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지구 벙커X - 강영숙 장편소설
강영숙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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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전 세계에서 확산되고 있어 일상생활의 흐름이 멈추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코로나19 정보를 먼저 확인한다. 권고에 의해서든 스스로 그러하든 고립을 경험하고 있다. 재난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는 강영숙 장편소설 『부림지구 벙커X』가 궁금해진 이유이다. 재난으로 인해 일상생활이 붕괴되고 고립될 때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은 어떨까 글자로 읽어보고 싶었다.


책에서 일어난 재난은 지진이다. 지진이 난지 1년도 더 지난 후 벙커X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구조대원도 의료인도 경찰이나 공무원도 아닌 일반인이다. 일반인 중에서도 중산층이나 지식인이 아닌 도시 빈민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수진의 집 가정부로 일하면서 밤에는 과자를 먹으며 텔레비전 드라마나 보다가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드는 게 좋았다. 그렇게 살다가 죽고 싶었다. (p.39)

가진 것이 없어 재난이 와도 잃을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누리는 따뜻한 기쁨이기에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일상의 행복이 더 커 보인다.


지진이라는 재난을 다루고 있지만 『부림지구 벙커X』는 재해 상황에서 인명을 구하는 영웅 이야기나 삶을 재건하기 위해 애쓰며 희망을 찾는 이야기는 아니다. 제철단지와 부림타운으로 이루어진 부림지구가 생성되어 전성기를 지나 쇠퇴하여 폐쇄되고 지진으로 봉쇄되기까지 부림지구에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재해로 인해 타인에게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해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상황은 느슨한 허구이고,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실제의 재해와는 다른 하나의 은유에 불과하다. (p.296)

작가의 말에서 강영숙 작가가 『부림지구 벙커X』에 대해 말한 것처럼 소설 속 지진이라는 소재의 역할은 재난이 가지는 위급한 이미지에 비해 느슨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지진이라는 재난을 당한 인간이라는 점보다 인간은 자신이 내면화한 가치관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가라는 점을 더 생각하며 읽게 되었다.


부림지구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누구든 몸 안에 칩을 넣어야 했다. 범죄자와 불법체류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이재민들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몸에 칩을 넣고 정부의 관리 대상이 된 사람들은 부림지구를 벗어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으면 부림지구에 고립되었다. (p.15)


부림지구는 지진 이후 피난 지시 구역이 되었다. 정부는 이재민들의 몸에 생체 인식 칩을 넣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킨다. 벙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정부의 소거명령을 피해 벙커에 숨어산다. 부림지구 벙커X에 사는 사람들의 문제는 이제 지진이 아니라 생체 인식 칩이다. 벙커에 사는 사람들은 지진 이후 1년 넘게 식량과 생필품을 정부 구호물품과 부림타운에서 훔쳐온 것에 의지하고 있다. 정부는 부림지구에 대한 재난 지원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벙커X에 남은 사람들은 지진이 다시 일어날 위험을 감수하고 존엄은 커녕 생명을 지킬 최소한의 식량과 생필품도 마련하지 못하는 벙커생활을 계속 하려는 것일까? 생체 인식 칩을 넣고 정부의 관리 대상이 되어 다른 지역에서 도시 빈민으로 또 다시 살아가야할까? 인간은 존엄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존엄과 정체성은 생존보다 우선되는 가치일까?


『부림지구 벙커X』의 인물들이 서로 다른 선택을 했듯이 독자들도 각자 다른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물들이 서로의 선택을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 했듯이 독자도 그럴 것이다. 하나의 정답을 찾을 수는 없는 질문이기에 자신의 선택에도 타인의 선택에도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 『부림지구 벙커X』가 가야할 길이다. 물론 현실은 다르다는 것이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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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알아야 할 음식 이야기
갈리아 타피에로 지음, 마르조리 베알 그림, 밀루 옮김 / 개암나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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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32회 무앙 사르투 북 페스티벌

'지구를 위한 도서' 아동 부문 수상!


인류학 박사가 쓰고 법학 전공자가 그린 음식 이야기 책이다. 글을 쓴 갈리아 타피에로는 '사전, 백과사전,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자아내는 물건들, 그리고 꿈꾸게 하는 여행'을 좋아하는 작가다. 직접 출판사를 차리고 아동책을 쓴다고 한다. 인류학을 연구했던 작가라서인지 책의 구성이 마치 음식문화사를 읽는 듯하다. 그림을 그린 마르조리 베알은 법학을 전공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 쌍둥이를 키우고 있어서일까. 그림의 색감이 아이들에게 최적화되어 있다.




