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중요하고 믿을 수 없게 친근한 경제 - 경제 뉴스 앞에 작아지는 이들을 위해
베스 레슬리.조 리처즈 지음, 임경은 옮김 / 이콘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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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포기하지 말자! 어렵다고, 나와 상관없는 얘기라고 치부하지 말고, 이 책으로부터 친절한 안내를
받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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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씨의 친구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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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영원하다라는 말을 믿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영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오랫동안 유지 될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던 관계는 분명 있었다. 그래서인지 띠지에 적힌 소중한 관계도 사소한 균열 하나로 간단히 깨져버린다.’라는 말이 참 씁쓸했다. 나이가 들면 좀 덜할 줄 알았는데, 늘상 익숙해지지 않는 건 어떻게든 얽히게 되는 관계다. 어떤 관계든 유지가 되려면 노력해야 하고, 시간을 쏟아야 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겨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주인공 미우라 씨가 하우스 셰어를 하며 친구와 함께 지내는 모습에 조금 놀랐다. 타인과 한집에 살면서 잘 지내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인 것 같기 때문이었다. 미우라 씨가 친구와 함께 대화하고, 동네 구경을 시켜주는 부분에서 이 친구는 참 말이 별로 없네.’라는 생각을 하며, 미우라 씨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근본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면서 책 제목이 자꾸 마음에 걸려 나중에 사이가 안 좋아지는 건 아닐까 계속 걱정을 했다. 사이가 멀어진 친구는 다른 사람이었지만 미우라 씨의 친구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첫 부분으로 돌아가 몇 번을 다시 읽었다. 미우라 씨의 친구가 로봇이었다니! 사람과 너무 비슷해서 로봇이라고 의심하지 않았고, <친구>라는 작품이 미우라 씨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복기하면서 저자는 어떻게 이런 작품을 썼는지 놀라웠다.

 

저자의 작품을 많이 읽어 온 독자라면 이번 작품이 낯설었을 것이다. 나 또한 저자의 만화를 모두 소장하고 있는 터라 비슷한 느낌의 작품일 거라 여기고 편한 마음으로 책을 꺼내 들었다. 번역가도 스포 금지를 할 정도였으니 나도 친구의 정체를 밝히지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다. ‘친구의 정체는 반전이긴 하나 그 친구가 로봇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면 이 작품의 또 다른 의미들이 묻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를테면 이 작품을 만든 카지 씨의 의도와 미우라 씨와의 설레는 로맨스가 그랬다. 물론 백만 엔이나 하는 로봇의 가격도 그렇고, 관처럼 생긴 박스에(적절치 않은 표현인 건 알지만!) 배달되어 온 모습이나, 초기설정 된 네 개의 단어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낯설고 무섭기도 했다. 왜 꼭 로봇이어야 했는지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같은 직장 동료인 미우라 씨와 카지 씨가 서로가 엄청난 걸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서서히 호감을 갖는 과정에서 괜히 애가 타고 설레기도 했다. 서로가 언제 알아차릴지 궁금했지만 끝까지 밝혀지지는 않았다. 로봇을 만든 작가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난 여동생의 현재 모습을 추측하며 만든 <친구>라는 작품의 의도를 다양한 곳에 가보길 원할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하는 미우라 씨의 모습의 시선도 신선했다. 감정이 없는 로봇이고, 상대방의 표정과 눈동자를 파악해 네 개의 단어를 말한다고 했지만 그런 로봇과 피크닉도 함께 가고, 산책을 하는 모습과 그 소식을 듣고 좋아하던 <친구>의 작가의 반응에 그제야 조금 공감할 수 있었다. 여동생이 어릴 때 세상을 떠났으니 현재 이런 모습으로 세상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해했다. 그런 의도를 미우라 씨가 공감해 주었고, 그랬기에 함께 살며 친구처럼 대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로봇이 등장했으니 먼 미래 사회를 말하는 것 같고, 사람과 너무 비슷한 모습에 놀라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형태만 다를 뿐 인공지능이나 가상 세계는 우리 주변에 이미 상용화되어 있으며, 어쩌면 먼 미래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로봇을 인간의 어느 영역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고찰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나중에 미우라 씨가 로봇을 작가에게 다시 반품한 것도, 작가가 전액을 돌려준 것도 결국은 사람때문이라고 느꼈다. 애인이 생긴 미우라 씨, <친구>라는 작품이 진정한 친구를 만나서 행복한 경험을 하고 네 개의 단어를 모두 말한 것으로 <친구>를 만든 작가의 의도는 모두 발현된 것이 아닐까? 세상을 떠난 여동생이 다시 돌아올 수 없듯이 현재 누려야 할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했다. 그 관계에 로봇이 방해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매개물이 단지 사람과 너무 비슷해 놀랍고 무서웠던 로봇이었을 뿐, 복잡다단한 감정을 지닌 인간이 로봇보다 더 자유로운 존재였다고 말이다.

