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 세계 여성사 - 농업의 시작, 생산의 신神 여성
장혜영 지음 / 어문학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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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농업을 시작했던 생산의 신神 여성에 대한 이야기

— 뒤표지 중

 

생물학적측면에서 볼 때 인류는 (대체적으로) 남성과 여성, 두 가지 성으로 구분되어 있다.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생존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 노력은 어느 한 쪽의 성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류가 지나온 시간을 재구성해 기록으로 남긴 것이 역사다. 우리가 아는 인류사는 전 인류의 생존 노력을 모두 기록하고 있는가. 남성과 여성의 삶은 역사에 같은 부피와 질량으로 존재하는가. 모두 아다시피 답은 ‘아니오’다. 우리가 배운 그리고 기억하는 인류역사는 남성사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그들의 침략, 전쟁, 승리, 패배 등의 기록이다. 『신석기시대 세계 여성사』가 눈에 띄는 이유는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의 이야기일뿐더러 기록과 자료가 많지 않은 시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약 1만년 이전에 시작해 지역에 따라 몇 천 년간 계속된 신선기 시대는 문자기록이 당연히 없을뿐더러 유물도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이다. 그러 유물 자료들로 여성의 역사만을 다룰 수 있을지 의아했다. 저자는 이미 『구석기시대 세계 여성사』를 집필한 경력이 있는 저자다. 중국 출신 소설가 겸 학술서 저술가로 소개되는 그는 그 외에도 『한국의 고대사를 해부한다』, 『한국 전통문화의 허울을 벗기다』등의 학술서를 저술했다. 한국사 전문가로 구성된 학계 사람이 아니기에 새로운 시각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다.

 

책은 전문 학술서에 가까웠다. 기존 학계의 불성실한 연구물을 비판하면서 다양한 자료들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공부가 일천하여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얼마나 널리 인정되는지 알지 못하나 그의 주장은 근거 없는 추정이거나 미루어 하는 짐작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마디로 신뢰할 만한 의견으로 보였다.

 

신석기시대 여성의 지위를 결정지은 것은 농경의 유무다. 인류사 초기부터 채집을 담당했던 여성들은 식물과 관련한 지식이 많았으므로 농경이 생산경제의 주를 이루게 되면 권력 또한 그쪽으로 기울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아시에에 농경이 급속히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대충돌 이론을 들어 설명한다. 기원전 12,800년 경 지구에 혜성이 충돌하면서 인근 지역에 급격한 기후변화가 있었고 동시에 남성 인류 다수가 사망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신석기시대 농업과 여성중심의 사회에 영향을 준 대충돌 사건은 다름 아닌 영거 드라이어스 지역Younger Dryas Boundary,YDB에서 1만 2800년 전에 발생한 혜성과 지구의 충독 사건을 말한다. p.52

남자들의 이러한 멸종은 신석기 농업시대 여자들을 새롭게 부상시킨 토대이기도 하기 때문에 비중이 돋보인다. 남자들의 대량피해는 여자들의 독점적인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된 것이다. p.61

 

북미와 서유럽 인근 넓은 지역에서 발생한 대폭발에서 살아남은 여성과 소수의 남성들은 동쪽 고원지대를 거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정착한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지역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는 이렇게 인류 최초의 농경과 문명이 시작될 수 있었다. 수렵을 담당했던 남성들이 없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의 기술 즉 채집과 관련된 농경을 급속히 발전시켰다. 또한 자연재해의 두려움 때문에 집락을 형성했고 사회조직과 문화가 시작됐다. 여성은 당연히 중요한 지위를 얻었고 신격화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 주도한 정주농업은 “식량을 대량으로 수확해서 대규모 비축이 가능한 사회”를 배태시켰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사유재산이 형성되고 계급분화의 싹까지 틔웠다. 농업과 정착이 아니었다면, 남자들이 지배한 구석기시대의 수렵‧채집경제만 가지고는 이 모든 인류문명은 아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신석기시대 초반 여성의 혁신적인 농업 선택과 정착에 의해 그 굳건한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가히 단언할 수 있다. p.109

 

