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 마카롱 에디션
이디스 워튼 지음, 김애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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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랜드 아처는 명망높은 아처 가문의 상속자로서 뉴욕 사교계의 촉망받는 젊은이다. 소설은 그가 어슬렁어슬렁, 사교계의 관습에 따라 다소 늦장을 부린 후 오페라 무대로 향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의 약혼녀(가 될) 메이 웰랜드가 자리한 관람석에 운명의 그녀- 엘렌 올렌스카 부인이 나타나자, 오페라를 보러 왔지만 실은 다른 이들의 동정 살피기에 바쁜 사교계 인사들이 모두 술렁인다. 작가는 이 첫 장면에서 1870년, 뉴욕 사교계의 분위기를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올렌스카 백작과 결혼해 프랑스에서 엄청난 명성과 부를 누리다가 남편을 떠나 비서와 도주했다는 소문과 함께 등장한 엘렌, 그녀 주위로 폭풍이 몰아치리라는 예감이 들면서 독자의 흥미를 끈다. 


뉴랜드 아처는 기존의 관습에 의문을 던지며 엘렌을 옹호하는 한편, 약혼녀 메이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다. 작가는 뉴랜드가 읽는 책들(진보적인 과학서적 등)을 슬쩍 보여주며 그가 틀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의 그런 성향을 폭발시켜 실제 삶에 적용하게 만든, 당연시 여기던 것들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 계기는 엘렌이라는 존재다. 엘렌을 향한 욕망은 그 실현을 가로막는 온갖 사교계 관습과 메이라는 인물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마치 눈으로 만들어진 형상 같은 그녀의 순수는, 이를 부수는 지배자의 쾌락을 맛보기 위한, 아처가 원하고 소유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처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었다.

이건 좀 상투적인 생각이었다. 결혼식을 앞둔 젊은 남자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에는 양심의 가책이나 자기 비하가 따르게 마련이나, 사실 뉴랜드 아처에게는 그러한 느낌들조차 없었다. 그는 (마치 새커리의 상류사회 영웅들이 종종 그런 식이어서 아처를 화나게 하듯이) 그녀가 주고자 하는 흠결 없는 책의 한 장에 대한 교환물로, 그만큼 순수하고 하얀 페이지를 건네줄 수 없다고 해서 한탄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메이처럼 자라왔다면, 숲 속의 아이들처럼 인생에서 쉽게 잘 속아 넘어가는 바보들로 살 거라는 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왜 신부에게 자신이 경험해 온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는지 아무리 고심해 보아도, (그가 가졌던 일시적 기쁨과 남성적인 허영에 대한 열정 같은) 정당한 이유를 생각해 낼 수 없었다.   - 59쪽


메이의 순수를 높이 여기고 은방울꽃을 선물하던 뉴랜드의 입장 전환. 어쩌면 엘렌에게 다가가기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무의식적 노력의 일환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입장을 다진 후, 그는 점점 엘렌에게 다가간다. 그는 (비록 명문가 자제의 의무치레였을지라도) 법률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엘렌의 사촌 메이의 약혼자였기 때문에, 집안의 명예가 달린 엘렌의 향후 처신과 관련하여 조언이나 설득을 부탁받으며 자꾸 엮인다. 엘렌의 태도는 미묘하다.그러나 결국 뉴랜드는 마음을 고백하고, 엘렌의 마음도 확인하게 되는데, 그 순간 도착한 메이의 전보. "결혼식을 앞당기게 되었어!" 두둥~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일일드라마 뺨치는 전개로 끝난 1부에 이어, 2부에서는 결혼식이 열린다. 뉴랜드는 거의 영혼이 반은 나가있는 상태로 결혼식에 임한다.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전형적이고 답답한 결혼생활이 이어지던 와중, 그는 몇번의 엇갈림 끝에 엘렌과 재회하게 된다. 뉴랜드는 엘렌에게 도망가자고 구애하고, 엘렌은 거절하면서도 흔들린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리라 여겼던 메이는 사실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사교계에는 뉴랜드와 엘렌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이미 파다했던 것. 메이는 엘렌에게 임신을 했다는 거짓말을 하여 엘렌을 떠나게 만들고, 남편에게 돌아가기를 거부한 엘렌을 불편하게 여기던 사교계 사람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녀에게 환송파티를 열어준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끝났다. 그리고 몇십년뒤, 메이가 먼저 사망한 후 첫째 아들과 함께 엘렌이 살고 있는 파리에 방문하게 된 뉴랜드는 함께 엘렌을 만나자는 아들의 요청을 거절한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마음속에 간직한 애틋한 연정.. 

