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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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펐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도 슬펐고, 재독 했을 때도 여전히 슬펐다. 소설의 시작인 주인공의 장례식장에서처럼 누가 나를 이렇게 기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슬픔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은 파란만장했고, 스스로 선택에 의한 궤적이 낱낱이 드러났음에도 이토록 노곤하고 서글플 수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혹은 노인이 되어 간다는 것에 대한 서글픔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한데도 끝을 모르는 먹먹함이 나를 계속 슬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23쪽

주인공은 수술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삶은 ‘에브리맨’이라는 그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석상 이름처럼 보통 사람의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해 보이기도 하고, 왜 저런 선택을 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가도, 자기 인생이니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가 이 모든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덧없는 것인지 헷갈렸다.

‘다이아몬드라는 건 그 아름다움과 품위와 가치를 넘어서서 무엇보다도 불멸이거든. 불멸의 흙 한 조각, 죽을 수밖에 없는 초라한 인간이 그걸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다니! (63쪽)’ 라고 말하게 되는 아버지 직업이 보석상이라는 것. ‘가까운 날에 그를 위해 침대를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바닥이 평평한 구멍을 파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186쪽)’라며 소설의 끝이 공동묘지의 묘지를 파는 인부의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것에서 여느 사람 못지 않는 평범함을 엿보았다. 그도 나처럼 평범하다는 것, 그리고 나도 그처럼 평범하게 잊힐 것이라는 사실이 안도감과 함께 서글펐다.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 삶이 우연히, 한 번만 주어졌고, 알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없다는 말처럼 어쩌면 그도 삶을 되돌아볼 여력이 없을 만큼 순간에 최선을 다했는지도 모른다. 세 번의 이혼과 그렇게 좋아하던 형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건강한 것에 질투해 ‘최초의 가족의 해체를 완료해’버리고, 정작 자신은 아버지에게 다 받았으면서 자신의 자식은 보호해주지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자괴감은 죽음을 예견해 두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죽음 앞에서 오는 후회인지, 언제나 늘 그렇듯이 인생은 내 맘대로 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모든 것이 슬펐다.

거짓말은 정말 경멸스러운 방식으로 값싸게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거야. 다른 사람이 불완전한 정보에 따라 행동하는 걸 지켜보는 거야. 다른 사람이 수모를 겪는 걸 지켜보는 거라고. 거짓말은 아주 흔하지만 당하는 쪽이 되어보면, 그건 정말 경악스러운 거야. 127쪽

그의 전부인이 그에게 쏟아낸 말들은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크든 작든 매일 거짓말을 하고 살아가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삶까지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어느 시기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건 그 자체로도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 아무것도 이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 후회와 외로움을 안길 뿐, 그 모든 것을 내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라는 말처럼 늙어간다는 것은 삶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일까? 늙어감이 ‘대학살’이 되지 않으려면, 인생이 끝난 것처럼 느껴지지 않으려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더라도 모든 행동에 책임을 지면 된다. 때론 책임지지 못하더라도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회피라면 때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도 된다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피해가 가는 회피여도 그것도 삶의 일부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노년이어도 삶의 종말이 아니라 속도가 느리고 제약이 좀 늘어날 뿐 여전히 주체는 바뀌지 않는다. 누구나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며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슬프게가 아닌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것도 현명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이 아닐까? 그럼에도 죽음이 멀게만 느껴지고, 주인공의 삶이 슬프게만 느껴지는 건 나에게도 많은 연습이 필요할지도 모른다ᅟᅳᆫ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나의 죽음도 ‘흔해빠진’ 죽음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부끄러움이 가득한 죽음만은 피하고 싶다. 죽음을 맞이한 뒤 가족과 타인에게 남겨질 이후는 내 영역이 아니므로 주인공처럼 노년에 내 삶을 한 번 되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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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베이터 - 디베이팅 세계 챔피언 서보현의 하버드 토론 수업
서보현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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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말을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잘 하고 싶다. 저자는 영어도 몰랐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버드 토론 대회 코치까지 되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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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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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에서 돈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돈으로 신뢰라는 주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굉장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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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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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306쪽


몇 년 전 우연히 카페에 들고 간 『안중근 재판정 참관기』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고 한참 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그 사진은 하얼빈에서 암살을 앞둔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의 마지막 기념사진이었다. 의거 3일 전에 마지막을 예감하듯 이발소에서 머리를 단장하고 의식을 치르듯 찍은 사진이었다. 왜 이렇게 이 사진이 나를 사로잡았을까? 눈물이 맺히고 마음이 울컥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안중근 의사의 나이는 31세, 우덕순은 34세, 유동하는 19세 라는 나이(『하얼빈』에서는 안중근과 우덕순이 동갑으로 나온다)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안중근 의사의 재판이 열린 재판장으로 기꺼이 들어갔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한반도를 넘어 동양 평화에 위협을 가중 시키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를 낱낱이 들여다봤다. 거기에 ‘의병으로서 행한 일이기에 전쟁포로로 이 재판장이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국제공법,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되기를 희망한다.’고 자신의 죄를 당당히 밝히는 안중근 의사가 있었다.


