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벤지 포르노 - 젠더, 섹슈얼리티 그리고 동기
매튜 홀.제프 헌 지음, 조은경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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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에 발표된 세계보건기구WHO 자료에 따르면 여성의 35퍼센트가 새의 한 시점에 파트너의 폭력이나 파트너가 아닌 사람이 행한 폭력을 경험한다. 전 세계 여성 중 3분의 1이 파트너로부터 성 학대를 경험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살해된 여성 중 38퍼센트가 파트너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p.104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는 반려자 또는 파트너라고 여겨지는 사람이다. 연구 결과의 수치가 놀랍기만 하다. 여성들의 삶에 이러한 폭력이 만연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얼마나 깨닫고 있을까. 최근까지 여성들은 자신의 삶이 가부장적 또는 남성중심적 구조에 매몰돼 있는가를 생각해볼 기회가 드물었다. 『82년생 김지영』이 새로웠던 이유는 일상에 매복한 차별과 폭력의 가능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특별한 굴곡없이 살아온 한 여성의 삶에 얼마나 많은 젠더의 문제가 담겨있는지 알 수 있었다. 너무나 평범한 삶이 나와 다르지 않아서 공감의 폭이 더 넓었다. 이후 드러난 정치인의 성폭력 사건, 유명 연예인의 성관계 영상 단톡방 공유 사건을 보며 성과 폭력의 문제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음이 드러났다. 성관계 동영상 유포 협박을 받은 아이돌 여가수의 자살에 이르러 우리는 ‘리벤지 포르노’라는 어휘에 익숙해졌다. 왜 피해자들이 자신이 당한 폭력에 저항하기는커녕 은폐해야하고 밝혀질 경우 스스로 목숨을 버려야 하나. 피해자가 피해자로 보호받지 못하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 가해자는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리벤지 포르노』는 “동의하지 않은 포르노그래피”를 “상대방에게 복수할 목적으로 전자 텍스트를 함께 실어 리벤지 포르노 웹사이트에 올리는 행위”에 초점을 두고 있는 책이다. 리벤지 포르노라는 용어 정의부터 그 범위, 유통 현황, 현재 이뤄지고 있는 대응책, 리벤지 포르노만의 특성, 동기를 다룬다. 책의 후반부에는 “리벤지 포르노를 저지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그 밖에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논의한다.

 

책의 저자 매튜 홀과 제프 헌은 영국에서 대학의 연구원과 교수로 일하며 젠더와 섹슈얼리티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저자들은 리벤지 포르노 게시 사이트 마이엑스닷컴에 올라온 게시물을 분석했다. 동영상과 함께 올라온 텍스트를 분석해 “가해자가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젠더와 섹슈얼리티 담론 형식을 이용해 설명하는지”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책에는 다양한 게시자의 사례가 제시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복수를 할 때 자신은 피해자의 위치에, 이전 파트너는 가해자로 두”며 “이전 파트너를 벌 받아 마땅한 인물로 부각”시켰다.

 

마이엑스닷컴에 있는 엄청난 양의 자료를 고려할 때 이런 소비 관행이 일반적이다 보니 리벤지 포르노 제작자와 소비자 모두 책임감이 흐려지는 것 같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괴물이라고 생각지 않고, 이런 이미지를 올리는 다른 남자들, 그리고 범죄로 여겨지는 일을 스스로 저지른 여자들을 괴물로 여긴다. p.103

 

그는 남성 포르노 소비자들은 그들의 취향이 아무리 폭력적이라도(또는 폭력으로 치닫는자 해도) 그들보다 더 ‘심한’ 이들이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는 점을 지적한다. 성적 노출을 했다고 피해자들을 비난할 때, 리벤지 포르노 생산자들은 도덕적 우위에 서서 피해자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노골적인 성적 이미지를 동의 없이 일반에 공개하는 자신의 행위보다 더 나쁘거나 최소한 똑같이 나쁘다고 넌지시 드러낸다. p.103

 

책에 제시된 리벤지 포르노 발생을 줄이기 위한 제언은 입법 조치, 교육과 인식 높이기, 피해자 지원, 가해자 재교육 등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식의 변화일 것이다. 리벤지 포르노 문제는 성의 문제가 아닌 폭력의 문제라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포르노그래피의 일종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폭력이고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도 그 폭력에 가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4. 기억하라. 이것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강간 문화다.

