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하, 나의 엄마들 (양장)
이금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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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알고 펼친 책이다. 창비 사전 서평단 도서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하와이, 여성연대, 100년 전, 세 여자 이야기, 놀라운 몰입도’라는 키워드로 소개됐다. 하와이 사진 신부 이야기이리라 예상됐다. 또 ‘세 여자 이야기’라는 키워드에선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가 바로 떠올랐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푸릇한 소녀들이 겪어낸 굴곡진 삶에 대한 이야기가 예상됐다. 시대도 비슷한 일제 강점기. 조선희 작가의 책을 흥미롭게 읽은 터라 어떤 변주가 나올지 기대됐다. 감상 포인트는 일제 강점기에서 빠질 수 없는 ‘독립운동을 어떻게 그렸는가’ 하는 부분, 또 세 여자의 삶은 어떻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찾아 갈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매봉산 자락에 들어앉은 한 마을에 사는 열여덟 살 동갑내기 버들, 홍주, 송화가 주인공이다. 의병의 자식, 청상과부, 무당의 핏줄이라는 사회적 편견 덕에 조선 땅에선 제대로 된 신랑감 찾기를 포기해야 하는 소녀들이다. 나무에 먹을 거리, 입을 거리가 주렁주렁 열린다는 ‘포와’는 꿈의 장소다. 신분 차별도 없고 눈치 볼 것 없는 세상이다. 세 소녀는 신랑 사진 한 장을 믿고 하와이행 배에 오른다.


아무리 수가 잘 놓였어도 피가 묻으면 쓸모없어진다. 홍주는 잘못도 없이 한순간에 피 묻은 자수보 같은 팔자가 된 것이다. 버들은 여자 운명이 고작 자수보 같다는 사실이 억울하고 이해되지 않았다. p.15

“내는 조선이 웬수다. 힘없는 나라 때민에 남편도 잃고 자식도 잃은 기라. 포와는 조선이 아니니까네 지킬 나라도 없을 거 아이가. 거 가서는 오로지 느그 생각만 하면서 신랑캉 얼라 놓고 알콩달콩 재미지게 살그라. 그기 오직 내 소원이다.” pp.35-36

버들은 ‘왜놈 시상’에 사는 ‘의병 딸내미’였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 훈장이었던 아버지는 의병으로 나섰다가 명을 달리했고 큰 오빠도 일본 순사에게 죽었다. 나라도 독립도 다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딸 버들이 제대로 된 신랑을 만날 수만 있다면 물 건너 먼 땅이라도 상관없었다. 돈으로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된 홍주네는 제대로 된 양반가문과 사돈을 맺으려는 야심에 딸을 희생시킨다. 병약한 신랑을 만나 혼인 몇 달만에 과부가 된 것. 홍주는 과부가 재가했다는 수근거림을 떨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송화는 무당의 손녀다. 평생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산 손녀를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해 무당 할머니는 손녀를 하와이에 사진 신부로 보낸다.


버들은 부산 아지매한테 받은 거울을 반짇고리 안에 넣어 두었다. 가지고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예쁜 거울을 보며 딸을 생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포와에 가면 거울쯤은 또 생길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p.39


세 소녀가 조선 땅을 떠난 구체적인 사연은 다르지만 결국 사회의 편견,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을 떠나게 했다. 하와이에서의 삶은 달랐을까. 사진신부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대입해보니 책장을 넘기기 전에 한 숨부터 나왔다. 이렇게 순진한 포부를 갖고 떠난 어린 처녀들인데 말이다. 사진으로 본 것과 달리 신랑들은 중늙은이들이었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열대의 따가운 햇살에 더 나이가 들어보였을 게다. 사진 신부들의 눈물이 홍수를 이룬다. 한 사람 버들의 신랑만은 사진과 다르지 않은 청년이었지만 도무지 신부에게 관심이 없다. 배곯을 걱정 없이 일 한 만큼 벌고 남 눈치 안보고 살고 싶었던 소녀들의 꿈은 어떻게 되는걸까.


