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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수수께끼

 

 

  2층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있던 나연은 물을 마시려고 거실로 내려왔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나연은 인터폰이 있는 곳으로 가서 누가 왔는지 확인했다.

“오빠 왔어요.”

유진이 온 것을 확인한 나연은 버튼을 눌러 대문을 열어 준 후 2층에 있는 희연이의 방으로 올라갔다.

희연은 자기 방에서 빠른 손놀림으로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마치 물고기가 물 밖으로 튀어 오르는 모습을 연상시키듯 빠르고 경쾌하고 시원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아름다운 선율이 집안에 울려 퍼졌고 희연은 점점 더 연주에 몰입해 가고 있었다. 이젠 손놀림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점점 더 빨라져 가고 있었다.

“언니.”

나연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순간 희연은 연주를 멈추며 말했다.

“피아노 칠 때는 방해하지 말랬잖아.”

“누가 왔는지 알면 생각이 바뀔 걸.”

“유진이 왔어?”

희연은 뒤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하여튼 언닌 못 말린다니까.”

나연이는 말을 마치고 나서 방을 나와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희연도 피아노 뚜껑을 닫고 거실로 내려 왔다. 유진이 와 있었다.

“왜 연주를 멈춘 거야? 훌륭하던데.”

유진이가 물었다.

“형편없는 연주인 걸, 뭐.”

“형편없긴? 아주 훌륭하던데. 근데 무슨 곡이야?”

“쇼팽의 즉흥환상곡이야.”

“뭐 마실래?”

“응, 커피.”

“언니, 나도.”

“넌 언니 부려먹을 줄 밖에 모르지.”

희연이 조금 못 마땅한 듯이 말하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 희연은 커피를 타 가지고 나와서는 유진과 나연이한테 주었다.

“커피 맛이 일품인데. 넌 정말 커피를 잘 탄다니까.”

희연은 유진이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무슨 일이야?”

“일은 무슨? 내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오나?”

“하긴. 저녁은 먹고 왔어?”

“아니. 아직.”

“뭐 하느라 여태껏 저녁도 안 먹었어? 밥은 아직 안했는데 내가 라면이라도 끓여 줄까?”

“됐어. 사실은 너랑 같이 어머니한테 갈려고 온 거야. 어머니가 널 보고 싶어하거든.”

“어머님이 나를?”

희연은 조금 놀란 듯 눈이 크게 떠졌다.

“그래, 우리 거기 가서 저녁 먹자. 사실 그럴려고 여지껏 저녁도 안 먹은 거야.”

“그래? 그러고 보니 어머님을 안 찾아 뵌 지도 꽤 오래 된 것 같네. 조금만 기다려. 나 금방 옷 갈아 입고 나올게.”

희연이는 기분 좋게 말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 옷도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가자.”

“그렇게 보여?”

“응.”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연이는 유진이의 말대로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가기로 했다.

“나연이 너도 갈래?”

유진이 물었다.

“됐어요. 전 공부해야 돼요.”

유진과 희연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우리 차 타고 갈까?”

희연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진이에게 물어보았다.

“차는 니 아버지가 가지고 나갔을 거 아냐?”

“내 차 있어.”

희연은 차고 문을 열었다. 차고 안에는 번쩍 번쩍 빛나는 검은색 그랜저가 놓여 있었다.

“이게 니 차야?”

유진은 매우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진이 놀란 이유는 번쩍번쩍 빛나는 새 차 때문이 아니라 딸에게 이런 고급 승용차를 사 주는 아버지와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희연이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응, 면허증 따니가 아버지께서 한 대 사 주셨어. 근데 왜 그렇게 놀라?”

희연은 의아한 눈으로 유진이를 보았다.

“아냐. 아무것도. 단지 학생한테는 좀 과분한 거 같아서.”

“니 말이 맞아. 그냥 지하철 타고 가자.”

희연은 여태까지의 자신의 태도를 180°도 바꾸며 차고 문을 닫았다. 유진은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희연이를 이해할 수가 없어 잠시 멍한 눈으로 희연이를 보았다. 소꿉친구로 같이 자라온 아이였는데 가끔 이런 경우가 있었다. 유진이는 그 때마다 희연이를 알다가도 모를 아이라고 생각을 했을 뿐 희연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 지에 대해서는 깊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런 이상한 행동에 대해 유진은 희연이한테 묻지도 않았고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희연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어서였다.

 

 

  강 여사가 경영하는 정통 이탈리아 레스토랑인 빈 레스토랑은 잠실역 근처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린 유진과 희연은 조금 걸은 후 강 여사가 경영하는 빈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희연은 강 여사를 보자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희연이, 왔구나. 아직 저녁 안 먹었지? 저기 앉아서 뭐 좀 시켜 먹고 있어. 금방 갈 테니까.”

강 여사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예, 어머님.”

유진이와 희연은 가운데에 있는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종업원이 다가오더니 유진이와 희연이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뭐 먹을래?”

유진이가 물었다.

“너는?”

“난 안심 스테이크 먹을래.”

“난 해산물 스파게티 먹을게.”

“그거 갖고 돼?”

“응.”

웨이터가 오자 희연은 안심 스테이크와 해산물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두 사람이 주문한 요리가 나왔고 강 여사가 그들의 자리로 왔다.

“어머니, 이제 소원 푸셨어요? 희연이 좀 데려 오라고 그렇게 안달이더니 말이에요.”

“그래, 이 녀석아, 자주 좀 데려오지 않고.”

“죄송해요. 어머님. 제가 자주 찾아 뵈야 하는 건데.”

“아니다. 니가 죄송하다니?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하냐? 다 이 녀석이 못나서 그렇지.”

“어머니는 또 저만 구박이에요.”

유진이는 웃음기가 가득 담긴 얼굴로 말했다.

“어머님, 근데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뭐예요?”

“응. 너한테 좀 부탁이 있어서......”

“부탁이요? 무슨?”

“이 곳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던 아가씨가 며칠 전에 그만 뒀거든. 그래서 니가 좀 연주를 해 줬으면 해서.”

“제가요? 하지만 저 이 곳에서 피아노 연주를 할 만큼 뛰어난 실력이 아니에요.”

“무슨 소리니? 넌 초등학생이었을 때부터 피아노 콩쿨대회의 상은 다 휩쓸었잖니? 대학에서도 특기생으로 널 데려가려 했었고. 그 실력이 어디 갔을라고?”

“그래 한 번 연주해 봐. 나도 네 연주 듣고 싶어. 아까 연주한 것도 훌륭하던데.”

유진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청했다.

“그럼 한 번 해 볼게.”

희연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위 흰색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는 곳으로 가서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 후 두 손을 건반위에 올려 놓았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두 손이 건반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환상적인 음율이 실내를 한 순간에 사로잡았다.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도 모르게 피아노 연주자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연주가 끝나자 실내에 있는 사람들이 환호하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희연은 답례의 인사를 정중하게 하고 강 여사와 유진이가 앉아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마에는 아직도 땀이 배어 있었다. 희연은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훔쳤다.

“거 봐라. 다들 좋아하잖니? 이렇게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난 니가 여기서 연주를 해 줬으면 좋겠는데. 네가 내키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만.”

“그렇게 할게요. 어머님.”

“고맙다.”

“고맙긴요? 이런데서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게 되다니 오히려 제가 영광인걸요.”

“그럼 마저 얘기들 나누거라. 난 또 할 일이 있어서.”

강 여사는 자리를 피해주었다.

“넌 정말 음악에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거 같아. 근데 난 암만 생각해도 도무지 널 이해를 못 하겠어.”

“응?”

희연은 유진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왜 음대에 가지를 않은 거야? 넌 어려서부터 피아니스트 되고 싶어했잖아?”

“난 또 무슨 말인가 했네. 또 그 소리야? 저번에도 말했잖아. 난 피아니스트가 될 재목이 못 된다고.”

희연이는 입가에 밝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넌 충분한 재능도 있고 노력도 남달리 하잖아.”

“그래도 난 발전할 가능성이 없어. 지금 수준에 머무르는 게 전부지.”

“누가 그런 소리를 하디?”

“누가 한 소리가 아니라 그냥 내 판단이야. 그리고 난 지금 내가 택한 학과에 만족해. 경영학도 나름대로 재미있거든.”

