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3  매일 시읽기 76일

눈사람
- 함민복

굴러굴러 
몸 만들었구나

차고 둥근 
물알 두 개

평편하게 
한 세상 살지 않고 

끝 찾아
다시 펼쳐 놓고 싶은

눈사람 
사람눈

2020년 겨울 첫눈이 왔다. 밤사이 뽀지게 내렸다. 펑펑까진 아니고 펄펄 내리다 샤락샤락 떨어지다 슬금슬금 물러서다 스리슬쩍 그치었다. 구름을 비집고 해가 얼굴을 내밀었고 아침 나절을 하얗게 물들인 눈들은 녹아내려 말라버리거나 흙속으로 스며들었다.

눈이 나리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시는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지만, 오늘은 백석 대신 어제 펼친 함민복의 시집 <<말랑말랑한 힘>> 에서 ‘눈사람‘을 찾아 읽었다. 며칠 전부터 아들이 ˝엄마, 겨울인데 눈이 안 와 눈이 안 와!˝ 노래를 부르며 하늘 한 번 보고 한숨
한 번 쉬고, 하늘 한 번 보고 한숨 한 번 쉬었더랬다. 하늘님이 아들의(이런 아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원망 섞인 한숨 소릴 들었나 보다. 아침에 일어나 하얀 눈꽃 피운 산 풍경을 보고는 ˝우와 예쁘다 우와 예쁘다˝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런 아이 또한 어디 한둘이었을까.

함민복 시인의 ‘눈사람‘은 어제 올린 ‘뻘‘과 비슷하게 보드라움의 힘을 이야기한다. ‘뻘‘이 말랑말랑하다면 ‘눈사람‘은 둥글둥글하다. ˝말랑말랑한 흙이˝ 발을 잡아주고 길을 잡아주었다면, 둥글둥글한 눈사람은 갔던 길 돌아보게 왔던 길로 이끈다. 바르고 넓은 ˝평편˝한 세상에 갇혀 살지 말고 삐뚤빼뚤하고 울퉁불퉁한 세상도 겪으며 살되, 너무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해지란다. 아이고, 이리 어려운 주문을 하시다니요. 시인이 ˝차고 둥근 / 물알 두 개˝를 포개고서 끝을 찾아 다시 펼쳐 놓은 것은 ˝눈사람 / 사람눈˝이었다. 이런 시적 언어 유희 참 좋다.

2020년 12월 13일. 눈이 나려 아들과 짧은 눈싸움울 끝내고 자그마한 눈사람을 만들어 사람눈에 담았다. 그 시간은 참으로 짧았다. 2012년 12월 5일. 서울에 첫눈으로 함박눈이 내려 딸과 아들은 시린 손들을 호호 불며 자기들 키 만한 눈사람을 만들고 눈 쌓인 골목길을
뛰어다녔다. 2012년 12월 7일. 옥상에서 녹지 않고 쌓여 있던 눈을 양동이에 퍼 담아 아이들과 함께 아빠, 엄마, 딸, 아들, 꼬마 눈사람을 만들어 냉동실에 보관했다. 그 시간들은 제법 길었다. 중딩과 초딩 고학년이 된 아이들은 이제 눈에 파묻히는 대신 핸드폰과 탭에 파묻히길 더 좋아한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옆지기도 싫다, 아이들도 싫다 하여 나만 홀로 시댁 근처 부천 원미산에 올랐다. 눈이 그친 산에서는 겨울 시린 바람이 매섭게 불어댔다. 휘이잉휘이잉. 쉐에엑쉐에엑. 높지 않아도 골짜기 깊은 산에 들면 언제나 파도 소리가 뒤따른다. 동무처럼. 적군처럼. 오늘의 바람은 동무로구나. 눈이 나린 뒤 산길은 말랑말랑함을 넘어 질척질척하다. 그럼 어떤가. 고요함 속의 고독한 즐거움을 누렸으니, 나, 조금, 둥굴둥글해졌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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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12-13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사람, 열심히 웃다가 결국 물로 녹아버릴 것 같아서 어째 짠하네요ㅠ

행복한책읽기 2020-12-14 15:37   좋아요 0 | URL
ㅋ 눈사람 사진은 8년 전이에요. 진즉에 녹아 없어졌답니다.^^

희선 2020-12-14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온 곳도 있고 비가 온 곳도 있군요 제가 사는 곳은 비가 왔을 거예요 눈은 안 보이고 그저 젖은 바닥만 보였으니... 어제 새벽부터 바람이 좀 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도 붑니다

저도 눈이 왔으면 해요 그냥...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0-12-14 15:39   좋아요 1 | URL
아이고. 눈을 바라는 희선님 맘이 여기까지 전해져요. 눈을 날마다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기다리게 돼요. 희선님 사는 곳에도 눈이 펄펄 나리기를요.
 

