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면 반칙이다 - 나보다 더 외로운 나에게
류근 지음 / 해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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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을 떠돌아 다니는 저자의 SNS 글을 보았던 거 같기도 한데, 간행물로는 처음 접한다. 기행을 일삼는 주당의 냄새가 가득하여, 만약 그와 가까이 지내면 꼼짝없이 새벽 첫차...아니 아침 해장을 하고도 한 이틀을 엮여 다녀야 할 것 같은 '포쓰'가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에세이에서 찝어낸 글은 책날개에 저자소개의 첫 단어인 '낭만주의자'에 어울리는 글이다. 두 꼭지를 옮겨놓는다.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은 첫날이어서 내일 있음이 우리에게 위안이다. 좋은 밤!


세상은 어쩌면 <빨간 머리 앤>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으로 나뉠 것 같다. 그게 만화든 소설이든 애니메이션이든 드라마든 말이다. 삶의 깊고 푸르고 멀고 환하고 가슴 뛰는 의미를 잃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장래 희망이 돈이고, 신앙이 돈이고, 첫사랑이 돈이 된 세상에서 19세기 소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가슴에 별처럼 아프게 박힌다. 지금 더럽혀진 모든 '어른'들에게 빨간 머리 소녀는 말한다.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요?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은 첫날이잖아요?"

_p.117

이름만 봐도 가슴 뛰는 사람이 있다. 이름만 봐도 가슴 설레고 가슴이 아파오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람이 있다. 첫사랑이었으나 짝사랑이었던 소녀의 흰 웃음처럼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이름이 있다. 깨꽃 같은 이름이 있다. 해 질 무렵 교회당에서 울려오던 소녀의 풍금처럼 내 가슴에 노을로 오래 번지는 이름이 있다.

바라만 봐도 슬퍼지는 이름이 있다. 이승에선 어쩌지 못할 예감 같은 것, 다음 생도 아니고 그다음 생도 아니고 그다음 다음 생에서나 행여 마주칠 것 같은 약속이 있었던가. 허공을 떠도는 풀씨와 바람처럼 마주칠 약속이 있었던가. 그래서 속절없이 슬퍼지는 이름이 있다.

혼자서 술을 마시면 푸른 술잔에도 있고, 내 손등 위에도 있고, 창밖의 고단한 빗방울에도 있고, 늙은 가수의 목소리에도 있고, 발등에 툭 떨어진 눈물에도 있고, 천천히 오는 가을과 겨울에도 있네. 이름만 봐도 울고 싶어지는, 이름만 봐도 서둘러 정거장에 나아가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이름이 있다. 당신의 오래고 먼 이름이 있다.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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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탐심 - 라디오에서 찾은 시대의 흔적들
김형호 지음 / 틈새책방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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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라디오 수집기가 아니다. 지역방송 기자로 일하는 저자가 '탐심'을 가지고 라디오에 대해 오랫동안 벌여온 치열한 '덕질'에, 특정한 모델의 라디오를 하나 하나 소개하며, 그것의 생산에서부터 당대 사회배경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을 곁들인 흥미로운 글들로 묶여있다. 전기공학에 대한 배경지식, 한마디로 이과적 두뇌가 없어도 책을 읽는데 지장이 별로 없다.




리전시 TR-1을 작동해 보기까지 몇 년을 기다려야 했다. 한국폴리텍대학교의 어느 교수님이 가변 트랜스 한 대를 주신 덕분에 22.5V 전원을 연결할 수 있었다. 라디오를 잠시 보관했던 지하실에서 혼자 들었던 리전시 TR-1의 첫 라디오 방송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2018년 삼일절 연설이었다. 연설은 독도에 대한 내용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독도 발언이 연상되는, 일본을 향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지하실에서 최초의 트랜지스터라디오로 대통령의 담화를 듣고 있자니 내가 레지스탕스라도 된 것 같았다. 당시 촬영한 화면을 페이스북에 올려놨는데 갈무리된 40초 길이의 담화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박수 소리)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잘못된 역사를 우리 힘으로 바로 세워야 합니다.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 과정에서 가장 먼저 점령당한 우리 땅입니다. 우리 고유의 영토입니다. 지금 일본이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제국의 침략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p.108