자신이 택한 학과에 만족한다는 데는 유진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희연이가 피아노를 포기했다고는 하나 희연은 피아노 연주회가 있는 날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피아노 연주회를 보러 갔다. 그처럼 피아노에 열정을 가진 아이가, 더군다나 어렸을 때부터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꿈꿔 왔던 아이가 입시를 한 달 남기고 갑작스럽게 진로를 바꾸었던 것이다.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유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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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리의 아픔

 

  울퉁불퉁한 비포장된 길을 달리던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마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그 곳에서 내린 사람은 마리 한 사람뿐이었다. 버스가 다시 흙먼지를 일으키며 떠나자 마리는 바다의 집으로 가는 길인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경사가 그리 가파른 언덕은 아니었지만 초여름 같은 더위에 마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리는 아버지와 친 동생 같은 보육원 아이들을 곧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마리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바다의 집 보육원에는 지금 12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 동안 마리의 아버지인 윤 원장이 운영하는 보육원을 졸업해 나간 아이들도 다수 있었으며 그 중에 한 명은 민이의 아버지인 강 사장이 운영하는 조그만 카센터에서 일하는 성필용이었다.

 

 

  원장실에서 녹차를 마시던 윤 원장은 창문을 통해 마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윤 원장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윤 원장은 마리가 자신의 뒤를 이어 이 곳을 이어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윤 원장은 마리한테 그런 고생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윤 원장은 마리가 무용가인 어머니의 뒤를 잇기를 바랬다. 그래서 여진과 이혼할 때도 마리를 여진한테 보낸 것이었다. 마리는 무용가인 어머니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 받아 춤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유명한 무용가인 어머니를 두고 있었고 천부적인 그 재능으로 자연히 사람들한테 알려져 고등학생일 때는 CF를 찍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는 어머니와는 다르게 유명세를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무용학과에 가긴 했지만 마리가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는 곳은 윤 원장이 운영하는 보육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윤 원장은 마리한테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힘든 일을 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의사는 윤 원장한테 길어야 1년이라고 말했다. 윤 원장은 폐암 말기였다. 1년 후 자신이 떠나게 된다면...... 그 땐 이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이젠 마리한테 이 아이들을 부탁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윤 원장은 마음이 복잡했다.

마리가 노크를 하고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버지, 저 왔어요.”

“왜 또 왔니? 오지 말라고 했잖니? 이러면 니 어머니가 싫어한다고. 넌 니 어머니 곁에 있어야 돼.”

“어머니가 싫어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어머니는 명성밖에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니 어머니를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윤 원장이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진 용서하셨는지 몰라도 전 아직도 그 날을 잊을 수 없어요. 전 그럼 나가서 일 할게요.”

마리는 원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마리는 아버지를 존경하는 만큼 어머니를 미워했다. 어머니가 가족도 내팽개친 채 명성에만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마리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의 일도 그랬다. 어머니는 그 때 무용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 인기 때문에 공연도 거의 매일 잡혀 있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계속 피를 토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던 마리는 어머니 공연이 예정되어 있는 극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마리가 극장 관계자한테 들은 말은 공연이 끝나는 대로 전화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이었다. 그 날 마리는 어머니한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어떻게 명성을 위해서 가족을 버릴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장실을 나온 마리는 아이들 점심 준비를 하기 위해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걸어가다가 식당 옆 프로그램실에서 소녀의 기도라는 피아노곡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프로그램실은 토요일까지는 만들기, 글쓰기, 그림 그리기 등 수업이 있었지만 일요일은 수업이 없었다. 그 곳을 일요일 날 쓰는 사람은 피아니스트가 꿈인 수아 밖에 없다는 것을 마리는 잘 알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리의 예상대로 수아가 의자에 앉아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수아는 누가 온 것 같아 피아노 연주를 멈추고는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문 앞에 사람의 형체가 있는 것만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누구에요?”

“나야, 마리 언니.”

마리는 대답을 하고는 피아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는 수아한테로 걸어갔다.

“언니 왔어요?”

수아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전에 연주한 곡이 소녀의 기도지? 정말 훌륭하던데.”

“너무 띄우지 마세요. 피아니스트 되려면 아직도 실력이 한참 모자라니까.”

“난 띄우는 거 아니야. 수아, 넌 틀림없이 피아니스트 될 수 있을 거라고. 그건 그렇고 눈은 좀 어때?”

“점점 더 안 보여요. 의사 선생님이 이런 진행속도라면 내년쯤이면 완전히 시력을 잃을 거래요.”

수아가 담담하게 말하는 바람에 마리는 오히려 더 가슴이 아팠다.

수아는 어렸을 때부터 아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진중했다. 그런 수아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더니 이상해졌다.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는 아이인데 식사를 할 때마다 음식을 흘리기 시작했고 어딘가에 자꾸 부딪혔다. 마리는 수아가 이상해서 수아한테 어디 아프지 않냐고 물었지만 수아는 괜찮다고만 했다. 하지만 수아의 증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걱정이 된 마리는 수아를 데리고 춘천 시내로 나와 안과로 갔다. 시내에 있는 조그만한 병원이었는데 의사는 망막색소변성증이 의심된다며 큰 병원으로 가서 자세히 검사를 받아 보라고 했다.

“큰 병원으로 가라뇨? 위험한 병인가요?”

그 때까지 별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마리가 놀라서 물었다.

“망막색소변성증은 서서히 시력을 잃어서 실명에 이르게 되는 병입니다. 현재로서는 원인을 알지 못하기에 치료법도 없는 병입니다.”

“예?”

마리는 너무나 놀란 상태로 수아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

“언니, 나 무서워. 나 방금 전에 의사 선생님이 말한 그 병에 걸린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니가 앞을 못 보게 된다니 그게 말이 되니?”

마리는 그럴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운명은 잔혹했다. 큰 병원에서의 검사결과 수아는 망막색소변성증에 걸린 것으로 진단되었다. 의사는 약으로 진행속도를 조금 늦출 수 있을 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혼이 나간 상태로 마리 언니와 같이 병원을 나온 수아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언니 나 어떡해? 이제 어떡하냐고?”

그 날 이후 수아의 중학교 생활은 최악이었다. 심지어 몇 번이나 죽으려고도 했었다. 그렇게 절망 속에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을 거 같이 살던 수아는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마리 언니와 같이 천재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이주희 피아노 독주회를 보러 가게 되었다. 그 날의 공연은 수아한테 다시 살 희망을 주었다. 수아는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환상적인 선율에 사로잡혔고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 후로 수아는 피나는 연습을 했고 원래부터 음감이 뛰어난 아이여서 수아의 피아노 실력은 급성장했다.

“난 그만 나가볼게. 점심 준비해야 해서.”

마리는 음악실을 나왔다.

 

  여진은 집에 돌아와 있었다. 10시가 넘었는데도 마리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딸이 어디를 갔는지 여진은 짐작이 갔다. 그렇게 그 아이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귀가 따갑도록 얘기했는데도 딸은 자신의 말을 조금도 듣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이혼한 남편인 상훈때문이었다. 여진은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무용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여진은 상훈의 재능을 사랑하여 그와 결혼했다. 여진이 상훈과 결혼 할 때 상훈은 무명 화가였다. 하지만 여진은 상훈의 재능을 알아차렸다. 그의 재능이라면 틀림없이 국선에 입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선에 입선할 생각으로 그림에 열정을 쏟아 붓던 상훈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림을 포기하고 춘천 외곽지역에서 보육원을 하기 시작했다. 여진은 배신 당했다고 느꼈다. 상훈의 마음을 돌리려고 갖은 설득을 다 했으나 한 번 마음을 정한 상훈은 결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결국 그 일로 부부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여진은 이혼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아이가 생겨 이혼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마리는 그렇게 금이 가 있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리의 출생으로 상훈과 여진은 부부라는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위태위태하게 유지되던 관계는 마리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의 일로 깨져버렸다. 그 날, 여진은 공연이 있어서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극장 관계자가 딸이 전화를 했다고 했다. 하지만 공연을 앞두고 있던 여진은 공연에 집중해야 겠다는 생각에, 또 별 일 아닐 거라는 생각에 끝나고 전화를 한다고 딸한테 얘기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진은 공연히 끝난 후 집에 전화를 했다. 하지만 신호만 계속 갈 뿐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순간 여진은 무언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집에 돌아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었다. 남편하고 딸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찾아 나서려고 했지만 어디서부터 찾아야 될 지도 막막해서 집에서 가만히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1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마리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여진은 급히 물었다.

