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브 스토리 1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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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의 매력은 현실을 잊게 해주는 모험과 정의가 아니겠냐며 얕은 지식을 드러내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브레이브 스토리는 이러한 나의 예상을 깨며 평범한 초등학생 와타루를 등장시키면서 오히려 현실감을 부각시켜 새로운 세계로 이끌고 있었다.

그래서 와타루가 겪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의 출연이 꿈인지 생신지 내가 분간을 못할 정도였다. 브레이브 스토리를 읽다가 잠들면 꿈 속에서 나는 와타루가 되었고 깨어 났을땐 책과 꿈속을 헤메는 나를 발견하고 있었다.

 

환상의 세계 비전의 등장은 말 그대로 환상임에도 이렇듯 초입부터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들어가야만 하는 비전을 평범한 와타루가 왜 들어가야만 할까?

본격적인 비전의 모험기를 2권에서 시작됨을 알리며 끝나지만 와타루가 비전으로 가야하는 이유를 1권에서 처연할 정도로 세세히 보여준다.

그랬기에 현실감을 느끼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와타루의 현재는 '남쪽으로 튀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성장의 진통과 그로 인한 모험이 시작되었기에 양쪽의 세계를 허우적 거리면서도 와타루가 비전으로 가는 목적이 분명한 것처럼 나 또한 읽는 이유가 분명해져 가는 느낌이였다.

 

와타루 부모님의 이혼에 어떠한 결론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와타루는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어떻게 헤치며 뒤집을 수 있을 것인가. 과연 그것들을 바로잡는 다고 해서 와타루와 와타루의 부모님은 모두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단순한 운명의 바뀜이 아닌 목숨을 걸고 잃었던 것을 다시 되돌려 놓고 싶다라고 강하게 염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열리지 않는 요어문. 그 문은 10년에 한번 열린다.

와타루가 부모님의 이혼으로 힘들어 하고 엄마 또한 서서히 망가져 가고 있으니 그 문이 나타났겠지만 어린 와타루에게 그것은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붓는 모험인 것이다.

자기보다 더한 상처를 안고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이미 비전을 여행하는 미쓰루를 통해 모험이 펼쳐질 테지만 분명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우연히 들어간 비전의 세계는 만만치 않았고 희망의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쫓겨났기 때문이다.

운명의 탑에서 와타루는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운명을 바꾼다고 한다면 그것은 와타루 혼자만 생각하는 잃어버린 무엇일 것인가 아님 와타루 가족 모두가 바라던 것일까.

그 점이 궁금하다.

와타루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정도 나만의 판단이 생길 것이고 또한 와타루가 처한 상황에서 또 다른 이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운명을 다 던졌다고 하지만 가족의 해체야말로 12살 와타루에게는 가장 큰 고난인 것이다.

부모님이 자신을 엄하게 다루는 것, 사고 싶은 게임 cd를 살수 없다는 것 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다.

너무나 평범한 아이 와타루.

그러나 한순간에 운명의 고난에 허덕이며 환상같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공사가 중단된 학교 근처의 가건물에서 유령을 보았다는 수근거림은 와타루에게 닥쳐올 고난의 복선이였고 요어문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자신에게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목소리, 정체불명의 노인, 그리고 비전을 여행한 미쓰루는 우연이 아니였다.

자신은 열심히 나름대로 삶을 꾸려가며 살아가고 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은 교묘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 자신의 상상과 바램이 보태져 나타난 요어문이 있다면 얼마나 많은 생각과 망설임이 교차할까.

와타루도 그러한 운명을 탓하며 망설임을 느꼈지만 과감히 나아간다. 궁지에 몰렸다기 보다 자신에게 처해진 상황에 맞대응한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랬기에 다음권에서 펼쳐질 와타루의 모험이 궁금하면서도 망설여지는건 이러한 이유일테다.

맞대응에서 오는 처연함, 나빠질 수 없는 상황속에서의 와타루의 용기가 나 또한 피할 수 없는 순리처럼 다가오는 가운데 와타루의 지지자를 자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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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선인
이토야마 아키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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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바다의 선인 카츠오를 선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바닷가에 아늑한 집에서 하루 하루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꾸려가며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그것보다 아름답고 평안한게 어디 있을까.

