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아빠와 등골브레이커의 브랜드 썰전 자음과모음 청소년인문 3
김경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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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중학교 때 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인기로 그해 겨울 시내에는 온통 발목까지 내려오는 파란 농구 코트를 입고 다녔던 청소년들로 북적였다. 그렇게 입고 다니는 게 멋있어 보여 나도 입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넉넉하지 못했던 형편이라 부모님께는 아예 말을 꺼낼 생각도 못했다. 당시에 언니들이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있어서 부탁을 해볼 만도 한데, 정신 차리라는 소리가 들려올 게 뻔하고 내겐 너무 과분한 것 같아서 그저 다른 사람들의 외투만 실컷 구경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비싼 겨울 외투를 사지 못한다. 몇 년 전 가장 비싸게 샀던 게 20만원 대였으니 그 이상이 넘어가면 과분하다는 죄책감 비슷한 기분에 사로잡혀버린다.

 

어쩌면 나도 이 소설 속의 현수 아빠처럼, 친구들이 입고 다니는 고가의 브랜드 패딩을 사달라고 했을 때 단박에 ‘브랜드는 뱀파이어다.’ 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 꼰대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의도치 않게 현수와의 세 번의 논쟁을 하고 난 뒤, 나이키 운동화가 갖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짝퉁을 사주는 바람에 겪었던 일들이 떠올리며 현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될 때, 이상하게도 난 현수 아빠에게 더 동질감을 느꼈다. 아무래도 메이커(우리 때는 브랜드보다 메이커란 말을 더 많이 썼다)를 입고, 신지 못했던 기억이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현수가 사달라는 브랜드 패딩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고가일 것이다. 그런 고가의 패딩을, 청소년기에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해서 덜컥 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현수만큼 준비하고 조사해서 ‘브랜드는 뱀파이어가 아니다’란 논쟁을 하는 기특함이 있다면 현수 아빠처럼 마지막에 고정 관념과 선입견을 깨고 현수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지도 모르겠다(저자는 영리하게 함께 백화점 가는 장면에서 마무리 했다).

 

브랜드는 부족을 만들지. 그 브랜드를 가져야 같은 부족의 될 수 있게 말이야. (…) 그렇게 브랜드가 세상에 선긋기를 하는 거야.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브랜드가 또 다른 신분제 구실을 하는 거지. 브랜드를 쫓다보면 너는 그런 부족이 되지 못할까 봐 불안할 거야. 브랜드가 만든 허상에 빠지지 말아야 해. 27쪽

 

솔직히 꼰대처럼 들리는 이 말을 인정하지 않을 노릇이 없다. 무조건 브랜드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뭔가 더 나을 거라는 생각, 브랜드를 좀 더 우위에 놓는 편견은 여전하다. 때론 아무 생각 없이 ‘우와!’ 할 때도 있고, 속으로 세상에 선긋기를 했던 적도 있던 터라 나한테 하는 말 같아 찔릴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나에게 명품백이 있다거나, 무리를 해서 물건을 구입한 적은 거의 없는데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놀라웠다. 하지만 좀 더 세세하게 파고 들어가면 현수가 말하는 좋은 브랜드의 가치를 알고 있음에도(탐스, 아름다운 가게, 빅이슈 등), 큰 금액은 아니더라도 브랜드와 한정판에 현혹되었던 적이 많았음을 깨달았다. 스타벅스만 해도 집에서 300미터 거리에 있다는 이유로 자주 들르고 한정판 사은품에 현혹된 적이 많았다. 나는 보통 기분에 따라 카페에 가는 터라 가장 먼저 절제하고 마케팅에 현혹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현수와 아빠는 세 번의 논쟁을 벌였다. 1대 1 상황에서 세 번째는 명확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고, 앞서 말했듯이 아빠와 함께 백화점에 패딩을 구입하러 가는 순간에 소설은 끝이 난다. 브랜드 패딩을 사기 위해 이렇게 논리적으로 접근한다는 구성이 부자연스런 부분도(아빠와 현수, 누나까지 너무 똑똑했다^^) 있었지만 나 역시 브랜드와 마케팅의 숨은 뜻을 알고는 깨닫는 바가 많았다. 이럴 때일수록 현명한 소비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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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중력 - 사소하지만 소중했고 소중하지만 보내야 했던 것들에 대하여
이숙명 지음 / 북라이프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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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은 사기보다 버리기가 어렵다. 일단 마음먹기가 어렵고 마음을 먹었대도 실행에 옮기기가 어렵다. 새 물건은 카드만 긁으면 집 안까지 배달된다. 덤도 끼워주고, 적립금도 주고, 야단법석을 떨면서 소비를 축하해준다. 하지만 처분할 때는 갖은 수고를 들여야 한다. 쓰레기를 분리하고 배출하는 것도, 쓰레기장으로 들고 나르는 것도 모두 내가 직접 해야 한다. 145~146쪽


