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머무르지 않듯
어제는 지난 번 페이퍼에 쓴 적이 있었던(엮인글) 학교 동문 독서모임의 엠티가 있었다. 처음에는 팬션도 빌리고 거창하게 가려던 계획이었는데 점차 축소되어 결국은 H가 다니는 교회의 작은 방에서 모이게 됐다. 그래도 내 마음은 엠티였던지라 나름 씻을 거, 갈아입을 옷 다 챙겨갔는데, 각자의 사정으로 새벽에 해산을 하는 바람에 따로 챙겨간 쇼핑백은 열어보지도 못한 사건.
H는 돌봐주는 아이의 어머니가 얘를 데리고 여행을 함께 다녀오면, 비용은 본인이 다 대겠다고 하셔서 얼마 전 영국과 프랑스를 다녀왔는데 거기서 와인을 한 병 사왔다. 그래도 나름 공부좀 했다고 생각했는데 와인병을 보니 까막눈이 된 느낌. 나는 이 와인이 부르고뉴 와인이라는 것 밖에 모르겠어, 라며 포기. 얼마 후 늦게 도착한 I도 와인병을 유심히 보더니 '아아아, 부르고뉴 와인이라는 것 밖에 모르겠네' 흐흐흐 똑같다 똑같아, 그럼 어때 맛있으면 되지요 ^^ 살다살다보니 교회에서 음주를 다 해본다. ㅋㅋ 와인을 마시고 H가 와인과 함께 프랑스에서 사온 치즈도 맛본다. 으흑 좋아라! (I가 와인을 열다가 코르크를 망가뜨리는 바람에 살짝 끝맛이 떨떠름하긴 했지만.
밤새 주로 하던 이야기는 H가 현재 처한 문제와, 그에 대한 우리의 조언이었다. 우리 학교는 특성상 목사님 자녀들이 좀 많은 편인데, 어제 모임의 6명 중에서도 3명이나 부모님이 목사님이었다. H의 아버지도 목사님이신데 요즘 H가 보기에도 아버지의 설교가 많이 힘에 부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H역시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현실적으로 더 보이게 되는 것들이 있겠지. 문제는 그 교회의 장로들이 이런 것들을 문제삼으며, 아버지를 몰아내려 하는 상황이란다. 그런데 여기서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을 깊이 들여다 보면 실은, 그 전에 계시던 전도사님과 그 장로님 중 한 명의 부인인 권사님이 조금 부적절한 관계에 있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H의 아버지가 그 전도사님을 조용히 나가게 했는데 이 과정에서 권사님께서 자신의 부정이 남편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배후에서 남편을 조종하여 이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런 과정에서 너무 지치셔서 조용히 덮고 나오시려고 하고 있는 상태고, H는 이런 아버지께 약간 실망한 상태.
그리고 아버지가 목사님이셨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목사님이 성직자이긴 하지만, 역시 직업이고 노동인데, 온가족의 희생만이 요구되는 현실이 과연 옳은가. 온가족이 교회에서 봉사하고 월급 120만원 받으면서 몇십년째 월급을 올려달라는 말은 꺼낼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고, 거기에 권력의 맛을 아는 장로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세를 확장하기 위해 목사님을 자신의 구미에 맞게 조종하려고 하는 성직자들의 슬픈 사정들은 이미 넘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아무도 고치려 하지 않는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 목사님께서도 몇년간 페이를 받지 못하시고, 본인이 시간강사로 강의를 나가시거나 하시면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셨는데도 이런 희생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쩌면 나 역시 그런 것들에 너무 무심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S선배는 아버지가 35년동안 동일한 월급을 받아 생활이 어려우면서도, 본인은 목사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 한번도 말할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교회의 규모가 일정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도, 목사님의 아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세속적 욕심이 많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아버지가 퇴직하신 후에 '새로 오시는 목사님은 좀 더 페이를 올려줬으면 한다' 라고 건의를 했고, 그 말을 들은 교회 사람들은 다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H가 아버지를 향해 하고 있는 생각들은 모두 옳았다. 날카로운 비판과 정의에 대한 외침. 현재 상황은 누가 봐도 부당하고, 고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상황이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되돌리기엔 너무 지칠 것 같은 상황. 나는 H에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너가 아버지에게, 지금은 날카로운 비판자나 정의를 외치는 동료가 아니라, 가족이 돼드릴 때인 것 같아. 너가 생각하는 문제들을 아버지께서도 모르고 계신 게 아니고, 어쩌면 너보다 더 잘 알고, 더 많이 고민하고 계실테니까,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그냥 믿고, 지지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응원하겠다고 말씀드렸으면 좋겠어.
온당하지 못한 상황을 덮는 것이 옳지 못함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 상황이 아버지가 아닌 H의 상황이었다면, 나는 아마 H가 아버지에게 조언했듯, H에게 조언했을 것이다. 하지만 H가 아닌, H의 아버지의 일이다. 목사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15년간 지칠만큼 지지쳤을 H의 아버지에게는 무조건 지지해주고, 믿어주고, 힘이 되주는 누군가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결론을 내리시든간에. 이런 내가 너무 무르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가족의 역할은 그런 거라 믿는다.
우리는 현재 교회의 모습들에 속상해하며,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함께 고민을 했으나, 역시나 대안을 찾는 것도, 롤모델을 찾는 것도, 결론을 내리는 것도 어렵기만 하다. H는 나중에 우리가 함께 교회를 만들어도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주변에도 이런 것들을 고민하고 꿈꾸는 분들이 계시다. 나는 교회를 만들 깜냥은 되지 않지만, 같은 고민을 가진 분들을 연결해주고, 연대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가져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