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딸기 > 반복되는 '카나의 비극'


The face of Qana 카나의 얼굴

1

카나의 얼굴
예수의 얼굴처럼
4월의 바닷바람처럼, 창백한.
빗물처럼 흐르는 피, 그리고 눈물.

2

숯덩이가 된 우리 몸을 짓밟고 그들이 카나로 들어왔다
이 남쪽땅에 나치의 깃발을 올리며
폭풍의 한 장을 열어젖힌다
히틀러는 가스실에서 그들을 불태웠고
이제 그들은 히틀러의 뒤를 이어 우리를 불태운다
히틀러는 그들을 동유럽에서 내쫓았고
이제 그들은 우리를 우리 땅에서 내쫓는다

3

그들이 카나에 들어왔다
굶주린 늑대처럼
메시아의 집을 불태우고
후세인의 옷과
남쪽 땅을 짓밟는다

4

폭격을 맞은 밀밭과 올리브나무, 담배밭,
그리고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
폭격을 맞은 카드모스
폭격을 맞은 바다와 갈매기들
폭격을 맞은 병원들, 아이를 돌보던 어머니들, 학생들
폭격을 맞은 남쪽지방의 아름다운 여인들
달콤한 눈 속엔 짓밟힌 정원들

5

우리는 알리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걸 보았고
피묻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 속에
기도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6

누가 카나의 역사를 쓸 수 있을까
이 곳은 두 번째 카르발라였다고
양피지에 새겨줄 수 있을까

7

카나는 숨겨져 있던 것의 베일을 벗겼다
우리는 아메리카를 보았다
유대 랍비의 오래된 옷을 입고
학살을 이끌며
이유 없이 우리 아이들을 폭격하고
이유 없이 우리 아내들을 폭격하고
이유 없이 우리 나무를 폭격하고
이유 없이 우리의 생각을 폭격하는
아메리카, 세계의 여왕
그들은 헤브루에서 아랍을 깔아뭉개라는 포고령을 내린 것일까

8

아메리카의 지배자는 매번
우리를 죽이기 위해 대권을 얻는 것인가
우리, 아랍을 죽이기 위해

9

우리는 하나의 아랍이 나타나
우리 목을 찌르는 가시덩쿨을 빼내주기를 기다렸다
한 명의 영적인 지도자,
한 명의 왕,
한 명의 돈키호테,
한 명의 영웅이 나타나 수염을 깎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할리드, 타리크 혹은 안타라를 기다리면서
허튼 수다만 늘어놓고 있었다
학살이 끝나고 나서
그들은 팩스 한 장을 보냈다
기도를 마친 우리는 그것을 읽었다

10

우리의 절규에 이스라엘이 무슨 두려움을 느끼랴?
우리가 팩스를 보내면 이스라엘이 두려워하랴
팩스의 지하드는 성전 중에서도 가장 나약한 성전이다
우리가 쓴 단 하나의 텍스트는
우리를 떠나간 순교자들,
그리고 우리에게 올 모든 순교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11

알 무카파, 자리르, 그리고 파라즈다크.
이스라엘이 그들의 무엇을 두려워하랴
무덤 입구에서 시를 집어던지는 칸사.
타이어를 불태우고
코뮤니케에 서명하고
상점을 부수면 그녀가 두려워할까
우리에겐 전쟁을 승리로 이끌 왕이 없다는 걸,
우리에게 있는 것은 수다장이들 뿐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는데

12

북을 친다고 해서,
옷을 찢고
뺨을 긁어댄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무엇을 두려워하랴
아드와 타무드의 이야기를 듣는다 해서
이스라엘이 무엇을 두려워하랴

13

우리 민족 모두가 코마상태에 빠져 있다
정복의 시대 이래로
우리는 한 통의 편지도
받지 못했다

14

우리는 덜 익은 밀가루반죽 같은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이 학살과 테러를 계속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게을러지고 냉담해져간다

15

질식할 것 같은 점령
점점 추해져가는 사투리
격리돼 가는 녹색 땅들
메말라가는 여름의 나무들
그리고, 변덕스럽게 이전의 경계선들을 잡아먹어가는
경계선들.