…이것은 그저 강간 문화와의 전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전투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착취 행태를 소리 내서 알리고, 사람들에게 왜 이것이 괜찮지 않은지 교육하고, 이 관행을 불법화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당신의 권리를 주장하라. p.85

 

이런 모든 점을 직면한 상황에서도 법적이고 기술적인 조치, 성폭행 피해자 지원, 가해자 처벌과 재교육 등 여러 가지 방식으 대응을 할 수 있다. 또한 폭넓은 정치적 활동, 젠더-섹스-페미니스트적 정치 행위와 변화를 지속하는 행동주의가 시급하다. p.290

 

저자들은 책 말미에 “정치적 발언”과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한다. 리벤지 포르노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직면한 상황을 바꾸지는 못해도 미래의 변화를 향한 시작이 될 수 있다.

 

현재 시점에 시의성이 높은 책이다. ‘리벤지 포르노’라는 범죄의 용어 정의부터 사례와 저간의 동기까지 분석한 점을 높이 사고 싶다. 다만 담론 분석이라는 학술적 도구를 이용해 사례를 분석하고 결과를 해석하다보니 일반 독자들에게 낯설게 여겨질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듯하다. 진지한 학문적 입장에서 본 리벤지 포르노에 대한 분석이 궁금하다면 읽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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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꿈을 담은 평화의 부처님 - 석굴암이 들려주는 통일 신라 이야기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는 한국사 그림책 17
김일옥 지음, 구연산 그림 / 개암나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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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최고의 예술품이야.”

“너무나도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있어. 놀라워!”

나는 사람들의 감탄에 어깨가 으쓱했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역사를 이어 온 신라 사람들의

뛰어난 예술성과 지혜를 인정받은 거야.

바로 우리 민족의 슬기와 믿음으로 만들어졌기에,

석굴암이 오늘날까지 신비로운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p.59

 

누가 하는 얘기일까? 석굴암 본존불 뒤 편에 있는 십일면관음보살이 하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는 관음보살이다. 관음보살은 천 년의 세월 동안 토암산 자락에서 세상의 흥망성쇠를 바라보며 사람들이 간절히 비는 소원을 들어왔다. 누구에겐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또 누구에겐 할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관음보살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든 것은 석굴암과 불국사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는 소식이었다.

 

『천 년의 꿈을 담은 평화의 부처님』은 석굴암의 십일면관음보살이 들려주는 석굴암의 이야기다. 관음보살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시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정세와 수나라의 국제관계가 어떠했고 어떤 계기를 통해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뤘는지를 알려준다. 통일 이후 당과 신라의 전쟁, 발해의 건국 배경을 설명해 준다. 통일 신라는 나라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어떤 일들을 했는지, 그 와중에 민심을 잡기 위해 경덕왕이 불국사를 짓게 된 계기를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실린 석굴암 건설에 얽힌 전설도 빼놓지 않는다. 김대성이 석굴암 천정돌을 올려놓을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부처가 도왔다는 이야기다. 누가 도왔건 그 시대에 이런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정교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신비로울 따름이다.

 

이야기는 신라의 쇠망과 이후 고려의 건국, 조선시대를 거치며 산속에 잊혀져 있던 석굴암에 대해 말해준다. 석굴암을 볼 때 가장 마음 아픈 일이 일제 시대에 일어난다. 이때 행해진 보수 공사 때문에 석굴암은 자연 환기 기능을 영원히 잃어버렸다. 천 년 전의 과학을 근대의 기술이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의 문장이 좋았다. 아이에게 조근조근 말을 건네는 듯한 어투, 시처럼 운율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덕분에 본문의 글을 소리내어 읽어보는 맛이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책 말미에는 석굴암에 대한 정보가 실려있다. 구조적 특징, 불상의 비례에 숨은 비밀, 통일신라 시대의 문화재들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어 같은 시대를 일별해 볼 수 있다.

 

이 책은 “유물과 유적 등 우리 역사의 상징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모은 ‘처음부터 제대로배우는 한국사 그림책 시리즈’ 의 열일곱 번째 책이다. 그림책에서 지식책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초등 저학년 아이들에게 역사를 흥미롭게 접하게 해줄 수 있는 알찬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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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 상처 입은 뇌가 세상을 보는 법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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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말을 거는 것은 기도다. 신이 말을 걸어 온다면 그것은 조현병이다.

