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세니예프의 생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지음, 이희원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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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학 진학 시 노어노문학과를 택한 것은 좀 어이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문학 쪽으로 가고 싶긴 한데, 영어 싫어, 독어 싫어, 일어 싫어…… 하는 식으로 지우다 보니 남은 것이 중국과 러시아뿐이었다는 슬픈 얘기다. 그 중 중국 문학은 루쉰(이라고 해 봤자 『아Q정전』)밖에 모르는데 반해 푸슈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고리키, 체르니셰프스키, 솔제니친 등 러시아 작가들은 비교적 친근한 편이었다. 그리하여 노어노문학과에 입학했지만, 시쳇말로 먹고대학생이었던 나는 대학 시절 내내 딴전만 벌였다. 특히 많은 노력이 필요한 어학은 일찌감치 포기. 누가 러시아어를 물으면 내 전공은 러시아어가 아니라 러시아문학이라고 주장했더랬다. (잘도 그런 흰소리를. 언어를 모르고서 문학이 가능하다더냐.) 실제로 문학 수업을 좀 더 열심히 듣긴 했다. 그러나 심지어 푸슈킨의 대표작 『예브게니 오네긴』도 읽지 않은 채 졸업한 걸 보면 역시 먹고대학생이 맞았다.

 

이 엉터리 (과거의) 러시아 문학도는 실은 러시아 문학이라는 걸 잘 모르겠다. 한 지역에서 (여러 세대가 되었든 동시대가 되었든) 동일한 언어로 씌어진 글이라고 해서 다른 지역과 확연히 구별되는 비슷한 특징을 지니는지, 그런 걸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책을 읽은 것도 아닐뿐더러 적은 대로 핵심을 추출해낼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푸슈킨으로부터 시작된 러시아 리얼리즘의 흐름을 배웠던 것도 같지만, 개별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스스로 확인한 것은 아니다. 밝고 낭만적이고 사랑스러운 푸슈킨, 그로테스크한 풍자가 고골, 고독과 페이소스의 레르몬토프, 박애주의자이자 엄숙주의자인 톨스토이, 모순의 집합체라 할 도스토예프스키,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체호프, 선동가 고리키 등 재미있게 읽거나 좋아하는 작가들도 여럿이지만, 그들에게서 다른 여러 나라의 작가들과 구별되는 러시아적 특징을 찾아내라고 한다면, 말문이 턱 막혀버리는 것이다. (등장 인물의 이름이 길다, 어렵다 이런 얘기는 빼 주시길.) ‘리얼리즘’, ‘비판 정신정도를 떠듬떠듬 읊조릴 수 있을 테지만, 그게 과연 러시아 문학만의 특징일까.

 

부닌은, 무슨 이유인지 머리 한 구석에 확 박혀 있는 작가이다. 수업 시간에 언급이 되었는지 어쨌는지 전혀 기억이 없고 어떤 작품을 썼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희한하게 이름은 친근해서 꼭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은 느낌을 준다고나 할까. (설마 이름이 쉬워서?) 그런 작가의 책이 나온다는 소식, 게다가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명맥을 잇는 마지막 작가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소개말에는 꽤나 구미가 당긴다. (노벨상 수상 작가라는 사실조차 이번에 알았다만.) 내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 문학이라는 걸 이 참에 느껴보겠다는 야심찬 각오까지는 아니지만 하여튼 제법 기대를 한 작품이다.