“아버지가 걱정되긴 하시는 건가요? 하마터면 아버지가 돌아가실 뻔했다고요? 그렇게나 명성이 중요하세요?”

여진은 화가 잔뜩 나 있는 딸의 말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여진은 더욱 더 공연에 매달리며 명성을 쌓아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그것 밖에 남은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1년 후 여진과 상훈은 마리는 여진이 키우기로 하고 합의 이혼했다.

마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또 니 아버지 있는 곳에 갔다 오는 거야?”

여진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런 곳엔 더 이상 가지 말라고 했잖아? 도대체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어? 대체 그 병신이나 거지 같은 녀석들이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거야?”

“그 애들은 병신이나 거지가 아니라 제 동생이에요.”

“동생?”

여진은 코웃음을 쳤다.

“너랑 피 한방울 썩이지 않은 애들인데 뭐가 동생이라는 거야? 정 그렇게 내 말을 듣지 않겠다면 이 집에서 나가 버려!”

마리는 아무 말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옷가지를 대충 가방에 넣어가지고는 문을 열고 나왔다. 딸의 행동에 여진은 기가 막혔다.

“뭐 하는 거야?”

“나가라면서요. 그래서 나가는 거에요.”

마리는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여진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그대로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딸을 잡으려고 쫓아가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다 전남편인 상훈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집을 나온 마리는 잠실역에 있는 공중전화로 희연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방에서 경영학 공부를 하고 있던 희연은 핸드폰이 울리자 책상 위에 놓아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마리.”

“이 시간에 웬 일이야?”

“나 너희 집에서 자면 안 돼?”

“응?”

“가출했어. 어머니랑 싸웠거든.”

희연은 기가 막혔다.

“지금 어디야?”

“잠실역.”

“기다리고 있어. 지금 바로 갈 테니까.”

희연은 통화를 마친 후 옷을 갈아입고는 거실로 내려왔다. 거실에선 아버지, 어머니, 동생이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어디 가니?”

채 여사가 물었다.

“친구가 잠깐 보자고 해서요. 금방 들어올게요.”

집을 나온 희연은 운전면허를 따자 아버지가 사 준 그랜저를 차고에서 꺼내 타 가지고는 잠실역으로 갔다.

 

 

  희연은 잠실역에 도착했다. 잠실역 5번 출구에 가방을 들고 있는 마리가 보였다. 희연은 차를 몰고 그 곳으로 갔다. 마리는 번쩍번쩍 빛나는 검은색 그랜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희연이 조수석쪽의 창문을 내리고는 말했다.

“타.”

마리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장관 딸은 역시 다르군. 학생이 그랜저라니? 난 꿈도 못 꿀 일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가출이라니? 어디 가서 얘기나 좀 하자.”

희연이 다시 악셀레이터를 밟으며 출발했다.

 

 

  희연은 가까운 곳에 있는 삼원빌딩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그 건물 1층에는 커피숍이 있었다. 희연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마리와 함께 1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라 커피숍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두 사람은 중앙에 놓인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나, 너희 집에서 며칠만 지내게 해 줘. 어머니랑 싸우고 집을 나왔는데 막상 나오고 보니 갈 데가 없더라고.”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희연이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우리 부모님은 가출한 여자 받아주지 않을 거야.”

“가출이 아니라 출가인 거야. 가출은 미성년자나 하는 거고 난 성인이라고.”

희연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빤히 마리를 보았다. 마리가 계속 말을 이었다.

“시골에서 친구가 올라왔는데 아직 집을 못 구했으니까 며칠만 지내는 걸로 하면 될 거야.”

“잠실이 시골이냐?”

“우리 아버지는 춘천 시골에 살고 있으니까 내 말이 완전 거짓말은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거다.”

“난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

“넌 천주교 신자니까 나처럼 어려운 사람 도와줘야 하는 거야. 그래야 이 다음에 니가 바라는 대로 천국 갈 수 있다고.”

“점점 하는 말하고는...... 커피 다 마시면 일어나자.”

“역시 니가 내 부탁 들어줄 줄 알았어. 넌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애니까.”

커피를 다 마신 후 희연과 마리는 커피숍을 나왔다.

 

 

  희연은 마리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한 장관과 채 여사는 희연이 같이 데리고 온 젊은 아가씨를 보고 놀랐다.

“누구니?”

채 여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학교 무용학과 다니는 제 친구인데 춘천에서 지금 올라왔어요. 집 구할 때까지만 잠깐 제 방에서 같이 지내게 했으면 하는데 그래도 되죠?”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얘기하지 왜 지금에 와서 얘기를 하니? 우리가 그런 부탁도 안 들어줄 거 같니?”

한 장관이 나무라듯 말했다.

“죄송해요.”

“근데 학생은 그럼 그 동안 춘천에서 학교 다닌거야?”

채 여사가 물었다.

“예......뭐.”

“힘들었겠네.”

2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던 나연은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문을 열고 나왔다.

“누가 왔어요?”

나연은 계단으로 내려 오려다 발을 잘못 디뎌서 굴러 떨어졌다.

“다치지 않았니?”

채 여사가 걱정이 되는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저 몸 하나는 튼튼하니까.”

나연이 일어났다.

“어쩜 저렇게 덤벙대는지......내 동생이야.”

“안녕. 윤마리라고 해.”

“안녕하세요. 한나연이에요. 근데 언니 정말 이쁘네요. 저 보다 이쁜 사람은 처음 봐요.”

“너 보다 이쁜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어.”

“그래도 언니보단 내가 이쁘다고. 유진 오빠도 언니보다 내가 이쁘다고 했어.”

“넌 정말 언제 철들래? 저흰 그만 올라갈게요.”

희연은 부모님한테 인사를 하고는 마리를 데리고 2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희연이의 방은 넓고 깨끗했으며 오른쪽 벽쪽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으며 그 옆에 놓인 책장에는 어렸을 때부터 희연이 피아노 콩쿨대회에 나가 탄 상장들이 이쁘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마리가 말했다.

“뭐가?”

“왜 음대에 안 간 거야? 난 너 음대 갈 줄 알았어. 그 재능을 썩히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재능은? 별로 잘 치지도 못 하는데.”

“정말로 하는 소리야? 아니면 예의상 하는 소리야?”

“응?”

“어느 쪽이야?”

“그만 자자. 벌써 12시가 넘었다고.”

희연은 대답을 피하며 옷장에서 자기가 입을 잠옷과 여분의 잠옷을 꺼내서 한 벌은 마리에게 건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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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짝사랑

 

  나연은 시계를 보더니 책가방을 챙기고는 도서관을 나왔다. 맑고 따뜻한 토요일의 오후였다. 투명한 햇살이 나연이의 얼굴로 쏟아져 내려 쓰고 있는 금테안경이 햇빛에 반짝였다. 나연은 따가운 햇빛을 가리기 위해 책가방에서 OB라고 쓰여 있는 야구모자를 꺼내 썼다. 파마를 약하게 해서 웨이브진 나연이의 머리가 모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벚꽃, 교정 안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꽃잎들은 간간히 미풍에 날려 한껏 운치를 더해주며 떨어졌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누군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더없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연은 혼자서 교정의 호숫가를 걸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나연은 이런 날 야구장에 갈까 하고 생각했으나 어쩐지 혼자 가는 것은 내키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가 그 골치 아픈 의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나연은 집에 가서 낮잠이나 자야 겠다고 생각하며 교문 쪽으로 걸어갔다.

교정을 나서려는 순간 나연은 앞에 재수 오빠가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연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연은 재수오빠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그만 재수한테 거의 다 와 가지고서는 넘어졌다.

“오빠, 안녕하세요.”

나연은 일어나면서 청바지를 털었다.

“안녕. 덤벙이.”

“오빤 덤벙이가 뭐에요?”

“그러게 좀 조심하고 다녀라. 넌 어째 허곤날 넘어지고 그러냐? 그러니까 준석이가 너한테 2% 부족하다는 소리나 해대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내가 어디가 2% 부족하다는 거에요?”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준석이가 한 말이라니까.”