알록달록한 식재료 그림이 눈길을 잡아 끈다. 유아용 그림책으로 보일만큼 예쁘다. 책 속 내용은 아기자기한 그림만큼 간단치 않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주제 문장 아래로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알아야 할 내용들이 꼼꼼히 정리돼 있다. '숨 쉬거나 자는 것처럼 먹는 건 필수!'라는 주제로 음식의 중요성을 먼저 설명한 후 '구석기 시대, 먹는 건 곧 생존!'부터 '함께, 즐겁게, 오래 먹기 위하여!'까지 모두 21개의 주제로 음식 이야기를 펼쳐 간다.




'구석기 시대, 먹는 건 곧 생존!', '불을 이용하여 음식을 익혀 먹다', '농경과 정착 생활이 가져온 변화들'을 서술하는 페이지는 먹는 일의 역사를 시간 순으로 보여준다. 구석기 수렵 채집 생활에서 신석기 농경 생활의 먹거리 문화의 차이를 설명한다. '생활의 지혜, 발효', '음식은 어떻게 보관했을까?'에서는 오랫동안 음식을 저장하기 위한 방법들이 발전한 과정을 보여준다. 한 페이지에 안에 몇 줄의 문장으로 서술된 요약이지만 각 주제를 훑어보기엔 부족함이 없다.


음식을 먹는 이유에 대해 '건강해지기 위해 먹다'를 주제로 한 페이지에서 알아보고 음식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역사도 알아본다. 음식은 부의 상징이기도 했고 국경을 넘나들며 나라 간 무역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달콤한 음식은 예나 지금이나 인기'이데 시원한 샤베트가 8세기 바그다드에서 기원한다는 재미있는 사실도 발겼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세계의 연간 1인당 설탕 소비량이 35킬로그램에 이른다는 놀라운 사실도.


종교나 지역에 따라서도 음식 문화는 달라진다. 식사를 하는 시간도 제각각인데 기후와 해가 떠 있는 시간에 따라 차이가 난다고 한다. 식사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나라는 프랑스, 가장 짧은 시간을 쓰는 나라는 멕시코다. 우리나라의 식사시간은 짧은 편일까. 긴 편일까.


육류 소비 증가로 환경이 파괴되는 일, 지나친 식사로 인한 비만은 현재 대두되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 주제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고기는 채소보다 생산에 소비되는 물의 양이 몇 배나 많고 식량부족보다 과열량이 인간의 죽음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


반면, 몸에 해로울 정도로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가 심각해지는 경우도 있답니다. 2016년부터는 과체중이나 비만으로 죽는 사람이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보다 더 많아졌어요. 실제로 성인 2명 중 1명은 과체중이거나 비만이지요. 그리고 이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답니다.


1킬로그램의 소고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15,0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답니다. 반면에 감자 1킬로그램을 재배하는 데에는 600리터의 물만으로 충분하지요. 그런데도 절반 이상의 토지가 가축을 사육하는 데 사용되고 있어요.


책 내용 중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환경에 해롭지 않은 먹거리, 곤충'이라는 주제였다. 곤충이 미래의 음식으로 고려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벌써 '해롭지 않은 먹거리'로 제시된다니. 포크에 꽂힌 하얀 애벌레를 아직은 맛있는 음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말이다. 미래를 위해서 곤충을 먹거리로 인식하는 일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인식의 전환에 상당 기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함께, 즐겁게, 오래 먹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건강한 먹거리를 먼저 찾는 일,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 일 등이다. 『어린이가 알아야 할 음식이야기』는 우리가 먹는 일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거의 모든 주제를 담고 있다. 이 얇은 책 한 권으로 먹거리에 대한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먹는 일에 대해 호기심가는 주제를 선별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관심있는 주제에 대해 더 넓고 깊은 읽기를 이어가는 일은 각자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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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내
A.S.A. 해리슨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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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실한 건축가 남편과 조용한 심리상담가 아내가 나무랄데 없는 저택에 산다. 아이 없이 개 한 마리를 키우고 각자의 일에서도 성취를 거둔 부부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위해선 이렇게 남부러울 것 없는 부부가 비밀스러운 문제를 안고 있게 마련이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부 자신도 모르는 듯 감춘,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 예를 들면 남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아내 같은 문제 말이다.

