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아나키즘과 맑스주의

 

 

 

 

온라인 저널인 '자율평론' 제16호(06. 04. 19)에서 하승우씨의 '아나키즘과 맑스주의: 오해와 차이'를 옮겨온다(필자는 폴 애브리치의 <아나키스트의 초상>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으며, <희망의 사회윤리 똘레랑스>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맑스 새롭게 읽기'라는 기획하에 진행된 강연원고로 보이는데(맑스의 '정치문제에 대한 무관심' 읽기이다), 아나키즘과 관련하여 러시아 인민주의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에 이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듯해서이다(오늘날 가장 유명한 아나키스트 지식인으로는 노엄 촘스키와 머레이 북친 등을 들 수 있겠다). 이 참에 나도 한번 읽어보고. 참고로, 인용문 전체에 대해서 따로 (-)표시를 하지 않았다. 나의 군말에 대해서만 (*)를 표시했다. 모든 강조와 이미지는 나의 것이다.  

1. 들어가며
오늘 같이 얘기할 텍스트는 아마도 이번 강좌 중에서 가장 짧은 글이자 가장 분명한 입장을 가진 글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짧고 분명한 글이기에 우리는 이 글의 맥락을 짚어야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이 글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아나키즘을 분명하게 소개하고 난 뒤에 비판하지 않고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구성하면서 그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분명 아나키즘과 맑스주의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고 특히 정치적인 입장에서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런 차이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아나키즘에 대한 우리의 오해부터 먼저 해소시킬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2. 하나의 아나키즘? n개의 아나키즘!
아나키즘은 하나의 단일한 이론적 내용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당대의 유명한 아나키스트들인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골드만, 베르크만의 사상은 조금씩 그 결을 달리 했습니다. 더구나 아나키스트들은 이론적인 노력보다 실천적인 투쟁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에 하나의 이론적인 흐름을 구성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대충 4가지 정도의 유파로 아나키스트들을 분류할 수 있을 듯합니다.

①아나키스트-꼬뮨니스트: 국가만이 아니라 사적인 소유권을, 조직을 거부하고 꼬뮨을 통한 대안사회 건설에 역점을 둠(대표적인 사상가로 표트르 크로포트킨)

②아나코-생디칼리스트: 노동조합을 통한 집산주의 사회건설을 목표로 삼음(대표적인 사상가로 미하일 바쿠닌)

③아나키스트-개인주의자: 꼬뮨과 노동조합 모두를 의심하며 자율적인 개인의 직접행동을 주장(대표적인 사상가로 막스 슈티르너)

④ 소박한(just plain) 아나키스트: 자신에게 어떤 접두사나 접미사를 붙이길 거부했던 아나키스트(대다수의 익명의 아나키스트들)

 

맑스가 “정치 문제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판하고 있는 프루동은 ‘역설의 사상가’(a man of paradox)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고, “나는 체계적인 이론을 만들지 않겠다”, “나는 분파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인물입니다. 이 인물은 체계적인 이론보다 신문을 만들고 정세를 비판하는 언론인, 평론가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평론을 쓰면서 비아냥과 역설을 적절히 구사했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의 말만 가지고 프루동을 읽을 경우 오해의 소지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엥겔스가 “권위에 관하여”에서 비판했던 바쿠닌 역시 마찬가지의 인물입니다. 바쿠닌은 “어떤 이론이나 이미 만들어진 체계, 이미 씌어진 책이 세계를 구하지 못한다. 나는 어떠한 체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나는 참된 탐구자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사회의 가장 소외된 계급들에서 혁명의 잠재력을 보았고 이론보다 본능적인 면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가장 민주적인 방식의 혁명을 주장하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비밀조직을 만들었던 바쿠닌 역시 역설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러시아의 인민주의 전통
아나키즘의 토대를 마련한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 모두 러시아의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그 자신은 귀족이었으나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했던 농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해방을 위해 삶을 바친 혁명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그 모범이 되었던 러시아의 인민주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짜르의 전제정치는 많은 반란을 자극했고, 스텐카 라친(*'라진'이다)과 에멜리안 푸카체프(*'푸가초프'이다. 영어식 표기는 'Pugachev'인데, 모음 'e'는 여기서 'yo'로 소리난다)의 반란이 대표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푸가초프에 대한 최초의 역사서를 쓴 사람은 시인 푸슈킨이었다). 이런 농민반란은 현실에 대한 저항과 증오를 자극했고, 나로드니끼라 불리던 인민주의자들은 러시아 민중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짜르에 대한 저항을 시작합니다.

귀족층을 중심으로 했던 인민주의자들의 활동은 테러를 비롯 짜르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수용하는 과격한 방식을 취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사상과도 연관되는데, 이들은 러시아 인민이 로마법적인 재산관념, 즉 사유재산의 절대성에 대한 관념을 가지지 않았고 평화로운 농민공동체를 받아들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국가는 적이었고 모든 권력은 악이고 죄라는 생각이 인민주의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거기에 러시아 특유의 기독교 전통도 이런 경향을 강화시켰습니다. 두호보르 종파처럼 “신의 자식들에게는 짜르나 통치권력, 그밖의 어떤 인간의 법률도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한 종파도 있었습니다(*이 두호보르 종파가 탄압을 받게 되자 캐나다로의 이주 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쓴 소설이 톨스토이의 <부활>이다. 실상 작가 톨스토이의 사상 자체가 아나키즘과 친연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레오(*Leo는 Lev의 영어식 표기이다) 톨스토이처럼 기독교에 바탕을 두고 인민주의를 실현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톨스토이는 소박한 영혼을 지닌 러시아 인민이야말로 역사의 핵심적인 동력이라고 봤습니다. 아나키스트는 인민에 대한 이런 신뢰를 이어받았고 대중이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고 봤습니다(*이때의 '인민'은 물론 '농민'이다. 아나키스트들과는 달리 맑스-레닌은 농민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 인민주의의 전통은 러시아 급진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은 인민에게 깊은 신뢰를 품었다는 점에서 동일했지만 그 신뢰를 드러내는 방식, 즉 혁명을 추구하는 방식은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톨스토이처럼 평화적인 방식을 추구했던 사람도 있고 트가체프처럼 짜르의 암살과 폭력만이 러시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1881년 3월에는 인민주의자들이 실제로 짜르 알렉산드르 2세(*사진)를 암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테러를 혁명의 방법으로 선택했던 이런 급진주의자들에는 인민주의자, 맑스주의자, 아나키스트, 허무주의자(니힐리스트)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전통에는 네차예프라는 인물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인물과의 관계 때문에 바쿠닌은 <인터내셔널>로부터 제명을 당하게 됩니다(흥미롭게도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에 따르면 레닌은 이 인물이야말로 조직을 가장 잘 이해했다고 칭송했다는군요).


 

 

 

 

4. 아나키즘과 맑스주의
사실 아나키즘과 맑스주의의 차이점은 목표보다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아나키즘을 어떤 하나의 이념으로 분명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에 여기서는 가장 일반적인 특징을 중심으로 살피려 합니다).

첫째, 아나키스트들은 맑스주의가 강조하는 전위조직이나 계급독재를 거부합니다. 아나키스트들은 대중이 스스로 ‘직접행동’(direct action)할 때에만 새로운 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연히 아나키스트들은 “노동해방은 노동자의 힘으로”, “농민해방은 농민의 힘으로”라는 구호를 외쳤지요. 서로간의 연대는 가능하고 필요하지만 실천적으로 운동을 이끌어갈 사람들은 반드시 그 당사자들이어야 하고 그 현실에서 생활하고 살아가는 일반 대중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특정한 계급이 전체 운동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하거나 의사결정과정이 중앙으로 집중된 조직을 반대하는 것으로도 드러납니다. 그리고 단순히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정치혁명이 아니라 삶의 영역 전반에서 벌어지는 생활의 혁명, 즉 사회혁명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둘째, 아나키스트들은 역사가 특정한 발전법칙(역사적 유물론 또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따라 실현된다는 생각을 거부했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은 새로운 사회의 구체적인 청사진이 미리 마련될 수 없다고 봤고 새로운 사회가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운동에 참여하는 대중의 집단적인 활력을 통해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관점은 아나키스트들이 과학적인 합리성과 의식보다 대중의 본능과 연대에 희망을 걸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납니다. 바쿠닌은 대중이 지닌 반란의 본능과 파괴적인 충동에 희망을 걸었고, 크로포트킨은 서로 돕고 보살피는 본능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새로운 아나키즘 사회는 냉철한 이성이나 지성보다 창조적인 파괴를 지향하고 서로 보살피는 본능에 바탕을 뒀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탁월한 지성과 능력을 갖춘 엘리트의 중요성을 감소시켰습니다(*때문에 지식인-아나키스트는 지식인-맑시스트와는 사뭇 다른 '애매한' 포지션을 갖는다).

셋째, 러시아를 중심으로 발전한 아나키즘 이론은 노동계급보다 농민을 중심으로 혁명 이후의 사회를 구상했습니다(프루동 역시 프랑스의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죠). 물론 아나키스트들도 산업혁명이나 과학기술로 인한 생산양식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고 그런 변화를 긍정적으로 봤지만 대규모 공장체제를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은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잘 감지하지 못했고 농민공동체가 가진 본능적인 측면에 주목했습니다(*그런 맥락에서 아나키즘은 러시아의 전통사상 내지는 자생적 사상이며, 러시아 맑스주의는 (수입된) 서구의 사상이다. 오늘날 이것은 '농민의 사상' 대 '노동자의 사상'으로 대별될 수 있다). 또한 한 사회를 중앙화된 권력으로 통합하지 않고 각자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사회전체적인 이론틀이나 이론적인 청사진을 개발하지 않았습니다(*아래 그림은 프루동과 바쿠닌).

