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형을 알았어요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눈이 좀 낮다,기보다는 좀 특이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내가 잘생겼다고 한 누군가를 사람들이 잘생겼다고 해주는 경우가 드물었달까. 어제 교수님 이야기에 썼던 교수님 중 잠깐 스쳐가며 언급된, 사은회날 내 편지를 받았던 신선생님의 경우, 솔직히 내가 잘생겨서 좋아했다고 말하면 친구들이 다 쓰러졌다. 애들은 내가 선생님의 지성을 좋아한 줄 알지만 솔직히 선생님 부임 첫해에 수업은 그리 훌륭하지는 않았. 근데 난 그 수업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저 마이너한 유머코드하며, 한석규 목소리에 감우성을 닮은 얼굴이라니! 난 친구들에게 우리 신선생님은 목소리는 한석규, 얼굴은 감우성이야, 라고 말했는데, 내 주변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정신차려, 웬디야- 선생님은 김용만을 닮았어, 하지만 난 한번도 김용만을 보고 멋지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내가 멋지다고 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내눈엔 감우성 남들눈엔 김용만 아 너무해들 진짜

회사에서도 거래처인 K사의 차장님을 가리켜 내가 '아, 그 잘생긴 차장님이요?'라고 했다가 모두가 쓰러진 적이 있었다. 누구???? 잘생긴 차장님???? 아, 솔직히 나는 그 분은 정말 객관적으로 남들 눈에도 잘생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응은 다들 쟤 뭐니,의 수준이었다. 그 차장님은 지금 봐도 너무너무 잘생겼는데- 아 너무해들 진짜-

그리고 또 거래처인 P사의 대표이사님 역시 비슷한 과다. 차이가 있다면 이분은 좀 더 피부가 검다는 것? 암튼 과장님께 저 이사님도 제 이상형에 가깝게 생기셨어요,라고 말했다가 죽도록 놀림 당하고 이사님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우리 과장님이, 선아는 이사님이 이상형이래요- 라고 말하시는 바람에 창피해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아 너무해들 진짜- ㅜ_ㅜ

엄마는 나의 남자보는 눈이 영 못미더우신가보다. 엄마는 나랑 같이 살던 C양과 사람보는 눈도, 취향도 비슷해 둘이 짝짜꿍이 돼 나를 놀리곤 했다. 실제로 엄마가 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사위삼고 싶어하며 침을 흘리던 K는 지금 C양의 남자친구다. (그러고보니 내 눈엔 K가 정말 김용만을 좀 닮은 것 같은데, -K야 미안~!- 다시 말하지만  내 이상형은 김용만이 아니라 감우성이다- 오다기리죠가 이상형이라 외치던 C였기에, 나는 주변사람들이 의혹을 수없이 제기해도 '아닐거야'로 일관했었다.)

교회에 최집사님이라는 분께서 새로 들어오셨을 때, 난 최집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제일제일 멋있다고 얘기를 했었다. 저분 감우성 닮으셨다고- 난 저런 분 있으면 바로 시집간다고. 다들, 그래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성실하고, 바르고- 그럼 난 꼭 이렇게 말했다, 아니아니, 나는 최집사님이 잘생겨서 좋다고!!!!!!! 그러면 다들 어이없어하곤 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못생긴 얼굴'이거든? 이라고 하면서 ㅠ_ㅠ 정말 충격적이었다, 못생긴, 정도까지는 결코결코 아닌데 ;;; 특히 엄마와 C양이 놀림이 대단했다. 어떻게 최집사님이 교회에서 제일 멋있을 수 있냐며...