 

A.S.A. 해리슨의 소설 『조용한 아내』에는 탁 트인 호수와 하늘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저택에 사는 조디와 토드 부부가 등장한다. 토드는 자수성가한 건축가로 활동하고 조디는 개인심리상담가로 일한다. 외모조차 아름다운 조디는 자신의 이룬 가정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그 아름다운 울타리가 영원히 유지되길 바라며 집안 내외를 가꾸고 남편 내조에 헌신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법적 부부가 아니다. 함께 살 뿐 결혼식을 올리지도 혼인신고를 하지도 않았다. 왜?

 

인생에 주어진 안정과 안전에 감사하며 그녀는 매일의 자유를, 요구와 복잡한 문제가 없는 삶을 소중히 여긴다. 결혼과 아이를 포기하면서 그녀는 여유로운 공간을 보장하는 깨끗한 백지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p.26

 

조디는 남편 토드가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안다. 하룻밤 상대부터 지속적인 관계까지 대상이 많은 것도 안다. 심지어 토드도 그녀가 안다는 사실을 안다. 둘에겐 가식의 삶이 중요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을 유지하기위해서 표면적인 평온을 유지하고자 한다. 조디는 ‘주변 사람들의 개별적 욕구와 특이성을 함께 수용하는 태도’로 계속 타협하는 과정이 ‘잘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한 가지 조건만 유지된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욕구나 기대를 충족시켜주려 여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항상 우리를 친절히 대하라는 법도 없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분노와 분개의 감정만이 남는다. 마음의 평화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긍정적인 면을 강조할 때 온다. p.35

 

조디는 토드의 여자관계가 지나가는 바람으로 끝날 것임을 확신하고 토드 역시 불안한 관계들을 지속할 마음이 없다. 그저 남성성을 과시하며 즐기고 싶을 뿐이다. 그것이 남성의 당연한 본성이라고 여기며. 결혼관계가 유지되고 안정된 생활만 보장된다면 남편의 바람쯤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믿음은 위대롭기만 하다.

 

 

“남자들 모두 언젠가는 바람을 피워요. 이런 식으로든 저런 식으로든. 내 아버지는 술과 바람을 피운 거죠.”

“난 알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에게야 어떻게 보이든, 결혼으로 맺은 유대 관계는 파괴될 수 없는 법이거든요.” p.78-79

 

파국은 두 사람에게 먹이를 향해 질주하는 갈매기처럼 다가온다. 작가는 종종 주변의 묘사를 통해 상황의 진행을 암시한다. 모든 단서를 무시하고 지금까지의 방식대로 남편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조디와 여느 여자들처럼 적당히 헤어질 거라고 여겼던 토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막다른 길에 갇힌다.

 

 

갈매기들은 망설이지도 어물쩍거리지도 않고, 수면 아래 자기들이 원하는 게 있다는 걸 알아챈 순간 전속력으로 곤두박질치며 무모하게 공격한다. 그들의 시끌벅적한 소리, 인간으로 치면 큭큭거리고 고소해하는 소리에도 먹이는 도망가지 못한다. 무엇이 덮치는지 알기도 전에 통째로 삼켜진다. p.135

 

스릴러라는 장르에 아들러 심리학을 결합한 소설이라고 했다. 한때 대단히 유행했던 아들러 심리학이지만 관심을 두지 않았던바 아는 게 없다. 어떤 부분이 아들러 심리학을 차용한 것인지 알고 싶었다. 검색해보니 아들러 심리학의 주요 개념들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개념들이 소설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흥미롭게 읽는 한 가지 팁이 될 것이다. 코앞에 닥친 상황에 대해 인물들이 각각 어떻게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지, 인물들의 관계는 어떤 결과로 나아가는지에 주의해볼 수 있다. 또 조디와 토드의 행동의 원인이 되는 열등감의 유래와 가족 구도, 출생순위의 영향 등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아들러 심리학을 기반으로 상담하는 조디가 내담자에 대해 하는 분석과 자신 스스로를 분석대상으로 삼는 부분도 비교해서 읽어보는 재미가 있다.

 

개인심리학의 특징은 행동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목적을 분석하고(목적론), 인간을 분할할 수 없는 전체로서 파악하여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 등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고(총체론), 객관적 사실보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주관적 의미부여 과정을 중요하게 보고(현상학적 관점), 내적 정신세계보다 대인관계를 분석하고(대인관계론), 주체적 결단능력을 중요시한다(실존주의)는 것이다. 주요 개념으로는 열등감과 보상, 우월추구, 생활양식, 허구적 목적, 공동체감과 사회적 관심, 가족구도와 출생순위, 삶의 과제 등이 있고, 변화를 위한 핵심 요인으로 격려를 강조한다.

