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문체, 혹은 양파에 대한 생각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이란 제목으로 재작년 6월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을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고종석에 대한 부분만 따로 떼내어 보강하려다가 '자료' 차원에서 글 전체를 다시 옮겨놓기로 한 것이고, 대신에 이미지들을 보강해 넣기로 한다.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정의한 바대로 문체가 '양파' 껍질 같은 것이라면, 내가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김훈, 김규항, 고종석이라는 세 종류의 양파가 되겠다.  

문체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을 적고자 한다. 먼저, 자신만의 독특한 ‘얼굴’ 혹은 ‘손가락’을 가진 작가로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이 김훈이다. 그는 소설가이기 전에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스트이기 전에 언론사 기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 표정을 그렇게 변화시켜가고 있지만, 나에게 소설가로서의 김훈은 좀 낯설다. 문학판의 각광에도 불구하고(그는 두번째 장편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첫번째 단편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런 건 그들만의 ‘비즈니스’이다. 작품이 있으니까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상이 있으니까 작품을 찾는 것이 문학/출판계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소설가의 손가락’이 아니라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주제를 모른다거나 어리석은 것은 결코 아니다. 에세이로서는 ‘밥벌이’를 할 수 없는 나라가 한국이며, 그는 ‘밥벌이’의 신성함을 누구보다도 ‘지겹도록’ 맹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현재 오랜 기자생활을 그만 둔 그에게 소설쓰기는 그의 밥벌이, 즉 그의 비즈니스이다. 도둑질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게 아닌 이상 남의 밥벌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다. 그건 각자의 문제이다. 그래서 예컨대, 화장실 청소원에게 혹 “그것도 밥벌이냐?”고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을 넘어서 아주 무례한 일이다. 세상의 밥벌이에는 귀천(貴賤)이 없으므로.

 

 

 

 

나는 김훈의 에세이들을 ‘숭배’하지만(나는 그것들이 국어교과서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소설들은 아직 한편도 읽지 않았다. 그의 에세이들은 출간되자 마자 사들였지만(어떤 건 몇 권씩),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세 장편 소설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대했다. <빗살무늬>는 품절된 이후에야 사려고 돌아다녔는데, 결국 내가 샀는지 못 샀는지도 기억나지 않으며, <칼의 노래>는 대폭 할인할 때에야 ‘싼 맛’에 샀고, <현의 노래>는 사두지 못한 채 모스크바에 왔다. 그러니 내가 그의 소설들에 대해서 말할 ‘지분’은 별로 없는 셈이다.

대신에 나는 북매거진 <텍스트>(2004년 4월호)에서 <현의 노래>에 대한 두 편의 서평을 읽었고, 이 소설에 대한 그림을 대충 그려볼 수 있었는데, 그건 읽지 않은 상태에서 그린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이하의 인용은 모두 두 서평으로부터의 재인용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그를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있다(하긴, 소설을 제외한 그의 글과 인터뷰 대부분을 찾아 읽었으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장편소설’이라고 표지에 박혀 있더라도, 그런 걸 세 권이나 냈더라도 그는 아직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그가 쓴 건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이 쓴 역사 ‘에세이’이고, 혹은 그에 대한 ‘판타지’이거나 ‘모노드라마’들이다. 그건 박상륭의 ‘잡설’들이 ‘소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어떻게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그의 ‘문체’ 때문이다. 흔히 ‘아름답다’ 혹은 ‘현란하다’고 일컬어지는 것 말이다. 요컨대, 그의 문체는 소설이란 장르, 품위 없고 잡스러운 장르가 요구하는 바 일상적 디테일, 저자거리의 언어를 담기에는 너무 고상하며 품위가 넘쳐난다. 그래서 어색하다. 마치 장미희가 떡장사를 연기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가 아무리 “소설이요!”라고 외쳐도 내겐 “똑 사세요!”로 들린다.

<텍스트>의 두 서평은 ‘모노톤의 복화술’(김용필)과 ‘문체의 아름다움이 놓친 몇 가지’(조은영)란 제목으로 돼 있는데, 서평자들이 지적하는 바나 내가 지금 얘기하는 거나 같은 얘기이다. 그의 소설은 ‘모노드라마’이며, 문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소설을 ‘망쳤다’는 얘기니까. 조은영 기자의 서평은 “그렇다면, 김훈의 진정한 3인칭 소설, 최초의 3인칭 소설은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조심스러운 진단으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물론 신중함은 기자로서의 조건이다). 그는 3인칭 소설은커녕, 소설 자체를 쓴 일이 없고, 앞으로도 별로 쓸 일이 없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예컨대, 김훈은 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악기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그 구멍과 줄과 떨림판과 건반 어디에도 소리의 흔적은 없다. 악기는 소리의 집이지만, 소리는 그 집에서 살지 않는다. 소리는 어디에 있느냐. 소리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죽느냐. 나는 소리의 거처를 알지 못하지만, 소리는 악기와 그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 사이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태어나고 죽는다.”(<밥벌이의 지겨움>, 19쪽) 이런 건, 그의 에세이들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사유이고, 문장이지만, 소설로는 옮겨질 수 없는 문장이다(뿐만 아니라 번역되기도 곤란한 문장들이다. 박상륭의 잡설들이 번역 불가능한 것처럼, 김훈의 에세이들도 번역 불가능하다).

그것이 <현의 노래>에서 “소리는 몸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몸이 아니면 소리를 빌려올 수가 없다. 잠시 빌려오는 것이다. 빌려서 쓰고 곧 돌려주는 것이다. 소리를 곧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자리는 적막이다. 그 짧은 동안만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는 것이다. 소리를 거스를 수 없다.”라는 우륵의 말로 가장(假裝)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게 김훈의 목소리임을 이미 알고 있다. 요컨대, 그의 소설의 언어는 에세이의 언어를 “잠시 빌려오는 것이며, 빌려서 쓰고 곧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 에세이의 자리는 그가 <풍경과 상처>나 <자전거여행>에서 적었듯이 물론 ‘적막’이다(이 적막으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짧은 동안만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다가”(빨리 한몫잡고서!) 곧 제자리, 에세이스트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에세이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 정신, 그 문체, 그 손가락, 그 적막을!



김훈의 보수주의를 이문열의 보수주의와 비교하는 시각도 있는데(하긴 쿤데라와 이문열도 양립 가능하다고 동렬에 놓는 시각에서라면야), ‘보수주의’에 대한 얘기를 잠시 미뤄두고, 일단 ‘소설가’ 김훈과 이문열을 비교하는 것 자체는 흥미롭다. 일단 둘 다 ‘소설가’가 아니라는 점, 즉 ‘소설가’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김훈은 이제 막 소설로 밥벌이하고 있으며, 이문열은 소설로 밥벌이를 할 만큼 하자 딴짓을 하고 있다(사실, 한때 소설가이긴 했지만, 요즘도 소설가 이문열 운운하는 것은 좀 우습다. 그의 대표작은 <삼국지>이며, 이번에도 동아일보에 <초한지>인가를 연재하는 듯하던데, 그걸로 미루어도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의 본업은 ‘고전 번역가’이다). 근래엔 둘 다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소설들만 썼다는 것도 공통적이고, 그 소설들이 ‘에세이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가령, 이문열의 <선택> 이후의 ‘소설들’). 차이라면, 문체에 있어서, 품위에 있어서, 그리고 언변에 있어서 김훈이 한 수 위라는 것 정도(그런 이문열도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 요즘 좀 특이한 한국사회의 풍경은 자칭 보수주의자들, 즉 ‘자각적인’ 보수주의자들이 (특히 젊은 세대에서) 늘어나고 있는 것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B급 좌파’들이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마치 이전에 ‘보수꾼’들이 ‘빨갱이’(혹은 ‘사회주의자’)란 딱지를 적대자들에게 갖다 붙이듯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술어논리에 의하면, ‘B급좌파’나 ‘보수꾼’이나 똑같게 된다). 그런 식으로 보수주의나 진보주의(혹은 사회주의)의 외연이 넓어지는 것은 ‘언어의 경제’상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보수주의’나 ‘진보주의’란 말의 의미가 불분명해지는 탓에 앞에다 수식어를 더 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노무현 정부는 한쪽에서 보기엔 좌파 사회주의 정부이고, 다른 쪽에서 보기엔 우파 보수주의 정부이다. 그런 ‘딱지’들이 가리키는 바는 대개 “당신은 우리편이 아니다!” 내지는 “우리는 당신이 싫다!”는 정서적 상관물이자 자기정체성의 확인이지 지시적 연관성을 갖는 논리가 아니다.

