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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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웃음은 공감하거나 나와 상관없이 다를 때 터지는 건데, 그럼에도 괜히 긴장되는 상황이 있다. 이 작품의 초반이 그랬다. 소설 속의 시골 생활과 사투리가 내가 성장해온 배경과 너무 닮아 있어서 웃길 법도 한데 웃음이 뚝 끊겼다. 그러다 아버지가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속임수를 당하면서도 베푼 친절과 위로, 편견 없음에 서서히 마음이 풀어졌다. 읽는 내내 ‘인간을 과연 믿어도 될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장례식에 찾아온 사람들만 봐도 그에 대한 해답은 충분했다.


4년 동안의 빨치산 생활을 한 아버지 고상욱 씨 덕분에 저자의 삶은 여기저기 얽혀버린 느낌을 받았다. 그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한 이 소설은 평등한 세상을 꿈꾸던 사회주의자의 삶의 궤적으로 채워진다. 그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과연 가족의 의미가 있는지, 목숨 걸고 지켰던 신념이 과연 지킬만한 것이었는지를 끊임없이 되묻게 만든다. 방물장수를 하룻밤 재우는 일로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이라는 아버지의 말과 옷 털고 손 씻지 않는 아버지를 향해 잔소리를 해대는 어머니에게 사회주의의 기본은 뭐냐, 유물론이다, 인간은 먼지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인간의 시원인데 사회주의자는 일상에서부터 유물론자로 살아야 한다는 부부의 대화는 나와 너무 동떨어진 시대의 이야기 같았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역사적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만 무기’라고 믿었기에 목숨 걸고 ‘무언가를’ 지켰고 행동했으며 이어진 팍팍한 삶을 견뎌냈던 것 같다. 아무리 시대적 상황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 신념을 지킨 4년의 결과를 평생 자신만의 방법으로 견뎠다는 게 대단했다.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때론 교도소에서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음식을 나눠주는 것을 보며 ‘종교가 사상보다 한질 윈갑서야.’라며 결이 다른 신념을 경험하기도 한다. 신념이 과오가 되어 평생 발목을 잡고 심지어 가족과 자식의 삶까지 영향을 끼치며, 저자가 아버지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빨치산의 딸로 살게 해서 미안하다는 진정한 사과’였음에도 삶은 더 팍팍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서인지 만만해서인지 아버지를 찾아오지만 항상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하고, 동지란 이름의 미명 하에 그들을 돕는다. 늘 뒤통수를 맞는 아버지를 지켜보는 사람이 더 답답한데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끝까지 인간을 믿는 아버지를 이해하기란 저자도 나도 힘들긴 매한가지였다.


결과적으로 옳았든 틀렸든 아버지는 목숨걸고 무언가를 지키려 했다. 나는 불편한 모든 현실에서 몇발짝 물러나 노상 투덜댔을 뿐이다. 148쪽


그럼에도 저자에게 아버지는 ‘나의 우주였다’였다고 말한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지만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31쪽)’는 말처럼 저자는 아버지의 죽음보다 아버지의 장례식장 풍경을 통해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간다. 어쩌면 스스로 아버지를 용서하고, 스스로 아버지에게 사과를 받았으며, 자신을 옭아맨 것에서 조금은 풀려났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아버지는 멋진 사람이었다. 딸내미와 맞담배를 피우고, 상처 입은 10대 이주민 자손과 맞담배를 피우는 것만 봐도 ‘가부장제를 극복한, 소시민성을 극복한, 진정한 혁명가였다.’는 말에 깊은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생각도 못 바꾸면서 세상을 어떻게 바꾼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저자와 이주민 아이가 각자의 추억을 지닌 채 담배를 꼬나물고 아버지의 뼛가루를 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항꾼에’ 여서 그것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되돌아보니 남겨진 사람들은 힘들겠지만 아버지에게는 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은 아버지의 생각대로 변하지 않았더라도, 아버지가 평생 쌓아 올린 연대주의(항꾼에!)는 적어도 아버지 주변에서는 일어났다. 필립 로스의 말을 빌어 죽음은 그렇게나 흔해빠졌는데도 아버지의 죽음은 가족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되돌아 보는 일은 시시하게 느껴졌다. 틈틈이 자기 반성하고 인간미를 잃지 않는 것이 나란 사람에게 어울리는 작은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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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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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펐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도 슬펐고, 재독 했을 때도 여전히 슬펐다. 소설의 시작인 주인공의 장례식장에서처럼 누가 나를 이렇게 기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슬픔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은 파란만장했고, 스스로 선택에 의한 궤적이 낱낱이 드러났음에도 이토록 노곤하고 서글플 수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혹은 노인이 되어 간다는 것에 대한 서글픔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한데도 끝을 모르는 먹먹함이 나를 계속 슬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23쪽

주인공은 수술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삶은 ‘에브리맨’이라는 그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석상 이름처럼 보통 사람의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해 보이기도 하고, 왜 저런 선택을 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가도, 자기 인생이니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가 이 모든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덧없는 것인지 헷갈렸다.

