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새로워진다 - 나이의 편견을 깨고 독립적인 삶을 꿈꾸는 여성들에게
리사 콩던 지음, 박찬원 옮김 / 아트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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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이 들어가는 일의 가장 좋은 점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더 안정감을 느낀다. 사람들을 실망시키게 되더라도 괜찮아, 라는 생각이 더 강해진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도 덜 신경쓴다. 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더 관대해진다. 100쪽


올 초만 해도 내가 38살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믿고 싶지 않았다. 해 놓은 것도 없는데 하릴 없이 나이만 먹은 것 같아 두려웠다. 40대가 되는 것이 두려웠고, 이대로 내가 없어지고 사라져 버릴 것 같아 자꾸 과거의 나를 회상하고,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을 쌓아가기 바빴다. 그러다 용기를 내 새로운 일을 시작했고, 경제적으로 큰 도움은 되지 않지만 나름대로 적성에 맞아 오랜만에 뭔가에 대한 새로운 계획 같은 것도 세워보았다. 그러다 보니 좀 더 일찍 시작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로 인해 나이가 들어 오랫동안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은 있지만, 나이 먹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또 방황하고 후회하다 30대가 끝나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성공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마흔 살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58쪽


마흔 살이 축복이 될지 좌절이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분명 대단한 것임을, 그것이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겠다. 결혼을 하고, 경력이 단절되고,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고,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을 때 혹은 성공의 정점에 있을 때도 과감히 도전하고 노력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내게 그런 확신을 심어 주었다. ‘나이의 편견을 깨고 독립적인 삶을 꿈꾸는 여성들에게’란 부제를 보고서 처음엔 시큰둥했던 게 사실이다. ‘편견’과 ‘독립’은 왜 유독 여성들에게 더 많이 부여되는지 확실히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 정말 우연한 계기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더니(나이와 환경에 상관없이) 벌어진 엄청난 변화를 듣고 있노라면, 타인의 이야기임에도 큰 용기가 되고 내게도 그런 가능성이 일어나진 말란 법이 없다는 사실을(그런 가능성이 없으면 뭐 어때!)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삶을 살아왔든, 열망하는 것이 있다면 그 열망이 무엇이든 그 속에서 견뎌낼 수 있다. 따라서 나의 조언은 그냥 부딪히라는 것이다. 27쪽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큰 감동을 받았던 것은 ‘열망’이 없을 수도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어느 순간 어떠한 계기로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문득 발견되기도 하지만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한 확신을 가져다주지 않지만 노력하는 모습, 그 길을 걸어보려는 다짐, 생각지도 못했던 길이더라도 ‘내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공허함 속에서도 잠재력이 길러지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을 발굴하고, 시도하고, 노력해서 얻어낸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단정 지을 수 있다. 나는 너무 평범해서 그런 발견조차 쉽지 않을 거라고 좌절할 수 있다. 하지만 70~90세의 나이에도 발견되고 결과물이 나오는 것을 보며 어쩜 너무 조급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다. 모두가 늦었다고 말할 때, 정말 늦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아무도 모른다. 목표가 확실하지 않더라도 ‘열망’ 자체를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말이다.