자연은 여성에게 영광의 자리를 마련해주었지만 마찬가지로 추락의 계기도 제공했다. 티크리스, 유프라테스 강 하안 삼각지는 토지가 비옥한 반면 홍수가 잦았다. 여성들이 빈약한 힘으로 쌓은 흙집들은 홍수에 휩쓸리기 일쑤였다. 인구수를 회복한 남성들은 타고난 힘으로 튼튼한 집을 건축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회복해나갔다. 여성 신화의 몰락이 예정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상황은 무역길을 타고 인근 지역으로 전파됐으며 여성이 주도권을 잡는 일은 이후 역사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 사건으로 인해 여성이 지배하고 견인하던 강력한 모권제는 전복되고 부권제가 권력을 대체했으며 남성에 의해 재산은 개인 소유가 되고 축적되면서 남계에 의해 계승되고 상속되기 시작했다. p.190

그런데 부처거주와 그 제도에 의해 파생된 재산의 사유화로 말미암아 “여성의 노동은 사회성을 상실”했으며 원래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던 “인구출산, 자녀양육”은 물론이고 그들의 모든 “가사노동까지 순수한 개인노동”으로 분류되며 어머니신‧여신‧생식신에서 생산을 위한 단순한 생리적 도구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p.256

 

대폭발의 영향을 받았던 서구여성들과 달리 다른 지역들은 역사의 주역이 되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저자에 따르면 아시아의 신석기 시대 연구에서 모계사회와 여신숭배를 주장하는 것은 서구의 신석기 역사 연구 체계를 지나치게 따른 결과라고 한다. 아시아의 신석기 시대는 중국을 제외하면 농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증거가 부실하며 따라서 여성이 권력의 주체가 되거나 모성신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신석기 시대 중기 이후 농업이 시작된 중국의 경우도 권력 전복의 이유가 없었으므로 남성이 농업 생산의 주체가 되었다.

 

농업생산의 담당자‧조직자가 되려면 그 무덤에서 …… 남성 무덤에서처럼 농업생산도구가 출토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돌도끼를 이용하여 나무를 채벌하고 돌괭이로 땅을 고르게 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이 눈부신 활약의 기반 위에서만 비로소 핵심적인 상위권에 등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적 특성을 무시하고 중국의 신석기시대 역사를 모권제가 먼저이고 부권제가 다름이라는 식으로 서양의 신석기시대 발전과정의 패턴에 억지로 꿰맞춰서는 안 된다. pp.369-370

 

한반도 신석기 시대 여성에 대한 장에서 고고학 연구의 자세에 대해 저자가 지적한 바를 새길 필요가 있다. 고고학은 학문이지 민족주의나 애국주의의 일환이 아니라는 말은 남북 연구자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 일 것이다.

 

증거 충분율의 과학적 원칙을 무시한 이러한 연구와 졸속 판단은 결코 진실을 반영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농업 기원의 연대 판단과 같은 고고학적 연구 행위는 심정적인 욕구가 아니라 과학적인 증거에 냉철하게 의존해야만 한다고 할 때 이러한 추정치는 창졸함을 넘어 마땅히 지양돼야 할 그릇된 학술자세라고 생각된다. 학문은 철저히 객관적인 행위이기에 당연히 민족주의나 애국주의 같은 요소를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p.483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가까웠던 인도-파키스탄 및 중앙아시아는 대충돌 피난여성들의 영향으로 농업이 비교적 일찍 발달했고 여성의 지위도 다른 아시아 지역에 비해 높았다. 하지만 그 영광은 서유럽에 비해 짧았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하류에서 시작된 가옥 건축과 관련한 남성 권력의 물결이 일찍이 옮겨왔기 때문이다.

 

고대의 여성사를 다룬 책이지만 읽는 과정의 생각은 고대사 전반의 궁금증에 가 닿았다. 인종적 유래를 밝히지 못했다는 수메르인은 서구 대폭발을 피해 이주한 사람들이었을까. 인도 유럽 어족으로 묶인 집단의 이주는 대폭발이 원인이었던 걸까.

 

신석기 시대 권력의 향방은 물리적 힘의 여부에 따랐다. 물리적 힘의 원천이 멸종에 가깝게 소멸하자 약자였던 여성들이 주도권을 잡을 기회가 왔던 거다. 만약 대폭발로 남성 인구가 대폭 감소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여성에 의한 농업혁명이 도래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성별 쪽에 우세한 역사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역사로 다루어지지 않던 소수의 역사를 다룬 책이 나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적어도 뭔가 변화하고 있다는 거니까. 신석기 시대 서구 여성 주도권이 빛나는 시기는 어느 날 갑자가 하늘로부터 갑자기 왔지만 앞으로의 평등한 세상은 이런 작은 변화들이 쌓여서 오지 않을까. 그런 점진적인 변화들이 모여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적인 현재로 고정되길 바란다.

