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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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했다. 이상하게 거리감이 느껴졌고, 글을 읽고 있는 내가 겉돌았다.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책을 펼친 건 아니었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첫마디는 ‘나는 너를 모른다’여야 할 것이다.(46쪽)” 라는 사실을 다소 황당하고 겸연쩍은 방법으로 터득했다. 깊은 밤, 이불 속에 몸을 깊숙이 묻고 스탠드 불빛 아래서 책을 읽다 거실로 나왔다. 식탁에 앉아 독서대에 책을 올리고 허리를 곧게 펴고 읽었다. 약간의 물리적 거리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는데, 희한하게도 ‘나는 너를 모른다’가 되었다. 그리고 어떠한 책임감도 묻어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읽기를 즐겼다.

 

‘골목’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어릴 적 살았던 고향집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두메산골이라 골목보다는 휑뎅그렁한 풍경이 전부였지만 저자가 언급한 ‘다락 방’도 많은 식구가 비좁게 자야 했던 좁은 방의 이야기도 이미 공유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고향집으로 수리하기 전에 다락에 전화기가 있었고, 벽에서 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힘들게 올라가면 작은 내 몸 정도는 숨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당연히 부모님에게 들키면 혼쭐이 났지만 형제들과 다락에서의 놀이를 멈출 수 없었던 기억이 문득 올라왔다. 9남매 중의 막내인 나는 무엇보다 식구들이 많을 때의 복작거림과 아무리 식구라고 해도 경쟁의 대상이 될 때의 불편한 감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막내라고 해서 특별히 귀여움을 받지도 않았지만, 딱히 고생을 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닌, 그렇다고 이기심도 너그러움도 배우지도 못한 모호한 위치였다. 그래서 골목골목에 깃든 이야기들을 온 힘을 다해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치부를 들킬까봐, 미화 된 유년 시절을 다른 기억으로 대체해야 할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동안 절대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들었고, 어느 정도의 거리감은 유지했지만 건조함은 끝내 잘라내지 못했다. ‘어쩌면 행복이란 즐겁고 만족 가득한 상태, 그 자체를 말하는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정지되고 멈춰있는 어떤 순간이 아니라 생의 움직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90쪽)’라는 말처럼 이 글을 마주하고 있는 나의 상태가, 행복을 차치하고라도 ‘생의 움직임 그 자체’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과거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잠시 현재를 잊었다가, ‘지금’을 드러내는 이야기 앞에서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생의 움직임’이 너무 격렬한 탓인지 유년 시절의 추억에 젖어 있던 ‘나’가 쨍하고 깨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나’가 아님을 부정할 수 없었다. 골목에 비유한 다양한 저자의 모습과 기억과 생각처럼 그렇게 갈라지는 여러 개의 ‘나’도 그냥 ‘나’였다.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 긴장이 시시때때로 올라와 감히 ‘행복’이란 단어를 꺼낼 수 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어울리지 않는 근본적인 물음들이 올라왔다. 왜 굳이 시간을 들여, 잠을 줄여가며, 내 할 일을 방치하며(게으름도 한 몫 한다) 긴장감을 팽팽하게 끌어올리면서까지 타인의 생각을 마주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내 자신도 유치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였는데도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나도 때때로 타인의 삶에 대해 간섭하고 규정하고 통제하는 오만을 저지르며 살고 있다는 뜻(152쪽)’을 부정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이렇게 거창한 이유보다는 ‘자신 없을 때는 한 발 더 내디뎌보는 용기도 필요한 것이다.(97쪽)’라는 말이 더 와 닿았다. 내가 하고 있는 이 모든 행위는 그저 ‘한 발 더 내디뎌보는 용기’일 뿐이었다고 말이다. 나는 그저 모든 순간에 약간의 용기를 내 본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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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11월 5일까지의 기록이다.
금요일에 주문한 책이 포함이 안 된 게 다행인걸까? ㅋ

올해는 월 독서 구입비를 10만원을 넘기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얼추 지켜진 것 같다.

1월과 9월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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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르네 놀트 그림,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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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이 입고 있는 목부터 퍼지는 붉은 드레스가 뭔가를 불안하게 한다. 화려한 색은 시녀임을 밝히고 있지만 존재는 철저히 가려지는 역설. 시녀 양성 교육 센터를 거친 오브프레드의 독백으로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전말이 드러난다. 전체주의 속에 갇혀 버린 그녀의 삶은 생기라곤 하나도 없이, 오로지 사령관의 아이를 가져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여자들의 옷으로 신분을 판별하고, ‘가게 이름조차 과도한 유혹이 된다고 판단했기에’ 그림으로 간판을 식별하게 만드는 곳. 장벽에는 불법을 저지른 자들의 시체를 메달아 놓고, 그것을 보며 경멸과 증오심을 가져도 되는 곳. 그런 곳을 알아가는 것조차 결코 녹록치 않았다.

