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재판정 참관기 - 100년 전, 안중근 의사와 일본인 재판관이 벌인 재판정 격돌, 현장 생중계! 재판정 참관기 시리즈
김흥식 엮음 / 서해문집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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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시간도 가지고 차도 한 잔 마시러 카페에 갔다. 다소 신난 음악을 들으며 그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데 나는 왜 하필 이 책을 가져갔을까? 책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장의 사진 앞에 멈췄고 순간 눈물이 날뻔 했다. 각자 나름대로 카페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나 또한 마음이 평안했고, 귓가에 흐르는 음악도 그런 분위기를 고조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외국어로 된 음악, 커피, 불특정다수들이 모여드는 카페.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

 

한참 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들여다 본 사진은 하얼빈에서 암살을 앞둔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의 마지막 기념사진이었다. 의거 3일 전에 마지막을 예감하듯 이발소에서 머리를 단장하고 의식을 치르듯 찍은 사진이었다. 왜 이렇게 이 사진이 나를 사로잡았을까? 눈물이 맺히고 마음이 울컥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안중근 의사의 나이는 31세, 우덕순은 34세, 유동하는 19세 라는 나이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안중근 의사의 재판이 열린 재판장으로 기꺼이 들어갔다.

 

이 책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일본 초대 총리이자 제1대 대한제국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의 재판 과정을 재구성한 책이다. 안중근 의사는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고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8일 동안 여섯 번의 공판을 받는다. 그 공판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고 있고, 공판을 지켜보면서 안중근 의사가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낱낱하게 보여주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일본이 러일 전쟁을 일으킬 당시만 해도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토가 부임한 이후에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한 을사늑약(1905년 11월)과 행정권을 박탈한 정미 7조약(1907년 7월)을 강제로 체결하고 동양 평화를 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을사늑약 당시 황제의 옥새와 총리대신의 허락도 없이 체결했으므로 부당함은 불 보듯 뻔했다. 익히 알고 있듯이 일본은 우리나라를 기점으로 삼아 제국주의를 향한 야욕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안중근 의사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반도를 넘어 동양 평화에 위협을 가중시키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그리고 ‘의병으로서 행한 일이기에 전쟁포로로 이 재판장이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국제공법,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일본인으로 구성된 두 변호사의 엇갈린 변호(사형과 무죄)에 자신의 주장을 정확히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죄’라고 주장하는 변호사에게도 ‘오늘날 모든 인간은 법률에 따라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다니 말이 되는가?’ 라며 자신을 법대로 처리해 달라고 말한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으며 자신의 행동까지 책임지는 모습에 알 수 없는 뜨거움이 자꾸 올라왔다.

 

그런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의식이 깨어있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는 고향을 떠나 3년 동안 활동하면서 ‘첫 번째는 한국의 교육을 꾀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한국의 의병으로서 나라를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연설을 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리고 조국에 대해 품은 사상은 오래 전부터였고, 러일전쟁이 일어날 무렵 더욱 절실해졌다고 했다. 그가 행동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조국에 대한 사랑을 넘어 동양 평화까지 생각하는 사람 앞에 불가능한 것이 없어보였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똑같은 상황을 겪고 보면서도 생각하는 바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행동만이 최선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뜻을 함께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기꺼이 조국을 대표했고, 형식적으로 이뤄진 재판에 순응하면서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고 자신의 뜻 또한 굽히지 않았다는 사실도 말이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쓰기 시작한 <동양평화론>은 완성되기 전에 형이 집행 되는 바람에 미완으로 남아 있다. 한국과 일본 중국이 힘을 합쳐 서양의 제국주의에 맞서 평화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책이라고 하는데, 100년이 지난 현재를 보면 안중근 의사는 무슨 생각을 할까? 동북아 국제 정세는 달라진 것이 없고, 더 적대적이며 여전히 전쟁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뻔히 보인다. 행동을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생각이 깨어 있어야 한다. 수많은 역사 속에서 생각이 깨어 있고 행동했던 사람들이 있어 (극단적인 예로 ‘헬조선’이라 부르는) 현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너무 뻔하지만 그게 사실인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걸 어떡해야 할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의거를 치르기 전에 찍은 사진을 보며 눈물이 났던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귓가에는 당시에 들었던 외국어 노래가 흐르고 있다. 내 곁에는 커피가 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은 여전히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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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를 버린 논어
공자 지음, 임자헌 옮김 / 루페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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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말 읽고 싶은데 내 역량이 되지 않아 읽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분야별로 다양한데 그 가운데 <논어>도 단연 상위권에 들지 않을까 싶다. 논어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오래된 책이 지금까지 언급되는 게 궁금하면서도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실생활과 연관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저히 자신도 없고 읽어도 뭔 말인지 모를 것 같은데 어떻게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랬던 내가 <논어>를 읽었다. 가장 큰 용기가 되었던 것은 이 책의 번역 때문이었다. 논어를 완역한 책인데, 흔히 들어온 군자와 소인이란 단어가 없다. 그리고 ‘공자님 말씀’에 비속어, 유행어, 외래어가 섞여 있다. 즉 나처럼 <논어>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일단 읽을 수 있게 한 다음 논어의 본질을 보여주고자 하는 번역자의 뜻이 보였다. 그리고 멋지게 먹혀들었다.