물론 현실을 옥죄는 것이 많다. 결혼, 육아, 돈, 용기 부족, 두려움, 불안함 등등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보다 안주할 수 있는 이유가 더 많은 게 사실이다. 나 역시 지금껏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 하면서 현실에 순응하며 살았던 적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서 여성들이 용기를 얻었으면 싶었다. 자신을 찾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싶은 열망과 시도는 꼭 현대에만 이뤄진 것이 아님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찾는데 과감해졌으면 싶었다. ‘과감하라’는 말이 현재의 모든 것을 부수고 나오라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지금부터라도 얼마든지 ‘과감’의 가능성을 키울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시도가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 못하더라도 자주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 순간에는 적어도 살아 있음을 느낄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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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신장재편판 1 - 강백호
이노우에 타케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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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는 정말 추억이 많은 만화다. 정작 만화책을 완독하지도 않았으면서 추억이 많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중학교 때 <마지막 승부>라는 농구 드라마가 인기였고,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농구를 잘하고 싶어 근처 초등학교에서 혼자 농구를 연습했던, 이불킥 하고 싶은 추억이 있다. 혼자 농구 골대에 골을 넣으면서 ‘레이업 슛’ 혹은 되지도 않는 ‘덩크 슛’ 하며 이승환 노래 속의 주문을 외우기도 했다. 그야말로 아무에게도 말하기 싫은 지우고 싶은 추억이지만 이 만화 이야기를 하려며 꺼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만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에도 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서태웅, 강백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태지를 한참 좋아하던 나는 이름이 비슷하단 이유로 서태웅을 좋아했고, 그가 나오는 엽서나 브로마이드도 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고등학교 생일 때 친구들이 아예 주인공들 사진이 담긴 판넬 액자를 사주었는데, 당시 함께 살던 언니에게 물어보니 진작 버렸다고 해서 아쉬웠다. 아마 그게 지금껏 남아 있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울 것 같다.


그렇게 추억 속에 잠자던 만화가 20권으로 재편해서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고 우선 3권까지 읽었다. 그리고 긴 만화를 소장해 본 적이 없음에도 이 만화는 꼭 모아서 소장해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3권을 읽고 나니 4권이 궁금해서 몸이 근질근질 한데도(아니면 전 권이 다 출간되면 한꺼번에 모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차분하게 3권까지 내용을 정리하고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정리를 하지 않으면 이렇게 오랜 시간 돌아서 제대로 읽기 시작한 만화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다. 3권에서는 곧 천재적인 재능을 드러낼 강백호의 경기 활약상이 펼쳐지려 하면서 끝이 났다. 강백호가 농구부에 들어온 것 자체가 채소연이 농구를 좋아하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스스로를 바스켓 맨이라 부르는, 우연이라고 하기엔 강백호가 너무 어리바리하게(그게 강백호의 매력이지만) 나와 그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농구에 대한 강백호의 무지, 숨겨져 있는 운동기질과 천재성, 그리고 그가 농구를 처음 시작했던 것처럼 종종 허를 찌르는 B급 유머에 이 만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유도부에서 강백호를 탐내고 소연이의 사진을 가지고 유혹을 하는 장면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농구를 향한 근본 없는 열정과 그러면서도 드러나는 천부적인 운동에 대한 자질은 명확했다. 그래서 그가 이미 농구천재로 알려진 서태웅과 어떻게 어우러질지 궁금했다. 다소 유치한 면모를 지니고 있는 강백호는 소연이 서태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같은 농구팀임에도 그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농구부에 들어오기 위해 보여주는 끈기와 저돌적인 모습 앞에서는 그가 어떻게 농구인으로 성장할지 기대되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진지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모습에서(능남고와의 경기 중에 상대팀 감독에게 똥침을 놓는다던가 하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만 강백호만의 매력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에 반해 서태웅은 농구 천재로만 알려져 있고 여자 아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말이 없고 까칠하면서도 츤데레 같은 매력을 드러내고 있어 앞으로 그의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서태웅은 좀 호리호리하게 보이지만 운동선수들의 이야기라 그런지 대부분 시커멓고(특히 교복), 등치 크고 땀 냄새가 절로 나는 이야기에 왜 매력을 느끼는지 앞으로 이유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4권을 시작하느냐, 재출간 완성을 기다리느냐가 관건이지만 이 만화를 만나고 정독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감격스럽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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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는 무섭지 않아 - 건강 빛방울 그림책 2
모닉 페르뫼런 글, 레인 판 뒤르머 그림, 콩세알 옮김 / 스푼북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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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큰 아이의 첫 유치가 하나 빠졌다. 어느 순간 아랫니가 좀 벌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우연히 안쪽을 보다 이미 아랫니가 유치 뒤에 나온 것을 발견했다. 순간 미안해졌다. 아이의 이가 흔들리지는 지, 영구치가 나오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큰 아이는 치과에 가기 싫어했다. 그러면 네가 혀로 밀고 더 흔들거리게 해서 집에서 뽑으라고 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도 진전이 없자 결국 아이를 데리고 치과로 갔다. 어르고 달래서 무섭지 않다고 말해주어도 겁을 잔뜩 먹고 있더니 아파할 틈도 없이 발치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많이 흔들린 상태라 큰 아픔 없이 이가 빠졌고 피도 별로 나지 않았다. 간단히 동의서를 쓰고 아이의 빠진 첫 유치를 가져왔다.