 

과연, 곳곳에 러시아에 대한 묘사와 사색이 들어 있다. 부닌은 유럽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자멸에 대한 러시아적 열정이라든가 혹독한 자연 환경에서 비롯되는 러시아인들의 우울과 냉담, 축제에 대한 러시아의 요구(하지만 정말로 우유가 흐르는 강과 끝없는 자유와 축제를 바라는 오랜 열망들이 러시아 혁명정신의 진짜 근원이었단 말인가?” -139), 러시아 문학에 등장하는 버려진 영지와 방치된 정원(불모의 땅, 황폐함, 몰락 같은 것들은 러시아 영혼에 무엇 때문에 그토록 다정한 위안을 주는 것인가?” -144), 러시아적 자유분방함, 푸슈킨, 고골, 레르몬토프, 체호프 같은 작가들에 대한 경탄과 애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자신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넘치도록 드러난다. 아르세니예프가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를 읽으면서 감탄하고 2의 푸슈킨이나 레르몬토프가 되기를 염원하는 장면에서는 수많은 러시아의 작가들이 같은 과정을 거쳤으리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푸슈킨을 읽지 않는 러시아인이 드물다고 하던데, 러시아인들에게 푸슈킨과 레르몬토프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가슴으로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막상 책을 읽는 동안에도, 다 읽은 후에도 이 작품이 특별히 러시아적이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다. 몰락해가는 귀족 가문의 후예로서 문학적 감수성을 가진 소년이(1부 카멘카, 삶의 시작) 조국으로서의 러시아를 느끼기 시작하고(2부 나의 조국 러시아), 문학적 재능을 드러내며(3부 숭고한 사명, 문학), 성장통을 겪으면서 방황하고(4부 청춘, 그 찬란한 이름), 사랑을 하는(5부 사랑, 시들지 않는 기억) 과정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으로 바꿔 놓더라도 그대로 통용될 법하다. 나는 차라리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나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를 떠올렸다.

 

조국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긴 묘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적 특징보다 보편성이 먼저 느껴지는 이유는 러시아라는 배경 위로 삶과 문학과 사랑이라는, 인류의 보편 주제에 관한 성찰이 도드라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릇 거장이라 함은 이렇듯 특정 시대, 특정 장소에서 소재를 취하더라도 시대와 장소를 뛰어 넘어 영속성을 가질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닐까. 이쯤에서 나는 또 흰소리를 늘어놓고 싶어진다. 내가 러시아 문학만의 특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읽은 모든 러시아 작가들이 거장인 까닭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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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6-07-09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전 부닌은커녕 예브게니 오네긴(사람 이름인거에요?), 체르니셰프스키, 레르몬토프, 이런 분들 하나도 모르는걸요. 얼블루님 러시아문학 전공 맞는데요, 뭘.
(소근소근. 러시아적 특징은 소설이 무지하게 길다, 아닌가요? -_-;; 쿨럭.)

sudan 2006-07-09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간 읽은 모든 러시아 작가들이 거장이라는 말을 다시 잘 생각해보니, 러시아문학에 대한 얼블루님의 애정이 확 느껴져요.

비로그인 2006-07-10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군요 러시아문학전공이라니 넘 멋져요..^^
그냥 넘어갈까했는데 블루님의 애정에 고무받아 읽어봐야겠어요..

urblue 2006-07-10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야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라는 건 뭘 두고 하는 말씀이신지. ^^;
근데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싫으셨다고 하셔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수단님, 뭐 특별히 애정이랄 것까진 아니구요, 그냥 관심만 보이는 척입니다.
글구요, 몇몇 아자씨들이 좀 길게 쓴 몇 권 빼면, 푸슈킨이나 체홉이나 고골이나 단편도 많이 썼다구요.

nada 2006-07-1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어 전공이셨구나... 워낙 할량할량 읽어서 다른 건 모르겠지만.. 딱히 러시아적이지는 않다고 느꼈는데, 그것이 모두 거장의 작품이기 때문이었군요!! (흰소리 댓글...- -;;)

비로그인 2006-07-1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문학 전공하신거요..^^ 취미로 러시아어를 배운 신랑이 늘 그러죠 러시아어는 정말 우아한 언어라구요..ㅎㅎ
아 그리고 싫다고 한게 아니라 힘겹게 읽었다는..-_-;;

urblue 2006-07-11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야님, 러시아어가 우아한 언어인지는 잘... 뭘 제대로 배웠어야 말이죠. ㅎㅎ

꽃양배추님, 흰소리에 흰소리로 답하시는 센스! ㅋㅋ

로쟈 2006-08-18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닌 자신이 '러시아'와 좀 무관한 작가입니다. 한 러시아 비평가가 한 얘기인데, 그는 생전에나 사후에나 언제나 '비동시대인'이라고...
 