4. 맑스는 왜?
“정치 문제에 대한 무관심”에서 맑스는 프루동과 프루동주의자들을 격렬하게 비판합니다. 정당을 구성하지도 않고 파업을 반대하는 입장은 맑스의 말처럼 “어리석거나 천진난만하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맥락을 조금 더 세밀히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 맑스는 프루동의 <소유란 무엇인가>를 “통찰력이 뛰어난 책”이라며 그 가치를 인정하기도 했고, 그 뒤 <신성가족>에서도 프루동이 “위대한 과학적 진보이자 정치경제학을 혁명화하여 비로소 참된 정치경제학을 가능케 한 진보”를 이루었다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844년에는 파리에서 프루동과 만남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맑스와 엥겔스가 주도하던 <공산주의자 통신위원회>에 프루동의 동참을 요청했는데, 프루동은 그 취지에 동의했지만 “우리가 운동에서 앞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편협성을 드러내는 지도자가 되지는 맙시다. 새로운 종교의 사도인 척 하지 맙시다”라고 주장했고 “문제제기를 결코 소모적인 것으로 여기지 맙시다”라고 전제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프루동은 혁명적인 행동을 개시하자는 주장에도 반대했습니다.

프루동은 “나는 가진 자들에 대한 성 바르돌로뮤의 밤[대학살]을 거행해서 그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것보다 소유를 천천히 불태우는 쪽을 좋아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이후 프루동과 맑스의 관계는 깨지고 <철학의 빈곤>으로 맑스는 프루동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게 되었죠.



프루동에 대한 맑스의 비판은 정당합니다. 프루동은 선거참여를 비판했고 노동조합이 파업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그 당시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로 이름이 높았던 프루동이 왜 그런 주장을 했을까, 라는 점이죠.

사실 프루동이 정치참여를 비판한 것은 이론적인 입장이 아니라 현실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프루동은 1848년에 수립된 임시정부가 보통선거권을 도입하자, 보통선거권이 가지는 약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보통선거권은 반(反)혁명이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르 레프레젱탕 뒤 페플>이라는 자신의 신문에서 프루동은 “공화국은 모든 의지가 자유롭고 국민이 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통치형태이다. 그러나 그 이상을 실현하려면 모든 사적인 이해관계들이 사회를 거스르지 않고 사회를 위해 움직이는 게 필수적인데, 그것은 보통선거권으로 가능하지 않다. 보통선거권은 공화국의 이기주의이다. 이 체제가 오래 유지될수록 경제혁명은 계속 이루어지지 않고 그럴수록 우리는 왕정과 독재, 야만주의로 퇴보할 것이다. 선거권이 더 늘어나고 합리화되고 자유로워지는 한 이 모든 건 더 분명해진다”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이게도 프루동은 1848년 선거에 출마했고 의원으로 당선됩니다. 그러나 프루동은 1848년 6월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카베냑의 군대가, 노동자들의 군대가 자신의 형제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 난 뒤 의회에서 다른 의원들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프루동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제를 정치적인 수단에, 더구나 선거라는 수단에 맡기는 것이 환상일 뿐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프루동은 “이건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를 구원하는 문제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쓰레기 더미에 버려졌다. 우리는 부르주아지를 구원해야만 한다. 하층 부르주아지를 배고픔으로부터, 중간층 부르주아지를 파멸로부터, 상층 부르주아지를 그 악마같은 이기주의로부터 구원해야만 한다. 6월 23일 프롤레타리아트의 문제는 오늘날 부르주아지의 문제와 동일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참 역설적인 문체이죠. 언론인으로서 프루동은 이런 식의 표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결국 이런 활동으로 프루동은 의원직을 제명당하고 감옥에 갇혔으며 선거를 통해 예견했던 루이 보나파르트와의 긴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뒤 프루동은 “정치에 몰두하는 건 똥물에 손을 씻는 짓”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루이 보나파르트가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보통선거권을 이용했을 때, 프루동은 선거와 정당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수단일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프루동은 투표거부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프루동은 정부의 책략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인민이 정부당국과 인민의 본질적인 갈등을 가장 잘 부각시킬 수 있다고 선언하며 투표거부주의자들(abstentionists)과 함께 했습니다.

이 운동은 적어도 두 가짐 점, 즉 정치행태에서 지배적인 요소이던 편의주의(expediency)를 거부하고(필자주: 어떤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근본적인 원인을 건드리지 않고 그 순간만을 적당히 넘기려 하는 주의. 근대정치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투표를 보편적인 정치적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민주주의의 신화를 거부하는 운동으로, 특히 아나키즘과 생디칼리즘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프루동은 계급갈등을 가급적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프루동은 부르주아지에게 그들이 과거에 혁명적인 세력의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부르주아와 노동자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부르주아와 노동자 모두를 해방시킬 혁명을,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의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혁명을 촉진시키려 했습니다.

노동조합에 대한 프루동의 부정적인 생각은 노동조합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조합이기주의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프루동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조합이 독단으로 여겨지기에 잠재적으로 자유에 해롭지만, 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조합은 유용하다고 봤습니다. “노동자들의 조합은…그들이 달성한 결과가 얼마나 성공적인가가 아니라 사회공화국을 옹호하고 세우는 그들의 조용한 추세에 따라서 판단되어져야 한다.…노동자들의 노동의 중요성은 조합의 사소한 이해관계가 아니라 지난번 혁명이 건드리지 않고 남겨둔 자본가와 고리대금업자, 정부의 지배를 부정하는 데 있다. 그런 뒤에 정치적인 거짓말을 극복했을 때…노동자 집단들은 자신들의 타고난 상속물인 대부분의 산업을 접수해야 한다.”

또한 프루동은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인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봤습니다. 맑스가 인용하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능력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프루동은 “정치적 능력을 가지는 것은 자신을 집단의 일원으로 의식하게 하고, 이 의식의 결과로 이념을 확정하며, 그 이념의 실현을 추구하게 만든다. 이런 세 가지 조건을 결합한다면 누구라도 가능하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프루동은 프랑스 노동계급이 실제로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기 시작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프루동은 노동계급의 이념을 상호의존의 이념으로 봤습니다. 프루동에게는 상호의존이라는 이념만이 (농민을 포함하는) 노동계급을 부르주아지와 분리시켰고 노동계급에게 진보적인 성격을 부여했습니다. 왜냐하면 상호관계가 발달하면서 결국에는 노동자들이 사회의 경제생활에 정의를 도입하고, 부르주아 계급의 반反상호주의적 정신이 실행을 막아왔던 평등주의 기반 위에 사회를 조직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상호주의는 인민의 참된 주권을 보장할 연방주의로 표현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연방 공화국에서 권력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고, 일련의 대표들이 인민의 일반의지를 실행하는 조절위원회들에 결합하는 ‘자연스런 집단들’에 의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루동은 자유의 건전한 성장에 해롭다고 여겼던 내전의 폭력 없이도 전체 공동체가 해방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실 당시에 사회의 분할구조를 인식하고 사실상의 계급투쟁이 존재한다는 점을 깨달았지만, 프루동은 이 투쟁의 유동성에서 상호주의의 균형이 나타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프루동은 계급투쟁을 공식화해서 영원한 분할을 만들지 모를 어떠한 방법도 피하려고 노력했다. 파업에 대한 비판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족으로 얘기하자면 프루동의 인민은행 계획에 대한 비판은 주로 화폐와 소유를 잘못 이해했다는 점으로 얘기됩니다. 그런데 그런 비판은 프루동이 추구했던 것을 오해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프루동이 폐지하고자 한 것은 소유 자체가 아니라 소유의 축적이었습니다. 노동거래소를 통한 노동권의 유통은 단지 화폐를 노동권으로 교체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노동권이 축적이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5. 엥겔스는 왜?
엥겔스는 “권위에 관하여”에서 바쿠닌을 겨냥해 비판을 가합니다. 그런데 바쿠닌은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쿠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모든 권위를 부정한다고? 그건 나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장화에 관한 한 나는 장화 만드는 사람의 의견을 구한다. 집, 운하, 철도에 대해선 건축가나 엔지니어와 협의한다.…그러나 장화 만드는 사람이든 건축가든 내게 자신의 권위를 강요하는 것을 나는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게, 그리고 온당한 존경심을 갖고 그들의 말을 듣는다.…그러나 나는 어떤 사람도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다. 그런 믿음은 나의 이성, 나의 자유, 그리고 내 과업의 성공에 치명적일 것이다. 그런 믿음은 나를 즉각 어리석은 노예,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의지와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엥겔스는 바쿠닌을 비판했을까요? “권위에 관하여”가 씌어진 1872년과 1873년 사이의 시기는 <인터내셔널>을 놓고 맑스, 엥겔스와 바쿠닌간의 싸움이 격렬하게 벌어지다 결국 1872년 9월 헤이그 대회 때 바쿠닌이 <인터내셔널>에서 제명된 시기입니다.

 

 

 

 

맑스주의자들은 바쿠닌이 <인터내셔널> 내부에 분파를 만들고 조직을 장악하려 한 악당이라고 주장합니다. 소련공산당 맑스-레닌주의 연구소가 펴낸 <맑스 전기>는 바쿠닌이 “무력하고 억압받는 인민 대중들과 농부들 및 쁘띠부르조아들의 회의”를 대변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바쿠닌이 <인터내셔널> 내에 분파를 만들고 테러와 관련된 비밀조직을 운영했기 때문에 제명을 당했다고 주장합니다(필자주: 그리고 바쿠닌이 비밀조직을 만들었다는 점은 러시아 짜르의 오크라나라는 비밀경찰제도를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유럽의 혁명가들과 달리 러시아의 혁명가들은 망명 이후에도 끊임없는 체포위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레닌도 마찬가지였죠 *오크라나? '오흐라나okhrana'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전혀 다른 해석을 합니다. 아나키스트 작가인 조지 우드콕은 맑스와 바쿠닌의 대립을 개인적인 대립이 아니라 중앙집권적인 권위주의자와 반권위주의적 자유인의 대립으로 묘사합니다. 특히 우드콕은 <인터내셔널>의 다수를 차지했던 조합주의자와 상호주의자들이 바쿠닌을 지지한 반면 맑스의 총무위원회(general council)가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인터내셔널>을 지배했다고 비판합니다. 둘 중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는 선험적으로 판단할 수 없지만 이 글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아나키스트의 분류에 따르면, 개인주의자나 소박한 아나키스트들은 분명 정치적인 권위를 절대적으로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아나코-생디칼리스트나 아나코-꼬뮨니스트들은 정치적인 권위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의 권위에 대한 생각은 우크라이나에서 농민꼬뮨을 건설하려 했던 마흐노(N. Makhno, 1889-1934)의 연설에서 잘 드러납니다.