 

『상담학 사전』 2016. 01. 15., 김춘경, 이수연, 이윤주, 정종진, 최웅용, [네이버 지식백과]

 

 

조디에겐 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바람피우기를 일삼는 아버지가 있었고, 토드에게는 가족을 구타하는 알콜중독자 아버지가 있었다. 조디의 어머니는 남편의 외도를 못 본 척 평생을 살았다. 토드의 어머니는 아들이 장성한 후 자신을 보호해 줄 때까지 폭력을 견뎠다. 조디는 삼남매 중 둘째로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서 자랐다. 둘째라는 위치의 특성과 함께 터울이 많이 지는 오빠와의 관계, 또 동생에 대한 역할 등이 그녀의 마음을 형성하는데 심리적 영향을 미쳤다.

 

조디는 어머니의 삶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처럼 결혼과 아이에 묶여 자신의 삶을 잃고 싶지 않았다. 법적 혼인과 아이를 거부한 이유다. 하지만 그녀가 피하고 싶어 했던 어머니의 삶은 스스로 회피했던 조건들로 인해 자신에게 그대로 반복된다.

 

제러드: 어떤 면에서는 부모님이 저지른 실수의 대가를 당신이 치르는 셈일 텐데요.

조디: 저는 제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싶어요. 행복해지고 싶어요.

제러드: 행복한 우리가 미리 처방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조디: 제 처지가 어머니처럼 되고 만다면, 탓할 사람은 저 자신밖에 없겠죠. p.164

 

조디는 정말로 토드가 죽기를 바란 걸까. 토드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를 잃으면 자신이 무엇을 잃게 되는지 알고 있었던 걸까.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내 입장은 부정적이다. 조디는 상황에 휩쓸렸을 뿐이다. 냉철해보이지만 실은 순박했던 그녀는 혼란 속에서 자기가 하는 결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우발적인 의도에 따른 결과에 의하면 토드는 조디의 평화로운 삶에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눈이라는 렌즈를 통해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어떤 사건을 전혀 겪지 않았던 듯이 살아가는 능력’을 발견했다. 조디의 ‘능력’은 이번에도 발휘될 것이고 자신이 잃을 뻔한 것이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자유’를 누릴 것이다.

 

숨차게 달려온 모든 서사에도 불구하고 조디의 자기 인식, 세계관, 믿음의 변화와 그에 따른 주변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변화가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아들러식 결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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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서 도착한 생각들 - 동굴벽화에서 고대종교까지
전호태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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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선사 문명에 대한 책을 읽을 때마다 한반도의 선사시대는 어땠을까 하는 질문이 따라다녔다. 인류 최초의 문명들이 빛을 밝히는 시기, 우리 땅의 조상들은 어떤 발전의 단계에 있었을까 궁금했다. 대략의 연대를 따지며 어림해보기도 했다. 연대별 역사의 흐름을 서술하기보다 유물, 유적을 바탕으로 하되 너무 흥미에 치우치지 않는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고대에서 도착한 생각들』은 선사시대를 산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그것을 신앙으로 삼아 종교로 키웠는지를 다룬다. 구석기를 다룬 부분은 유럽 초기 벽화들을 사례로 삼고 이후 신석기 시대를 지나면서 한반도 문명을 주요 소재로 다룬다.

 

저자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책 머리에서’ 이 책이 사상사나 종교사와는 거리가 있다고 밝힌다. 오히려 ‘나와 역사의 만남’ ‘내가 역사와 나누는 대화’에 가깝다고 적고 있다. 저자의 의도를 반영해 책은 시종 대화체로 서술된다. 학자인 아버지와 대학생 아들의 대화다. 지인 부녀도 등장해 대화에 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아들 또래에게 설명하듯 이어지는 대화체가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익숙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료가 부족한 고대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옛날 얘기하듯 풀어내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하고 보면 어색한 감을 얼마간 줄 일수 있을 듯하다. 또 대화의 상대가 대학생이고 보니 주고받는 질문의 수준이 고대 사상을 다루기에 부족함이 없다. 역사 이야기를 하다 아들과의 일상사가 불쑥불쑥 끼어드는 부분을 쉼표로 생각하면 진지한 독서에 그리 방해되는 바는 아닐 것이다.