비가 개고 해가 쨍쨍한 오후, 벼르고 벼르던 분리수거를 하고 왔다. 대부분 플라스틱인데 늘 버리면서도 의문이 든다. 과연 이걸 재활용 할 수 있을지, 우리 집만 해도 이렇게 쓰레기가 많은데 내가 사는 지역, 우리나라, 전 세계로 따져보면 어질어질 해진다. 두 차례에 걸쳐 재활용, 일반 쓰레기, 음식물, 폐지까지 버리고 오니 집이 조금 깨끗해진 것 같았지만 물건이 꽉꽉 들어찬 집은 여전히 답답해 보였다. 가장 큰 원인 제공은 내 책이다. 더 이상 빈 벽이 없어 책장을 들일 수 없어 이중으로 쌓여 있는 책들을 보면 내 욕심이 과하다 싶다. 최근에는 소장하지 않는 책들은 지인에게 주는 등 최대한 책을 늘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긴 하다. 꼭 1년 전에 무모하게도 내 책들을 세어봤다. 약 3,100권이었는데 분명 그보다 더 늘어났다는 것을 안다. 몇 십 권도 아니고 백 단위의 책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가끔 마음이 동할 때면 물건을 모두 끄집어내어 버리지만 항상 내 마음과 달리 양이 너무 적어 당황할 때가 많다. 특히 자잘한 물건들이 많은데 서랍에 처박아 둔 터라 잘 보이진 않지만 꺼내보면 양이 엄청나다. 물건을 쌓아두는 편은 아니지만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서,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으니 그냥 두는 물건들이 좀 있다. 한 때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기도 했지만 내 책들을 보며 포기한지 오래고, 책들이 모두 빠진다면 정말 그럴싸하다는 상상도 해봤다. 책장 때문에 우리 집엔 소파, TV장, 화장대(이건 내가 관심이 없어서)도 없다. 그러니 책들만 빠진다면 정말 간소화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잠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아예 싹 정리하고 해외로 살러 간 저자가 대단해 보였다. 필요하거나 버리지 못한 물건은 비키니 장 두 개에 담아 언니 집에 맡겨놨다고 했는데, 과연 내가 내 짐을 싹 정리한다면 양이 어느 정도 될까 싶었다.

집이 필요하다 생각하니 다른 문제들이 따라왔다. 치솟는 집값에 불안해하고, 안정된 직장이나 부유한 부모를 가진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고, 누가 투자에 성공했단 소리를 들으면 샘이 났다. 불안, 비교, 시기는 내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를 자꾸만 흔들어놓았다. 7쪽

한때 내 책들을 한 곳에 두고 싶다는 생각에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었다. 최근에도 그런 열망이 들떠 가라앉히느라 애를 먹었는데, 결국 집이 주는 만족감 하나로 평생 빚쟁이로 살기 싫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명한 건지, 현실 안주인지, 자기합리화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굳이 돌아보면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공간에 주는 만족감이 분명 있다. 그럼에도 나는 왜 이렇게 많은 물건들을 끌어안고 사는 걸까? 그나마 옷은(내 옷만. 아이들과 남편 옷은 좀 된다) 많지 않아 나름 만족하면서도 항상 수수한 차림이 나에게 맞는 건지 어떤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물건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저자를 보면서 한참을 웃고(이 책도 카페에서 읽다-저자의 패션 테러 부분-너무 웃겨서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 책을 덮고 뛰쳐나올 정도였다), 패션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세상 이야기 같은 생소함에, 저자에게 물건이 머무는 순환 속도에 어지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저자처럼 과감히 물건을 정리하지 못할 거라는 데서 오는 실망감(?)과 정말 다 정리했을 때의 후련함과 미련(?) 사이에서 갈등할 나를 상상해보고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꼭 저자처럼 따라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한 공간’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 없는 공간’을 갖고 싶었다.”라는 말은 실천해 보고 싶었다. 그럴 기회가 나에게도 분명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열망하는 책만 가득한 방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랑하는 가족의 물건과 추억이 함께 어우러질 때 가능하다는 것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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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17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3,100권이면 서재를 크게 잡으셔야겠네요 못 쓰는 책은 저한테 던져주세요 ㅎㅎ
 

 

 

 

알라딘 굿즈!!