마흐노는 마을에서 백군과 지주들을 몰아낸 뒤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을 도우러 왔습니다. 우리는 지주들과 그들의 마름들을 따랐지만, 이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정의와 평등의 이름으로 여러분끼리 땅을 분배하십시오. 그리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 동등한 관계에서 일하십시오.”

 

 

 

 

그리고 1936년 스페인 시민전쟁 때 국제의용군으로 자원했던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얘기는 권위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생각을 잘 드러내 줍니다. “의용군 체제의 핵심은 장교와 사병간의 사회적 평등이었다. 장군에서부터 사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똑같은 보수를 받았고, 똑같은 음식을 먹었고, 똑같은 옷을 입었고, 완전한 평등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생활하였다.…물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명령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동지가 동지에게 하는 것임을 인식했다.…실제로는 그런 방법이 장기적으로 ‘효과’가 있다.…나는 명령을 따르게 하거나, 위험한 일의 자원자를 얻는 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혁명적’ 규율은 정치적 의식에 달려 있다. 왜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아나키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분열은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1995)에서도 잘 표사된다.)



아나키즘은 이를 위해 먼저 거대화된 권력을 잘게 나눠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권력은 크게 뭉칠수록 통제에서 벗어나고 그것에 영향을 받는 개인을 소외시키기 때문입니다. 반세계화운동과 아나키즘을 연관짓는 숀 쉬한(Sean M. Sheehan)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나키즘은 스스로 없애려고 하는 권위주의의 씨앗을 내포한 관료제를 낳지 않으면서 자율적으로 조정되는 의사결정 구조를 개발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흔히 반세계화 운동으로 불리는 흐름이 지닌 긍정적인 측면인 친지역화(pro-localization)는 탈중앙화한 공동체들을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공동체들은 엘리트나 관료집단의 손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크로포트킨은 스위스의 <쥐라연합>을 통해 이런 구상을 밝혔습니다. “우리는 사회란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이론으로부터 이상적인 공화국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현존하는 사회악을 인식시키고 토론과 집회를 통해 지금보다 나은 사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사고하도록 유도했다. 국제대회에서 제기된 문제를 모든 노동조합의 연구주제로 추천했다. 그러면 한 해 동안 유럽의 모든 지부에서 직업과 지방의 특성에 맞게 토론되었다. 지부의 결론은 지역대회에 제출되었고 그것은 좀더 정리된 형태로 다음 국제대회에 제출되었다. 우리가 이상으로 삼는 사회구조는 이처럼 이론과 실천이 철저히 아래로부터 수렴되는 것이었다.”

이런 얘기는 엥겔스의 비판, “권위의 원리를 절대적으로 나쁜 원리인 것처럼 말하고 자치의 원리를 절대적으로 좋은 원리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권위와 자치는 서로 다른 사회 발전 양상에 따라 그 범위가 서로 다른 상대적인 것들이다.”라는 비판이 조금 어긋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줍니다.

6. 오해를 넘어서 차이로
아나키스트들과 맑스주의자들은 분명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로 묶었던 것은 사회주의였고, 적기와 흑기가 함께 휘날렸던 적은 아주 많았습니다. 사실 아나키스트들의 가장 큰 적대자는 맑스주의 자체라기보다 그 지류인 볼셰비키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다중네트워크에 모인 분들도 볼셰비키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레닌을 제거한 맑스주의? 지젝식의 비유를 빌자면, '니코틴 없는 담배'나 '카페인 없는 커피' 정도가 되겠다).

그렇다면 이제 과제는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를 넘어서 그 차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계속 낯선 이방인으로 배제할 것인지 아니면 조금 다르지만 함께 할 수 있는, 때로는 그 상대의 모습에서 배울 수 있는 벗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맑스주의나 아나키즘 자체가 지금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배울 것은 누가 더 올바른가라는 점보다는 새로운 대안사회를 만들어나갈 단초를 찾아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아나키스트들의 고민을 허투루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의 고민은 아직 가지 않은 길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06. 0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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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주말의 영화 프로그램을 보다가 찜한 작품이 <이웃집 야마다군>이다. TV 채널을 놓고 리모콘을 든 엄마의 공격과 신문을 든 아버지의 방어가 팽팽하게 펼쳐지는데, 화면 자체는 소박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얼마나 비장한지! 한참 킬킬거리면서 개봉하면 볼 영화 1순위로 꼽아두었다.  

지난 주말 극장엘 갔는데, 마땅히 볼 만한 다른 영화도 없었던지라 고민없이 이 작품을 골랐다. 예상대로 '인디관'이라 이름붙은 가장 작은 관에 20~30명 정도의 관객이 다였다. 하지만 그날 같이 이 애니를 본 사람들은 얼마나 신나게들 웃었는지.

평범한 직장인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집안 일 떠넘기기를 좋아하는 엄마,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든 중학생 노보루, 똑똑한 딸 노노코, 그리고 고집 센 장모가 벌이는 에피소드들은 일본의 소박한 가정의 모습을 따뜻하게 보여준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보다는 웃겨 죽겠다.

영화를 보고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는 '적당'과 '포기'.
새학기를 맞아 올해의 결심이 뭐냐고, 결혼이냐 승진이냐를 묻는 아이들에게 담임 선생님은 결의를 다지는 표정으로 칠판에 적는다. <적당 適當>
결혼식 축사를 맡은 남편의 손에 커닝 페이퍼라고 반찬거리 메모를 쥐어준 아내를 보면서 남편은 비장하게 말한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포기입니다.'
안되는 건 안된다고 포기하고서 적당히 살다보면 세상 모든 일은 어떻게든 굴러간다고 말하는 이 가족의 어이없는 모습에 웃다 보면, 그렇게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인생 뭐 있냐~ 

영화를 보고 나서도 이게 누구 작품인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전혀 몰랐다. 나중에 찾아보니, 에라, 저 유명한 지브리의 다카하다 이사오 작품이었네. 게다가 엉성한 선과 대충 칠한 듯 보이는 색 때문에 싸게 만들었겠구나 했는데, 풀 디지털 방식이라 <모노노케 히메> 보다도 돈이 더 많이 들었다고 한다. 흠. 아무튼, 이 작품을 소개한 씨네21의 기사를 옮겨 둔다.  

 

<이웃집 야마다군>(ホ-ホケキョとなりの山田くん, 1999)

4개의 칸 속에 기승전결이 압축되어 있는 네컷만화를 장편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수 있을까. 대부분의 감독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말 것이다. 물론 성공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는 이미 <아즈망가 대왕>이나 <사자에상>(サザエさん)처럼 네컷만화를 TV용 시리즈물로 번안한 경험이 있다. <이웃집 야마다군>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아사히신문>에 연재 중인 네컷만화에서 인상적인 20여개의 에피소드들을 모아 여러 편의 하이쿠로 선집을 엮듯이 <이웃집 야마다군>을 만들어냈다.

<이웃집 야마다군>이 보여주는 것은 소박한 현대 일본 가정사다. 항상 힘이 넘치는 할머니, 전형적인 일본의 소심한 가장, 저녁식사 메뉴를 고민하느라 정신없는 엄마, 잘나지 않은 외모 때문에 고민이 많은 아들, 지나칠 정도로 어른스러운 막내딸로 구성된 야마다 가족은 일상의 평범한 고난과 행복을 겪으며 살아간다. 여기에는 다카하다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일상의 순간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파친코를 좋아하는 아빠와 아줌마스러운 엄마의 부부싸움. 비오는 날 지하철역에서 기다리는 아빠에게 우산을 가져다주는 게 영 귀찮은 아이들의 모습, 서서히 이성에 눈떠가는 아들의 풋사랑 등.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는 스스로의 힘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장편애니메이션으로서 커다란 줄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각각의 에피소드가 산토카, 바쇼 등 유명 하이쿠 시인들의 글귀로 마무리되는 것에서는 <이웃집 야마다군>이 일본의 전통적인 압축미(하이쿠와 네컷만화)를 장편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불러들이려는 시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놀랍게도 <이웃집 야마다군>은 <모노노케 히메>보다도 많은 총 24억엔의 제작비가 투여된 대작이다. 모든 것이 풀 디지털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카하다 이사오와 지브리의 예전 작화풍에 익숙한 관객은 이 작품을 외면했고, 결국 지브리 역사상 최대의 흥행 참패로 이어졌다. 물론 흥행에서의 참패가 한 예술작품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이웃집 야마다군>은 소박한 그림체 속에 숨어 있는 지브리의 대담한 실험이며, 동시에 다카하다 이사오가 비오는 도쿄의 골목에서 구성지게 불러젖히는 인생찬가다.

http://www.cine21.com/News_Report/news_view.php?mm=001002005&mag_id=39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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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6-21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보고싶군요.

바람돌이 2006-06-2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싶은데 비디오로도 나올까요?
우리 동네는 개봉도 안할거고, 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 보러 갈수도 없는데 말이죠. ㅠ.ㅠ

urblue 2006-06-21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애니가 지방에서도 상영이 되는지는 모르겠네요. 서울서도 별로 많이 하는 것 같진 않더라구요. 요즘 웬만한 건 거의 비디오나 DVD로 나오는 것 같던데, 좀 기다려보시기를. 하여간 간만에 신나게 웃었어요.

미완성 2006-06-21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저도 씨디로 구워놓고 심심할 때마다 보고 있다는...
전 '우동' 에피소드 볼 때마다 웃겨요. 엄마가 너무 귀여워서..*.* 리모콘 대결도 그렇고, 아들래미 공부땜에 과외를 시킬까 말까하던 장면도 그렇고. 근데 정말 대충 만든 줄 알았더만 돈이 더 많이 들었다니, 오, 놀라운 소식이어요. ㅇ.ㅇ

urblue 2006-06-21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동' 장면에서 많이 웃었어요. 그치만 보기엔 귀여워도, 내 옆에서 누가 그런다면 때리고 싶지 않을까요? ㅋㅋ

sudan 2006-06-21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간만에 페이퍼까지 쓰셨을까 싶은데요?
처음에 저 그림만 딱 보고는 우리나라 애니인 줄 알았어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림체.(얼블루님의 호평이 아니었다면 그림 때문에 이 애니는 절대 안 봤을 것 같아요.)

sudan 2006-06-21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돈 많이 들인 애니라는 걸 알고 다시 보니 처음 생각처럼 못 그린 그림 같아 보이진 않아요.

sudan 2006-06-2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 참.

urblue 2006-06-21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 네컷 만화가 원작이니까 그림체가 크게 독특하긴 어렵겠지요. (이 시점에서 갑자기 '표절'이란 떠오르는데, 일단 패스.)
제가 요즘 좀 뜸하죠? 딱히 재밌다거나 바빠서라기보다는 그저 안 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도 같고...
모니터 앞에 앉는 시간 줄여서 뭐 하실건지 결정 하셨나요? ^^

urblue 2006-06-21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새.