 

저자의 만화 데뷔 20주년이라는 사실도 놀랍고, 기념비적인 작품에 이런 주제를 쓴 것도 신선했다. 저자의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섬세한 감정 묘사와 타인과 자신에 대한 관찰 때문인데, 로봇을 등장시켰다는 것도 사회적 흐름을 관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면서 좀 더 친구라는 의미를 확장시켜 본다. 인간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많은 자연적 조건을 존중하는 것. 그리고 인간과 동등함의 기준을 더 확대시킬 때 좀 더 미래지향적인 사회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의 미우라 씨와 <친구>의 어색하지 않은 다정한 모습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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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개혁가 배틀 LIVE 역사청문회
이광희 지음 / 주니어태학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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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부족하다고 느낀다. 모든 공부가 그렇지만 한 번 공부해서 모든 걸 알고, 딱 정리되는 게 아니다. 역사는 기본 틀에서 계속 지식이 덧대어지고 쌓여서 나만의 것으로 되기까지의 과정이 길다. 그래서 지식을 재미있게 쌓아주는 책을 만나면 눈이 번쩍 트인다. 이 책이 그랬다. 『조선 최고의 개혁가 배틀』이라는 제목 답게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 7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이었지만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정립해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책을 읽는 동안 ‘최고의 개혁가’가 누구인가를 찾기보다 그 시대의 인물들에 깊숙이 들어갔다. 다름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때로는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고 개혁을 외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근본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이나 기득권층의 이익에 힘을 보태기보다 약자의 편에 섰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약자의 편에 서는 방법과 문제를 해결해내는 과정에 모두 동조할 수는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이들을 ‘개혁가’로 기억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이들을 ‘개혁가’라고 부를 수 있을지 판단은 유보하더라도 이들이 이룬 개혁의 내용은 짚고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여립은 ‘천하공물 하사비군’ 즉 천하는 공공의 것이기 때문에 정해진 주인이 없고,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기 위해선 현명한 임금이 필요한데 이씨 왕조가 왕위를 이어가는 조선 시대에서는 왕을 갈아치울 수 있다는 생각은 반역으로 몰리기에 충분했다. 정여립의 주장은 힘없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좋았다. 신분의 구분 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사는 세상 ‘대동’을 꿈꾸었고, 양반과 노비가 함께 어우러진 대동계를 만들어 일본군을 물리치기도 하지만 사병 집단이 반란군이 될 수도 있다는 선조의 의심 아래 결국 정여립은 자결하고 만다. 정여립 사건은 서인이 주도적으로 조사했는데, 이때 반대파인 동인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숙청된 사람이 천 명이 넘는다고 하니, 정여립에 대한 평가가 갈릴 만도 하다. 하지만 그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는 사실만은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그의 행보를 지켜보는 내내 마음이 착찹했다.

허균의 마지막 말 ‘할 말이 있다’를 듣고 순간 익숙한 말이어서 내 책장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할 말이 있다』라는 허균의 책이 있었고, 이미 읽고 리뷰까지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허난설헌의 동생으로만 알고 있었던 허균 덕분에 신분차별의 안타까움을 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지배층에 커트라인을 두고자 첩의 소생을 서자, 얼자로 구분하고 배제하면서 ‘인재가 없다’라고 한탄하는 것에 나 역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제우 역시 하늘 아래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동학을 만들어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사상 역시 과정과 결과의 방향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신분 차별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분제 만큼이나 백성을 힘들게 했던 건 세금이었다. 그렇기에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해야 한다는 김육의 간절함은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다. 이런 마음을 지도자가 갖고 적극적으로 이행해 주면 좋으련만! 공납의 폐해를 안타까워하며 죽기 직전까지도 대동법 시행을 위해 애썼지만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들에 의해 반대에 부딪혔다. 또한 상공업의 중요성 주장했고 수레와 화폐 사용을 위해 노력했지만 사대부들의 인신공격만 있을 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들의 잇속만 차리는 정치인들이 많아 고달픈 건 백성뿐이라는 걸 더 실감하게 되었다.