 

아쉬운 점 몇가지. 중국에서 활동하는 저자의 책이다 보니 사용하는 단어들이 어색한 경우가 다수 있었다. 주장의 근거로 인용한 문헌들이 중국의 것일 때 (아마도) 저자가 직접 번역한 문장들이 매끄럽지 않기도 했다. 본문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는 많은 이미지 자료가 제시되는데도 불구하고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 도판이 너무 작고 해상도가 낮아 알아보기 힘들기도 했고 색깔로 구분됐던 것으로 보이는 자료를 흑백 처리해 자료간 경계를 구분할 수 없었다. 학술서로 좀 더 많은 독자층을 만나길 바란다면 개선해야할 문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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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스 라이크 어스
크리스티나 앨저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시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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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범인이면 어떡하지?’

 

뒤표지에 적힌 이 문장에 호기심이 일어 크리스티나 앨저 장편소설 「걸스 라이크 어스」를 펼쳤다. 단순하지만 낯설지 않아 더 자극적인 미끼 같은 문장이다. 질문은 하나인데 여러 가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까?

희생자는 누구인가?

아버지를 의심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왜 아버지가 범인이라고 생각할까?

아버지가 범인이라면 질문을 던진 사람은 어떻게 할까?

 

넬 플린은 FBI 행동분석팀 요원이다. 강력계 형사인 아버지 마틴 대니얼 플린의 장례식을 위해 10년 만에 롱아일랜드 서퍽 카운티로 돌아왔다. 형사과장 글렌 도시는 오토바이 사고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유해를 뿌린 다음날 강력계 신참 형사이자 아버지의 마지막 파트너인 리 데이비스가 찾아온다. 리 데이비스는 시네콕 카운티 공원에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된 사건을 전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넬 플린은 지난여름 파인 배런스에서 같은 방법으로 살해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된 사건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사고 당시 파인 배런스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 리 데이비스는 ‘희생자가 후진 동네 출신의 윤락녀’라고 말한다. 넬 플린과 리 데이비스는 연쇄살인을 의심하지만 글렌 도시 형사과장은 FBI에 공식적으로 지원요청을 하지 않는다.

조사를 진행할수록 넬 플린은 증거에서 아버지와 연관된 기억이 떠오른다. 일곱 살 때 돌아가신 넬 플린의 어머니와 관련된 사건에 대한 불확실한 기억도 더불어 떠오른다.

서퍽 카운티 경찰은 범인을 특정하고 수사를 진행한다. 검시관 제이미 밀코스키가 설명한 범인의 특징과 맞지 않지만 증거는 무시된다. 앤 마리 마셜 기자는 경찰들이 자백을 강요하고 멋대로 일처리를 한다고 의심하며 서퍽 카운티 경찰이 부패해가고 있음을 알리는 기사를 쓴다. 넬 플린은 아무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단독조사를 계속한다.

 

“그 일 하는 여자들 대부분이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닌 건 알지?”

인생을 어떻게 살지는 다들 선택하는 거잖아.” (p.56)

 

넬 플린의 질문에 리 데이비스가 답한다. 많이 들어본 질문과 답변이다. 마치 자장면과 짬뽕을 고르듯 원해서 선택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미성년자인 십대 소녀가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할 때 메뉴판처럼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칠 자격이 있잖아요. (p.278)

 

그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는 사람이야. (p.327)

 

정당한 법적 절차는 때로 시간이 걸리고 답답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당한 법적 절차는 피의자의 권리를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법이 공정하게 적용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기도 한다. 인간은 종종 명분이라는 목적을 내세우며 부당한 수단을 정당화해왔다. 법적 절차를 정당하게 만들고 지키도록 강제하는 것은 인간이 부당한 수단을 휘두르는 것을 막는 방법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많은 여성들이 유리천장에 막혀 업무에서 좌절을 겪는 것과 달리 넬 플린이 지원과 응원을 받으며 업무수행을 하는 것이 통쾌하다. 반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가부장제가 내면화하도록 강요한 논리가 스며있는 듯 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쉽다.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 성매매 조직, 부패 경찰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자극적인 범죄를 소재로 다루는 콘텐츠는 흔하다. 하지만 지루하고 식상하게 사건을 선정적으로 전시하지 않고 깔끔하게 포장한 것이 「걸스 라이크 어스」가 가진 장점이다.

