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인종의 경계를 묻다 스켑틱 SKEPTIC 24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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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주제는 좀 지루했다.

초능력자라고 주장하는 유리 겔라의 허상을 밝혀낸 것으로 유명한 제임스 랜디 마술사가 92세의 나이로 사망 후 추모 기사가 실려서 기대했는데 깊이가 부족해 아쉽다.

과학은 도덕적일 수 있는가, 가치중립적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진화 자체가 다양성과 자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종교 대신 도덕률을 감당할 수 있다는 주장은 신선하다.

다양성과 자유의 확대야 말로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도덕의 진보 방향이고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한다.

도그마에 갇혀 있는 종교는 21세기의 보편적 도덕성을 획득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제일 관심있는 주제는 책의 제목인 인종에 관한 내용이었다.

얼마 전에 읽은 "1만 년의 폭발"이라는 책에서는, 공정함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과학적 진실을 감추고 있다면서 인종적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나도 한때 페미니즘에 경도된 적이 있어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는 문화적 억압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었다.

간단히 말해 여자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남자와 육체적으로 같은 성취를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현재는 명백한 생물학적 차이가 존재하고 남녀 구분이 없다면 올림픽 100미터 세계신기록을 여자가 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이해한다.

인종의 명백한 분류보다는 평균키의 차이나 피부색, 모발처럼 집단적 구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을까?

인종에 관한 주제를 읽을 때마다 과학에서 말하는 인종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문화적 의미의 인종이 다른 게 아닐까 싶다.

기준이 다르니 본질을 등한시하고 논쟁만 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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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시대, 종교를 생각한다 스켑틱 SKEPTIC 23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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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자의 가장 큰 적은 종교인 것 같다.

그 외 자잘한 적들로는 대체의학, 지구평면설, UFO 등등이 있다.

스켑틱 잡지를 한꺼번에 빌려 읽어서 그런지 비슷한 내용이 계속 반복돼서 감상문 쓰기가 힘들다.

전체적으로는 거의 다 동의하는 내용들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믿음과 계시로서의 종교는 21세기 과학을 대체할 수 없고, 점점 더 무신론의 시대로 변해갈 것 같기는 하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과학을 단순한 기술 발달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과학 만능주의라는 말도 나왔을 것이다.

스켑틱 시리즈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과학은 단순한 발견이나 기술 발달이 아니라 사고 체계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세상을 이해할 것인가?

자연의 신비라는 자연과학적 진리를 밝히려는 탐구 정신인 것 같다.

그러므로 신이라는,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증명할 수 없는 절대자를 전제한 종교, 특히 인격신을 가정한 기독교와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도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의 주장을 빌려 과학과 종교가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영역이라고 논쟁을 회피하려는 모습도 보이지지만 전략적으로를 옳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는 양립 불가능한 명제 같다.

절대자를 상정하고 그에 복종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얻는 종교적 행위를, 책에서는 인간이라는 집단 수준의 적응이라고 표현했다.

구석기 시대 동굴 벽화를 보면서 호모 사피엔스의 DNA 에 예술과 종교 유전자가 새겨져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종교가 인간의 사회를 안정시키고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존속해 온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 종교가 과학과 합리주의의 발달에 따라 서서히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과거보다 확실히 종교적 영향력은 약화됐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교회에 가고 UFO 와 외계인, 대체의학 등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다.

어쩌면 인간의 정신 활동이 계속 되는 한, 우리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예술 작품에 격한 감동을 느끼고 많은 비용을 지불하듯 종교도 그런 형태로 존재할지 모른다.

교회가 사라지는 21세기에 미술관이 현대인의 예배소가 되고 있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원인을 찾으려는 인간의 속성이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자연현상에 대한 첫번째 원인으로서 절대자를 창조해 냈다는 의견도 있다.

확실히 인간은 왜? 에 대해 궁금해 한다.