성리학을 중요시하는 조선에서 주자의 《중용》을 윤휴가 다르게 해석했다는 이유만으로 송시열과 사이가 벌어지고, 두 차례의 예송 논쟁을 통해 둘의 사이가 완전히 벌어진다. 또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청의 풍물과 제도를 자세히 묘사하고,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문체로 자신의 생각을 과감히 드러냈으며 성리학적 고전 문체에 반한다는 이유로 ‘바른 글’을 지어 올리는 처분을 내린 정조. 그런 정조를 ‘우리 임금님은 너무 바른 게 문제야. 이제 문체까지 바르게 하라고 하시네.’ 라며 흉을 보는 모습에 풋 웃음이 났다. 정조가 막으려 했던 패관소품 문체는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고 나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토지 제도 개혁을 위해 무려 18년 동안 《반계수록》을 쓴 유형원이 주장한 균전제와 인재 선발 제도를 보면 정말 앞서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교육 제도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 인재 선발 과정을 보면 과거제의 폐단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든든한 인재가 많아야 나라가 안정된다는 생각이 실행되었으면 참 좋았을 것 같다.

7명의 개혁가 이야기를 만나면서 현재 우리 사회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개혁이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사회 문제를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해 왔다. 물론 올바르지 않은 개혁으로 인해 사회가 오히려 도태되는 상황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많은 사회구성원이 함께 올바른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논의하고 함께 참여한다면 진정한 개혁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참여를 미루지 말고 나부터 사회의 흐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사람이 많아질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건강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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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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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편 「바빌론의 탑」을 읽고 내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미쳤다!”였다. 좀 격한 표현이긴 해도 당연 ‘놀랍다’라는 뜻이었다. ‘이 작가는 천재구나!’를 첫 단편으로 경험하는 책을 만난 게 얼마 만인지! 지금은 새로운 개정판이 나왔지만 구판으로 가지고 있는 이 책은 정확하게 13년 전에 선물 받았다. 출판사에 입사해서 맞은 첫 생일에 팀장님이 선물해 준 책이다. 그때도 엄청난 책이라고 말했었는데, 이상하게도 당시에 순수고전문학을 읽던 나에게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제목과 표지는 영 끌리지 않았다. 그래서 묵혀둔 게 13년이 지나버렸고, 오히려 차기작인 『숨』을 읽는 중에도 이 책은 꺼낼 엄두도 내지 않고 있다가 첫 단편을 읽었는데 정말 엄청난 책을 묵히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완독하고 났을 때 느낌은 13년 동안 잘 묵혔다는 것이었다. 물리학과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한 저자가 그려낸 과학 SF를 이해하기 위한 발판이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면 질색하던 내가 『코스모스』를 읽고 어설프게나마 이런저런 과학책을 읽어둔 덕분에 이 책에 나오는 이론들과 세계를 거부감없이 받아 들이다 보니 저자가 더 천재라고 느꼈다. 그리고 저자가 한 작품을 쓸 때마다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도 알 것 같았다. 과학적인 이론을 내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더라도 어떤 작품이든 흠잡을 데가 없었다. 특히「바빌론의 탑」과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바빌론의 탑」의 하늘의 천장이 있다는 상상력과 무거운 층이면서도 그 무엇에 의해 지탱되지 않으며, 천장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는데도 탑을 쌓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게 여러 의미로 낯설지 않았다. 당연히 성경의 바벨탑을 연상시키는데 하늘의 천장을 파고들어 갈 고용된 광부 힐라룸의 시선에서 보여주고 있어 마치 내가 그 안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자가 만들어 놓은 탑의 내부를 내가 또 다른 상상력을 덧대어 새로운 탑을 만들어 가는 것 같았다. 나는 폐쇄공포증과 고소공포증을 경험하는 것 같은데도 그 안에서 태연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탑이 나중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데서 오는 또 다른 공포도 있었다. 신비감과 기괴함이 한 데 섞인 탑의 내부를 타고 올라갈 때 결국 하늘의 천장은 무너졌고 홍수가 일었다. 그리고 힐라룸은 극적으로 천장에서 위로 헤엄쳐와서 하계(下界)의 동굴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가 바깥으로 나와 깨달은 건 부드러운 점토판 위에서 그림이 조각된 원통형의 인장을 대고 굴리면 원통이 남긴 자국이 하나의 그림을 형성하는 원통 인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세계가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야웨의 창조는 밝혀짐과 동시에 숨겨져 있으며, ‘인간은 우주에서의 자기 위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저자는 원통 인장이란 표현이 이 작품의 우주가 양의 곡률(positive curvature)를 가지는 4차원 시공연속체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라고 했는데 힐라룸을 통해 보여주는 소설의 결말이 얼마나 정교한지, 얼마나 흥미롭고 저자가 대단한지 그저 소름이 돋았다.