김훈과 이문열의 보수주의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건 대국적 견지에서의 ‘통찰’이긴 하지만, 섬세하지는 않다. 김훈은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이다(이문열도 허무주의자인가?). “아마도 소리와 병장기는 같은 것인 모양이구나”(<현의 노래>)라는 통찰, 즉 악기와 무기는 등가이며, 펜과 칼은 같은 것이라는 그의 주장 혹은 자기암시는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그게 그거라는 허무주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허무주의야 말로 모든 것을 ‘풍경’의 자리에 갖다 놓는 그의 에세이스트 정신에 부합한다. 풍경의 자리에 놓일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사계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충만하며 허무하고 부질없다. 역사 또한 그는 그 ‘풍경’의 자리에다 놓고 묘사할 따름이다.

<현의 노래>의 한 장면에서 김훈이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빨아당기는 속살이 어째서 왕의 무덤 속에 들어가 쇠와 함께 썩어야 하는가. 야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117-8쪽)라고 묘사할 때, ‘야로’는 김훈 자신이며,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야말로 그의 ‘허무주의’의 근거이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풍경의 ‘적막’이다. 그는 언제나 그 풍경 앞에서, 허무 앞에서, 적막 앞에서 기진맥진하였고, 그러면서 마치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이 험난한 사투 끝에 돛새치의 뼈다귀만을 건져 올리듯이 자신의 문체를 길어냈다. 언제나 칼로 깎은 연필을 손가락에 쥐고 원고지에 쿡쿡 눌러써가면서 말이다(왜 칼과 펜이 등가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그의 ‘기진맥진’에, 그의 ‘문체’에 나는 언제나 경의를 표한다.

반복하자면, 내가 보기에 김훈에게서 더 핵심적인 건 그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허무주의이다. 그가 ‘보수주의자’라면, 그에겐 ‘보수’나 ‘진보’가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가 가부장(家父長)적인 사고의 틀을 고수한다는 의미에서일 뿐이다(언젠가 이 때문에 ‘김훈 파동’이 한번 있었다). 그는 무어라고 말하는가?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 언어를 다루는 일의 힘겨움을 생각한다면 등에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이 고백에 그의 진실이, 핵심이 담겨 있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가 뜻하는 바는 말의 허무주의, 의미의 허무주의이다. 그래서 그에겐 그러한 의미(=기의)보다 말의 뼈(=기표), 말의 잔해, 말의 화석이 더 중요하다. 그가 일상적 시간(=밥벌이의 시간)이 아닌, 역사적 시간, 더 나아가 지질학적 시간에 언제나 매혹되며 거기에 붙들려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예컨대, <현의 노래>의 구상 또한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우륵의 가야금에서 얻어졌다고 하지 않는가? 그 천년의 ‘적막’이 곧 그의 ‘질퍽거리는 구멍’이다.



작가는 ‘천년의 적막’을 탐사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문체를 낳은 허무주의는 좀더 실제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고백한바 있지만, 그는 5공 때 한 일간지의 젊은 기자로서 군사정권에 대한 ‘용비어천가’에 앞장섰던 경력이 있다. 그가 신념(=이즘)을 갖고 그 일에 나섰던 거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것이 ‘신념’이 아니라 ‘처세’였더라도 마찬가지이다(그랬더라면 이후에 다른 ‘기자들’처럼 금배지라도 달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를 그 일에 내몬 것은 ‘신념’도 ‘처세’도 아닌 ‘체념적 자학’이고 ‘허무’였다. 당당하게, 폼나게 사표를 던질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논리는 좀 다르다. 그 대신 다른 누군가가 결국 그 일을 해야 했을 거라는 것. 즉, 한 사람이 폼나는 대가로 또 다른 누군가가 오물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이다. 그럴 거라면, 자신이 하겠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건 그러한 ‘자발적 부역’에 대한 변명의 논리이다. 그의 ‘부역’은 오직 그가 문장에서 ‘의미’를 버릴 때에만 가능했다. 그것이 그의 의미론적 허무주의의 기원이다.



 

 

 

 한편으로, 대장부의 길과 가장(家長)의 길은 좀 다른 길이다. ‘질퍽거리는 구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달리 식구(食口)들의 ‘입구멍’이다. 한 가장이 해야 할 최소한이란 그 구멍을 채워 넣을 밥벌이를 하는 것이다. 유구한 일이지만, 대장부의 ‘명분’은 우리를 한번도 밥 먹여주지 않았다(밥 먹여주기는커녕 죽이지만 않아도 다행이겠다. 오, 계백이여!) 후배 박래부 기자와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문학기행>이 책으로 묶여 나왔을 때, 김훈이 썼던 서문에는 그의 가족사 한 자락이 들어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엄하고 혹독한 분이었는데, 자주 ‘세상을 저버린 자’처럼 세상에 대한 분노와 허무를 무지막지한 술로 달랬다. 그리고 그런 날 새벽이면, 소년 김훈은 해장국 심부름을 가야 했다고.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에도 그는 해장국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그만 뚝배기를 바지와 길바닥에 다 엎지르고 말았다. 새벽녘 길바닥에서 그는 목놓아 엉엉 울면서 절대로 아버지와 같은 삶은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아버지와 같지 않은 삶? 그건 대장부의 삶이 아니라 충실한 가장의 삶이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것은 대장부의 논리가 아닌 바로 가장의 논리이며(대장부는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지만, 가장은 한 입으로 두 말 해야 할 때가 있다), 가장으로서의 김훈이 발명해낼 수밖에 없었던, 발명해내지 않으면 안되었던 논리이다(자신의 아들에게 주는 편지에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바도 ‘자기 밥벌이’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당연하다. 그 ‘밥벌이’에 그의 오욕과 영광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허무주의는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장(家長)의 허무주의’이다. 그 허무주의는 결코 겉멋이나 잘난 체가 아니며, 젊은 치기나 늙은 달관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자 김훈이 밥벌이를 하기 위한, ‘유능한’ 가장이 되기 위한 허무주의였다. 어찌 그의 허무주의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나는 6하원칙의 신성함을 믿는다. 다만 6하의 가치와 존엄을 인정하되, 6하로서 충족될 수 없는 진실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라고 그는 또 말한다. 복습하자면, 그가 말하는 ‘6하원칙’이란 ‘밥’과 동의어이다. 기자 김훈은 어떤 원칙의 신성함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밥의 숭고함과 밥벌이의 신성함을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기자의 밥벌이란 ‘6하원칙’에 맞게 기사를 쓰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또한 ‘6하원칙’이라거나 ‘밥벌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건 앎일 수도 있고, 직관일 수도 있고, 양심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가져오자면, ‘죽음 충동’이라 지목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죽음충동은 삶 혹은 생존에의 의지를 ‘전부가 아닌(not-All)’ 것으로 잠식하며, 거기에서 기자 김훈이 아닌 에세이스트 김훈이 태어난다.