그리고 1년이 더 지난 지금, 사람들이 최집사님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이분 정말 너무너무 괜찮은 분이다. 내가 처음에 딱 봤던 그대로다. 가정에 잘하고, 부인 끔찍하게 아끼고, 애들한테 정말정말 좋은 아빠. 내 눈을 그토록 못미더워하는 엄마가 오늘은 딱 최집사님같은 스타일이 정말 최고라며, 그런 신랑감만 데려오면 된다고- 엄마가 니 눈을 못믿었었는데, 니 눈이 최고로 정확하다며- 어떻게 딱보고 그렇게 사람을 잘 알아보냐고, 이제야 좀 안심히 된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신다, 나는 의기양양하여, 응 엄마 내가 사람을 쫌 봐, 딱보면 쫌 알아,라는 초거만을 떨며 내가 잘 알아보고 데려올테니 걱정마,라고 답했지만 엄마가 잊고 있는 건, 내가 좋아했던 건 인간 됨됨이도 됨됨이지만, 그 이전에 얼굴이었다는 거!

후후 나 너무 외모지상주의인 것 같아,라고 말하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비웃으려나 ㅋㅋ 내 기준 안에서만 외모 지상주의, 남들이 보기엔 얼굴보다는 인성을 중요시 하는 사람-

그나저나 스물여덟살이 마감되는 시점이다보니 요즘들어 부쩍 엄마의 초미의 관심사가 나의 결혼이 되고 있는 듯 하다. 엄마맘대로 사위감 1순위였던 K군을 C에게 보냈기 때문인걸까? 암튼 난 향후 3년간은 계획에 없는데, 3년 이후에도 실은 잘 모르겠는데 말이다 -

그래도 일단 이런 건 엄마한테 처음 인정받아봤다는 기쁨 ^^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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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2-02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를 읽은 결과, 웬디양님은 다른 여성들과 한 남성을 두고 경쟁할 일은 없을거 같은데요. 이건 좋은거에요. 하하.

웽스북스 2007-12-02 12:51   좋아요 0 | URL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형'이라고 말하지만은 않아서 그렇지 실전에서는 다들 이쁜 마누라 얻어서 잘 사시는 분들이셔요 ㅋㅋ 그러고보니 저 이상형 분들은 또 다 유부남이라는 공통점이 ㅎㅎㅎ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이상형이랑 결혼하는 건 아닌 것처럼, 저도 꼭 제 이상형인 사람만을 만난 건 아니구요 ㅋㅋ 남자는 결혼후 살집이 잡혀야 저런 풍채(?)가 완성되는 건가? 라는 생각도 했었어요 ㅋㅋ

Mephistopheles 2007-12-02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그래도....감....우성정도면 지성미에 샤프한....눈이 높으신 거잖아욧.

웽스북스 2007-12-02 17:52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하 감우성....은... 그렇죠 -_-ㅋㅋ
문제는 그러니까, 저 분들을, 아무도, 감우성이라고, 생각, 안해준다는 거....아....갑자기 저분들게 죄송해지는데, 저분들 정말 잘생기고 멋진 분들이시거든요? 그러니까, 음...ㅠ_ㅠ 결론이 뭐라는거지? ㅠ_ㅠ

비로그인 2007-12-03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핫. '내 눈에 좋으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결국 '사랑은 내가 하지 남이 하나~' 이니까요. ^^

웽스북스 2007-12-03 18:22   좋아요 0 | URL
글죠글죠, 오늘도 꿋꿋하게! 내 스따일을 찾아~
 



한겨레에 들어가 배너를 보면 가끔 어이없을 때가 있는데
FTA 반대 기사 옆에 버젓이 있는
한미FTA 찬성 광고가 그랬다

물론 프레시안 사건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적 압박에 대해 인지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한겨레도 그런 강단, 정도는 보여줘야 하는 매체라 생각해 왔다
나의 오산이었는지도


오늘 한겨레에 들어가보니
이명박의 배너광고가 보인다

물론 네이버 메인 상단에도 이명박과 정동영이 함께 롤링되고 있지만
한겨레는 네이버가 아니다
언론매체라면, 어떤 광고를 실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 거기까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럼 적어도 기술적 제어를 통해 한 화면에 같이 나오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정동영,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이명박