'국민 라디오'는 1933년 독일에서 처음 등장했다. 1933년에 집권한 나치 정권은 집권 시점인 1월 30일의 '301'과 국민 라디오 Volks Empfanger, 폴크스 엠팡저의 약자 'VE'를 따서 VE301이란 라디오를 만들었다. 라디오 제조는 지멘스가 맡았고, 텔레푼켄의 진공관을 사용했다.
(중략)
독일의 국민 라디오 프로젝트는 '히틀러의 입'이라고 불렸던 요제프 괴벨스가 주도했다. VE301 라디오는 '괴벨스의 주둥이 Goebbels Shnauze'라는 별명을 얻었다. 괴벨스가 이 라디오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별명이다.
-p.220

원조 국민 라디오를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의 국민 라디오 시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전쟁 준비로 국민을 선동하는데 빛을 발했던 국민 라디오는 우리나라에서는 독재 정권 시대에 도입됐다. 박정희 정권은 집권 초기 농어촌 지역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벌였다. 공무원들의 월급까지 갹출해 라디오를 보급했다. 통치 이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농어촌 지역을 중앙 방송으로 계몽하겠다는 의도였다. 나치의 선전영화 '미거스하우젠의 전투'의 복사판이었다. 국민 라디오는 계몽이란 명분으로 여론을 통제했다. 무료로 라디오를 나눠주는 것처럼 선심을 썼지만, 라디오는 정부 방침을 국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선전용 확성기였다.
우리는 국민 라디오에서 대통령에게 라디오 마이크를 빼앗긴 슬픈 역사도 가지고 있다. 미국 대공황 시대 루스벨트 대통령의 노변정담爐邊情談을 흉내 낸 대통령의 확성기 방송은 희망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훈화하기만 했다. 마이크는 다시 국민에게 돌아왔지만, 방송 정책에서 통제를 받는 미디어들은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는 권력, 자본과 결탁한 뉴미디어까지 나타났다. 여론을 왜곡하고, 가짜 뉴스가 진실을 가린다. 한낱 라디오가 뭘 할 수 있느냐고 남의 얘기처럼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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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산문
박준 지음 / 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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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이 읽히나 쉬이 넘어가지 못하고 머물러 서있게 만드는 글들을 읽었다.
저자의 시집을 한 권쯤은 읽은 줄 알았는데, 계절 산문이 처음 읽게 된 그의 글이고 시집을 보관함에 담아둔다.

시간들이나 그때의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글들은 마음을 누른다.
아마도 숲이 울창해 지고, 다시 앙상해지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그런 문장들을 계속 곱씹어 읽어본다.




과거를 생각하는 일에는 모종의 슬픔이 따릅니다. 마음이 많이 상했던 일이나 아직까지도 화해되지 않는 기억들이 슬픔을 몰고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문제는 즐겁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은 장면을 떠올리는 것에도 늘 얼마간의 슬픔이 묻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켜켜이 쌓인 시간이 만들어낸 일이라 생각합니다. 숲이 울창해지는 일도 다시 나무들이 앙상해지는 일도 이러한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 p.39

낮이 분명하게 길어졌습니다. 저는 하루종일 저의 하루를 살아가느라 이렇게 지쳤는데 어둠은 조금 전에야 막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허정허정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초입에는 어느 집 담장 너머 만발한 능소화들이 이정표처럼 서 있습니다. 이 길이 제 집으로 가는 길이 맞는다는 듯이, 혹은 지금부터가 여름이라는 듯이.
능소화는 바람에 흔들리고 덩달아 능소화가 만들어낸 그림자도 흔들립니다. 발끝으로 그림자를 몇 번 따라 짚어보다가 그만둡니다. 온통 흐르는 것들을 지나 드디어 제 방으로 돌아옵니다. 제가 누우면 하루와 어둠과 가난도 따라 눕습니다. 함께 잠이 듭니다. 벌써부터 방은 덥고 새벽쯤 땀을 흘리며 잠이 깬 저는 일어나 물을 마십니다. 물을 마시고 살금살금 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다시 눕습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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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스러운 사이 - 제주 환상숲 숲지기 딸이 들려주는 숲과 사람 이야기
이지영 지음 / 가디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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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 대한 정보 없이 -가령 몇 군데의 TV에 출연했다는 사실 같은 것- 오로지 표지가 주는 매력에 이끌려 집어든 책이다. 책을 읽는 내내 환상숲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든다. 다음번 제주에 '환상숲곶자왈공원'을 예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버려진 땅을 일군 아버지와 어머니, 평생 인연을 맺은 남편과, 두 아이들의 이야기가 숲책 곳곳에 스며들어 있으니 다 읽고 한 번 더 책의 숲으로 들어갈 볼만하다.