크리스티나 앨저의 「걸스 라이크 어스」는 빠른 이야기 전개로 몰입도를 높이면서도 친절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점에서 스릴러 소설의 매력을 담뿍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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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웃음의 나라 - 문화인류학자의 북한 이야기
정병호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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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사실은 국민 학교 시절,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겪은 적이 있다. 짧게 말하자면 북한 사람들이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었다. 북한 땅에 사람이 사는 일이 당연할진대 왜 그렇게 놀라게 되었는가가 이 에피소드의 관전 포인트. 바로 <똘이장군> 때문이다. 어린 시절 TV만화영화에 꽤나 심취했던지 나의 무의식 속 북한은 사람이 아닌 동물이 살고 있는 나라였다. 그것도 아주 포악한 돼지와 늑대가 점령한 나라였다. 그렇다고 내가 지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진 않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방송에서 처음 북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문득 깨달았다. "북한 주민은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당연한 사실에 놀랐다. 내 머릿속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똘이장군>이라는 인기 반공물을 반복 시청한 나는 어느샌가 북쪽땅의 주민들에 대한 심각한 무의식적 편견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북한 문제를 생각할 때 언제나 떠오르는 웃픈 이야기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통일의 길을 가려면 서로를 알아야 한다는 논리는 자명하다. 그러나 이 명징한 논리를 체화하기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장년세대는 나의 경우처럼 무의식에 내재된 편견이 깊을 수 있고, 청년세대는 그리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있다. 보이지 않는 편견을 깨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고 불안한 앞날을 제쳐두고 먼 날의 일을 준비하자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는 북한 문제에 대해 조금씩이라도 시야를 넓혀가려면 책부터 읽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정병호 교수의 『고난과 웃음의 나라』는 현 시점의 북한에 대해 무겁지 않게 다룬 책이다.



표지부터 이야기 하고 싶다. 북한을 대표하는 상징물들을 앙증맞게 모아놓았다. 여명이 밝은 것인지 노을이 지려는 것인지 지평선이 발그레한 가운데 금수산 궁전, 김일성 동상, 개선문, 류경호텔(이 책을 일고 이런 훌륭한? 건축물의 존재를 알게 됐다.) 등이 옹기종기 반짝거리고 있다. 그런데 가장 오른 쪽 끝에 장난감인 것처럼 황금색의 미사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북한을 말할 때 반드시 이야기해야 할 것에는 미사일에 대한 주제가 포함돼 있어야 한다고 당당히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거대한 건축물과 조형물 그리고 미사일로 상징되는 나라, 우리의 북쪽 형제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가 담긴 책다운 표지다.


저자는 90년대 후반 북한의 대기근 시절 구호활동가로 방북을 시작했다. 기아에 스러져가는 아이들을 지원하고자 했던 일은 이후 탈북민을 위한 일들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북한의 모습을 가까이 접할 기회들이 있었고 문화인류학자의 시선으로 북한과 북한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문화인류학은 문화의 상대성을 기본으로 한다. 어느 한 문화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고 편견을 거둔 시선으로 대상을 관찰하는 학문이다. 저자도 반공교육을 받은 세대로서 북한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한계를 넘어서 같은 사람으로 그들을 대하려고 노력한 결과가 이 책이다. 때문에 책에는 북한의 실상에 대한 단순한 나열이나, 판단의 시선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그들은 그랬고 우리도 그런 적이 있다"는 식의 서술이 자주 등장한다.


북한사회의 '민주화'는 절실한 과제다. '자주 주권'의 상징으로 핵무기와 미사일을 만들어 체제 안보와 권력세습은 가능했지만 그러는 동안 세계적 빈곤국이 되었다.…… 변화의 물꼬를 열려면 우선 북한사회를 강박적 위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국제적 고립사태가 완화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전쟁종료와 공식수교, 남북교류협력은 중요하다. p.360


남한사회의 '인간화'도 시급한 과제다. 탈북민들의 경험은 이 문제의 단면을 새롭게 보여준다.…… 탈북민들을 지원한다고 모두 예산 타령만 하는데 사실 돈보다 사람이 더 아쉽다고 했다. 외롭고 불안하고 무엇보다도 희망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알고 보니 남한 사람들도 모두 그리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인간관계는 사라지고 이해관계만 남은 이 사회가 바로 남한 청년들이 이야기하는 "헬조선"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pp.360-361


