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민주주의를 훔쳐 갔을까? - 현대사와 함께 읽는 진짜 정치 이야기 사회 시간에 세상 읽기 1
김은식 지음, 소복이 그림 / 이상미디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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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덮고 나도 모르게 “좋은 책이다.”라고 혼잣말을 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대해 쉽게 설명해 주고 역사에 생생히 묻어있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하지만 오로지 의미 전달로만 묻히기엔 더 뜨거운 뭔가가 있었다. 너무나 쉽게 들어왔던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누군가의 피로 이뤄진 사실이라는 말을 오롯이 실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알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몰랐던, 내 생활에 급급해 잊고 있었던 역사에 대한 미안함도 쉴 새 없이 묻어 나왔다.


민주주의의 가치와 소중함을 정확히 모른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없는 상태’가 왜 문제인지도 잘 모른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야. 그러다 보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문제를 만났을 때 그것과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는 이유나 방법도 잘 모르게 될 수 있겠지 11쪽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모든 구성원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 각각의 생각과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 이념이라면, 그 이념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대화와 토론과 설득과 타협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민주주의 과정이’라는 말을 제대로 인지하니 ‘날치기’와 ‘다수결’의 폐해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렇게 의미를 알아가자 근현대사의 민낯이 보였고, 구성원을 인정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를 억압한 지도자들의 만행에 분노가 일었다.

제주 4.3사건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세 가지 만행(친일파 청산 좌절, 한국전쟁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지 못함, 권력 유지를 위해 온갖 부정하고 폭력적인 방법 동원)이 이후 역사에 끼친 영향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박정희라는 사람이 일본군 장교로 해방이 되던 해에 중위를 달고 있었으므로 ‘만약 제대로 친일파에 대한 처단과 문책이 이루어졌다면 더 이상 군인으로서 그렇게 승승장구할 수 없었을 사람이라’는 사실이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다. 친일파 청산은 현재까지 이뤄지지 않았고, 오히려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보다 호위호식하며 살고 있는 그들을 보면 모든 게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사람들은 ‘민주주의는 스스로 지켜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등장해 4·19 혁명이 무색할 정도로 18년 동안 민주주의와 먼 독제체제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한다. 18년 동안 권력을 쥔 것은 잘못이지만 덕분에 잘 살게 되지 않았냐고. 그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경제적 발전이 늦더라도 4·19 혁명으로 이뤄낸 민주주의를 잘 지켜냈다면 많은 사람들이 덜 고통 받으며 함께 갈 수 있었다는 이런 생각이 어려운 것일까? 그렇게 잘못된 지도자로 늦춰진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룬 것은 ‘평범한 대학생, 고등학생, 그리고 시민들’이었다.

1981년생인 나는 어렸을 적, 어렴풋이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전두환이란 사람이 기억난다. 내가 태어나기 약 일 년 전에, 고향에서 1시간 거리의 광주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얼마나 섬뜩했는지 모른다.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고 있지 않고, 5·18 민주화 운동으로 희생된 사람들보다 역시나 더 잘 살고 있다. 이런 역사의 편협함을 보면서 분노가 치미는데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그런 역사를 정면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심정을 아는 것도 두려워 답답하기만 하다. 이후 1987년 6월 민주 항쟁은 ‘30여 년 이상 이어지던 군사 정부 시대가 끝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므로 현재 내가 누리는 민주주주의 대가를 치러준 수많은 분들에게 나는 그저 빚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도 조화를 이루고 어울려 사는 방식’이라는 말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장 내 가족과도 대화를 하다 틀어지고 마음이 상하기 일쑤인데, 생각이 다른 모든 구성원과 이뤄나가는 게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막막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권리를 잘 실천해야 한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 내가 뽑은 지도자가 어떻게 하는지 관심을 기울이는 것, 하다못해 국경일에 태극기를 달고 내가 이해한 민주주의 의미를 생활 속에 녹여내는 것도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일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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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보다 굿즈가 더 많다.
큰 박스가 두 개가 배송되어 깜짝 놀랐다.
굿즈를 너무 많이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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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부터 오늘까지 정신이 없는데 도착한 책!