토머스 새스

 

 

 

『NeuroLogic(신경학의)』라는 건조한 원제목의 책이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으로 번역돼 나왔다. 잘지은 제목이다. ‘신경학’이라는 표제였다면 끌리지 않았을 책을 단번에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뇌라는 기관을 통해 번역되며 우리는 그 번역 이상을 알 수 없다. 뇌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또는 ‘지어내’는지에 따라 좋은 삶을 살 수도 불행한 삶을 살 수도 있다. 책은 뇌에 대한 다양한 신경학적 사례와 분석을 통해 뇌가 어떻게 ‘나’를 형성하는지를 보여준다.

 

놀라운 이력의 저자다. 아직 30세가 채 되지 않은 엘리에저 스턴버그는 예일대학교 예일-뉴헤이븐 병원의 상주의다. 17세 때 철학과 신경과학을 아우르는 첫 저서 『우리는 기계일 뿐인가』를 출간했다. 22세에는 뇌의 결함이 있는 사람의 도덕적 책임이라는 문제의식을 풀어낸 두 번째 책을 저술했다. 이번 책이 세 번째다. 신경계 질환 환자들을 직접 진료한 사례와 기존의 연구들 또 기술 발전으로 근거가 보강된 이론들을 통해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의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하고 한다.

 

8장에 걸쳐 전개되는 이야기는 각 장이 따로 떨어져 있다기 보다는 앞장에서 제시한 문제가 해결되면서 잇따라 제기되는 의문을 연결해서 풀어가며 전개된다. 1장에서 의식계와 무의식계가 어떻게 나뉘어져 있는지 서술하고 2장에서는 무의식계가 하는 일에 대해 3장에서는 무의식계를 훈련하는 방법을 다룬다. 4장은 의식계와 무의식계가 어떻게 한 사람의 서사를 써내려 가는가를 다루고 5장에선 건강을 잃은 뇌가 왜곡된 서사를 지어내는 경우를 제시한다. 6장에서는 뇌가 자아와 비자아를 구분하지 못할 경우 발생하는 일에 대해 다루고 7장은 인위적인 사고 회로의 변환이 가능한일인가를 탐구한 후 마지막 8장에선 앞 장에서 다뤘던 사실들을 해리성정체감장애 즉 다중인격의 사례에 대입해 정리한다.

 

뇌과학을 다룬 책들에게 읽기 장벽을 느끼는 부분이 뇌의 해부학적 명칭들이다. 이 책은 그런 점을 고려해 책 시작부분에 뇌의 각 부분 명칭을 도판과 함께 실어 이해를 돕는다. 저자의 서술은 쉬운 글쓰기의 전형이다. 가설을 제시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실험 과정을 설명하고 결과를 해설하는 일에 막힘이 없다. 제시된 사례들이 다른 뇌과학 책에서 여러 번 인용된 것들이긴 하지만 저자는 거기에 최신의 과학적 증거들을 보완했다. 예를 들면 fMRI, PET, EEG, EMG와 같은 검사 자료들 말이다. 이 검사가 무엇인지 몰라도 된다. 책에는 친절히 색인과 설명이 붙어 있으니까. 저자는 자신의 접근법이 다르다고 말한다.

 

지금껏 뇌를 주제로 한 많은 책은 대부분 행동 연구에 의존했다. 행동 연구는 새롭고 기발하지만 행동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뇌를 살펴보지는 않는다. p.11

 

이 책에서는 인간의식에 대한 여러 질문을 연구하기 위해 뇌라는 블랙박스를 균열시킨 뒤 내부의 작동방식을 관찰할 것이다. p.13

 

저자는 기존 연구의 가설을 위한 신경과학 연구 결과를 활용한다.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킨 사람의 뇌가 어떻게 오작동하고 있는지 fMRI를 통해 들여다본다. 일반인의 뇌와 뇌질환자의 뇌가 서로 다르게 활성화되는 지점들을 머리 속 영상으로 비교해 보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행동 연구에 비해 과학적일 뿐 아니라 다양한 추정의 확실한 근거가 된다.

 

뇌과학에 대한 상식이 충만한 상태에서 최신의 연구 동향을 보고 싶은 독자에겐 평이해보일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책의 부제처럼 ‘상처 입은 뇌가 세상을 보는 법’이 궁금하다면, 쉽게 뇌과학에 대한 개략적인 책을 훓어 보고 싶은 독자라면 일독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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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프 이너프 - 진실을 직시하는 강인함에 관하여
데보라 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책세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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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감상주의를 배제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미학적‧정치적‧도덕적 의무를 열정적으로 설파했던 여성 작가, 지식인 그리고 예술가들에 관한 책이다. p.9

 

시몬 베유가 궁금했다. 그녀의 저작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은유 작가의 책에서 등장하는 인용구에서 느껴지는 강렬함에 매료됐었다. 예를 들면 『노동일기』중의 아래와 같은 대목이 좋았다. 시몬 베유는 어떤 사람인지 그녀의 사상의 맥락은 어떠한지 궁금했다.

