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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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인문학을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을 요즘 심심찮게 볼수 있다. 나 또한 그러한 인문학을 죽이는데에만 기여했지 살려본적은 없는 것 같다.

그랬기에 그러한 인문학을 알고자 아니, 인문학과 조금이라도 친해지는척이라도 하고자 이 책에 관심을 갖었다.

문외한인 인문학에 대해서 조금은 알 수 있을거라 생각했고 또한 인문학을 살리기 위해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오인하고 이 책을 접했다. 그러나 서문을 읽고부터 나는 이건 아닌데라는 느낌을 가지며 읽어나갔고 겉모습으로 판단한 이 책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희망의 인문학.

우리의 희망이 인문학이 아닌, 인문학으로 인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사례들이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문학' 이 이 책의 취지라면 이해가 가는가.

나 또한 이해하지 못했고 이상하게 흘러간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쳐서 무얼 어떻게 하자는 건지, 과연 인문학이 가난한 사람들을 먹고 살게 해줄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처음부터 쉴새없이 해나갔다.

그러나 그러한 취지의 실험, 클레멘트 강좌가 시작되고 그에 따른 변화를 보면서부터 나의 생각도 변화되어 갔고 왜 희망의 근원이 인문학이 아닌 인문학으로 인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지 또한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왜 하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며  인문힉이여야 하는가.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고대 아테네에서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성찰적 사고와 자율성을 몸에 읽히고 공적 세계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을 길러 내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를 어려운 의의로 들리지만 책을 쭈욱 읽어나가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과정과 그 후의 사례들을 보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교육이 결과를 위한 교육도 아니고 대학을 진학하기 위한 과정도 아니라고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생활고에 찌들어 안주해버리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시키므로써 자신의 존재를 생각해보며 어떻게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지 스스로의 성찰과 행동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최저의 극빈자들에게 과연 이 교육이 먹혀 들어갈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말만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불가능 하다는 일을 얼 쇼리츠와 주변인들은 해나간다.

그들이 첫 수강생들을 모집하고 교육해가며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는 모습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는 우울함을 동반하기도 했지만 서서히 그들을 이해시키고 참교육의 현장을 보여주는 모습에서는 희망이라는 가능성을 보았음에 틀림없었다.

한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클레멘트 코스의 과정을 한곳에서만 정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또한 미국에서만 하는 것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켜 나가며 우리나라에서도 올 1월에 방문 강연을 했다는 사실에 참으로 놀라웠다.

강좌를 연다고 해도 최고의 강사진들은 어떻게 소화해 낼 것이며 어떻게 꾸준히 교육시킬까 의아해 했지만 그들은 해낸다.

그리고 그 희망의 씨앗을 서서히 퍼트려 가고 있는 중이다.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기술하기 전에 저자가 다양한 인문학의 기초가 되는 것들을 역설하는 글들을 읽었을때의 그 당황함을 기억한다.

분명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친다고 하면 우리가 어렵게 생각하고 부유층들의 학문으로 인식된만큼 쉽게 알수 있고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그 세계로 인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들은 너무나 어려웠다.

생활고에 찌든 사람들이 과연 이 모든것을 이해하며 완전하게 교육을 마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은 이들이 인문학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르치려는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그들에게 이 의의를 어느정도 전달하고 학생들을 뽑았지만 실제로도 학업을 쉽게 포기하는 이들은 생활고의 어려움도 개인적인 사정들도 아닌 왜 내가 이것을 배워야 하는지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중도포기한 사람들이 많았다.

현재 내가 소크라테스를 배워서 무얼 하며 고대 그리스 시를 이해함으로써 어떻게 현실과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그들을 교육시키면서 지식의 홍수에서 방황하는 그들을 보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변화에 나도 몸부림이 쳐졌다.