 

 

 

 

 

오카모토 카노코(岡本かの子)의 『초밥』(박영선 역, 뜨인돌, 2006)을 출퇴근 지하철 길에 읽었다. 책을 건네받고 우선 빨간 바탕에 노란 기모노를 입은 여인의 뒷모습을 새겨 놓은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난하기도 하지.

食小說이라는 카피에도 혹했다. 초밥을 좋아하기도 하는데다, 뭐 『초밥왕』 같은 내용일거라고 생각한건 아니지만, 어쩌면 바르뜨의 일본 요리에 대한 묘사 정도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일식 요리에 대한 하이쿠 같은, 혹은 좀 더 화사한 문장들 말이다. 책을 펼쳐들고 겅중겅중 읽어 나갔다.

어,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이게 언제 쓰여진 소설인가. 머리말이며 역자의 소개를 되짚어 챙겨본다. 알라딘의 저자 소개에는

오카모토 카노코. 1889년 명치시대 말 도쿄에서 대 지주의 딸로 태어났다. 대단한 문학가족이었던 집안 분위기 탓에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문학을 접하게 된 그녀는 예리한 감수성과 과잉된 열정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일본 근대 문학 부활의 첫울음'이라는 격찬을 받으며 문단에 들어선 후 나쓰메 소세키, 다니자키 준이치로, 아쿠다카와 류노스케 등 당대의 저명한 작가들과 교류하며, 동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던함과 경계 없는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예술지상주의적 작품 세계를 펼쳐 나갔다. 평론가 주조 쇼헤이로부터 '형이상학적인 깊이를 집합적 무의식으로 드러낸 여류 천재 소설가'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학은 병들어 있었다>, <파리축제>, <게이샤의 어느 날> 등이 있다.」라고 나와 있다.

저자는 이를테면 우리나라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현진건이니 채만식 시대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일본문학에 문외한인지라 동시대 다른 저자의 소설이 어땠는지는 잘 모른다. 『초밥』(은 오카모토 카노코의 작품 가운데 음식을 소재로 다룬 세 편의 소설-초밥, 집 유령, 식마-과 다른 단편인 뺨 때리기 등 네 편이 실린 단편집이다)이 정말 대단한 소설이라거나 너무 재미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실은 조금 심심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도리어 지나치게 야단스러운 느낌이다.

그렇지만 『초밥』은 꽤나 흥미롭다. 가령 역자가 몇몇 세부 묘사나 장치를 바꾸어 놓는 번안을 해 두었다면, 나는 좀처럼 이 소설의 시대를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를 두고 일종의 현대성이 나타나 있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아마도 당시 일본사회의 서구화 혹은 현대화 분위기에 대한 단순한 반영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는지도 모르겠다. 80~9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 넘는 고전 급의 에너지는 별로 느껴지지 않지만, 동시대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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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7-04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생각했던 것보다 좋았습니다..^^

urblue 2006-07-04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 못 봤어요. 곧 보려구요. ^^

2006-07-04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언젠가 토요일 오후,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발견한게 일본판 <꽃보다 남자>였다.

대만 드라마도 잠깐 본 적이 있지만,
주인공들은 만화랑 이미지가 안 맞고, 재벌집 자식들의 럭셔리함도 전혀 찾아볼 수 없어서
흥미를 느끼지도 못했다.

일본판은 어떠려나 잠깐 봐주기로 했는데...
이런, 2시간 동안 내내 그것만 보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 몰입해서.

이후로 월화 밤, 혹은 토요일 오후에 작정하고 챙겨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열성적으로 본 드라마는 아마 <아일랜드>가 마지막이었지. -_-;

그런데,
어제 끝나버렸다.
비행장에서 석양을 깔고 키스씬으로 마무리.