이번 대선 광고 온라인 마케팅 쪽에 쏟아부은 돈이 얼만지 대략 알기에
광고 인벤토리가 충분치 못할 거라는 건 예측할 수 있지만
이건 내 기준에선 정말 넌센스

솔직히, 정말, 없어보인다, 가오안나, 흥



ps

1

이명박 온라인 (오프라인도 마찬가지다) 크리에이티브 담당하는 대행사 어딘지
가서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어찌나 2000년대 초반의 울트라맥스유치 크리에이티브들을 만들어주셨는지
주변에서 그 찬란함에 대한 말들이 장난이 아니다
내가봐도 좀 심하다싶긴 하다

향후 있을 소재교체들이 연이어 기대되고 있는 사건
부디 실망시키지 말아주세요


2

조선닷컴에 갔더니 이명박 광고는 보이지도 않고
정동영 광고만 양측 상단에 자리잡고 있다

굳이 설득할 필요가 없다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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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1-3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인가봐요. 전 내내 놀다 저녁부터 논문 수정중. 별로 수정지시사항은 안나왔는데 조금만하면 될거 귀찮아서리. -_-

웽스북스 2007-11-30 21:51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 동기들이 와인시켜놨다고 막 나오라고 꼬시고 있어요 언니 어차피 주말에 나올거잖아 하면서 ㅠ_ㅠ 에잇 흔들흔드르르르르~ 논문 구경은 언제시켜주실건가요?

Mephistopheles 2007-12-01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탈에 걸린 한나라당 광고를 접하고 싶지 않아도 접하게 되는데요...
입 딱딱 벌리면서 달리는 모습이나 기타치고 로고송 공모하는 거나...
TV에서 국밥 먹는 장면이나...
외모지상주의는 안되지만...정말이지...복 없는 얼굴이에요........
그 광고 보고 하루 만명씩 표 빠져나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요..

웽스북스 2007-12-01 17:38   좋아요 0 | URL
으으 완전 동의 백만표요
국밥먹는 거 정말 게걸스럽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배고픕니다'라니- 무슨 히딩크도 아니고 -_-
정말 미학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광고에요

온라인 배너는, 정말 할 말 없어요
일반 배너도 요즘은 그런 수준으로 안만들어요 ;; -_-

그리고 친구들이랑 매일 하는 말이 그거에요
관상을 믿는 건 아니지만, 저 관상은 좀 심하지 않냐
그리고 관상도 관상이지만, 눈빛이요-
그 사람 살아온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아요

정말 뉴스에 나오면 꺼버리고 싶을 것 같아요
 


씻으러 잠깐 나가는데, 동생이 자고있는 게 보인다. 순간, 이녀석 그러고보니 용돈 떨어졌겠구나-

제대한지 얼마 안돼, 과외라도 잡으려고 했는데, 뭐 쉽지 않은가보다. 그렇다고 저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는 좀 민망해 하면서도, 몇만원씩 타 쓰는 형국인 걸 알아서, 동생 제대 후에는 내가 한달에 어느 정도는 용돈으로 주고 있다. 참 착한 누나,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좀 영악하다. 절대, 정기적으로 주지 않는다. 대신 얘의 돈이 들고나는 형국을 파악하고 있다가, 떨어질 때쯤 준다. 생일을 핑계로 주든, 명절을 핑계로 주든, 뭘 시키면서 주든, 그냥 주든, 하여튼, 정기적으로는 안준다.

나는 내가 동생에게 용돈을 주는 일이 서로에게 당연한 것이 되어, 고마움이 사라져버리는 게 싫다. 나도 쉽게 슥슥 주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정작 내 옷을 사는 돈은 7,8만원만 되도 손이 덜덜 떨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동생이 내가 주는 용돈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싫다. 매달 몇 일이 되면, '누나 용돈 안줘?'라고 말하게 되는 게 싫다. 나도 매번 쉽지 않은 마음으로 주니까, 그 돈을 받는 동생의 마음도 늘 고마웠으면 좋겠다.