공자가 말했다. “「시경」의 시 300편을 한마디로 하면 이거다. 맑은 마음.” 32쪽

이렇게 <논어>의 해석과 함께 번역자의 생각과 느낌이 곁들어진 게 이 책의 구성이다. 「시경」의 ‘맑은 마음’에 대한 번역자의 느낌은 신박하다 못해 논어를 계속 읽고 싶게 만든다. ‘솔직의 탈을 쓴 직설, 독설 때문에 일상에 크고 작은 빡침이 있었다면 자, 맑은 시의 바다에서 잠시 쉬시면서 셀 위 댄스?’ 라고 말해준다. 그저 마음을 다스리라는 말보다 이렇게 공감해주고 알아먹기 쉽게 말해 주니 이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이런 말은 어떤가.

공자가 말했다. “이번엔 부모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말해볼게요. 부모님이 잘못하는 것을 보게 되잖아요? 그럼 돌직구 날리지 말고 돌리고 돌려서 감정 상하시지 않게 부드럽게 일러드려야 해요. 그렇게 말씀드렸는데도 부모님이 내 말을 따라서 고치지 않으시잖아요? 그래도 또 공경스럽게 대해야 하고 엇나가면 안 돼요. 물론 피곤하죠. 그래도 원망하면 안 되는 거예요.”

- 나를 낳고 길러준 고마움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막무가내 효도를 스스로 세뇌할 것인가? 공자는 부딪히라고, 부모님의 잘못된 생각에 끊임없이 부딪치라고 말한다. 대신 언성을 높이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돌려 말하라고 한다. 건강하게 집요해야 하는 것이다. (71~72쪽)

효도는 어렵다. 자식 된 도리도 어렵다. 그런데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 평화롭게 살아간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서로 부딪히는 모습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친절하고 도리에 맞게 하라고 알려준다. 번역자 또한 ‘건강하게 집요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듯이 <논어>가 고리타분하게 잔소리만 하는 책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공자가 말했다. “아, 어떡하지? 아, 어떡하지? 하며 전전긍긍 애쓰지 않는 인간한테는 나도 뭘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요.”


-발은 내가 떼는 거다. 좋은 선생님이 날 어떻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283쪽