학자로서의 자세도 잃지 않았다. 쉽게 방문할 수 없는 지역이나 시설을 관찰할 기회를 만나면 "사진도 못 찍고 녹음도 못 할 상황"이라도 "가능한 자연스럽게 보고 기억하려 노력했다." 자신의 의견에 배치되는 주장도 한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경험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가치관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화인류학자들은 바로 이런 상황이 사회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가치관과 사회조직 원리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p.126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북한의 변화와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이 살아온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어떤 가치관과 규범, 생활방식을 체득하고 내면화했는지"를 밝히고 싶었다고 한다. 자신이 "문화인류학자로서, 또 구호활동가이자 교육자"로서 체득한 북한에 대해 나누고 싶었다는 말이다. 책을 읽고 나니 북한을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살아 있는 존재로 한층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로 느껴진다. 『고난과 웃음의 나라』는 저자의 의도를 채우고도 남을 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분단이 만든 문화적 이질성은 쉽게 지워지리라 낙관한다. 한민족으로서의 문화적 동질성을 재확인하고 회복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의 동질성은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너무 달라진 남쪽의 우리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북쪽의 그들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작업이 우선 필요하다. p.15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을 만날 때는 서로 살아온 삶의 경험에 대한 존중과 공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서로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나의 관점에서 상대방의 삶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눈을 통해서 그가 본 세상과 걸어온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우리도 서로 '가지 않은 길'에서 겪은 삶의 경험을 나누고 공감하며 오랜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공존을 모색하게 되길 바란다. p.362


2001년 대학생들과 함께 중국 기행을 했었다. 책에 나오는 것처럼 단둥의 압록강에서 유람선을 타면 맞은 편 북한 지역을 코앞에서 볼 수 있다. 그때 우리 일행은 북쪽 사람들을 마주한다는 신기함에 강 건너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네고 손을 흔들었다. 거리가 있어 표정을 정확히 보진 못했지만 그쪽 사람들은 움직임 없이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높이 처든 손이 머쓱해진 우리는 이후 조용히 유람선 관광을 마쳤다. 우리는, 아니 나는 그 때가 대기근의 후유증이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시기라는 걸 몰랐다. 그저 "엄혹한 체체에서 사니 저렇게 무뚝뚝한 모양이다"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북한에 대해 좀 더 알았다면, 또 그때 강변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았다면 그렇게 천진난만하지 못했을 것 같다. 유람선을 타고 북한 지역을 '구경'하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을 거다. 앎이 필요하다.


저자의 관찰, 분석과 해설 덕에 북한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교육 기관마다 반드시 있다는 세 성인(누굴까?)을 모신 신비로운 '교양실'의 존재, 김일성의 일생은 영웅 신화의 재해석이라면 김정일의 신격화는 예수 탄생설화의 모방이라는 사실, 북한은 6.25 전쟁이후 전쟁 고아들을 해외 교육기관에 유학시켜 돌봤다는 역사, 2016년 중국의 북한 식당 종업원 집단 탈북의 진실 등. 궁금하다면 문화인류학자가 경험한 북한문화에 대한 훌륭한 그리고 흥미진진한 현장기록에서 확인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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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들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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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무거운 짐, 영혼이 짊어져야 할 거대하고 이상한 짐이다……. 당연히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선택이며, 그런 선택은 어려울 수 있다.

—어슐러 K 르 퀸, 『아투안의 무덤』


34년만의 후속작이다. 아니, 34년을 기다린 건 아니다. 전작 『시녀들』을 읽은지 얼마되지 않았다. 오브프레드라는 이름의 여자가 남긴 기록의 열린 결말, 어두운 차안으로 몸을 던지는 마지막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공의 이름에서 알 수 있는 암시로는 그녀의 탈주가 성공적이리라 예상됐다. OF Fred(프레드의 것)를 의미하는 ‘Offred’를 달리보면 'Off Red'이니까. 우리의 시녀는 그들을 상징하는 ‘붉은 색’에서 벗어날 운명이었다.


시녀의 운명에서 탈출한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뱃속의 아이는 무사했을까. 그녀의 큰 딸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시녀의 탈출을 도운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소설 이후의 이야기도 궁금했지만 전작에서 무엇보다 궁금했던 건 길리어드가 만들어질 당시의 이야기였다.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성들을 착취하는데 앞장선 ‘아주머니’들 특히 리디아 아주머니가 궁금했다.