  내가 안내했던 손님 중 가장 고령의 어르신은 96세 할머님이시다. 이른 새벽 일어나 깨끗한 물을 묻힌 참빗으로 곱게 빗은 듯 정갈하게 묶은 머리는 검은빛이 전혀 없는 은발이었다. 손이나 얼굴의 잔주름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양옆 손자들의 부축에 손사래를 칠 만큼 정정하셨다.

  다행히 그 시간대에 다른 일행에도 어르신들이 많이 참가하셨다. 덕분에 천천히 느긋하게 숲을 둘러보는 시간이 되었다.

  중간쯤 돌았을 때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어 지팡이 대용으로 사용하시던 칠십대 할머님이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으셨다. 그러고는 당신께서는 더 이상 못 가겠으니 여기서 멈추겠다고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러자 96세 할머님께서 나직한 목소리로 꾸짖으셨다.

  "야! 내가 네 나이면 시집을 한 번 더 갔겠다."

  다 함께 깔깔 웃었고, 덕분에 칠십대 할머님 또한 나머지 길을 가뿐하게 걸으셨다. 너무 멋지지 아니한가? 나도 그런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p.30~31)


  이제는 우리 아이들이 똑같이 싸우고 있다. 아직 말도 잘 못하는 둘째가 어찌나 오빠의 성질을 건드리는지, 왜 첫째는 가만있는 둘째를 이유 없이 건드리고 가는지, 왜 똑같은 장난감이 두 개여도 하나를 가지고 싸우는지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갈 때가 없다. 그래도 저렇게 싸우는 시간이 쌓이면, 서로에게 가장 진솔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또한 이렇게 많이 싸워본 아이가 다른 자리에 가서도 쉽게 주변 사람들과 맞춰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무도 서로 자리 경쟁을 하며 자랄 때 더욱 크게 자라난다. 그렇다고 마냥 경쟁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며 서로 타협하기도 하고 양보하기도 하면서 본인들의 살아갈 공간을 만들며 궁극적으로는 숲을 이룬다. 갈등이 있기에 고민이 있고 발전이 있고 화목이 생기듯, 부딪히는 것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두 형제를 통해 배운다.


(p.51~52)


  "돈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 세상입니다. 화려하고, 간단하고, 편리합니다. 저희는 어려운 길을 택했습니다. 남들은 결혼식 준비를 위해 피부마사지를 받지만, 저희는 꽃을 심고 돌을 나르고 바느질을 했습니다. 조금은 어색하고 서툴고 불완전할 테지만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부터 끝날 때까지를 모두 함께한다는 것이 더욱 의미 있지 않을까요?"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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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유지혜 지음 / 김영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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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여느 아이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손가락이 길어 한 옥타브를 무리 없이 누르고, 숙제도 성실하게 해오는 학생이었다. 유년 시절이 지나 집에 있던 피아노가 어디론가 사라진 뒤에도 학교 음악실이나교회에서 틈나는 대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 치는 것을꽤 좋아했다. 그러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곡 연습에 돌입했다. 좋아했던 남자애가 피아노를 멋들어지게 잘 쳤기때문이다. 피아노를 잘 쳐서 걔를 좋아했던 건지, 걔가 좋아서 - P21

피아노 치는 모습마저도 좋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피아노를치는 남자에게 반하지 않기란 거의 도전에 가깝다는 사실을그때 알았다. - P22

"좋아한다, 가 사투리로 뭐예요?" (뻔뻔하기도 하지) 그가 웃으며 답했다.

"좋아하맨마씸."

술에 취한 나는 그 말이 잘 외워지지 않아 말하고 또 말했다.
섬에 사는 사람들의 언어는 바람 소리를 이길 만큼 억세다고들었다. 강력 접착제처럼 입에 착 달라붙는 발음 외국어로 들릴 만큼 이국적이었다. 망설임을 뒤로하고 마침내 내뱉는 청년의 고백처럼 그 말은 단단해 보였다. 살랑살랑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가을밤, 닿을 듯 말 듯 젊고 아름다운 기운이 우리를 - P57

에워싸고 있었다. 그와 더 가까워지기 직전, 백지상태의 머릿속에서 여러 호기심이 떠올라 잠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어떤사람일까?‘ ‘어떤 음악을 들을까?‘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할까?‘ 그날 우리는 편의점 앞 벤치에서 밤을 새웠고, 다음 날아침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내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좋아하맨마씸.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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