그래서인지 큰 아이는 이 책을 읽으면서도 두려움이 없었다. 이미 치과를 경험했고, 역시나 무섭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경험을 해보니 그럭저럭 견딜 만 한 곳이라 여기는지도 몰랐다. 주인공 한나가 당나귀 인형 두두의 부은 볼을 보며 치과에 가자고 한다. 하지만 두두는 ‘주사에다 칼에다……. 치과는 너무 무섭단 말이야.’ 라며 거절한다. 한나는 의사 선생님이 상냥하고 다정하며 재미있다고 하지만 두두는 쉽게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한나의 마음도 두두의 심정도 이해가 가는 게, 아이를 달래서 병원에 가려고 하지만 이미 아이는 겁을 먹었고, 그 다음에는 자연스레 협박(?)이 뒤 따른 뒤에야 갈 수 있었던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나는 끝가지 두두를 안심 시키며 친절을 베풀기도 하고, 입을 벌리지 않으려 하자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어 웃게 만든다. 그리곤 입 안을 들여다보면서 곧 이가 빠질 거라고, 하지만 괜찮을 거라고 안심시켜 준다. 그렇게 두두와 치과 놀이에 한참 빠져 있는데, 한나의 엄마가 다급하게 한나를 부른다. 치과 예약이 되어 있다며 얼른 나가자고 하지만 한나는 순간 겁을 먹고 절대 가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자 두두가 한나에게 다가와 치과는 무서운 곳이 아니며, 의사 선생님은 상냥하고 재미있다는 말로 위로 해준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한나는 그렇게 치과에 무사히 갔고, 두두의 말처럼 치과가 무서운 곳이 아님을 알게 된다.

큰 아이에게 이 책을 읽어주면서 네가 경험한 치과는 어땠냐고 물어보니 윙 소리(기계음)는 싫지만 무섭지 않았다고 말했다. 용감하게 치아를 잘 뽑았다는 약간의 자화자찬이 섞여 있었지만 당시에 정말 울지도 않고 겁도 내지 않아서 용감하다고 칭찬해 주었던 터라 아이의 말에 격한 공감을 해 주었다. 책의 뒷면에는 ‘무서움을 털어 내요.’라는 코너를 마련해 병원에 갈 때 주의해야 할 점들을 알려준다. 아이의 마음을 공감해주고, 병원에 대한 거부감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기 등 아이의 눈높이에서 설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역시나 내 편할 대로 겁주고 협박하고 억지로 데려갔던 순간들이 떠올라 부끄러웠지만 앞으로는 조금씩 그런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다. 어른인 나도 병원은 무서운데 그런 나를 겁줘서 데려간다면 정말 싫을 것 같다. 아이들 시선에서 좀 더 헤아려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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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돼가? 무엇이든 -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이경미 첫 번째 에세이
이경미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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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읽고 싶은데 도무지 읽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책을 들고 집 근처 카페로 갔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평일 한 낮인데도 카페는 앉을 자리가 거의 없었다. 널찍한 책상에 겨우 자리를 정하고 앉았지만 내 앞자리까지 그야 말로 사람들로 빽빽했다.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들으며, 평안한 상태에서 책을 펼쳤다. 그리고 얼마 안가 책을 덮고 천장을 보며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부디 내 앞에 앉은 여자가 날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길, 내가 웃지 않으려 천장을 보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않길 바랐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마주한 웃긴 장면에서 그야말로 나는 맥없이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렇게 책을 읽다 무심코 터져 나오는 웃음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냥 기분이 좋았다.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존중도 아름답지만, 때로는 정말 싫은 마음을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도 아름다운 존중이다. 75쪽