『증언들』은 전작이 남긴 대부분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속편이다. 그렇다고 전작의 물음을 그대로 받아 답안만 작성하지는 않았다. 길리어드에서 일어나는 상상초월의 여성비하와 착취의 시스템이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 괴물같은 착취구조의 붕괴가 어떤 작은 틈새에서 시작했는지를 전한다. 이번에는 세 개의 목소리다. 길리어드 밖의 십 대 여성, 길리어드 체제 내의 이십 대 여성, 그리고 ‘아주머니’다. 놀랍게도 작가는 리디아 아주머니의 목소리로 길리어드의 성립과 쇠망을 증언하게 했다. 다른 여성들도 이전 작품과 관련된 의미있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시녀이야기』에서 행방이 밝혀지지 않은 인물들 중 두 명이라는 사실이 힌트라면 힌트. 하지만 이것도 추정일 뿐이다.


세 여성의 증언들은 전작에서처럼 오랜 시간 후에 역사적 사료의 형태로 발견된다. 먼 미래, 길리어드가 붕괴하고 그들의 역사를 연구하는 ‘길리어드 연구 심포지엄’이 열린다. 리디아 아주머니가 남긴 자료는 책 속에 숨겨진 자필 원고 형태로, 젊은 여성들의 경우는 녹취록의 형태다. 자료가 가짜일 가능성도 얼마간 존재한다. 특히 리디아 아주머니의 자료는 길리어드 제국 내에서 그녀가 취한 행보와 너무도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시녀’ 시스템의 고안자였다. 판사라는 직업의 덕에 법률에 능통했고 생존을 위해 자신을 감출 줄 알았다. 그녀는 명확하게 예정된 치욕의 삶을 피하기 위해 권력에의 봉사를 선택한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영악하게 권력이 원하는 바 이상으로 적응한다. 마음 속엔 복수의 미래를 그리면서.


이 일은 반드시 갚아 주겠어. 아무리 오래 걸려도, 그 사이에 아무리 많은 똥을 처먹어야 한 대도 상관없어. 어쨌든 반드시 복수하겠어. p.218


리디아 아주머니는 길리어드의 종교근본주의적 여성 억압 시스템을 창안했다. 성에 따른 이분법적 사회 체계를 세웠지만 한편으론 국가 최고 권력의 부패와 모순에 대한 기록을 남겨 앞날을 준비했다. 그리고 은밀하게 바깥 세계와의 연결을 도모했다.

과거 평화로워 보이던 조국이 소리 없이 무너져가던 시기 리디아 아주머니는 판사였다. 안정되고 존경받는 자리에서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었다. ‘삶에 치명적으로 매혹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그 시기 모든 사람들은 국가가 쇠망해가는 증거들을 무시했다. 어느 순간 조국이라는 하늘은 한 순간에 무너졌고 사람들은, 특히 여성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자유로웠던 그 때 좀 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음을 자책한다. 자유란 거대한 짐이 따르는 선택이다. 자신이 깨닫지 못했던 그 진리가 좀처럼 알아채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이해한다. 길리어드와는 다른 세계가 열릴 시간에서 자신의 기록을 보며 놀라워할 미래의 누군가에게는 절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자신이 만든 세상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알았다. 그러한 세상이 한 번 존재했던 이상 인류의 앞날에는 같은 악몽이 반복되지 않으리라 믿었다. 정말 그럴까.


사라진 나의 국가에서, 상황은 수년째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그러다가 분노했다.

실행 가능한 요법의 부재. 원망할 사람을 찾는 탐색.

나는 그런데도 왜 평소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을까?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너무 오래 들어왔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늘 한 덩어리가 제 머리에 떨어질 때까지는 아무리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못 믿는 법이다. p.99

그러나 나는 당신을 미리 용서한다. 나 역시 한때는 당신과 같았다. 삶에 치명적으로 매혹되어 있었다. p.251

어떻게 그렇게 서툴게, 그렇게 잔인하게,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당신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당신이라면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만 당신에겐 그런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절대 생기지 않을 것이다. p.578

길리어드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국경선 내의 사람들의 생각을 변하게 하기는 충분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 사물화, 대상화, 착취를 비롯해 계급에 따른 인간 가치 평가까지 국민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하게 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어떤 일이 당연하지 않을 것일 때 그것을 알아채는 눈이 필요하다. 길리어드를 무너뜨린 힘은 이런 사소함에서 비롯됐다. 십대 소녀는 '누구나 동의'하는 일이 '어딘가 잘못'됐다고 생각함으로써 권력을 붕괴시킬 틈을 만들었다.