「이해」라는 작품은 뇌손상을 입은 레온이라는 남자가 임상실험에 참여하는 데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지능이 올라감을 경험한다. 그리고 치열한 두뇌 싸움 끝에 ‘나는 <말>을 이해하고 그것이 작용하는 수단을 이해한다. 고로, 나는 붕괴한다.’라는 끝맺음 또한 엄청났다. 용두사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소재로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마무리를 하는지 경이로웠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언어학자 루이즈 뱅크스를 통해 ‘헵타포드(칠족 생물이라는 뜻)’와 언어를 교환하면서 루이즈는 선물을 받는다. 헵타포드가 루이즈에게 미래를 보여주면서 태어날 아이의 성장과정을 보여준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딸과의 추억이 함께 전개되어 처음엔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일어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딸과의 일상은 헵타포드가 보여주는 미래였고, 아이의 성장의 끝도 보여준다. 끝을 알기에 과연 루이즈가 자기가 본 미래를 선택할지 안 할지 무척 궁금했는데, 루이즈는 딸을 만날 결심을 한다. 그리고 딸을 만나는 시작점에서 비로소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건 루이즈이 인생이자 딸의 인생이다. 


세종대왕 님을 만났으면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을 저자가 펼쳐놓은 언어학도 완벽하지만 고통을 알면서도 똑같은 선택을 하는 루이즈를 보는 내내 찡했다. 그 이유를 나는 모성애라고 보았다. 아이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스킨십을 통해 모든 걸 느꼈는데, 그 아이를 잊을 수 있을까? 어떤 힘든 과정이 있더라도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 나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조금 더 도움이 필요한 내 아이를 키우면서 이 아이가 내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성장과정 중에 놓여 있기에 힘들지 않은 순간이 없다. 그럼에도 아이를 보고 있으면 나를 엄마로 만들어 준 것이 신기하다. 이런 감정은 어쩌면 ‘언어라는 정의 속에는 기회와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 사이의 관계는 임의적이라는 주장이 들어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아이를 통해 얻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비언어적인 사실에 더 깊은 감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루이즈에게 다른 이유가 있더라도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주역이라는 역할에 기꺼이 감사해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루이즈는 기꺼이 주도적으로 자신을 삶을 선택하고 자신의 인생을 펼쳤다. 그리고 언제든지 나도 ‘나의’ 인생도, 우리의 인생도 시작될 수 있다.


이 작품은 SF의 매력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완벽함을 설명할 재간이 없지만 앞서 언급했던 비언어적인 사실이 주는 감동을 충분히 느꼈다. 그걸 언어로 표현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탄생시킨 저자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은 비언어적인 공감이 크다. 나는 그럴 능력이 없지만 그걸 잘하는 저자가 있으니 만끽하면 된다. 문학작품에는 인간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절망 같은 감정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때론 문학이 불편하고, 반대로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인간의 세계를 넘어 더 먼 곳으로 확장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과학과 인간의 삶을 수준 높게 엮어 문학의 시야를 한층 끌어올렸으며, 독자 또한 우주를 유영하는 느낌이 들도록 말이다. 우리가 하계에 살고 있다면 저자는 마치 하계와 우주를 넘나드는 것처럼 인간의 삶 또한 깊게 관여하며 많이 사랑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과학과 문학, 인간과 우주의 경계를 나누기보다 우리의 사고는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음을 이렇듯 증명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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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를 벗어나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73
캐런 헤스 지음, 서영승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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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펼치면 안 됐을 책이었다. 깊은 밤 아이들을 재워놓고 꺼낸 책이었는데, 낮보다 감성이 말랑말랑해지는 밤에 펼친 이 책은 그야말로 눈물이 마를 틈을 주질 않았다. 16년 전, 25살에 읽었을 때와 43살 엄마가 된 뒤에 읽는 책은 완전 달랐다. 빌리 조 – 죽은 남동생 - 남동생을 낳다 돌아가신 빌리 조의 엄마 이야기가 나올 때면, 우리 엄마 - 나 - 내 아이들 이런 식의 엉킴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뭉쳐진 휴지가 자꾸만 쌓여갔다.