꼭 내게 하는 말 같았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지만 그 선택도 내가 해야 하고, 선택에 따른 긍정과 후회의 몫도 모두 내 책임이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나서서 해주기를, 시키는 대로 했는데 내 뜻과 다르면 원망의 대상을 찾고 있는 건 아닌가 할 때가 많다. 현재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나는 내 스스로가 발을 떼어 보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거나, 알아서 해주겠거니 하는 기대 없이 스스로 독립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가 발을 떼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알아먹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이 책을 보며 온전히 깨달았다. 그리고 번역자의 말마따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을 너무 낡은 언어로 마주하고 있었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알아먹지 못해 고민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거나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은 부작용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알아먹기 쉬운 말로 논어를 읽고, 번역자의 생각을 더듬다 보니 왜 <논어>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책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바람직함, 사람다움, 인간답게 사는 것에 대한 갈망은 세월이 지나도 본질이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기에 그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현대사회에 더 많이 읽혀야 하는 책이 아닌가 싶었다. 혼자 살아간다 해도 필요한 것이 사람다움인데, 하물며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서 사람다움을 잃어버리면 그게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완벽한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논어>에는 현인의 깨달음과 조언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차이일 뿐 <논어>는 결코 낡은 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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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분노하는가? - 분노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길
조정민 지음 / 두란노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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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지혜롭게 수용하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지금 내 상황을 사람의 눈으로 보면 분노가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시선, 믿음의 시선으로 보면 다른 차원의 시각이 열립니다. 36쪽


이 구절을 읽다가 몇 달 전에 생겼지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90일 통독 성경’을 꺼냈다. 늘 성경을 일독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성경을 펼칠 용기를 얻었다. ‘하나님의 시선, 믿음의 시선’으로 세상과 나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여호와 이레’, 준비 하는 과정을 만들고 나를 상황으로 이끄신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몇 달 동안 신앙 서적을 읽으며 내게 부족한 지식을 채우게 하시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하셨다. 그리고 때가 된 듯 꼭 읽어야 하는 하나님 말씀으로 나를 이끄셨다. 90일의 목표를 세워놓고 겨우 3일 하고 이런저런 일들로 멈춰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가인의 분노와 사라의 분노를 읽다가 성경을 펼쳤고, 통독하는 가운데 가인과 사라가 그대로 등장하는 부분을 읽다 보니 말씀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솔직히 성경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기에 당당히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경의 배경지식을 알고, 성경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서는 가운데 성경을 펼치니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말씀이 살아서 내게 다가온 기분이 들었다. 익히 알고 있던 인물들이 왜 이렇게 행동했는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쓰셨는지를 깊이 알게 되면서 나를 많이 대입해 보았다. 흠 많은 나도 하나님은 똑같이 사랑하시고, 언젠가 알맞은 때에 쓰시기 위하여 연단하고 계신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요셉처럼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배움의 기회로 삼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을 성취하는 주인공이 됩니다. 구원을 위한,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노 때문에 인생을 그르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51쪽

고백하건데 분노도 나의 큰 고민 중 하나였다. 나는 잘 분노하지 않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욱하는 마음이 올라와 임신과 출산, 육아 핑계를 대고 있었다. 분명 그 영향도 있지만 분노의 대상이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사실에 늘 마음 한구석이 어려웠다. 그리고 성경 속 인물들이 어떻게 분노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분노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를 알게 되면서 결국에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불거져 나오는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면 하나님의 시선에서 분노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가인과 사울과 요나 같은 이기적인 분노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왕이면 요셉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아무 때나 분노하지 않고,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 안에서 분노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의 분노를 내일까지 끌고 가지 않고, 나의 의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며, 정말 분노가 머리끝까지 올라 욕을 하더라도 하나님께 모두 고하고 고침을 받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의 감정적인 분노, 이기적인 분노, 경험적인 분노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주님처럼 분노할 수 있을까요? 주님처럼 사랑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면 죄인이 아니라 죄에 대해 진정으로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181쪽

결국 사랑이다.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사랑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그리고 절대 내가 갚을 수 없는 죗값을 치러주시고 은혜 내려 주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노도 미움도 절망이 나를 지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연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늘 주님께 모든 걸 맡기며 죄와 가까이 하지 않기를 간구해야 한다. 그렇게 평생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삶이며, 그 가운데 믿음과 사랑이 밖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율법에 갇힌 행위가 아닌 사랑에 의한 실천. 내게 당면한 작은 어려움 하나라도 그렇게 해결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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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어쨌든, 잇태리> 박찬일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갔다가 허수경 시인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찍은 사진이다.




페이스북을 잘 들어가지 않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눈 뜨자마자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런 생각없이 글들을 보다 허수경 시인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결국 돌아가셨구나. 위암으로 투병중이시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도 들었지만 이런 소식이 부디 전해오지 않길 바랐다.