 

시녀로 살아가는 게 비참을 넘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게 만들게 하는 힘은 아무래도 소설보다 그래픽 노블의 힘이 아닌가 싶다. 소설로 읽었다면 너무 어두워 덮어버렸을지도 모를 작품을, 화려하고 생생하면서 참담함으로 이끄는 그림의 힘이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활자만으로 불가능했던 압도적 표현력’이라는 말처럼, 어느 한 장면을 허투루 볼 수 없었다. 그림이 색을 띠지 않을 때보다 오히려 화려하게 색을 띠는 것조차 부자연스럽게 만들었고, 내면 깊숙이 불안을 끌어냈다. 결론을 알 수 없어 막막했고, 이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혼란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오브프레드의 독백과 함께 완전히 이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령관과 단둘이 만나는 건 금지된 일이다. 우리는 번식을 위해 존재한다. 첩도 아니고, 게이샤나 창녀도 아니다. 우리는 두 발 달린 자궁이자 성스러운 그릇, 걸어 다니는 성배일 뿐.

 

시녀들의 목적이 분명하기에 사령관과 관계를 맺을 때도 경악스럽다. 시녀가 철저히 자궁의 역할만 하도록 사령관의 아내도 그 자리에 동석한다. 일을 치르고 난 뒤 누가 더 괴로운지는 알 수 없지만 각자의 역할만 수행했을 때 나름의 평화(?)가 공존한다. 그런 그녀에게 사령관은 은밀하게 따로 만나기를 원한다. 나름의 데이트라는 명목으로 비밀스런 클럽에 데려가고 그곳은 과거의 자유를 방탕하게 누리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시녀 생활을 적응하지 못한 오브프레드의 친구를 만난다. 장소만 다를 뿐 그곳 생활도 정상적인 삶은 아니다. 오히려 그곳은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기에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이 이야기 속에는 너무 많은 고통이 담겨 있다.

 

처음부터 그렇게 철저히 감시받고 자유가 사라진 사회는 아니었다. 오브프레드에게도 가족이 있었고, 딸아이도 있다. 시녀로 살아가야 하는 중에도 종종 떠올린 그녀의 과거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회였다. 하지만 딸아이의 생사를 몰랐다 겨우 알게 되었을 땐 자신은 그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존재감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려는 부분이 보였다. 사소한 것부터 욕망에 이르기까지는 그녀는 자신의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기에 오히려 위험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사령관이 숙청되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탈출인지 처형을 당하러 가는 것인지 모를 차를 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역사적 주해’에서는 이 이야기가 담긴 테이프가 발견된 장소, 그녀의 이름조차 ‘가부장제적 명명’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녀가 살았던 시절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탈출해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또 다른 지옥 속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혹은 ‘과거의 거대한 암흑’으로 빨려들어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목소리를 정확히 해독’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가 남긴 흔적을 통해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게 되었다. 아마도 곧 출간 될 후속작『증언들』에서 그 흔적을 더 비참하게, 낱낱이 목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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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다 반사
키크니 지음 / 샘터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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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8시 28분. 둘째가 어린이집 차량을 8시 35분에 타야 하는데 순간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이들이 놀라 일어나고, 그때부터 정신 나간 여자처럼 준비했다. 18kg이 넘는 둘째를 안고 달리면서 왜 알람소리를 못 들었는지 후회를 해보지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알람을 더 촘촘히 맞추는 수밖에. 그렇게 아이 둘을 보내고 기력이 딸려 멍 때리며 여행 프로그램을 보며 따끔거리는 목을 달래려 아침부터 컵라면을 먹고, 집안일을 했다. 어제 개켜둔 빨래 정리부터 물건들을 제자리 넣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왜 물건들은 손대는 순간 제자리에 돌아가지 못할까? 어이없는 한탄을 하며 이제야 한숨을 돌린다. 특별할 것 없지만 나의 일상은 이렇게 오늘도 돌아가고 있다.


요즘은 똑같이 그리기보다는 나라면 이런 소재를 어떻게 재미있게 풀어낼까 하는 생각에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있다. 18쪽

『키크니의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을 재미있게 읽어서 저자의 에세이가 가미 된 후속작이 출간되었다고 해서 무척 궁금했다. 역시나 재미있게 읽었고, 그림 그리는 ‘키크니’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었다. 어쩌다 그림 그리는 일을 하게 되었는지, 프리랜서의 삶, 가족, 우정, 먹는 것, 저자의 등치(?) 같은 것을 세세히 알다 보니 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나도 오늘 아침에 일을 주절이주절이 떠들어봤다. 저자라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떻게 재미있게 풀어낼까’에 고심했겠지만 나는 타인의 일상에 더불어 나의 일상을 기록하고 기억해 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일상 가운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는 게 뭔지 모르지만 든든해 보였다.