 

“밭을 가는 농민이 자기가 농민이 된 것은 교사가 될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회 체제는 깊이 병든 것이다”

시몬 베유 『노동일기』中

 

데보라 넬슨의 『터프 이너프』는 시몬 베유를 포함해 6명의 여성 작가들을 다룬다. 그들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작가들”이며 “현실의 고통에 맞서 연민, 위안, 구원이라는 마취제를 거부하고 냉철한 사유의 날로 진실을 도려낸 강인한 삶”을 살아간 이들이다. 한나 아렌트, 메리 메카시, 수전 손택, 다이앤 아버스, 조앤 디디온이 그들이다. 한나 아렌트와 수전 손택 이외의 작가들은 내게 낯설었다. 그러나 그들이 “진실을 직시하는 강인함”을 추구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책을 읽어볼 용기를 냈다.

 

사실 철학이나 사상을 다루는 책을 수월히 읽어내지 못하는 편이다. 논리적 사유 훈련이 안된 것인지 문해력이 떨어지는 것인지 서사가 없이 생각을 이어가는 책들은 읽기가 힘들다. 사사 위주의 편독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이 책 역시 읽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저자-가 말하는 바에 어느 정도 가까운 이해에 달했는지도 의문이다. 그냥 문장을 따라가는 것도 힘들었다고 고백해야겠다. 철학적 사고 미숙련자가 읽기에 『터프 이너프』는 장벽이 높은 책이었다. 우선 개념들이 문제였다. ‘작인’, ‘수난’, ‘천형’, ‘복수성’, ‘미학적 매니페스토’ 같은 용어의 의미가 얼른 와 닿지 않았고 사전적 의미를 찾아 뜻을 새겨도 문맥이 난해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또 하나의 독서 장벽은 각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 부족이었다. 저자 데보라 넬슨의 서술은 각 작가들의 전기적 사실과 작품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했다. 작가들의 삶에 대한 일별이 필요하다. 책 또는 (사진)작품을 읽거나 본 일이 없는 상태에서는 저자가 말하는 ‘터프함’의 흐름을 쫒는 일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 독서에 가까웠다.

 

저자가 ‘들어가며’에 소개한 작가들의 면면이다. 작가들에 대한 일목요연한 정보 습들을 위해 이 부분을 주의깊게 읽어둬야 한다.

 

시몬 베유Simone Weil는 금욕적이면서도 자유로운, 특유의 신비주의적 기독교 사상으로 세계대전 종전 후의 종교적 부흥에서 컬트적 인물의 위상에 올랐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정치철학자 중 한 명으로 오히려 시간이 흘러 당대에서 멀어질수록 통찰의 별이 더욱 환히 빛나고 있다. 소설가 겸 비평가로 명성을 크게 얻었던 메리 메카시Mary McCarthy는 자서전과 베스트셀러 소설 《그룹The Group》으로 여전히 미국 문학사에서 중추적 입지를 유지하고 있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20세기 후반의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한 지식인이자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본인의 예술적 저작은 비록 기대에 못 미친다 해도 예술과 정치의 비평가로서는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이앤 아버스Diane Arbus는 전후에 누구보다 큰 영향을 끼친 사진작가이자 예술가다. 그리고 조앤 디디온Joan Didion은 기자,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로 오랫동안 성공가도를 걷다가 회고록 《마술적 사유의 한 해The Year of Mafical Thinking》의 출간과 바네사 레드그레이브Vanessa Redgrave가 주연한 동명의 브로드웨이 연극(각색)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pp.9-10

 

저자가 이들 작가를 하나의 책으로 묶어낸 이유에 대한 서술이 이어진다.