20201212  매일 시읽기 75일


- 함민복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집에 있는 함민복 시인의 《말랑말랑한 힘》을 꺼내 들었다. 이런 이유에서. 

갯벌에 가지 않아도 나는 날마다 말랑말랑한 것을 만지고 산다. 신체 연령 열한 살, 정신 연령 여덟 살쯤에 이른 아들은 잠들기 전 엄마와 같이 누워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별일이 없는 한, 나는 그 시간을 때론 기꺼이, 때론 마지못해, 할애한다.

아들과 한 침대에 누워 말랑말랑한 살들을 만진다. 뽀독뽀독, 반들반들, 맨질맨질, 까슬까슬. 부위마다 느낌이 조금씩 다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위는 겨드랑이와 가슴한복판 사이 젖가슴이다. 여기가 가장 말랑말랑하다. 아들은 깔깔대며, 그만 그만을 외친다. 어젯밤 아들이 도란도란 무슨 얘기 끝에 물었다.

엄마, 엄마는 뭘 잘 먹어요?
밥 잘 먹지. 
밥잘 먹지가 머에요?
밥을 잘 먹는다고.
아하!
너는? 너는 뭘 잘 먹어?
나는 엄마의 마음이요.
뭐? 뭘 먹는다고?
엄마의 마음이라구요. 
(우와~~~순간 감탄)
엄마의 마음은 무슨 맛인데?
꽃향기, 스테이크, 베이컨. 

꽃향기도 먹을 거던가??
아무튼, 너가 좋아하는 것들이네. 
그걸 요리할 때 나던 냄새, 
그 냄새가 엄마 맛이구나.
그 맛으로 엄마를 기억하겠구나
엄마 마음 먹고 자란다는 아이야
네 말을 들으니 내 마음
삐쭉삐죽 모난 곳들
무엇으로라도 툭툭툭툭 다듬어
조금이라도 둥글둥글 만들어야겠구나
네 말랑말랑한 마음이 
피 나지 않도록

말랑말랑한 힘을 가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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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12-13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건 뭐 너무 말랑말랑 하잖아요!!!!!😍

행복한책읽기 2020-12-14 11:13   좋아요 0 | URL
말랑말랑한가요. ㅋ 그 힘이 태평양도 넘었네요^^
 
천 개의 아침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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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1 매일 시읽기 74일 

어리석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 메리 올리버 

가끔 나는 나무 한 그루의 잎들을 세느
라 종일을 보내지. 그러기 위해선 가지마다 
기어올라 공책에 숫자를 적어야 해. 그러니 
내 친구들 관점에서는 이런 말을 할 만도 
해. 어리석기도 하지! 또 구름에 머리를 처
박고 있네 

하지만 그렇지 않아. 물론 언젠가는 포기를 
하게 되지만 그때쯤이면 경이감에 반쯤은 
미쳐버리지ㅡ무수한 잎들, 고요한 나뭇가지
들, 나의 가망 없는 노력, 그 달콤하고 중요
한 곳에서 나, 세상-찬양 충만한 큰 웃음 
터뜨리지. 


안도현 시인과 서정주 시인의 시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다시 메리 올리버의 시집을 펼쳤다. 분명 읽었는데, 시들은 다시 읽어도 거의 늘 처음 대하는 듯 새롭다. 다행히 이번 시는 그렇지 않다.

이 시는 메리 언니가 사랑해 마지 않는 자연의 경이를 보란 듯이 당당하게 예찬하는 시다. 장자의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을 떠올리게 하는 시다.

산에 들어 높은 바위에 앉아 울창한 숲과 드넓은 하늘과 멀디먼 지평선을 바라볼 때, 그 순간 시원한 바람 한 점이 내 몸을 감싸고 지나갈 때, 저런 달콤한 기분에 젖어들게 된다. 그런 순간이면 세상을 다 가진 듯하고, 지금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아직은 안 된다. 아직은 좀 더 찬양하다 죽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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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0 매일 시읽기 73일 

