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 인류 - 균은 어떻게 인류를 변화시켜왔나
박한선.구형찬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번 좋은 책을 고를 수는 없는 모양이다.

앞서 읽은 <농경의 배신>은 무척 흥미로웠는데 이번 책은 밀도가 영 헐거워 아쉽다.

대신 한국인 저자들이 쓴 책이라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 없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전날 읽은 <농경의 배신>을 인용한 내용이 많았다.

농경이 시작되고 가축과 함께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좁은 공간에 집중화 되니 인수공통 전염병이 퍼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대륙은 1만 2천 년 전에 가장 늦게 인간이 건너 가 구대륙과는 격리되어 있었으므로 천연두 등의 오래된 전염병에 취약한 게 당연한 듯하다.

인간과 함께 진화해 온 병원균을 완전히 박멸할 수는 없기 때문에 공생하자는 주장이 흥미롭다.

비슷한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요즘 맹위를 떨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감기처럼 관리하자는 맥락과 통하려나?

손씻기, 마스크 착용, 거리두기, 예방접종 등의 기본적인 안전 수칙에는 동의하지만 지금처럼 국민을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시도가 과연 질병 확산을 막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의문이긴 하다.

제일 흥미로운 대목은 행동면역에 관한 챕터다.

행동면역이 무슨 의미인가 했더니,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인간이 취하는 여러 행동 패턴들을 뜻하는 말이다.

간단히 말해 회피와 혐오반응이다.

우리 선조들은 병원균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직관적으로 정상적이지 않은 것들을 피했다는 것이다.

배설물을 멀리하고 아픈 사람을 격리시키는 등의 행동이다.

이방인을 배척하는 것도 그가 어떤 병원균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회피했을 것이라고 본다.

돼지고기를 금기시 하는 종교적 규범의 기원도 이런 회피 반응 때문인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의 언어 - 새는 늘 인간보다 더 나은 답을 찾는다
데이비드 앨런 시블리 지음, 김율희 옮김, 이원영 감수 / 윌북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는 별로 안 좋아하고 심지어 치킨도 안 먹기 때문에 크게 기대를 안했는데 생각보다 재밌게 읽었다.

400 페이지 정도로 약간 두껍지만 새 삽화들이 많아 실제 내용은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여러 새 종류를 설명하는 본문은 관심이 적어 다소 지루하게 읽었고 부록으로 실린 새의 특성에 관한 부분이 흥미롭다.

몰랐던 새에 대한 여러 사실들을 확인하고 생각보다 매력적인 구석이 많다는 걸 느꼈다.

일단 새는 후각이 거의 없는 줄 알았는데 심지어 혀도 있고 부리나 입천정에 미뢰가 있어 맛을 느낄 수 있다는게 놀랍다.

인간처럼 오감이 다 있고 특히 시각이나 청각은 훨씬 발달했으며 후각은 인간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까마귀는 인지 기능이 있어 5세 어린이 정도의 이해력을 가지고, 사람 한 명 한 명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까마귀가 머리가 좋다는 게 사실인가 보다.

딱따구리 같은 경우는 도토리 등의 먹이를 나무 구멍에 숨겨 놓기도 한다.

철새들이 이동을 하는 이유는 먹이를 찾기 위해서인데 약 19% 정도의 새들이 거주지를 계절마다 옮긴다고 한다.

태평양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장거리 비행으로 무려 4000km 이상을 날 수 있는데 새들도 힘들기 때문에 텃세로 적응해서 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시속 140km 에 달하는 엄청난 속력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달리기가 제일 빠른 새는 타조다.

유튜브에서 자전거 경주하는 인간보다 더 빨리 달리는 거 보고 놀랜 기억이 난다.

펭귄처럼 뒤뚱거릴 것 같은데 반전이었다.

가장 신기한 것은 새가 바로 공룡의 후예라는 사실이다.

이제는 깃털 달린 공룡이 일반적인 상식이 된 것 같다.

깃털이 비행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보온이나 과시 등의 다른 목적으로 시작됐다는 점이 공룡과 새의 연결 고리 같기도 하다.

하늘을 날아야 하기 때문에 인간보다 훨씬 몸이 가볍고 심지어 소변도 인간처럼 많이 배출하지 않고 최소한으로 농축해서 배설하는 걸 보면 확실히 이 동물은 하늘에 적응을 한 듯 하다.

다른 생명체에 대해 알게 된 좋은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멸의 인류사 -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사라시나 이사오 지음, 이경덕 옮김 / 부키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시 어려운 주제는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주제는 명확하지가 않고 늘 모호한 느낌이었는데 비슷한 책을 읽다 보니 아주 약간은 체계가 잡히는 것 같기도 하다.