 

이 책에서 이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문체의 유사성과 함께 20세기 후반 미국을 사로잡았던 고통과 정서적 표현의 문제에 대해 공통적인 관점을 견지했기 때문이다.……이 여성 작가들은 직접적이고 선명한 시각으로 위로도 보상도 없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과업을 자발적으로 떠맡았기 때문에 터프하다. p.11

 

이 여성 작가들은 모두 “감정의 실패를 해명하라는 요구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만일 남성작가들이 이들과 같은 태도로 글을 쓰거나 작품 활동을 했으면 과연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과하게 냉철하다는 평가는 있었을지언정 “자비심이 없다”거나 “얼음처럼 차다”고 지적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페미니즘의 테두리 안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비슷한 부류의 남성 작가, 지식인, 예술가가 이들의 성격묘사를 뛰어넘는 비정함을 삶에서 혹은 예술에서 보여준 경우는 있으나 감정이 없다는 비판을 받은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pp.12-13

 

책에서 말하는 감정을 절제한 ‘터프함’은 “현실 자체를 민감하게 인식하는 감수성”을 가지고 “현실을 직면할 의무”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혼자서, 또 타인들과 함께, 수난에 맞서”는 일을 의미한다. 각 저자가 ‘터프함’을 실행한 방법은 제각각이다. 베유는 ‘수난’에 ‘주목’하기를 요청한다. 처절한 수난의 과정에 공감하기보다 사려 깊게 사고하라는 말이다. 이러한 생각은 아렌트에게 이어진다. 아렌트는 수난이 지닌 감정적 장악력에 매몰되지 않기를 요구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익숙해진 ‘무사유’의 개념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아렌트의 ‘무사유’는 “고의로 생각을 하지 않는 행위”고 “사유를 미루는 짓”이었다. 그저 생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닌 모든 결과를 예측할 능력이 있고 어쩌면 무의식 중에 참혹한 결과를 원하면서도 그 과정에 대한 사유를 회피하는 일이다. 무사유의 동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의 회피”다. 아렌트는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을 감지했을 때 “무사유를 선택”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도 예외일 수는 없겠지만 언론을 장식했던 ‘기억상실자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렌트는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지만, 진정한 위험은“그 문제를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았기에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기억이 없는 사람은, 거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을 거부함으로서 악은 격화되는 게 아니라……부유浮游하게되므로 한계를 모르게 된다. p.175

 

6명의 여성 작가들은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자신의 주장하는 바를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다. 겁먹거나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이 책의 모든 여성 작가들이 그렇듯, 이 공격성은 주로 남성성을 거세하는 못된 여자의 전형으로 비쳐, 손쉽게 개인적‧젠더적 측변으로 치부되며, 결국은 매카시가 연구하고 정성껏 설명한 더 일반적인 원칙들을 가려버리게 된다. p.186

 

이 작가들이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부분도 흥미로웠다. 시몬 베유는 메리 메카시에게 번역되면서 미국 땅에 알려졌고, 한나 아렌트와 메카시는 한 직장에 일하면서 “같은 편에 홀로”서 있는 관계였다. 수전 손택은 메리 메카시가 누렸던(?) 미국 문단의 다크 레이디라는 호칭을 물려받았고 다이엔 아버스의 사진을 비평했다. 조앤 디디온은 산문에서의 다이엔 아버스로 비교되곤 했다.

 

여성이 감정적이라는 흔한 통념을 넘는 여섯 명의 작가들을 알게 된 좋은 독서 시간이었다. 배경 지식 부족으로 저자의 의도에 다가가는 읽기가 되지는 못했지만 궁금했던 시몬 베유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한나 아렌트와 수전 손택의 생각을 얼마간 더 이해하게 됐다. 낯선 이름이었던 메리 매카시, 다이앤 아버스, 조앤 디디온을 다른 세 작가의 삶에 기대어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다.

 

책의 역자는 여섯 명의 지성인들이 “누구보다 ‘차가운’ 현실 인식을 견지하되 사회적 불의나 정치의 실패로 부당하게 수난받는 약자들을 구제하고 개혁을 선도하려는 의지만큼은 ‘뜨겁다’”고 주지한다. 이 대목에서 그녀들이 제시한 “환상 없는 현실 직시에 근거한 유효한 정치적 비전”과 법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혐오와 수치심』등에서 주장한 “법과 제도 뒤에서 작동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감정들”의 차이가 궁금해졌다. ‘사회를 직시하는데 배제해야 하는 감정’과 ‘법을 집행하는데 배제할 수 없는 감정’은 서로 어떤 교집합과 여집합을 가질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많은 책들 사이에서 헤매야할 게다. 그 사이 또 감당할 수 없는 괴로운 ‘감정’에 휘말릴 것이다. 현실을 직시해 호기심에서 비롯된 감정을 냉철히 다스리고 나의 분수를 깨달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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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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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의 전개와 상관없이 소재 자체가 한 권의 소설을 끌고 갈 때가 있다. 소재가 특수하거나 희소할 때 가능한 일이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이 그런 경우였다. 나치, 히틀러,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때의 사람들이 그 시간의 참상에 대해 여전히 증언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 직후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날 때까지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의 서사가 주를 이뤘다면 최근에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나치에 동조했던 사람들이 입을 열고 있다. 그 사람들은 이제 삶의 마지막에 닿아 있다.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어쩔 수 없었지만 평생 죄책감을 갖게 했던 수치스러운 기억들을 풀어놓고 있다.