세 소녀는 하와이에서의 삶을 나름대로 살아나간다. 남편을 인정하고 아이를 낳고 자신의 삶을 일구는 여자들이 된다. 힘겨운 사탕수수밭 노동을 하면서 버들의 남편은 독립운동에도 힘쓴다. 책에는 당시 하와이 독립단체들의 상황이 이야기에 잘 녹아들어가 있다. 미국에 기대 권력을 잡기위해 교민 사회의 분열을 일삼는 이승만의 행태와 무장투쟁만을 고집하는 박용만. 독립운동을 다룬 글을 읽을 때마나 느끼는 건 하나의 목표를 위한다면서 서로의 방법만 주장했던 그 당시 독립 운동 단체들에 대한 아쉬움이다. 누구는 외교로 누구는 무장투쟁으로 도울 수는 없었을까. 아니 원래 그런 일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래 권력의 향방까지 가늠하는 상황이었으니 양보나 합의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게다. 그 결과가 이승만의 집권이다. 소설 속에 이승만 또는 항일 투쟁이 자세히 묘사되진 않는다. 항일 무장 투쟁에 투신한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꾸려가는 버들의 이야기가 주다.


이 소설은 세 여자의 연대에 대한 이야기다. 버들의 남편은 독립 운동을 위해 만두로 떠나고, 홍주의 남편은 본처를 찾아 조선으로 돌아간다. 송화의 남편이 죽고 나자 셋은 함께 사는 삶을 꾸려간다. 조선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이 하와이에선 가능했다. 여성들이 모여서 자립적인 삶을 사는 일 말이다. 군부대의 세탁일을 맡아 가게를 운영하면서 힘들지만 안정된 생활의 터전을 마련한다. 쉽지만은 않은 과정이었지만 버들과 친구들은 언제나 희망을 놓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버들의 남편이 돌아오고 홍주는 미국인과 결혼한다. 송화는 조선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버들의 딸, 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느 때처럼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자 버들은 습관적으로 좋은 일이 생기길 빌었다. p.250


사진 신부의 다음 세대 진주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아이는 엄마의 삶을 어떻게 생각할까. 아이가 기억하는 엄마 삶과 실제 버들의 삶은 어떤 간극이 있을까. 소설은 흥미로운 서사의 매듭이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저절로 소리내어 읽게 되는 책이었다. ‘조선 팔도 말씨가 다 섞여 있다’는 소설 속 문장처럼 팔도 사투리가 다채롭게 등장한다. 하와이에 이민 온 전국의 사람들이 각자 고향말씨로 대화하는 장면은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읽힌다. 누군가는 평안도 사투리로 또 누군가는 충청도 느릿한 말투로 다른 이는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로 말을 건넸다. 읽다보면 어느새 사투리를 따라하며 웃게 됐다.


세 여자 이야기의 결말이 해피앤딩인지 새드앤딩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들이 그 삶을 살았다는 사실에 더 큰 방점이 찍히는 소설이다. 100년전 그 시절 책 속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산 여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역사에 기록된 삶 이면에서 자신의 삶을 꿋꿋히 살아낸 사람들이다. 기록된 삶은 사람살이 중 극히 일부이고 우리의 삶은 기록되지 않는 쪽에 가깝다. 나는, 그래서 세 여자의 이야기가 어느 역사이야기보다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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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해결사 깜냥 1 - 아파트의 평화를 지켜라! 고양이 해결사 깜냥 1
홍민정 지음, 김재희 그림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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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오는 날 아파트 경비실 문을 고양이가 두드린다.

까만색 머리와 등, 하얀색 얼굴과 배, 발을 가진 조그만 고양이, 제 몸집만 한 여행가방을 가진 고양이다.

그런데 이 고양이, 도도하다.

고양이가 원래 그렇던가.