그래서 『하얼빈』을 마주했을 때 당당했던 안중근 의사와는 좀 다른 이야기일 거라 예감했다. 『칼의 노래』에서 외로웠던 이순신 장군을 목도 했던 것처럼 안중근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약간은 예상을 할 수 있었다. ‘대의’에서 한 발짝 벗어 났지만 오히려 내면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간 안중근 역시도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처연해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운명을 찾아갔을 뿐, 때론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동양 평화’라는 이유 외에 자신의 직감을 적확하게 설명할 수 없어도 나 또한 그렇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향해 자신의 살아 있는 몸을 밀어 또 다른 생명을 해하려는 행위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안중근의 정치성은 이토와 코레아와 세계 공통어 ‘후라’를 그의 한 몸의 리듬으로 연결시키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을 거쳐서 대련에 닿는 철도를 따라서 전개되고 있었다. 217쪽


저자가 안중근의 ‘대의’에 집중했다면 이토를 향해 총을 쏜 순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중근이 이토를 향해 6초간 7발의(소설에서는 한발이 남은 걸로 설정했다) 총성이 울린 장면은 말 그대로 순식간에 지나갔고, 사실만 전달하려는 것처럼 간결했다. 웅장하지도, 그 순간을 정지시켜 장황하게 설명하지도 않았다. 이토의 마지막 순간도 그저 ‘이토는 곧 죽었다. 이토는 하얼빈역 철로 위에서 죽었다.’ 라고만 표현했다. 이토가 도착하는 순간을 요란하게 맞이했던 많은 얽힘과 목적을 뒤로한 채, 이토가 하얼빈에 왜 오는지를 알 필요조차 없다고 느낀 안중근이었다. 이토가 온다고 하기에 하얼빈으로 향했을 뿐, 거기서 그는 깔끔하게 목적을 달성했다. 이토를 저격한 뒤 ‘코레아 후라’라고 외친 것처럼 그는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하고 존재했던 것처럼 보였다.


안중근은 한 나라도 어쩌지 못한 거대한 운명을 어떻게 혼자 짊어질 생각을 했을까? 안중근이 이토를 쏜 총알이 당연하게도 우리나라도, 동양 평화도 지켜내지 못했지만 ‘그 사내는 땅에 결박되어 있으면서도 땅 위에 설 자리가 없었다.’라고 남편 안중근에 대해 말했던 김아려처럼 그는 자신의 설 자리를 내어 기꺼이 ‘대의’를 행했다. 그는 가난했고, 포수였지만 무직이었고, 젊었다. ‘도마’라는 세례명을 받은 천주교인이었으며,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를 세상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간 묵묵했던 길에 반해 이토의 잘못된 길은 오만하게 드러났다. ‘이 세계는 인간이 만드는 구조물이다. 이것이 우리의 앎이다. 우리의 앎은 사물을 향해 나아간다.’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것이 제국의 길이다.’라고 오도를 향하는 모습은 안중근과 대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길은 각자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길을 어느 누구도 틀안에 가둬 단정 지을 권리는 없다. 이토의 그런 생각에 책을 읽다 말고 ‘헛소리!’라고 일갈할 뿐이었지만 안중근은 그를 향해 총을 쐈다. 안중근의 총알이 이토의 몸을 뚫지 못했다면 또 다른 이의 시선처럼 어쩌면 우리는 ‘일본에게 완벽하게 종속’ 되었을 수도 있다. 


저자의 의도처럼 왜 안중근은 이토를 향해 총을 쏠 수밖에 없었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그는 총을 쐈지만 깨어있는 지식인이었다. 이 책에는 안중근의 정치성을 거의 드러나지 않아 자칫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의문으로 남을까 염려된다. 하지만 『안중근 재판정 참관기』에서 바라본 그는 교육으로 깨어 있었고, 또렷한 근거를 바탕으로 제국주의에 휩쓸리는 동양을 거시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미래를 염려하는 행동파로 보였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동양을 보며 안중근 의사는 무슨 생각을 할까? 저자가 ‘영웅’ 안중근을 걷어내고 ‘인간 안중근’에 집중해 ‘가장 치열했던 일주일’을 표현한 것도 어쩌면 내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은 잠시 내려둔 채, 자신의 삶을 잘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결은 많이 다르고 조금은 억지스럽더라도 치열함의 근본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안중근 재판정 참관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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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4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13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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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124쪽