마츠모토 준은, <고쿠센>이나 <너는 펫>과는 또 다른 느낌.
처음엔 츠카사 역에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보면 볼수록 괜찮고,
오히려 루이 역의 오구리 슌이 느끼해서 이상하다. 붸~

다음 기는 2007년에나 찍는다는구만.
그때가 되면 마츠모토 준을 비롯한 다른 애들 다 너무 늙어서 주인공 바꿔야하는 거 아닌가.

아웅, 이제 뭘 봐~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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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4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瑚璉 2006-07-04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보다 경단이 원본이던가요?

urblue 2006-07-04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꽃보다 경단..이 뭐죠? -_-a

chika 2006-07-04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맞을걸요? ㅡㅡ;

1회때 츠카사역으로 마츠모토 준이 나와서 엄청 웃었어요. 잘 모르고 있었는데다가 마츠준 첨 본게 '김전일'에서의 만화같은 인상땜에;;;;;
이 드라마에서는 단연 츠쿠시가 돋보였다고 생각해요 ^^

瑚璉 2006-07-0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花より団子"라는 일본 속담이 원제라는 뜻이었습니다요. (휭~).

urblue 2006-07-04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질님, 음, 그렇군요. 꽃보다 경단,이라니. 엄청 현실적이네요. -_-

치카님, 전 '김전일'은 못 봤는데, 거기두 나왔어요? 얘가 일본서는 인기가 많은 모양이네요. 츠쿠시 귀여워요. >.<

Koni 2006-07-04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일본에 그런 속담이 있군요. 발렌타인 데이에 꽃과 초콜릿을 받고는 "(꽃을 보며) 뭐냐 먹을 수도 없는 거. (초콜릿을 보며) 이건 또 뭐냐, 먹어도 배 안 부른 거."라던 선배 오빠의 투덜거림이 떠오릅니다.

urblue 2006-07-05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오님, 일본 속담은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선배, 이미 배가 많이 부른 것 같은데요. ㅎㅎ

瑚璉 2006-07-05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고나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게 써 두어서 부연설명을 합니다.

1. "花より団子"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 대체로 '명분보다 실리'라는 뉘앙스로 쓰이는 속담이라고 한다.
2. 이 속담에서, 우리말로는 보통 경단이라고 번역되는 "団子"는 일본 발음으로는 "男子"와 발음이 같다고 한다.
3. 따라서 말장난의 일종으로 "花より団子" -> "花より男子"가 만화의 제목으로 채택되었다.
4. 절대로(!) 저 만화의 원제가 "花より団子"인 것은 아니다.

urblue 2006-07-05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번의 오해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저리 자세하게 설명하시다니, 친절하셔라. ^^

IshaGreen 2006-07-05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캐릭터들 넘 멋지네요^^ 전 저거 학창시절때부터 만화 보다가 완결까지 보는거 포기했었는데-_-;

urblue 2006-07-0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열 몇 권 정도 보고 말았어요. 너무 길어서. -_-;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베스트셀러 미니북 20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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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맥베스 부인에서 데스데모나를 떠올렸다가, 곧바로 그는 『오셀로』의 주인공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맥베스, 맥베스라 4대 비극 중 하나인데, 틀림없이 읽었는데 말이지, 대체 어떤 내용이었더라? 심각하게 고민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책을 읽는 며칠 동안 생각해내지 못해서 결국 인터넷 검색 서비스를 이용해야만 했다. 찾고 보니 기억 난다. 이런, 아주 잠깐이라지만 어떻게 욕심 많은 레이디 맥베스와 순정에 목숨 바친 데스데모나를 혼동할 수 있지. 하긴, 비록 방향은 다르다 하더라도 대단히 용기 있다는 면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목에 맥베스 부인을 넣음으로써 작가는 이미 자신의 얘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물론 나처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면 별로 도움이 안 되긴 한다.) 남편이 왕이 될 거란 예언에 왕을 암살하기로 마음먹고 남편을 부추기는 맥베스 부인이 영국의 악녀라면, 러시아의 작은 마을 므첸스크군의 맥베스 부인이라 작가가 명명한 카테리나 리보브나는 어떤 여자일까.