늙은 사내의 시 
- 미당 서정주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시를 못 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깎아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깎아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깎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등달같이 
아내 손톱 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서정주 시인의 <<80소년 떠돌이의 시>>를 계속 읽는다. 80이 넘은 시인은 제목처럼 정말 소년으로 돌아간 듯하다. 삼분의 일 정도 읽었는데, 시들이 대체로 유쾌하고 구수하다. 옛말들은 정겹고 한자어들은 낯설다. 소년으로 돌아간 시인이 들려주는 어린 시절 추억들은 훈훈해서 이따금 부럽기까지 하다. 시간이 훌쩍 지나 돌아보는 지난 날들은 미화가 되어 그럴까. 여든을 훌쩍 넘어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치매 걸려 현재를 모조리 까먹는 내 어미에게도 초등학교 시절만큼은 아름답게 기억된다. 그런 행복한 기억이 내 어미의 뇌에 아직 자리해 있어 나는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언젠가는 지워질지언정.

서정주 시인은 금실 좋은 부부로 해로를 했던가 보다. <늙은 사내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님 시를 못 쓸 정도라면 손톱 발톱 깎을 힘은 더 없지 않을까요, 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찾아 보니, 시인은 치매 든 아내의 손톱 발톱을 10년 넘게 깎아 주었다고 한다. 아내가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후엔 79일간 곡기를 끊고 맥주로 연명하다 세상을 뜨셨다고. 이 사연을 접하고 시를 다시 읽으니, 마지막 두 행의
˝마음 달래자 /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가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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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창비시선 44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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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8 매일 시읽기 71일 

식물도감 
- 안도현 

*
사무치자 
막막하게 사무치자 

매화꽃 피는 것처럼 내리는 눈같이(첫 연)
​ 

이름에 매달릴 거 없다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마지막 연) 

안도현 시인의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에서 제3부 작약작약 비를 맞네 <식물도감>편을 읽었다. 

시집을 내지 않은 8년 동안 시인은 ˝돌을 주워 상자에 담는 일과 풀을 뽑아 거머쥐는 일과 새소리를 듣고 담아두는 일에˝(시인의 말 중) 매진했던 모양이다. <식물도감>에는 얼마나 많은 식물과 꽃이 등장하는지, 보았으나 모르겠고 읽었으나 모르겠고 들었으나 모르겠는 생명들로 넘쳐난다.

식물에는 자기만의 시계가 장착돼 있어 피고 지는 시기를 어김없이 알아 피고 지고 피고 지고를 거듭한다. 그들의 시계에 사람은 생활을 맞춘다. 가령 이 시집의 제목에 등장하는 능소화는 여름에 피는 꽃이다. 능소화가 피는 무렵엔 악기를 창가에 걸어두면 되나 보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매화는 추운 겨울과 따신 봄 사이에 핀다. 송홧가루는 ˝봄을 떼메고˝ 간다. 봄이 둥실둥실. ˝연두가 연두일 때˝ ˝모화꽃이 핀다.˝
˝오동꽃˝ 피면 ˝5월이 간다.˝

6월에 제주 가면 ˝멀구슬나무 꽃˝을 보라 한다. 꽃의 생김을 모르니, 보아도 필시 본 줄 모를 것이다. 갯멧꽃은 바닷가에 산다. 참새떼는 찔레 덤불을 좋아한다. 채송화밭에선 나비들이 ˝점방˝을 차린다. 봉숭아 꽃씨는 ˝꽃의 화력발전소˝란다. 오메, 꽃이 얼마나 흐드러지게 피면 이런 표현을 쓸까나.

˝마타리꽃 피었다 / 곧 개강이다 / 나는 망했다.˝ 푸하하. 꽃들의 시계에 맞춰 이런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시인, 왜케 귀여우신가. 참새떼는 강아지풀 씨앗을 우루루 삼킨다. 바랭이풀은 버티고 버티다 ˝서리 내리자˝ 풀썩 ˝무릎 끓었다˝고. 눈 내리기 시작하면 억새들은 고개
돌려 눈을 바라본다. 복수초는 봄철 눈이 녹기 전 설산에서 꽃을 피운다.

이 많은 식물을 내가 어찌 알랴. 설령 공부한들 오래 기억할 리 만무하리. 식물에 관심이 있긴 하나 지그시 바라볼 여유 없는 독자를 왜 이리 괴롭히시나, 하며 시인을 원망하려는데, 마지막 연에서 활짝 웃었다. 알아도 몰라도 꽃은 꽃이다. 그냥 예뻐하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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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12-11 0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식물도감을 보면 정말 많은 식물을 만날 수 있겠습니다 꽃 하면 봄이 먼저 떠오르지만 여름 가을 겨울에도 피는 꽃이 있지요 꽃 이름 몰라도 된다니 다행이네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