“하여튼 그 바람둥이 오빠는...... 뭐, 바람둥이니까 마음 넓은 내가 이해해야지.”

“토요일인데 학교엔 웬 일이야?”

“도서관에서 공부 좀 하려고 했는데 날이 좋아서 그런지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공부가 안 되네요. 그래서 그냥 나왔어요. 근데 오빠 어디 갈 데 있어요?”

“아니. 그건 왜 물어?”

“그럼 저하고 야구나 보러 가지 않을래요?”

“야구?”

재수가 되물었다.

“왜요? 오빠는 야구 싫어해요?”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럼 저하고 야구나 보러 가요. 괜찮죠?”

“그러지. 뭐. 나도 마땅히 할 일도 없는데.”

재수는 순순히 나연이의 청에 응했다.

나연은 속으로 ‘야호’라고 외쳤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 때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상황은 180도로 바뀌고 말았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애인처럼 정답게 주고 받아?”

민이가 재수의 어깨를 탁 쳤다.

“말 조심해라. 난 몰라도 나연이가 어떻게 생각하겠냐?”

“그런가? 기분 상했다면 사과할게. 너도 나 잘 알잖아? 워낙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타입이라는거.”

민이는 이번에는 순순히 재수의 말을 수긍했다.

“괜찮아요.”

나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지만 속이 좀 씁쓸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필 이럴 때 민이 언니가 나타날 게 뭐람?’ 민이 언니는 재수오빠와 같이 있을 때는 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근데 둘이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민이가 다시 물었다.

“나연이가 야구 보러 가자는데 너도 같이 갈래?”

“그거 좋지. 그러고 보니 오늘 OB 와 LG경기가 있는 것 같던데.”

나연은 민이 언니하고는 같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암만해도 토요일 오후, 최고의 황금시간이 최악의 시나리오로 써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연이 넌 OB팬인가 보지? OB모자를 쓰고 있는 걸 보니까.”

민이가 물었다.

“네. 언니는요?”

“난 LG팬인데. 그럼 우린 라이벌인가?”

민이는 큰 소리로 웃었다.

‘라이벌이라도 됐으면 좋겠네요. 재수 오빠한테는 언니만 있으니 어디 제가 끼어들 공간이 있어야죠?’

나연은 속으로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세 학생은 잠실 야구장을 찾았다. 서울의 라이벌 전이라 그런지 관중석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응원전도 여느 때보다 열띤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오후 2시에 시작한 시합은 그야말로 명승부였다. 역전에 재역전을 거듭한 끝에 9회말 2사 만루의 상황에서 LG 3번 타자의 끝내기 안타로 경기가 끝나고 말았다.

‘야구도 언니한테 졌네요.’

나연은 엉뚱한 생각을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세 학생은 야구장을 나왔다.

햇빛은 많이 수그러져 있었고 거리엔 제법 찬바람이 불었다.

“우리 술이나 마시러 가는 게 어때?”

민이가 말을 꺼냈다.

“넌 무슨 여자애가 또 술타령이냐?”

“넌 마시기 싫으면 그만 둬라. 나연이 하고 마시면 되니까.”

 

  세 사람은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 근데 돈은 있는 거냐?”

재수는 의심쩍어 하는 눈초리를 하며 물었다.

“아니. 하지만 그게 무슨 걱정이냐? 우리한텐 장관 딸이 있는데.”

“언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나연은 나즈막히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분명히 거부감이 담겨 있었다.

민이는 나연이의 딱 부러진 말에 조금 놀랐다.

“미안.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됐어요. 그만 술이나 시키죠.”

술과 안주가 곧 나왔고 또 다시 술자리에서의 재수와 민이의 말싸움이 이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나연이가 끼어들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 사람이 있는데도 나연은 혼자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로웠다.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나연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세 학생은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나왔다. 거리는 이미 어두워진지 오래였다. 재수는 먼저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민이는 나연이를 부축한 채 걷고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나연은 걸음을 제대로 못 걷고 있었다. 둘은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왔다.

“집에 갈 수 있겠어?”

민이가 물었다.

“걱정 말아요. 갈 수 있으니까.”

나연이는 지갑에서 패스를 꺼냈다.

패스를 개찰구에 넣고 안으로 들어간 후 나연은 민이를 돌아보았다.

“언닌 참 좋겠어요.”

나연은 말을 마치고 나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민이는 나연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어 잠시 멍한 표정을 하며 서 있었다.

나연은 지하철이 들어오자 지하철에 올라탄 후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오늘도 재수 오빠는 민이 언니하고만 있었다. 그 자리에 자신은 없었던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모르게 가슴 한 켠이 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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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학대받는 소녀, 소희 

 

 

  김 판사는 방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소희는 알몸인 채로 방바닥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김 판사는 자주 술을 마시고 취해 들어왔고, 그럴 때마다 소희의 몸을 요구했다. 처음엔 소희는 반항했었다. 그러나 매번 김 판사의 승리로 끝났고 소희는 언제부턴가 반항할 힘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옷가지들이 방바닥에 널부러져 있었지만 소희는 주워 입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앉아서 흐느낄 뿐이었다. 그래도 한 때는 희망이 있었다. 친 어머니를 찾아가면 되리라는 희망. 그 희망으로 버텼었는데......

소희는 배다른 오빠에게 애원을 하고 또 애원을 해서 기어코 어린 자기만을 남겨두고 떠난 어머니를 찾아냈었다. 어머니는 대궐 같은 집에 살고 있었다. 대문을 열고 나오는 어머니에게 소희는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소희를 모른다고 하며 냉정하게 잡아뗐다.

그 날 소희는 실망과 분노의 감정에 휩싸여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가 증오스러웠고, 정말 죽고 싶은 생각밖에 달리 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자신의 방에 있는 창턱에 걸터앉았다. 2층에서 밑을 보니 그야말로 낭떠러지였다. 하지만 소희는 차마 뛰어내리지를 못했다. 자살이란 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독한 마음을 품기에는 소희는 너무 여린 아이였다. 하는 수 없이 소희는 다시 창턱에서 내려왔다. 그 후로 소희는 여전히 의붓아버지의 성폭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듯이 살아오고 있었다.

 

 

재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집 안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다행이네. 오늘은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으니.’

재수가 안도의 한숨을 쉬려고 하자 소희의 가느다란 흐느낌이 재수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래서 집에 오는 건 싫다고. 정말 싫단 말이야!’

재수는 마음속으로 세차게 소리치고 나서 소희의 방으로 걸어갔다.

재수는 소희의 방문을 열었다. 소희가 알몸인 채로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있었고, 옷가지들은 방안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오빠 왔어?”

소희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또, 또 그런 거야? 아버지 어딨어?”

재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번에는 정말 아버지에게 대들고 싶었다.

“오빠, 그러지마. 부탁이야.”

소희가 문을 나서려는 재수를 나즈막한 목소리로, 그러나 황급히 불러세웠다.

재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나 오빠 마음 잘 알아.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잖아. 그래봤자 오히려 오빠 입장만 난처해질 뿐이야.”

재수는 소희의 말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나선다고 달라질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사실이 더욱 더 재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만 옷 입어.”

재수가 마음을 돌리며 말했다.

“응. 오빠도 가서 자. 술 마신 거 같은데.”