가장은 자기 식구들의 밥벌이를 하는 것으로 충분히 존엄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은 그가 다 먹여 살릴 수 없는 ‘구멍들’ 천지이다. 그 구멍들 앞에서, 어느 봄날 전군가도(全群街道)에 무지막지하게 흩날리는 ‘사쿠라’ 꽃잎들 앞에서, 그는 할딱이며 기진맥진이고 속수무책이다. ‘6하’로 기술될 수 있는 세상의 진실들은 몇십 년 기자생활의 ‘짬밥’으로 어떻게든 카바한다지만, 그걸로 충족되지 않는, 그걸 넘어서는 진실들은 다 어찌한단 말인가? 에세이스트 김훈은 그 ‘충족될 수 없는 진실’들을 (‘가부장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기록하고자 분투하지만, 그의 자백대로 언제나 ‘백전백패’이다. 그의 문체는 그 싸움에서 얻어진 전과이되, 패장(敗將)의 그것이어서 아름답지만 속절없다. 아마도 김훈 자신이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스트 김훈의 허무주의는 기자 김훈의 그것과 같이 ‘가장의 허무주의’이되, 이 대책 없는, ‘무능한’ 가장의 허무주의이다. 어찌 그 허무주의가 안쓰럽지 않겠는가? 하여 그 ‘허무주의들’에 비하면, 보수주의란 딱지는 사소하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사르트르에 의하면, 현실과 지시적 연관을 갖는, 그러니까 현실을 ‘앙가제’하고, 현실에 ‘앙가제’하는 문학은, 곧 소설은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에 복무해야 한다(그는 총구를 제대로 겨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무엇을’을 달리 ‘의미’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순수한 음악의 상태, 무의미의 상태를 지향하는 시와는 달리, 산문(=소설)은 무엇보다는 ‘의미’해야 하며, 의미-지향적이어야 한다(그것이 시와 산문의 차이이다). 비록 그 의미가 단선적이거나 독백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카뮈와의 논쟁에서 사르트르-장송이 지적했던 바는 카뮈의 아름다운 문체가 ‘앙가주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의 아름다운 문체,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은 소설에 적합하지 않다. 소설가의 문체는 적당히 아름다워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그것이 ‘산문적 일상’을 묘사/기술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즉 소설가가 자신의 얼굴, 필체, 문체를 갖는 건 바람직하며, 동시에 좋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문체’이어서는 안된다(<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란 프랑스 영화의 문제의식이기도 한데,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아내’로서 적합하지 않다. 결혼생활은 ‘산문적’이기 때문이다).



<현의 노래>의 서평이 들어 있는 <텍스트>(4월호)에는 ‘여성’을 주제로 한 서평들도 여러 편 모아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한국어로 ‘아름다운 페미니스트’란 부제를 달고 나온 <글로리아 스타이넘>이다. 플레이보이의 바니걸로 위장취업할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미국의 이 대표적인 ‘스타’ 페미니스트 운동가의 평전인데, 스타이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녀의 ‘너무 아름다운 외모’는 페미니즘에 혼란과 지장을 초래한다. “곧 그녀는 페미니스트이기에는 너무 예쁜 여성인 것이다.” 그래서 튄다. 다르게 말하면, 그녀는 ‘문체적/문채적’이다. 가령, 그녀의 50세 생일파티 풍경. “보스턴의 부동산 부호가 파티준비를 돕겠다고 나섰고, 파티 장소는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 그랜드볼륨이었다. 베트 미들러의 축하공연이 있었으며 스타이넘의 어린 시절과 젊었을 적 사진이 실린 생일 책이 전시되었다. 언론 또한 이 파티를 크게 다루었다. 스타이넘은 일에서나 개인적으로나 인생의 정점에 서 있었다.”

페미니스트의 삶의 불행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성공적인’ 페미니스트란 건 뭔가 어색하다. 결국 페미니즘은 그녀의 미모와 상승작용하며 스타이넘이란 한 여성에게 ‘성공한 삶’을 가져다 준 것이지만, 그것이 전체 페미니즘, 혹은 억압받는 여성 전체의 삶과는 과연 얼마만큼의 관계가 있을까? 그녀를 비판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대로, 차라리 스타이넘이란 ‘스타’ 없는 페미니즘이 더 낫지 않았을까?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못생겨야 할 필요는 없지만, 적당히 못생길 필요는 있다(그래야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주장을 듣는다). 즉 적당히 예뻐야 한다. 그건 다른 모든 ‘산문적’ (정치적)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시적인’ 외모는 ‘산문적’ 일상에 적합하지 않다.


 

 

 

이건 너무 ‘마초적인’ 생각인가? 가부장적인 김훈은 ‘마초적’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그 자신은 거기에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념적으로 그와는 좀 거리가 먼 ‘B급 좌파’ 김규항조차도 똑같이 ‘마초적’이란 비판을 받곤 한다는 점이다(술어논리에 따르면, ‘보수주의자’ 김훈과 ‘진보주의자’ 김규항은 똑같다). 그건 그가 성모순보다 계급모순이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리고 그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공격적으로 드러낸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사실 나로선 그의 비판자들보다는 그의 의견에 공감하는 바가 더 많다. ‘중산층 페미니즘’, 즉 “계급과 사회구조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페미니즘은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다른 여성, 빈민, 식민지인)’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는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이다(<텍스트>의 서평에서 인용).

그런 의미에서 이 페미니즘은 민주주의와 똑같은 딜레마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 또한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민주주의의 기원으로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바탕은 노예제였다). 미국, 프랑스, 영국 등 대부분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경영국가, 제국주의 국가였던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라크 침공을 거론하면서 이런 것이 미국의 민주주의냐고 비판하는 것은 따라서 예리하지 못하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반민주주의적, 제국주의적 행태이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 착취해야지만, 자국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한국의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적 ‘평등’은 국외적 ‘차별’에 의해서 지탱된다). 민주주의가 고상하고 고급스런 제도라는 건 그런 뜻에서이다(어느 정도의 경제적 바탕, 가령 1인당 국민소득 1만불 이상이라든가 하는 토대가 마련돼야지만, 민주주의란 제도는 작동한다). 이러한 사정은 ‘고상한’ 페미니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고상한 것들이란 원래 그 모양이다). 나는 다른 민주주의, 다른 페미니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자신할 수 없다.


 

 

 

 내가 김규항을 처음 알게 된 건, 그러니까 그의 글을 처음 읽게 된 건 <씨네21>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지면을 통해서였다. 공동으로 연재하던 몇 사람의 필자들 가운데에서 유독 그가 눈에 띄었는데(그는 아마도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지면이 낳은 최고의 ‘스타’일 것이다), 그건 그가 자신의 ‘문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더라도 그의 문장들은 ‘김규항’을 입증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비유컨대, 김훈의 문체가 아름답고 유장한 ‘패장(敗將)의 문체’라면, 김규항의 문체는 ‘자객의 문체’이다. 백전백패를 ‘자랑하는’ ‘패장의 문체’와는 달리, ‘자객의 문체’는 ‘무엇을’에 ‘어떻게’가 복무하는 문체이다. 마치 자토이치의 검술처럼, 그는 짧게 끊어서 군더더기 없이 급소들만을 공격한다. 그래서,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때에라도 그의 문장(=수사학)에는 매료되었다. 이후에 내가 가급적이면 그가 쓴 모든 글을 챙겨 읽고자 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에 인터넷에서 그가 쓴 글을 읽고 다소 실망했다. 유시민에게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붙이는 글이었는데, 내용에 실망한 게 아니라(“나는 유시민을 보수주의자로 본다”는 데 어쩔 것인가?), 문체가 예전의 문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온라인 글쓰기의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해도(설마 그런 류의 글들이 공식적으로 출판되는 걸까?) 그의 글은 더 이상 김규항의 ‘얼굴’도 ‘필체’도 보여주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손가락’ 대신에 글의 ‘내용’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다.

김규항의 문체를 ‘자객의 문체’라고 했는데, 그의 칼끝이 유독 예리하게 겨냥하는 것은 우파(=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이 유사-좌파(=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것이 좌파 전체의 ‘이익’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유시민을 전여옥과 ‘똑같은 놈’이라고 배제함으로써, 좌파는, 혹은 민노당은 어떤 이익을 챙기는지) 모르겠지만, 유사-좌파들을 걸러내는 일을 이 ‘B급 좌파’는 자신의 소명으로 간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단순하게 말해서, 민노당을 지지하지 않은 90% 국민들, 혹은 요즘 지지율이 좀 올라갔다고 하니까 한 70%의 ‘불순한’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들을 어떻게 걸러내고 순화/훈육/계몽해야 하나?). 그것은 한국의 논객 중 가장 ‘좌파적’이라 할 만한 자신의 입지/주장을 ‘B급’이라고 공언하는 그의 ‘결벽’에 이미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좌파의 ‘최소한’이라고 간주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기준에 미달한다면, 모두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뒤집어써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준에 따를 때, 제도권 좌파, 즉 개량주의적 ‘의회주의 좌파’는 진정한 좌파인가? 동급의 의원으로서 한나라당 의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정을 논할 민노당 의원들은 과연 좌파다운 좌파인가? 대학에 몸담고 있는 제도권 좌파, 자칭 ‘좌파’ 교수들은 과연 진짜 좌파이며 진보주의들인가?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면서 ‘아빠’로서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일(“너희는 이렇게 바르게 살아라!”)은 진정 얼마나 좌파적인가? 혹은 한국의 자본주의라는 ‘식인체제’ 하에서 구차하게 계속 살아가는 일은 과연 얼마나 좌파적인가? 등등.