허수경 시인의 흔적이라도 발견하고 싶어 블로그를 뒤졌다. 약 4년 전에 우연히 찍은 사진이 나왔다. 듬성듬성 센 머리카락과 체크 목도리가 무척 잘 어울렸던 기억이 나던 사진이었다. 이젠 정말 사진으로밖에 뵐 수가 없는 분이 되어버렸다.

 

 



책장을 뒤졌다. 2011년에 출간된 <박하> 책이 나왔다.

 



겉표지를 들추면 유난히 예뻤던 표지로 기억되던 책이었다.

 

 

 



그리고 무심코 책장을 열어보고는 놀랐다.

정말 잊고 있었다.

허수경 시인의 사인본이 있을 줄이야.


사인본을 보고는 마음이 울컥해서 눈물이 날 뻔 했다.

그냥 참고 싶었다.

내가 울어버리면 정말 영영 이별일 것 같았다.



이미 읽은 작품이지만, 다시 읽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으로 다시 만날 것이다.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평안하시길!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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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역사와 삶의 철학이 만나는 살아 있는 기록 청소년 철학창고 12
사마천 지음, 고은수 엮음 / 풀빛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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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읽어야지 다짐했던 책을 읽고 나면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다. 최근에 그런 독서를 좀 했는데 이 책도 그 중 한 권이다. 중국 역사서이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자성어들이 <사기>에서 유래된 사실이란 정도만 알고 있지만 책을 읽어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 청소년들이 접하기 쉽게 쓰인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워낙 등장인물이 많아 낱낱이 파악되지는 않지만 다음에는 완역본으로 정독할 자신감을 얻었+다. 읽고 싶은데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책이라면 일단 쉽게 쓰인 책부터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기>는 오제 시대부터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총 3천 년의 총체적인 기록이라고 한다. 아무리 총체적인 기록이라고 해도 3천 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니, 얼마나 방대할지 잠시 아찔했다. 하지만 단순히 연대순의 서술이 아닌, 통치자 중심으로 한 기전체 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좀 더 흐름을 파악하는데 용이했다. 각 시대의 주요한 인물과 당시의 제도와 문물, 경제 실태, 자연 현상 등으로 분류하여 특징과 변동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시대의 연결은 잘 되지 않더라고 인물 중심으로 연결해 기억할 수 있었다. 사마천은 영웅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업가, 코미디언, 여성, 실패한 인물 들을 평가해 자신만의 역사관과 가치관이 함께 들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나서 여기저기서 들었던 왕들이 정립이 되었던 경험처럼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띄엄띄엄 알고 있었던 인물들이 정리가 되었다. 특히 여불위와 진시황제의 관계,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적 의미, 왕위를 세습하지 않았던 요, 순 임금, 토사구팽 당한 한신의 내막까지 상세히 알게 되니 그제야 사마천이 의도했던 그만의 역사관과 가치관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궁형을 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그런 비참한 운명 앞에서도 이 책을 썼고 그랬기에 인간의 삶과 죽음, 운명에 관심이 많았고, 그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기에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왜 <사기>는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 받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읽어보고 싶은 책이 되었을까? 평소에 어렵다 여기고 있던 터라 생각보다 술술 읽힌다는 그 자체에 중점을 두었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현재에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들을 마주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혜안을 얻으려는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록위마의 고사만 보더라도 진실을 은폐하고 황제를 우롱하는 신하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당시에만 일어난 일일까? 현대에도 이익을 위해 진실을 감추고 거짓 증언을 하고, 언론이 국민을 속이는 일도 허다하다. 황제가 사슴을 보고 사슴이라 말하자 ‘말’이라고 대답하는 신하들이 있다면 당당하게 ‘사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지금껏 그런 용기 있는 사람들로 인해 현재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믿는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거짓이 줄어들 것이며, 더딜지라도 건강한 사회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다 믿는다. 때론 그런 살마들을 외면하고, 귀찮아하는 일도 많지만 그런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거짓에 맞서는 일이라 생각한다. <사기>가 내게 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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