재수는 문을 닫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집을 나가버린 새 어머니, 딸을 학대하는 아버지, 그리고 학대를 받는 이복 여동생, 재수는 이런 가족이 싫었다. 또한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은 더욱 싫었다. 재수는 술을 마시기를 참으로 잘했다고 생각했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을 것 같았다. 재수는 눈을 감았다. 술김이 올라와 어서 빨리 잠이 들고 싶을 뿐 가족에 대한 생각은 더는 정말 하고 싶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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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시작

 

 

  작가 마가렛 미첼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주인공, 스칼렛의 마지막 대사 ‘해는 내일도 떠오른다’ 는 그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 말처럼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떠올랐다. 어제도 떠올랐고, 틀림없이 내일도 떠오를 해, 언뜻 보기엔 빛도 같고 모습도 같기에 그 해가 그 해인 것 같지만 오늘의 해에는 분명 어제의 해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나는 그것이 새로움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해, 오늘의 해에는 이미 어제의 해한테서는 사라져버린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희망을 발판삼아 또 하루의 새로운 시작을 여는 것이고. 1993년은 우리나라에 그처럼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해였다. 1992년 12월18일에 있던 제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3당을 통합한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가 9백 97만 7천 3백 32표를 얻어 건국 이후 14번째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되었다. 2위를 한 김대중 후보가 얻은 표는 8백 4만 1천 2백 84표로 두 후보간의 표차는 1백 9십 3만 6천 48표였다. 김대중 후보는 선거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대권패배와 관련,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치일선에서 은퇴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민자당의 김영삼 14대 대통령 당선자는 나의 승리는 바로 위대한 우리 국민 모두의 승리라며 이제 우리는 명실상부한 문민정부를 창조해 냈다고 당선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후보는 청와대의 주인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이렇게 30년간을 지속해 오던 군사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고 국민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문민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력직에 오르자마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자신의 재산은 물론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명하였고, 공직자들의 비리가 샅샅이 밝혀지자 펜으로써 그들을 가차없이 잘랐다. 확실히 문은 무보다 강하다는 옛 명언을 증언이나 하듯 시대는 분명 변하고 있었다. 시대 변화의 주역은 물론 김영삼 대통령이었고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은 70 ~80%를 넘나들고 있었다.

한편 대학가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군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80년대를 그렇게 떠들썩하게 했던 전대협은 아이러니하게도 군사정권이 몰락해 자신들의 추구해 온 이상이 더 이상설득력이 없게 되자 한총련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탈바꿈하며 새롭게 문민정부의 학생운동을 주도해 나갈 것을 다짐한다.

또한 교육제도에 있어서도 학생들의 입시부담을 줄이기 위해 학력고사를 수능시험제로 바꾸며 미래의 교육을 이끌어 갈 새로운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1993년도의 시작은 문민정부라는 희망찬 출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3년이 그렇게 희망으로만 가득찼던 해만은 아니었다. 3월 28일 무궁화호 열차가 전복되어 사망 75명, 부상 105명이라는 희생자가 발생했고, 7월26일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사고로 60명의 사망자와 40명의 부상자가 속출했으며, 10월 10일 훼리호선 침몰사고로 300여명이 사망․실종됐다. 연이어 터지는 대참사로 국민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안전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였고 다음에는 지하철에서 사고가 일어날 것이라는 낭설이 사회에 퍼지는 가운데 문민정부 초기의 개혁바람은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또한 미국의 농산물 수입개방 압력이 계속되면서 문민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되어 갔다. 그러는 가운데 93년은 마무리 지어졌다. 그리고 93년과는 또 다른 94년의 해가 떠올랐다. 1년 전의 놀라운 국민들의 지지율에 비해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채 30 %도 안 되는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졌고, 미국이 농산물 수입개방 압력을 더욱 강화하자 정부는 끝내 농산물 수입을 개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이 결정에 국민들은 분노하게 되고 재야 단체, 농민, 각종 사회단체, 한총련 대학생들이 4월 9일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 11개 도시에서 농산물 수입개방을 반대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갖기로 결정하는데......

 

  집회가 있기 하루 전날 밤이었다. 강의가 끝난 저녁, 거리는 서서히 잉크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맘때면 늘 그렇지만 학교 주변의 술집들은 학생들로 붐비기 마련이다. 목마르지라는 호프집도 마찬가지였다. 감미로운 노란 불빛이 실내를 감싸고 돌았고, 히트곡인 김건모의 핑계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술집을 꽉 채운 학생들은 저마다 서로간의 얘기를 주고 받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호프집 중앙을 가로질러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른쪽 벽쪽으로 예닐곱명이 앉을 수 있도록 마련된 자리가 있었는데, 그 곳에 세 남학생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들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핏처 하나와 값싼 감자튀김 안주 한 접시와 서비스로 주는 팝콘만이 초라하게 놓여 있었다.

“자 우리 한 잔 해야지.”

준석이 잔을 들었다.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의 외모도 체격에 걸맞게 흠잡을 데 없는 이상적인 얼굴이었다. 이마는 조금 넓었는데, 그 이마까지 검은 머리가 쓸려 내려와 있었고, 크고 강렬한 빛을 발하는 눈은 사람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인상을 풍겼다.

“좋지.”

허공에서 ‘쨍’하는 소리를 내며 세 개의 잔이 부딪혔다.

“그나저나, 1년이 지나도록 이게 뭐냐? 멋진 애인 한명 구하지 못하고.”

준석이 잔을 내려놓으며 내뱉었다.

“넌 또 애인타령이냐? 그렇게 많은 여자들을 사귀면서.”

마주보고 있는 재수가 한심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재수는 준석보다 조금 키가 작고 마른 체격이며 반곱슬이었다. 알이 네모진 안경을 쓰고 있었고, 입가에는 늘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는데 때때로 그 웃음기는 알 수 없는 서글픔을 느끼게 했다.

“그 애들은 그냥 친구일 뿐이야.”

준석이 관심 없다는 듯이 말하고 나니 삐삐가 울렸다. 준석은 바지 주머니에서 삐삐를 꺼내 번호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누구야?”

재수가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잠깐 전화 좀 걸러 갔다올게.”

준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후 준석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누구한테서 온 전화야?”

재수가 좀 전처럼 다시 캐물었다.

“아는 여자 애야.”

준석은 자리에 앉았다.

“또 여자 애냐? 넌 어떻게 여자 애한테서만 연락이 오냐?”

재수는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그거야 내가 워낙 잘 생겼으니까 그렇지.”

준석이 제법 우쭐대며 말했다.

“뭐야?”

재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준석을 바라보았다.

“그럼, 뭐 하냐? 마음에 드는 애는 하나도 없는데.”

준석은 싱겁게 말하고 나서는 맥주잔에 가득 찬 술을 반쯤 마셨다.

재수는 더 어이없는 얼굴을 하며 옆에 앉아 있는 유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유진아, 쟤, 저런 왕자병은 어떡해야 하냐?”

유진은 재수의 질문에 가볍게 미소를 보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진은 피부가 하얗고 고왔으며 양쪽 볼에는 불그스름한 빛이 돌아 유순해 보였다.

“근데 말야, 우리 동아리 방에 매일 장미꽃 갖다 놓는 사람은 누굴까? 내 생각엔 분명 여자일 것 같은데.”

준석은 제법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넌 또 그 얘기냐? 그리고 그 사람이 여잔지 남잔지 니가 어떻게 아냐? 우리 동아리에 남자만 있냐?”

재수가 여전히 한심하다는 듯이 내뱉았다.

“그거야 분명 내 얼굴에 반했을 테니까 그렇지.”

“뭐야? 야, 그런 씨도 안 먹히는 소리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

“좋지.”

세 학생은 다시 잔을 부딪혔다.

“그나저나, 얘네들은 왜 아직까지 안 오지?”

유진이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깡패가 언제 시간 제대로 지키는 거 봤냐?”

재수는 불만이 가득찬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야, 민이 걔 차라리 안 오는 게 낫지 않겠냐? 오면 또 둘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준석이가 끼어들었다.

“그야 그렇지만 이런 자리에 빠질 아이는 아니잖아?”

유진이가 말을 받았다.

“하긴 그래. 이런 자리에 안 오면 강 민이 아니지.”

준석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거리가 거의 잉크빛으로 물들고 나더니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민이는 도서관 앞 가로등이 켜진 곳에서 희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짧게 깍은 머리가 제 멋대로 삐쳐 나와 있었는데 그 헤어스타일은 미소년 같은 민이의 동안인 얼굴과 잘 어울렸다. 몇 시쯤 됐을까, 시계를 보는 사이 도서관에서 희연이가 나와 낮은 계단을 걸어내려 오고 있었다. 희연은 단발머리에 간편한 캐쥬얼 차림을 하고 있었다. 희연은 왜소한 체격이었고, 얼굴은 조금 창백했으며, 목에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금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나약하고 착하게만 보이는 희연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왠지 모르게 날카로운 차가움이 느껴졌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희연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냐. 나도 지금 왔어. 가자. 애들이 기다릴텐데.”

민이와 희연이는 발걸음을 옮겼다.

“근데 넌 무슨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냐? 물론 곧 있으면 중간고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하는 거 아냐?”

“그래도 별 수 없어. 이렇게라도 해야 따라갈 수 있으니까. 경영학 정말 어렵거든.”