‘자객식’으로 말하자면, 사실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놈들”은 전부 보수주의자이고, “죽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 진보주의자이다. 유기체의 생존은 ‘항상성(호메오스타시스)’이라는 걸 조건으로 한다. 항상성이란 건 ‘기브 앤 테이크’, 즉 주고받는 타협을 통해서 유지된다. 단칼에 자결하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일은 언제나 그러한 ‘타협’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인간조건이다. 그럴 경우, 급진적인 진보주의 혹은 절대적 진보주의(‘숭고한 A급 좌파’란 게 있다면)란 그러한 타협과 인간조건으로부터의 ‘단절’을 뜻한다. 즉,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죽음을 무릅쓸지언정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것(지젝 같은 좌파가 ‘죽음충동’에 그토록 매혹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그에게 유일한 ‘행위(act)’는 상징적 ‘자살’이다). 지젝과 네그리 같은 좌파들은 모두 기계-인간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바, 그것은 현재의 인간조건이 극복되어야지만 진정한 ‘진보’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김규항도 그러한지?).



 

 

 

사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새로운 인간’이란 테마는 러시아문학에서는 이미 고전적인 테마이다.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가 정면충돌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를 둘러싸고서이다. 1917년 혁명 이후에 역사는 한동안 체르니세프스키의 편이었다. 사회주의 인간형, 혹은 공산주의 인간형이 인민들에게 요구되었고(그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벌레’로 낙인찍혔다), 인간개조론이 제기되었다. 요컨대, 일차적 본성이든(공병호가 얘기하는), 이차적 본성이든(아도르노가 얘기하는), 현재의 ‘이기적인’ 인간본성을 가지고는 사회주의 유토피아(=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공산주의는 ‘인간들’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천사들’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왜 누구는 대학교수를 하고, 누구는 탄광노동자를 해야 하는가? 그걸 누가 결정하는가? 제비뽑기로 결정하는가? 혹은 로테이션을 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허용해서는 사실상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자발적인 ‘의무감’에 따라 마치 ‘기계’처럼 처리되는 수밖에 없다. 즉 인간-기계, 기계-인간들을 만들어내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좌파적 휴머니즘’이란 말은 ‘듣기 좋은 소리’이거나 넌센스라고 생각한다(그런 얘기를 들먹이는 좌파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C급이다). 휴머니즘을 가지고는 ‘좌파’를 할 수도 없고, ‘좋은 세상’을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진보가 변화/변혁에 대한 요구를 의미할 때 가장 먼저 변화/변혁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며, 인간조건 자체이다(기계-인간이 되기 전이라도 최소한 ‘강철 인간’은 돼줘야 한다. ‘스탈린’이란 이름에 새겨진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인간복제라거나 유전자 조작을 가장 앞장서서 환영해야 할 사람들은 라엘리안들이 아니라 좌파들이다. 그리고, 인간본성 운운하며, 인간복제에 반대하는 하버마스 같은 철학자야말로 유사-좌파, 즉 보수주의자이다. 진정한 좌파가 되기 위해선, 모성을 버리고, 부성도 버리고, 인간성 자체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유토피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리라(모스크바-유토피아의 ‘새로운 러시아인’들처럼). 좌파, 혹은 ‘에덴의 기계들’에게 입력된, 프로그래밍된 행복!

말이 좀 길어졌다. 요점은 보수주의자니, 진보주의자니 하는 딱지 붙이기가 얼마만큼의 준거성, 혹은 의미연관성을 갖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급진적 환경주의자들에 따르면, 환경문제의 해결은 이 지구의 암종인 인간이란 종이 완전히 사라질 때에야 가능하다. 거기에 무슨 타협의 여지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 서면, 좌파니 우파니 하는 구분은 사소하다. 좌파 박테리아와 우파 박테리아가 아웅다웅하고 있는 것이기에. 빨간색이건 파란색이건 박테리아는 박테리아일 뿐이다. 거꾸로 그런 게 아니라면, ‘작은 차이’를 중요하게 간주해야 한다. 좋은 사회, 혹은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하는 강박관념이나 순수에의 결벽에 들려 있지 않다면 말이다.

김훈과 이문열은 다르며, 유시민과 전여옥도 다르다. 그리고 전두환과 김대중이 다르며, 노무현과 이회창도 다르다. 그리고 부시와 케리도 다르다. 그들은 아주 조금 다를 뿐이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게 내 상식이고 정치적 감각(이기 이전에 일상적 감각)이다. 나는 우리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될 거라고 믿지 않지만 적어도 ‘덜 나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덜 나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식과 감각이 필요하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덜 나쁜 사회’의 의의를 가르쳐준 이는 기자(요즘은 편집위원이던가?)이자 에세이스트이며 소설가인 고종석이다(자칭 ‘자유주의자’인 그가 복거일의 제자를 자처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 또한 ‘문체’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 문체는 화려하지도 간결하지도 않으며 그저 담백하다. 그리고 상식적이다. 그는 허무주의자(혹은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B급 좌파도 아니다. 그는 개인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이다. 이념의 스펙트럼 속에 굳이 자신을 분류해 넣어야 한다면, 나는 그와 같은 칸에 분류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즉 나의 정치적 입장은 그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 그에게서 감화를 받은 바가 많은 탓일 것이다(그에 따를 때, 외모에 의한 서열화는 지성에 의한 서열화보다 더 나쁘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이것도 마초적인가?).

김훈, 김규항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고종석의 (모든 글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글들을 읽었고, 읽고자 했다.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서얼의식’은 갖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특별한 트라우마나 결벽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논리적이지만, 모나지 않고 둥글다. 따라서, 그런 그의 문체가 소설이란 장르와 잘 어울리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김훈이 소설을 못 쓰고, 김규항이 소설을 안 쓰는 데 반해서, 고종석은 소설을 잘 쓴다(이 세 ‘글쟁이’를 내 식대로 분류하자면, 김훈은 ‘예술가’이고, 자칭 ‘출판인’이어서 ‘출판운동’을 하는 김규항은 ‘운동가’이며, 고종석은 ‘지식인’이다). 더불어, 그에게선 기자와 에세이스트와 소설가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지도 날카롭지도 않지만 담담하면서 유려한 그의 문체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체는 그렇게 그 사람이 된다…

06. 03. 19 -20.

P.S. 언젠가 김규항의 홈피에 들렀다가 인상깊게 읽은 것이 그의 '문장론'이다. 작년 8월에 씌어진 것인데, 이상하게도 9월에 나온 그의 책 <나는 왜 불온한가>(돌베개, 2005)에는 실려 있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의 '문체'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필히 읽어볼 필요가 있는 글이다. (저작권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여기에 옮겨놓는다(부분 발췌하고자 했으나 저자의 뜻이 훼손될 우려도 없지 않아 그냥 그대로 옮겨놓는다). 여기서도 군말과 강조는 나의 것이다.

-이따금 “문장론이 뭐냐”는 식의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현실에 익숙하지(하고 싶지) 않아서 늘 대답을 흐리곤 한다. 사실 나는 어떤 문장론을 갖고 글을 쓰진 않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 나는 글의 소재를 얻기 위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쓴다. 어쨌거나, 문장론이 있든 없든, 내가 초고를 써놓고 퇴고를 거듭하는 걸 보면 나에게도 문장에 대한 어떤 태도는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건 두 가지일 것이다. 간결함과 리듬.(*그러니까 그에게 글, 혹은 문장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내가 쓰는 글의 8.5할쯤에 해당하는, 공을 들여 쓰는 글은 초고를 쓰면 적어도 서너 번 이상은 퇴고를 한다. 군더더기라 느껴지는 건 망설임 없이 없애거나 좀 더 간결한 표현으로 바꾼다. 나는 중언부언 하는 것만 군더더기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이 화려한 표현도 군더더기라 생각한다. 그리고 부러 반복 효과를 내려는 게 아니라면 같은 글에선 같은 단어를 쓰지 않는다. 10매 이하 칼럼에선 반드시, 30매가 넘어가는 긴 글에선 되도록 그렇게 한다. 동시에 리듬을 만들어간다. 거창하게 말해서 운율을 맞추는 건데, 눈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서 리듬감이 흐트러지거나 호흡이 끊기는 부분은 글자 수를 고치거나 단어를 바꾼다.(*'간결함'이 그가 첫손에 꼽는 글의 요건이다. 앞에서 나는 그의 '자객의 문체'가 '자토이치의 검법'을 연상시킨다고 적었다.)  