누가 누구에게 뭔가를 해준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건 위험하다. 엄마가 내게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고, 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고, 고마운 일이다. 아내가 남편의 셔츠를 다려주는 것도, 남편이 저녁 먹은 설겆이를 하는 일도, 당연한 일이 아니고, 고마운 일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포기해야만 했던 자신을 위한 어떤 것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쉬고 싶고, 책을 읽고 싶고, 때로는 알라딘에서 놀고 싶을 때, 그 욕망을 버리고, 타인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이다. 그게 고마운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 되어버릴 때, 그 희생은 일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버리기에,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좀 얄밉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앞으로도, 때로는 이렇게 영악한 방법으로라도, 내가 상대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 상대도 고맙게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많이 고마워하고, 또 내가 많이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많이 말할 작정이다. 별 것도 아닌 것 갖다가 더럽게 생색낸다고 뭐라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이 사회가 고마움에 대한 불감증으로 가득해지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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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7-11-25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에 동의합니다~~!!^^

웽스북스 2007-11-25 12:57   좋아요 0 | URL
우와우와 로렌초의 시종 님의 덧글이다!!!! ㅎㅎㅎ

Mephistopheles 2007-11-25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니밴드조차재수없어" 태그 추가요~~~

웽스북스 2007-11-25 12:57   좋아요 0 | URL
흐흐흐흐 콜!

비로그인 2007-11-25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에, 좋은 글이군요. 안전에 대한 불감증만큼 고마움에 대한 불감증이 많은 것은
저 역시 싫습니다. ^^

웽스북스 2007-11-25 12:58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사실은 저도 가족에 대해서는 그럴 때가 많구요- 조금씩 민감해져야겠지요 ^^

마늘빵 2007-11-25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와 메피님 댓글에 한표.

웽스북스 2007-11-25 12:58   좋아요 0 | URL
원글에도 한표를 좀 주시지요 ㅋㅋ

마노아 2007-11-25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혜로운 웬디양님, 브라보~!

웽스북스 2007-11-26 00:33   좋아요 0 | URL
'사람 좀 보시는' 마노아님, 브라보~!

순오기 2007-11-26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을수록 세상은 더 각박해지지요!

웽스북스 2007-11-26 19:15   좋아요 0 | URL
흐흐 순 '오기'!님도 가족들에게 생색 많이 내세요- 고마워하라고 ^^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 챕스틱(립케어제품을 통칭해 나는 이렇게 부른다. 마치 스카치테이프나 포스트잇 부르듯 ㅋ)을 왜 바르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핸드크림도, 스킨로션도- 핸드크림은 20대 중반이 지나서 바르기 시작했고, 남들 다 갖고 있는, 깨끗하고 맑고 자신있어진다는 존슨즈 베이비 스킨/로션 같은 건 왠지 나도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가지고 있었으나 잘 쓰지는 않았다. 새스고딘이 말했지, 마케터는 새빨간 거짓말쟁이라고- 존슨즈베이비로션은 나를 끈적끈적하게 했지, 뭐 그닥 깨끗하거나 맑거나 자신있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챕스틱도 마찬가지다. 애들이 바르니까 따라 사보고, 또 따라 발라보고 했었는데 생각해보면 입술에 뭐든 바르는 게 금지되던 시절, 챕스틱은 나름 '화장품'이 아닌 '의약품'이기에 '정당하게' 바를 수 있음에도, 바르는 행위 자체가 화장을 하는 느낌이어서, 그 재미를 즐겼던 것 같다. 이런 챕스틱 중에는 빨간 물이 들어가 있는 것도 있었는데, 잔잔히 드는 그 빨간 물이 얼마나 갔겠는가. 그럼에도 그렇게 잠시 입술을 붉게 만들어보는 것이 주는 묘한 쾌감 같은 것도 있었다. 어른 흉내를 내고 싶던 학생의 발악인가보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챕스틱을 사지 않았다. 이제 더이상 챕스틱으로 어른 흉내를 낼 필요는 없었다. 반짝반짝 입술을 예쁘게 만들어주는, 챕스틱의 붉은기와는 비견할 수도 없는 립글로스가 있었으니까. 물론 챕스틱도 몇번 산 적이 있지만 끝까지 쓴 적은 없다. 바를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챕스틱을 바르기 시작한 건 올해다. 아! 챕스틱을 발라주지 않으면 이렇게 입술이 파싹파싹 마르고 당기는구나, 라는 느낌을 올해 알기 시작한 거다. 늦은 건지도 모르겠다. 스킨을 안바르면 피부가 당기는 건 스물 서너살쯤 알았고, 핸드크림을 안바르면 손이 당기고 답답한 건 작년에 처음 알았다. 그리고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핸드크림 한통을 다 써봤다. 알지 못하던 느낌들을 알아가는 이 느낌이 썩 기쁘지만은 않구나, 이런 건 앎의 즐거움으로 쳐주고 싶지 않아. 하지만 점점 알아가는 건 늘어만 가고 있다.

