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브앤테이크 정신이 매우 계산적이고 비합리적인 단어로 쓰이는 오늘날이긴 하지만, 나는 기브앤테이크정신이 좀 투철한 편이다. 그러니까 내가 기브한 것에 대해서는 꼭 테이크를 하지 않아도 잘 까먹는데, 성격이 요상맞아서 내가 받은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좀 갚는 편이다. (선물이나 밥을 얻어먹는 것도 그렇긴 하지만, 복수도 잘한다 ㅋㅋ) 커피를 한잔 얻어마시면 그날 밥이든 뭐든 내가 다시 사서 어떻게든 마음의 부채감을 없애려 하는 편인데, 2500원짜리 오늘의 커피 한잔 얻어마시고 5000원짜리 밥을 사고, 뭐 이런 식이다. -_- 이러니 은행 잔고에 바람잘 날 없고, 남들은 재테크 종자돈으로 1억을 모아 돈굴리기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데, 나에게는 님은 먼 곳에,를 불러야 할 판이다.
그럼에도 꼭 일방적으로 주게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꾸만 일방적으로 받게만 되는 사람이 있는데 G언니가 후자에 속한다. 언니는 가오 '정'(언니의 성)이라 스스로를 칭하는데 동생들 앞에서 하튼 맨날 가오만 잡는다. 흥! 가오쟁이. "혼난다. 너 다시 언니 안볼려면 돈내라", 이렇게 말하니 나는 미안해서 다음에 언니를 못만날 판이다. ㅠㅠ 한번은 좀 많이 나온 밥값을 또 언니가 다 내서, 같이 있던 M 언니와 돈을 합해 몰래 3-4만원을 가방에 넣었던 적도 있다. M언니도 그렇다. 내가 돈을 내려면 계산서를 들고 날라서 카드를 내밀고 세이프 한 후 카드 리더기에 카드를 긁을 때까지 언니가 못와야 한다. 이건 또 무슨 웃지 못할 상황인건지. (그래도 새해 첫날 만나서 내가 돈을 내는 데 성공했다 -_-v)
어제는 한달만에 G언니가 일하는 아름다운 가게에 가서 일을 도왔다. 가게에 갈 때도 우리의 가오 '정' 언니는 '절대 오지 마라, 너 가게 오려면 나 볼 생각 하지 마라' 또 이런 식이시다. -_- 멀고 힘든데 뭐하러 오냐고, 고급인력들이 이런 데서 고생하면 안된다며, 그치만 우리 중 뭘로 보나 제일 고급인력은 G언니다. 게다가 특히 나는 야근하는 시간까지 합해 시급으로 따지면 무슨 저임금 노동자 수준인 걸. 하지만 무서운 G언니 덕분에 우리는 그냥 몰래 가서 헤헤헤헤 거리고 서프라이즈! 하는 표정으로 뻔뻔하게 가서 일을 한다.
그런데 어제는 자원봉사 하시는 분들이 못와 아침부터 언니가 좀 동동거렸나보다. 우리는 2층에 있던 책이 아른아른거려서 간 거였는데, 1층에도 이래저래 할 일들이 좀 많았다. 아름다운 가게는 점포 하나당 매니저가 한명이라 자원봉사자가 없으면 매니저는 꿈쩍도 못한다. 덕분에 전날 모사에서 기증한 좋은 속옷들이, 하급 품목들처럼 엉망이 돼 있었다. 진열이라는 게 계속 가서 정리해주지 않으면 엉망이 되는 건 정말 순식간이라는 걸 아름다운 가게에서 뼈저리게 느낀다. (특히 나의 마술피리 그림책들 ㅠㅠ) 창고에서 바구니를 찾아다가 칸막이를 만들어 속옷을 사이즈별로 나누고 개서 정리하니 제법 '있어보인다' 우리는 가오정과 아이들이기 때문에 이런 거 무지 중요하다 으흣! 뿌듯해 뿌듯해 (그날 상하 세트 6천원짜리 속옷을 몇십만원 어치를 팔았다는 후문이다 ^^v)
오후에는 자원봉사자 분이 꽤 있어서 그날 새로 오신 분께 속옷 쪽을 맡기고 2층으로 올라갔다. 오늘의 목표인 책 정리, 지난 번에는 애들 도서관 쪽에 있는 책들을 정리했고, 이번에는 감히 손을 못대던 판매책 쪽을 정리했다. 언니가 처음부터 매장을 맡았다면 책 진열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텐데, 이미 언니가 왔을 때는 손을 쓸 수가 없던 상태였고, 그래서 우리가 책정리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출동!!!! 을 한 것이지. 양면으로 돼 있는 대형 책장이 중앙에 3개가 있는데 이 책장에는 정말 책이 여기저기 섞여 있다. 그나마 소설과 비소설 정도는 '나름' 구분이 돼 있는데 역시나 완전하지는 않다. 한달에 언니가 있는 매장에서만 나가는 헌책이 1500권 정도라고 하니, 틀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냥 마구잡이로 꽂을 수밖에 없던 상태.