-간결함과 리듬이 덜 다듬어진 글을 내놓는 것처럼 불편한 일은 없다. 어쩌다, 내 글의 1.5할쯤에 해당하는 글에서, 이런저런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도리 없이 그러곤 하는데 그런 글들은 그저 실용적인 이유를 위해 일회용으로 존재한 것일 뿐, 내가 썼지만 더 이상 내 글은 아니라 여긴다. 간결함과 리듬 말고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쉽게 쓰는 것이다. 나는 왜 거의 모든 글쟁이들이 글은 쉬우면 쉬울수록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배운 사람들이나 알아먹는 어려운 말을 이유 없이 쓰지 않는 건 물론이려니와 되도록 한자말을 줄이려고 애쓴다.(*하지만, 모두가 간결하고 쉽게 쓴다면 '간결함'과 '쉬움'이라는 미덕 자체가 증발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간결함, 리듬, 그리고 쉬움 같은 문장에 대한 내 모든 태도들은 오로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이오덕 선생이 말씀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 모름지기 글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글을 씀으로서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

앞에서, 김규항은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라고 적었지만, 이 마지막 문단에 의거할 때 그건 그의 문장론으로서 불충분하며 부정확하다.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고 할 때 '문장'은 '삶'과 등가화되고 있으며, 그럴 때 '문장'은 단지 수단에만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그의 삶이다. 그러니, "문체는 곧 사람이다"(뷔퐁)라는 고전적인 명제에 기대지 않더라도 나는 그가 '문체주의자'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 또한 'B급 좌파'이면서 동시에 '양파'인 것이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양파'는 롤랑 바르트의 그것처럼 그저 텅빈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러시아 정교회 사원 지붕들에서 보듯이 신성함에의 의지와 염원을 담고 있다. 내가 문체주의자들을 존중하는 이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연한 일이지만,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집에서 받는 건 설날 아침의 세뱃돈밖에 없다. 차례상 차리는데 쓰시라고 나와 동생이 돈을 드리는 것과는 별개로 세뱃돈은 부모님의 기분 문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동생과 나는 엄마의 생활비를 드리고 있고, 엄마는 세뱃돈과 생일에 맛난 거 사 먹으라고 용돈을 주신다. (그러고 보니 김치며 반찬 등등도 보내주시는구나.)

 

그렇게 살아 왔으니 결혼을 한다고 해서 집에 손 벌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오래 전부터 집을 옮기려고 했지만 전세가 빠지지 않다가 갑자기 집이 나가는 바람에 새 집을 구하게 되었고, 그 참에 아예 살림을 합치겠다고, 그러니까 신혼집을 꾸미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도 모든 준비는 당연히 나와 애인이 알아서 하는 것이었다. 엄마한테는 이리저리 되었으니 이리저리 하겠다라고, 거의 통보에 가까운 보고를 드렸을 뿐이다. 물론 동생 결혼 때 말이 많았던 걸 감안해서 최대한 엄마 마음 상하지 않게 예쁘게 얘기했다. 엄마는 혼수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하셨지만, 난 괜찮습니다, 내가 알아서 할께요. 나중에 이사 다 하고 나면 놀러나 오셔요. 라고 대답했다. 내쪽만이 아니라 애인의 부모님께도 마찬가지다. 처음 뵙는 자리에서(라고 해봤자 여태 그 한 번 외에 뵌 적도 없지만) 부모님께 어떤 도움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그래도 맏딸, 맏아들 결혼시키는 건데, 부모님들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안하는게 오히려 좀 섭섭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건 처음부터 확실하게 정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뉴스에서 결혼하는데 들어가는 평균 비용이 1억 3천이라는 통계를 봤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집을 얻어 살려면 그 정도 예상할 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 모든 비용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 신혼 부부는 얼마나 될까. 지난 달 결혼한 친구는 일산에 32평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는데 당연히 남자 부모님이 해 주신 거였다. 내년에는 아예 집을 사 주신단다. 친구 쪽에서는 어머니가 나서서 모든 혼수를 꾸려 주셨다.(친구는 그 동안 번 돈을 몽땅 어머니께 드리긴 했다.)

 

주말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른 친구에게서 소식을 듣고 연락한 것인데, 애인네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해준다고, 소식을 전한 친구가 날 걱정하더란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려고 그러나 보지, 라고 대답했는데, 준비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금하다고 전화를 한 것이다. 내가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뻔히 아는 것이 그딴 소리를 하다니. 하기야 저도 사는 게 힘드니 그렇게 기반 없이 시작해서 어쩌겠냐고 나름 나를 염려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32평 아파트에서 번듯한 살림 갖춰 놓고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거, 부러운 일인가?

글쎄. 가진 게 많아 한꺼번에 다 하면 좋을 수도 있겠지만, 32평 아파트에서 시작하든 18평 연립에서 시작하든 내겐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내가 가진만큼,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살면 되지 뭘 얼마나 욕심을 부릴까. 워낙 재테크니 뭐니 하는 것들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어쨌거나 나랑 애인이랑 둘이 버는 돈도 적은 건 아니다. 곧 아파트를 사거나 부자가 되거나 하지는 못하겠지만, 책 사고 영화 보고 하고 싶은 거 할 만큼은 되는데 그 정도면 훌륭한 거 아니야.

 

 

 


댓글(3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ooninara 2006-03-20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7평에서 시작했어요.
둘이서 좋기만 하다면 집 평수가 중요한것은 아니죠?
30평대에 살아도 부부싸움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예요.
축하드려요~~~~~~~~~~~~~~~~~~~~~


Koni 2006-03-20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께서 서운하시기도 하겠지만, urblue님 굉장히 멋지세요! 결혼은 부모님에게도 인생의 큰 이벤트라, 어른들 입장에서는 조금 불편하시기도 하겠지만... 저도 urblue님처럼 결혼하고 싶어요.

blowup 2006-03-20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렇지 않다가도 주변 사람들의 걱정에 가끔 '내가 이상한 걸까' 싶기도 해요. 아이가 생기면 다른 의미의 경제 관념이 생길 것 같긴 한데. 지금은 죄책감 들지 않을 정도의 소비와 나눔을 중심으로 생각해요.

sudan 2006-03-20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깜짝. 대체 누가 뭐란다고 저런 제목을. -_-
그 정도면 훌륭하다 마다요. 보기에도 좋아 보여요. 말씀대로 하고 싶은거 하고 살면 되죠. (게다가, 서재방도 따로 있고.)

2006-03-20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6-03-20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크기와 행복은 비례하지 않더라구요..^^
님보다 더 작은 집에서 시작한 부부는 점점 크게 불리면서 알콩달콩 살고 있고요
타워팰라스에서 시작한 제가 아는 어느 부부는 2년도 못되서 이혼했답니다.
부부간의 교감만 좋다면 표면적인 17평은 심리적인 타워펠리스가 될꺼라고
생각되요..^^

2006-03-20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리스 2006-03-20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7평을 71평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게 사랑의 힘이지요.
동시에 71평을 17평이 아닌 1.7평으로 만드는 재주를 가진게 불화란 것이죠.

조선인 2006-03-20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딱 18평 연립에서 시작했어요. 흐뭇 흐뭇.

urblue 2006-03-20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그러셨군요~ 반가워라. 수니님 부부처럼 결혼 10년 기념 파티, 이런 거 하게 될 날을 기다려야겠어요. 그땐 뭐 더 넓은 집에서 더 잘 살겠죠. ^^

냐오님, 엄마 말씀에 의하면 전 결혼을 너무 쉽게 보고 있답니다. ㅋㅋ 그치만 뭐 어려울 게 있나요. 예물이니 예단이니 이런 거 하나도 안 하겠다고, 예식은 최대한 간소하게 하겠다고 결정만 내리면 그 다음에는 할 일도 없는걸요.