‘다이아몬드라는 건 그 아름다움과 품위와 가치를 넘어서서 무엇보다도 불멸이거든. 불멸의 흙 한 조각, 죽을 수밖에 없는 초라한 인간이 그걸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다니! (63쪽)’ 라고 말하게 되는 아버지 직업이 보석상이라는 것. ‘가까운 날에 그를 위해 침대를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바닥이 평평한 구멍을 파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186쪽)’라며 소설의 끝이 공동묘지의 묘지를 파는 인부의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것에서 여느 사람 못지 않는 평범함을 엿보았다. 그도 나처럼 평범하다는 것, 그리고 나도 그처럼 평범하게 잊힐 것이라는 사실이 안도감과 함께 서글펐다.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 삶이 우연히, 한 번만 주어졌고, 알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없다는 말처럼 어쩌면 그도 삶을 되돌아볼 여력이 없을 만큼 순간에 최선을 다했는지도 모른다. 세 번의 이혼과 그렇게 좋아하던 형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건강한 것에 질투해 ‘최초의 가족의 해체를 완료해’버리고, 정작 자신은 아버지에게 다 받았으면서 자신의 자식은 보호해주지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자괴감은 죽음을 예견해 두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죽음 앞에서 오는 후회인지, 언제나 늘 그렇듯이 인생은 내 맘대로 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모든 것이 슬펐다.

거짓말은 정말 경멸스러운 방식으로 값싸게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거야. 다른 사람이 불완전한 정보에 따라 행동하는 걸 지켜보는 거야. 다른 사람이 수모를 겪는 걸 지켜보는 거라고. 거짓말은 아주 흔하지만 당하는 쪽이 되어보면, 그건 정말 경악스러운 거야. 127쪽

그의 전부인이 그에게 쏟아낸 말들은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크든 작든 매일 거짓말을 하고 살아가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삶까지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어느 시기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건 그 자체로도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 아무것도 이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 후회와 외로움을 안길 뿐, 그 모든 것을 내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라는 말처럼 늙어간다는 것은 삶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일까? 늙어감이 ‘대학살’이 되지 않으려면, 인생이 끝난 것처럼 느껴지지 않으려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더라도 모든 행동에 책임을 지면 된다. 때론 책임지지 못하더라도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회피라면 때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도 된다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피해가 가는 회피여도 그것도 삶의 일부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노년이어도 삶의 종말이 아니라 속도가 느리고 제약이 좀 늘어날 뿐 여전히 주체는 바뀌지 않는다. 누구나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며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슬프게가 아닌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것도 현명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이 아닐까? 그럼에도 죽음이 멀게만 느껴지고, 주인공의 삶이 슬프게만 느껴지는 건 나에게도 많은 연습이 필요할지도 모른다ᅟᅳᆫ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나의 죽음도 ‘흔해빠진’ 죽음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부끄러움이 가득한 죽음만은 피하고 싶다. 죽음을 맞이한 뒤 가족과 타인에게 남겨질 이후는 내 영역이 아니므로 주인공처럼 노년에 내 삶을 한 번 되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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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베이터 - 디베이팅 세계 챔피언 서보현의 하버드 토론 수업
서보현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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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말을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잘 하고 싶다. 저자는 영어도 몰랐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버드 토론 대회 코치까지 되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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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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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에서 돈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돈으로 신뢰라는 주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굉장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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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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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306쪽


몇 년 전 우연히 카페에 들고 간 『안중근 재판정 참관기』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고 한참 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그 사진은 하얼빈에서 암살을 앞둔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의 마지막 기념사진이었다. 의거 3일 전에 마지막을 예감하듯 이발소에서 머리를 단장하고 의식을 치르듯 찍은 사진이었다. 왜 이렇게 이 사진이 나를 사로잡았을까? 눈물이 맺히고 마음이 울컥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안중근 의사의 나이는 31세, 우덕순은 34세, 유동하는 19세 라는 나이(『하얼빈』에서는 안중근과 우덕순이 동갑으로 나온다)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안중근 의사의 재판이 열린 재판장으로 기꺼이 들어갔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한반도를 넘어 동양 평화에 위협을 가중 시키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를 낱낱이 들여다봤다. 거기에 ‘의병으로서 행한 일이기에 전쟁포로로 이 재판장이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국제공법,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되기를 희망한다.’고 자신의 죄를 당당히 밝히는 안중근 의사가 있었다.


