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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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래드의 소설이 우리를 실제로 아프리카의 깊은 정글 속으로 끌고가듯이.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책장을 덮고,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픽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현실세계와 마주선 우리 자신을, 아마도 픽션과 힘을 상호교환하는 형태로, 완성해가야만 한다. 235쪽

소설과 현실 세계를 적절하게 오가게 해주는 작가 가운데 하나는 하루키가 아닌가 싶다. 그의 소설을 읽다 현실세계로 돌아오고 싶으면 그의 에세이를 읽는다. 소설 속의 절제된(왠지 모르게 하루키 소설 속의 인물들이 절제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습을 벗어나면 나와 같이 숨 쉬고 살아가는 저자를 만난다. 그러나 그런 만남이 글로 한정되어 있듯이 ‘잡문집’이라 이름 붙인 이 책에서 정말 다양한 저자를 만났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글과 미발표 글을 나름대로 분류해서 엮어서 만든 두툼한 이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많은 저자를 만난 느낌이었다.

처음엔 순서대로 서문과 해설에 관한 글을 읽다가 읽히지 않아서 오랫동안 덮어뒀다. 그러다 읽히지 않는 부분은 제쳐두고 읽고 싶은 부분부터 읽었더니 재미있었다. 제목처럼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많아서 다 읽고 났을 땐 저자를 굉장히 오랫동안 지켜본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지금까지 글을 쓰며 살아온 시간을 한번 되돌아 본 것이랄까? 글 쓰는 것에 대해, 좋아하는 재즈에 대해, 그 외 삶의 잡다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번외를 읽는 것 같은데 실은 그것이 지금껏 저자를 두둑하게 지탱했던 중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건 아니지, 마살리스 씨. 그런 표현은 정당하지 않아. 재즈라는 음악은 이미 세계 음악 속에서 확고한 시민권을 얻었고, 그것은 달리 말해 세계 시민의 자산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뜻이지. (중략) 물론 흑인 뮤지션이 핵심 추진 세력으로 크게 경의받아야 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 역사 또한 절대 간과되어서는 안 되겠지. 그러나 그들만이 그 음악의 유일한 정통적 이해자요 표현자이며 다른 인종은 그곳에 낄 틈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오만한 논리이자 오만한 세계관이 아닐까. (144쪽)

저자가 재즈를 좋아하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지만 내가 아는 재즈는 깊이가 너무 얕아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다 이 문장을 읽고 재즈를 정말 좋아하고 나름대로의 세계관이 있다는 인지가 되었고, 책을 읽다 궁금한 재즈 음악을 찾아 들으면서 느긋하게 책을 읽어 나갔다. 읽고 싶은 만큼 읽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에서 감동하고, 언급된 책들을 찾아서 읽다 보니 더 많은 세계를 만난 듯 했다. 번역에 관한 부분을 읽다 그가 좋아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책장에서 빼왔다. 카버, 샐린저, 폴 오스터의 책을 꺼내놓고 조금씩 읽자 내 책장에서 잊혀지고 있던 작가를 다시 재조명해주는 것 같아서 고마웠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자기만의 방을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방을 마련하고, 그곳으로 사람들을 불러 편안한 의자에 앉히고, 맛있는 음료를 내놓고, 상대가 그곳을 아주 마음에 들게 하는 것. 마치 자기만을 위한 장소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 (445쪽)

저자는 그런 방을 꾸준히 만들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만들어 낼 방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생각건대, 우리는 우리를 물어뜯거나 찌르는 책만 읽어야 한다.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트리는 도끼여아만 한다.’는 프란츠 카프카의 편지를 인용해 저자가 쓰고자 하는 ‘책의 일관된 정의’를 더 느껴보고 싶기도 하다. 다소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읽는 이의 바다를 깨트리는 일은 굉장한 일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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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3 : 세계편 - 완결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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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중학생이 된 지인의 아들과 책 이야기를 하다가『퇴마록』이야기가 나왔다. 나에게『퇴마록』은 나의 유년시절 함께한 책이었고, 당시에는 그런 세계가 정말 존재하는 것 같아서 무섭기도 하고, 뭉클했던 책이라고 말이다. 내가 너무 재미있게 말했는지 그 아이가 자꾸『퇴마록』을 빌려 달라고 했다. 나는 단번에 안 된다고 했다. 중학생이 된 네가 읽기에는 아직 그렇다, 시간이 좀 지나면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나를 볼 때마다 책을 빌려달라고 떼를 쓰기에, 그건 내 소중한 기억이라고 정 읽고 싶으면 엄마한테 허락을 받고 도서관에서 빌려보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학교 과제와 학원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풀이 팍 죽어 놀 틈이 거의 없이 공부만 한다는 얘기를 하는 아이를 보며 갑자기 짠해졌다. 그래놓고 또『퇴마록』을 빌려 달라 했다. 순간 마음이 약해져서 빌려주고는 엄마 몰래 읽으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중학생이 된 아이들은『퇴마록』보다 더 험하고 자극적인 세계를 모르는 게 아니라는 데서 오는 씁쓸함도 있었다.