“어려우면 포기하면 되는 거 아냐? 중간고사 시험 한 번 정도 망친다고 인생 끝나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맨날 학사 경고야?”

“야!”

“에취.”

“감기 걸렸어?”

“응. 잠깐 약국에 좀 들렀다 가자.”

“그래.”

교문을 나선 두 여학생은 학교 앞 근처에 있는 약국에 들렀다. 희연은 조제한 약을 받아 가지고 민이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두 학생은 다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목마르지 호프집으로 걸어갔다.

 

  희연과 민이가 호프집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왜 이제야 와?”

유진은 희연이를 보며 물었다.

“약국에 좀 들렀다 오는 길이야.”

희연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국? 약국엔 왜?”

유진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감기 때문에.”

“또야?”

“환절기 때만 되면 늘 이러는 거 알면서 뭘 그렇게 놀라?”

“괜찮아?”

“응, 별 거 아니야. 근데 아직 안주 안 시킨 거야?

희연은 핏처 한 병과 감자튀김 안주 한 접시뿐인 초라한 테이블을 보고 말했다.

“우리가 무슨 돈이 있어야 말이지.”

준석이가 대답했다.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껏 시켜.”

“역시 희연이가 있어야 한다니까.”

재수가 기쁨에 소리를 질렀다.

“야, 소주도 한 두어 병 시켜라.”

민이가 끼어들며 말했다.

“넌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 소주만 마시려 드냐? 그렇게 쳐 마셔대니까 얼굴이 그 꼴이지.”

재수는 민이를 비꼬아 댔다.

“야, 넌 뭐 잘난 줄 알아? 꼭 머저리 사촌 같이 생겼으면서.”

민이도 지지 않고 대꾸를 했다.

“뭐, 머저리 사촌? 야 너 말이면 함부로 다 해도 되는 줄 알아? 그러다가 나한테 된통 당하는 수가 있어.”

“어이구, 누가 할 소리를.”

민이가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휴, 또 시작이야. 도대체 너희들은 어째 만나기만 하면 그러냐?”

준석이 짜증을 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야, 너 같으면 이런 말 듣고도 열 안 받겠냐?”

재수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민이도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며 맞받아 치고 있었다.

“내가 말을 말았어야지.”

준석은 한심하다는 듯이 내뱉고는 앞에 놓인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재수와 민이의 말싸움은 끊일 줄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다. 희연이는 재수와 민이의 말싸움을 재미있게 지켜 보다가 말을 꺼냈다.

“기장, 이제 다 모였는데, 싸움은 잠시 접어두고 술 한 잔 하는 게 어때?”

“그렇지. 한 잔 해야지.”

민이가 말했다.

“당분간은 좀 조용할 거 같네. 아주 속이 다 후련하다.”

준석이가 무거운 짐을 벗어내린 듯 시원하다는 투로 말했다.

“한울림의 앞날을 위하여.”

민이가 잔을 들었다.

“위하여.”

다섯 개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학생들은 각자 술을 적당히 마시고 나서 잔을 내려놓았다. 재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경고하겠는데 내 앞에서 담배는 피지 마. 난 담배는 질색이니까.”

민이가 엄중한 경고를 내렸다.

“내 담배 갖고 내가 피는 데 웬 참견이야?”

재수는 무시하고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려 했다. 그러자 민이가 재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재수의 입에서 약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 니가 깡패야? 왜 남의 다리는 걷어차?”

재수가 성난 얼굴을 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게 내가 경고했잖아? 내 앞에서 담배 피지 말라고.”

민이는 아주 태연하게 말하며 감자튀김을 주워 먹었다.

“어휴, 이걸 정말?”

재수는 민이의 뻔뻔한 태도를 참을 수가 없어 주먹을 쥐었다.

“왜 때리실려고? 어디 한 번 때려보시지 그래?”

민이는 당당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휴, 내가 참아야지.”

재수는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잘 생각했다. 더 맞기 싫으면 그게 상책이지.”

민이는 또 재수의 부아를 돋우고 있었다.

“뭐야? 내가 너 같은 걸 겁내서 그러는 줄 알아? 봐주면 적어도 고맙다고는 해야 될 거 아냐?”

재수의 가슴에서는 간신히 삭였던 화가 또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야, 너희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 셈이냐?”

준석이 또 다시 짜증을 내며 말을 했다. 그러나 둘은 준석이의 말을 못 들은 듯 변함없이 둘의 말싸움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젠 내 말은 씨도 안 먹히는 군.”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애? 안 그래 유진아?”

희연이가 물었다.

“쟤네들 일에 신경 쓸 거 없잖아.”

“하긴 그래.”

“야, 쟤네들 말릴 방법 좀 없겠냐?”

준석은 아이들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쟤네들을 무슨 수로 말려?”

유진은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그 때, 재수가 주문한 술과 안주가 나왔다.

“잠깐, 휴전하고 술이나 마시는 게 어때? 안주도 나왔는데.”

희연은 마침 술과 안주가 나오자 둘의 싸움을 좀 지연시켜 보려는 속셈으로 말을 꺼냈다.

“좋지.”

둘은 희연이의 말에 흔쾌히 응했다. 다섯 개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역시, 희연이 너 밖에 없다. 이제 좀 살 만하네.”

둘의 싸움이 멈추자 준석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말했다.

“얼마 못 갈 거야.”

희연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근데, 우리 오기 전에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희연이가 유진이에게 물었다.

“뭐, 특별히 한 얘기 없어.”

“맞아, 준석이 저 녀석이 애인타령이나 하는 거 듣고 있었다니까.”

재수가 덧붙였다.

갑작스럽게 준석이의 삐삐가 또 요란스레 울렸다. 준석은 삐삐를 들여다 보았다.

“또 삐삐냐? 아까 그 여자애야?”

재수가 물었다.

“아니, 다른 번혼데. 잠깐 전화 좀 걸고 올게.”

준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치겠군.”

재수는 기가 차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부러우면 너도 나처럼 잘 생기면 될 거 아니냐?”

준석은 제법 우쭐대며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야, 소주도 나왔는데 우리 소주나 마시자.”

민이는 수저로 소주병 마개를 땄다.

“하여튼 술꾼은 어쩔 수 없다니까.”

재수가 또 민이를 건드렸다.

“야, 머저리, 잔이나 들어.”

재수가 잔을 들자 민이는 재수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야, 근데, 넌 아까부터 자꾸 나보고 머저리라고 그러는데 그러다 큰 코 다치는 수가 있어? 깡패.”

재수는 잔을 내려놓으며 기어이 시비를 걸고 넘어갔다.

“뭐, 깡패? 그렇게 자신 있으면 어디 한 번 덤벼 보시지 그래?”

민이도 다시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어쭈, 제법 자신 만만해 보이는데. 보나마나 한 방에 나가 떨어질 게 뻔한데 순순히 잘못했다고 항복하지 그래?”

“웃기고 있네. 너야말로 잘못했다고 빌지 그래? 그럼 내가 용서해 줄지도 모르잖아. 난 원래 마음이 넓거든.”

“또 다시 시작이군. 희연아, 쟤네들 싸움 좀 말릴 방법 없겠냐?”

이번에는 보다 못한 유진이가 희연이한테 도움을 요청했다.

“쟤네들을 무슨 수로 말려. 쟤네들 사랑싸움에 신경쓰지 말고 술이나 마셔.”

희연은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유진이의 맥주잔에 따라 주었다.

“뭐, 사랑싸움?”

민이와 재수가 동시에 희연이를 돌아보았다.

“희연아,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저런 깡패는 트럭으로 갖다 줘도 하나도 안 반갑다고.”

재수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지껄였다.

“어이구, 누구는? 너랑 사랑하느니 차라리 물에 빠져 죽겠다.”

“사랑싸움 아니었나? 아니었음 말고.”

희연은 능청을 떨며 말했다.

준석이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준석은 재수와 민이가 말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자리에 앉았다.

“또 시작한 거야?”

준석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얼마 못 갈 거랬잖아?”

희연이가 말했다. 그 때 재수가 괴성을 질러댔다.

“야, 너 정말 깡패야? 왜 자꾸 남의 다리는 걷어 차?”

재수는 화가 나서 큰 소리를 질렀다.

