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착취의 지옥도 - 합법적인 착복의 세계와 떼인 돈이 흐르는 곳
남보라.박주희.전혼잎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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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 독서는 어떠한 조건에도 휩쓸리지 않고 읽을 책을 직접 고를 수 있다는 편안함에 편중되어 있다. 그럼에도 가끔 자유로운 선택을 고민하게 만드는 책들이 있는데 꼭 이 책이 그랬다. 제목과 표지를 보는 순간부터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음에도 지나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피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가 저절로 전해지는 책이었다. 그리고 책장을 열고 그 세계로 들어갔을 땐 ‘불편한 진실’이란 게 누구의 시선에서 말한 것이었는지 내 생각 자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사용주(원청)-고용주(용역업체)-노동자로 구성되는 이 ‘삼각 고용’ 구조는 노동자를 ‘동네북’으로 만든다. 모든 책임을 노동자가 떠안는 순간 원청의 불법 행위, 용역업체의 방관은 표백되고, 이 간편한 책임 전가는 반복된다. 59쪽

 

그 동안 내가 얼마나 타인에게 무심했는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용역업체와 노동자와의 갈등은 숱하게 보도로 접했지만 갈등의 본질은 제대로 알려고 했던 적이 없었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가장 약자였던 노동자를 옹호하는 시선도 없이 갈등 자체에 지난한 시선을 던졌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용기 내어 목소리를 낸 수많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 주변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직종도 있었고 단지 그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으며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무지가 드러났다. 그래서 용역업체들이 고용 노동자들에게 행한 임금착취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어찌나 감추기 급급한지, 끈질긴 인내와 요구가 아니면 대략의 금액도 알기 어려운 게 실상이었다), 인면수심을 넘어서는 그들의 뻔뻔한 행태에 가슴이 콱 막히는 마음을 어째야 할지 몰랐다.

 

‘노동자의 피를 빨아 먹는 거머리’ 같은 행위는 넘쳐나는데 실체는 없다.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원청의 대표도 정확히 알 수 없고 그들이 거머리처럼 빨아 먹는 착취의 금액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노동계의 ‘빅 브라더’ 마냥 매일매일 임금착취를 당하는데 착취하는 대상자는 만날 수도, 부당함을 알릴 수도 없다. 부당함을 갖는 순간 기계의 부속품처럼 일자리를 빼앗기고, 다른 일자리를 구하려고 해도 용역업체만 바뀔 뿐 착취를 피해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노동의 대가라고 하기엔 내 얼굴이 화끈해질 정도로 적은 월급, 그마저도 계약이 끝나면 처음부터 다시 세팅되기 때문에 10년을 일해도 월급이 그대로인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부당함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솟아오를 무렵 왜 이런 구조가 바뀌지 않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꼭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중간착취는 간접고용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다면 기업은 왜 노동자를 직접고용하지 않고 간접고용하는 걸까. 이에 대해 재계는 노동 유연화 때문이라고 말한다. (…) 현실에서는 ‘손쉬운 해고’로 통용된다. 168쪽

 

파견법은 IMF로 경제가 휘청거리던 시기에 ‘노동 시장 유연화’를 목적으로 합의한 법률안인데, 여러 차례 제정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노동계의 반발로 번번이 보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 4만 명이던 파견 노동자는 현재 346만 명이 되었다. 전체 임금 노동자의 17.5퍼센트에 달하는 ‘지옥문’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며 노동자의 권리는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법망을 피해 더 악랄하고 집요하게 자행되고 있다. 파견 근로, 용역 노동자는 관련 법에 명확한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근로 기준법 울타리 밖에 있으며, ‘헌법은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한다.’며 중간착취의 행태에 개탄하던 윤여준 전 장관의 편지는 그래도 문제의 심각성과 변화의 필요성을 토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바꿔보고자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보도했던 기자들이 직접 국회, 노동부, 한국경영자총회에 입법요구와 질의서를 전달한 과정은 바위로 계란치기를 보여주듯 처참했다. 간접고용을 당장 없애달라는 것도 아니고, 당장 수용 가능한 법률안을 수정하자는 제안도 말끔히 거절당했다. 찾아간 곳 모두 하나 같이 ‘문턱 높고 속도 느린’데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국회와 정부가 23년간 간접고용 노동자 보호에 등 돌린 탓에 근로기준법은 아직도 1958년 제정 당시, 과거의 노동 시장에 머물러 있다. (…) 당시의 법은 당연히 오늘날 실재하는 346만 명의 간접 고용 노동자를 한 명도 보호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252쪽

 

분명 부당함에 목소리를 냈고 이 사실을 알린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미 변화를 이뤄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문턱 높은 곳을 그나마 낮춰주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 힘을 보태준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처음 제목과 표지에서 느꼈던 ‘불편한 진실’은 과연 누구를 향해야 하는 걸까? ‘불편한 진실’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분명 있으며, 이러한 현실을 몰랐던 사람들도, 알고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 같은 사람들도 해당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불편한 진실’에 갇혀 여전히 노동착취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이다.