영화감독인 저자의 이야기는 주제에 따라 우울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어둠으로 침잠하기도 하며,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게 만든다. 하지만 저자의 글은 결코 독자의 감정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않는다. 균형을 잘 맞추고 있다고나 할까? 깊게 공감해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들지도, 너무 겉핥기만 하다 지나치지 않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감각적으로 잘 썼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고, 이래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빤하고 지난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도 어쩜 그렇게 솔직하고, 웃프고, 무언가를 자꾸 생각하면서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지! 저자의 의도야 어떻든 나는 이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글이 참 좋았다.

삶이라는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라고 밀란 쿤데라는 말했다. 90쪽

그러면서도 경험에서 우러나온, 모든 것을 깨달아 버린 혹은 정답이 없는 삶의 질문 속에서 여전히 헤매는 것 같은 공감 가는 말들이 나올 때면 여러 번 문장을 곱씹었다. 마치 내 경험인 듯, 과거에 그러했던 일들이 이제야 확인 받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쉽게 눈길을 떼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이상하게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나의 과거를 모두 되짚으며 그때는 왜 그랬을까, 참 어리석었구나, 즐거웠구나, 다시 돌아가도 어쩔 수 없겠구나 하는 여러 감정들이 솟구쳤다 사라졌다. 그런 감정들이 남긴 뒷맛이 일단 씁쓸하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잠시 추억 속에 잠겼지만 결국 그렇게 여러 맛을 느낄 과거를 또 만들기 위해 미래를 향해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분명 재밌게 읽었는데 이 모든 감정들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대단하지 않는 일들이, 대단하게 여겨지도록 만드는 것은 일단 내 안에 잠재해 있는 모든 감각의 총동원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말이다. 그것을 풀어내는 능력에 따라 이야기가 갈리겠지만 나도 그런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어떠한 형태든 시작을 해보고 끝을 보고 싶었다. 오래전 저자의 일기가 이 책에서 그런 역할을 했듯이 무언가 끼적거리더라도 남겨보고 싶었다. ‘잘 되고 있지 않아, 아무것도’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도 어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하나의 과정인 것을! 뭔가 엄청난 걸 깨달아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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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을 보면서 참 책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 때마다 항상 '욕심이 지나치다 vs 책에 대한 사랑이다'라는 정답 없는 고민을 해본다. 좀 더 넓은 공간이 있어 책들을 숨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가도(마음 같아서는 내 잠잘 공간을 줄여서라도 책들에게 쉼터를 주고 싶지만), 현재에 감사하자는 마음과 늘 싸운다.



그러다 최근에는 김영하 작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 놓은 책 중에서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거라고!



정말 속이 후련하고, 그간의 죄책감을 다 잊게 해주는 명언(?)이었다.^^



그렇게 읽은 책 혹은 골라서 읽으려고 한 책들이 꽤 되는데 어쩌다 보니 절판되어서 구할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오늘은 그 책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1. 뿌쉬낀 - 뿌쉬낀