16

이스라엘이 우리를 모두 학살할거야. 못할 까닭이 없지.
이스라엘은 히샴, 지야드, 알라시드를 죽일거야. 못 그럴 이유가 없지.
왜 아니겠어? 바누 타흘라브를 죽이고 그들의 아내를 빼앗을거야.
왜 아니겠어? 바누 마젠을 죽이고 그들의 자식들을 빼앗아가고.
왜 아니겠어? 바누 아드난의 바지를 무릎으로 끌어내리고
입술과 목을 갈망할지도!

17

이스라엘이 무엇때문에 아랍세계를 두려워하겠어
그들이 예후다가 되었는데


1996


번역 딸기

++ 카나 대학살: 1996년 이스라엘이 레바논 카나(Qana)에 있는 UN 캠프를 폭격, 107명을 학살한 사건



---

오래전에 옮겨놓았던 니자르 카바니의 시.
역사는 반복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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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코아가 바뀐 스폰지하우스에서는 지금 일본인디영화페스티벌을 하고 있다. 토요일에 <녹차의 맛>과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두 편을 볼 계획이었으나, 느지막하게 아침을 먹고 나니 오후 2시 상영시간에 맞추기가 어려워 <녹차의 맛>은 포기. 이제 못 보면 DVD도 구하기 힘들 텐데, 언제 보려구. 역시 게으름이 생활의 가장 큰 적이다.

 

설마 사람이 많을까 싶어서 예매도 하지 않았다. 아트큐브도 아니고, 스폰지하우스는 제법 좌석도 많잖아? 이대 앞에서 쇼핑하고 교보에서 놀다가 걸어서 스폰지하우스에 도착한 시각은 6시 30분. 영화 시작 20분 전이다. 이런, 앞에서 두 번 째 밖에는 자리가 남아있지 않단다. 사람들을, 아니면 TV를 너무 무시했던 게야. (<거북이>는 TV 영화프로그램에서 소개했다.) 그나마 볼 수 있었으니 다행이지. 쩝.

 

제목도 희한한 이 영화, 과연 인디영화답다. 어찌나 웃었는지, 한 주일의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 버린 듯 하다.

 

23세의 주부 스즈메는 해외 근무 나간 남편이 사다 놓은 거북군에게 먹이를 주는 것 외엔 딱히 할 일도 삶의 보람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 태어날 때부터의 친구 쿠자쿠가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활기차게 사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렇게 존재감 없이 살다가 순간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던 찰나, 우연히 찾아낸 스파이 모집 광고가 떠오른다. 그래, 스파이가 되는 거야!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스파이가 되어 버린 스즈메. 이제부터 할 일은? 가능한한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하게 살기.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주제에 어떻게 하면 평범하게 보일까를 고민하다니?

 

평범하게 사는 스파이 노릇은 그래도 스즈메의 생활을 바꿔준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레고 흥분되고 무언가 굉장한 사건이 앞날에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투명 인간 같던 스즈메는 점점 뚜렷해진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건 누구나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게 아닐까. 별다른 큰 일이 없어도 재미있게 보람을 느끼며 사는 게 가능하다고.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스즈메만 빼고) 범상치 않다. 꽤나 고집 있는 배관공, 이상한 춤을 추는 미용실 아저씨, 해외 여행을 일삼는 숨은 고수 두부 가게 아저씨, 바로 옆 모나카 가게 아저씨, 어중간한 맛의 라면을 만들면서 가장 맛난 에스프레소를 후식으로 내 놓는 라면 가게 아저씨, 한 성깔하는 악기점 아저씨, 스즈메의 아버지와 이웃집 아저씨, 스파이 부부, 공안요원들, 쿠자쿠 등등. 9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 많은 독특한 캐릭터를 비벼 넣어 새콤달콤한 비빔국수 같은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박수를. 아니 푸하하 터지는 박장대소를.