“그러게 내가 말조심 하랬잖아. 또 한 번 주둥아리를 놀렸다간 그 땐 각오하라고.”

“어휴, 이걸 정말? 이것도 여자라서 때릴 수는 없고.”

“내가 미친다. 정말. 야, 이제 그만 할 때도 됐지 않냐? 그렇게 싸운 지 벌써 1시간이 다 되어간다고.”

“야, 준석이 넌 가만있어. 난 맞고도 가만 있을 수는 없다고.”

“그래, 준석이 넌 끼지 말아. 난 너한테까지는 감정 없으니까.”

“웬 일이냐? 너희 둘이 뜻을 같이 할 때도 있고.”

준석이 비아냥 거리며 말했다.

“준석이도 왔는데 다 같이 소주 한 잔 하는 게 어때? 맥주도 이젠 다 비웠으니까.”

희연은 또 한 차례 둘의 싸움을 지연시켜 보려 하였다.

“그거 좋지.”

다섯명의 학생이 희연이의 제안에 찬성했다. 각자의 술잔에 술이 부어졌고. 그들은 허공에서 잔을 부딪혔다.

“에취.”

희연은 술을 마시고 나자마자 기침을 했다.

“괜찮아?”

유진이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응, 괜찮아. 에취.”

“이제 그만 마셔. 감기까지 걸렸다면서.”

유진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응.”

희연은 유진이의 말에 순순히 응했다.

“근데, 이번엔 어떤 여자애냐?”

재수가 준석이에게 물었다.

“은주라고 아는 애 있어.”

“그래 그 여자가 뭐라고 하대?”

“만나자고 그러지 뭐.”

“그래서 만나기로 했어?”

“아니. 별로 관심 없는 얘야.”

“아, 참 그러고 보니 깜빡할 뻔 했네.”

희연이가 갑작스럽게 말을 꺼냈다.

“뭘?”

유진은 궁금증이 담긴 눈으로 희연이를 보았다.

“내 친구가 준석이 너 좀 만났으면 하는데.”

“날?”

준석이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응. 우리학교 무용학과 다니는데 내일 1시에 학교앞 아모르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하는데. 어때, 만날 생각 있어?”

“그 애 니 동생보다 이뻐?”

준석이가 물었다.

“응.”

“정말이야?”

“난 거짓말 안 해. 그 앤 TV에도 나온 적 있다고.”

“TV에도 나온 적 있다니? 누군데?”

준석은 방금 전 시큰둥했던 반응과는 달리 한껏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그건 비밀. 내일 가서 직접 확인해 봐.”

“야, 누군지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별 수 없어. 그 애가 자신의 정체를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으니까. 누군지 궁금하면 내일 가 보면 되잖아?”

“내일 1시, 아모르 커피숍이라고 했지?”

“응.”

“희연아, 너 어쩌다가 저런 플레이보이한테 중매까지 서 주게 되었냐? 중매를 서 줄려면 나한테 남자나 좀 소개시켜 주지.”

민이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아는 남자가 거의 없어서.”

“혹여 니가 소개를 받으면 뭐 하냐? 보나마나 퇴짜 맞을 게 뻔한데.”

또 재수가 끼어들어 민이의 화를 돋우었다.

“넌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더 맞기 싫으면 얌전히 있으라고.”

“정신을 못 차린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자기 주제는 생각 안하고 헛된 망상이나 하고 있으니 말야.”

“나 잠깐 화장실 좀 갖다 올게.”

희연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희연은 손을 씻고 나서 거울을 보았다. 술기운인지 감기 기운 때문인지는 몰라도 얼굴에 붉은 빛이 감돌았다. 희연은 스스로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진이의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단정히 하고 나서 희연은 화장실을 나왔다.

희연이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 새 화제가 내일 있을 범국민적인 집회에 관한 얘기로 옮겨져 있었다.

“준석이, 너도 내일 집회에 한 번 와 보지 그래?”

재수가 물었다.

“지금 내가 그런 데에 신경 쓰게 생겼냐? 희연이가 말한 여자가 누군지 궁금해 죽겠구만.”

“하여튼 저 인간 머릿속엔 여자밖에 안 들었다니까.”

“걱정마. 머저리. 난 참석할 테니까.”

민이가 말했다.

“야, 넌 안 와도 된다고. 너 같은 깡패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단 말이야.”

재수는 또 싸움을 걸고 있었다.

“정말 쓸모가 없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야. 뭘 알고나 제대로 말씀하시지.”

민이는 또 재수의 말을 맞받아쳤다.

“유진아, 너도 내일 집회에 갈 거야?”

희연은 조심스럽게 유진이의 속마음을 떠 보았다.

“가야지. 뜻이 좋은 집회잖아. 넌? 갈 거야?”

“아니, 나 그런데 참석 안 하는 걸 잘 알잖아.”

“하긴.”

 

  다섯명의 학생이 목마르지라는 호프집에서 술을 마신지도 3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재수와 민이의 말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봐, 깡패, 좀 작작 먹지 그러냐? 그렇게 먹어대기만 하니까 살이 디룩디룩 찌는 거 아냐?”

재수가 민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머저리, 내가 말했지? 그렇게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다간 한 대 더 맞는다고.”

“어휴, 그러셔? 어디 한 대 더 때려 보시지 그래?”

재수는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세 명의 학생은 둘의 말싸움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희연아, 쟤네들 싸움 좀 그만 두게 할 수 없냐?”

참다 못한 준석이가 희연이에게 또 다시 도움을 요청했다.

“방법이 한 가지 있긴 있어.”

“그게 뭔데?”

준석은 희망을 품고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그만 일어나자.”

희연이가 말했다.

“그래. 그게 낫겠다.”

유진과 준석은 희연이의 말에 동의를 했다.

“뭐, 이제 10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가자고?”

민이가 극구 반대를 하고 나섰다.

“그래, 나도 벌써 가고 싶지는 않다고.”

재수도 민이처럼 희연이의 제안에 반대를 했다.

“가고 싶지 않으면 너희 둘이 여기서 계속 마셔. 그 대신 오늘 술값은 너희 둘이 다 내야 할 거야”

“희연아, 이건 너무 비열한 방법이야.”

민이가 말했다.

“그래도 어떡하냐?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인데.”

희연은 능청스런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다섯 명의 학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진은 일어서면서 조금 비틀거렸다. 그는 준석과 함께 화장실로 갔다. 재수와 민이가 먼저 밖으로 나왔고 희연은 술값을 계산한 후 나왔다. 조금 있자 화장실로 갔던 준석이와 유진이가 함께 나왔다. 유진은 밖으로 나와서도 조금 비틀거리며 걸었다.

“너 취한 것 같은데. 집에까지 갈 수 있겠어?”

준석이 걱정을 하며 물었다.

“걱정마. 이 정도 마신 걸 가지고 뭘.”

“나하고 같은 방향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희연이가 말했다.

“사내 녀석이 저렇게 술이 약해서 어디다 쓰냐?”

민이가 투덜거렸다.

“야, 그러는 넌 뭐 잘난 줄 아냐? 여자가 소주를 물 마시듯 쳐 먹는 주제에.”

재수가 또 민이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너희는 어째 밖에 나와서 까지 그러냐? 이제 그만 좀 할 수 없냐?”

준석이 또 짜증을 냈다.

“먼저 갈게.”

희연이가 작별 인사를 했다.

“잘 가라. 압구정 부르즈아들.”

민이가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희연은 민이의 농담에 가볍게 미소를 띄우고는 발길을 돌렸다.

“우리도 그만 가야지.”

민이가 말을 꺼내자 세 명의 학생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재수와 민이의 말싸움은 걸어가고 있는 도중에도 끊이질 않고 계속되었다. 준석은 그들의 말싸움을 저지시켜보려 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준석은 하는 수 없이 둘의 말싸움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걸었다.

세 학생은 횡단보도로 들어섰다. 때마침 파란 불이 켜졌다.

“머저리, 건너가자.”

민이가 말했다.

“난 오늘 준석이네 집에서 자야겠다.”

“또?”

민이가 놀라며 물었다.

재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라.”

“잘 가, 깡패.”

재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민이가 주먹으로 재수의 배를 때렸다. 재수는 ‘욱’하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였다.

“내가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지 말랬잖아.”

