비 오는 날의 인사

중략

"여기는 윤동주 선배님의 조용한 안식처입니다. 담배 꽁초를 버리지 맙시다."
오늘은 비가 지독하고
팻말은 풀숲 속에 쓰러진 채 비에 젖어 있었지만
후배들은 여기서 담배 따위는 피우고 있지 않아요
여기 올 때마다 조그마한 꽃다발이 놓여 있습니다.
"시인이 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했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
라고 일본의 한 뛰어난 여성 시인이 쓴 적이 있습니다.
당신에 대해서입니다.

중략 - P13

서울

사람이 어깨만이 돼서 거리에 넘친다.
버스 기사님이 어깨만이 돼서 우리를 싣고 달린다
연인들이 어깨만이 돼서 타박타박 걸어간다.

이 거리는 어깨만으로 남아 서 있다.

사람들이 어깨만이 돼서 부딪쳐 간다.
버스 기사님이 어깨만이 돼서 우리를 버리려 달려간다
연인들이 어깨만이 돼서 넘어져 간다

이 거리는 어깨만 남아 짖는다.
어깨 너머 잊힌 달이 헐떡거린다.

이 어깨에는 그림자가 없다. - P28

등심(燈心)

촛불에 있어서 등심이 그렇듯
소중한 것은 아주 가녀리다.
꼭 있어야만 할 것은 참 가녀리다.
그것 없이 아예 존재 못할 때

그리고 아예 존재함에는 형체가 없다.
촛불 하나가 방 안을 밝힐 때
빛에 형체가 없듯
어떤 모양이든 방 안을
구석구석까지 다 밝힐 때 - P53

눈보라

2
수업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겨울날 오후에는 옆자리애랑 내기하며 놀았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이다. 먼저 창문 밖에서 풀풀 나는 눈송이 속에서 각자가 눈송이를 하나씩 뽑는다. 건너편 교실 저 창문 언저리에서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간다. 먼저 눈송이가 땅에 착지해버린 쪽이 지는 것이다. "정했어." 내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나도"하고 그애도 말한다. 그 애가 뽑은 눈송이가 어느 것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제 것을 따라간다. 잠시 후 어느 쪽인가 말한다. "떨어졌어." "내가 이겼네." 또 하나가 말한다. 거짓말해도 절대로 들킬 수 없는데 서로 속일 생각 하나 없이 선생님 야단 맞을 때까지 열중했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아직도 눈보라 속 여전히 그 눈송이는 지상에 안 닿아 있다. - P65

손톱

달동네 한복판에
어깨처럼 완만한
언덕 중턱에
눈이 남아 있다.
집들이 철거된 그 자리에

거기에만 땅이
남았으니
눈이 녹지 않고 남아 있다.
몽땅 가져갔고,
땅만 남았으니

달동네 한복판에
도장으로 찍을 만한
조그마한 하얀 표가 있다.
"인정 안 해"라고
하얀 인주로 찍을
도장처럼 - P66

서울에서 내가 한 것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무언가를 보는 일, 그것뿐이었다. - P95

것이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할 만큼 많은 시가 "나왔"고, 또 그러기 위해서 어떤 힘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마 이런 일은 일생에한번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당시 한국의 공기 중에 뭔가 시를 유발하는 성분이 포함된 것 같았다. 사실 그후 2011년의 대지진 및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를 제외하고 나는 한번도 시를 쓰지 않았다. (이 책의 말미에 그것들도 수록했다.) - P95

내 한국어 실력은 높지 않았다. 만약 한국말이 유창했더라면 오히려 시를 안 썼을 것이다. 눈으로 본 것, 마음에 떠오른 것을 말하고 싶어도 제대로 못했던 답답함이 시를 쓰게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외국어로 시를 쓴다는 것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지만 시니까 가능했던 것이다. 논문이나 신문기사를 써보라 하면 할 수 없었을 테니까.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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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맛이 살아있는 백석 시.
어릴 적 명절 전날의 시골집 풍경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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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05 0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겨울이면 떠오르는 시! 백석의 <국수>
백석의 시는 머릿속으로 풍경이 그려지고 소리가 들리죠 !!^^

햇살과함께 2021-12-05 12:27   좋아요 1 | URL
백석 시인의 시 읽으면 입에 침이 고여요~ 김치말이국수 먹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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