고등학교 시절 어려워했던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을 전집을 통해 새로이 탐독하고 있을 때였다. 책을 펼칠 때마다 나오는 수많은 러시아 작가와 작품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오고 궁금했던 게 고골의 <외투>, 폰비진의 <미성년>, 그리고 뿌쉬낀의 작품들이었다. 그 가운데 뿌쉬낀을 가장 궁금해 했던 이유는 다른 작가들은 한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나온 반면 뿌쉬낀은 정말 여러 작품이 나왔다. 그래서 인터넷 서점에서 그의 작품을 검색해 봤는데, 한 권으로 된 전집은 절판이 된 후였고 단행본으로 몇 권이 있었다. 그래서 그 중에서 소설집을 사서 읽고 다른 단행본을 사려고 하는 중에, 우연히 광주의 한 서점에서 뿌쉬낀의 한권으로 된 전집을 보게 되었다. 손때가 타고, 너널너덜 하고, 굉장히 두껍고, 3만 9천원의 가격표를 달고 있었지만, 이미 내게는 그런 악조건 보다 갖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그때는 그 책을 살 여건이 안 되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는데 자꾸 눈에 밟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틀 후에 광주에 사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그 책을 구해 달라고 했다. 아, 그 말을 하고 나니 왜 그렇게 가슴이 뛰던지. 정말 설렜다. 그러나 친구에게서 날아온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서점은 가보았으나 그 책을 누가 사 가버렸고 주문을 하려해도 절판된 책이라 구할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니 그 책이 갖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러다 불현듯 출판사에 문의를 해보자란 생각이 들어 출판사 홈피에지에 글을 올렸더니 재고 문의를 해보라며 전화번호 하나를 알려 주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재고가 있었다. 책이 약간 더럽다며 9천원이나 깎아준 책은 생각보다 깨끗했고 책이 내게 왔을 때의 기쁨은 말할 수가 없었다. 책을 보는 사람들마다 이거 책 맞냐는 핀잔도, 집으로 들고 가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의 힐끔거림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냥 기뻤다. 그렇게 내 생애 가장 두꺼웠던 책, 무려 1793페이지짜리의 뿌쉬낀 전집을 손에 쥐게(너무 두꺼워서 다 못 쥐었다. ㅋ)되었다. 2005년 1월 21일 금요일의 일이었다.


이 책은 1999년 뿌쉬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책들에서 발행된 책이다. 1999년이면 나는 고3. 그때 러시아 작품에는 관심도 없었고 뿌쉬낀을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알았다고 해도 이렇게 두꺼운 책을 살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뿌쉬낀 200주년 탄생 기념이라는 이름 앞에 전집을 발행해준 열린책들이 얼마나 고맙던지. 그 유명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시가 뿌쉬낀이 썼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러시아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라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의 작품 외에도 알게 된 것이 너무나 많아져 갔다.

 

이 책을 받고 가장 놀랐던 건 엄청난 양의 작품 수였다. 이 전집에서 크게 서정시, 장편 서사시, 희곡, 민담, 운문 소설, 소설로 나뉘어져 있다. 서정지가 약 400페이지 장편 서사시가 360여 페이지, 희곡은 190여 페이지, 민담은 46페이지, 운문소설 270여 페이지, 소설은 370페이지, 해설 및 연보가 146페이지로 된 엄청나고 방대한 전집이다. 페이지 수로만 따져 보더라도 시인이라는 뿌쉬낀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인데, 거기다 다양한 장르와 운문소설이라는 새로운 시도까지 한 뿌쉬낀의 역량이 느껴져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해설의 제목을 번역자 석영중 씨가 '아, 뿌쉬낀' 이라고 한 것처럼, 나도 '아, 뿌쉬낀'이라는 감탄사에 많은 것들을 내포시킬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감탄하고 감탄했다.




2. 율리시스 - 제임스 조이스




*11년 전에 큰맘을 먹고 <율리시스>를 구입했는데, 얼마 뒤에 출판사 이벤트에 당첨되어서 똑같은 책이 한 권이 더 왔다.

그래서 이 책을 너무 갖고 싶어 하던 친구에게 선물로 줬던 기억이 난다.