나도 공부를 하고 싶다, 인문학을 배우고 싶다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무슨 생각이였는지 올들어 이상하게 공부를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과 함께 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순전히 관심만...) 근처대학의 인문학부에 지원을 해보았지만 고등학교때의 성적이 가관인지라 톡 떨어지고 말았는데 그러한 미련에 더욱더 불을 지르게 된 계기가 이 책이 아닌가 싶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을 정의할때 생활고에 찌들고 그 생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만 말했었는데 따지고 보면 그 가난한 사람들에 나또한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

현재 내가 가진 것을 보았을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치의 희망도 없고 무얼 어떻게 미래를 꾸려나가야 할지 아무런 준비도 없기 때문이다.

늦지 않은 나이라면 늦지 않은 26의 나이에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겉모습의 풍요만 좇는듯한 느낌을 가지면서도 자꾸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을 보면 아직 자아성찰이 덜 된듯 하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의문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고 그 의문의 풀림으로 인해 더더욱 그 안으로 뛰어 들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이 어디까지 뻗어 나갈지 알수는 없지만 나또한 가난한 이들처럼 인문학을 배움으로써 희망을 품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만나게 된게 아닌가 싶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게 휘둘려지는 힘과 무력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 단순히 가난으로써의 위험이 아닌 지식층들이 누렸던 위험성을 가질 수 있는 가치를 누릴 수 있게 된다면 저자의 뜻은 어느정도 이루어 진 것이리라.

그 뜻이 널리 널리 퍼지길 바라며 그 희망에 나또한 기대를 걸어본다.

 

p.s: 오타발견

 

p 361 운영되는 곳이 있을지도 무른다 -> 모른다 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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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관계 1
안도현 지음, 이혜리 그림 / 계수나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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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도토리는 떨어져 있는 길참나무잎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나뭇잎들의 위로를 받으며 그 나뭇잎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위해서 조금은 두려운 과정을 견뎌내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겨울이니까요.

그리고 나뭇잎과 도토리는 나무 위가 아닌 나무 아래서 새로운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도토리가 땅에 떨어져 두려움에 떨고 있을때 나뭇잎이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도토리 너는 끝까지 살아 남아야 한다고 그래야 다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관계가 무어냐는 도토리의 질문에 나뭇잎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건 서로 도와주면서 함께 살아간다는 거야"

 

라고 말입니다.

도토리는 그래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렇게 나뭇잎과 함께 땅위에서 있는데 어떻게 도우며 살아가야 하는지를요.

더군다나 나뭇잎은 겨울이 깊어 갈수록 썩기 시작했어요.

도토리는 자꾸 잠이 왔구요. 그것은 도토리와 나뭇잎의 새로운 관계를 위한 과정인데 도토리는 꿈이였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도토리는 아픕니다.

 

나무잎이 네 몸속에 길참나무 한그루가 있다고 말했을때 그 의미를 몰랐는데 그제야 그 길참나무가 도토리의 몸을 뚫고 나왔으니까요.

새싹의 솟음이 도토리를 아프게 했지만 도토리는 행복해 집니다.

그런 싹은 한두개가 아닌 숲 전제에서 솟아 올랐으니까요.

싹이 자라서 나무가 되면 나뭇잎이 말한 관계에 대해서 또렷이 이해하고 반갑게 맞이할 수 있겠죠?

도토리 싹이 잘 자라 주어야 나뭇잎과의 만남이 이루어 질테니까요.

 

우리가 생활하면 얼마나 많은 만남과 관계 속에서 살아 가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안도현님의 글과 이혜리님의 그림을 자꾸 자꾸 보다보면 도토리가 나이고 나뭇잎들은 수많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꺼예요.

비단 친구들 뿐만이 아닌 부모님이나 가족들도 떠올려 보며 소중한 사람들과 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그것을 지켜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떠오를 거예요.

분명 기분 좋은 일일꺼예요.

한번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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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무어 4 - 가면의 섬 율리시스 무어 4
율리시스 무어.피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 지음, 이현경 옮김 / 웅진주니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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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3권까지 너무 재미나게 읽고 4권을 기다렸나 보다.

3권의 리뷰를 보고 어떤 분이 댓글로 4권이 나왔다고 알려 주셨다.

그래서 바로 구입해서 읽었다.

그 전의 책과 조금은 디자인이 산뜻해진 4권은 읽는 재미가 더 쏠쏠했다.