셜록 머그를 골라봤는데 컵은 예쁘나 크기는 좀 작다.

신상 알라딘 굿즈가 나올때마다 꼭꼭 사지만 갠적으로 9월은 좀 약한듯!!

10월을 기다려 본다^^

 

 

 

 

9월 초에 함께 구입한 알라딘 굿즈!

셜록 담요는 제가격 주고 그냥 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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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에게 기독교가 필요한가 - 100년의 지혜, 老 철학자가 말하는 기독교
김형석 지음 / 두란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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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정말 좋다!’는 감탄사가 나왔다. 어쩜 이렇게 믿음 안에서 통찰력이 있는지, 이렇게 명확한 확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존경스러웠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을 낱낱이 만나면서도 교회가 해야 할 일들(또는 우리가 교회에서 기대해야 할 것들)과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짚어주었다. 어떻게 이렇게 적확하게 말할 수 있는지 다시 저자의 약력을 살펴보았다. 1920년에 태어난 저자가 100세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그래서인지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고, 함께 학교를 다녔던 이가 윤동주시인과 황순원 작가라는 일화를 들을 때면 기분이 묘해졌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연륜 때문인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기 때문인지 자꾸 따져보려 들다가도 결국은 신앙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예수님의 교훈이 내 인생관이 되고, 내 가치관이 되고, 더 크게 말하면 내 세계관이 됐다. 내 인생관과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 한 나는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듯이 예수님 자체가 인생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선뜻 질문할 수 없는 여러 가지가 말끔히 해갈되어서 너무 개운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탄생할 수 있었던 역사는 물론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천주교의 차이가 맞물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또한 유럽의 교회가 문을 닫는 이유, 우리나라의 기복신앙과 ‘교회에만 매몰되는 교회주의’가 빚어내는 위험도 말해주고 있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닌,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당혹스러웠던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정작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되는대로 신앙이 흘러갔다. 그렇다보니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 교회를 떠난 이들, 제대로 믿음이 뿌리내리지 못한 사람들을 쉽게 비난했고 서서히 무뎌져 갔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어느 순간부터 잊어버렸다. 비난 대신 그저 기도만 해주면 되는 것을 내 마음이 좁아 너그럽지 못했던 순간들이 참으로 많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그분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늘나라를 위한 나의 책임은 무엇인가 90쪽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교회 안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등등)이 어렵고 힘들게 만들 때마다 이 뜻을 잊지 않는다면 분명 흔들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삶을 살아가다 보니 어렴풋하게 깨닫게 되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만났다. 교회의 성장이 멈춘 이유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염려의 해결책으로 ‘교회가 교리만 찾고 종교적 진리에만 머무를 게 아니라 사회가 원하는 진리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인류에게 희망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답을 해주어야 한다는 대안에 교회와 국가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초점이 잡혔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그렇게 ‘큰 책임’이 있는데 책임을 지기는커녕 복음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보았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사랑이 있는 고생이 가장 고귀한 것이고 예수님 또한 그렇게 사셨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222쪽

자꾸 성전중심의 공간신앙에 얽매이고, 기복신앙적인 기도만 하게 되고, 율법에 얽매어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흔적들이 내게도 여전히 남아있다. 조금씩 내 신앙을 정립하고 있던 와중에 이 책을 읽었고 저자의 바람처럼 항상 새로운 ‘나’를 기대하게 되었다. 그래서 깨닫고 배운 것이 너무나 많다. 기도의 중요성은 물론이고(철없이 드렸던 기도를 세월이 지나면 주님께서 높이실테니 열심히 기도를 드려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소유가 아닌 베푸는 것이 목적이며, 문제의식이 있을 때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고, 내 그릇에 넘치는 것은 받을 생각도 말고, 자녀에 대해 욕심내지 말고 ‘이다음에 50, 60이 됐을 때 세상에서 어떤 인간으로 살아갈지에 대해, 그들의 미래 삶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인생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깨달아 다른 사람의 짐을 사랑으로 대신 져주는 것’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이라는 사실이 가장 크다.