그런 이야기로만 이 책을 읽을 수 없었던 것은, 메이 웰랜드라는 인물 때문이었다. 

뉴랜드가 화자로서 내세워진 이 소설 속에서 메이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은방울꽃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처녀 메이는 엘렌의 강렬한 매력의 그림자에 가려진다. 뉴랜드는 처녀의 순수성을 잘 지키다가 남편에게 넘겨주는 관습에 의문을 표하고, 여성에게도 그가 누린 만큼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아무리 메이 웰랜드에게 눈을 뜨라고 해도, 그녀가 단지 멍하니 텅 빈 곳을 본다면 어쩔 것인가?"(100쪽) 한탄한다. 그가 메이의 눈을 뜨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가문과 단단하게 엮인 그녀가 가문의 관습에서 벗어나기란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메이 웰랜드,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정의 천사'로서 밝은 모습을 유지한다. 그 속이 얼마나 썩어 들어갔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뉴랜드는 메이가 죽기 전 아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나와 결혼하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했다'고 말한 사실을 뒤늦게 전해듣고서야 자기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연민한 사람이 메이였음을 꺠닫는다. 뉴랜드가 가장 원하던 것을 포기한 결과 좋은 환경에서 클 수 있었던 아들과 딸. 뉴랜드가 늘 답답하게 여겼던 결혼생활이 포기한 연정보다 가치없는 것일까? 


제목을 <순수의 시대>라고 지은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다. 

우선은 위선과 허위, 허영으로 가득한 사교계 속에서 가장된 순수, 즉 메이 웰랜드가 표상하는 순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뉴랜드와 메이의 아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세대, 즉 원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는 시대와 달리, 원하는 걸 가질 수 없는 제약 속에서 오히려 순수하게 보존되는 무언가가 있었던 시대, 바로 뉴랜드와 메이와 엘렌의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도 느껴지는 듯하다. 작가 자신이 뉴욕 명문가에서 태어나 유럽에서도 오랫동안 살았고, <순수의 시대>는 1862년생인 이디스 워튼이 1920년에 발표했다고 하니 그 자신이 느낀 뉴욕과 유럽, 1870년과 1920년 무렵의 세대 변화를 잘 담은 소설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 뉴랜드를 보고 있으면 차암 팔자 조오타.. 싶어지긴 하는데, 그럼에도 그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며 읽어나가게 되는 것은 작가의 섬세한 필력 덕인 것 같다.


이디스 워튼을 더 읽고 싶다. 앗, 집에 <기쁨의 집>이 있었지? 하고 찾아보니 2권 밖에 없다.. 잉?

검색해보니 따로따로 사긴 했지만 1,2권 모두 샀는데.. 판 내역도 없는데.. 

본가에 있나 싶어 엄마에게 물어봤지만 없다고 한다. 

오, 그렇다면 이참에 표지갈이?? 하고 찾아봤으나 <기쁨의 집>은 내가 산 펭귄클래식코리아 밖에 안 나와있다..잉??

<순수의 시대>만큼 히트친 작품이 아니라 그런가보다. 할 수 없다. 1권을 다시 살 수 밖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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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4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4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4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4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난티나무 2023-05-04 14: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연정과 맺어졌대도 ‘결혼생활’은 엇비슷해졌으리라는 데에 제… 손가락은 소중하니 ㅋㅋㅋ 제 깎은 손톱을 걸겠어요!!! ㅋㅋㅋ 이 무슨 소리 ㅋㅋㅋㅋ
일케 헛소리 써놓고 생각…하다가 골치가 아파와서, 뉴랜드 바보똥멍충이!!!!!!!!!!! (혹시 메이가 스트레스로 죽은 건 아닐까욥?)

독서괭 2023-05-04 15:38   좋아요 2 | URL
아악 ㅋㅋㅋㅋ 엘렌과 맺어졌어도 결혼생활은 엇비슷 ㅋㅋㅋㅋ 완전 정곡을 찌르신 듯 합니다 ㅋㅋㅋ
난티나무님, 저는 메이가 스트레스로 죽었다는 데에 제 깎은 손톱을 걸어보겠습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3-05-04 17:08   좋아요 2 | URL
수하 님의 깎은 손톱이 여기서 나왔군요!!