瑚璉 2006-06-2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거금을 들여 구해둔 DVD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코드 문제 때문에 못 보고 있어요(-.-;).

urblue 2006-06-21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질님, 저런, 제가 다 안타깝습니다. 그거 볼 방법은 없나요?

따우님, ㅎㅎ 네, 결정했습니다. 날짜는 바뀌었지만 그래도 일반 예식장보다는 문화센터 쪽이 나을 것 같아서요. 따우님 댁이랑 가까우니까 결혼식날 놀러오시든지요... ^^;

瑚璉 2006-06-21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DVD 플레이어가 없는 관계로 DVD-RW로 보는데, 이때 DVD-RW 자체에 지역코드 변경 횟수 제한이 있는 것이 문제이지요.

로드무비 2006-06-2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저도 꼭 보고 싶네요.
좋아하는 명랑만화풍 그림.
좋은 동네 사십니다. 극장도 그리 가깝고.^^

urblue 2006-06-22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요, 저 애니 보면서 로드무비님 생각났어요. 전에 아따맘마랑 동일시하시던 게 기억나서 말이죠. 헤~ =3=3

건우와 연우 2006-06-22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보고싶은 영화네요. 알게해주셔서 감사^^

urblue 2006-06-22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재미있게 보시길. ^^

Volkswagen 2006-06-22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재미있겠습니다. 찾아봐야겠습니다. 여기도 지방인데...우째야 할랑가~~ (고심중....)
 
 전출처 : 딸기 > 이란의 역사


이란의 역사

나는 일종의 '이란 열(熱)'을 앓고 있다. 이 병이 생긴지 몇년은 된 것 같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이란이라는 나라가 꼭 알렙처럼 내 머리 속에 들어와버렸다. 이스파한의 아름다운 모스크들, 테란 바자의 화려한 양탄자들, 페르샤의 옛이야기들까지, 그것들을 꼭 내 눈으로 보아야만 할 것 같고, 이란이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만 같다. 이 병의 이유는 나도 잘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그렇다고 할 밖에는.

이란, 아리안

이란은 열사의 사막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동 하면 사막을 떠올리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람들 머리 속에 있는 것은 보통 사우디아라비아의 풍경이다.
걸프의 거대한 모래국가와 달리 이란은 기본적으로 사막이 아닌 '고원'으로 이뤄져 있다. 북쪽의 고원지대는 상당히 추워서 1년의 절반 동안 눈에 덮여 있는 곳들도 있다. 이란의 부자들은 이 고원지대에 스키를 타러 다닌다고 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 나오는 '추운 마을'들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이 이란고원에 인류가 둥지를 튼 것은 아주 오랜 일이다. 페르샤라는 이름을 대체 언제부터 들어왔던가. 이란인의 직접적인 조상은 인도-유럽어족의 한 갈래인 아리안들이다. 이들이 고원에 들어온 것은 기원전 2500년 쯤으로 추정된다.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던 아리안들은 기원전 3000년-4000년 무렵에 이동해서 일부는 유럽에 들어가 게르만, 슬라브, 라틴의 원조가 되었고 일부는 남쪽의 고원에 정착해 이란인이 됐다고 한다. 더 밑으로, 더 남쪽으로내려간 사람들은 인도아대륙에 진출해 원주민이던 드라비다인들을 제치고 현재의 인도인들의 조상이 됐다. (여담이지만 인도 남쪽에는 아직도 드라비다인들이 남아서 스리랑카에 사는 혈족들의 분리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아리안은 이합집산을 거치는데 스키타이족(우리와도 연관이 있지요), 메디아족, 이란족(페르샤인들) 등이 모두 이 갈래다. 이란-이라크전은 1980년에 일어났지만 실은 이미 인류의 초창기에서부터 오늘날 이라크에 살던 사람들과 이란의 아리안들은 대립을 했었다. 초창기 이란의 아리안족들, 즉 이란족들은 당시 그 땅을 정복했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나 바빌로니아에 맞서 싸우는 용병 노릇을 했다. 아리안들은 아주 용감했었는지, 곧 원주민들을 제치고 고원을 장악해 '이란'(아리안들의 땅)을 만들어버린다. 기원전 7세기 쯤, 이란인들의 일파인 메디아인들이 앗시리아에서 독립해 남부 이란과 소아시아에 걸쳐 메디아 왕국(B.C. 708 - B.C.550)을 세운다. 메디아는 이란인이 세운 최초의 왕조였지만 영토가 넓었던 대신 중앙집권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 연합체에 그쳤다고 한다.

아리안이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한 것은 기원전 621년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 왕 때다. 아스티아게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앗시리아를 무너뜨리고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을 차지했다. 메디아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즉 오늘날의 이라크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바빌론에 맞섰으나 싸움은 패배로 끝났다. 바빌론의 나보니두스 왕은 이란 남부 아케메네스 Achaemenes 왕조 (B.C. 550-B.C. 330) 와 동맹을 맺어 메디아를 정벌해버렸다.
아케메네스는 우습게도,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인 키루스(Cyrus)가 열어제낀 왕조다. 메디아는 외손자에게 뒤집어진 꼴이다. 아스티아게스는 앗시리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바빌론과 손잡았다가 훗날 바빌론에 망했고, 키루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메디아를 무너뜨리더니 급기야는 바빌론에 칼을 돌렸다. 키루스는 주변 부족국가들을 통합해 동으로는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 서로는 힌두쿠시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B.C. 539년 바빌로니아를 정벌한다. 한때의 동맹이던 나보니두스는 폐위됐다.

키루스는 아주 관대한 정책을 펼쳐 피정복민의 관습과 신앙을 지켜줬다. 오히려 피압박 민족들에게 '해방자'로 추앙됐다고 하는데, 바로 성경에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바빌로니아에 노예로 잡혀 있던 유태인들('바빌론 유수')을 해방시켜준 것이 바로 이 왕이다. 구약 에스라서와 이사야서에는 '고레스 왕'으로 표기돼 있다. 키루스는 이란인들에게는 아주 위대한 왕, 너그럽고 지략 뛰어난 왕으로 각인돼 있다고 한다.
키루스 대왕은 이집트마저 정복하길 원했지만 당대에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준 것은 아들 캄뷰세스 2세. (어릴적 읽었던 헤로도투스의 '역사'에서 익히 봤던 이름) 캄뷰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스스로 이집트 27왕조의 파라오가 된다. 그러나 왕이 이집트에 가 있는 동안 정작 이란에서는 쿠데타 기도와 혼란이 벌어졌고, 캄뷰세스 2세는 에티오피아 원정이 실패한 뒤 자살했다.

드디어 이 인물이 등장한다. 다리우스 1세.

캄뷰세스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즉위한 다리우스 1세는 인도 북부에서 오늘날의 불가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헬레네스(그리스인들)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이란(페르샤) 제국'의 시대가 온 것이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를 최초로 건설했다 하니, 수에즈 운하의 원형이 그 옛날에 만들어졌던 셈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거대제국을 페르샤라고 불렀는데, 파르시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란 얘기다. 이란어를 파르시라고 한다. 그러니 '이란 제국'이 맞는 말이지만 지금은 페르샤가 일반화된 용어로 자리를 잡았다. 메디아를 필두로 줄줄이 이어진 왕국들을 모두 '페르샤'라 하고, 메디아 왕조, 아케메나스 왕조 식으로 '왕조'를 붙여 구분하니 뿌리는 다 똑같다.
페르샤에 정복된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아테네가 여기 껴들어서 전쟁이 난다. 다리우스 1세가 쳐들어온다! 3차에 걸친 전쟁이 벌어진다. 다리우스의 1차 원정은 폭풍으로 실패했고, 2차 원정에서는 유명한 '마라톤 전투'로 퇴각한다. 그런데 헤로도투스는 마라톤 전투를 대서특필했지만 허풍이 심했던 모양이다. 페르샤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았던 전투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당시 병력규모로 미뤄 과장돼 있을 소지가 높다고 지적한다.
크세르크세스 황제를 묘사한 부조 다리우스 1세는 3차 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숨졌다. 뒤를 이은 인물은 전임자 만큼이나 명성을 떨쳤던 크세르크세스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의 원정대도 살라미스 해협에서 아테네 해군에게 궤멸됨으로써 10여년에 걸친 원정을 실패한다. 전쟁의 패배, 결말은 '국력 쇠퇴'다. 피정복민들이 크세르크세스 사후 줄지어 반란을 일으키고 지배층은 분열됐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메디아와 달리 중앙집권체제와 사회경제적 토대를 갖춘 명실상부한 제국을 만들었다. 당시의 행정과 치안, 세금제도 등을 담은 상세한 기록들이 전해온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촘촘한 도로망과 국가가 운영하는 역마제도. 전국 어느 곳에건 보름 이내에 중앙정부의 뜻이 전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서 지금의 터키 북쪽 리디아 속주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돼 있었다고. 이 네트워크는, 속주들의 반란을 막는 안보시스템이기도 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한다. 알렉산더가 바빌론 땅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광대한 영토는 휘하 장군 4명이 나눠가졌다. 그들 중 이란을 지배했던 것은 셀레우쿠스 Seleucus 장군이었다. 셀레우쿠스와 그 후손들이 이끈 왕조를 셀레우키드 seleucid 왕조(B.C. 312-B.C. 247)라고 부른다.
그러나 셀레우키드 왕조는 지배구조를 만들기도 전에 반란에 시달렸다. 현재의 타지키스탄 지역인 Fars 지방(Farsi, 즉 페르샤어의 어원이 됐던)에서는 半유목민인 파르티아족(이란족과 스키타이족의 혼혈)이 셀레우키드 왕조를 무너뜨리고 파르티아 왕조(B.C.247-A.D. 224) 를 세웠다. 반란 지도자 아르사케스 Arsaces의 이름을 따서 Arsacid 왕조라고도 한다.