최근에 집 소유에 대한 집착이 나를 뒤흔들 일이 있었다. 모든 것에 의미를 잃어 기운을 잃었고, 자꾸 내 환경을 탓하게 되었다. 분명 성경이나 신앙서적을 읽으면 응답이 있을 것 같은데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나는 그 답과 마주하기 싫었다. 그러다 용기를 내서 이 책을 읽었고 ‘집은 살기 위해서 만든 공간이지 삶의 목적은 아닙니다.’라는 말씀 앞에 정확하게 정답을 주신다며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이어 집의 노예가 되는 사람이 어리석다는 말씀에 그간 나를 괴롭혔던 고민을 털어버렸다. 물론 좋은 집에서 여유롭게 살고 싶은 소망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능력 밖이고, 내 것이 아니며, 좋은 집이 주어진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할거란 생각을 떨쳐버렸다. 나는 늘 이렇게 어리석은데 주님은 한결같이 이런 나를 묵묵히 기다려주시고 사랑해주신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기대하며 살아갈 삶이 그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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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루네코 5 - 고양이패밀리 좌충우돌 일상 다이어리
쿠루네코 야마토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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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이 책을 읽는데 마음이 조금 찡해졌다. 고양이들의 애교와 사랑스러움 뒤에는 고양이 집사의 헌신과 고충이 있고, 그 모든 것에는 고양이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인지도 모른다(‘고양이는 뭔가 도움이 되나요?’ 란 질문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현실적이면서도 오히려 애정이 느껴졌지만 말이다). 생명이 있는 무언가를 키운다는 건 나도 함께 자랄 각오를 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요즘 어렴풋이 느낀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잘 하고 있는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따질 겨를도 없이 그냥 닥치는 대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복적인 일과에 쉽게 지치고, 아이들이 조금씩 커가면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고양이를 키우는 와중에 위탁도하고, 입양도 하고 보내기도 하는 저자를 보면서 참 대단하다 느꼈다. 그리고 왜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을 ‘집사’라고 부르는지 오늘에서야 완벽히 이해했다.

저자가 함께 살아가는 고양이만 키우고 있다면 ‘집사’의 역할이 능숙하다 못해 몸에 배어 자동으로 나올 것 같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고양이를 데려와서 먹이고, 보살펴주고, 뒷바라지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을 낱낱이 보여준다. 특히나 고양이는 깔끔한 편이라 청결 면에서 늘 신경을 써야 하는데(물론 여기저기 오줌을 뿌리고 다니는 고양이 ‘봉’이 있긴 하다), 내 한 몸 씻기도 버거운 나 같은 사람에겐 절대 할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사랑이 충만하면 그렇게 될까? 고양이가 신발을 물어뜯어 놔도 ‘어쩔 수 없지, 라든가-. 고마워-라는 생각?’도 부족해 화가 나기는커녕 ‘이런 건 냥이 집사에게 상이죠-.’ 라고 말하고 있으니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을 뛰어 넘어 버린 것 같다.

아니면 육아와 비교해 보면 비슷할까? 밥 달라고 자고 있는 저자를 깨우고, 괴롭히고, 잠자리도 빼앗아 버리는 건 기본이고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집고 뛰어다니는 고양이들. 둘째가 네 살이 된 지금도 나의 작은 소망은 통잠이요, 어질러지지 않은 거실이라 여기는 것처럼 때론 나도 아직까지는 아이의 집사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편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엄마기에, 내가 무언가를 해줘야 하기에 혹은 사람을 만들어야 여기기에(읭?), 갈등이 끊이지 않은지도 몰랐다. 고양이와 비교 자체보다 육아에서 힘을 빼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봐도 역시나 결론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집사를 자처하는 저자의 모습에 위로를 받았다고 하면 이상할까?

그렇게 고양이들의 모습을 내내 지켜보다 동일본대지진 때 고양이를 위탁 받아 키우는 부분에서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렇게 큰 일이 벌어졌을 때 가장 잘 할 수 있는 고양이를 맡아 키우는 일. 후에 고양이들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소식을 궁금해 하는 모습에서 정말 고양이를 깊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론 함께 했던 고양이가 갑작스럽게 무지개 다리를 건너버려서 상심하고, 아프거나 헤어짐을 아쉬워해야 하는 고양이를 만나기도 하지만 끝까지 고양이 집사로 남길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참 예뻤다.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볼 수 없는 나도 그런 저자의 기록을 언제까지나 마주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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