 

율리시스 무어와 빌라 아르고의 비밀을 파헤치면서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드는 릭, 제이슨, 줄리아는 시계공 피터 다이달로스를 찾아 메티스를 타고 18세기 베네치아로 가게 된다.

시간의 문이 열리면서 그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피터를 찾아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킬모어 코브를 지키기 위해 피터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지금껏 아이들이 찾았던 열쇠 보다 시간의 문을 영원히 닫고 열 수 있는 첫번째 열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열쇠를 아이들이 먼저 찾아야 한다.

오블리비아 뉴턴이 먼저 찾아서는 안되며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피터의 마음을 흔들리게 해서 비밀이 새나가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미 많은 부분 털어놓았지만...)

 

베네치아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만남 그리고 모험은 여전히 흥미진진 했다. 시간의 문을 통해 이탈리아의 노숙자들이 빌라 아르고에 감으로써 네스터와 제이슨은 위험에 빠지고,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새로운 인물 미나소를 만나게 된다.

그도 오래전부터 네스터와 함께 시간의 문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고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나소의 도움으로 무사히 그들을 다시 베네치아로 돌려보내지만 아이들이 풀어가야 할 숙제는 많아진다.

과연 시간의 문을 지배하는 첫번째 열쇠는 존재하는가.

그 열쇠를 찾아 얼마나 많은 모험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아이들은 진실을 향해 나아가지만 킬모어 코브와 빌라 아르고를 지킨다는 사명을 갖기엔 너무 어리다.

그러나 그러한 어림을 무조건적인 무시와 동정이 아닌 진심으로 아이들을 걱정하기에 나오는 염려일테다.

 

네스터가 제이슨과 줄리아 부모님의 이사를 조금 늦춰 아이들이 시간을 벌 수 있게 해주었지만 이제 부모님도 빌라 아르고에 오셧고 아이들의 모험과 숙제는 더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 많은 의문들이 남아 있고 아이들은 의문들을 향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것이다.

오블리비아 뉴턴처럼 다른 목적을 위해 킬모어 코브와 빌라 아르고를 해치도록 두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그려졌기에 무능한 어른들의 모습이 많이 보여 그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이용하는 모습이 되어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느새 나는 그런 아이들의 응원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네스터와 미나소처럼 아이들이 걱정되고 미더워 보이지만 그들이 반드시 잘해낼거란 기대감이 아이들에게 힘이 되듯이 말이다.

 

피터를 찾아 비밀을 찾아 떠난 베네치아의 여행은 지금까지의 책보다 진행속도가 좀 느렸다.

모험과 공간의 뛰어넘음은 존재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긴장감과 후련함이 조금 부족했었다.

그에 반면 아이들의 한계구나, 부진함이구나 이렇게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이 아닌 과정이라 생각하고 편히 읽었던 것 같다.

여전히 다음 이야기는 궁금하고 밝혀질 비밀들과 진실들이 늘 우리에게 존재하는 정의 실현을 해주길 바라는 기대감이 있어서 였을까.

그러나 나도 아이들을 무조건 믿고 따라보려 한다.

그들의 모험과 어려움속에 나도 모르게 녹아들고 마음의 짐을 같이 나누어 보려 한다.

대리만족일 수도 있겠으나 아이들이 옳은 방향으로 향해 주길 바라는 마음일 테다.

 

이런 마음일때 아이들은 첫번째 열쇠를 찾아낼 것이고 킬모어 코브를 지킬 것이고 의리로 똘똘 뭉쳐 어른들이 했던 실수를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쭈욱 지켜 보는 수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있는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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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너와 나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
장폴 뒤부아 지음, 김민정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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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책을 펴들었다.

단숨에 읽어나가는 속도감의 반대편에는 우울함이 있었다.

요즘들어 프랑스 문학에서 느끼는 감정이 우울함이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하는 고독을 주저없이 털어내며 외며할 수 없게 만든다고나 할까.

깊은 밤 책을 통한 나의 고독과 우울함은 그렇게 찾아왔다.