 

저자는 선사시대 사람들에 대한 현대인의 평가에 일침을 가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돌도끼를 들고 짐승을 잡으러 다녔다고 해서 그들의 인지나 사고가 우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사실 선사시대와 지금을 비교하면 논리적 전개 과정이 더 복잡해진 것 말고는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 우주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이 질적으로 얼마나 크게 달라졌는지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p.5

선사시대는 현재와 문명적, 기술적 차이가 아주 커. 그러나 이것이 현대인이 선사시대 사람보다 인지적으로 앞섰다는 걸 뜻하지는 않아. 현대인이 인지적 깊이에서는 오히려 대단히 원시적일 수도 있다. 탐욕과 편견에 깊이 물든 현대인이라면, 그 사람은 오히려 선사시대 사람보다 더 야만적인 존재일 수도 있지. p.19

책에는 문명의 발달이 인간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를 각 장마다 질문으로 던진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토기의 발명으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농경은 신석기시대 사람의 생각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유교는 고대 한국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와 같은 질문이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치면서 도구의 발전은 인간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대화가 이어진다. 삼국시대의 건국이야기는 어떤 생각을 담은 신화들이 있는지 소개하고, 고대의 샤머니즘과 음양오행론이 어떻게 우리의 생활와 사상에 자리잡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후반부에는 불교, 신선신앙, 도교, 유교 등이 어떻게 전래되어 우리의 사고와 문화를 바꿨는지 살펴본다.

 

단군 신화에 대한 해설에서는 샤머니즘 신화에 대한 불교의 영향을 알 수 있었다. 환인이라는 하늘신의 이름이 불교의 유래에 따라 바뀐 것이라는 말이다. 유럽 신화의 변천에서 볼 수 있는 여성신의 남성신으로의 교체 현상이 단군 신화의 변천에서도 나타남을 살필 수 있다. 탄생의 주체로 숭배받던 여성신들이 청동기 무기와 전쟁의 확산에 따라 남성신에게 우위를 내주게 된다. 시대의 조류에 따라 신화도 재서술되고 변화한다.

 

단군은 하늘 사람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 환웅의 아들이고 하늘의 최고 신 환인의 손자다. 청동기시대에 하늘의 주인은 남신이다. 하늘의 임금이던 큰 여신은 청동기시대가 되자 땅의 신이 되었다. 한 신은 올라가고 한 신은 내려왔다. 땅과 하늘의 주인이 뒤바뀐 것이다.

환인의 이름은 본래 ‘하늘님’이었다. 후대에 석가모니 붓다의 불교가 자리 잡으면서 인도의 브라만교, 불교, 힌두교의 하늘신 이름인 환인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p.79

청동제 무기와 연장은 지배/피지배 관계를 성립시켰어. 지배자들은 ‘하늘의 뜻’을 주장하며 노예를 기본적인 생산수단의 하나로 삼게 되었지. … 지배자들은 자신이 하늘신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피지배자들에게 주입하려 애썼어.

철기는 청동기시대의 생산방식과 체계를 보편적이고 항구적으로 만들었어. … 철기는 청동기보다 재료 구하기가 쉬워 이것을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보급할 수 있었어. 덕분에 전쟁의 규모도 커졌지. … 지배자들이 하늘신의 자손이라고 주장하지 않아도 법령과 군대만으로 세상을 통제하는 것도 가능해졌고. 거대한 규모의 제국이 출현할 수 있게 된 거야. 신의 뜻은 이제 현실을 설명하는 배경에 불과하게 되었어. p.171

철기의 등장은 강인한 영웅의 신화를 탄생시킨다. 주몽 신화의 함의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단군 신화와의 비교에서 둘의 차이와 시대의 변화가 어떻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꿨는지 알 수 있다.

철기는 사람들을 강하고 자신있게 만들었지. 쇠로 된 농기구를 지니게 된 농부는 농부대로, 쇠로 된 무기를 갖게 된 전사는 전사대로 자연의 수목과 짐승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어 … 사람들은 자연에서 나는 것은 무엇이든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 pp.181-182

둘의 차이는 단군은 샤먼왕이었고 주몽은 전사왕이라는 점이야. 단군은 그저 나라를 열었지만, 주몽은 나라를 열고 다스렸어. 주몽은 농사로 풍요를 불러왔고 전쟁으로도 풍요를 불러왔지. 주몽의 시대에 세상은 신성한 존재보다 빼어난 전사를 바랐어. … 주몽은 능력으로 신성성을 보여준 영웅이야. pp.186-187

석가모니의 불교는 신분제의 필연을 벗어난 세계관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혁명적인 사상도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자신들이 내생에 붓다가 될 미륵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귀족의 지배를 공고히 했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생각도 권력자의 탐욕에 따라 변형되고 수정된다. 공자의 유교도 크게 다른 길을 가진 못했다. 춘추전국 시대 혼란한 사회를 ‘예의와 염치, 분수’를 지킴으로써 수습하려 한 생각이 신분제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사회 통제수단’으로 사용됐으니 말이다.