내가

원래 아무거나 안 먹는데 …

원래 아무 데서나 안 자는데 …

원래 책 같은 건 좋아하지 않는데 …

원래 과자 같은 거 안 좋아하는데 …

원래 부스러기는 안 먹는데 …

……

알고 보니 재주도 많은 고양이다. 엄마의 늦은 퇴근을 기다리는 꼬마 형제의 놀이 친구가 돼주고, 춤동아리 오디션 연습을 하는 소녀의 춤선생 역할도 딱 부러진다. 아파트 건물을 오르내리는 택배 기사를 눈치 빠르게 돕고 택배 기사만 보면 으러렁거리는 개의 마음을 통역해준다.


"원래는 안그런데 이번만은"하며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 귀엽다. 고양이다운 도도한 모습 가운데 호기심과 오지랍을 숨기고 있는 것같아 웃음이 나온다. 거침없이 자기가 원하는 걸 말하지만 받을 때는 체면을 차리는 태도다. 고양이의 습성을 잘 반영한 모습이다. 주인에 대한 무조건 복종과 넘치는 애정을 무한정 내보이는 개와는 달리 고양이는 사람을 집사로 부릴만큼 자존심이 높지 않은가.


하지만 고양이 해결사 깜냥은 그저 자기만 아는 고양이가 아니다.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무섭고 외로운 마음을 읽고 같이 놀아줄 줄 아는 고양이다. 또 좋아하는 춤동아리 오디션에 꼭 합격하고 싶은 십대 소녀의 마음도 찰떡같이 공감해준다. 아래층에선 시끄럽다고 하지만 아이의 춤연습도 중요하게 여긴다. 소음은 줄이고 춤연습은 할 수 있는 묘안을 자연스럽게 내고 거기에 더해 자신만의 고양이 춤을 전수한다. 아이는 무사히 오디션에 합격했을까.


깜냥의 능력은 택배 아저씨를 돕는 과정에서도 발휘된다.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아저씨가 말하기 전에 알아서 척척 필요한 일을 돕는다. 떨어진 상자는 주워 올리고 알아서 엘레베이터 조종을 맞는다. 택배 아저씨만 보면 사납게 짖어대는 개가 사실은 사람이 반가워서 그랬다며 둘 사이를 중재해준다. 깜냥 덕에 갈등은 풀리고 따스한 분위기가 아파트 단지에 감돈다.


그나저나 경비실이 이렇게 바쁜 줄 처음 알았다.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자주 인터폰이 울리는 게 정말일까. 세대수가 많은 아파트일 수록 경비실에서 해야할 일이 많겠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다. 음식물 쓰레기를 흘리거나 깨진 유리를 방치하는 일은 입주민들이 주의를 기울이면 될 일일테니 말이다. 층간 소음 문제도 그렇다. 공동생활 장소임을 항상 염두에 둔다면 굳지 중간에 경비실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해결될 일이다. 주변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창비 좋은 어린이책 수상작 『고양이 해결사 깜냥 1』은 도도하지만 마음 넓은 고양이를 만나는 기쁨이 있는 책이다. 그래서 제목 뒤에 붙은 '1'이라는 숫자가 반갑다. 1이 있다는 말은 2, 3, 4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아파트의 평화를 지켰던 깜냥의 다음 활약이 기대된다.




깜냥 덕분에 집 앞에서 자주 마주치는 길고양이가 다르게 보인다. 깜냥처럼 까만 등과 햐얀 배를 가졌기 때문이다. 게으르게 어슬렁거리며 햇볕을 쐬고 털을 핥는 모습이 하는 일 없이 참 태평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가는 아이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생명을 접하는 기회를 준다는 걸 깨달았다. 반려동물을 기르는 경우가 아니면 다른 생명체를 가까이 하는 일이 드물다. 어떤 아이들에게든 친밀하게 다가오는 우리 동네 검정 고양이는 동네 꼬마들에게 깜냥만큼 귀여운 동물친구 역할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세상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한다는 깜냥,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달라던 깜냥이 우리 동네엔 벌써 살고 있었던 것만 같다. 깜냥이 부탁했던 인사를 대신 건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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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이단자들 - 서양근대철학의 경이롭고 위험한 탄생
스티븐 내들러 지음, 벤 내들러 그림, 이혁주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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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나는 철학이 어렵다. 본격적인 철학서도 아닌 해설서도, 심지어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쉬운 입문서도 일정 페이지를 넘어가면 어렵다. 기억력 문제일까, 논리적 사고의 결여 때문일까, 혹은 공부가 부족한 걸까. 읽기 힘들어하는 분야임에도 꾸준한 호기심은 또 어쩐 일인지. 계속 읽다보면 뭔가 조금은 이해 비슷한 지점에 닿을까 하는 기대가 있는 모양이다.