 

원제 ‘Le Assaggiatrici'는 ’맛, 감정인‘ 정도의 뜻이다. 평범한 단어의 원제와 비교하면 국내 제목은 소설의 소재와 내용을 정확이 버무려 독자에게 내놓았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정보가 알려졌지만 히틀러에 대해서는 여전히 궁금한 지점이 있다.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독재자의 삶은 어떤 것인지 말이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기미상궁‘쯤 될 여성집단을 뒀었다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실존인물의 증언을 바탕으로 썼다고 하니 상상으로만 이뤄진 문장이 아니라 목소리를 풀어낸 이야기이다. 소설이라고만 말하기엔 강렬한 사실성이 마음을 울렸다.

 

‘로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은 전쟁 중 외톨이가 되어 시부모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 어느 날 히틀러의 친위대가 찾아와 ‘직장’에 차출된다. 이른바 히틀러의 ‘시식가’가 된것이다. 음식이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지 아닌지를 판정하는 실험대상으로 일해야 했다. 살기 위해 먹는 음식이 죽음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 한 사람의 목숨을 위해 다수의 타인이 생명을 걸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다른 시식가 여자들과의 관계, 독일군 장교와의 사랑, 패망을 앞둔 시점의 극적인 탈출 과정이 이어진다.

 

로자는 시식가로서 함께 생활했던 엘프리데를 오랫동안 기억한다. 그녀는 신분을 속인 유대인이었다. 자신의 위태로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다른 친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의 가족을 위험에 노출시키면서까지 그들을 돕는다. 하지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그녀를 보호하지 않는다. 자기들의 안위만을 생각한다. 밀고에 밀고가 이어진 끝에 엘프리데와 그녀의 아버지는 수용소로 유배된다. 유대인이라는 이름은 타인을 위해 했던 모든 행동과 함께 했던 시간을 무화시켰다. 누가 악인인가. 로자는 엘프리데를 수용소로 보낸, 한때 연인이었던 나치 장교에게 말한다.

 

“당신 잘못이고말고.” 내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야.” p.343

 

로자의 아버지는 나치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을 잃었다. 그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로자는 나치에 부역한 자신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만, 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도 생각한다. 로자의 아버지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같은 상황에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일단 용인하면 그 정권에 대한 책임을 네게도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가 속하는 국가 체제 덕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은둔자조차 말이다. 알아들었니? 네게는 정치적 죄악에 대한 면죄부가 없다, 로자. p.196

 

소설 속 로자의 실존 인물 ‘마고 뵐크’는 생의 끝에서 시식가로 지낸 자신의 시간을 고백했다. 70년의 시간동안 두려웠을 것이다.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볼까 싶고 한편으론 시식가로서 자신이 보낸 시간 동안 죽어간 생명들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동료 유대인들에게 문신을 새기면서 살아남은 유대인의 실화를 담은『아우슈비츠의 문신가』도 비슷한 경우였다. 랄레 소콜로프는 독일 패망 직전 수용소를 탈출했고 나름 성공적인 생을 살았지만 죽기 얼마 전 부역자로서 자신의 삶을 밝혔다. 명백한 가해자와는 달리 목숨을 담보로 한 부역자들에 대한 단죄는 어떠해야 하는 걸까. 고민해볼 일이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역사가 있기에 더 관심을 가지고 숙고해 봐야할 것이다.

 

로사의 실제인물 마고 뵐크

사진출처: https://www.spiegel.de/fotostrecke/photo-gallery-the-woman-who-tasted-hitler-s-food-for-poison-fotostrecke-95062-5.html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상황과 대비되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나치와 관련한 증언과 기록은 이렇게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인류가 어떤 일까지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가”가 된다. 우리는 어떤가. 부역자에 대한 고민은 고사하고 친일파 정리도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 이 리뷰는 문예출판사에서 가제본을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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