나는 하루 종일 집과 바닷가를 뒹구며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며 수영을 하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해주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상상만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그러나 그건 나와는 거리가 멀기에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피해 사는 사람 같다는 선인. 카츠오도 복권이 당첨되기 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였을 것이다. 복권으로 인해 당분간 먹고 사는데는 문제가 없었기에 회사를 그만두고 조용한 바닷가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도시 사람들에겐 그가 무료해 보일지 몰라도 카츠오도 나도 만족할만한 상황이였다.

거기다가 사랑하는 사람까지 만났으니. 덤으로 별 도움 안되는 신神 판타지까지.

 

옮긴이는 판타지의 존재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판타지의 등장은 생뚱맞고 어색했다. 신이라는 생각은 전혀들지 않고 카츠오의 집에서처럼 식객이 더 어울리는 역할이였다. 대부분 어디선가 본 것 같아서 알고 있기도 하지만 카타리기처럼 판타지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 부분에 큰 의미부여를 둔 것은 아니지만 판타지는 지나가는 바람 같았다. 무얼 해줄 수 없기에 신이 존재한다며 엉뚱한 말과 행동을 서슴치 않고 전혀 신 같아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러한 판타지는 카츠오, 카타리기, 카렌에게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카츠오가 가지고 있는 의문처럼 모두는 판타지를 자연스레 잊기도 하고 자연스레 받아 들이기도 한다.

카츠오가 시력을 잃은 후 바닷가에서 첼로를 켜고 있을때도 말이다. 카츠오에겐 판타지의 출현이 카린처럼 자연스럽다.

그녀가 떠나고, 그녀와 오랜시간 같이 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후에도 늘 기억 저편에 살아 있어 자연스레 꺼낼 수 있는 것처럼 판타지는 더 쉽다.

대화하기도. 그리고 기억하기도.

 

카츠오는 카린의 죽음 앞에서도 슬픔의 티를 별로 내지 않았지만 그는 마음속에 그녀, 그리고 그녀와의 추억을 깊이 담은 것 같다.

그 추억이 그의 전부가 되어 버린 첼로 속에 봉인 되어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카타리기는 카츠오에게 다가오고 있다.

오래전부터 카츠오를 좋아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카츠오도 알기에 그녀에게 좋은 답을 말해줄 수 없지만 그녀는 오랜시간 마음의 방황뒤 카츠오를 보러 온다. 아마 그가 눈이 멀었다는 사실에도 개의치 않고 그를 여전히 사랑할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지 모르나 시간이 흐른 후 좋은 모습을 기대해도 좋을 듯 하다.

단지 시간이 흘렀다는게 변화했을 뿐 새로운 그들의 변화는 충동적이지 않을 것이다.

 

판타지의 등장, 카츠오의 삶이 독특하게 다가왔지만 카린의 죽음 카타리기의 마음에 있는 카츠오를 향한 변치 않는 모습 등은 충분히 식상한 내용이였다.

여기 저기에서 접붙인 듯한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였다. 너무 뻔한 내용들에 익숙해져 있고 왠만한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는 약아버린 나일지 모르지만 식상함뒤에 오는 무의 감정은 뜨뜻미지근 했다.

그러나 카츠오의 생활은 부러웠다.

통장의 잔고가 아닌,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아닌 복잡한 세상을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사랑하고 자신을 새로 발견해가는 모습이 부러웠다.

나는 그럴만한 용기가 없다.

그렇기에 그의 용기를 부러워할뿐 '당신은 참 식상해'라고 말할 수 있는건 용기가 아닐 것이다.

나를 향한 자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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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잊지 못할 일 -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59인이 말하는
도종환 외 지음 / 한국일보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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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59인이 말하는 평생 잊지 못할 일이라...

그와 비슷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101인의 가상 유언장이라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인들이 쓴 글을 엮은 것이였다. 그러나 그 책을 읽고 적이 실망하고 말았다.