스티븐 내들러 부자의『철학의 이단자들』에 기대를 건 이유 또한 같은 맥락이다. 철학을 만화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림은 뭔가를 이해하거나 기억할 때 도움이 된다. 이해하기 힘든 논리도 그림으로 풀어놓으면 문장으로 된 것보다 더 알기 쉽지 않을까. 게다가 학습만화처럼 해설은 해설 따로 그림 따로 놀지도 않았다. "서양근대철학의 경이롭고 위험한 탄생"을 다뤘다고 하니 이참에 17세기 철학의 흐름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과학혁명의 세기'라 불리는 17세기는 또한 '천재들의 세기'로도 불린다. 과학과 철학 양쪽에서 근대를 여는 다양한 혁신이 튀어나온 시기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오, 베이컨, 데카르트, 홉스, 보일, 스피노자, 로크, 라이프니츠, 뉴턴과 같은 천재들은 과학에서 또는 철학에서 그리고 과학과 철학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근대적인 형이상학과 인식론이 등장했고, 자연에 대한 이해가 혁명적으로 진보했으며, 시민과 국가 간 관계에 대한 새로운 모델이 제시되었던 세기였기 때문이다. p.6

저자는 17세기의 당시의 '관습적 진리'를 반박한 천재들을 '이단자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저작은 실제로 '이런저런 교단들'에서 금서가 되기 일쑤였다. 근대에 가까운 이때까지도 종교집단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17세기 초만해도 브루노는 화형을 당하고 갈릴레오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했다. 그러나 종교의 부조리한 아성도 이단자들의 합리적 지성이 쌓이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실제로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 모두가 바티칸 금서 목록에 오른 저작을 가지고 있다. 브루노, 갈릴레오, 베이컨, 데카르트, 홉스, 파스칼, 스피노자, 아르노, 말브랑슈, 보일, 로크, 라이프니츠, 뉴턴의 저작 모두 그 악명 높은 리스트에 올라 있다. 중세와 근대 초기의 종교 당국은 때로 종교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사유와 이단을 식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p.7


1600년 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주장을 편 조르다노 브루노가 무려 화형을 당한다. 이어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처벌을 받고 같은 주장을 담은 책을 썼던 데카르트는 책 출판을 포기한다. 고대의 권위에 눌리지 않는 지적인 탐구에 의한 과학을 추구하는 학자는 점점 늘어간다. 책에는 철학자 간의 조우를 통해 그들의 사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데카르트는 프랜시스 베이턴의 책을 읽으며 둘 사이의 사상적 공통점을 확인한다. 또 아파서 누워있던 파스칼을 데카르트가 찾아서 논쟁을 벌이며 생각의 차이를 알게 된다. 프리드리히 5세의 딸 엘리자베스 공주와 데카르트는 서신을 통해 사상을 주고받는다. 사회계약론을 주장한 홉스는 스피노자의 저술에 '눈이 튀어나오게' 놀라고, 이런 대담한 저술가를 라이프니츠가 직접 찾아가서 만난다. 유럽 대륙 여기저기에서 새로운 생각이 싹트는 가운데 서로의 사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교류했다.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반목하면서.