평소 같았으면 덮어 버렸을 우울함이 이상하게 나를 이끄는 것 같았다. 나와 비슷해서 였을까. 아니면 대리만족을 느껴서였을까.

 

전업작가인 폴 페레뮐터가 들려주는 마흔여덞의 인생은 나이를 떠나 누구에게나 느낄 수 있는 절망,고독,방황,행복해지고 싶은 욕구등 모든 요소가 있었다.

부모님을 여의고 이혼당하고 써내는 책들은 시원찮고 그 기로에 서 있는 폴은 여행을 떠난다.

현실에서의 도피라 해도 되겠고 자신을 찾아서 떠난다고 해도 좋겠고 두려움과의 정면 돌파라고 해도 괜찮을 핑계거리가 그득한 여행이였다.

그러나 그의 핑계는 늘 아버지였다.

이 모든것이 아버지 때문이라며 그렇게 마음 속에서 아버지와 화홰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여행은 특별했다.

노동자로써의 여행이였고 아버지가 익사한 캐나다 북부 호수까지 찾아가게 되고 거기서 그는 아버지의 친구를 통해 아버지의 비밀을 알아 버린다.

그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였고 배신감이였고 또 다른 희망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더러운 숲'이라 불리우는 아무도 건넌적이 없는 숲으로 들어가 폐인이 되며 자신과의 싸움을 벌인다.

야생의 숲은 그의 마음처럼 거칠었고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서 이해까지 그리고 인간이 뱉어낼 수 있는 온갖 혐오스러운 환각상태까지 가나 그는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그리고 숲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된다.

몸은 처절하게 망가져 버렸지만 질긴 생명력을 발견하며 조금씩 자신이 누리게 될 행복의 발판을 만들어 간다.

그 첫 발판에는 동생이라는 혈육이 있었기에 그곳에 정착한다.

그의 방황은 끝났고 동시에 삶의 무기력함에서도 빠져 나오게 된다.

 

절망의 끝에서 만나게 된 새로운 희망.

어느 정도 삶의 여유를 누리고 있을 마흔여덞의 중년 사내도 그렇게 새로운 삶에 뛰어들어 성공한다.

자신의 삶을 되찾는 미로속의 탈출을.

 

그러나 그가 미국 남부와 캐나다의 호수를 여행하며 떠돌던 때의 기억들은 나를 최고의 우울함으로 몰고 갔다.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만남이라는 희망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쩍쩍 갈라지고 부르튼(훗날 자신의 손처럼) 사람들만 만나게 된다.

그러한 만남이 그에게도 충격이였지만 그런 만남을 지켜 보는 나는 두려움에 사로 잡힐 수 밖에 없었다.

낯섬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걸 헤쳐나갈 용기가 없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현재 내가 존재하고 있는 삶에서조차 두려움을 느끼고 한치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늘 나는 정지해 있었지만).

 

그러나 폴이 '더러운 숲'을 통과하는 과정을 보고 있자니 내게도 필요한게 저러한 막연함일까. 저라한 정면돌파일까라는 혼란이 일었다. 그러면서 폴이 부러웠다.

그는 부딪혔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으니까.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올 또다른 삶에 한발짝 다가갔으니까.

그러한 과정이 쉽지 않았기에 무조건적인 부러움은 아니였지만 내가 하지 못한걸 폴은 해냈기에, 거기다가 목숨까지 걸어 봤기에 그가 느꼈을 고통과 상실감을 맘껏 만끽한 셈이였다.

그가 느꼈을 과정을 나 또한 그대로 겪어 봤고 그가 맞이하게 될 행복의 가능성 또한 나도 느꼈다.

 

폴의 이야기가 나와 가깝게 한 정도가 아닌 나의 내면을 타고 흐르는 교감으로 넘쳐났다. 삶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오고 삶에 대한 의욕이 사그라질때 그 우울의 한가운데로 몰아 넣어 주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지만 나 또한 그 우울의 강을 건너온 기분이다.

어느날 내게 그러한 시련이 닥쳐 온다면 용기를 내어 정면돌파를 해보려 한다. 시련은 늘 기다리며 한꺼번에 부어줄 태세라서 쓰러지지 않도로 마음을 더더욱 굳건히 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우선은 정면돌파의 과정을 통함이 아닌, 내가 맞을 수 있는 행복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봐야 겠다.