유언이라는 낯섬과 주제가 정해진 탓인지 가상이라는 제목이 있음에도 너무나 가상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한 안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그와 비슷한 59인의 이야기라.... 읽기도 전에 짜증이 났고 조금 읽어본 후에도 도저히 마음이 가질 않아 방치해 두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 시간이 흐른 후 힘없이 퇴근해 집에 돌아와 책상을 보니 읽을 책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마음이 쓸쓸하고 무기력감이 밀려온 탓일까. 억지로 밖에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한 '내 평생 잊지 못할 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짜증과 억지가 아닌 마음을 열어 놓고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마 나의 마음상태와 가장 잘 맞았기에 그러지 않았나 싶다.

연말에다 새해를 맞이해야하는 부담감으로 나는 계속 의욕을 잃은 상태에다 무기력에 삶의 의미조차 잃어버린 날들의 연속을 마주 하고 있었다.

무엇으로도 마음이 달래지지 않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가시는 늘어만 가고 그럴때마다 거칠게 불평을 내뿜는 나였다.

그러한 상황이였기에 그렇게 보기 싫어 하던 이 책을 꺼냈으리라.

그냥 읽고 해치울 생각에 집어든 책이였는데 나는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의 감정이 격해 있었고 연속으로 마주한 마음찡한 사연들이라서 그랬겠거니 해도 '감동은 기적처럼 온다'에서 위험에 처한 회사를 위해 방패막이를 해야 하는 씁쓸함을 안고 있는 사장 앞에 직원들이 사재를 담은 통장을 내민 것이다. 평상시의 나라면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사연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였을 텐데 나는 왜 눈물이 났던 것일까.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직원들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서 직원들이 보여준 믿음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나는 현재 내가 잃어버린 가장 큰 것이 믿음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믿음이 어느 순간 사라져 나를 찔러 오는 가시에 저항하고만 있는 나를 한발짝 벗어나 바라 보게 됐기 때문이다.

 

59인이 전하는 사연은 다양하고 다른 느낌을 안고 있지만 그들이 그 일들을 잊지 못하는 것은 단 하나다.

상대방이 내게 보여준 신뢰때문이다. 가족이나 낯선 사람 그리고 다른 세계에서 마주하게 된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발견했을때 그들은 마음 속에 그 일을 각인시킨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도 많아 역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이 신뢰에 대한 마음을 대신 품어 버린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겠노라고 다짐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대부분 성공한다. 그러나 어렵고 힘겨운 시절을 바탕으로 성공을 한 사람들만의 이야기라 괜한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빵빵한 학력과 이력을 살펴보건데 이런 사람들의 잊지 못할 일만이 감동을 주는것일까. 그들은 나같은 사람과 달라서 내가 무심히 지나쳐 버린 일들을 보며 깨달아 성공한 것일까라며 억지떼를 써보아도 나의 거부감은 열등감에서 오는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내가 느꼈던 신뢰에 대한 따뜻한 마음은 어느새 이렇게 약아빠진 마음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나는 아직 신뢰를 줄지도 받을지도 모른다.

신뢰는 주고 받는 것이 아닌 만들어가며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의 신뢰는 너무나 얇고 얕다.

내가 흘렸던 한방울의 눈물은 얇은 나의 마음을 적셔 단단하게 해주는 시초라고 생각하고 싶다.

 

59인의 잊지 못할 일들이 과연 평생이란 말을 집어 넣을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함인가, 대단함인가를 논하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내가 건진 이 마음자세와 다짐을 굳건히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 마음속에 있는 불신을 깨트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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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네야 테르시 지음, 유혜경 옮김 / 책씨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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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10대들의 모습을 다룬 소설을 보면 왜 내가 10대때는 이러한 소설을 많이 접하지 못해 자극을 받지 못했을까라는 아쉬움이 든다.

10대때의 나의 독서를 살펴보면 그냥 닥치는대로 읽었고 그나마 자각하고 골라 본 것은 10대 후반에 읽은 문학 조금이 전부다.