 

스파이 부인이 처음 했고, 나중에 스즈메가 따라하는 휏휏휏휏 하는 웃음소리는 중독성이 있다. 영화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뒷자리에서 누군가 그렇게 웃었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돌아와서도 나 역시 그렇게 웃고 있었다. 당분간은 그리 웃을 것이다. 휏휏휏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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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6-07-24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휏휏휏휏. 이 영화 재밌죠? 전 극장에 가서 본 건 아니고 어둠의 경로로 봤었는데 좋더라구요^^ 친구가 일본인디영화페스티벌에 출석도장찍고 있는지라 몇 편 추천받아서 저도 곧 볼 예정^^ (녹차의 맛, 핑퐁, 스크랩 헤븐 추천받았어요-)

urblue 2006-07-24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두르세요. 인디페스티벌은 수요일까지랍니다. 저도 다른 작품들 더 보고 싶었는데 게으름 피우다 다 놓쳐버렸지 뭡니까. 흑흑. 그래도,
휏휏휏휏.

2006-07-24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7-24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dan 2006-07-24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그래도 휏휏휏,이라뇨. 울다가 웃다가 하면... 알죠?
퍼뜩 정신차려보니까 네시부터 지금까지 여기저기 영화싸이트에서 놀고 있지 뭐에요. 내가 지금 이럴때가 아닌데 왜 여기서 놀고있지? 하고 생각해보니까, 이 페이퍼 땜에 저 영화 검색하다가 그만 웹서핑 삼매경에. -_-

urblue 2006-07-24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그렇게 놀고 지금 야근하시는 건 아니겠죠? 휏휏휏휏~

2006-07-25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랑비 2006-07-25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랑 녹차의 맛이랑 보고 싶었는데... 한밤중의 야지키타밖에 못 봤어요. 흑흑. 한밤중의 야지키타도 재미있었답니다. 쪼끔 엽기지만. ^^

urblue 2006-07-25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밤중의 야지기타도 보고 싶었어요. 녹차의 맛은 워낙 길어서(143분) 쪼끔 지루하다는 평도 있더라구요.

2006-07-25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7-29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쁜하루 2006-07-29 0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보려고 마음먹었더니..이미 끝났네용 ^^;;; 담엔 정보습득 능력을
조금 빠르게 해야겠어용 ^^

2006-07-31 0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7-31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sandcat > 새가 난다, 저어새가 난다 + 자료

-sandcat, 7월호 게재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바람은 쉬지 않고 새들을 가두고 내리눌렀다. 바람에 얽힌 그들의 날개는 뭐랄까, 인어공주의 다리처럼 딴 세상 같고, 그녀가 잃은 지느러미처럼 아련하다. 새는 깃털만큼 무수한 몽상의 방식이며, 비상(非常)한 상투성이다. 삶이 주는 인간의 비애는 날아다니는 저들로 인해 그 무게를 덜어낸다. 하늘과 새를 머리에 이고 사는 사람들아 봐라, 새가 난다. 저어새가 난다.

석도의 저어새
젓갈시장을 돌아나온 샛바람이 달긋 분다. 가끔씩 멀기만 밀려올 뿐 배를 띄우기에도, 어린 새가 첫 비행 연습을 하기에도 적당한 날씨다.

‘저어새번식지 국제공동조사’ 삼 일째, 오늘의 목적지는 어로한계선 북방에 위치한 석도, 비도이다. 북한을 지척에 둔, 육지로 말하자면 비무장지대에 속하는 곳으로 인적이 드문 덕에 남한의 저어새들이 번식기를 보내는 데는 나무랄 데 없는 곳이다.

강화도 선착장에서 떠난 지 한 시간이 흘렀을까. 17.5노트로 나아가던 배가 갑자기 멈춰섰다. 오늘은 해미(바다 위에 낀 짙은 안개)의 날, 워낙 정치적으로 예민한 지역이라 함부로 나아가기 어렵다.

국제적인 멸종위기종인 저어새의 운명도 해미 속 한 척의 배처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불과 10년 전인 1996년, 동아시아 7개 국가가 모여 저어새 보전을 위한 ‘저어새 보호 국제프로젝트’를 시작할 때의 저어새 개체수는 500여 마리, 2006년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1600여 마리 이상으로 늘었다.