정확한 답이든 아니든 나름대로 현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음모론도 인과관계를 원하는 인간의 속성 탓에 만연해 있는 것이리라.


"실재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의 과학은 아직 원시적이고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기도 하다"

스켑틱 잡지의 첫 장에 나오는 인류 최고의 천재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어쩌면 과학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줄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는 경구에다가 과학과 합리주의 정신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다는 말을 끼워 넣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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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의 시대 - 한국 스켑틱 Skeptic 2018 Vol.15 스켑틱 SKEPTIC 15
스켑틱 협회 편집부 지음 / 바다출판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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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도 좌파가 유행인가 보다.

실증주의적 과학을 공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급진적 좌파라고 해야 하나?

토마스 쿤이 주창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과학도 상대적이다고 해석해 절대적, 객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편다고 한다.

선량한 야만인이 21세기의 대중이나 과학자들의 공정성, 정의감각에 어울리는 개념인 셈이다.

반대로 유전자의 역할을 강조한 진화심리학자 에드워드 윌슨 등은 하버드 대학에서 학생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최고의 지성이라는 하버드 대학에서조차 과학을 "올바르고" "정의롭고" "공정한" 감각으로 받아들이다니.

공병호의 책에서 본 것처럼 좌파는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고 여전히 대세가 아닐까 싶다.

유사역사학도 범주는 다르지만 사고체계는 비슷한 맥락 같아 보인다.

진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념성, 정당성, 이데올로기가 더 우위에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왜 대중과 엘리트 과학자들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하는가?

더 넓게 보자면 최첨단 과학의 시대에 여전히 종교가 득세하는 이유도 비슷한 것 같다.

책의 제목대로 21세기는 무신론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한다.

기독교, 이슬람교, 비신자들 이런 식으로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우주를 완벽하게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인간의 사고력, 과학이 미미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탓도 있을 것이고 대중이 과학의 성과를 전부 받아들이기에는 현대 과학이 너무 어렵다는 점도 있다.

나만 해도 대학 교육을 받고 과학의 가치를 신봉하지만 뒷장에 실린 양자역학 챕터는 거의 이해를 못하고 건너 뛰었다.

그냥 막연히 옳은 말이겠지 생각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간극을 파고드는 게 선동가들이고 종교인이고 유사역사학자들이 아닐까 싶다.

하나의 결론을 내기 위한 복잡한 과정들을 전부 생략해 버리고 단순 도식으로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간단한 결론을 이야기하는데, 문제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과학의 외피를 쓰고 있어 신뢰감을 가장하는 것이 더 문제다.

백신을 맞으면 자폐가 된다는 주장을 의사가 하는 식이다.

결국 과학의 성과를 대중들에게 잘 설명할 수 있는 엘리트 과학자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다.

이 책도 그런 활동의 일환일 것이다.

과거보다 IQ 가 상승해 오고 있다는 플린 효과에 대한 챕터가 있다.

지식이 누적되니 당연한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따져 보면 과거에는 주변 몇 km 에서 일어나는 현실적 일들만 처리하면 충분했는데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실천적 지능만으로는 생존하기 어려워졌고 점점 추상적 사고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과학 교육이라고 한다.

고대인이 현대인보다 아이큐가 낮다기 보다는 실천적 지능에서 추상적 지능으로 실제적 사고에서 수학적 사고로 변화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저자들은 이런 추상적 사고와 지능이 증가할수록 점점 더 사람들은 무신론자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창조과학자들이 성경은 과학이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와 매장의식을 보면서 인간은 종교적 존재이고 유전자에 종교적 본성이 새겨졌다고 생각했는데 책의 주장처럼 어쩌면 종교는 인간의 본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도덕과 영적 감성을 과연 종교 대신 무엇이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과학적 사고는 종교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내가 살아 생전에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긴 하지만 약간의 기미는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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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창조론의 자리는 있는가 - 한국 스켑틱 Skeptic 2018 Vol.12 스켑틱 SKEPTIC 12
스켑틱 협회 편집부 지음 / 바다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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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잡지는 정말 나같은 사람을 위해 나오는 책인 것 같다.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회의주의자임이 분명하다.