대부분 크게 공감이 가지 않고 내 수준에 맞지 않는 독서였다는게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이다.

거창하게 10대의 독서를 운운하는 것은 이 책의 주인공 가브리엘 때문이다.

 

17살의 나이에 갑자기 비워진 아빠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해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고통의 과정의 겪으며 자신의 내면에 가까워지는 가브리엘이 나는 부러웠다.

아빠를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그가 부럽다는 말이 얼핏 잔인하게 들리 수도 있으나 아빠를 잃고 아빠가 어떠한 떠남을 강행했든 어떠한 과정이 있었기에 아빠를 원망했든 결국은 아빠를 소중한 사람으로 되돌려 놓는 마음이 기특해서이다.

자신도 의아해하는 엄마와 아빠의 바닥을 드러내면서도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을 봤으면서도 가브리엘 자신도 그렇게 아빠를 사랑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갑자기 자살을 한 아빠에게 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고 또한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에 편지를 쓰기로 한 가브리엘.

여기에는 아빠에게 쓴 편지와 자신의 일기들로 채워져 있지만 17살의 가브리엘이 가질만한 성숙을 뛰어 넘는 내면이였다.

때론 유치할때도 있었지만 쉼 없이 고뇌하고 자신이 처해진 상황을 어떻게든 헤쳐 나가려는 그의 내면은 무르익음의 농도가 짙었다.

 

아빠에 대한 수 많은 의문들과 엄마에 대한 짜증, 그리고 현실적인 사랑과 모순적인 사랑의 경험 속에서 똑부러지게 나아기진 않지만 깊은 늪 속에서 서서히 뭍으로 올라오듯 그 과정은 적나라하다.

그의 사고와 마음의 드러남은 일기와 편지를 통해 거짓을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자신도 아빠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할 수 없었다고 했듯이 그의 행동도 서서히 자신이 이끄는 진실을 향해 가고 있다.

 

엄마에게 아빠의 죽음의 전반상황을 듣게 되고 엄마, 아빠에 대한 고통과 분노의 감정 속에서도 이젠 엄마와 더 가까워져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동안 아빠와 너무 다정해서 엄마가 질투심을 느낄 정도였으니 이젠 그러한 아빠가 없고 아빠에 대한 배신감이 느껴져도 결국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아빠니 엄마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억지로가 아닌 스스로의 생각으로.

늘 일에 찌들려 아빠와 가브리엘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 해 주지 못하고 아빠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리던 엄마도 가브리엘 에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가브리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와 가깝게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둘에겐 미래가 있잖니. 안그래?" - p.208

 

아빠의 죽음으로 엄마도 가브리엘도 커다란 고통과 혼란스러움 가운데에서 헤메였지만 이젠 각자의 미래이면서도 공동의 미래이기도 한 그들의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정체성을 찾지 못해 혹은 자책감에서 나오는 혼돈 속에서 삐뚤어 질 수도 있었지만 가족의 소중함과 늘 곁에 있어주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해주는 알레한드라의 품으로 안착하려는 마음이 애닯게 다가왔다.

책을 읽는 도중에는 이러한 느낌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가브리엘의 토로를 보고 있자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착각이 일 정도로 내면의 혼란을 다 끌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끌어 냈다면 힘들다, 살 맛이 안난다로 끝내 버렸을 그 무언가를 혼란스러움 그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나는 10대 때 그런적이 있었던가. 20대인 지금의 나는 나를 더 감추고 살고 있진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면 가브리엘의 혼란을 부러워하며 그의 안착됨을 기특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 싶다.

10대의 나의 혼란은 철저히 내면 속에 감추어져 있었고 20대인 지금의 나는 태연히 마음을 드러내지 않음에 능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모습을 찾아야 하는건 가브리엘이 아니라 가브리엘을 통한 내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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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연애는 왜 그 모양이니?
로리 고틀립 외 지음, 윤정숙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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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보며 잠시 나마 '나의 연애는 왜 이 모양일까' 라고 생각해 봤지만 그렇게 논할만한 연애담이 없다는 것이 참담하게 다가왔다.