파르티아 왕조는 미트라다테스 Mithradates 2세 치세(B.C.123-87) 때 세력을 확장해 인도와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 로마제국과 상대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이란의 직물(페르샤 카펫)이 동서양을 오갔다. 지배층은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했지만 대중들에게까지 퍼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파르티아는 주변국들에 비하면 신분 이동의 통로가 열려있는 비교적 개방된 사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파르티아족의 출신지인 파르타브 Parthav 지방의 언어인 파흘라비 Pahlavi가 공용어로 사용됐는데,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붕괴된 파흘라비(팔레비) 왕조는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파르티아가 500년 가까이 존속됐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사산 Sassan 왕조(224-652; 교과서에는 '사산조 페르시아' 라고 나왔던)가 조직적으로 전대의 유산을 파괴했기 때문에 역사 복원이 잘 되고 있지 않다는 점.
사산은 이란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아르다쉬르는 스스로를 사산의 후계자라고 칭했기 때문에 그의 왕조에 '사산조'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르다쉬르는 집권 뒤 파르티아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지방 귀족들을 통제, 전국을 12개 주로 나눈 중앙집권체제를 만든다. 조로아스터 신관의 아들이었던 그는 조로아스터를 국교로 지정했고 정교 일치의 강력한 집권체제를 추구했다. 아들 샤푸르 Shapur 1세는 그러나 종교에 지나치게 심취해 승려들에게 정치를 맡기는 우를 범한다.
폭군 아자르 나르시의 시대를 지나 사산조의 10대 왕인 샤푸르 2세가 즉위한다. '샤푸르 대왕'이라고 불리는 이 왕은 어머니 뱃속에서 즉위, 상당기간 섭정을 거쳤다. 70년 재위하면서 주변국들을 복속시키고 승려들의 특권을 없애 왕권을 강화했다. 샤푸르 2세에서부터 바흐란 5세, 카바드 1세 등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사산조의 전성기였다. 페르샤는 정치사회적,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해, 뒷날 아랍인들에게 멸망하기까지 '르네상스'를 맞는다.

사산조 하면, 로마와의 싸움을 빼놓을 수 없다. 로마와 갈등했던 이유는 아르메니아 지배권 문제였다고 하는데, 아르메니아는 지금도 이슬람권에 둘러쌓인 기독교국가로 남아 있다. 옛 소련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들 중에서 유일하게 제법 자본주의적인 변신을 했는가 하면, 유대인에 버금가는 '로비 능력'으로 미국 내에서도 말빨 센 이민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로버트 카플란은 밉살스런 저작 '타타르로 가는 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이란 공포증'에 대해 說을 풀었는데, 양국의 역사가 오랜 만큼 적대심도 깊은가 보다. 아르메니아는 근대 들어와 터키(오스만 투르크)에서도 숱하게 학살됐으니 悲願의 민족이긴 하다. 하지만 사산조는 파르티아에 대면 신분 이동이 제한돼 있었지만 그래도 기독교도가 특별히 박해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사산과 로마의 싸움은 역시나 '양대 제국의 패권 싸움'으로 봐야 할 듯.
사산조의 수도는 바그다드 근처에 있는 크테시폰인데, 당시에 이미 200만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대도시였단다. 몇해전에 크테시폰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들르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크테시폰은 바그다드의 건립자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압바스 왕조의 2대 칼리프)에 의해 파괴됐고 크테시폰의 건축물들은 바그다드의 건축자재로 이용됐다고 하니. 지난 3월 미군이 바그다드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바그다드 시내에 있던 만수르의 頭像을 생각했었다. 부수고 짓고 또 부수는 것이 인류의 '문명'인가.

이제 고대 세계를 지나, 중세 이란으로 넘아가보자.

아랍족은 이란의 아리안들에게 '눌려 살던' 민족이었다(종족 구분이라기보다는 사실 언어에 따른 구분에 가깝지만). 그런 아랍족이 '大페르샤'를 제치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등장 이후였다.
아부 바크르와 함께 가난한 베두인들을 찾아가는 예언자 무함마드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프로 취임한 아부 바크르 Abu Bakr는 서쪽으로는 비잔틴, 동쪽으로는 사산조를 향해 정벌의 칼날을 돌린다. 650년 아랍군은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이듬해에는 사산군을 대파하면서 이란 전역을 장악했다. 정통 칼리프朝(650-661)가 멸망한 뒤 이란에는 우마이야드 Umayyad 왕조(661-750)와 압바스 왕조(750-821)가 대를 이어받았다.
사산조의 후예인 다부예흐 Dabooyeh가 망국의 유민들을 모아서 작은 나라를 세우긴 했지만 페르샤의 후계자로 보기엔 미약하다(다만 이들은 이슬람 개종 후에도 독자적인 국가를 유지, 950년간이나 지속됐다고 한다). 압바스 왕조 말기, 이란 땅에서는 반란이 줄을 잇는다. Saffarids, Samanids, Ghaznavids, Buyids 등 자잘한 왕조들이 명멸했던 시기(821-1055)를 Iranian Intermezzo라 부르기도 한다.

이슬람교 포교 과정에서 무슬림들이 보여준 관용은 잘 알려져 있다. 이란에서는 주로 도시거주민을 중심으로 개종이 급속히 진행됐다. 이란인의 개종이 빨랐던 것은, 지역적 역사적 종교적 속성 상 조로아스터교가 이슬람교와 유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유사했다기보다는 이슬람이 조로아스터의 여러 요인들을 흡수해 만들어졌다고 해야겠다).
몽골인들이 한족의 문화를 배운 것처럼, 이란을 정복한 아랍인들은 페르샤의 제도와 문화를 물려받았다. 특히 '제국'의 운영체제를 많이 배웠다. 버나드 루이스같은 서방 이슬람학자는 '이란은 처음부터 제국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고대 페르샤 시절부터 이란은 '제국'을 이끌어왔고, 전제군주에 익숙해 있다는 말이다.
루이스가 이런 얘기를 한 것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을 헐뜯기 위해서였지만. 아무튼 이란의 군주인 샤 Shah 는 (루이스에 따르면) 이집트의 파라오, 중국의 황제와 비견되는 절대 군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얼마전에 심심풀이로 읽다 만 페르도시 Ferdowsi(935- ?)의 유명한 서사시 '샤나메' 영역본은 Shah 와 King을 구분하고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황제'와 '군왕' 쯤 될 터인데, 이란의 샤를 '왕중의 왕'이라 하는 것을 보면 당대 페르샤인들의 자부심이 중화사상 못지않았음을 볼 수 있다.
아랍 지배 뒤에도 이란인들이 관료로 많이 등용됐고 교육, 철학, 문학, 법학, 의학 등 학문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랍어가 공식언어가 됐지만 이란의 민중들은 페르샤어(파르시)를 지켰다. 특히 샤나메를 비롯한 페르샤의 서사시는 유명하다. 파르시에서 파생된 말들은 인도는 물론이고 아프간을 비롯해 '-스탄'으로 끝나는 대부분 나라들에서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압바스 왕조는 9세기 무렵부터 투르크 전사들을 용병으로 불러모았다. 왕조가 쇠하자 칼리프는 상징적인 종교지도자로 전락하고, 투르크 전사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중 돋보이는 것은 셀주크 투르크(1037-1220)다. 이들은 오늘날의 아프간 지역, 즉 이란의 동쪽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이란을 장악했다.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밑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에 이르는 땅이 아랍족에 이어 다시 투르크족의 지배를 받게 됐다.
당시 셀주크에 저항했던 이들이, 테란 근교 알무트에 근거지를 뒀던 '이스마일 암살단'이다. 이들은 알무트 일대를 장악하고 셀주크 왕조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했는데, 이들이 해시시를 흡입했다는 데에서 영어 단어 '암살 assassin'이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훗날 이들의 존재는 시아파 무슬림, 즉 이란인들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사례로 악용되기도 하니 씁쓸할 뿐이다.