나 스스로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그에 따른 갈등도 없는데, 말하자면 확신범인데 왜 자꾸 이런 책을 읽는 것인지 생각해 봤다.

기독교에 대한 문화적 관심도 있지만 (마치 이슬람의 역사에 대해 궁금하듯) 무엇보다 근본주의 기독교인인 엄마 때문인 것 같다.

엄마는 대학교 2학년 때 시집와, 42년 교직 생활을 하시면서 학생운동 하느라 교도소 수감되어 있는 아빠를 뒷바라지 하며 정말 가족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다.

지금도 직장생활 하는 딸을 위해 반찬을 보내시고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라도 광주에서 인천까지 달려와 아이들을 봐 주신다.

시부모님도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고 실직하고 이혼한 시동생을 위해 조카까지 맡아 주기도 하셨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에 아무런 불평이 없고 위암도 잘 극복하시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신다.

내가 보기에는 인격적으로 정말 훌륭하신 분인데 단 한가지, 교회 문제로 너무 괴롭다.

엄마는 가족 모두를 구원받게 하시는 게 삶의 목표인 분이시다.

신앙이야말로 누구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선택할 수 없는 신념의 문제이자 자유의지인데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압적으로 교회에 나가야 하는지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

우리 가정의 문제는 오직 이것 하나, 엄마의 강렬한 선교 의지이다.

평범한 기독교도 싫은데 이 교회는 성경을 정말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근본주의 교리를 고집하기 때문에 더 받아들기기가 힘들다.

엄마의 강권에 못이겨 몇 번 나갔던 부흥회에서 나사 연구원이라는 사람이 강연자로 나서서, 여호수아가 팔을 들어 잠깐 태양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는 기록이 천문학적으로 입증이 됐다는 식의 강연을 듣고 도저히 더 나갈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그 연구원이라는 경력도 진짜인지 의심이 됐는데 오늘 읽은 이 책에 따르면 과학자들도 교회 앞에만 가면 이성의 문을 닫고 맹목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단순히 마음의 평안을 얻고 힘든 세상 살아가면서 신에게 의지하는 정도의 평범한 교회라면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서 나가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설교 시간마다 성경은 과학이다, 아라랏트 산에 노아의 방주 조각이 남아 있다, 진화론은 잘못된 이론이다를 주장하는 이런 신앙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런 엄마의 강요에 맞서기 위해 나는 계속 무신론에 대한 책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셋으로 나눴다.

첫째는 도킨스 식의 제거론이다.

과학적 사고방식을 하는 사람이라면 신이 그저 상상력에 불과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도 종교에서 과학적 진실을 없애 버리는 제거론자이다.

적어도 생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종교와 과학이 양립하기 어렵다고 느낄 것 같다.

나 역시 이 쪽인데, 급진적인 주장인 만큼 주변의 공감을 얻기도 힘든 부분이 있다.

두번째는 분리론이다.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가 이런 쪽이다.

예술과 과학이 서로 다르듯 종교를 예술과 같은 맥락으로 보기 때문에 서로 갈등할 일이 없다.

일반적인 기독교나 천주교가 이런 스텐스를 취하는 것 같다.

과학은 과학자의 영역으로, 영적인 부분은 종교가, 이 정도의 분리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회피라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조화론이 있다.

이 부분은 솔직히 이해가 잘 안 간다.

창조의 원리에서 형이상학적 요소를 제거하고 인격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우주 원리라고 할까?

'동일한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방식'이라고 설명한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이 믿었던 우주 원리로서의 신, 理神論 의 개념일까?

진화론이라는 법칙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주체를 창조주로 설정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신은 인간사에 세세하게 관여하고 영향을 미치는 인격신이 아니다.