1600년에서 시작한 책은 시간 순서대로 각 사상가의 철학을 다루면서 1703년 런던의 뉴턴을 지나 1755년 제네바의 볼테르에 이른다. 17세기의 철학 흐름을 정리하면서 그는 철학자들의 주장이 각기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누군가의 주장이 후에 옳은 것으로 밝혀진다고 해서 반대 주장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진보를 중단시키려고 했던' 종교세력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볼테르는 다른 사고에 대한 존중, 무조건적인 박해를 막을 수 있는 인간 이성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공들여 만든 책이다. 글을 쓴 스티븐 내들러는 위스콘신 대 철학과 교수로 17세기 유럽 철학자를 연구해왔고 특히 스피노자 연구의 권위자다. 그린이 벤 내들러는 글쓴이의 아들이다. 책이 다루는 내용이 철학이기 때문에 그림과 글의 긴밀한 조화를 생각하면 (그들 사이가 좋다는 전제하에) 저자들이 가족이라는 사실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 옮긴이 또한 스피노자를 전공하고 서양근대철학을 강의하는 분이니 오역의 위험도 줄었을 것이다. 워낙 이해도가 낮은 분야이다 보니 오역인 줄 모르고 문맥을 오해한 채 지나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의 번역자는 그런 면에서 세심한 편이었다. '옯긴이의 말'에서도 적시하고 있는바 "최대한 풀어 쉽게 번역"했고 "부연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는" 역주가 달려있다. 전공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옮긴이는 이 책이 "'초심자'를 위한 만화'라고, "철학에 익숙한 독자들도 재미를 느낄 법"하다고 했다. 그러나 철학에 익숙하지 않는 독자와 완전 초심자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는 책이다. 옮긴이처럼 이 책을 두고 아들과 대화하려면 한 번 읽는 걸로는 안 될 듯하다. 만화라고 만만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림으로 설명돼 있다고 해서 몇 페이지에 압축된 사상들이 단번에 이해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17세기의 철학자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일별했다는 소득이 있었다. 수차례 읽고 그림이 설명하는 바와 문장을 연결해서 떠올릴 수 있어야 그림과 글이 함께 들어간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습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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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잘 가꾸는 법 자신만만 생활책
최미란 지음 / 사계절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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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만 생활책 시리즈 『집, 잘 가꾸는 법』이 나왔습니다. 같은 시리즈 중 『책상, 잘 쓰는 법』에서 책상 위에 올라가 있는 거의 모든 물건들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틔워줬던 터라 집 가꾸는 방법은 어떤 내용이 담겼으려나 기대됐습니다.


목차부터 살펴보니 ‘이사하기, 청소하기, 집과 자연, 이웃과 배려’ 순서로 내용이 정리돼 있습니다. 검푸른 색으로 잠든 주택가를 배경으로 노란 불빛같은 목차가 나란히 배열돼 있습니다. 아마도 이사 전날 밤인 모양입니다.


하나 아파트 4층에 살던 행복이네 식구가 이사를 갑니다. 아침 일찍 사다리차가 벌써 창문틀에 고정돼 있습니다. 하얀 물방울 무늬가 들어간 보라색 치마를 입은 할머니 혜자씨가 동네 친구 할머니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아이들 솜씨처럼 투박한 그림이지만 이사짐차 옆면에 전화번호까지 표기되어 있습니다. 자신만만 생활책 시리즈의 특징이 아닌가 싶은데요. 전체적으론 코믹한 그림체를 유지하면서도 각각의 사물이 세밀화처럼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행복이네 식구는 넷입니다. 엄마 미영씨, 할머니 혜자씨, 행복이 그리고 반려견 놀자까지. 식구들은 이사 전날 중요한 물건을 따로 챙겼습니다. 이사나가는 아침에 보물찾기를 합니다. 행복이는 장롱 밑에서 탱탱볼을, 미영씨는 가구 사이에서 중요한 서류를, 혜자씨는 서랍 뒤로 넘어간 손수건을 찾았습니다. 잃어버린 것도 잊을 무렵 찾는 물건들은 보물에 다름아니죠.