지금 저어새를 바라보고 있는 동아시아 각국의 사람들, 한결같이 손등이 검고 눈이 맑은 이 사람들이 저어새라는 희귀종과 한 배를 탄 숨은 공로자임에 틀림없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배는 마침내 석도에 닿을 수 있었다.

석도에서는 총 10~12쌍 정도가 번식기를 보내고 있었다. 작은 바위섬을 뒤덮은 가마우지와 괭이갈매기 사이로 보석처럼 박혀 있는 저어새는 번식기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살구빛 머리장식깃과 가슴깃, 20센티미터에 이르는 주걱 모양의 검은 부리로 확인된다. 멀리서 저어새들 또한 완전한 고요 속에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분단의 상징, 비무장지대. 주인도 없고 사람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아이러니의 땅에 저어새가 산다. ‘분단’과 ‘단절’을 상징하는 곳이 특별한 생명의 땅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아이러니일지도 모른다.

저어새는 새는 부리가 뾰족하다는 편견을 깨뜨리는 새다. 성조가 된 녀석은 부리에 투박한 주름을 얹는데, 너울대는 파도 같은 줄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늘어난다. 독특한 모양의 부리는 다른 새보다 비효율적인 사냥법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연기념물 205호, 강 하구나 갯벌 생태계의 깃대종인 저어새는 얕은 갯벌에서 먹이를 취한다. 그들의 부리는 애초에 그들의 생태적 특성에 맞게 진화해왔을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속도에 비해 인간이 환경에 가한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빠른 것일 테고 말이다. 먹잇감이 풍부했던 예전에는 효율적이지 못한 사냥법으로도 충분히 생존이 가능했지만 급격한 서식지의 환경변화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저어새가 사는 강 하구나 얕은 갯벌은 사실 건강한 바다의 상징이기도 하다. 강 하구나 얕은 갯벌은 바다를 살찌우고, 건강한 바다는 인간을 살찌운다. 저어새를 안다는 것은 바로 서식지를 안다는 것, 저어새를 보전한다는 것은 바로 서식지를 지켜낸다는 의미이다.

비도의 저어새
비도는 저어새 천지의 무인도다. 이곳에만 자그만치 40~50쌍 정도가 번식기를 보내고 있었다. 다 큰 녀석들은 약 50마리, 새끼들은 12마리 정도로 2002년 6월, 작고한 김수일 교수 일행이 밴딩한 저어새가 고향으로 날아와서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도 보인다. 털이 부숭부숭한 어린 새끼와 서 있는 저어새 무리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힘에 겨운 번식기를 견뎌내고 있을 터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노랑부리백로 서식지가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그날 비도에서 2마리의 노랑부리백로를 발견하는 기쁨도 거저 얻었다.

새들의 눈으로 보자면 이 지상은 중력이 지배하는 추락의 땅일 것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새들의 시야는 인간의 그것과 다르다. 보통 인간의 세 배에 이르며 고개를 돌리지 않고 150~340도에 이르는 풍경을 한눈에 꿴다. 그렇다면 지금 저어새들이 내다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미래와 21세기를 사는 인간들의 현재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새끼에게 비행 연습이라도 시키려는가보다. 영화 『위대한 비행』에서 본 철새들의 비행은 강도 높은 노동, 여러 날의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나오는 고달픈 생존이었다. 철새들의 이동보다는 한가한 날갯짓을 하고 있는 저어새 무리를 보니 고향이 주는 편안함에 몸을 내맡기는 살가운 여유가 느껴진다.



저어새의 고향은 한국
환경연합 습지팀의 석도, 비도 내 저어새 모니터링은 벌써 5년이 넘었다. 일 년에 3회 이상, 출입이 까다로운 이곳을 모니터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멸종위기에 처한 조류 연구는 바로 서식지에 대한 연구이며, 지속적인 모니터링은 보전을 위한 전략 세우기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축적된 자료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삶의 형태에 대한 재고와 각성을 동반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저어새들이 석도와 비도, 역도와 유도에서 둥지를 틀고 첫 비행을 한다. 그 저어새들의 고향은 한국이다. 이곳에서 제대로 크지 못하면 영영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세상이 무엇이냐?
두루미의 부리에서 떨어져
달빛에 반짝이는 물방울
                    -도겐 선사, 13세기 일본