여전히 종교는 인간의 삶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학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대중을 교육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왜냐면 과학은 실재하는 현실 세계를 다루고 물리적 우주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해결책도 거기서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인상깊은 구절>

55p

과학기술은 "미래의 먹거리"나 "신성장 동력"이기 이전에 특별한 유형의 지적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과학적 세계관은 합리적 추론과 객관적 증거를 집요하게 강조하는 지적 스타일이다. 겉으로는 우리 사회가 과학기술 강국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이런 지적 전통과 문화를 향유하는 시민들이 많지 않다는 측면에서 과학기술의 뿌리가 약한 국가에 속한다.

88p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대로 믿을 권리가 있지만 마찬가지로 당신에게는 누구든 들을 용의가 있는 사람에게 당신이 아는 최고의 지식을 가르칠 권리가 있다. 목사가 우리 과에 찾아와서 공짜로 성경책을 나눠줄 권리가 있듯이 말이다. 종교 근본주의는 공정한 승부를 벌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자. 그들은 말 그대로 당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그 목표는 다름 아닌 과학과 합리주의에 대한 정면공격이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경향을 과소평가하고 그것을 흔들리는 추처럼 취급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추가 되돌아올 즈음이면 우리는 갈릴레오나 다윈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굳건히 지킬 경우에 비해 훨씬 나쁜 세상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토머스 헉슬리는 이렇게 말했다. "흙에서 개량된 것보다는 원숭이에서 개량된 것이 낫지 않겠는가?"

92p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열린 사고를 하지만 창조론자들은 성경의 권위에 집착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과학은 엘리트 집단의 제도로서, 과학 옹호론자들의 태도 또한 때로는 권위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창조론자들은 대중의 호응을 얻기 위해 상식에 호소하며 일상적인 종교문화에 걸맞은 일종의 실용주의 과학을 구상한다.

 오늘날 창조론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것과 같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은 과학적 근거를 찾는 대신 변명만 늘어놓으면서 자신의 믿음을 방어한다. 창조론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목격하는 생명체들 또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출현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화론을 통해 생명의 탄생을 훨씬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음깨달았다. 

 우리가 창조론은 과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창조론자들이 과학을 실천하지 않는다거나 특수창조설이 평평한 지구처럼 실패한 이론이라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창조론이 끔찍한 실패로도 취급될 수 없는 반증불가능한 부당한 가설이므로 과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게다가 창조론자들은 신과 악마의 존재를 말하는데, 과학에서 초자연적인 설명은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97p

진화론은 우리가 목격하는 불완정성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기 시작했고 창조론의 설명을 대체했다. 적응력이 뛰어나고 명확하게 분류되는 생명의 형태들은 공통 조상으로부터 유래한 후손이라는 증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증거에 부합하도록 창조론을 수정할 수도 있겠지만, 진화론과 비교한다면 일련의 변명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 창조론과 같은 광범위한 이론이 무너진 이유는 일부 괴상한 '데이터'가 연역적 결론들과 상충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창조론이 틀렸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물체가 고유의 자연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주장이 뉴턴 물리학에서 더 이상 논리적이지 않았던 것처럼, 신성한 목적이 없다고 가정해야 생물학적 현상을 더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창조론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과학이 아님을 깨달았다. 과학은 자연주의적 설명만 허용하므로 성숙한 과학은 창조와 같은 개념들을 고려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136p

과학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새로운 이론이나 가상적 존재가 단지 유용하다는 이유 때문에 (당대의 과학자들이 그 물리적 실체를 의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진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예를 들면 지구가 아닌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 모델도 처음에는 물리적으로 참이라서가 아니라 행성의 겉보기 운동을 수학적으로 더 간단히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용되었다. 비슷한 사례로 원자핵, 전자, 그리고 광자도 처음에는 유용하긴 하나 물리적 실체는 없는 개념으로 생각되었다. 