그렇게 책을 빌려주고 난 다음 날, 얼굴에 팩을 바르고 편하게 누워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딩동’ 했다. 저녁에 올 사람이 없어서 남편보고 나가보라고 했는데 마침 씻고 있어서 내가 나갔다. 지인의 아들이었다. 목적인즉슨,『퇴마록』국내편 2권을 빌려 달라는 거였다. 어이가 없었다. 순간 나도 당황해서 들어오라 하고(우리 집 현관문은 거의 열려있기에), 나는 안방에 숨어 빼꼼히 고개만 내민 채 서재방 오른쪽 책장 꼭대기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알아서 책을 찾아서 나가는 아이에게 “재밌지?” 하고 물으니 “정말 장난 아니고, 심각하게 재밌어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아이를 보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나만의 비밀을 뺏긴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책을 빌리러 오는 아이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이상하지만, 그렇게 빌려 준 책을 하루 만에 읽고 또 우리 집에 들른 아이를 보며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아예 두 권을 빌려주고 오지 말라고 퉁을 놓았지만, 아이는 해맑게 이틀 뒤에 오겠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그러고는 기분이 묘해져서 나도『퇴마록』을 꺼냈다. 이미 고등학교 때 완독한 책이지만 7년 전에 나온 개정판을 모두 소장하고 있어서 다시 읽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게 꼭 1년 전이었고, 세계편 3편에서 멈춰 있었다.『퇴마록』에 열광하는 지인의 아이를 보면서 이 아이보다 먼저 선점해야겠단 생각에 책을 펼쳐 들었다. 유치한 목적이나마 생기자 좀 지루해서 놓아버렸던 부분부터 술술 읽혔고, 책을 덮으니 새벽 1시가 훌쩍 지나있었다.

내가 읽다 멈춘 부분은 퇴마사들이 블랙서클의 존재를 알고 루마니아 드라큘라 성까지 간 부분이었다. 토굴에서 각자 흩어져 공격을 받은 부분이었는데 이상하게 여기부터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다시 펼쳤을 때는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악행을 자행했던 코제트를 물리쳤지만 그녀는 블랙서클의 일부분이었다. 코제트의 영혼이 구원 받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함께 수많은 사상자를 낸 힘겨운 싸움의 끝은 씁쓸했다. 무엇보다 코제트는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세상에 소외 받은 사람들을 이용했다는 사실이 더 그랬다. 그럼에도 퇴마사들은 나머지 블랙서클의 멤버를 찾아야했다. 코제트가 알려준 젠킨스와 히루바바를 찾아 나섰는데 젠킨스는 캐나다에, 히루바바는 아프리카 말리에 있었다.

젠킨스를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물건이나 사람의 기록을 읽는 능력을 지닌 전직 형사 더글러스를 만나게 된다. 후에 블랙서클의 본거지를 찾는데 이 남자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는데, 여하튼 잘못된 신념으로 블랙서클의 일원이 된 그들의 사연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분명 잘못된 생각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백인이 가져온 문명으로부터 자신의 종족을 지키려 했던 히루바바의 이야기는 더욱 그랬다. 꼭 20년 전에 세계편을 읽으면서 메모를 해 놓은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히루바바가 문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진 모습을 다시 마주했는데, 현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마음이 심란해졌다. 현암은 그 생각이 틀리지 않지만 문명이 주는 이익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협력해야 한다는 말을 했지만 히루바바나 현암의 말이 모두 맞아서, 그 절충안이 없어서 이 세상은 아직도 평화롭지 못한 모습이 많나보다 싶었다.