건수하 2023-05-04 22:16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 난티님이 원조~

다락방 2023-05-04 15: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 기쁨의 집은 민음사 판으로는 <환락의 집> 으로 있으니, 표지갈이 하셔도 된다고 봅니다. ㅎㅎ

2. <이선 프롬>은 한 권짜리인데 강추합니다.

저는 <순수의 시대>에서 아처와 엘렌한테 이입했던 것 같아요. 저는 언제나 사랑 이야기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쪽이거든요. 그런데 오늘 독서괭 님의 리뷰 읽고나니, 아 이번에는 메이의 입장에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어쩜 그렇게 잔인했을까요? 가슴속에 다른 여자 품고 사는 남자와 아이까지 낳고 살아가는 그 마음은 어땠을지. 흑 ㅠㅠ

독서괭 2023-05-04 15:43   좋아요 2 | URL
1. 제목이 달랐다니!!! 생각도 못했어요. 꿀정보 감사합니다~ 신나는 표지갈이~~ ㅋㅋ
2. 이선프롬, 여름 이런 작품들 읽고 싶은데 새책을 사긴 좀 그래서 ㅠㅠ

저도 첨엔 아처와 엘렌한테 이입했어요~ 다 읽고 나서도 그 아련한 감성은 좋더라고요. 하지만 아무래도 저는 결혼한 여자라 그런지 ㅋㅋ 곰곰 되씹어볼수록 메이에게 마음이 가더라고요. 가슴속에 다른 여자 품은 거 뻔히 알면서 모른척 가정을 유지하는 그 마음 ㅠㅠ 전 남성작가가 이 이야기를 썼다면 메이 캐릭터가 평면적이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디스 워튼이 썼기에.. 그 이면이 보였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잠자냥 2023-05-04 16:16   좋아요 2 | URL
저도 <이선 프롬> 강추....
저는 민음 <환락의 집>으로 읽었어요. 여기도 대환장파티 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5-04 16:41   좋아요 2 | URL
이디스 워튼이 쓰지 않았다면 밋밋했을 거라는데 저도 깎은 손톱을 걸겠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읽을 때 (자세히 묘사하려 노력할 수록) 여주에 잘 감정 이입이 안 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다락방 2023-05-04 17:08   좋아요 3 | URL
수하 님의 깎은 손톱… 수하님은 개구쟁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5-04 21:06   좋아요 2 | URL
깎은 손톱 걸기.. 유행하나요?ㅋㅋㅋㅋ
이선 프롬 꼭 읽어야겠군요!

책읽는나무 2023-05-06 1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틀 전에 손톱을 깎은 잡니다.
손톱을 괜히 버렸?ㅋㅋㅋ
전 책은 안 읽고, 영화로 봤었거든요.
세 주인공이 모두 피해자이자 답답한 주인공들로 보여졌습니다만...엘렌과 메이 두 여성이 굉장히 속 깊고 현명한 여성들이었기에 자식들이 잘 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메이가 안됐더군요. 그런 남편을 말 없이 한평생 지켜보고 살았다는 건ㅜㅜ
전 영화 볼 때 엘렌 넘 얄밉다! 그러면서 봤어요. 아처는 왜 저래? 했구요ㅋㅋ
마지막 장면 엘렌을 만나지 않고 아들과 함께 돌아서는 장면은 좀 아련미가 있긴 했지만, 그 정도의 양심은 갖춰야지 않나? 뭐 그런....^^
저도 기혼자의 시선으로 흐름을 지켜 봤던 것 같네요^^;;;
그리고 책도 읽어봐야겠다! 하면서 손을 놓아 버렸네요^^
리뷰 굉장하네요. 역시 👍