 물론 모든 이론이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며, 가상적 존재가 모두 실재하는 것으로 밝혀지지도 않는다. 실험(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실제적 응용)에 의해서 새로운 이론의 유용성이 입증되면 이론에 내포된 개념들도 물리적 실재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과학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과학자들이 이론의 관측 가능한 예측을 생각해내고 그에 따른 적절한 실험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만일 예측이 실패하면 이론은 폐기된다. 하지만 실험이 성공하면 이론은 과학적 실재의 일부가 되고, 한때는 역설적으로 보였던 개념들에도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익숙해지고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반해 실험으로 검증할 수 있는 가설을 제시하지 못하는 이론은 과학적 생산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사라져버릴 것이다. (또한 다른 차원이 없이도 사실을 더 잘 설명하는 경쟁 이론이 창안될 수도 있다)

196p

아틀란티스 이야기를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증명의 부담은 이 이야기가 역사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측이 지고 있다. 아틀란티스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저 아틀란티스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플라톤이 유일한 근거라는 점만 지적할 수밖에 없다. (다른 고대 작가가 기록한 아틀란티스 이야기는 모두 플라톤에서 인용했으며 모든 인용 문헌도 플라톤으로 소급된다)

226p

핸콕은 과학자들이 맹목적으로 한 가지 신념만 고집한 나머지 눈앞에 닥친 재앙을 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솔직하지 못한 고백이다. 필자는 현장의 지질학자로서, 20세기 초부터 중반까지 지질학자들이 재앙의 중요성을 간과한 적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과학계는 대재앙에 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 덕분에 월터와 루이스 앨버레즈는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지질학계로 하여금 공룡이 혜성 충돌로 멸종했다는 이론을 수용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핸콕은 정상적인 과학적 회의주의에 부딪힐 때마다 음모론을 흘린다. 이는 믿기 힘든 주장에 가해지는 과학적 비판을 피하려는 핸콕의 핑계일 뿐이며, 자신을 소위 거대하며 불가항력인 동일과정설에 부딪힌 소수자로 위장하려는 행위다.

230p

나는 저명한 화산 용암지대 홍수 전문가인 매사추세츠대학교의 아이작 라슨에게 영거 드라이아스기 충돌 가설과 연관시킬 수 있는 폭우가 내렸을 가능성이 있는지, 핸콕이 제기한 음모론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라슨은 완곡하게 돌려 말하지 않았다. "대재앙을 일으킬 만한 단 한 번의 대홍수는 없었으며 홍수가 여러 번 일어났다는 가설에 과학계는 합의했다. 음모론에 관해서는, 과학계는 신빙성 있는 자료로 뒷받침하는 새로운 가설에 항상 열려 있으며, 결정적인 경험적 증거나 이론적 근거가 부족한 가설은 지지를 받기 힘들다고 말하겠다. 과학자는 상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크므로, 이런 사람들 수천 명이 음모론에 얽혀 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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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 사랑하기 전에 알아야 할 신비로운 성과학 이야기
로버트 마틴 지음, 김홍표 옮김 / 궁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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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생물학 책이다.

박물관 큐레이터라는 직업에서 알 수 있듯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진화와 인간의 생식, 양육, 피임 등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전달한다.

생물학 시간에 배웠던 내용들인데도 정말 오랜만에 접하게 되서 새롭다.

단순히 인간의 생식 과정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영장류의 진화라는 넓은 관점에서 설명한다는 점이 신선하다.

인간의 발생을 실험실에서 연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대신 우리의 유인원 친척들을 관찰하고 실험하는 방식으로 추정하고 있다.


몇 가지 인상적인 내용들

1) 인간의 두뇌는 다 자라면 출생시의 네 배가 된다.

다른 유인원들이 두 배가 되는 것에 비해 훨씬 커지는 셈이다.