나무님, 죄책감 들지 않을 정도의 소비와 나눔이라니, 멋진걸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야겠군요! 친구가 걱정했다는 소릴 듣고는 좀 기분이 상했어요. 어떤 생각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왠지 서운하더라구요.

수단님, ㅎㅎ 깜짝 놀라시기는. 제 로망이 3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책방이잖아요. 이번참에 책방을 2개나 가지게 되어서 흐뭇합니다. 사이즈 작은 게 조금 문제지만.

숨은님, 알죠, 잘 사시고 계신 거. 저도 그렇게 살고 싶잖아요. ㅎㅎ
그러고보니 제 동생도 결혼할 때 집에서 좀 받긴 했습니다. 워낙 가진 게 없어놔서 말이에요. 그치만 녀석은 그 돈 엄마한테 갚는다고 합니다.

urblue 2006-03-20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심리적인 타워팰리스라니, 너무 멋진 말이잖아요. >.< 애인이 메피님처럼 절 떠받들어 주면 더 좋을텐데 말입니다. ㅋㅋ

숨은님, 그럼요, 그럼요. 마음도 가까이, 몸도 가까이 딱 붙어서 살 건데 집 넓으면 뭐하겠어요. 저도 열심히 잘 살겁니다. ^^

낡은구두님, <앙상블>이라는 만화가 생각나요. 사랑의 힘으로 가난을 극복하는 부부 얘기.. 아자!

조선인님, 오~ 동지가 또 계시는군요. 다들 이리 잘 살고들 계시니까 힘이 납니다. ^^

비로그인 2006-03-20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알아서 하는 결혼이라니 블루님 정말 멋지시네요..^^
저희는 18금반지 하나씩 나눠낀게 전부였답니다.독일이야 전세가 없고 지금도 제 집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침대하나 달랑 새로 사서 시작한 그 작은 월세집이 생각나네요..ㅎㅎ
누구보다 잘 사실 거로 보예요..^^

urblue 2006-03-20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대하나 달랑 사셨다구요? 그러고보면 저희는 이것저것 많이도 사고 있네요. ^^
제 친구 중에도 독일 남자랑 결혼한 애가 있는데, 신랑이랑 같이 한국에 왔을 때 결혼 반지라고 보여주는게 18K 금반지였어요. 그것도 이뻐보이기만 하던걸요.

로드무비 2006-03-20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고보니 결혼할 때 가전제품을 냉장고만 달랑 한 개 새로 샀었네요.
시계도 선배언니가 선물받은 걸 세트로 주어서 한 개씩 나눠 끼고.
반지 18K는 기본.
서재 자랑 자꾸 하시니 배가 살살 아파옵니다.=3=3=3

반딧불,, 2006-03-20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좋죠.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근데 살다보니 조금만 여유가 있었으면 하고 부러워합니다;; 속물 맞거덩요~~^^
그래도 믿음과 신뢰만 있으면 더 잘 살 수 있죠. 화이팅.

urblue 2006-03-20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처음에 홍대 앞에서 봤던 집들은 대개 14~5평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엄청 넓은 집이에요. ㅎㅎ

새벽별님, 님도 32평에서 시작한 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 그러니까, 하나도 안 부러워할래요~

로드무비님, 언제 서재 자랑 자꾸 했다고 그러시는지. ㅎㅎ
결혼 반지 찜해 놨어요. 18K 금반지로.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

urblue 2006-03-20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행복할게요. ^^

balmas 2006-03-21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평이면 넓은 거 아녜요??? ('')(..)('')

urblue 2006-03-21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넓은 거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흑흑...

urblue 2006-03-21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하지만 가진 책 다 가지고 오면 책방 두 개로도 모자란다구요. 게다가 제가 읽을만한 건 얼마나 될지...흠...

마태우스 2006-03-21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님이 이렇게도 멋진 분이신지 미처 몰랐습니다. 앞으로는 잘하겠습니다. 꾸벅.

urblue 2006-03-2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도 멋진'이라니, 저도 몰랐는걸요. ^^a

2006-03-21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3-21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멋지세요! 저두 소파도 길거리에 나온 걸 줏어오고 식탁도 남이 이사가면서 파는 걸 사오구 그랬어요. ^^ (앗, 좀 심했죠?)

urblue 2006-03-21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만난 다른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결혼한 동생이 주말마다 시부모님 댁에 가서 점심 저녁을 함께 먹는답니다. 예외가 없다네요. 결혼한지 벌써 몇년인데! 엄청 갑갑하겠지요. 그래도 싫다 소리도 못하고. 집도 사주고,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많은 굉장한 분들인 모양이지만. 물론 없는 집이면 없는대로 아쉽고 힘든 경우가 많겠지만, 그렇게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어요.
애인도 장남이긴한데... 흠... 애인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뭐 나중에야 어떨지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에요. ^^;

urblue 2006-03-21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다녀가셨네요. 반갑습니다.
웬만하면 가진 걸로 어떻게 해 보자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그러기도 쉽지 않네요. 자꾸 이거저거 사들이고만 있습니다. 에휴. 그나마 소파랑 식탁은 들여놓을 자리가 없으니 다행이지 뭐여요. ^^;;

클리오 2006-03-2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괜찮은데 그 놈의 집땜에.. 지금도 엄마는 한번씩, 남자가 집 한채 확 사줄 수 있는 재력이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하지만... 엄마는 돈보다 맘편한게 최고라는 사실을 잊으셨나봐요.. ^^

2006-03-21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eylontea 2006-03-22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남이 아니라 결혼은 내가 하는 거죠.. 나와 상대편만 오케이 한다면.. 서로가 바라보는 것이 같으면.. 그것으로 결혼 준비도 결혼 생활도 하는 것이죠..

urblue 2006-03-2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 고맙습니다. 결혼하는데 이런저런 조건들이 문제가 된다고 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봐 왔어요. 전 그런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바라보는 것이 같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다행이지요. ^^

다시 숨은님, 음, 그러셨군요. 아무리 부모 자식 사이라도 사생활이라는게 있는 거니까...
무거운 얘기 아니에요. 제가 결혼한다고 이런 저런 얘기 늘어놓을 때마다 이미 경험하신 분들이 다정한 충고와 조언을 해 주셔서 도움이 많이 되는걸요. ^^ 고맙습니다.

클리오님, 집 한채 확 사 줄 수 있는 능력이 없어도 마음 편하게 해 줄 능력이 있으면 된 거네요. ^^

동그라미 2006-03-24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마음 편하게 해주고 두사람 함께 하는 그 시간들이 행복해요..축하드려요 잘사세요 이쁘게...

urblue 2006-03-2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그라미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
 

결혼식인가? 지나는 길목에 있는 건물 근처에 왁자하니 사람들이 몰려 있다. 괜히 호기심이 발동하여 입구를 기웃거리는데, 문 양쪽에 선 남자와 여자가 나를 가로막는다. 들어가려면 신분증을 보여야한다나 방명록을 써야한다나. 귀찮다. 아쉬운 발걸음을 뗀다. 살짝 모퉁이를 도니 눈에 잘 띄지 않는 다른 입구가 보인다. 옳지, 저기로 들어가면 되겠구나, 하는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거긴 입구가 아니에요. 저 앞으로 가세요. 에이, 역시 귀찮아.

 

그저 터벅터벅 걷다가 후배 C를 만났다. 같이 밥을 먹기로 하고 막 움직이려는데 눈앞에 선배 S가 보인다. C가 S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며 뭔가 얘기를 시작한다. 즐거운가 보다. 나는 주위를 살피며 짐짓 딴청을 피운다. S와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C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나를 흘깃거리는 S와 눈이 마주친다. 어쩐지 절박한 눈빛, 하고 싶은 말이 있나. 하지만 난 할 말이 없다. 바로 외면한다. 드디어 C가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인사도 건네는 둥 마는 둥 하고 앞장서 걷는다.