민이는 말을 끝내자마자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어휴, 저게 여자야? 무슨 주먹이 그렇게 세?’

재수는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준석과 재수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버스가 도착하자 두 남학생은 버스에 올라탔다.

 

  네온싸인이 활개를 치고 시끄럽게 차들이 지나가는 밤거리를 두 남학생이 걷고 있었다. 준석과 재수는 그 화려한 네온싸인이 빛나는 거리를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방금 전까지의 차들의 소음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어두운 길에 밤의 적막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재수였다.

“너, 아직도 방에다 소피 마르소 사진 붙여 놓고 있냐?”

“당연하지. 소피 마르소는 중학교 때부터 나의 영원한 연인이었는데. 내가 불문학과를 간 이유 저 번에 너한테 말했잖아? 프랑스 가서 소피마르소 만나볼려고 그런 거라고.”

“그 때쯤이면 그 여자도 늙었을 텐데 만나서 뭐 하냐? 야, 너도 이제 20살인데 이제 그런 사진은 띠어 버리고 정의로운 생각 좀 하는 게 어때?”

“정의로운 생각? 그게 뭔데?”

준석은 자못 궁금해 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내일 같이 집회에 가자고. 아마 내일 보라매 공원에 쌀 수입 개방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엄청 모여들 거라고.”

“그게 무슨 정의로운 생각이냐? 그들은 피에 굶주렸을 뿐이야. 그들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내 형도 그들의 피해자...”

준석은 끝을 맺지 않고 말을 멈추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재수는 놀란 얼굴을 하며 준석을 보았다.

“아니야. 아무 것도.”

준석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말을 흐렸다.

준석에게는 형이 한 명 있었다. 준석의 부모님은 지금은 조그만 햄버거 가게를 하시지만 예전에는 길거리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포장마차를 하셨다. 부모님의 포장마차는 때때로 단속반에 걸려 무참히 부서지고 했는데 형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다. 아마도 그 때부터 형의 마음속에는 정부에 대한 불신이 싹텄던 것 같다. 형은 대학에 들어가더니 운동권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 무렵, 이미 부모님은 틈틈이 모은 재산으로 조그만 과일 가게를 갖게 되어 더는 단속반원들의 행패를 받지는 않았지만 형의 마음속에 자리 잡힌 앙금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부모님이 데모를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지만 형은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2학년을 마치고 형은 군대에 가게 됐는데 공교롭게도 전경으로 착출되었다. 데모를 하던 사람이 이젠 데모를 진압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시위가 한층 심해진 날이었다. 형은 네 다섯명으로 둘러싸인 학생들의 무자비한 구타에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네 차례에 걸쳐 대 수술을 했지만 끝내 형은 수술실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준석은 그 때의 충격을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운동권이라는 학생들은 입으로는 민주를 부르짖었지만 정작 하는 일이라곤 동료를 죽이는 일뿐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 준석은 운동권이라고 자부하는 학생들을 혐오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넌 언제쯤에 집에 들어갈 생각이냐? 벌써 사흘째 아냐?”

준석은 화제를 돌렸다.

“내일은 들어가야지.”

재수는 맥이 쭉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웬만하면 네 가족 좀 생각해라. 이렇게 매일 외박하지 말고.”

“그래야지.”

재수는 ‘가족’이라는 말에 힘이 쭉 빠진 채 대답했다. 재수에게 있어 가족이란 유감스럽게도 불행한 단어였다. 불쌍한 이복동생인 소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희를 생각할 때마다 재수는 가슴이 아려왔다. 소희의 친어머니는 소희가 어렸을 때 소희를 버리고 떠났고, 의붓아버지는 소희한테 성적학대를 일삼고 있었다. 재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때, 아버지가 소희의 옷을 벗기고 몸을 탐하는 것을 보았다. 그 땐 너무나도 놀라고 낯이 뜨거워서 소희를 막아주지도 못하고 집을 나와 버렸다. 그 후로도 아버지는 소희한테 그런 행동들을 서슴치 않고 했다. 그러나 재수는 아버지한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여전히 소희를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 재수는 그런 집안이 싫어 가능한 밖으로 나돌고 있었다.

두 학생은 서민 아파트인 동보 아파트로 들어섰다. 준석이의 집은 가동 301호였다. 준석과 재수는 가동으로 가서 계단을 올라갔다.

준석이 벨을 누르자 키가 작고 아주 앳되어 보이는 지은이가 두꺼운 철판으로 만들어진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빠 왔어. 재수 오빠도 왔네요.”

지은은 깜찍한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재수는 지은이의 밝은 얼굴을 보자 이복동생인 소희가 떠올랐다. 소희의 친어머니가 집을 나간 이후로 소희의 웃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재수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잘 있었어? 꼬마 숙녀.”

재수는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지우며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분명히 경고하겠는데요. 다시 한 번 나한테 꼬마라고 했다간 이 집에서 내 쫓을 줄 알아요.”

지은이는 귀엽게 투정을 부리며 말했다.

“꼬마를 보고 꼬마라고 하는 건데. 뭐가 잘못이야?”

준석이가 재수의 편을 들었다.

“오빠, 난 꼬마가 아니야. 난 모델 지망생인 고등학생이라고.”

지은이는 여전히 깜찍한 목소리로 반박을 했다.

“야, 155cm로 무슨 모델이냐? 제발 그 헛소리 좀 이제 그만할 수 없냐?”

“오빤 내가 모델이 된 다니까 괜히 샘나서 그러지?”

“뭐야?”

준석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은이를 쳐다보았다.

“근데 늦었는데 여태 안 자는 거야?”

재수가 물었다.

“공부 해야죠. 저도 이제 고등학생이라고요.”

지은은 대답을 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라 3호선 지하철은 텅텅 비어 있었다. 유진과 희연이는 문이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는데 유진은 잠이 든 채 희연이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고 있었다. 희연은 그런 유진이를 행복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역은 압구정...... 압구정입니다. 다음은.......」

안내방송이 흘러나오자 희연은 조심스레 유진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유진은 자신의 어깨에 와 닿는 촉감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

“다 왔어.”

유진은 희연이의 어깨에서 고개를 떼었다.

지하철에서 내린 두 학생은 조금 후 지상 위로 올라왔다. 유진은 다시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길가 구석을 찾아 쪼그리고 앉아 오바이트를 했다. 희연이가 뒤에서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희연이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응, 이제 괜찮아.”

유진은 토를 다하고 나서 말했다.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 네 앞에서 말야.”

“뭐가 어때서 그래? 남자들이야 다 술 마시고 그러는데.”

희연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이 말했다.

유진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술이 많이 깨었지만 발걸음은 아직도 조금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유진아, 너 내일 집회에 나갈 거야?”

희연은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가야지. 우리 쌀을 지키냐 마느냐의 중요한 집회라고.”

유진은 확고한 신념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니가 안 나갔으면 좋겠는데.”

희연은 방금 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나 요즘 운전 배우는데 내일 너랑 같이 운전 배우면 좋을 거 같아서.”

“나 기계에 질색인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리고 내일은 집회에 나가야 해. 쌀을 지켜야 농민들이 사니까.”

희연은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유진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끔 도와주는 것이지 유진이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유진과 희연은 유진이의 집에 도착했다. 유진은 걸어오는 게 숨이 찼던지 도착하자마자 벽에 기댄 채 앉아 또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희연은 벨을 눌렀다.

“여보세요?”

안에서 강 여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예요. 어머님. 안에 아버님 계셔요? 유진이 지금 여기서 자고 있거든요.”

곧 유진이 아버지인 박 회장이 나왔다. 박 회장은 유진이를 업고 안으로 들어갔고 희연이가 그 뒤를 따랐다. 강 여사는 남편이 업고 들어오는 유진이를 보자 깜짝 놀랐다.

“어이구, 내가 저 녀석 때문에 못 산다니까. 저 녀석이 희연이 너 같으면 얼마나 좋겠냐?”

강 여사는 하소연하듯 말했다.

“어머님도,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하고 유진이 하고 어디 같나요? 그리고 금하건설을 이어 갈 아이인데 저 정도 객기는 있어야죠. 기분 좋게 마신 술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고맙다, 희연아. 조심해서 들어가거라.”

“예. 안녕히 계셔요.”

희연은 강 여사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후 유진의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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