그래서 다른 포유류들은 낳자마자 걷는 조숙성 새끼인 반면 인간은 생존이 어려운 미숙성 신생아로 태어난다.

9개월 간 뱃속에 있다가 출생 후 1년 동안 두뇌를 키우는데 온 에너지를 다 쏟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인간의 임신 기간이 21개월이나 다름없다고 설명한다.

숫구멍이 돌 때까지 열려 있는 것도 두뇌가 더 자라기 위해서이고, 산도 통과를 위해 자궁에서 최대한으로 머리가 커진 후 극적인 출생 과정을 거쳐 1년 여 동안 열심히 두뇌 성장에 투자한다.

그 후에 비로소 젖도 떼고 걷기도 한다는 것이다.

직립보행으로 골반이 좁아졌고, 머리도 크기 때문에 태아는 다른 영장류와 달리 두 번의 회전을 통해 뒤를 보고 태어난다.

넓은 어깨도 출산시 위험 요소가 된다.

큰 두뇌가 이렇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2) 보통 생리주기는 생리 시작 후 여포가 자라는 여포기 2주와, 배란이 일어난 후 임신이 안 되면 황체가 퇴화하는 황체기 2주로 나뉘는데 가임 기간은 이 주기의 중간으로 알려졌다.

자연스러운 피임법은 바로 이 배란일 앞뒤를 피하는 것인데 놀랍게도 생리주기 전 기간에 걸쳐 임신이 가능하다고 한다.

인공수정 한 정자는 무려 10일도 생존할 수 있고 실제 배란도 이렇게 딱 맞춰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기를 이용한 피임법은 실제 효율성이 매우 떨어지는 셈이다.

오히려 인위적으로 배란일을 피하려다 보면 오랫동안 남아 있던 기능이 떨어지는 정자가 수정되어 건강하지 않은 배아가 발생할 위험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임신을 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날을 찾을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사랑을 나누는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교조주의적인 성리학 때문에 금기일이 늘어나 왕의 생산력이 떨어졌다는 책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저자는 가장 효과적인 피임법으로 마지막 장에서 경구용 피임약을 추천한다.

놀랍게도 가장 많이 이용되는 피임법은 정관수술이나 난관수술이라고 한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자궁내 장치나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 경구용 피임약 보다는 물리적인 장치인 콘돔이 가장 편리하고 효율적인 피임법 같다.

실패율이 3% 정도라는데 매일 잊어버리지 않고 약을 꼬박꼬박 먹는 것이나 수술 등에 비하면 용인할 만한 수치 같다.

가톨릭 등의 종교단체에서는 인위적인 피임을 반대한다고 하는데, 고작 성가대 조직을 위해 19세기까지 거세를 용인했던 조직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는 일갈이 시원하다.


3) 대부분의 내용은 중립적인 반면 모유수유 이점과 분유수유 문제점에 대한 강력한 주장은 전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모유수유의 장점은 널리 알려져 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유수유가 어려운 환경에서 분유수유를 선택할 경우 과연 책에 나온 대로 온갖 문제점에 노출되는지는 의문이다.

하는 게 좋다와, 안 하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좀 다른 개념 같다.

나 역시 모유수유의 중요성에 대해 귀가 따갑게 들었던지라 첫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려고 유방 마사지까지 받으러 다녔지만 결국 실패했다.

둘째는 아예 포기하고 처음부터 분유로 키웠다.

젖이 안 나오는 어쩔 수 없는 경우들이 있고 무엇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모유 수유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어린이집에 일찍 보내는 것은 확실히 감염 위험이 크지만 단지 분유를 먹었기 때문에 면역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약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모유수를 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을까?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다, 하는 식의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특히 모유든 분유든 젖병에 넣어서 먹이는 행위는 애착 형성에 문제가 된다는 지적에는 전혀 동의하기가 어렵다.

주양육자의 안정된 보살핌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 아닐까?


진화적인 측면에서 임신과 양육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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