 

돌담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 앞에 섰다. 승용차 한 대가 눈 앞으로 들어와 정차한다. 거긴 주정차 금지 구역인데. 게다가 일방통행로인가보다. 반대편에서 버스가 들어오더니 난폭하게, 위협하는 듯 승용차 바로 앞에 멈춰 선다. 부딪히는 줄 알았다. 승용차에 타고 있던 남자와 여자는 둘 다 놀란 모양이다. 버스가 나빠. 저 차가 잘못했더라도 저렇게 위험하게 운전하면 안 되지. 딱히 후배에게랄것도 없이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다. 승용차의 차창이 내려가고, 남자가 소리를 지른다. 오고 가는 고함과 대거리. 이 남자, 정말 열 받았나 보다. 그대로 차를 움직여 버스에 받아버린다. 참, 성질머리하고는. 남자와 여자가 내리고, 버스 기사도 내리고, 길 한복판에서 드잡이가 벌어진다. 몰려든 사람들로 웅성거린다. 나와 C는 길을 건널 생각도 하지 않고 돌담에 기대 서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문득 시선을 돌리다 웬 운동모자를 쓴 남자가 승용차 안으로 상체를 구부리고 있는 것을 본다. 와중에 좀도둑질이라니. 쯧쯧 혀를 차려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칼, 그것도 제법 큰 식칼이 눈에 들어오자 순간 숨이 멎는다. 그새 싸움이 끝났는지 승용차의 남자가 차로 돌아오다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운동모자를 알아챘다. 이건 또 뭐야, 너 잘 걸렸다, 하는 표정. 어, 칼 들었는데.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 속에 스치지만 내가 어쩌기도 전에 운동모자가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고 남자가 푹 주저앉는다. 저 남자 인상착의를 봐 둬야 해. 그렇지만 모자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차림새라도. 눈길은 남자를 좇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향하려는 찰나, 내가 보고 있었다는 걸 그가 알아채면 어쩌나, 긴장이 확 피어 오른다.

 

난데없는 음악 소리.

휴대폰이 울린다.

.

.

.

.

.

.

.

.

.

.

.

.

.

 

아침이다.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paviana 2006-03-16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잠이 확 깼어요. 긴장과 서스펜스가 느껴졌어요.ㅎㅎ

2006-03-16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dan 2006-03-16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곰. 꿈 얘기인거죠?

sudan 2006-03-16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감나게 잘 쓰시네.. 저도 잠이 확 깼어요.

urblue 2006-03-16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엔도님, 평상시에는 상상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째 꿈은 항상 요란법석인지 몰라요. 대체 뭘 욕망하는 걸까요? 큭큭.

수단님, 제 꿈은 늘 실감나는데다가 상당히 버라이어티 하답니다. ㅎㅎ

숨은님, 설마 으시시까지야.... 당연 꿈입니다.
그 아저씨 정말 운 좋으셨네요. 님이랑 한판 붙었으면..? ㅎㅎ

파비아나님, 아침잠 깨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

sooninara 2006-03-16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ㅠ.ㅠ 정말 놀랐잖아요..휴~~~

그림자 2006-03-1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정말 놀랐다구요 ㅠㅠ

urblue 2006-03-16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 그림자님, 에구...죄송 ㅠ.ㅜ 그렇게 놀랐다고 하시니 몹시 민망하옵니다.

sandcat 2006-03-16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이다, 란 문장 말고 다른 문장, 상황을 만들어보려 머리를 쥐어짰는데-찔끔찔끔- 끝내 떠오르질 않았어요. 으으.
이 상황은 꿈이 아닌 현실이며, 핸드폰에선 낯선 음성이 들려오는 거지요.
"****"
가온 보러 또 오셨었지요?

반딧불,, 2006-03-16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미치겠슈.
속았잖아요.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근데 피 많이 보셨으면 로또 사시지요.

urblue 2006-03-16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드캣님, 저 상황이 현실이었으면 아마 숨 넘어갔을지도 몰라요. 게다가 잘 울리지도 않는 제 핸드폰에서 낯선 음성이라니...

반딧불님, ㅋㅋ 근데요, 찔린 남자가 갑자기 주저앉는 바람에 피는 한방울도 못 봤어요.

瑚璉 2006-03-16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칼은 사람을 찌르기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답니다(^.^).

urblue 2006-03-16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찔러 보신 건 아니겠죠? ^^

히피드림~ 2006-03-17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꿈 잘 안꾸는 편인데,,, 흡사 짧은 단편소설을 하나 읽은 것 같아요. 앞으로도 꿈이야기 자주 해주세요.^^

urblue 2006-03-17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꿈은 정말 황당합니다. 그제는 엄청 잘생긴 유명 배우가 저한테 프로포즈를 하는데 제가 거절해버렸잖아요. ㅎㅎ

Mephistopheles 2006-03-17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몰래카메라~~!! 였습니다.~~
이러면 종 허망하겠죠..^^
혹시 꿈에서 피를 보셨나요...그러면 좋은 꿈이라던데요..^^

urblue 2006-03-18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몰래카메라라뇨...
피 하나도 못 봤습니다. 흑흑. 저한테는 그런 운도 안 따라주나봐요.
 

실은 예전에 이 선생님에 관한 페이퍼를 쓰다가 그만둔 일이 있습니다. 이벤트 공고를 보고 생각난 김에 마무리를 지을까 하는 마음으로 참가합니다. ^^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무수히 많은 선생님들과 만났지만 현재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선생님은 단 두 분 뿐이다. 한 분은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국어를 가르치셨던 여자 선생님.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하냐면, 워낙 규모가 작은 소도시라 선생님들이 대개 근처의 학교에서 옮겨 다니기 때문.) 나를 엄청 예뻐하신 분인데, 이 분 얘기도 나중에 한번 하긴 해야겠다.

 

다른 한 분은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영어 선생님. 이 분의 마스크는 로빈 윌리암스를 닮았다. 아마 한 두 해 전에 동네 극장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가 상영되었었고, 그래서 3월 2일 첫날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신 선생님을 보자마자 여기저기서 키팅 선생님이다~ , 캡틴! 하는 웃음 섞인 웅성거림이 새어 나왔다.

 



선생님은 영화 속의 키팅 선생님 만큼이나 재미있고 좋은 분이셨다,고 기억된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는 항상 학생들을 책상에 엎드려 있게 하셨다. 드르륵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교탁 위에 출석부와 교과서를 올려놓고는 고개를 들라.라고 말씀하시면 학생들이 모두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반장이 인사. 처음 한동안은 이런 희한한 방식에 키득거리고 웃었지만, 그것이 학생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는데 효과적이라는 건 확실했다. 수업 중 중요한 부분을 강조할 때는 별로 말씀하셨는데, '자, 이건 별 다섯 개'하시면 그 부분에 별 다섯 개를 그려넣곤 했다.

 

시골의 작은 학교인데다 당시는 단일 교과서였으므로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몇 년씩 해오던 걸로 근근히 버티는 교사들도 꽤 많았는데, 선생님은 무척 열심이셨다. 키팅 선생님처럼 환하게 웃으셨고, 우리가 지루해 할라치면 재미있는 얘기도 해 주셨다. 그 중 유독 기억나는 것은 운명의 상대에 관한 얘기다. 운명의 짝을 만나면 그 순간에 바로 알아볼 수 있다고 하셨다. 망치로 머리를 친 것처럼 ~하는 울림이 있든지, 딸랑딸랑 종이 울리든지 한다고. 사모님을 처음 봤을 때 종이 울렸단다. (애인을 처음 봤을 때 이랬냐 하면, 음)  

 

내가 반장으로 뽑혔다. 사실 1,2 학년 때에는 후보로 추천이 되어도 안 하겠다고 버텼었는데, 이 때 반장을 하겠다고 한건 역시 선생님 때문이었을 거다. 선생님은 반장이 일을 하기 편한 시스템을 학기 초에 만들어 주셨다. 예를 들면 과제라든지 돈이라든지 이것저것 걷어야 할 것들을 여러 명이 나누어서, 돌아가면서 하게 하셨다. 1번, 11번, 21번, 31번, 41번이 각각 10명 씩 책임지고 걷은 후 내게 건네 주는 것이다. 다음은 2번, 그 다음은 3번. 요즘의 학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는 뭘 그리 많이 제출했는지, 이런 일은 끊임이 없었던 것 같다. 다른 반들은 대개 몇 명씩 빠지는 경우가 빈번했지만, 우리 반은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익숙해지고 나자 조금 이상한 걸 발견했다. 특히나 각종 회비니 뭐니 하는 돈이 관련된다든가 하는 경우 선생님이 조회나 종례 시간에 아이들에게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다른 일로 교무실에 가면 그 일을 총괄하는 선생님이 묻는다. 블루야, 너네 반도 이거 걷고 있지? 난, 조그만 게 영악했다고 해야 할지, 그런 거 못 들었는데요, 라고는 절대 안하고, . 대답하고는 교무실 칠판에서 해당 사항을 찾아 반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전달했다. 그렇게 해도 우리 반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끝내 놓고 다들 긴장했던 마음이 한껏 풀어져 있을 때, 이제 수업은 더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고등학교 교과서를 복사해서 수업을 진행하셨다. 제법 어려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이들이 못하겠다고 떼를 쓰자 얼굴이 굳은 선생님이 내게 물으셨다. 너도 못하겠냐? . 무척 화를 내셨던 것 같다. 그 자리에서인지 나중에 따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게 실망했다는 말씀도 하셨다. 어린 나이에 무척 충격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진학 후에 선생님께 긴 편지를 드리기도 했다.