N사의 립케어제품 관련 설문조사를 하면서, 중고등학생과 20대의 결과를 비교해보니, 립케어제품을 살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건 보습력이었다. 그런데 중고등학생의 경우 보습력만큼 중요하게 보는 게 바로 '색깔'이었다. 20대 이상에게 색깔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더이상 챕스틱의 희미한 붉은 빛은 20대에게 매력을 주지 못한다. 대신 잦은 화장품 사용으로, 건조하고 갈라진 입술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고려 요소는 50% 이상이 무조건 보습력! 그러고보니 나도 나이들어 다시 챕스틱을 사면서 무색무취에 무조건 입술 뽕뽕하게 수분 꽉 채워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제품을 선호하고, 조금 가격을 더 치르더라도 그런 것들을 고르게 된다. 10대의 구매 희망 제품과 20대의 구매희망 제품은 모두 N사였으나, 10대는 니베아, 20대는 뉴트로지나였다. 니베아 챕스틱은 붉은 틴트끼가 살짝 들어가 있는 제품도 있지만, 뉴트로지나의 경우 압축해놓은 바세린같다. 그야말로 의약품스럽다. 나는 심지어 그보다 보습력이 더 좋은 제품을 쓰고 있다. 특히 겨울이 되니 입술이 벽돌같다. 주위에는 입술이 후끈 달아오르면서 팽팽해지고 빵빵해지는 듀왑 제품을 즐겨 쓰는 사람도 많다.


생각해보니 모든 화장품들이 자유롭게 주어진 지금보다, 챕스틱의 희미한 붉은 기운이나마 잠시잠깐 즐기며 어른 흉내를 내던 그 때가 더 즐거웠던 것 같기도 하다. 챕스틱의 영양가에 기대지 않아도 촉촉하고 부드럽던, 듀왑같은 제품으로 억지로 후끈거리게 만들지 않아도 팽팽하고, 립글로스의 끈끈함을 더하지 않아도 반짝반짝하고 불긋불긋한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가 아름답다는 걸, 아직은 화장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쁜 나이라는 걸, 화장품에 기대기 시작하면 기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걸,  괜히 어른들이 부러워 문구점에서 파는 2000원짜리 립글로스를 쓰는 건 입술 망가지는 지름길이라는 걸,

이제 수능이 끝나고 조금씩 멋내기에 맛들이기 시작할 풋풋한 아가씨들에게 꼭 얘기해주고 싶다



ps 어제 이 글을 쓰다가 또 컴퓨터 앞에 엎드려 잠들었다. 그리고 오늘 교회에서 중고등부 애들을 보는데, 입술밖에 안보여, 아 예쁘다 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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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1-18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에는 입술이 후끈 달아오르면서 팽팽해지고 빵빵해지는 듀왑 제품을 즐겨 쓰는 사람도 많다."