나의 피로를 풀어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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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고백 - 사도신경으로 나의 믿음을 세우다
황명환 지음 / 두란노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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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에 관한 독특한 기억이 있다. 신앙을 가지기 전이었고, 신앙을 가지고 있는 언니네와 함께 살 때였다. 방에서 혼자 잠들었는데 심하게 가위에 눌렸다. 꿈은 너무 생생한데 몸이 움직이지 않아 온 몸에 소름이 돋을 때 기억나는 건 성경책밖에 없었다. 기도를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을 때 사도신경을 읽어보라는 형부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겨우 침대에서 내려와 엉금엉금 기어가 형부의 가방을 열어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사도신경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야말로 불을 켤 용기도 없을 정도로 무서웠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평안함이 왔고, 그 뒤로 지금까지 가위에 눌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요약하고 정리한 것이 사도신경이고, 이 진리가 틀림없는 것이기에 사도신경은 오늘날 모든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유일한 신앙 지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15~16쪽

 

지금은 예배를 드릴 때 습관적으로 툭, 하고 나오는 게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을 읊으면서도 분명 엄청난 고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알려고 했던 적은 없었다. 그저 나의 나약함을 외면하며 정말 사도신경을 완벽하게 믿는지 의심할 때가 더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내용을 가장 잘 압축 해놓은 진리의 기준이자 지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이론이라도 사도신경과 맞지 않으면 거부하면’된다고 말이다. 이렇게 잘 압축해 놓은 진리의 기준을 놔두고 나는 어디서 믿음을 찾으려 했는지 모르겠다. 그 사실이 참 안타까우면서도 부끄럽다.

 

그런데 많은 성도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면서도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 여기서 착각해선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엄청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그 믿음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실행하지 않는 우리의 나약함입니다. 54쪽

 

결국 나의 나약함이었다. 그 나약함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언젠가 더 큰 믿음, 더 큰 능력이 생기면 순종하며 살 수 있겠지’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 기도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이렇게 늘 기도하지 않으면 나의 나약함이 믿음까지 져버릴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지음 받았으니 그 사실을 인정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기도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무엇보다 내 안에 ‘이미 엄청난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마치 처음 아는 사실처럼 감격으로 다가온다. 그것도 나에게 바라는 것 없이 그저 선물로 말이다.

 

스스로 무능하다고 탓해선 안 됩니다. 우리 자체만 본다면 무능하지만, 모든 것을 감당케 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 옆에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61쪽

 

“성령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동등한 ‘인격적’ 하나님입니다.” 라는 사실을 믿는다. 저자는 창세기 1장 1절을 믿으면서 성경의 다른 것은 믿지 않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면 성령이 ‘어떤 능력이나 힘, 에너지 같은 객체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사실, 우리를 선택하시고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를 알게 되면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초대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가톨릭과 기독교, 개신교의 의미를 알고 나면 교회가 하는 역할도 제대로 알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불거진 문제는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혼동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문제에 ‘교회의 주인’을 넣어보면 해결이 어렵지 않다는 사실도 말이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알고 있는지 여부가 인생의 성패를 가릅니다. 안타깝게도 이 단순한 진리를 모르는 미아가 세상에 가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와서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사명을 감당하며 살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가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인생을 제대로 사는 길입니다. 122쪽

 