한 때 독자들 사이에 퍼졌던 <율리시스>에 관한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읽은 사람을 주변에서 찾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갖는 나름대로의 완독 불가능 이유를 들었는데, 하룻밤 이야기라면서 1,324쪽은 너무 하지 않냐는 말을 듣고 나 역시 격하게 공감했다. 11년 전에 구입해 놓았음에도 여전히 책장에 장식처럼 꽂혀 있고, 여전히 읽을 계획이 없어 그 핑계를 착실하게(?)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며칠 전에 청소년이 읽을 수 있게 축약본으로 나온 <오디세이아>를 읽고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어서 완역 <오뒷세이아>를 읽어볼 마음이 생겼다. 얼마 전에 완역본을 구입해 놓은 터라 이렇게 마음이 생겼을 때 읽어보자 싶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율리시스>가 오디세이아의 영어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소름이 돋았다. 여기저기서 듣고는 언젠가 읽을 것 같아 구입해 놓은 책들이 이렇게 연결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묵혔으니 이제 읽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만간 <오뒷세이아>든 <율리시스>든 읽어보자고 다짐했다. 이렇게 계기가 될 때, 동기부여가 될 때 읽는 독서가 즐겁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되었지만 동일한 번역자의 <율리시스>가 어문학사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있다. 책이 절판되었을 때는 기존의 번역자를 따라서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3. 롤리타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내게는 세 가지 버전의 <롤리타>가 있다. 가장 먼저 구입한 책은 민음사세계문학전집의 <롤리타>고, 그 다음에 문학동네세계문학전집의 <롤리타>다. 현재 민음사 출판사의 <롤리타>는 절판된 책이라 내 나름대로 희귀본이라 여기고 있다.

내가 읽은 책은 문학동네세계문학전집의 <롤리타>였고, 다 읽은 뒤에 <롤리타> 특별판을 선물 받아 총 세권이 되었다. 


이 책을 읽기로 다짐 한건 책이 세 권이어서가 아니라 김영하 작가의 『읽다』때문이었다.



김영하 작가는 『읽다』에서『롤리타』의 첫 장 두번째 단락부터 도발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 순간 독자는 밀란 쿤데라가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라고 정의한, 바로 그 의미를 실감하게 됩니다. 자, 도덕적 판단을 중지하기 싫다면 여기서 책장을 덮으시오, 라고 나보코프가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독자는 작가와 일종의 합의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작가인 당신의 도덕적 판단을 무조건 수용하겠다'가 아니라 '이 소설을 다 읽을 때까지 일단 도덕적 판단은 유보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책을 읽는 내내 독자는 이 합의를 번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독자들이 번복을 하고 책장을 덮어버립니다. 『읽다』 123쪽


과연 나의 도덕적 판단을 유보한 채 계속 지켜볼 것인지 아니면 책장을 덮어버릴 것인지 무척 궁금해졌다. 그래서 책장에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롤리타』를 꺼내들고 싶어졌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읽으면 더 용기가 날 것 같아 고전 읽기 모임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었다. 

결국 나는 롤리타를 향한 험버트의 사랑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이 소설이 내게 남긴 건 무엇인가, 이 소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고리타분한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소설이 내게 불쑥 다가오면서 느낀 다양한 감정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강하지만, 아마 다른 분들과 함께 읽으면서 그 분들이 용기를 주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 소설을 완독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히 장담하건데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각자 다른 롤리타, 각자 다른 험버트를 만날 것이다. 나는 여러분을 시샘한다.



옮긴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빌려보자면, 우리가 만난 롤리타와 험버트는 역시나 각자 다른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각자 만나고 있으면서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읽어보라고 이끌어 주었다. 그래서 나처럼 낙오될 뻔 한 독자도 완독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때론 완독하기 버거운 책을 함께 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4. 토지 - 박경리





무려 12년 전에 사 놓은 토지 세트 도서다. 책을 구입하고 약 2년 뒤에 저자가 돌아가셔서 이 책을 읽기가 더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이 책을 읽어버리면 저자와 영원히 이별할 것 같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고 하면 이해가 갈까?


이 책은 나의 부족한 설명보다 너무 익히 들어온 명성 때문에 꼭 소장하고 읽고 싶은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이 책을 읽지 못하고 있고, 솔직하게 읽을 계획이 없다. <율리시스>처럼 어떠한 동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그렇게 왔을 때 순식간에 읽어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세트도서는 이제 만날 수가 없다. 저자가 사망하고 난 뒤 저작권 문제가 있다고 들었고 출판사가 바뀌었다. 이 세트 도서도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는데, 좀 더 비싸졌고 디자인도 바뀌었다. 그래서 나는 절판된 이 책에 대한 애정이 좀 더 있다. 이 책으로 <토지>를 읽을 것이고, 오랫동안 묵혀뒀던 마음의 짐을 말끔히 털어내고 싶다. 어서 그날이 오길 바랄 뿐!