대형유인원 중 제일 먼저 갈라진 오랑우탄은 1500만년 전에 분기했고, 인류와 가장 가까운 유인원 침팬지는 700만 년전에 갈라져 나갔다.

이 침팬지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바로 보노보이다.

인류라고 부를 수 있는 종은 대략 25가지 정도로 보는데, 전부 멸종했고 오직 호모 사피엔스인 현생인류, 바로 우리만이 살아남았다.

그래서 제목도 "절멸의 인류사"인 모양이다.

침팬지와 인간이 제일 가까운 사촌이라고 하면 큰 거부감을 보이지만, 그 사이 조금씩 바뀌어 온 다른 모든 친척들은 멸종하고 말았으니 차이가 큰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지적에 공감이 된다.

인류라고 불릴 수 있는 다른 종들이 살아남았다면, 이를테면 아르피테쿠스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에렉투스 등이 지금도 존재한다면 보다 직관적으로 침팬지와 인류가 공동의 조상에서 분기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얘기다.

왜 그들은 멸종하고 말았을까?

그들만 멸종한 것이 아니라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거의 모든 생물들은 다 사라지고 만다.

저자가 전작에서 표현한 바대로 지구는 한정된 의자이기 때문에 앉을 수 있는 정원이 정해져 있어 환경 변화에 적응한 생명체들은 번성하고 못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환경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면 같은 종이 계속 번성할 것이고 소행성 충돌처럼 느닷없는 큰 변화가 생긴다면 기존의 것들은 멸종하고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체, 즉 우리 같은 포유류가 번성하게 된다.

인간임을 규정하는 가장 큰 특성이 큰 뇌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뇌는 나중에 커졌다.

직립 2족 보행이 먼저였다.

700백만 년 전에 허리를 세우고 두 발로 걷기 시작한 반면, 큰 뇌는 250만 년 전 쯤에 진화했고 그 때부터 석기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아프리카 환경이 건조화 되면서 삼림이 점차 초원으로 바뀌어 가자 나무에 매달리는 걸 더 잘 했던 침팬지 등의 유인원들이 살아 남았고 인류는 초원으로 쫓겨나게 됐다는 가설이 흥미롭다.

서서 걷게 되면 맹수들의 먹잇감이 되기 쉽지만 대신 이들은 집단을 이루어 함께 살고 더 오랫동안 달릴 수 있어 먹이를 찾는 반경이 넓어진다.

언어도 집단 생활을 이루면서 협력할 수 있는 중요한 능력이 된다.

두 발로 걸으면서 두 손을 이용해 음식을 운반해 줄 있기 때문에 어린 자녀와 엄마를 부양할 수 있게 됐다는 추론도 흥미롭다.

음식 운반 가설이 직립 보행의 진화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집단 내에서 1부 1처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내 자식이라 확신하고 음식을 가져다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뇌가 먼저 커진 것이 아니라 직립 보행으로 손을 쓸 수 있게 되면서 뇌가 커졌다고 한다.

그 외 아프리카를 탈출한 호모 하이델베르크인이 네안데르탈인으로 30만년 전 쯤 진화하고 4만 년 전에 멸종하는 과정 등도 흥미롭게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처드 도킨스의 영혼이 숨 쉬는 과학 - 열정적인 합리주의자의 이성 예찬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는 나를 무신론자로 이끈 분, 내 인생의 가치관 변화에 꽤 영향을 끼친 분이라 가급적 저작들을 읽어 보려고 노력하지만 어렵다!

내 과학 수준의 한계인가, 상세한 설명들은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일단 지루하다.

당위적으로 적응을 위한 자연선택과 점진적 진화가 "진리"임은 알겠는데 상세한 논증은 제대로 이해를 못했다.

나름 생화학을 전공했는데도 이렇게 모를 수가 있나 약간의 절망감이 들면서도 과학과 대중의 괴리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므로 이 차이를 잘 메꾸는 것이 과학 저술가들의 역할인 것 같기도 하다.

도킨스는 명성있는 과학자답게, 대중에게 흥미를 끈다는 미명하에 과학을 우스꽝스럽고 가벼운 것으로 희화화 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수준있는 문학연구가 대중들에게는 겨우 드라마 캐릭터 분석으로 전락한 세태가 과학 대중화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열심히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과학 저술에도 노벨 문학상이 수여되길 바란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도킨스는 과학이 문학과 다름없는 예술적 위대함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과학의 이미지는 일종의 실용주의적 기술 같은 느낌인데, 생명의 탄생과 같은 진리를 찾는 열망은 반드시 실용적 이익이 없다 할지라도 예술처럼 그 자체로서 훌륭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과학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 세상이 만들어진 이치를 알아내는 탐험의 과정인 것 같다.