지금껏 만났던 어떤 인물들보다 강력한 힘을 지닌(블랙서클 일원의 영을 모두 흡수했기에) 블랙서클의 마스터를 의외의 존재가 제압해 버리는 것을 보며, 우리가 이 세계를 아는 건 일부분에 지나지 않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연희는 자신을 늘 지켜주는 남자가 ‘리’로 불린다는 것만 알았고, 곧 그의 영체도 잃어버렸지만 그들이 파괴해가는 악한 영의 세계는 과연 어디까지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소설이기에, 소설의 배경 안에서 생각하려 하지만 자꾸 현재와 연관 지어지는 이야기들이 영 개운치 않았다. 나의 추억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고 싶어 정독하고 있는 시리즈였지만, 현재 읽어도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이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무엇의 변화를 바랐던 걸까? 정의 사회? 언제나 선이 이기고, 악은 패한다는 사실? 현재에 대입해 봤을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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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8-04-24 0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퇴마록‘이 나올 때만 해도 이런 책이 국내엔 없었지요. 주로 일본소설이 이런 계통이 좀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이걸 읽던 시절이 딱 고등학교-대학교시절 같습니다. 디테일은 차이가 많겠지만, 무속인이 아닌 소위 인증된 종교소속의 퇴마사도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가 모르는 영적인 현상들이 많이 있으니 생각하면 여전히 ‘퇴마록‘의 세계는 저를 무섭게 합니다.ㅎ 책을 빌려주시기도 하는 걸 보면 너그러운신 듯...ㅎ 저는 가족이 아니면 책은 빌려주지 않습니다. 못 받는 경우도 많고 실제로 읽지 않고 그냥 욕심에 빌려가서 안 갖고오는 경우도 많아서 그런데 위의 얘기처럼 열심히 읽으면서 빌려달라고 하면 거절하기 힘들지 모르겠습니다.ㅎㅎ

안녕반짝 2018-04-25 12:03   좋아요 1 | URL
저는 언니의 책장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읽었는데, 마지막까지 읽을 때는 정말 아쉽고 서운하고 뭉클했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개정판으로 나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아껴두면서 읽고 있었는데 이렇게 빌려달라고 하니 완전 저도 긴장감을 느끼면서 읽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멈춰 있어요. 저 아이도 시험 기간이라 빌려가는 걸 금지당했고(엄마로부터), 저는 감기가 된통 와서 식욕, 독서욕, 의욕을 다 잃어버려서 지금은 그냥 감기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어요.
정말 다 읽어버릴 의욕이었는데 감기 한 방에 날아가버렸어요.
저도 책은 잘 안 빌려주는 편인데 요즘엔 거절을 못해서.. 쩝!
책이 상해오는 게 제일 마음 아파요. ㅜㅜ
 
유랑탐정 정약용
김재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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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분명 졸리고 피곤한데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이 책을 꺼내들었다. 책을 덮었을 땐 새벽 1시가 넘어 있었다. 내일이 걱정되었지만 다 읽고 나서 후련했고 더불어 마음이 복잡했다. 의문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건 흥미로웠지만 그 뒤에 감춰진 진실을 마주했을 땐 무엇이 정말 옳은 건지 단정 지을 수 없어 묵직함을 안고 잠들었다.


천연두를 앓은 흔적으로 삼미자란 아명으로 불리는 어린 약용과 이가환은 주막에서 의문의 사망 사건을 만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그들은 나름대로 사건을 해결해보려 하고 앞으로 그들이 만나게 될 수많은 사건의 시작일 뿐이라고 짐작했다. 그들이 여행을 하다가, 혹은 시간이 흘러 의문의 사건 앞에서, 나라의 녹을 받는 입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모든 것은 의문의 사건 해결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여행하던 시절에 만난 의문의 남성, 진이라 불리고 세구의 시신과 함께 그들을 곤경에 빠뜨렸던, 도무지 늙지 않는 여러 이름을 가진 남자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홀연히 사라져 버린 뒤 그때와 비슷한 살인사건으로 재회 할 것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난 범인 중에서는 오로지 살인을 즐기는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진이라는 남자의 목적이 궁금했다. 그가 기이한 시신을 남기고 약용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는 이유들이 무엇인지 말이다. 약용이 우여곡절 끝에 그와 마주했을 땐 그는 서양의술을 비롯해 세상의 변화를 그에게 일러준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평등교의 교리를 설파하면서 조선의 개혁을 바랐고 약용이 함께 도와주길 바랐다. 그 목적 때문에 오래전 약용과 마주했을 때부터 계획을 세워왔던 것이다.

