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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D대리와 E대리와 이야기를 하다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이야기가 나왔고, 재밌겠다며 눈을 반짝이는 E대리에게 나는 그 책을 빌려주기로 했다. 그리고 지난 주말, 너무너무 재밌어서 나에게 문자를 보내고 싶었다고 E대리는 이야기한다. 오늘 책을 빌려줘서 고맙다며 커피를 사주는 E대리를 홀랑 따라 내려가 커피를 들고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이야기를 한다.
실은 책 중간에 보면, 너의 소속이 너를 결정한다. 그러니 열심히 해서 좋은 데 가라, 뭐 이런 얘기가 있는 걸 보고, 이 책을 동생한테 읽혀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동생은 중3) 내가 집에서 막 키득키득거리면서 책을 보니까 동생도 궁금해하더라고요. 이제 고등학교도 가고 하니까, 열심히 공부하라고 이 책 보여주려고 했는데 끝까지 읽으니까 안되겠어요
ㅋㅋㅋ 내가 그 맘을 왜 모르겠는가. 나는 삼미정신으로 살겠다고 공언을 하고 다니지만, 나는 동생에게 절대 읽힐 수 없는 책 1순위가 이 책이다. 이 책은 재미도 있는데다가 설득력까지 있어, 안그래도 삼미정신으로 살고 있는 내 동생이 자신의 삶의 자세를 합리화, 강화, 유지할까 살짝 두렵다는 거. 그러니 내가 참 모순이지. 나는 삼미정신으로 인생을 즐기겠다며, 동생은 읽으면 안된다고 하는 건 또 뭐람. 이게 언니누나들의 심정인가? 실제로 이 책을 읽고 박민규에게 찾아와 본인이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며 공언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사람의 손을 꼭 붙잡고 박민규는 "제발 그러지 마세요"라고 이야기했단다. 이러니 동생에게 내가 이 책을 어떻게 읽히겠어. 하지만 실은 언젠가 내 손으로 동생에게 이 책을 건네는 날이 오게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날 내 동생은 아무래도, 뭐야, 이런 당연한 얘기를, 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얘는 정말, 삶이 너무 삼미슈퍼스타즈라니까.
그러고보니 우리의 독특한 폐인 Y양에게, 니 딸이 너 닮아서 너처럼 맨날 그렇게 일본 가수 동영상 보면서 일본 간다고 하면 어떡할래, 라고 물었더니 단호하게 한마디했다. "내딸은 컴퓨터 못하게 할 건데?" 하튼, 잘못된 사랑인지, 잘된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나도 내가 키우고 싶은 내자식의 모습으로, 내가 이뻐하고 싶은 내동생의 모습으로 안자라고 있으니. 적어도 내가 못하는 것들을 남들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할텐데 말이다.
그나저나 E대리와는 하루종일 삼미정신으로 헤죽헤죽거렸다. 주간업무회의 발표하러 가면서 "아 오늘 발표할 게 너무 많아요" 하는 E대리에게 "읽기 힘든 건 읽지 말고 발표하기 힘든 건 발표하지 마세요" 막 이러고- 주간업무회의 오퍼레이팅을 맡은 D대리에게도, 넘기기 힘들면 넘기지 마세요, 라고 크득크득거리며 다녔다. 흐흐. 삼미정신의 세계로 또 한명을 끌어들이다니. 기쁘다. 이 마인드라면 야양청스교 전도도 잘할 수 있을텐데. (아무래도 우리는 삼미교처럼 고정적인 텍스트가 아닌, 매일밤 댓글이라는 가변적 텍스트여서 그런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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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어제 내 책을 읽는 E대리를 보며 가슴이 쓰렸는데, 내가 책을 잘 빌려주는 편이기도 하거니와, 애지중지 모셔놓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언젠가 썼듯, 많은 사람이 내 책을 보면 내 책값이 더 효율적으로 쓰였다고 생각한다) 줄을 긋거나 밑줄을 치는 것도 크게 개의치 않는데, 싫어하는 것이 두가지쯤 있으니, 하드커버 겉껍데기가 책과 분리되어 가방 속에서 흐믈흐믈해져 아래가 다 해지고 찢어지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소프트커버 책 날개로 어디까지 읽었는지 표시해서 책날개 부분이 뭉툭해지는 것이다. 삼미슈퍼스타즈는 소프트커버 책이고, 어제 내 앞에서 E대리가, 바로바로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상상 A
어머어머 E대리님, 나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책날개가 지저분해지는 건 싫어요-
라고 이야기하며 차라리 책끝을 접어달라고 말한다.
아.... 쪼잔하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상상 B
E대리가 없는 틈을 타 조용히 책날개를 빼고 몰래 책갈피를 꼽아놓는다
아.....나중에 책을 열고 무서워하면 어쩌지? ㅜㅜ
상상 C
어? 어디까지 봤어요? 라고 말하며 슬며시 책을 가져갔다가
아아 여기까지 읽었구나, 라며 슬쩍 책날개를 뺀다
아.....부자연스러우면 어쩌지? ㅜㅜㅜㅜㅜㅜ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오늘 책을 받았다. 이런 소심한 영혼! 실은 팀에서 내가 좀 까칠한 이미지라 괜히 또 까칠하다는 소리들을까봐 ㅜㅜ 그냥 눈 질끈 감았다. 사인본만 아니었으면 그냥 가지라고 하고 새책 샀을거야 정말 ;; -_-
언젠가 다락방님을 만나서 얘기한 적이 있는데 다락방님은 책날개가 너덜너덜해질 수록 참 기분이 좋아진다던데, 나는 그 반대인 것을 알고 신기했다. 대신 다락방님은 책 귀퉁이 접는 건 용납할 수가 없다는데, 나는 또 그건 괜찮다. 책에 낙서를 하거나 삐뚤빼뚤 밑줄을 긋는 것도 오케이!
사람마다 민감한 부분도 다들 다르고, 관대한 부분도 다들 정말 많이 다르구나 싶다. 그치만 난 또 소심해서 말을 못하니, 빌려주기 전에 얘기해야겠다. 관대한 척 ^-^ 이렇게 얘기해야지
저는 책 그렇게 깔끔하게 보는 편이 아니어서요, 그냥 편하게 막 봐도 돼요~ 책날개로 읽은 데 어디까지인지 표시만 안하면 돼요~ 여기 책갈피 꽂아놨으니까 이걸로 표시하면 돼요 ^^
이렇게 말하면 좀 관대해 보이면서도 까칠함이 덜 티나지 않을까? 흐흐흣 나이들면서 느는 건 역시 잔머리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