독서괭 2023-05-08 12:49   좋아요 1 | URL
오 책나무님, ˝그 정도의 양심은 갖춰야지 않나?˝ ㅋㅋㅋㅋ 기혼자의 시선 ㅋㅋㅋ
우리 기혼자들에게 연애세포는 사라진 걸까요?^^; 좀 슬프구만요..
전 영화 못 봤는데 궁금해요. 어떻게 표현했을지..
아처를 화자로 내세우면서도 두 여성의 심리를 따라갈 수 있도록 쓴 것 같아서 좀 신기하더라구요. 이디스 워튼은 <이선 프롬>도 남성 화자 작품이던데, 많이들 강추하셔서 매우 궁금합니다.
깎은 손톱은 추후 어디에 걸 일 있을지 모르니 앞으로는 잘 모아두시구요 ㅋㅋㅋ
칭찬 감사합니당^^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 - 세월호 생존학생, 청년이 되어 쓰는 다짐
유가영 지음 / 다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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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얼마 전, 한동안 꽤 친하게 지냈던 지인이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몇년 동안 별로 연락을 못하고 지냈는데, 늘 활달하고 씩씩하고 멋있던 사람이 아파서 요양중이라는 이야기를 갑자기 듣게 된 것이다. 크게 충격을 받고, 남은 오후 업무시간 동안 화장실을 드나들며 몰래 울었다.

그러고는 나도 며칠 심한 감기를 앓았다. 후두염이 유행이라더니 목이 붓고 아파서 잠도 푹 못자고, 애들에게 옮길까봐 노심초사(애들은 이미 감기에 걸려 있었지만..). 비몽사몽한 시간을 보내며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한 사람이 겪는 고통을 다른 사람이 100%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똑같은 일을 동시에 겪어도 실제 감각하는 고통의 정도는 서로 다르다. 설령 객관적인 고통의 강도가 완벽하게 동일하다 하더라도(그런 객관성이 존재할 수 있는지부터 의문이지만) 이를 겪어내는 사람의 육체적.정신적,사회적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체감도는 달라질 수 있다. 재벌에게도 병마는 가리지 않고 찾아간다. 그러나 최고의 의료 환경에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병을 앓는 사람이 체감하는 고통은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사람이 체감하는 고통과 크게 차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타인이 겪는 고통을 지켜볼 때, 우리 속에서는 이런 것들이 튀어나온다.


1.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연민

2.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

3.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


이 책,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를 쓴 유가영 작가는 가장 큰 상처를 준 말로, 참사를 겪은 단원고 학생들에게 대학 입학 특례제도를 마련해준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자 달린 댓글, 

"이럴 줄 알았으면 세월호 탈걸 ㅋㅋㅋ" 을 꼽았다. (지금 책이 딴데 있어서 워딩이 정확치 않음) 

이 댓글을 쓴 자에게는 1번 연민이 없을 뿐만 아니라 2번은 휘발되었고(참사 무렵에는 있었을 것이다) 3번은 왜곡되었다.

참사의 순간,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겪어야만 했던 공포나 같은 학년 친구들의 사망 소식이 가져다주었을 충격, 살아남은 자로서 느껴야만 하는 죄책감과 후회.. 그런 것들을 상상할 능력은 없으면서, "비극을 겪은 나"라는 자기연민을 바탕에 깔고 공부 안해도 대학에 쉽게 갈 수 있는 자신을 상상할 뿐. 그러고 나면 희박했던 2번 안도의 감정은 휘발되고 그것이 혜택을 못받는 억울함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매우 유아적인 수준의 댓글을 단 누군가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 생존자와 유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유가영은 책의 시작 부분에서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도 "놀러 갔다 죽은 건데"라는 등의 말로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모습에 많이 슬펐다고 썼다. 


개인적 고통이 사회적 고통으로 치환될 때가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사회적 고통은 사회적으로 유발된 고통이다. 개인적 고통은 대체로 평등해서, 누구도 고통이 자신을 피해가리라고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적 고통은 특정한 집단이 가진 조건에 의해 발생하므로 고르게 분배되지 않는다. 위생 문제로 발생하는 질병이라든지, 인종,성별,성적지향 등을 이유로 겪는 차별 등이 주는 고통이 예가 되겠다. 이 경우 2번의 안도가 해당 외 집단의 구성원에게는 작동하지 않는다. 내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3번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물론 사회적 고통으로 인식되어야 사회의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개인적 고통이 소거되어서는 안 된다.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와 같이, 책임 소재가 문제되는 순간 정치권에서는 이를 소수 집단에 한정된 고통으로 몰고 가려 한다. 그리고 사건과 정치를 엮는다. 그렇게 사회적 고통으로 만듦으로써 개인적 고통들은 축소하고 희석시킨다. 이를 지켜보는 대중들을 지치게 만들어 1번 연민조차 엷어지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고통을 호소하는 희생자들을 향하는 시선에 남는 건 "그만 좀 해"가 되는 게 아닐까. 결과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자들만 득을 보는 꼴이다. 