독 안에 쥐처럼 가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약용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궁금했다. 약용이 조선의 앞날을 위해 고민하는 모든 것을 훤히 들여다보는 진이란 남자에게 마음이 쏠려서인지 약용이 일단 그의 제안을 수락한 뒤 새로운 해결책을 도모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기대할 것 없는 조정에서 지원군이 오지 않을까, 진이란 남자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게 되진 않을까 하는 수많은 가설들을 세워가며 읽어나갔다. 추리소설의 묘미는 흐름을 어느 정도 추측하면서 읽고, 뻔하게 흘러가지 않는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말 그렇게 반전을 주면서 흘러갈 땐 또 놀라곤 한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그런 과정을 여럿 거쳤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해결된 것 없이 책의 쪽수가 줄어들 때마다 어떤 결말이 드러날지 흥분되면서도 이미 과정을 통해 대강은 유추할 수 있는, 결국은 명확하게 똑 떨어지지 않는 삶에 대한 회의가 진득하게 달라붙어 당황스러웠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그 안에서 약용과 진은 충돌했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괴리가 만들어낸 세상의 부조리함이 여전히 생겨나고 있는 것이 씁쓸했다. 수많은 과정을 거쳐 그러한 세상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진이란 남자의 잘못된 방법에 동의할 수 없지만 그가 펼치고자 했던 세상에 대한 갈망은 있었다. 약용이 갈망한 세상에 대해 동조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방법은 정직했기에 끈기를 이어갈 수 없었다. 소수의 생각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정당한 방법이 바탕이 전제된 채 그러한 의문과 실천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은 더 불행해질지도 모른다. 무거운 마음이 자꾸 들었던 것은 과연 나는 어느 위치에 있느냐는 것 때문이었다. 또한 현 세상은 어떻게 흘러 가느냐였다.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혼란스러움 속에서 도피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묵직한 질문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중요한 질문이었다. 나의 생각이 엉뚱하게 흘러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이 내게 남긴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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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8-04-24 0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김탁환작가의 백탑파 시리즈의 느낌이 나네요...
 
이상한 엄마 그림책이 참 좋아 33
백희나 글.그림 / 책읽는곰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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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만 보고 ‘설마, 나 인가?’ 싶었다. 두 아이에게 나는 정말 ‘이상한 엄마’로 보일 때가 허다해서 그랬을 것이다. 감정조절이 실패한 날에는 더욱 그러해서 제목만 보고도 심히 마음이 찔려버렸다. 그러나 책을 읽고 다 읽고 난 뒤에는, 아이가 아플 때 정말 이런 엄마라도 있어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엄마’라는 이름을 가지면서부터 아이가 아프면 가장 마음이 약해지고, 돌볼 수 없는 상황일 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때가 많으니까.


 

서울에 엄청난 비가 쏟아진 날, 호호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호호가 열이 심해 조퇴했다는 전화였다. 엄마는 일하는 중이라 당장 가보지 못해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호호를 부탁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화는 연결이 되지 않고 이상한 잡음만 들려온다. 그러다 겨우 전화가 연결되었고, ‘엄마’인 줄 알고 호호를 부탁한다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는다.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은, 모습이 꼭 선녀 할머니(?)같은 분이 곧바로 호호네 집으로 구름을 타고 날아간다. ‘아이가 아프다니 하는 수 없지. 좀 이상하지만 엄마가 되어 주는 수밖에.’ 라는 말을 하며 호호를 돌봐주기로 한다. 호호는 집에 무섭게 생긴 분이(얼굴에 하얗게 분칠이 되어 있어서 더 그래 보인다) 맞이하니 무서웠지만 목소리 때문에 안심하게 된다(저자의 그림책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독특한데, 집안 구석구석과 표정을 상세히 묘사해서 호호의 마음을 알 정도였다).

 

동화 속 상황이지만, 만약 요즘 같았다면 어땠을까? 누군가 남의 집에 들어온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날 돌봐준다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각박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호호가 아픈 상황이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좋은 의도로 호호네 집에 온 ‘이상한 엄마’를 믿어주는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엄마’는 호호가 먹고 싶다는 달걀국을 끓여 주는데, 호호는 맛이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다 마신다. ‘이상한 엄마’는 집을 데울 요량으로 달걀프라이까지 해준다. 집안이 너무 건조해지자 달걀흰자를 모아 거품을 내 구름을 만들어 안개비를 뿌려준다. ‘이상한 엄마는 가장 크고 푹신한 구름을 골라 호호를 눕’혀 재운다. 호호 엄마는 일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오고, 곤히 잠들어 있는 호호를 보며 안심한다. 그렇게 잠이 든 모자가 일어나보니 엉망이 된 부엌에 거대한 오므라이스가 차려져 있었다.

