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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 -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길 ㅣ 인문고전 깊이읽기 8
이명권 지음 / 한길사 / 2011년 3월
평점 :
1.
수천년을 이어온 종교들의 철학은 그렇게 만만한 마약이 아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핵심은 인민의 고통을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해방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내부에 비리와 폭력이 있어도, 그 교리에 동의하는 인민의 동의를 받아왔다.
우파니샤드는 어떨지. 영혼의 자유라.
알듯 모를듯한데.
2.
신을 모신답시고 행하는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경멸과 풍자가 재밌다.
신을 모실 생각말고 께달으라는 거야. 네가 깨달으면 너도 신이된다고. 신의 종이 될 생각말고.
혹은 제사를 빌미로 편안히 잘먹고 잘살게 되는 것만 신에게 빌지말라고 하네.
구해야 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영혼의 자유라고.
우주의 본질과 인간의 자아는 둘이 아니다.
맞다. 그런 느낌이 들어. 나이들 수록. 모든 생명의 자아는 우주의 본질과 연결된 듯이 느껴져.
바람도, 숨도. 밤도. 시냇물도. 나무도.
원초적인 직관이 수천년전의 인간들에게 있었던 거다.
그것이 바로 너다.
시적이다.
우주 자체가 희생이며 제물이듯 인간의 삶 자체도 희생이며 제사다. 말이 희생되어 우주의 일부를구성하듯이 인간은 자기희생, 즉 비움을 통해 지상의 권력이나 부귀 대신에 영적인 해방을 얻게 된다. 특히 우파니샤드에서 욕망과 무지는 영원한 해탈을 얻지 못하게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인도 전통 풍속이 관습적으로 지녀오던 카스트의 굴레에 매여 있지 않다.
인간은 더이상 어떤 제도와 풍습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 그것과 다르지 앟다는 혁명적인 선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 묻고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인간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의 목적은 다음 세상에 더 좋은 하늘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카르마의 우주적 법칙에서 벗어나 참된 영혼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좋은 말이지만.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인도 카스트의 굴레에 매여 있지 않다는 말에 동의가 안된다.
본인들이야 애초에 경전을 가르침받고 교육받을 수 있는 카스트에서 태어났겠지.
애초에 우파니샤드는 옆에 붙어앉아서 제자에게 물려줬다면서.
노예들은 경전을 들은 귀에 수은을 녹여 부어버리는 법이 있었고,
불가촉천민은 노예에도 못끼여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영혼이 자유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참된 영혼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수행할수 있는 사람과, 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나뉜 사회에서
참된 영혼의 자유를 누릴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조차 카스트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사람들은 지금도 그런걸.
우파니샤드는 불교에 영향을 많이 준 철학이구나.
불생불멸의 아트만으로서 어떤 고통과 집착을 넘어서 있는 무제약적 근원을 깨닫는 길, 그것은 바로 브라만을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통과 집착을 어떻게 넘어설까.
죽음도 슬픔도 배고픔도 목마름도 없는 아트만은 그 욕망이나 사유가 참되니 마땅히 아트만을 추구하여 깨달아야 한다. 아트만을 깨닫는 자는 모든 세계와 바라는 바를 이룰 것이다.
인간의 사색, 결국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성찰, 우주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색과 사색.
아주 오래전.
기원전 800년에서 300년 무렵이라니 2500년쯤 전이다.
그때의 인간들이 자기가 누군지 궁금했다. 알수가 없었거든.
세상을 해석하고자 하고 내가 누구인지 알고자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싶은 인간의 욕망이
명상과 수행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렇게 살면서 철학을 만들어낸다.
브라만은 진리, 지혜, 환희, 무한이라는 본질적 속성으로 압축된다. 그러나 브라만은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
천천히 읽으면 재밌다. 알듯 모를듯 해도.
'그것이 바로 너다'
나의 존재가 곧 브라만이고 아트만이고 우주의 진리라는 거다.
인간의 의식에 매우 혁명적이라는 이명권의 해석에 동의한다.
신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이고, 인간의 존재가 우주의 진리다. 맞다.
그 존재가 진리다. 그 존재가 아트만이다. 그것이 바로 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