결코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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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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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추리소설을 대표하고 거기다가 나오키상까지 수상한 작품이라고 했는데 작품의 전반을 차지하는 살인사건은 초반에 나온다.

잠시 멈칫 거렸다.

'이러면 재미 없을텐데' 하며 죽죽 읽어 나가긴 했지만 그런 의구심은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추리 소설을 너무 얕보고 있었다.

단순하게 읽기의 재미에 빠져 이시가미를 불안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고 형사들의 추적을 더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완벽한 은폐는 없다는 사실을 깨주길 바라면서도 그 사실에 대한 확신을 떨쳐내기 싫은 극을 달리는 두 마음이 소설을 읽는 내내 이어졌다.

반전.

이런 마음은 반전을 맞이하게 되면서 뒤집어지고 말았다.

내가 겪던 갈등과 혼란은 철저히 농락당한채 과연 나의 소소한 추리는 작다는걸 느꼈다.

나의 시각은 독자의 시선으로 가장 적합하다 느끼며 내가 책을 파고 들지 말고 그냥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그렇게 책을 덮었다.

하지만 이시가미의 결정과 선택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여운이 남았다.

마음이 저릿 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안타까움과 멍함.

여러가지의 감정이 솟아났다. 이시가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건 야스코에 대한 헌신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제목에도 나왔듯이 용의자 X의 헌신.

어쩜 그리 잘 들어 맞는 제목인지 모르겠다.

 

사랑을 넘어선 헌신이 왜 이시가미에게  일어났을까.

자신의 삶을 마치려고 했을때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였기에?

아님 운명적인 타이밍 때문에?

이시가미는 야스코의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 진짜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는 모든 가능성을 뛰어 넘었다는 걸 알수 있었다.

삶을 포기하려한 순간 야스코를 만나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왕 그녀를 위해 헌신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더라도 이시가미의 결정은 충격적이였다.

그녀에게 댓가를 바라게 될까봐 그리고 철저한 알리바이를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안타까움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

 

이시가미는 천재적인 수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머무르면서 삶은 정지하는 것 같다.

끊임없는 수학에 대한 열정을 쏟아 부어도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알아주는건 형사를 통해 만나게 된 대학동창 유가와 뿐이다.

이시가미와 비슷한 두뇌를 가졌지만 전공이 갈라지면서 자연스레 멀어지게 된 두사람의 재회는 그래서 더 안타깝다. 유가와는 이시가미의 단독범행의 흔적을 좇고 이시가미는 유가와를 속일 수 없어 자수를 고백한다.

그 고백이라고 해봤자 그 둘만의 대화라 짐작만 했을 뿐이였지만 유가와가 느꼈을 안타까움, 연민은 그대로 전해졌다.

이시가미의 마음은 어땠을까.

유가와를 만남으로써 틀어져버린 은폐와 버릴 수 없는 양심은 허물어 내리지만 그래도 야스코에 대한 헌신은 남았기에 그걸로 위로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헌신이 물거품으로 느껴지는 야스코의 자수는 이시가미를 사랑이 아닌 그 외의 감정이라 이시가미가 더 안쓰러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시가미는 그 모든 과정과 결과에 야스코에게 부담은 주기 싫어했다.

왜 그런 욕심이 없었겠냐만은 자신을 절제하는 모습 앞에서 더 이상 할말이 없어졌다.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감정의 결과는 엄청났지만 이시가미의 열정에 찬사를 보낼 수 없는 현실은 잔인할 정도다.

사랑을 넘어 헌신까지 가는 이시가미가 처연해 보이는건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만난 추리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은 추리적 요소와 인간미까지 갖추고 있어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 할만하다.

과연 인간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은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러한 미덕과 양심을 나는 갖추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극단적이긴 했지만 사랑을 하려면 이시가미와 같은 열정과 마음으로 하라고 스스로에게 자극을 주는 시간이기도 했다.

과연 내게 그러한 내면의 힘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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