 

‘이상한 엄마’가 벗어놓고 간 선녀 옷을 보며 호호 엄마는 의아해 하지만, 무사히 호호를 돌봐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변함없을 것 같다. 나였대도 내가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집이 엉망이 되더라고, 아픈 내 아이를 돌봐주고 거대한 저녁밥까지 차려져 있다면 이상한 상황이어도 고마울 것 같다. 내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 ‘이상한 엄마’라도 부탁할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아이를 키울 때의 불안함이 많이 사라질 것 같다. 그걸 견디지 못할 것 같아 임신한 상태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여전히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호호를 돌봐준 ‘이상한 엄마’를 보면서, 내 아이들을 봐준 수많은 지인들이 생각나 괜히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이 하나를 온 마을이 키운다는 말도 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아이에 관해서라도 좀 더 관대한 시선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이 너무 멀리 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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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운 건 싫어 - 남들보다 내성적인 사람들을 위한 심리수업
피터 홀린스 지음, 공민희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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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커피를 마신다. 대부분 오전에 원두커피를 마시고, 믹스 커피는 가끔 마신다. 카페를 이용할 때도 있고, 집에서 간단히 내려 마실 때도 있다. 그러다보니 하루에 두 잔이 될 때가 허다한데, 멍한 정신도 깨우고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가는 게 좋아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나에게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하면, 정말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한다. 무언가에 중독된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느끼면서도 커피 한 잔 마실 때의 그 평안함이 좋아서 끊지 못하고 있다.


최근 이론에 따르면 카페인이 실제로는 내향적인 사람의 성과에 해를 끼치며, 사회적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어 피로감을 느끼는 것과 같은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중략) 이 말은 내향적인 사람이 더 쉽게 자극을 받고, 사회적 소통을 용인하는 정도가 더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향적인 사람이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마치 커다란 보청기를 끼고 걸어 다니면서 세상의 볼륨이 조금만 더 낮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4~25쪽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내향적인 사람에 가깝지만, 내가 좋아하는 커피가 이런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의아했다.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데. 설사 내가 커피에 중독이 되어 있다고 해도 그 시간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의 볼륨이 조금만 더 낮아졌으면 좋겠다’라는 부분이 계속 걸렸다. 커피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소리에 민감한 게 사실이다. 카페에서도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웃는 소리를 견디지 못해 커피만 후다닥 마시고 온 적도 허다했고, 집에서는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소리를 질러대는 둘째에게는 매일매일 격하게 대하고 있다. 이게 정말 카페인 중독 때문이라면, 그래서 완화시킬 수 있다면 정말 그래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제부터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아마 내일 또 마시게 될 지라도 소리에 예민한 나를 무디게 만들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자신을 내향적인 인물로 단정하고, 그 역할에 계속 가두는 것은 스스로를 고립된 삶을 살면서 자기 안에 머무는 존재로 한정시키는 것이다. 남들과 만나지 않고 자신에게만 의존하려고 할 때 가장 안타까운 점은 그럼으로써 자신의 기능성을 제약한다는 것이다. 61쪽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향적, 외향적, 혹은 사회형 내향성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계속 판단하게 만든다. 다양한 성향이 있는데 굳이 이렇게 단정 지어서 나눈다는 것에 약간 못마땅하긴 했지만 파악하면 파악할수록 나도 알지 못한 내 모습을 많이 발견했다. 복잡한 인간관계를 싫어하면서도, 한정된 인간관계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내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만나는 게 아닌가’란 반성을 하다가도, ‘타인의 시선에 피로감을 느끼지 않고 좀 편하게 살면 안 되나’란 합리화가 늘 부딪혔다.

그렇다면 적절한 균형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불행히도 쉽게 정의할 수는 없다. 내향적인 사람은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을 곱씹는 행위가 현재의 경험에 영향을 미치고 행복해질 기회를 해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실수를 분석하고 배우는 것이 좋은 생각처럼 보이겠지만, 행복해지는 것이 목표라면 그냥 흘러가게 놔두는 편이 더 낫다. 133쪽

정답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정말 그렇다는 것에 회한이 들면서도, 내향적인 성향에 대한 분석은 수긍하게 되었다.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을 곱씹는 행위’ 또한 내가 자주 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현재에 별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국은 행복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이 방법을 알려 주었다고 해도 내 인생에 그대로 대입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잘 몰랐던 내향적인 나, 나와 완전 다른 외향적인 타인을 좀 더 이해는 계기가 된 건 사실이다. 적절하게 순응하고 변화를 꿰하다보면 좀 더 나를 다듬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 불가능 할 것을 알면서도 카페인을 줄여보는 일. 거기서부터 나를 인정하고 달라지기 위해 소소한 노력을 해보려고 한다. 달라지고 싶다는 건 현재에 불만족한다는 얘기도 되므로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시도는 해봐도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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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18-04-15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끌리네요...읽어보고 싶은 책이에요^^

2018-04-16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