그러므로 ‘미래적 관계에 기반을’ 둔 교제를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과거, 현재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믿는 사람들만 구별되는 미래적 관계가 아니라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제가 이뤄져야 한다. 늘 소극적이고 현재의 관계만 중시했던 나에게 미래적 관계의 의미는 남다르다. 누군가를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갈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면 허투루 스칠 사람이 없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의 신앙고백’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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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올게 : 바닷마을 다이어리 9 - 완결 바닷마을 다이어리 9
요시다 아키미 지음,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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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아꼈다. 완결을 알았기에 읽을 만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나름대로 경건한 마음을 취한 셈인데 그도 그럴 것이 약 8년 전 처음으로 입소문을 듣고 이 만화책을 읽었다. 그 때만 해도 1~2년에 한 권씩 나올 거라 생각도 못했고, 생각보다 그 시간이 빨랐다는 기분이 들 줄도 예상 못했다. 일 년에 한 권이라도 좋으니 계속 이 이야기가 이어갈 수 있길 바랐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만난 배다른 동생 스즈에게 함께 살자고 건넨 한 마디 때문에 카마쿠라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따뜻한 이야기가 좋았다. 그리고 줄거리마저 희미해지게 띄엄띄엄 출간되는 책을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그런 책이었으니 마지막 권이 나에게 ‘읽어달라’고 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출간부터 완결까지 꼭 10년이 걸린 책이자 내가 유일하게 모은 만화책. 보내기 싫은 심정도 충분했다. 그래서 느긋하게 기다리다 지난 주 금요일 집안일을 멀끔히 해놓고 배를 깔고 누워 정독했다. 오히려 만화책을 읽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나는(만화책이 익숙하지 않아서)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또 언젠가 때를 기다려 1권부터 9권까지 정주행을 하리라 다짐했다. 그런 날 말이다. 마음이 한없이 울적하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데, 아무것도 위로가 되질 않을 때 무심코 이 만화를 꺼내기로 말이다.

가마쿠라의 일상은 겉으로 보기엔 별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크고 작은 변화들이 감지되었다. 치카와 하마다 산조의 아이가 태어나려고 했고, 하마다는 에베레스트로 향했다. 스즈는 축구 특기생으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사치와 요시노 언니의 연애도 진전이 있었고, 후타를 비롯한 친구들도 나름대로 고등학교 준비를 한다. 후타와 스즈와의 관계는 변함이 없을 거라 믿었지만 미묘한 감정의 변화들이 때론 아슬아슬하기도 하고, 얼마든지 이야기들이 이어져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카마쿠라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그 시간들이 멈췄으면 하는 생각. 당연한 건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책을 읽으면서 이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다. 치카의 분가도 괜히 아쉬웠고, 앞으로 누군가는 떠나고 돌아오고를 반복하더라도 이 시간들이 잊히는 게 싫었다. 마치 내 아이들이 훌쩍 커버린 뒤에 어렸던 현재를 아쉬워하는 것처럼 변화를 인정해야 하는 사실을 할 수만 있다면 막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당연한건 데도 나는 내 욕심껏 그들을 멈추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데 얽혀있지만 각자의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가운데 “스즈와 카즈키의 ‘그후’ 번외편”을 보고 모든 게 과거의 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까지나 막내일 것 같던 스즈가 언니들을 처음 만났던 고향으로 돌아가 이복동생을 만나고, 그곳에서 결혼 소식을 전한 일. 그리고 그 사람이 화려한 양산을 오래전부터 이상하다고 말했다는 것에서 남편 될 사람이 누군지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꼭 ‘그’라고 믿고 싶다). 혼자서 ‘헉!’ 하고 놀라면서도 어쩌면 스즈도 현재 나와 비슷한 나이대에 아이를 키우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자 공감각이 더뎌졌다. 여전히 내 기억과 추억은 카마쿠라의 언니들 틈바구니에서 씩씩하게 지내던 스즈의 잔상이 진하게 남아있는데, 스즈도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니 기분이 묘해졌다.

어쩌면 이게 누구나 꿈꾸는 평범한 삶인지도 모른다. 흐름에 삶을 맡기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 얽혀 들어가면서 온갖 일들을 겪지만 그럼에도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일. 그게 행복이고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평범한 삶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 만화를 사랑했는지도 모르겠다. 만화에 문외한인 내가 이 만화를 우연히 만나고, 오랜 시간 기다림과 함께 한 시간까지 행복했다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제는 아쉽지 않다. 각자의 자리에서 여전히 행복하게 살아가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함께 하고 있다 여기면 현실에서 나의 행복도 그리 어렵지 않다고 여겨본다. 마지막 책의 부제처럼 ‘다녀올게’ 하고 말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일상. 그 일상이 오늘따라 굉장히 감사하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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