#


* 사진은 퍼가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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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영화다. 보면서 키득키득 많이 웃었다. 사랑을 잃고 물고기가 되어서도 말다툼을 그치지 않는 부부의 정곡을 찌르는 대사부터 또다시 동상이몽에 빠져드는 이다와 오토의 마지막 표정까지, 순간순간 반짝이는 유머러스한 묘사 때문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Fisher와 그의 아내>라는 멋대가리 없는 원제보다 <내 남자의 유통기한>이라는 국내 개봉 제목이 훨씬 낫다는 등의 얘기를 나누며 극장을 빠져 나오는데, 문득 신발 바닥에 아주 커다란 껌딱지라도 붙은 양 껄끄럽다. 뭐가 개운하지 않은 거지? 응, 뭘까?

 

영화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의 의미는 무얼까, 사랑의 유효 기간은 얼마나 될까, 어떻게 해야 오래도록 사랑을 유지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해 온 평범한 질문들. 요즈음의 TV 광고는 사랑의 유효 기간이 18개월이라고 말한다. 마법에 걸린 물고기 부부는 고작 3년 동안 변함없이 사랑하는 커플을 만나면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그것이 미션 임파서블인 듯 여겨진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서로 사랑하며 해로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걸까.

 

인도에서 명상을 즐기며(?) 자란 탓인지 오토는 물질적인 성공에는 관심이 없다. 캠핑카를 타고 떠돌며 물고기 의사 노릇에 만족한다. 반면 이다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꿈이 넘쳐서, 그 넘쳐 흐르는 꿈이 이런저런 욕심으로 바뀐다. 제대로 된 욕실에서 목욕을 하고 싶고, 아이가 뛰놀 정원 딸린 집이 필요하고, 오토가 좋아하는 잉어를 잔뜩 키울 호수가 갖고 싶다. 둘은 그렇게 정반대인데, 어떻게 사랑에 빠졌을까. 당연히, 서로의 실체를 몰랐으니까! 이다가 성공 가도를 달리는 동안 해마가 되어 아이를 키우는 오토는 무기력에 빠진다. 이다에게 사랑을 느낄 수 없다. 아직도 날 사랑하느냐고 묻는 이다에게 그는 한 번도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다의 성공은 한바탕 일장춘몽인 듯 순식간에 무너져버리고, 그제서야 사랑을 확인한 오토와 이다는 아이와 셋이서 옛날의 캠핑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당신과 토미만 있으면 돼. 그렇지만 여전히 아이디어와 의욕이 넘치는 이다, 아연실색하는 오토. 그들의 삶은 아마 그렇게 평생 돌고 돌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이지, 이다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패션 시장에서 통할 만한 멋진(내 눈엔 그다지 멋져 보이진 않더라만 일종의 판타지니까.) 아이디어를 내고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여자가 육아를 남편에게 맡기고 일에 매진하는데, 어째서 끝없이 물질적 욕심만 부리는 못된 마귀할멈처럼 보여야 하지? 욕심도 의욕도 계획도 없는 남자랑 캠핑카에서 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참는 게 여자의 사랑이면, 남자의 사랑은 대체 뭔데? 오토는 마치 말뚝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자리에 딱 붙어서서 이다에게 고무줄을 묶어 놓고, 앞으로 열심히 걸어가는 이다가 결국 자기에게 되돌아오길, 그래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해 주길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내 옆에 있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야. 나만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야.

 

그러니까, 둘이 사랑하는 방법이 다른데 어째서 감독은 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이는지, 영화의 제목을 차라리 <내 여자의 유통기한>이라고 해야 하는게 아닌지, 껌딱지같은 찜찜함의 이유는 그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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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07-21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거 어느 극장에서 하나요? 찾을 수가 없슴다..ㅠㅠ

urblue 2006-07-21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큐브에서 하고 있어요. 물론 2관이지만, 평일 저녁인데도 빈 자리가 거의 없더라구요.

sandcat 2006-07-2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웃긴 많이 웃었는데 빤한 사랑(순수)의 공식을 확인하는 헛헛함이 있어요.
 