아하하하...대체 그 제품엔 뭐가 들었기에...^^

웽스북스 2007-11-18 16:58   좋아요 0 | URL
뭔가 매운 향신료같은 성분이 들었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어요- 암튼 매운 음식 먹었을 때처럼 입술이 후끈해지는 느낌이 퍼지면서 입술에 잔주름이 펴지고 부어올라 빵빵해지죠- 입술에 볼륨감 없는 사람들의 로망? 막이러고 ㅋㅋ

이매지 2007-11-18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듀왑은 전 기분 나빠서 못 쓰겠더라구요 ㅎㅎ
한 번 샘플로 발라본 적 있는데 입술이 아프더라는 ㅠ_ㅠ
전 니베아꺼 써요.
뉴트로지나는 정말 의약품스러워서 되려 더 찝찝한;;

웽스북스 2007-11-18 19:39   좋아요 0 | URL
그래서 지금, 10대에 가깝다고 얘기를 하고 싶은 거죠? ㅎㅎ
좀더 나이가 들어서 입술이 더 쩍쩍 갈라지거든 바디샵 비타민E 라인 립케어 제품 써봐요, 완전 좋아요- 난 그나이 때 아무것도 안발랐어요 ㅎㅎ 나이들면 정말 입술이 막 땡겨요 ㅠㅠ

마늘빵 2007-11-18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저는 약국에서 파는 챕스틱 쓰는데.. -_-a

웽스북스 2007-11-19 00:03   좋아요 0 | URL
구매경로 1위는 '약국' 맞더군요 ㅎㅎ

라주미힌 2007-11-1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옆의 여인의 입술에서 좋은 향이 나면 맛이 궁금하다는 ㅡ..ㅡ;;;
특히 딸기.. 흐흐흐

웽스북스 2007-11-19 00:03   좋아요 0 | URL
딸기맛이 날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ㅎㅎ

마늘빵 2007-11-19 11:54   좋아요 0 | URL
이 댓글 미묘하게 야한데요? ^^

웽스북스 2007-11-19 12:03   좋아요 0 | URL
야하긴 한데, 미묘하다기보단 좀 대놓고 야하지 않나요? ㅋ
라주미힌님께 딸기향 챕스틱을~!

라주미힌 2007-11-1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향.. 딸기맛이 아녜요? ㅡ.,ㅡ;;;
초코향도 있던거 같던데..

웽스북스 2007-11-19 16:01   좋아요 0 | URL
라주미힌님, 챕스틱으로는 향이 퍼지는 정도지 달달한 맛까지는 느끼기 어렵구요~ 정 '달달한 립제품의 맛'을 느껴보고 싶으시면 랑콤의 쥬시튜브 계열 쪽이 향도 맛도 괜찮은 편입니다 ^^ 마침 제가 쓰는 쥬시튜브가 살짝 달달하게 초코 비스무레한 맛이 나는 제품이니 원하신다면 담번에 뵐일이 있을 때 새끼손가락에 조금 짜드리겠습니다 ^-^

프레이야 2007-11-19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향 챕스틱, 저 쓰던 것 어제 작은딸한테 줬어요. 입술이 텄다고 그래서요.
이제 정말 향이나 색이 없는 입술보호제가 좋던걸요. 진한 립스틱도 싫고..
그래서 립글로스만 바르는 편이죠. 아무것도 안 바른 큰딸의 깨끗한 얼굴이 참
이쁘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요..