원래 그렇게 하는 법이라고 했어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아주머니들이 동의한 일이었어요. 그렇게 가르쳤어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어요. p.147




『시녀 이야기』의 만족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책이었다. 베일에 쌓였던 비밀들을 풀어내면서도 어느 스릴러 못지 않은 극적 긴장감이 있었다. 이야기로도 훌륭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포는 거듭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굳이 페미니즘의 관점으로만 읽을 책은 아니다. 권력의 생성과 성장, 부패의 문제,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관계에 관한 서사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감사의 글'에서 작가는 이 이야기들이 상상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 역사에 없었던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절대 생기지 않을 일'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지구상 어딘가에서 볼 수 있는 일을 썼다. 이 책은 좀더 많이 읽혀질 필요가 있다.


이 텔레비전 시리즈는 원작을 집필하며 세운 원칙, 즉 인간 역사에서 전례가 없었던 사건은 소설에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존중해 주었다. p.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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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작렬지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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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물결에 흙색 벽돌로 지은 이층집이 잠겨 간다. 물은 마치 폭풍우 이는 바다인 것 마냥 넘실거린다. 집 앞을 비추던 가로등의 목까지 차오른 파도 위로 안온한 일상을 영유하던 화기(花期)들을 떠다닌다. 집 앞에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있다. 시야 밖으로 뻗어 올라간 계단의 꼭대기는 어디에 가 닿은 걸까. 파도는 저 계단 끝까지 덮치려는 걸까. 흰 포말을 손톱처럼 바짝 세운 붉은 파도는 자연의 일부일까 혹은 높은 곳을 향한 욕망의 은유일까. ‘전 세계가 인정하는’ 작가 옌롄커의 신작 장편소설 『작렬지』의 표지다.

 

 

옌롄커는 ‘중국 3대 거장’ 중 한 명으로 노벨상 후보로 매년 언급되는 작가다. 한 나라를 대표 하는 거장의 작품을 읽는 일은 그 나라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읽어본 중국 작가는 루쉰과 위화 정도인데 이들의 소설엔 언제나 공감하기 어려운 해학과 풍자가 있었다. 인물들의 태도나 감정들이 과잉되어 있다고 느껴졌고 몹시 다른 정서를 가진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여겨졌다. 소설이라는 창을 통해 다가온 중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도 다르지 않았다.

 

옌롄커는 “문단의 지지와 대중의 호응을 동시에 성취한 ’가장 폭발력 있는 작가‘로 평가“된다고 했다. 이전 중국 소설에서 대중적 인기의 원인을 알아채지 못한 탓에 옌롄커의 작품을 통해 다른 중국을 만나보고 싶은 기대가 있었다.

 

책은 ‘편집자 서문’으로 시작한다. 소설 속 지리서 『작렬지』를 쓴 저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인물은 어떤 사정으로 책을 쓰게 됐는지를 밝힌다. 그리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쓴 역사지리서를 꼭 읽어주기를 당부한다. 마치 소설이 아닌 것처럼 운을 뗀다. 책의 차례 또한 자례시의 ‘지리 연혁1', ’개혁 원년‘, ’인물편‘, ’정권1‘, ’전통 풍습‘ 등을 소개하는 것처럼 짜여있다. “땅이 갈라지고 터져 달아났다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산기슭 작은 마을 자례(炸裂)촌이 더 큰 행정단위인 ’진‘, ’성‘, ’시‘를 거쳐 초대형 도시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은 듯이 보인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독자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발전하는 마을이나 도시가 아니다. 오히려 욕망의 소용돌이에 휘둘리는 인간들과 그에 감응하는 자연을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는 자례시의 지방지를 써달라고 작가에게 요청한 시장 쿵밍량의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쿵밍량의 아버지 쿵둥더가 마을의 세력가 주씨 때문에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다. 쿵둥더는 어느 날 꿈을 꾸다 한밤중에 일어나 아들들을 밖으로 내보낸다. 평생의 운명을 좌우할 물건을 찾아오라는 주문과 함께였다. 네 아들은 각자 자신이 주운 물건이 이끄는 삶을 시작한다.

“모두 나가거라. 지금 당장 나가서 각가 동서남북으로 걸어가. 돌아보지 말고 계속 가다가 무엇을 만나거든 허리를 굽혀 주워라. 그 물건이 평생 너희의 운명을 좌우할 게다.” p.28

 

환타지 소설인가.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일까. 중국 작가들에게서 느껴졌던 과장과 허풍의 최대치를 보게 되는 것일까. 의구심이 들었다. 소설은 계속된다. 둘째 쿵밍량은 물건을 ‘훔치’는 행위를 짐을 ‘내리’는 일로 만들어 부를 일군다. 순식간에 이룬 부를 기반으로 촌장이 되고 그의 성공가도가 시작된다. 거짓과 부패로 둘러싸였지만 계속 달리는 한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 고속도로다.