5. 코기빌 3부작 - 타샤 튜더






나는 타샤 할머니를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국내에 출간된 모든 책을 거의 다 가지고 있다(개정판은 제외). 그 가운데서 타샤 할머니의 그림책을 정말 좋아하는데, 코기빌 3부작 책이 특히 그랬다. 이 책으로 인해 코기도 알게 되었고, 종종 코기를 발견하면 자연스레 타샤 할머니가 키웠던 개들이 생각났다. 그만큼 특별한 책이라 책 속의 내용이 진짜처럼 느껴지고, 그림도 생생해서 아끼는 책이다.


현재는 품절되었지만(중고도서는 있다), 자꾸 표지가 쪼글쪼글 변해가는 게 아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활발하게 번역되고 출간되던 타샤 할머니의 책이 요즘엔 출간되지 않는 게 아쉽다. 그래서 그냥 번역되지 않은 해외도서를 사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게 있는 타샤 할머니 책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타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꼭 10년이 되었다. 할머니가 가꾸었던 정원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고, 그림들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그림 속의 세계가 어디선가 존재하는 것 같아 즐겁고 신비롭다.


타샤 할머니의 다른 책들을 만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 이렇게 절판 혹은 품절 된 책들(다른 판본이 존재하고, 중고로 구입할 수 있는)을 살펴보니 감회가 새롭다. 아마 뒤져보면 이런 책들이 더 있을 듯 한데, 딱 떠오르는 책 다섯 권만 골라보았다. 


개정판은 언제나 반갑지만 절판 혹은 품절은 마음 아프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이 희귀본이 되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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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8-08-27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지세트 그리고 율리시즈는 저도 갖고 있네요 율리시즈는 읽기 매우 어려운 것이 번역에 대한 문제도 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 온갖 은유와 표징을 무수히 많은 고전에서 빌려와서 기초지식이 상당해야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저도 율리시즈는 아직이에요 뿌쉬킨은 탐나네요 열린책들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도 전설이라던데 구할 수가 없네요

안녕반짝 2018-08-27 00:48   좋아요 2 | URL
우와! 겹치는 책이 있군요^^
<율리시스>는 솔직히 아직 엄두가 안나요. 그래서 전 얼마 전에 구입한 천병희 교수님의 <오뒷세이아> <일리아스> 먼저 도전해 보고 그 다음에 읽어보려고 해요. 기초지식이 하나도 없어서... ㅜㅜ
열린책들의 도끼 옹 전집을 전 두 질이나 갖고 있는데 전설을 품고 있는 걸까요?^^ 절판될 무렵 구하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열린책들에서 도끼 옹 전집을 내주어서 정말 도끼 옹 작품은 열린책들이다, 맹신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얼마전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문학동네 번역을 읽고 다른 부분이 많아 혼란이 오고 있습니다.
도끼 옹 작품의 새 번역이 나오면 찾아서 보려고 기다리고 있어요.

북프리쿠키 2018-08-27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기만 해도 두근거리는 책들이네요.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어쩔 수 없이 출판사별로 여러권 욕심나는 게 정상인가 봅니다ㅎㅎ 책장에서 고이 잠들어 있는 책들 언제 깨울 수 있으려나요.ㅎ 반짝님 말씀처럼 들었다 놨다 하다가 과감히 펼치는 날이 오겠죠.~

안녕반짝 2018-08-30 23:40   좋아요 0 | URL
저도요. 국외든 국내든 번역자, 출판사, 판형이 다르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들입니다.
일단 쟁여놓고 기회가 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카알벨루치 2018-08-27 18: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율리시스>저도 저거 구입해놓고 쳐다보고만 있네요 ㅎㅎ 언젠가는.......^^

안녕반짝 2018-08-30 23:41   좋아요 1 | URL
앗! 똑같은 책인가요? 저도 오랫동안 묵히고 있는 중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08-30 23:54   좋아요 0 | URL
우리 숙성시켜 나중에 된장재료로 쓰지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