 

안타깝게도 카테리나는 사랑에 눈 먼 여자다. 이게 왜 안타까운 일인가 하면, 사랑에 눈 먼 여자가 자신을 제대로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멋진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 가능성은 19세기의 러시아 뿐 아니라 현대의 세계 어느 곳에서도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그리 낭만적이지 못한 소리를 하느냐고? 글쎄. 사랑에 눈 먼 여자란 상대방이나 서로간의 관계보다는 자기 자신,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더 빠져 있기 마련이고, 눈 멀어서 상대의 속내를 어찌 알 것이며 사랑이 부스스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어찌 막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눈 크게 뜨고 자신과 상대를 바라보며 허약해지는 곳을 메워나가는 사랑이 진짜가 아닐까. 아무튼.

 

사랑 없는 결혼 생활과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보상이라도 된다는 듯 사랑과 재물을 양손에 움켜쥐려고 작정한 카테리나에게는 오로지 방해물을 치워버리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해서는 안될 일이 무에 있을 것이며 주저할 이유가 무엇이랴. 하여 그는 불구덩이 속으로, 아니 얼음이 덮인 차가운 강물 속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끝까지 함께할 줄 알았던 그의 사랑은 그 차가움에 진저리를 치더니 손을 뿌리치고 혼자 뭍으로 내빼버린다. 그런데도 카테리나는 포기할 줄을 모른다.

 

지루하고 답답한 세월의 무게 혹은 빙하같이 엄혹한 가난의 무게에 짓눌리면 사람의 심성이 일그러지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본성 속에 악마가 될 불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 역시 눈이 멀어 제 갈 길을 찾지 못한 게 문제가 아닐까. 바로 옆에 멀쩡한 길이 있는데도 무작정 강 속으로 허우적허우적 걸어 들어가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는 듯 하다. 『쌈닭』의 돔나 플라토노브나를 봐도 마찬가지다. 확실히, 사랑이든 재물이든 권력이든 사람을 현혹하여 눈 멀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는 주의가 필요한 법이다. 사랑이 찾아와도, 로또 1등이 되더라도, 기쁨에 눈을 꽉 감는 척만 하고 실눈을 뜨고 있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 책, 받아보니 길이가 보통 책의 2/3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Minibook 시리즈라고. 알지 못한 채 구입해서 투덜댔으나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는 훨씬 편하다. 표지를 비롯한 삽화는 러시아 원서에서 가져온 것처럼 보이는데, 꽤 재미나다. 사실 레스코프는 러시아 문학사 시간에도 들어보지 못한(혹은 기억하지 못하는) 작가이다. 새로이 알게 된 작가라는 점에서, 귀엽고 유쾌한 삽화가 곁들여졌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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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26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겠네요.^^
 

월요일 아침부터 전화와 이메일과 엠에센을 넘나드는 동시다발적 대화에 기운이 쏙 빠져있는 중이다.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의 관공서는 여전히 불친절하고 어렵다.
외국인에게 우리나라 관공서에서 요구하는 자료를 몽땅 받아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왜 이건 되고 이건 안되냐, 왜 그걸 달라고 하냐, 왜 이런 것까지 해야 하냐,
쏟아지는 질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답이란, 규정이 그렇다,는 것 뿐.
게다가 속 터져가며 진행하고 있는 이 일이 자칫 이대로 끝나버릴지 모르는 상황이다.  XX

토요일에 상견례가 있었다.
예단, 예복, 예물은 하나도 하지 않기로 애인과 합의를 보았고, 엄마에게도 그렇게 얘기했다.
우리끼리 알아서 할테니 상견례 자리에서 예단 얘기 꺼낼 필요 없다고 말해두었다.
그런데 엄마는 편치 않으셨던가 보다.
주위에서, 아무리 그래도 시부모님 한복 한벌 해 드리지 않을 수 있냐고,
그랬다가 나중에 한소리 듣거나 호되게 시집살이 시키면 어떻게 하냐고들 했던 모양이다.
예단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엄마가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애인의 어머니는 예단이 뭐 중요하냐, 애들끼리 잘 살면 그만이다, 라고 말을 얼버무리셨다.
애인 역시 미리 예단은 없다고 말씀드렸던 때문이겠지만, 좀 섭섭하신 것도 같다.
하지만 그냥 모른 척 할 생각이다.