촌장인 쿵밍량이 누구든 ‘훔치다’라는 말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했다. 사람들은 모두 ‘훔치다’라는 말 대신 ‘내리다’라는 말을 사용하게 했다. …… 모두 이렇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월말에 쿵밍량이 돈을 나눠 줄 때 ‘훔치다’나 ‘도둑질’ ‘털다’같은 말을 한 사람의 월급에서 정말로 100위안, 200위안씩 공제하자 그런 어휘들은 자취를 감췄다. 매일 기차에 도둑질하러 간다고 믿는 사람도 더 이상 없었다. p.53

 

사실은 거짓에 가려지고 진실은 돈 앞에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지도 잊는다. ‘이상한 일’은 이제 ‘익숙한 일’이 되어 간다.

진짜 비둘기도 가짜 같았다. 가짜도 진짜 같았다. 하지만 그런 진짜와 가짜들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기이하다거나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p.489

 

이상한 일이 익숙해지는 일에는 자연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과나무에는 배꽃이 피고 배나무에는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고 귤과 오렌지가 열린 감나무가 숲 속에 자랐다. 백열들은 검은 빛을 내뿜고 파란 전구에서는 자홍빛이, 회색 등은 하얀빛을, 빨간 등은 파란빛을 냈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마음의 변화에 따라 마을의 자연과 사물이 천변만화했다.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자 밍후이 앞에 있던 무당 벌레가 잠자리로 변해 날아갔다. 비가 내릴 것 같았다. p.335

 

소설은 중국 현대사의 격변을 배경으로 한다.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에 담긴 속내를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 작가는 한 마을의 흥망성쇠 과정에 삶이 겹쳐진 사람들이 어떻게 운명을 만들고 또 알아채지 못한 채 그 운명에 허무하게 스러지는지를 이야기한다.

 

『작렬지』와 중국 작가들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책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큰 도움을 얻었다. 작가는 ‘이해하기 힘든 역사’가 ‘새로운 글쓰기’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일견 황당해 보이는 현실과 무질서한 혼란 속에도 인과관계가 존재하며 이것이 문학이라는 형식을 거쳐 진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 작가들이 현실을 과장하거나 허구로 묘사하는 게 아니었다. 중국인들에게 닥친 현실 자체가 정말로 현실을 떠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현실은 새로운 글쓰기를 강요하고 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실재가 이른바 신실주의라는 문학의 탄생을 촉발하고 있다. 신실주의는 독특한 문학 기법을 통해 보이지 않는 진실을 드러내고 가려진 진실을 들추며 ‘존재하지 않은’ 진실을 그려낸다. p.656

중국의 현실과 역사, 현실 속의 모든 황당함과 무질서, 혼란, 몰이해, 마음과 영혼의 고통, 갈등은 모두 내적 진실 속 인과에 숨겨져 있다. 글쓰기가 이러한 내적 인과—현실과 삶을 폭발시키는 핵—를 포착할 때 신실주의의 ‘신’은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아도 문학에서는 보이고 존재하는 진실이 된다. p.660

…… 신실주의는 중국의 현실 속에서 숨어 있는 내적 인과를 찾고 핵분열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핵을 포착하여 분열 과정 중의 황당함과 혼란, 무질서, 거짓, 비논리를 설명한다. 『작렬지』에서 드러내려 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혼란과 분열을 촉발하는 핵이었다.…… 『작렬지』는 어둠 속에서 ‘가장 중국적’ 원인을 찾으려 했다. p.662

 

‘작가의 말’에서 중국의 역사와 현재를 이해하고자하는 작가의 치열함이 느껴졌다. ‘신실주의’라는 방식으로 작가가 보여주는 중국의 ‘보이지 않는 진실’을 제대로 알아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우리의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 주변에도 분명히 있는 일견 황당해 보이는 일들, 그런 일들을 바로잡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의문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진실’을 그리진 못할지라도 ‘가려진 진실’에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지.

옌롄커가 써 내려간 이 역사지리서는 화산 폭발로 인해 생겨난 ‘자례’라는 작은 마을이 도시로 급성장하고, 다시 폐허가 되기까지의 빛과 어둠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작렬지』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역사리지서 편찬이라는 소설적 상상력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견고한 허구의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진실을 드러내고, 가려진 진실을 들추며, 존재하지 않는 진실을 그려낸다"

—출판사 책 소개 중(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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