어릴 적부터 가사보다 멜로디가 좋아 음악을 들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저릿함을 느끼게 하는 가사도 있었지만, 어릴 때는 가사의 뜻도 잘 몰랐기 때문에 주로 멜로디에 심취했다. 내 상황에 멜로디는 이입하는 재미가 있었다. 67쪽

완전 내 이야기 같았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도 나는 가사의 뜻을 모르고 여전히 멜로디에 심취한다는 점이다. 철저히 멜로디 위주다 보니 한 소절만 듣고도 반해 음반을 사거나(나머지 곡이 다 별로인 경우 허다), 수백 번을 반복해서 들을 때도 있었다. 주로 외국곡이 많았기 때문에 나중에 가사를 찾아보고 놀란 적도 많았지만 내 귀에 확 꽂히는 멜로디가 주는 매력을 버릴 수가 없다. 이런 얘기를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는데 이 구절을 읽고 정말 너무 공감이 가서 마음이 후련할 정도였다. ‘남보다 특이한 상상을, 그것도 아주 길게 하고 있’다며 한탄을 하지만 정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전작을 읽을 때는 투박하게 느껴졌던 그림체가 이번에는 뭔가 정리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네 컷 만화의 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말풍선의 내용도 많아지고 익숙한 형식이어서 그런지 훨씬 더 재미있었고, 소소한 이야기들이 많아 이름처럼 키 큰(키가 커서 ‘키크니’) 사람이 들려주는 이런저런 얘기 같았다. 이런 책을 만나면 늘 그렇듯 별 볼일 없는 나의 일상이, 무탈한 나의 하루가,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나의 위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감사하게 된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우여곡절도 많지만 그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조금씩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게 그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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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소망 - 바벨론 세상에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바라보다 요한계시록
유기성 지음 / 두란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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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주님의 재림이 ‘언제’인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맞을 것인가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23쪽


 

‘묵시와 예언, 상징으로 가득하고 이 책을 근거로 많은 이단이 나온 것도 사실이기에 선뜻 다루기가 조심스러웠’다는 저자의 고백에 나 역시 공감한다. 그랬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글자만 읽고 넘어간 적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종말이 아닌 주 예수님이란 말에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말씀을 읽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오해가 풀리고 정신이 바짝 차려졌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며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면서 미지근하여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고 하신 말씀이 직구로 쿵, 하고 날아왔다.

 

예수님을 믿어도 왜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113쪽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교회에 안 나오는 것보다 나오는 게 낫지 않냐, 중언부언 기도라도 하는 게 낫지 않냐고 적반하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과 행동이 정말 주님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하나씩 내 상태를 알아 갈수록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를 철저히 깨달아간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단호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예수님을 믿으려면 고난을 견디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욕먹고, 핍박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불의에 참고, 바보처럼 당하라는 말이 아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상황, 심지어 생각까지 주님께 의미를 물어보라는 뜻이다.

 

기도 없이 사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 없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연하고 답답한 이유는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177쪽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요즘의 나는 기도시간에도 멍하니 있을 때가 많다. 내 마음이 마땅치 않아 스스로 고립되고 아무런 의욕도, 간구도 하지 않는 나를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책망하셨던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의 믿음처럼 뜨뜻미지근하니 기도가 나올 리가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인데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면서도 혼자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힘들다고 징징대는 모습을 보인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 자신의 한계를 깨트리지 못하고, 하나님께 구하지 못하니 중보 기도가 나올 리가 없다. 내 개인적인 이익과 고민과 걱정에서 빠져나올 리가 없다. “창조주 앞에서 ‘이것을 보십시오, 제 집을 보십시오, 제 차를 보십시오. 제 몸을 보십시오. 제가 모은 이 조개껍질들을 보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비극입니다.” 라는 존 파이어 목사님의 말씀처럼,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다.

마귀와 싸우는 것에 대해서 절대로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탄은 하늘에서의 전쟁에서 이미 패하여 땅으로 쫓겨난 존재입니다. (…) 그런데 마귀가 가장 증오하고 무너뜨리려고 하는 대상이 교회입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더 그렇게 할 것입니다. 224쪽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교회에서 입는 상처, 시련, 고통들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를 알면 지혜롭게 헤쳐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마귀의 탓으로 돌리는 건 위험하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복음 안에는 자유의지가 분명하게 있다. 그 자유의지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냐의 차이일 뿐, 나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면 된다. 요한계시록의 의미를 깨닫는 시작은 단순한 이 진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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