웽스북스 2007-11-19 21:25   좋아요 0 | URL
저도 립스틱은 사본 적이 없어요, 누가 줘도 5번 이상 발라본 적도 없구요~
립글로스가 좋아요~ 흐흐
아무것도 안바른 그얼굴 참 예쁜때죠

아, 오늘 화장 다지워진 내얼굴, 가리고 퇴근해야지 흐흣
 


예전에 몸담고 있던 (지금은 눈팅만 하는) 네이버 서평단 북꼼에서 우수 리뷰어로 선정된 적이 있었다. 그 때 친하게 지내던 누군가, 내게 소감을 물었고, 나는 별로 기쁘지 않다,고 답했다. (물론 북꼼의 우수리뷰어가 소감을 답해야 할만큼 대단하고 비장한 그 무언가는 물론 아니다, 그냥 재미로 물어봤던 거였다) 

당시 나는 그 책이 싫은, 아쉬운, 이유를 열심히 쓰긴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도 아니었고, 그 책으로 우수리뷰어에 뽑히는 게 그다지 영예스럽지도 않다 여겨졌다. (실은 그 책과 함께 선정됐던 다른 책을 더 좋아라했었다, 나는- 그 책은 읽느라 살짝 고역스러운 책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안좋은 책의 리뷰를 써서 우수리뷰어로 뽑혔던 사람들끼리 '간신나라 충신' 클럽을 만들었었다) 

하지만 진짜 기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때는 북꼼의 새로운 기수가 시작된지 5개월 남짓 지났을 때였고, 북꼼에서는 한 기수에 우수리뷰어로 선정된 전례가 있는 사람들은 다시 선정하지 않는 문서화되지는 않은 관례가 있었기에, 그 때는 이미 '뽑힐 사람은 다 뽑힌' 상태였다. 그러니, 내가 우리 문학동에서 정말 리뷰를 잘 쓴다고 생각하고 제일 먼저 읽어보는, 좋아하던 리뷰어들은 이미 한번씩 다 우수리뷰어가 됐었고, 정작 내가 뽑히던 때에는 그들이 다 빠져나간, 즉 진짜배기들이 빠져나간 뒤였다. (승부라고 하니 어쩐지 좀 비장하긴 하지만) 물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우수했다고' 뽑아주신 건 감사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한 '최우수' 상은 아닌 셈이였다.



이창동 감독이 청룡 영화상 작품상 후보로 노미네이트 되는 것을 거부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물론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말이다. 검색해보니 예전에 오아시스 때에도 청룡영화상 후보를 거부한 전력이 있다.

올해 나는 작년에 비해 그리 많은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제일 좋았던 영화 다섯편을 대라고 한다면
일본영화 한편, 중국영화 한편, 독일영화 한편, 아일랜드영화 한편, 그리고 '밀양' 을 꼽을 것이다

제일 좋았던 영화 네편을 대라고 한다면
일본영화 한편, 중국영화 한편, 독일영화 한편, 그리고 '밀양'을 꼽을 것이다

제일 좋았던 영화 세편을 대라고 한다면
일본영화 한편, 독일영화 한편, 그리고 '밀양'을 꼽을 것이다

제일 좋았던 영화 두편을 대라고 한다면
독일영화 한편, 그리고 '밀양을 꼽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만 대라고 한다면, 고민고민하다가 나는 '밀양'을 꼽을 것이다

누군가 내 개인적인 취향이라 치부해버릴런지 모르겠지만, 내가 영화를 많이 보지 못해서 그런지, 나는 올 한해 밀양을 뛰어넘는 영화를, 더욱이 한국 영화를 만나지 못했다. 올 한 해가 거의 저물고 있으니, 이변이 없는한 계속 그럴 것이다. 그래, 디워도 못봤고, 화려한 휴가도 못보긴 했지. 못봤는지 안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들이 밀양을 뛰어넘는 영화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이 두 영화를 봐야 할 이유는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내 생각이 변할 것 같지도 않다.