 

‘고대 사람들은 인간과 세상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에 대한 쉬운 접근을 원하는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단, 좀 더 체계적인 사상사에 대한 기대를 가진 경우라면 대화체로 이어지는 서술이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저자가 ‘만약 내가 고대 사람이라면’을 전제로 풀어놓은 많은 추정들이 너무 소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역사책을 기대했는데 에세이를 읽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추정들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책 말미에 ‘주’를 붙여 ‘상상’을 하게 된 근거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아주 먼 사람들의 아주 가까운 생각들’이 궁금하다면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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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우리 모두 처음이야!
이주희 지음 / 개암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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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입학식이 있는 날입니다. 입학을 기다리던 아이도, 학교로 출근하는 선생님도, 아이의 엄마도 모두 근심어린 얼굴입니다.

 

각자가 마음에 담고 있는 걱정은 다릅니다. 입술까지 살짝 떨리는 아이는 낯선 학교에 대해 아주 아주 넓고 복잡한 곳에 혼자 갈 일이 걱정입니다. 반에서 제일 작을까 걱정되고 서툰 행동 때문에 선생님께 혼날까 싶기도 합니다.

 

푸르른 수염자국이 있는 터프한 인상의 선생님도 표정이 무겁습니다. ‘좋은 선생님이 되는 비결’이라는 책을 읽어봐도 여린 마음이 진정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말을 안들으면 어쩔까, 반대로 너무 무서워하면 어떡하나, 수업을 지루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합니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도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를 등교시키고 출근해야하는데 늦을까 싶습니다. 자명종을 백개쯤 맞춰놓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이의 공부가 너무 어려울까 걱정이고 다른 엄마들과 친하게 지낼 일도 고민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번쯤 돼봤을 누군가의 모습들입니다.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봄 꽃봉오리가 부풀고 꽃잎이 흩날립니다. 연초록 잎사귀가 짙어갈 무렵 칠판만 바라보던 아이는 앞자리 친구와 이야기도 하고 즐겁게 발표도 하게 됩니다. 호랑이 같은 모습의 선생님이 아이들을 웃깁니다. 아이들은 선생님께 스승의 날 편지도 쓰지요. 아이의 등교를 돕는 엄마도 힘이 납니다. 아침 준비 시간이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단풍이 떨어질 무렵 모두는 즐거운 마음으로 내일을 준비합니다. 아이는 스스로 책가방을 챙기고 선생님은 수업자료를 준비합니다. 녹색어머니회로 아이 등굣길을 보호하는 엄마와 함께 학교가는 아이의 하루가 시작됩니다.

 

처음은 모두에게 낯선 일입니다. 가족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집단 생활을 시작하는 아이들에게는 더군다나 공포스러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엄마의 도움도 가족의 지지도 기대할 수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이 대신 나서서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없고 스스로 해나가도록 지지해줄 수밖에 없습니다. 해마다 새로운 아이를 맞는 선생님도 긴장감이 적지 않습니다. 자신의 지도에 따라 아이들의 학교생활 적응도가 달라질 테니까요.

 

 

입학을 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낯섦이 친숙함으로 바뀔 때가 옵니다. 학교생활은 즐거운 것이 되고 선생님은 보람을 느끼겠죠. 하루가 다르게 학교에 적응하는 아이를 보며 부모는 대견함을 느낍니다. 모두가 내일의 등교를 생각하며 웃음짓는 날이 옵니다.

 

아기자기한 그림으로 아이와 부모 그리고 선생님의 마음을 섬세하게 묘사한 작가가 ‘걱정 더는 비법’을 공개합니다.

 

마음이 콩닥거릴 때 저는 마음들을 꺼내 놓고 가만히 들여다봐요. 물론 마음은 나만 볼 수 있지요. 그리고 마음들을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도닥도닥해요.

 

걱정을 내려놓기가 힘들다면 작가의 비법을 따라 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당장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럴 땐 ‘자꾸 하다 보면 점점 좋아’진다고 하는데요. 처음하는 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당장 적응이 되진 않지만 계속 하다보면 어느새 익숙해지는 날이 올 겁니다. 우리 모두의 처음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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