극심한 가뭄과 황사, 대공황은 1930년대 미국의 팬핸들 지역을 휩쓸고 있었다. 버려진 땅에 외지인이 들어와 과도한 경작으로 숲과 초지가 훼손되어 발생한 황사가 삶을 터전을 일구고 싶은 누군가에게 엄청난 시련으로 다가온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10대 소녀가 그려낸 시선이 더 참담했던 건 너무나 덤덤했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사랑하지만 칠 수 없는 상황과 빌리 조의 연주까지 썩 내켜 하지 않는 엄마. 그런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하는 빌리 조를 지켜보는 것도 최악의 자연환경 속에서 밀 농사를 포기하지 않는 아빠에게 놓여진 환경이 너무나 처절했다. 내가 손을 내밀 수 있다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음식과 모래가 들어올 틈이 없는 집, 피아노를 마음껏 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와 빌리 조의 화상, 그리고 엄마와 남동생의 죽음. 16년 전 읽은 판본에서 빌리 조가 고통을 당하고 헤쳐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과정이 너무 처연하고 가슴 아파서 작가마저 좀 더 나은 모습으로 고쳐서 쓰고 싶었다고 하니 고통은 비단 빌리 조에게만 오는 게 아니었다.


그건 사고였다. 난로 옆에 기름통을 놓아 둔 아빠, 그걸 물로 착각하고 부어버린 엄마, 불붙은 기름통을 빌리 조가 문밖으로 던졌을 때 아빠를 부르러 간 엄마에게 쏟아진 건 사고였다. 그 사고로 결국 엄마와 남동생이 죽었고, 사람들은 빌리 조가 기름통을 던진 이야기만 했다. 나중에 빌리 조가 가출을 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기름통을 놓아둔 아빠도, 불붙은 기름통을 던진 자신도 용서했을 때 그 과정을 낱낱이 지켜봤기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좋아하던 피아노를 화상으로 붙어버린 손가락 때문에 칠 수 없다는 사실을 점점 알아갈 때, 엄마가 있었다면 자신을 사랑해주고, 자신도 엄마를 사랑해주었을 거라는 속 마음을 들을 때 너무 힘들었다. 나와 내 아이들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상상보다,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 힘들었다고 생각되는 과정들이 스치면서 미안해졌다. ‘내가 빌리 조 보다 상황이 낫구나’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가족 구성원이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의 안정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아픔을 겪는 일이다. 기쁨 속에서 감춰진 슬픔이 있고, 슬픔 속에는 감춰진 기쁨이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아픔에 우리 자신을 내맡겨둘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이 아픔을 통해서 성숙하는 길을 찾고, 변화를 모색하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이 아픔을 넘어서게 될 것인가이다. 283쪽 _뉴베리상 수상 연설


빌리 조의 시련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나빠질 일도 없었고,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빠가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 루이즈가 서서히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아빠와도 조금씩 마음을 터놓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드디어 빌리 조가 황사를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리 조는 황사에서도 벗어나고, 자신에게 처한 시련에서도 벗어나려고 가출을 했다. 하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빌리 조는 달라져 있었다. 지긋지긋했던 황사도, 자신이 환경도 모두 받아들였다. 팬핸들에 황사가 걷힌 것이 아니라 빌리 조의 마음속 황사가 걷혔다. 빌리 조의 ‘추수감사절 기원 목록’처럼 촉촉한 대지의 팬핸들, 아빠의 미소와 루이즈, 엄마의 피아노를 돌보는 아빠, 손이 전혀 아프지 않는 상황, 엄마와 동생의 무덤에 피어난 양귀비꽃, 그리고 이 집에 산다는 확신이 모두 이뤄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이제 집 안에서 행복한 피아노 연주가 가득하길, 엄마와 남동생에 대한 기억이 더 이상 슬픔으로만 간직되지 않길,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더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내 눈물이 증거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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