셀주크 투르크는 1219년 몽골족에게 무너진다. 칸의 후예들은 페르샤 전역을 황폐화했다. 후세 입장에서 보자면 대규모 학살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문화유산의 파괴다. 칭기즈의 손자 훌라구 칸은 이란 땅에 일한국을 세웠는데, 가잔 Ghazan 칸 치세(1295-1304) 에 다시 역내 부흥이 이뤄진다. 그러나 1335년 아부 사이드 Abu Said 왕이 숨진 뒤 한국은 결국 사분오열한다.
티무르의 초상 이란 북동부에서 칭기즈의 후예들 중 강성했던 티무르가 제국 건설에 나선다. 티무르는 1381년 이란을 침공하고 북인도, 서역, 소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페르샤 천년 고도 시라즈와 이스파한은 다시 초토화됐다. 티무르 제국은 1405년 티무르 사후 급속히 쇠퇴했고, 1501년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티무르 치하의 이란 북서부에는 사피 알 딘이라는 이슬람 셰이크(이슬람에는 원래 성직자 혹은 사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옮기기 힘들다)가 추종집단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당시 이단으로 배척받던 쉬아파들인 이들은 순니파의 탄압을 피해 은둔생활을 해왔다. 1499년 이 집단의 지배권을 장악한 이스마일이 정복전쟁을 일으킨다. 이스마일은 곧 이란 전역을 통일하고, 1501년 타브리즈 Tabriz 를 수도로 사파비 왕조 Safavid(1501-1736)를 수립한다.
이로써 이란은 652년 아랍족 침입 이후 1,000년 만에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난다. 오랜 이민족 통치로 이란인들은 반외세 심리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라는 상반되는 의식구조를 갖게 됐다는 분석도 있고, 또 오랜 전제군주정과 외세 통치로 인해 절대권력에 굴종하는 공포심리가 체질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란은 지리적인 틀에서 이란고원이라는 땅 안에 언제나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학자들은 이란이 외세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결코 땅과 나라이름을 잃은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이스마일은 쉬아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고 순니파들을 강제 개종시켰다. 쉬아 이슬람이 국교가 된 것은 이민족의 천년 지배를 끝낸 것보다도 현대 이란의 역사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됐다. 사파비 왕조는 초기 신정체제를 구축했다. 이스마일이 모든 권력을 갖고, 성직자와 관료, 군이 3대 권력집단으로 샤를 에워싸는 체제였다.
어쨌건 쉬아는 이단(이것도 역시나 이슬람에는 없는 개념인데, 일단 '소수파'라는 의미로 해석하자)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영어로는 오토만 제국, 오늘날의 터키)가 이단을 처벌한다며 1524년 이란을 침공해 타브리즈를 함락시킨다. 아마도 투르크는 유럽의 십자군 전쟁에서 이단 전쟁의 논리를 배운 듯 -_- 이란군이 반격에 나서긴 했지만 사파비 왕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오스만은 1533년 이라크를 점령해버리고, 아제르바이잔과 코카서스 지배권을 놓고 사파비 왕조를 두고두고 위협한다.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는 샤 압바스 Shah Abbas의 치세(1587-1629) 때였다.
이란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압바스는 이스마일의 증손자다. 선대 왕인 이스마일 2세는 자기 아버지한테 10년간 유배됐다가 탈출해서 정권을 장악했는데, 왕이 된 뒤에 형인 무하마드 호다반데 Mohammad Khodabande만 남기고 친족은 물론 아비의 신하들까지 모두 도륙해버린다. 공포정치에 질린 근위대가 호다반데를 옹립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발각됐고, 압바스의 형 헤이다르마저 반란군을 이끌다 전사한다.
압바스는 10살 어린 나이에 반란군 지도자로 추대된다. 작은아버지에 맞서 왕위를 차지하기까지 압바스의 드라마는 '용의 눈물' 같은 영웅신화 겸 전쟁이야기다. '타고난 군사전략가'인 압바스는 일단 '적의 적'인 오스만과 강화를 맺어 국경분쟁을 일단락 지은뒤 동쪽 우즈벡을 격퇴시킨다. 그리고는- 오스만과의 전쟁이다. 이라크, 그루지야, 코카서스를 탈환해 버린다. 정치적으로는 개혁가였다. 사제들과 귀족들의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관료제를 강화하여 중앙집권제를 공고히 했다- 마치 왕건의 행로처럼, 그는 왕조의 창시자처럼 개혁을 강행한다. 그 덕에 정교 분리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종교에 독립적인 위계질서가 만들어졌다.
이란은 다시 동서양 교역중심지로 발달하기 시작한다. 전국 도시를 잇는 도로망과 숙박시설을 만들어 안전을 보장하고 비단 무역을 독점, 국가재정을 확충한다. 압바스는 바레인과 호르무즈 해협 섬들을 점령하고 인도양의 포르투갈 세력을 격퇴한다.

'전성기'를 얘기하려면 문화가 빠질 수는 없다. 압바스는 심지어 '계몽군주'였다고 한다. 예술을 장려해 건축과 회화 등 페르시아 예술과 문화를 부흥시켰다. 이스파한을 새 수도로 정하고 사원과 궁전, 학교, 다리 등을 지어 세상의 절반(Nesf-e Jahan)이라 불릴 정도였다.
이스파한의 옛모습을 담은 그림엽서 이란인들은 이스파한을 '이란의 심장'이라 하고, 수도인 테란은 '이란의 영혼' 즉 머리라고 한다. 얼마전에 지진으로 폐허가 된 밤 Bam을 가리켜서 외신들이 페르샤의 보석이니 에메랄드이니 했는데 사실 이란에서 밤은 대표적인 유적지는 아니다. 이란에서 가장 유명한 곳들(그러니까 관광지들)이라고 한다면 테란, 이스파한, 쉬라즈, 파브리즈다.

압바스 2세(1642-1666) 통치기 뒤로 사파비 왕조는 내리막을 걷는다. 어떤 이는 압바스 2세를 영조에 비유한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굶겨죽인 것처럼, 압바스 2세는 아들이 역모를 꾀했다고 의심해서 처형해버린다. 손자 사피 1세가 뒤를 잇지만, 아비의 죽음으로 비뚤어진 이 왕은 공포정치로 살육전을 일삼는다(이건 정조와 다르다).
나라가 부실해진 틈을 타서 아프간이 쳐들어온다. 1722년 아프간의 부족장 마흐무드 Mahmud가 이스파한을 함락하고 마흐무드 1세로 즉위한다. 폐위된 술탄 후세인 왕의 아들이 신흥군벌 나데르의 힘을 빌어 왕위를 되찾긴 했지만, 이번에는 나데르가 반역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어버린다. 사파비 왕조의 종말이다. 나데르는 초반 피치를 올리다 1747년 암살됐다. 이후 아프샤르, 잔드, 카자르 등 여러 왕조가 부침하는 혼란기가 이어진다.

근대 이란카자르 Qajars 왕조 (1795-1925) 시기부터라고 볼 수 있다. 아그하 모하마드 칸 Agha Mohammad Khan은 케르만 지방(이번에 지진 참사가 일어났던 곳)에서 잔드 Zand 왕조를 끝내고 카자르 왕조를 연 뒤 테란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성격이 극악무도해서 시종에게 살해되고 말았다고. 아들도 애비못지 않았는지, 사치에 탐닉해 국고를 탕진하고 아제르바이잔을 러시아에게 빼앗기는 바보짓을 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란 문화권인데 옛 소련 시절을 거치면서 나라가 완전히 비틀어졌고, 독립한 뒤에는 아수라장 꼴이 났다.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와 영국이 이란을 침략하기 시작. 문제의 저 아들네미는 러시아와 두 번 싸워서 지고 끝내 코카서스를 빼앗겼고, 또 그 아들놈은 1857년 파리조약으로 헤라트와 아프간땅을 영국에 내줬다. 헤라트는 아프간 서쪽, 즉 현재의 이란에 가까운 쪽인데 '페르샤 양탄자'의 본고장이다. 뒤에 영국은 아프간을 장악하려다 엄청 데이고 학을 뗐는데, 그 짓을 소련이 80년대 반복하고 지금 미국이 또 하고 있으니. 아무튼 아제르-이란-아프간 지역의 오늘날 국경선 윤곽이 저 바부팅이 왕 시절에 만들어진 셈이다.

낫세르 앗딘 샤 Naser ad Din Shah (1848-1896) 시절에 미르자 타키 칸 아미르 Mirza Taqi Khan Amir 라는 재상이 있었다. 어느 제국이나 그렇지만 이슬람권은 관료제가 발달해 얘기 속에 '재상'이 자주 등장한다. 이 재상은 스러져 가는 국가를 살리기 위해 과감한 개혁정책을 시도하였으나 관료들의 저항과 국왕의 견제로 결국 내쳐진 뒤 죽임을 당한다... 망조 든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토리다. 보통 아미르 카비르 Amir Kabir 라고 불리는 이 재상은 이란에서 크게 존경받는 인물인데, 지금도 많은 이란인들이 그의 개혁이 중단됐던 것을 아쉬워한다고.
1871년 또다른 재상이 다시 개혁을 추진했다가 역시 실패. 이란의 근대화는 결국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졌고, 자발적인 근대화가 이뤄지지 못했다. 영국의 경제침탈이 본격화되면서 민중의 반외세 운동도 거세졌다. 1890년에는 영국이 담배독점권을 가져가자 이슬람 지도자가 금연령을 포고, 결국 독점권을 되찾은 일도 있었다.

왕실은 썩어서 국가재산을 서구에 팔아치웠다. 상인과 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왕권 제한 움직임이 분출되기 시작. 1906년 8월 무자파르 알딘 샤 Muzaffar al Din Shah는 제헌을 약속했고 12월에 근대적 헌법이 제정됐다. 되는 일이 없으려니, 이 왕이 닷새만에 죽었다. 뒤를 이은 모하마드 알리 샤 Mohammad Ali Shah는 입을 씻고 헌법을 파기한다. 그리고는 러시아 장교가 지휘하는 군대(코사크 병단)를 시켜 의회를 폭파해버린다.
봉기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제헌 혁명'이라 부르는 이 봉기를 이끈 제헌파들은 1909년 7월에 테란에 입성해 샤를 몰아내고 헌정을 세운다.
1907년부터 러시아와 영국은 이란을 양분해 수탈을 하고 있었다. 1차대전 중 이란은 영국, 러시아, 터키군의 전쟁터가 되어 짓밟혔다. 러시아가 1917 볼셰비키 혁명을 거치면서 내정에 정신 팔린 사이, 영국은 1919년 사실상 이란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조약을 강요해 식민화한다. 이란인의 反英감정은 극도로 고조됐다. 이를 기반으로 떠오른 인물이 코사크 부대 사령관인 레자 칸 Reza Khan 이었다.

레자 칸 레자 칸은 1926년 '레자 샤 파흘라비'로 등극, 팔레비(파흘라비) 왕조(1926-1979)를 열어젖힌다. 레자 샤는 과감하고 체계적인 서구화에 들어간다. 부족 중심의 형태로 운영되던 군대를 혁신, 상비군으로 만들어 왕정의 권력을 강화했고, 관료제를 뜯어고쳤다. 전국을 포괄하는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근대적인 대학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세속국가'를 지향했던 레자 샤의 원대한 야심을 알려준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유학자들이 서당에 앉아 아이들을 가르친 것처럼 이슬람권에서는 이슬람학자들이 교육을 맡았었다. 이슬람권에는 오래전, 10세기부터 대학이 발달했는데 아프간에서 테러리스트 온상이 되고 있다고 (미국이) 지탄했던 '마드라사'가 이런 교육기관들을 가르킨다. 이집트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성원(聖院)에 있는 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대학 중 하나로 꼽힌다.

레자 샤는 이슬람 학자들에게서 교육권을 빼앗아 종교적, 전근대적 사고방식 대신 세속적, 서구적, 합리적, 근대적 국민의식을 고양시키려 했다고 보면 되겠다. 그의 개혁으로 근대적 교육을 받은 관리들이 생겨나고 경제가 회복되고 중산층이 형성됐다.
교육 뿐만 아니라 사법권도 이슬람학자들에게서 근대적 사법기구로 넘어오게 됐다. 역시 이슬람의 독특한 측면인데,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는 종교-문화-사상-사회-정치체계의 통일체다. 꾸란의 말씀은 경전인 동시에 법전에 해당되고,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성직자' 개념이 없는 대신 이슬람 학자 겸 율법학자들이 무슬림을 지도한다. 권위있는 율법학자들(다른 종교권에서는 '성직자'로 부르는)이 법률적 판단을 해서 발표하는 것을 파트와 fatwa 라고 하는데, 무슬림들에게는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서구 법체계의 '판례'에 해당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레자 샤는 근대적 사법체계를 도입해서 성직자들의 자의적인 판결 관행을 중지시키고, 1936년에는 여성들의 차도르를 없앴다.