그래서 『하얼빈』을 마주했을 때 당당했던 안중근 의사와는 좀 다른 이야기일 거라 예감했다. 『칼의 노래』에서 외로웠던 이순신 장군을 목도 했던 것처럼 안중근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약간은 예상을 할 수 있었다. ‘대의’에서 한 발짝 벗어 났지만 오히려 내면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간 안중근 역시도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처연해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운명을 찾아갔을 뿐, 때론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동양 평화’라는 이유 외에 자신의 직감을 적확하게 설명할 수 없어도 나 또한 그렇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향해 자신의 살아 있는 몸을 밀어 또 다른 생명을 해하려는 행위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안중근의 정치성은 이토와 코레아와 세계 공통어 ‘후라’를 그의 한 몸의 리듬으로 연결시키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을 거쳐서 대련에 닿는 철도를 따라서 전개되고 있었다. 217쪽


저자가 안중근의 ‘대의’에 집중했다면 이토를 향해 총을 쏜 순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중근이 이토를 향해 6초간 7발의(소설에서는 한발이 남은 걸로 설정했다) 총성이 울린 장면은 말 그대로 순식간에 지나갔고, 사실만 전달하려는 것처럼 간결했다. 웅장하지도, 그 순간을 정지시켜 장황하게 설명하지도 않았다. 이토의 마지막 순간도 그저 ‘이토는 곧 죽었다. 이토는 하얼빈역 철로 위에서 죽었다.’ 라고만 표현했다. 이토가 도착하는 순간을 요란하게 맞이했던 많은 얽힘과 목적을 뒤로한 채, 이토가 하얼빈에 왜 오는지를 알 필요조차 없다고 느낀 안중근이었다. 이토가 온다고 하기에 하얼빈으로 향했을 뿐, 거기서 그는 깔끔하게 목적을 달성했다. 이토를 저격한 뒤 ‘코레아 후라’라고 외친 것처럼 그는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하고 존재했던 것처럼 보였다.


안중근은 한 나라도 어쩌지 못한 거대한 운명을 어떻게 혼자 짊어질 생각을 했을까? 안중근이 이토를 쏜 총알이 당연하게도 우리나라도, 동양 평화도 지켜내지 못했지만 ‘그 사내는 땅에 결박되어 있으면서도 땅 위에 설 자리가 없었다.’라고 남편 안중근에 대해 말했던 김아려처럼 그는 자신의 설 자리를 내어 기꺼이 ‘대의’를 행했다. 그는 가난했고, 포수였지만 무직이었고, 젊었다. ‘도마’라는 세례명을 받은 천주교인이었으며,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를 세상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간 묵묵했던 길에 반해 이토의 잘못된 길은 오만하게 드러났다. ‘이 세계는 인간이 만드는 구조물이다. 이것이 우리의 앎이다. 우리의 앎은 사물을 향해 나아간다.’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것이 제국의 길이다.’라고 오도를 향하는 모습은 안중근과 대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길은 각자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길을 어느 누구도 틀안에 가둬 단정 지을 권리는 없다. 이토의 그런 생각에 책을 읽다 말고 ‘헛소리!’라고 일갈할 뿐이었지만 안중근은 그를 향해 총을 쐈다. 안중근의 총알이 이토의 몸을 뚫지 못했다면 또 다른 이의 시선처럼 어쩌면 우리는 ‘일본에게 완벽하게 종속’ 되었을 수도 있다. 


저자의 의도처럼 왜 안중근은 이토를 향해 총을 쏠 수밖에 없었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그는 총을 쐈지만 깨어있는 지식인이었다. 이 책에는 안중근의 정치성을 거의 드러나지 않아 자칫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의문으로 남을까 염려된다. 하지만 『안중근 재판정 참관기』에서 바라본 그는 교육으로 깨어 있었고, 또렷한 근거를 바탕으로 제국주의에 휩쓸리는 동양을 거시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미래를 염려하는 행동파로 보였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동양을 보며 안중근 의사는 무슨 생각을 할까? 저자가 ‘영웅’ 안중근을 걷어내고 ‘인간 안중근’에 집중해 ‘가장 치열했던 일주일’을 표현한 것도 어쩌면 내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은 잠시 내려둔 채, 자신의 삶을 잘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결은 많이 다르고 조금은 억지스럽더라도 치열함의 근본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안중근 재판정 참관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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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4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13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