 

아무튼 선생님과의 기억은 대개 좋은 것이었고, 마지막의 일조차 나를 예뻐하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몇 년 전, 무슨 일로인가 선생님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는데, 문득 선생님이 과연 내게 좋은 분이었던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른 모든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좋은 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나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학급의 반장이었던 내게는 정말 좋은 선생님이었던 걸까. 얼마 전 친구에게 당시에 돈이나 다른 걸 걷는 것과 관련해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했더니 친구는 그런 건 몰랐다고, 놀랐다고 대답했다. 16살 아이에게 그런 일을 하게 한 건 절대 옳지 않았다고.

 

지금도 가끔은 선생님이 떠오른다. 한쪽으로는 여전히 가장 기억에 남는 훌륭한 선생님으로, 다른 한쪽으로는 옳지 않은 행동을 한 선생님으로. 어쩌면 한쪽은 일부 내 잘못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물만두 2006-03-14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추행 샘도 계셨으니 뭐, 할 말이 없죠 ㅠ.ㅠ

로드무비 2006-03-15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인 이야기는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구랴.=3=3=3

urblue 2006-03-15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헉... 설마 님께서 배운 사람 중에 있었다구요? ㅠ.ㅜ

로드무비님, ㅋㅋ 그런 것만 보시나요. 글구, 여기 말고 아프락사스님 서재에 있는 페이페어 추천해주세요!!

2006-03-15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본의 영화 잡지 <키네마 준보>와 <아사히 신문>에서 2005 베스트 1으로 꼽았다는 작품. (그런데 아사히는 우익 계열 아니었나.)

토요일 오후 3시 40분 상영을 보러 갔는데, 의외로 좌석이 4개 밖에 남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표를 끊고 바로 입장해서야 이유를 알았다. 워낙 상영관이 작기도 하지만, 토요일과 일요일에 감독 이즈츠 카즈유키와 배우 다카오카 소스케의 무대 인사가 있었던 것. 핸드폰으로 몇 컷 사진을 찍긴 했지만 줌을 몰라서 거의 제대로 안 나왔을 것이다.

감독은 일본 메이저 영화사라면 이런 영화는 절대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일본 내부의 문제를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재미있지만 뒷부분에 가면 손수건도 필요할 것이라면서 즐겨달라고. 다카오카 소스케는 싸움 장면도 노래하는 장면도, 모든 배우들이 정말 열심히 찍었다고 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정말 웃지 않을 수가 없다. 배경은 68년. 버섯돌이 머리 모양을 한 밴드가 여고생들을 실신시키던 시절의 이야기다.



어쨌거나 68년. 바야흐로 일렉트릭 기타는 저물고 포크 기타의 시대, 프리섹스를 외치는 히피의 시대, 안전모를 쓰고 쇠파이프를 든 전공투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도 조선 여학생의 동정을 잉크로 더럽히고 수작을 거는 일본인 고등학생들이 있고, 그런 일본인을 때리고 버스를 뒤집어 엎는 조선인학교 학생들이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것들을 진지하게 그리지 않는다. 처음에 등장하는 저 밴드부터, "전쟁은 전쟁으로 대체한다."는 마오주석의 말을 학생들에게 떠들면서 조선인 학교와의 친선 축구 시합을 성사시키라고 요구하는 교사, 서로 만나기만 하면 두들겨 패고 싸울 궁리만 하는 일본인 학교 학생들과 조선인 학교 학생들, 히피이고 싶어하는 대학 나온 술집 주인, 소련 무용단이었다가 탈출한 여성, 금지곡 <임진강>을 기어코 방송하고야 마는 라디오 PD까지, 거의 모든 인물들이 가볍게 희화된다. 게다가 배우들의 서툰 한국어까지 가세하니, 영화를 보는 내내 쉴새 없이 웃음바다다.

예상했던 정도의 비극이 있고, 그런 상황에 따라 다소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는 재일 조선인들의 한 맺힌 성토가 쏟아지기도 하지만,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일본인과 재일 조선인의 사랑이 열쇠라는 것은 일견 지나치게 안이한 결말이 아닌가 싶지만, 재일 조선인도 일본 땅에서 일본인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해본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일본 학생들과 집단 싸움을 벌이고 있던 안성(다카오카 소스케)이 아이가 태어난다는 말을 듣자마자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후다닥 달려가 버린 것.




조선인 친구들로부터 '강개'라는 조선식 이름으로 불리는 코우스케와 경자의 <임진강> 듀엣. 경자에게 반한 코우스케는 한국어를 공부하는데, 재미있게도 이 배우의 한국어 발음이 가장 나았다.




히피를 꿈꾸는 오다기리 조. 여기까지는 멀쩡한데 뒤로 가면.... ㅎㅎ 이 배우도 색깔이 참 다양하다. <메종 드 히미코>에서와는 완전히 딴판.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urblue 2006-03-14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세요. 상영 기간이 꽤 되는 것 같던데요.

물만두 2006-03-14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오다기리 조예요? 전 오기다리 조라고 만순이에게 말했는데 ㅠ.ㅠ

히피드림~ 2006-03-14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영관이 서울 하나뿐이라 못 봤어요. tv에서 우연히 예고편을 봤는데 재밌겠던데요. 비디오로 나오길 기다리는 중입니다.(아참, 아사히는 일본에서는 꽤 양심적인 신문이에요. 전체적으로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신문이고, 특히 북한에 대해 보도를 많이 해주죠.원래가 일본인들이 남한보다 북한에 더 관심이 많거든요. 재일작가 유미리가 이 신문에 일제시대 의열단에 관한 소설인 "8월의 저편"을 연재한적도 있어요^^)

Koni 2006-03-14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저기서 이 영화 얘기가 나오더군요. 전 오다기리 죠가 나온대서 관심을 가졌지만서두.

urblue 2006-03-14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하하, 오다기리에요. 남의 성(이름인가, 뭐 하여간)을 바꾸시네... 저도 가끔 그럽니다만. ㅋㅋ

punk님, 그러게요, 이런 영화 좀 여러군데서 해 주면 좋을텐데 말이에요. 나중에 비디오라도 꼭 보세요. 진짜 재미있습니다. 웃겨 죽는 줄 알았어요.
아사히가 그랬군요. 어디선가 우익 신문이라고 들은 희미한 기억만...헤헤.

냐오님, 이 영화에 등장한 오다기리 조 보시면 아마 확 깰걸요. ㅋㅋ 꽃미남을 저렇게 망가뜨려 놓다니, 했습니다.

2006-03-15 0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예진 2006-03-20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재미있을 거 같아요 ^^
아 참 그리고 유아블루님~~유아블루님하고 저는 이벤트로 만났잖아요 ^^
저 이번에 두번째 이벤트를 연답니다 ♥ 꼭 참여해주시면 좋겠어요! [너무 부담드리는 건가요 ㅜ.ㅜ;;]

urblue 2006-03-20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기는 한데, 예진양은 아직 못 볼걸요. 15세 관람가든가. 좀 잔인한 장면이 많아서. ^^;
중학생 된 거 축하해요. 사촌 동생도 이번에 중학교 갔는데.
이벤트 내용이 어떤건지 봐야겠지만, 가급적 참가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