그러므로 연민과 안도와 상상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고통스러울 때 사람은 고독해진다. 하지만 사람은 다른 사람 없이 살 수 없음을 깨우쳐주는 것 또한 고통이다. 나의 고통과 당신의 고통은 매우 다르지만, 고통스러울 때 어떤 마음과 손길이 필요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당신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100%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을 그 자체로 수용하고자 하는 마음.   

"타인을 이해하려고 얘쓸 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 中 '진주의 결말' 88쪽) 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가능하다"고 답하고 싶다. 불가능하다고 답하는 많은 이들의 내심에는, "이해='완전한'이해"라는 등식이 깔려있지 않을까? 완전이나 완벽이 세상에 존재하기란 거의 완전이나 완벽하게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완전이나 완벽을 상정하곤 한다. 10%만 이해하면 어떤가. 아주 많이 노력하면 50%를 넘어, 70이나 80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는 일이 연민과 안도와 상상력을 보존 내지 강화시켜 준다면. 어차피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해, 라는 말로 쉽게 포기하기보다는, '진주의 결말' 속 진주와 같이 "달까지 걸어가는 것처럼" 희망을 걸어보는 편이 아름답지 않을까. 


지난 시간을 담담하게 풀어내기까지 유가영 작가가 감당했을 고통을 100% 가늠하기란 어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일은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거기에 닿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될 것이다. 책을 써 주어 고맙다. 살아있어 주어 고맙다. 타인의 고통을 향해 눈돌리는 당신의 노력에 아주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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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8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18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3-04-18 22:1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괭님은 요즘 썼다하면 이달의 당선작이네요!

독서괭 2023-04-19 23:17   좋아요 4 | URL
잠자냥님 이달의당선작 선정위원이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3-05-10 15:10   좋아요 1 | URL
헐 나 맞혔어요! ㅋㅋㅋㅋㅋㅋㅋ 성지순례 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5-10 15:52   좋아요 0 | URL
ㅍㅎㅎ 잠자냥님 덕에 된 게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잠자냥님 글들은 당선감이 많아서 맞추기 어려워요 ㅋㅋ

잠자냥 2023-05-10 17:30   좋아요 0 | URL
제 덕이라니요. 괭님의 글이 좋아서지요. ㅎㅎ

2023-04-18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19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3-04-19 09: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통은 개인적인게 맞는거 같아요 ㅜㅜ
그래서 타인의 고통을 함부러 낮게 가하면 안될거 같습니다~~ 지인의 소식에 많이 힘드셨겠네요 ㅜㅜ

독서괭 2023-04-19 23:21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 위로 감사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지요…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역시 소설을 읽어야 하는 듯 합니다!!(아 소설 읽고프다…)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NOON 세트 - 전10권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외 지음, 황현산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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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 토요일에 이어 <노인과 바다>를 마저 읽었다. 헤밍웨이야말로 초월을 끝임없이 지향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냥과 낚시와 전쟁과 위험을 쫓아다닌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로 갈릴 수 있겠지만, 직접 체험보다는 간접 체험에 의해 모든 걸 쉽게 경험하는(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그 불꽃같은 삶에 경외감이 느껴진다. 그의 작품을 좀더 읽어야겠다.

너무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하는구나, 하고 노인은 생각 했다. 차라리 이게 꿈이었더라면. 저 고기를 낚지 않고 차 라리 신문지를 깐 침대 위에 그냥 누워 있었더라면.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그 가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저 말린을 죽인 것이 정말 미안하군. 그는 생각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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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4-01 10: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앗 그런데 벌써 4월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ㅠㅠ 3월에 글 하나 못 쓰고 제2의성도 못 끝내고(지금 매춘부와 고급창녀 읽는중) 이웃임들 글도 거의 못 읽고 흑흑 ㅠㅠㅠㅠ

단발머리 2023-04-01 11:09   좋아요 4 | URL
저도 오늘 4월이라 달력 한 장 뜯으며 눈물 훔쳤어요 ㅠㅠ 이리 와요, 독서괭님! 흑 ㅠㅠㅠ

독서괭 2023-04-01 11:30   좋아요 2 | URL
단발님 어흥흥😭😭😭

독서괭 2023-04-01 2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페넬로페님 댓글 어디 갔습니까??? 설마 제가 실수로 지운 건 아니죠??😱😱😱