연애를 안한지가 근 3년이 되어가고 그나마 3년전의 경험도 내 인생에서 한번뿐인 연애였으니 갑자기 이 책을 마주하기가 고약스러워진다.

한심하고 못된 나를 만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 혹은 스스로 위로해야 할지도 모르는 처연함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씁쓸함이 책을 마주하기 전부터 나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첫 대면부터 이렇게 책을 냉정하게 바라보지 못했다.

주관적인 생각을 덕지 덕지 붙여 책을 펴들고 보니 위험했다.

이 책의 저자의 문체가 지극히 자조적이였기 때문이다.

he said, she said로 남,녀의 상황 대조를 실어 놓았지만 내가 책을 읽기 전부터 빠져들었던 자괴감의 늪으로 끌고가기 충분할 정도로 씁쓸함이 많았다.

거기다 정서의 낯섬이라니...

솔직담백한 고백 속에서도 그들의유머, 그들의 생각을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를 쉴새없이 되뇌이게 되는 동떨어진 느낌은 연애를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무조건 동조하기에는 무리가 갔다.

오히려 당신들의 연애는 왜 그 모양이냐고 진실됨을 찾아 보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의 진실을 찾는단 말인가. 사랑의 진실? 그들이 계산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거짓을 향해 갔다는 생각이 든 것도 아니다.

단지 나는 현실 속으로 뛰어 들지 못했고 그들은 뛰어 들어 부딪혔다는 차이만 있었을 뿐.

그래서 그들의 부딪힘을 지켜보며 혀를 차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솔직하게 경험담과 자신의 생각을 털어 놓아서 좋긴 하지만 그래도 연애에 대한 환상을 조금이라도 품고 싶다고 이렇게 다 드러내는 건 싫다고 말이다.

이런 나의 모습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연애의 쓴맛을 잊은 후에 품은 환상이 너무나 달콤한 것을...

 

이 책에서 남,녀의 만남에서부터 사귀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의 많은 부분들 속에서 분명 연애의 환상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연애를 자꾸 실패했기에 그러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완벽한 소울 메이트는 없다는 것을 보고도 난 왜 이들의 말을 믿고 싶지 않고 당신들이 진지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아직은 너무나 개방적인 그들의 사고방식과 연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리라. 당신들과 같은 솔로이지만 그렇게 재고 빼고 더하는 복잡함보다는 운명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도 못하면서 당신들의 연애는 머가 그리 복잡하냐고 짜증만 내고 있는 것이리라.

 

자조적인 서술도 싫고 정서의 낯섬에서 나오는 유머도 어색하고 무엇 보다 환상을 갖지 못하는 드러남이 거북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솔로일 수 밖에 없다고 비난을 던져와도 조금은 위로를 기대했던 나는 심하게 풀이 죽어 버렸다. 이런 식으로 연애를 해야 한다면 연애와 사랑은 하고 싶지 않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이런 연애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함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좀 더 유쾌하게 써내려가지 못한 그들의 연애, 좀 더 아기자기하게 꾸미지 못한 책의 구성등이 조금은 아쉽게 다가왔다.

그 아쉬움이 왜 너의 연애는 그 모양이냐고 경종을 울려주는 자극일 수도 있는데 그 자극을 그들의 연애담으로만 돌려 버려서 민망하기 그지 없지만 내게는 그들을 비난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나는 연애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고 당신들처럼 계산적인 건 싫다고 말하면서도 어느새 조건주의자가 되어버려 그 조건 속에서 연애의 환상을 품고 있는 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로는 사랑만을 지향하면서 어느새 사람이 아닌 조건으로 판단하는 속물근성을 가져버린 나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다.

정작 중요한 나는 제대로 갖추어 놓은 것이 없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조건이 필요없는 불꽃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것인지 모르면서도 현실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나를 거둬들이지 못한다.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빛깔 없는 사랑을 꿈꾸었던 것일까.

책에 대한 수 많은 푸념을 쏟아 놓았지만 분명 이 책을 읽기 훨씬 전부터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씁쓸함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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