어쩌다보니 전 회사의 상사들과 엮여 지금 회사로 옮기고 나서,
하는 일 그닥 재미없고, 월급 (엄청나게) 적고, 발전이랄 것도 없는 상황이지만,
비교적 스트레스 적고, 6시 칼퇴근이 가능하다는 걸 위안으로 삼고 있는데,
오늘은 이래저래 잔뜩 열 받은데다 쓸데없는 심부름 하느라고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씩씩거리며 퇴근하는데 울리는 벨소리. 애인이다.
다짜고짜 "나 회사 다니기 싫어요!"라고 볼멘 소리를 했다.
"언 놈이에요? 블루씨 열 받게 한 놈이?" 
"1년만 참아요."
"응? 1년 후에는요?"
"내가 더 많이 버는 데로 옮기든가 할 테니까 그때 확 때려치워 버려요."
"정말?"
"그럼요."

아우, 갑자기 기분이 확 좋아지면서 웃음이 났다. ㅎㅎ

지금 애인은 설거지를 끝내고 쓰레기봉투 정리 중.
그거 끝내면 차를 타 줄테고,
난 차 마시면서 책을 볼거다.

애인이 있어서, 다행.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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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7-18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컥. 이런 염장이!!!!!
(참기름병을 들이붓는군요)

비로그인 2006-07-18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억, 고농축 염장성 페이퍼!
후훗, 보기 좋습니다.^^

이매지 2006-07-18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밖에 나가서 비라도 맞아볼까 싶어지는 -_ ㅠ
왜 제 애인놈은 저런 소리 안해준답니까! 흥=3 따져야겠어요 ㅋㅋㅋ
(부러워서 하는 소리예요 ㅠ_ㅠ)

바람돌이 2006-07-18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런 공주같은 때가 나도 있었더랬어요.
그러나 지금은 아그들 생기니까 바로 무수리가 되던걸요. ㅠ.ㅠ

sudan 2006-07-19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잇. 괜히 읽었당. -_-
얼굴 보고 고맙다고 얘기해야. 이렇게 페이퍼로 써놓고 진짜로는 말 안 한거 아니에요? (부러워서 트집잡는거여요.)

urblue 2006-07-19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어제 제가 무진장 열뻗친 상태였으니까 좀 봐 주세요~ ^^;

Jude님, 반갑습니다. '고농축 염장성'이라뇨. ㅋㅋ 정말 보기 좋으신거죠?

이매지님, 비..는 왜 맞습니까. -_-;; 님 애인님은 아직 어리잖아요. 좀 더 기다려 보세요. 글구, 저거야 뭐 그냥 하는 소리인거죠.

바람돌이님, 앞으로도 계~속 공주같이 살래요. =3=3

수단님, ㅎㅎ 고맙다는 말은 안 했어요. 페이퍼 봤으니까. 그럼 안 되는 걸까요? 우웅.

비로그인 2006-07-19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아침부터 잠이 확 깨는 상큼 페이퍼예요..^^

Mephistopheles 2006-07-19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이 솔로들을 향해 상콤하게 날리는 염장 토네이도 스크류 10단 콤보~!!!!!
(아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넌 이미 자지러져 있다..)

urblue 2006-07-19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야님, 아우, 역시 뭔가 아십니다. '상큼'하다구요. ㅎㅎㅎ

메피스토님, 님도 못지 않은 염장의 달인이신 걸로 알고 있는뎁쇼. ^^

로드무비 2006-07-19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상금 같은 애인.^^

瑚璉 2006-07-19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염장도 지나치면 건강에 안 좋습니다(-.-;).

urblue 2006-07-20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그렇군요, 비상금 같군요. ^^ 그런데 이 비상금을 꺼내 쓰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라는 생각이 드네요. -_-;

호질님, 건강에 안 좋지 않을 정도까지만 할(려고 노력할)게요. ㅋㅋㅋ

blueblack7 2006-07-31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두 애인이 있었음.. 좋겠다^^

urblue 2006-07-31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쫌 민망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