새벽에 일어나 문득 펼친 책장에서 만난 문장은 울컥하다 못해 눈물이 줄줄 흐르게 만들었다. 눈물이 차오르고 눈앞이 흐려진다는 표현을 실감할 정도로 글씨는 자꾸 흐려지고 눈물은 왈칵 쏟아졌다. 누군가 그랬다. 같은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어른과 그런 어른을 멀뚱히 바라보는 아이는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의 차이라고.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아기 펭귄의 마음에서 나는 무엇을 경험했던 걸까?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보면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 자꾸 눈물이 난다. 노든, 치쿠, 윔보, 아기 펭귄이란 단어만 떠올려도 곁에서 내가 그들을 다 지켜본 것 같아서, 나 혼자 ‘긴긴밤’을 보낸 게 아닌 것 같아서 자꾸 마음이 시린다.


나는 절벽 위에서 한참 동안 파란 세상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너무나 거대했지만, 우리는 너무나 작았다. 바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우리는 엉망진창이었다. 124쪽


아기 펭귄이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바다를 보면서 다른 동물들의 마음을 이해한 장면을 말하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한다. 꼭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이 세상은 거대했지만 나는 너무 작았다. 이 세상은 아름다웠지만, 나는 엉망진창이었다.’ 라고 들려 하루 종일 눈물바람이다. 아마도 현재의 내 상태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매일 하루살이처럼 하루를 버티지만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늘 지배적이다. 계획도 없이 눈에 보이는대로 해치우고, 그렇게 보내다 보면 잠들 시간이 다가온다. 하루를 되돌아보면 정리된 건 하나도 없이 엉망진창이고, 또 그렇게 보낼 내일이 예상되는 게 요즘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엉망진창이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엔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삶인데, 대부분 다 그렇다고, 나만 그런 게 아니니 아름다운 이 세상을 바라보라고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16쪽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115쪽~116쪽


그러면서 굳이 나에게 앞으로 더 ‘훌륭한’ 내가 되라고 말하지 않는 것 같아 더 뭉클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나 자체로 훌륭하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코뿔소 노든을 돌봐주던 코끼리들이 바깥세상을 향해 망설이던 노든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중에 노든이 아기 펭귄에게 똑같이 말해 주었던 것처럼, ‘난’ 이미 훌륭하니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도 된다는 말처럼 들렸다. 훌륭하다는 말이 뭔가 꼭 잘해야 하고, 뛰어나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의의를 두는 것처럼, 누군가 나를 믿어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노든과 아기 펭귄이 내디뎠던 낯선 세상으로의 발걸음은 두려움만이 지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125쪽


인생에서 반짝였던 시기는 누구나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순간일 때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랫동안 지속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아직 그 반짝임이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보통 순간의 반짝였던 기억을 가지고 오랫동안 긴긴밤을 견뎌내는 게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렇게 긴긴밤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받으며 자란 아기 펭귄은 강했다. 코끼리 무리에서 사랑 받으며 세상을 향했던 노든처럼, 자기 새끼도 아닌데 기꺼이 알을 품었던 보쿠와 윔보처럼, 그들이 보여주었던 연대는 아기 펭귄이 긴긴밤을 이겨 낼 힘을 만들어주었다. 노든의 상처와 분노를 가라앉혀 준 것도 사랑이었고, 그 사랑을 아기 펭귄에게 되돌려 준 것도 사랑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누군가에게 계속 사랑을 빚진 자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이렇게 버틸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외면한 사랑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사랑 받으며 자랐다. 그걸 잊어먹었거나 부족하다고 느낄 뿐, 나를 사랑한 사람은 이 세상에 분명히 있고 있어 왔다. 그 사람이 단 한사람이었대도 그걸로 족하다. 그리고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야 할 때다. 지금의 상태가 엉망진창이더라도 훌륭한 코뿔소 노든처럼, 훌륭한 아기 펭귄처럼 진정한 내가 되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아기 펭귄은 스스로 이름을 찾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 삽화에서 펭귄의 무리에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펭귄은 더 이상 아기 펭귄이 아닌 이름을 찾아가고 있다고 여겼다. 노든이 굳이 아기펭귄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도 찾아낼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우리도 스스로의 이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시작되었다. 나를 비롯해 우리는 이미 이 곳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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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9-08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안녕반짝 2022-09-13 23:4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좋은 책 만나 울컥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