하지만 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 반대세력과 언론을 강도 높게 탄압했다. 봉건적 특권을 박탈당한 이슬람 세력은 결국 왕조의 적이 되고만다. 왕가와 성직자(편의상 이렇게 부른다면)의 대립은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다. 근본적으로 레자 샤의 근대화 정책은 봉건적 토지소유제도를 혁파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토대 없는 윗줄만의 개혁으로 그쳤고, 더욱이 개혁에 드는 비용도 농민 세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레자 샤는 소련과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과의 경제관계를 강화했다. 열받은 소련과 영국은 1941년 이란을 침공해 레자 샤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위기감을 느낀 그는 결국 아들 무하마드 팔레비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레자 샤는 영국군에 체포돼서 영국과 모리셔스 등지를 전전하다 1944년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팔레비 왕조는 친미 부패왕조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긴 하지만, 적어도 레자 샤는 카자르 왕조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개혁을 추진, 이란인에 의한 근대화를 추진하고 제국주의에 맞서려 했던 정치가로 평가해야 한다...고 오늘날의 사가(史家)들은 말하고 있다 -_- 잘 모르긴 하지만, 그의 개혁이 성공했었다면 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처럼 '이란의 아버지'가 되었을 터인데. (역사에서 '만약'을 가정해보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가능성들을 점검해보고 점쳐보고 실패의 원인을 찾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또 재미삼아 '만약에~' 해보는 것만 해도 아주 좋다. 왜 그걸 나쁘다 하는지 모르겠다)
레자 샤의 개혁이 케말 파샤의 개혁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케말은 공화정을 택했는데 왜 레자 샤는 왕정을 택했을까? 더 재미난 것은, 터키와 이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터키는 서방에서 '서구화해서 성공한 케이스'라고 떠들어대고 있고 (실제로는 터키를 미워하면서) 이란은 서방에서 '악마의 나라'로 몰아붙이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아들 팔레비(보통 '팔레비 국왕'으로 불리는) 즉위 뒤인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을 침공한다. 이란은 연합국의 병참기지가 되었고, 영국과 소련의 경제적 침탈도 심해졌다. 소련군은 2차대전 종전후에도 가장 늦게까지 이란에 주둔했으며 이를 배경으로 이란 공산당인 투데당 Tudeh party이 세력을 불렸다.

타임지 커버에 실린 모하마드 모사데크 반외세 민족주의를 내세운 모하마드 모사데크 Mohammad Mossadeq가 이끄는 국민전선이 약진을 보이자 1951년 팔레비 국왕은 등떼밀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모사데크 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유전 국유화를 단행했다. 이란 유전을 꿰차고 있던 영국은 이란의 돈줄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모사데크가 투데당과 협력할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까지 나서 군부 쿠데타를 사주한다. 모사데크는 반역 혐의로 체포된뒤 3년간 복역하고 고향에 가택연금됐으며 1967년 사망했다.

모사데크를 쫓아낸 팔레비는 친미, 친영 노선을 노골화하고 비밀경찰(SAVAK)을 동원해 반대파를 탄압했다. BP, 더치 셸 같은 서방 석유회사들이 이란의 유전을 장악했다. 1955년에는 바그다드조약이 성립된다. 바그다드조약기구(중동조약기구 METO)는 터키·이라크·이란·파키스탄·영국으로 구성된 상호방위동맹으로, '가맹국의 안전을 위한 협력'을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소련의 중동진출을 막기 위해 결성된 것이었다. 회원국이 아닌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한 미국이 이 기구를 좌지우지했다. 1958년 이라크가 바트당 혁명 뒤 탈퇴하면서 이 기구는 해체되고 소련에 맞선 군사조약기구인 중앙조약기구(CENTO)가 만들어진다.

METO에 반강제적으로 가입한데 이어 팔레비 국왕은 1959년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 미군 주둔을 허용한다. 1963년 팔레비는 6개항의 개혁조치를 국민투표에 부쳐 이른바 '백색혁명'을 시작했다. 주내용은 토지개혁, 근로자에 회사 이윤 분배, 삼림과 목초지 국유화, 국영사업장 매각, 노동자 농민에 유리하게 선거법 개정, 문맹퇴치 지원 등이었으며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다. 특히 역점을 두어 추진하였던 토지개혁은 아버지 레자 샤 시절 무산됐던 것으로, 팔레비 국왕이 솔선해서 왕실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지소유자와 겹치는 이슬람 성직자층은 이 조치에 크게 반발한다. 이들은 호메이니의 지도 아래 반(反)백색혁명 운동을 벌였다. 호메이니는 가택연금 됐다가 이듬해 터키(뒤에는 이라크)로 망명했다.
성직자들의 반대 속에서도 토지개혁은 진행됐고, 경제도 나아졌다. 국정에 자신감이 생긴 팔레비는 1967년 10월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대관식을 거행하고 1971년에는 페르샤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페르세폴리스에서 성대히 거행하기도 했다.
내정이 안정되자 팔레비는 중동의 경찰 역을 자임하고 군비 강화에 나섰다. 내용은 실상 미제 무기 수입이었다. 국민들은 이런 친미노선에 굴욕감을 느꼈고,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서구화 정책에 반감을 가졌다. 모사데크 국민전선의 한 분파인 이란자유운동, 호메이니가 이끄는이슬람세력, 페다인과 무자헤딘 등 무장단체들이 모두 반 팔레비 전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반왕정 운동은 점차 조직화되어갔다.

과시성 사업과 군비 강화에 예산을 낭비한 결과, 이란 경제는 1976년 후반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왕정의 무능과 부패 속에 빈부격차는 오히려 커졌다. 1977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는 그간 묵인해왔던 왕정의 인권탄압에 우려를 표하고 개선을 요구한다. 그러던 차에 78년 왕정은 호메이니를 음해하는 기사를 친정부지에 게재, 국민을 자극하고 쿰 시에서 열린 신학생 데모를 유혈진압한다. 이스파한의 바자르가 항의표시로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자 다시 무자비하게 해산하는 등 78년 벽두부터 시위와 유혈진압의 악순환이 시작됐다. 8월 아바단에서 시위군중이 경찰을 피해 들어간 렉스 시네마에 불이 나서 400여명이 숨지는데, 훗날 조사에서는 광신도의 방화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비밀경찰의 소행으로 믿었다. 9월 성난 군중이 테란 시 잘레흐 광장에 운집하자 경찰이 무차별 발포, 유혈극이 벌어졌다.

이슬람혁명을 이끈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 이라크는 이란의 압력에 따라 호메이니를 추방했으며 호메이니는 프랑스 파리로 망명해간다. 그의 프랑스 망명은 오히려 이란 반정부운동이 국제적 주목을 받게 하는 계기가 됐다. 12월 팔레비 국왕은 온건파인 국민전선 지도자 바크티아르 Bakhtiar와 협상, 바크티아르에게 총리직을 맡기고 출국하기로 결정한다. 이듬해 1월 팔레비는 이란을 떠났다.
그러나 79년 출범한 바크티아르 정부에 대해 호메이니는 '불법'임을 선언하고 타도령을 내린다. 2월1일 호메이니 귀국. 군부마저 호메이니 지지로 돌아서자 바크티아르마저 망명해버리고 2월12일 왕정은 완전히 종식됐다. 이것이 이란 이슬람혁명이다.
1979. 2. 5. 호메이니는 메흐디 바르자간 Mehdi Bazargan을 임시정부 수반으로 지명한다. 하지만 이슬람최고혁명위원회가 사실상의 정부였고, 정규군과 별도로 이슬람혁명수비대가 만들어져 무력으로 뒷받침했다. 12월에는 이슬람공화국을 표방한 새로운 헌법이 채택됐다.

테란 주재 미대사관 인질사건(11. 4.)이 없었더라도 미국은 이란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왈러스틴과 헌팅턴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미국이 느낀 '체제 충격'이 어마어마하게 컸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었다. 아무튼 인질사건으로 바자르간은 사임했다.
1980년 1월 바니 사드르 Bani Sadr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혁명세력을 누르지 못했다. 사드르는 1년만에 실각해하고, 무자헤딘(MKO) 지도자 마수드 라자비 Masoud Rajabi와 함께 81년 7월 파리로 망명했다. 사드르는 파리에서 호메이니 축출 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란의 권력투쟁은 승패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성직자 계급의 승리 이후 이란은 교조주의로 치닫는 동시에, 정정불안과 암살이 횡행한다. 사드르 실각 뒤 취임한 알리 라자이 대통령과 자베드 바호나르 총리가 나란히 암살됐다. 혁명위원회는 분쟁을 잠재우기 위해 저항조직을 해체하고 3000여명을 처형했다. 81년말 혁명은 초기의 불안단계를 극복하고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여기서 사담 후세인이 등장한다. 이라크는 인구의 65%가 시아파이고, 시아파의 종주국은 이란이다. 이슬람국가들 중에서 시아파 인구가 많은 나라는 이 둘 뿐이다. 후세인은 이란 혁명의 파고가 넘어올까 두려워 선제공격을 해버린다. 주변 아랍국가들의 명시적, 암묵적인 지지 속에 80년 7월 이란-이라크전쟁이 시작됐다. 표면적인 이유는 Shatt al-Arab 수로의 영유권 다툼이었다.
개전후부터 1982년 여름까지는 이라크가 공격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1982년말부터 이란이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반격에 나서면서 지리한 소모전에 돌입한다. 미국 무기로 무장하고서도 미국의 이라크 지원사격으로 고립지경에 빠진 이란은 국민들의 '혁명 수호 의지'로 패전을 면할 수 있었지만 인명피해는 이란 쪽이 훨씬 컸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으로 오히려 이란 내에서는 혁명 분위기가 공고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전쟁이 89년 9월 UN 중재끝에 종료되고 호메이니도 사망한 후(1989년 6월)에야 이란은 정상적인 국가로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지금은 호메이니의 뒤를 이은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최고종교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다.