추진력있는 M언니, 그리고 뒷수습의 대가인 참모 웬디. 둘이서 책장을 거의 뒤집었다. ㅋㅋㅋ 소설은 일단 한 곳으로 모으고, 비문학 중 정치/역사/인문은 한 곳으로 모으고, 실용서 한곳으로 모으고, 실용서 중 건강 서적 또 한곳으로 모으고, 경제/경영 서적 따로 모으고, 미디어 이론서 모으고, IT 관련 책들 모으고, 육아/여성 한곳으로 모으고, 에세이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기독교/천주교/불교 서적들을 한 곳에 모아놨더니, 오오 제법 그림이 괜찮은 것이지. 곳곳에 섞여 있을 때는 빛나지 않던 책들이 모이니 가치 있어 보인다. 소설 사이에 끼워져 있던 '우리아이 잘 키우기' 책은 눈에 띄지 않지만, 비슷한 책과 함께 있는 이 책은 꽤 빛이 나는 것이다. 일단 문학은 한 곳으로 넣어놨는데, 그러다 보니 또 욕심이 생겨 일단 시집만 빼서 한 칸에 모아놔봤다. 세상에, 여기저기 숨어 있었을 땐 전혀 정체를 몰랐던 백석의 시집도 거기 있었고, 브레히트의 시집도 구석에 숨어 있다가 당당히 나왔다. 시와 희곡을 한 칸에 모아 놓고, 아래 쪽에는 또 곳곳에 흩어져 있던 문학 계간지들을 찾아 모아봤다. 살청님이 모으셨다던 세계의 문학 58호도 있었다. 그거 정리하면서 살청님 생각 나더라. 정말 오래된 책이고,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책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찾던 책일 수도 있는 것들이 모여 있으니 또 어찌나 뿌듯하던지. 나는야 뿌듯 대마왕. 책정리는 내책이나 남의 책이나 하여튼 즐거운 일이란 말이지.
하지만 문학 칸은 아직 성에 차지 않는다. 일단 시간이 모자라서 소설을 모아만 놨지. 국내작가, 외국작가, 이런 것들이 하나도 분류가 안돼있거든. 그러니 자꾸만 할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아, 얘는 쟤랑 같이 있어야 하는데, 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함께 꽂아주지 못하는 슬픔. 다음번에는 소설들좀 어떻게 정리해보자, 라고 다짐하며 가게를 나왔다.
여기까지 일을 하고, 아름다운 커피를 사 가려는데, 언니 또 돈을 안받으시는 사건이다. 돈을 꺼내자마자 나오는 혼난다! 흑흑 나는 눈물을 닦으며 또 커피 두개를 공짜로 받아 넣었다. 언니 다음에도 돈 안받으면 저 여기서 안사먹고 인터넷으로 주문할 거에요! 라는, 겁도 안날 협박을 했다 -_- 잠시 후 (양조위를 닮은) 언니의 남편이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가게로 왔고, 우리는 반찬으로 '간장 게장이 나오는' 한정식 집에서 굴밥 정식을 먹었다. 밥값이 꽤 나왔으나 역시 언니가 내고- (이제는 지갑을 열려고 하는 것조차도 민망한 지경) 커피값은 우리가 내겠다며 삼청동으로 갔는데, 커피 값이 꽤 비쌌다. 우연히 들어간 커피집이 자리만 좋고, 가격은 비싸면서도 커피 맛이 별로였던 사건. 지난 번에 갔던 데를 가는 편이 나을 뻔했다. 아름다운 커피보다 맛없던 커피가 9000원, 두둥! 쇼핑백에 있던 아름다운 커피가 아른 아른 거린다. 게다가 부가세도 붙었나? 넷이 마시니 4만원 가량의 돈이다. 이번에는 정확히 계산서를 내가 사수하고 M언니와 서로 내겠다고 싸우다가 '그럼 같이 내요'라고 쫑알쫑알 협의하며 계산대로 가니 이미 카드를 내밀어 계산하고 있는 언니의 남편. 멍해진 우리는 저지도 못하고, 또 그대로 커피를 얻어마셨다.
세상에, 반나절 일하고, 점심 얻어먹고, 저녁 얻어먹고, 커피 얻어마시고, 이런 상황이 어디 있담. 이제 민망해서 2월에 언니의 가게에 다시 갈 일이 걱정이다 정말. 그래도 문학 책들 정리해야 되는데, 이를 어쩐다. 흐흐 그래도 간만에 언니들을 만나 매우 수다를 떨었더니, 하도 웃어서 배가 다 아팠다. 역시 난 노가다 체질임을 다시 한 번 느끼며- 언니에게 교보문고 앞에 가서 책정리 잘하는 애 하나 있다고 소문 좀 내 달라고 말하며. ㅋㅋㅋ
다시 가게에 찾아갈 때면 1500권의 책이 나가 있고, 또 그보다 많은 책들이 들어와 있겠지. 이렇게 책들이 순환해 다시 새주인을 찾아간다는 건 그러고 보면 참 기쁜 일이기도 하다. 언니가 '니들 개인전 열어줄테니 책좀 기증해라, 진짜를 내놓으시지'라고 말하는 데 딴청을 피우며 언니가 개인전을 열면 꼭 오겠어요- 라고 대꾸하며. (언니가 개인전을 하면 진짜 보물창고일텐데 ㅋㅋ) 언니는 차라리 돈을 가져가라- 우리는 차라리 노가다를 하겠소, 라고 말하며, 하튼 그런 걸 보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며, 우리는 또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