애초에 김치냉장고를 사려고 냉장고를 가장 작은 사이즈(양문형 중에서)로 샀는데
살다 보니 별로 필요한 것 같지 않고 해서 그냥 있었다.
집에서 밥을 먹는데, 엄마가 어쩜 김치를 이렇게 맛이 없게 먹느냐고,
맛있게 담가서 보내주면 뭐하냐고 말씀하신다.
그거야 뭐...
사실 아무리 맛있는 김치라도 냉장고에 보관하면 그 맛이 오래 가지 않긴 한다.
엄마가 김치냉장고를 사 주시겠단다. 
덩달아 집에 놀러 와 있던 동생네도 같이 사주기로 하셨다.
올케 입이 찢어졌다. 

어제 잠들기 전에 <심부인의 요리사>를 조금 보았다.
웃기는 부인일세, 하며 킬킬거렸는데,
꿈에서 요리사가 되어 엄청나게 많은 만두를 빚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진짜 만두를 빚은 것처럼 어깨랑 허리가 결린다. 
왜, 심부인이 아니라 요리사에 동화되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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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6-26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심부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요^^

paviana 2006-06-26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왜 하필이면 요리사가 되셨어요.심부인이 되어서 한상 받으시는 꿈을 꾸고 일어났다면 개운했을텐데요.

urblue 2006-06-26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님, 그러게나 말입니다. 왜 요리사냐구요. 흑흑.

물만두님, 만화 보시고 님도 요리사에 동화되시는 건 아닌지... =3=3

2006-06-26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 2006-06-26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컥. 저랑 같군요.
저도 속절없이 요리사에..;;;
참. 조심스럽습니다만 그래도 시어른 한복은 하시는 게 나을겁니다..;;
묘하게 기억하시던만요. 저는 아가씨 결혼하고 얼마 안되어서 한지라 따로 안했거든요. 극구 안하신다 해서 안했는데 나중에 좀 그렇더라구요.

urblue 2006-06-2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디님, 히힛, 저만 요리사가 아니었어요~
에, 그 문제는 결혼식 앞두고 다시 얘기하려구요.

속삭님, 너무하셔요~~ 꿈에서 저한테 일시킨 사람이 바로 님이었죠? 흥흥흥!

로드무비 2006-06-26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케 입이 찢어질만하네요.ㅎㅎ
이제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일만 남았군요.^^

sudan 2006-06-27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핫. 심부인이 아니라 요리사! (그런데, 그 정도로 요리는 잘 하나요? ^^ ;;)

urblue 2006-06-27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밤새 만두를 빚었으니 솜씨가 좀 늘지 않았을까요? ㅎㅎ

따우님, 넹~ ^^

로드무비님, 결혼식장에 입장하기 전에 신혼여행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아직 마음을 확실하게 못 정했네요. ^^

ceylontea 2006-06-27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맨 마지막줄에 심각하게 글 읽다가 웃어버렸어요.. ^^

urblue 2006-06-28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힛. 웃으셔서 다행~

IshaGreen 2006-07-05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야 축하드려요~~~^.^ 정말 좋으시겠어요. 한창 때 오기로 결혼 안해! 라고 부르짖으면서도 막상 준비하시는 분들 보면 부럽네요^^ㅋㅋ

urblue 2006-07-06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
결혼은, 아직도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쩌다보니 임자(?)를 만나서 이렇게 되었지만 말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