왕조사 연표

고대 페르시아 왕조(B.C. 559-330)
사산 왕조(A.D. 226-651)
아랍의 지배(651-1258)
몽고의 지배(1256-1349)
티무르 왕조(1369-1500)
사파비 왕조(1501-1736)
아프샤르 왕조(1736-1749)
카자르 왕조(1796-1925)
팔레비 왕조(1925-1979)
이란 이슬람공화국(1979-)


■ 근대정치사 연표

1906년 입헌군주국 수립, 샤 통치 종식
1919년 페르시아조약 -영국 보호령이 됨
1921년 레자 칸의 쿠데타
1925년 카자르 왕조 멸망, 팔레비 왕조 건국
1935년 이란(Iran)으로 국호 변경
1941년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즉위(9월)
1951년 모사데크 Mosaddiq 정권 수립
1953년 모사데크 실각
1962년 백색혁명 시작(1월)
1963년 호메이니 망명(6월)
1977년 재미 유학생 반정부시위(11월)
1978년 반정부 시위 전국 확산(3월)
1979년 팔레비 망명, 호메이니 귀국(2/1), 이슬람공화국 선포(4월), 미대사관 인질사건(11월)
1980년 바니 사드르 대통령 당선(1/25), 이란-이라크전쟁 발발(9/21)
1986년 미국 관리 비밀 방문(이란-콘트라 스캔들)
1988년 이라크와 휴전협정 체결(8/20)
1989년 호메이니 사망(6/3)
1993년 라프산자니 제6대 대통령 취임(8/4)
1997년 하타미 대통령 당선(5월)
2001년 하타미 대통령 재선(6월)
2005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취임(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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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waits > [펌/민소] '먹튀' 자본 부추기는 한미 FTA - 이해영 한신대 교수 짧은 인터뷰

 

'먹튀' 자본 부추기는 한미 FTA
<민소라디오 전문서비스> 이해영 한신대 교수
현석훈의 시사광장    메일보내기

   
 서세진 - 한미 FTA 1차 본협상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15개 분과 중 농업과 위생 검역, 그리고 섬유, 무역규제를 제외한 11개 부분의 통합 협정문이 마련되었는데요. 현 정부는 과거 어느 나라보다도 신속하게 협상을 진행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님과 한미 FTA 1차 본협상 결과에 대해서 말씀 나누어 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해영 - 안녕하십니까?
  
  
  서세진 - 11개 부분의 통합협정문이 마련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통합협정문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해영 - 통합협정문 자체가 최종결정문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큰 의미가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통합협정문이라는 것은 양국이 제안한 협상 초안들을 합해서 하나의 협정 문안을 만든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서세진 - 1차 본협상에서 11개 부분 통합협정문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1차 본협상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평가를 해 주신다면요?
  
  이해영 - 통합협정문이 만들어 졌다고 하더라도 협정 문안에 대한 협정이 마무리 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협정문의 60% 가량의 부분들은 여전히 협의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까지 한미 FTA 1차 협상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다고 볼 수 있는데요.
  
  문제는 합의된 부분이 합이되지 않은 부분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라는 겁니다. 즉, 한미 FTA와 관련해서 투자와 서비스 분야에서 양국이 합의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 한미 FTA라는 것은 서비스, 지적 재산권 등 이른바 신통상이슈에 초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노리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서비스, 지적재산권 등에 과한 부분이 합의가 되었다는 것은 향후 한미 FTA에 관련된 협상의 전망을 매우 우울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세진 - 학계 전문가들은 제2의 금융위기를 불러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의 협상에 대한 위험성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해영 - 투자 분야는 이미 IMF 이후부터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미 투자협정(BIT)이 오랫동안 협상이 진행되다가 스크린쿼터문제에 발목이 잡혀서 타결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상 이것을 제외하고 한미 간의 협상은 완료가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에서 협정 문안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투자부분에 대한 부분은 BIT를 통해서 이미 공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로 이 BIT에 관한 문제는 매우 심각한 독소 조항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미 FTA 투자부분 협상의 첫 번째 문제는, 투기자본까지도 투자로 분리되는데도 불구하고 투기자본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미국식의 투자개념에 따르면 사채까지도 투자가 됩니다. 결국 이것은 투기와 투자에 대한 구분 없이 모두 수용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행의무 부과금지 조항입니다. 이것은 일체의 이행의무를 부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자율 송금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럴 경우 론스타 같은 '먹튀'자본의 경우 이 과실 투자 이익을 본국으로 송금하는데 전혀 방해를 받지 않게 됩니다.
  
  또 한 가지는, 투자자 국가 제소조항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인 투자자가 한국에 투자를 했다가 손해를 봤을 경우 한국 정부의 규제로 몰아서 한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국제법상으로 봤을 때는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NAFTA 에서 유래되어 한미 FTA도 그대로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멕시코의 예를 들면 미국 회사가 '메탈 클래드'라는 회사가 멕시코에 산업폐기물들을 갖다 버려서 그 주변이 오렴이 되고 주변 주민들이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멕시코 주민들과 멕시코 정부가 규제를 가하자 메탈 클래드는 NATFA 조항을 근거로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메탈 클래드 사가 승소했던 예가 있습니다.
  
  
  서세진 - 정부가 협정 초안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해영 - 지금 한미 FTA의 경우 국민 경제 생활에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누가 어떤 피해를 입을지 조차 예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물구하고 미국과 합의를 했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죠.
  
  우리의 경우 협상 동의권을 대통령이 가지고 있고, 국회는 그 비준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의 경우 헌법 60조에 명시되어 있는 동의권을 최대한 활용해서 행정부와 협상팀을 통제해야 합니다. 한-칠레 FTA의 경우에 행자부가 협상을 해 온 것에 대해 넋 놓고 있다가 결국 행자부의 거수기 노릇을 하고 만 것이죠.
  
  
  서세진 - 체결된 부분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말씀 해 주셨는데요. 2차, 3차 본협상을 대하는 우리 측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해영 - 이번 협상의 경우는 실패한 협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얻어간 것과 우리가 가져온 것을 비교해 볼 때 우리가 가지고 온 것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 미국이 가져간 것은 실직적인 이익을 챙길 수 있는 만큼은 다 챙겨 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적재산권의 문제, 신 금융서비스에 대한 부분, 노동 분야의 Public Communication의 문제 등 실질적으로 알맹이는 미국이 다 챙겼다는 것입니다. 결국 의제 설정의 대부분은 미국의 요구안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요구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죠.
  
  정부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저 다 받아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이 추세로 간다면 사실상 한미 FTA 협상을 끝났다고 보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더 이상 가져올게 없는 상황입니다. 농업 분야에서 미국이 몇 년 정도 더 봐줄 것이냐 정도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문의 상징적인 효과 때문에 마치 우리 국민들이 한미 FTA에 목매는 것처럼 보여지는데요. 결국 이렇게 되면 농업과 개성공단에 대한 부분은 질질 끌다가 결국은 일괄 타결에서 한국은 엄청난 조건을 떠안고 협상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이 잘못된 협상에 대해서 협상단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 동시에, 이 협상의 중단을 촉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서세진 - 오늘 한미 FTA 1차 협상에 대해서 이해영 한신대 교수님과 말씀 나눠 봤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영 - 감사합니다.


2006년06월12일 ⓒ민중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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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주문을 넣으려다 <아르세니예프의 생> 서평단 모집하는 걸 보고 잠시 미루었다. 어차피 살 책이지만 혹시나 하여. 2월에 서평단으로 뽑힌 책 두 권의 리뷰를 모두 쓰지 않았으면서 꿈도 야무지다만.

소마 미술관의 파울 클레 전시회에 다녀왔다.
가기 전에 책세상에서 나온 <파울 클레의 삶과 예술>을 구입했는데 읽지는 못했다.
파울 클레의 작품은 모두 9000점에 달한다고 한다. 그 중 이번 전시회에 나온 작품은 달랑 60점이다. 9000점 중에서야 '달랑'이지만 전시회로 보자면 아주 적지는 않다. 도슨트는 파울 클레 전공자인지 준비를 많이 했는지 막힘없이 술술 얘기를 풀어냈고, 그냥 봤으면 모르고 지나갔을 법한 내용을 잘 전해주었다.
올림픽 공원 공연 회원에 가입한 덕에 3000원 할인을 받았고, 야외 조각 공원을 슬슬 걷는 것도 좋았고, 하여 꽤나 유익한 전시회였다.
<파울 클레의 삶과 예술>과 더불어 타쉔 시리즈 중 <파울 클레>를 같이 읽을 생각이다.

피카소 전시회를 가기 전 준비 차원에서 읽으려고 고른 책은 타쉔 시리즈와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김원일의 <발견자 피카소>가 어떨지 궁금한데, 그간 몇번이나 서점엘 가도 그 책은 없다. 존 버거의 책은 단지 저자와 역자가 맘에 든다는 이유로 애인이 고른 책. 전시회 도록이 있다면 그걸 구입할 계획.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보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진도는 잘 안 나가고 있지만 재미있다. 조목조목 잘 정리된 책. 애인이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사달라고 하니 이것도 읽어야겠다.
미셸 푸코와 한미 FTA에 관한 책도 애인의 선택. 푸코는 건너 뛰고, FTA만 봐야지. 

애인의 친구가 유럽 여행을 갔다가 오르셰 미술관의 인상파 도록을 선물로 사 왔다. 그걸 한장한장 넘기다 보니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인상파 화가전도 가보고 싶지만, 안갈 가능성이 크다. 한가람미술관은 싫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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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6-12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바쁘셨어요?
무슨 일인가 했어요.

2006-06-12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6-06-13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디님, 오랜만이죠. 많이 바빴던 건 아니구요, 이래저래 놀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

바람구두님, 넵. 도장찍어주셔서 감사.

happyant 2006-06-13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녀가요.ㅎ인감도장으로 꾸욱~

urblue 2006-06-1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감 도장 아무데나 찍으면 안됩니다~ ㅎㅎ

2006-06-15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6-26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6-06-26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서평단 뽑혀서 지금 읽고 있습니다. 이런 책은 확실히 읽는 재미가 떨어지지요. 한 열흘은 걸릴 것 같아요. ㅠ.ㅜ 말씀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