현실, 그 가슴뛰는 마법이라는 책 제목처럼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예술처럼 인간의 감정을 고양시키고 궁극의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은 가치관이나 신념, 민족이나 종교 등에 의해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이므로 과학이 종교를 대신한 도덕적 원칙이 될 가능성에 대한 시사도 신선했다.

도덕적 진보는 종교가 아닌 현실 그 자체를 연구하는 과학을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인권의 진전, 상호협력주의, 평등의식, 생명존중 등이 과연 종교를 통해 이룬 것인가?

세속적인 국가일수록 양성평등과 개인의 자유, 복지 등에 훨씬 더 앞서 나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술의 탄생 - 끔찍했던 외과 수술을 뒤바꾼 의사 조지프 리스터
린지 피츠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은 흥미롭지만 외국에서 번역된 이런 책을 읽을 때는 약간의 긴장을 하게 된다.

일단 유명한 역사적 사건들이 아니라서 잘 모르는 특별한 케이스들이 많아 보통은 지루해지기 때문이다.

지루한 일화나 연대기 나열이면 어쩌나 싶고 아무래도 번역서이다 보니 가독성 면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수술의 탄생이라니, 도저히 지나칠 수 없어 빌린 책인데 읽은 소감, 아 정말 세상에는 왜 이렇게 재밌는 책이 많을까!

왜 책을 읽는가에 대한 대답은 120% 재밌기 때문이다.

너무너무 재밌어서 읽지 않을 수 없다.

독서만큼 돈도 안 들면서 무궁무진하게 즐거움을 넓혀갈 수 있는 취미가 또 있을까 싶다.

유튜브에 뜨는 동영상들도 중독을 걱정할 만큼 자극적이고 재밌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때의 충만감과 즐거움에는 감히 미치질 못한다.

활자의 시대가 가고 영상의 세상이 온다고 하지만 여전히 책은 영상물에 비하면 훨씬 깊이있고 강렬한 지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책의 주제는 그냥 의학의 역사가 아니라 "외과", 즉 수술하는 과의 역사이다.

의학을 크게 보면 약 처방하는 내과와 직접 병변을 절단하는 외과로 나눌 수 있는데 당연히 일반인의 눈에는 외과가 훨씬 극적이고 현대의학의 성과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선호한다.

당장 의학드라마를 봐도 내과 의사가 주인공인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의 잘생긴 선남선녀들이 수술복을 입고 메스를 들고 환자의 병변과 사투를 벌인다.

처음에는 이 외과의가 일종의 기예를 뽐내는 장인 수준이었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인 것이, 마취제도 아직 발명되지 못하고 절단 후 감염 관리도 안 돼서 신체를 잘랐을 때 보다 회복 과정에서 패혈증으로 죽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왜 나이팅게일이 병동과 환자 관리를 수치화 하여 간호의 필요성을 역설했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심지어 신체를 절단하는 외과 수술은 마치 공개 처형을 보듯 일반인들에게 관람의 대상이었다.

당장 렘브란트 그림만 봐도 툴프 박사의 해부학 실습 때 여러 사람이 모여 구경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점에서 동양과는 매우 다른 문화임이 확실하다.

신체 훼손을 금지하는 동양과 직접적으로 살아있는 환자에게 칼을 대는 서양은 본질적으로 아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다.

당연히 사체를 해부하고 직접 환자의 병변을 절단하는 의료 문화 속에서 외과는 발전할 수 있었다.

물론 감염에 대한 기본 개념이 없고 심지어 항생제도 만들어지기 전이라 수술받는 환자들의 예후는 처참했다.

끔찍한 사례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런 희생 속에서 오늘날의 의학 발전이 가능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역사의 발전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시대배경이 1840년대부터인데 겨우 이 정도의 의학수준이었다면 조선 말기에 한반도로 건너온 선교사들의 의료 수준도 높지는 않았을 듯하다.

아니면 그 사이에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했을까?

아편전쟁 후 청나라에 쳐들어간 서양인들은 공개처형을 시행하는 중국 문화의 야만성에 기겁을 했다는데, 영국에서도 공개처형은 판결받는 즉시 법원 바로 옆에서 거행되었다.

왜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내지는 게 끔찍한 형벌이었는지 실감이 안 됐는데 책을 보니 확실히 이해가 된다.

배에 실려 가는 과정이 너무 끔찍해 1/3이 사망했고 20여 년의 긴 형기를 마친 후에도 영국으로 돌아가길 거부할 정도로 항해가 험난했다고 한다.

세상은 적어도 인권과 생산력 면에서는 진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