올해 내가 봤던 한국영화 중 두번째로 좋았던 영화를 고르라 한다면, 나는 플란다스의 개,를 선택하겠지, 하지만 그건 올해 개봉한 영화가 아니잖아!

그러므로 기사를 접하면서 올해 청룡영화상은, 어떤 작품이 받게 되든, 그리 영예롭지 못한 상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청룡영화상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될 작품을 만들 깜냥 역시 되지 못하긴 하지만, 같은 입장이었어도, 나 역시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긴 하다. 아, 도무지 세상은 소신을 보일 기회를 주지 않는단 말이지



ps

혹시나 내가 만나지 못한 밀양을 뛰어넘을 만한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에게 심심한 사과의 마음을 전하며, 하지만 없으리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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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처음으로 해보는 이벤트~
    from 지극히 개인적인 2007-11-12 21:58 
      제 글에 달아주신 메피님의 덧글을 보면서 이걸로 이벤트를 해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1000힛때 이벤트를 해보고 싶었는데 저도 모르게 쓱~ 지나가버렸거든요 ^^;; 알라딘 생활 3개월(? 맞나?)만에 첫 이벤트입니다~! 이 글에 트랙백으로 연결된 글을 보시고 거기에 언급된 영화 밀양,을 제외한 나머지 영화들을 맞혀주시면 됩니다 원글 말고, 여기에 달아주세요 ^^ 모두 올해 2007년 개봉했던
 
 
Mephistopheles 2007-11-12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영화 한편, 중국영화 한편, 독일영화 한편, 아일랜드영화의 제목이 뭔가요?

웽스북스 2007-11-12 22:02   좋아요 0 | URL
맞혀보세요~!
어 이런걸로 이벤트해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

마노아 2007-11-12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님의 글을 보면서 참 좋게 보았던 영화 밀양이 더 애틋하게 가슴에 박힙니다. 글을 맛있게 쓰셨어요. ^^

웽스북스 2007-11-12 21:49   좋아요 0 | URL
어머, 감사합니다 ^^ 마노아님도 역시 밀양이 제일 좋았던 건가요?

이매지 2007-11-12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네이버 북꼼에서 한 번 받은적있는데
별로 기쁘지는 않았고 그저 책쿠폰이 생겼다고 낼름 질렀던 기억이 ㅎㅎㅎ
저 아직 밀양 안 봤는데 봐야겠군요 :)

웽스북스 2007-11-12 22:2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책쿠폰, 고거이 달콤한 것이죠- ^^

마늘빵 2007-11-13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북꼼 하루 지각해서 짤렸어요. :) 씨익. 그래도 괜찮아요. 제가 좋아하는 책은 안왔거든요. 그래서 다 누구 주거나 쌓아놨다 방출하려고 대기중이에요.

웽스북스 2007-11-13 12:30   좋아요 0 | URL
앗 그런 과거가 ㅋㅋ 아프락사스님은 어쩐지 5동이었을 것 같은데요~ 혹시 초창기 멤버였다면, 간신나라 충신 배출 책 제 1호인 '야구의 물리학'도 보셨었나요? ㅋㅋㅋㅋㅋ

마늘빵 2007-11-13 16:50   좋아요 0 | URL
그거까지 한거 같기도. 그거 막 혹평을! :)

웽스북스 2007-11-13 19:05   좋아요 0 | URL
ㅋㅋ 역시 5동이셨군요- 5동 출신들이 '아직도' 목에 핏대를 올리는 최악의 책이에요 ㅋㅋ

무스탕 2007-11-13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양 보면서, 보고 나서도 한동안.. 계속 답답했던 가슴이 떠올랐어요.
그렇다는건 좋은 영화로 기억이 남은게 아닌건가? 그건 아니에요 ^^

웽스북스 2007-11-13 19:06   좋아요 0 | URL
그죠, 무스탕님 저도 그랬어요
영화를 볼 때보다, 보고나서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것들이 결국 이 영화를 최고로 꼽게 만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