 

국가는 그런 약자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이미 강자임에도 똑같은 국민으로 권리를 주장할 때 명료하게 분별해주는 것도 국가를 지탱하는 여러 기관이 할 일이다. ‘간접고용 노동 시장의 개선이 자비나 아량을 베푸는 차원에서 이뤄져야 하는 일은 아니’라는 정홍준 교수의 말처럼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 역시 ‘기업과 사회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러기 위해선 때론 우리가 국가가 되어야 하고, 정당한 권리는 주장하는 일에 힘을 보태야 하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부당함과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불편한 진실’을 불편함으로 끌어안고만 있다면 언제라도 내가 ‘불편한 진실’ 안으로 빨려 들어 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생계의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 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불편한 진실’ 속으로 다시 묻어버리는 행위는 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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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착취의 지옥도 - 합법적인 착복의 세계와 떼인 돈이 흐르는 곳
남보라.박주희.전혼잎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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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으로도 흥미가 인다. 그러면서도 무엇을 알게될지 두렵기도 하지만 꼭 알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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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과 나
이소영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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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식물에 관한 책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식물산책>이 너무 좋았는데, 이 책은 또 어떤 매력을 발산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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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녕 - 박준 시 그림책
박준 지음, 김한나 그림 / 난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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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은 이별과 동시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래서 “안녕”의 뒤에 담을 수 있는 의미는 무한하다. 이별이어도 슬프지 않고 반가움이어도 어색하지 않다. “안녕”은 이제 당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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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녕 - 박준 시 그림책
박준 지음, 김한나 그림 / 난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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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깼다. 방금 꾼 꿈인데도 내용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 이 시간에 깨어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닥치지 않은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모든 것에 자신이 없어졌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멀뚱거리며 기도도 했다가, 반성도 했다가, 그런 와중에 생필품을 스마트폰으로 주문하기도 하고,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안녕, 안녕은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안녕, 안녕은 말하기 싫을 때에도 해야 하는 말이야.

결국 새벽 5시쯤 잠이 들었고, 아침이 되어 커피를 마시며 잠을 깨우며 안녕을 결심했던 사람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약 2년을 알아왔던 사람들에게 ‘안녕’을 말하면서 이 ‘안녕’이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 하기 싫은 말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랜 고민을 내려놓듯 ‘안녕’을 말했을 때는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울컥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먼저 만나자고 손을 내민 사람들이었고,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스스로 초심을 잃어버린 게 사실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핑계들로, 일방적인 결론으로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것에 대한 무책임일지도 몰랐다.

벽 앞에서 우리는 눈앞이 캄캄해지지.

벽은 넘지 못하고 눈만 감을 때가 있어.

힘을 들일수록 힘이 빠지는 순간이 있고,

힘을 내도 힘이 나지 않는 날들이 있지.

현재 나는 벽을 넘지 못하고 눈만 감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이 ‘벽’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쩌면 시인처럼 그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네가 보고 싶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했음에도 단박에 무언가가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안녕, 안녕은 처음 하는 말이야/안녕, 안녕은 처음 아는 말이야./안녕은 마음으로 주고 마음으로 받는 말이야./그래서 마르지 않아.’라는 시인의 말처럼 내가 오늘 ‘안녕’을 말한 이들에게 처음 말한 ‘안녕’은 분명 ‘마음으로 주고 마음으로 받는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분명 내 마음이 탐탁지 않은 적도 있었고, 뜻하지 않은 기쁨을 느낀 적도 있었다. 모호했던 나만의 세계가 연결된 기분도 들었고,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 회의감이 든 적도 있었다. 그런 과정 끝에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일이고, 셈하지 않고 들어주’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라는 벽에 마주섰고, 그 벽에서 결국 나는 등을 돌려 ‘안녕’을 고했다.

안녕은 차곡차곡 모으는 마음이야.

마음을 딛고, 우리는.

안녕, 안녕.

그럼에도 시인은 나에게 내가 이런 식으로 고했던 ‘안녕’도 결국은 ‘차곡차곡 모으는 마음’이라고, ‘마음을 딛고, 우리는. 안녕, 안녕.’을 말해도 된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저지른 무책임함에 대한 예언 같았다. 그래도 된다고. 그게 끝이 아니라고. 끝은 아무도 알 수 없듯이 또 다른 ‘안녕’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거라고 말이다. ‘한번 눈으로 본 것들은 언제라도 다시 그려낼 수 있어./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을 그리움이라고 하는 거야.’라는 말에는 언제라도 내 마음이 허락하면 다시 ‘안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라는 위로처럼 들렸다.

안녕, 다시 안녕이라는 말은 서로를 놓아주는 일이야.

안녕, 다시 안녕이라는 말은 뒷모습을 지켜봐주는 일이야.

안녕, 안녕.

끝까지 ‘뒷모습을 지켜봐주’기로 했다. 다시는 서운하거나 이기적인 마음을 갖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뒷모습을 지켜보며 ‘안녕’이라고 말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으니 ‘말하고 싶을 때 말하’는 ‘안녕’이라는 말이 꼭 슬픈 것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온통 시에 마음을 뺏겨, ‘안녕’을 음미하느라 놓치고 있었던 이 책 속의 흰 강아지와 새의 만남이 처연해보였다. 하지만 쓸씀함에 무게가 쏠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꼈던 감정처럼 이들이 결국 하게 되는 ‘안녕’은 ‘서로를 놓아주’고 ‘뒷모습을 지켜봐주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마음이 욱신거린다. 이 욱신거림의 실체를 여전히 모르겠다. 오늘 닥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고, 여전히 보이지 않은 근심이라는 정체에 정복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씩씩하게 ‘안녕’을 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별인지 반가움인지 알 수 없는 ‘안녕’의 마지막에 내가 담을 수 있는 의미는 무한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은 이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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