책읽는나무 2023-04-03 08:4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왜 지웠어요?
만우절이라서????ㅋㅋㅋ

독서괭 2023-04-03 20:47   좋아요 1 | URL
제가 지운 걸까요??ㅠㅜ 읽긴 읽었는데 대댓을 못 달고 있던 사이에;;
 
나, 버지니아 울프 -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의 이야기가 되기까지
수사네 쿠렌달 지음, 이상희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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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복잡한 세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도록 압축해준 책. 울프 책의 구절들을 중간중간 삽입해주어 좋았다. 하지만 압축되지 않은 긴 글로 읽고싶은 마음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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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3-24 21: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저도 오늘 드디어 완독했습니다.ㅋㅋㅋ

독서괭 2023-03-25 08:30   좋아요 1 | URL
어제까지 백자평 마감이라 해서 급하게 썼네여 ㅋㅋㅋ
 
전국축제자랑 - 이상한데 진심인 K-축제 탐험기
김혼비.박태하 지음 / 민음사 / 2021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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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칠 때마다 한꼭지씩 아껴 읽었다. 처음에는 훗훗 하면서 한번씩 웃다가, 음성품바축제에 이르러서는 그장 전체에 배꼽을 잡았고, 완주와일드푸드축제에서는 김혼비의 박력에 반했으며, 양양연어축제에서 숙연해졌다가, 마지막 산청곶감축제를 읽으며, 아-젠장, 역시 난 김혼비가 너무 좋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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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02-09 15: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두 김혼비 좋아요. 한 권 밖에 안 읽었지만요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2-09 15:31   좋아요 3 | URL
뭐 읽으셨나요? 저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아무튼, 술>, <다정소감>, 그리고 이 책을 읽었습니다. 다 재밌어요!

단발머리 2023-02-09 15:32   좋아요 2 | URL
저는 다정소감 읽었어요 ㅋㅋㅋㅋ 김혼비 화이팅!! ㅋㅋㅋㅋ

독서괭 2023-02-09 15:59   좋아요 1 | URL
다정소감이 제일.. 덜 웃깁니다!! ㅋㅋ

건수하 2023-02-09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해요 김혼비!

전 이거 빼고 세 권 읽었는데 아무튼 술이
제일 좋았어요 ^^

독서괭 2023-02-09 16:00   좋아요 2 | URL
오 수하님도 김혼비 작가 개그코드가 맞으시는군요!
이렇게 네권이 단행본 전부니까, 저는 다 읽은 찐팬 ㅋㅋ
수하님도 세권 읽으셨으니, 이 책도 읽어보세요^^

미미 2023-02-09 16: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호 저도 김혼비의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괭님이 반하신 김혼비의 박력 어떨지 궁금해요ㅋㅋㅋㅋ

독서괭 2023-02-13 12:49   좋아요 0 | URL
와일드푸드축제에서의 박력이라면, 뭔가 예상되지 않으십니까? ㅋㅋㅋ 미미님도 김혼비에 입문해보시죠^^

공쟝쟝 2023-02-09 1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서괭 입에서 젠장이라는 형용사(ㅋㅋㅋ) 나오다니요!!! 저는 축구 넘 좋았는데… 아무튼 술 읽고 실망했어요…너무 착한 사람이더라고요… (내가 술마시고 한 개짓을 생각해보면….) 작가님 너무 착해서 맘에서 멀어진 거지, 특별히 재밌는 에세이란 것엔 동의합니다ㅋㅋㅋ 축제자랑 킵킵!

독서괭 2023-02-13 12:51   좋아요 1 | URL
음 제가 젠장이라는 말도 안 쓰는 얌전괭으로 이미지를 잘 관리하고 있었군요 ㅋㅋㅋ 아무튼 술에 실망하시다니 무슨 일? 했는데 ‘너무 착해서‘라니 ㅋㅋㅋㅋㅋ 쟝쟝님은 술 취해 많은 일을 하셨나봅니다 ㅋㅋㅋ 김혼비 개그가 취향에 맞으시다면 축제자랑도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singri 2023-02-09 2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상한데 진심 딱이네요ㅋ웃길꺼같습니다ㅋㅋ

독서괭 2023-02-13 12:52   좋아요 1 | URL
네 엄청 웃기고요, 지역축제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게 하는 글들입니다. 싱그리님도 함 읽어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