아파트와 단독주택, 빌라들이 촘촘히 들어선 동네로 이사짐차가 들어옵니다. 행복이네가 이제부터 살 집은 행복빌라 302호입니다. 책은 이사 들어갈 새집과 행복이네 살림을 보여주는데요, 프라이팬 하나, 탁상달력 하나까지 그려져 있습니다. 정말 세 식구 이사하면 이만큼 짐이 나오겠다 싶은 정도입니다. 식구들 모두 비어있는 자기 방에 들어가 방 이곳저곳을 확인합니다. 짐푸는 요령, 방안 가구 배치하는 방법 등 실용정보 사이로 눈에 띄는 것은 거실에 널부러진 할머니와 엄마입니다. 새 책상과 침대를 산 행복이는 자기 방에서 뛸 뜻이 기뻐하고 있는데 할머니와 엄마는 소파와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습니다. 아이에겐 새로운 환경이 즐겁기만 하고 어른들에겐 살만한 집 꾸미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집 가꾸기는 내 집에 이야기만 포함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집이 안락하기 위해선 공동주택 전체의 안정이 먼저 필요합니다. 이웃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지내는만큼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에 분란의 소지도 적어집니다. 행복이네는 떡을 돌리며 이웃과 인사를 나눕니다.


집 가꾸기의 하이라이트, 청소하기 차례입니다. 어린 행복이마저 알고 있는 깨끗한 집을 위한 진리, 알고는 있지만 실행하기 참 어렵습니다.


깨끗한 집에 살려면 자주 청소를 해야 해.

그래야 더러움이 쌓이지 않아.

귀찮다고 청소를 미루면 때가 찌들어 청소하기 더 힘들지. p.18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청소모드로 돌입합니다. 우선 ‘청소 복장’을 갖추고, 계획적인 ‘청소요령’에 따라 청소를 합니다. 청소에는 정리정돈이 필수인데요. 행복이에게 방의 책장 정리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이 몸과 눈높이에 맞춰서 스스로 물건을 정리하는 장면을 보면 어린이들이 자기 책장을 정리하고 싶어질 듯 싶습니다. 이어 서랍과 옷장 정리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옷장 칸을 어떻게 나눠서 정리하는지, 이불, 옷, 양말 개기에서 장롱에 이불 넣는 방법까지 꼼꼼하게 설명해줍니다.


정리가 끝났으면 집을 더럽히는 먼지, 때, 냄새를 제거해야 할 텐데요. 각각의 오염이 왜 발생하는지 그 이유와 어린이들에게는 어려울 수 있는 세제의 종류, 친환경 세제 활용법등을 그림으로 쉽게 알려줍니다. 그 밖의 청소 세제를 설명하는 페이지에는 배울 게 아주 많습니다. 치약으로 찌든 때 지우기, 감자 진액으로 거울 닦기, 끈적한 스티커 자국 지우기 등은 생활 유용한 팁들입니다.


자연을 집 가꾸기에 활용하는 방법들 중 실내 정원 만들기 부분은 아이들과 함께 실습해보기 좋습니다. 각종 채소와 허브, 공기 정화용 화초 키우기 중 관심있는 식물을 키워보는 건데요. 요리에 사용하는 바질을 직접 키워보고 싶어졌습니다.



이외에도 ‘황사, 미세먼지 대처법’, ‘무더위 대처법’, ‘건조할 때 대처법’, ‘한파 대처법’, ‘해충 구제법’ 등이 정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웬만한 어른용 생활백과 못지않은 정보량입니다. 집 안팎을 깨끗이 유지하고 이웃과도 원만하게 지내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총 망라되어 있는데요. 책장을 천천히 넘기면서 꼼꼼히 읽으면 ‘집’이라는 공간을 안락하게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일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에 조금씩 하는 사소한 집안 일들을 묶음으로 보니 집을 집답게 유지하는데 필요한 노력의 양이 결코 작지 않게 느껴집니다.


다시 밤입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입니다. 가족과 함께 쉬는 그 공간이 온 가족의 노력으로 조금 더 안락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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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집 같아요 누구나 그림책 1
오로레 쁘띠 지음, 고하경 옮김 / 개암나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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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나서 첫발을 뗄 때까지 흐뭇한 미소와 강렬한 감동 사이를 오가는 아기와 엄마를 따라가 보세요.

— 책 뒤표지 中

노란 소파에 엄마가 누워있습니다. 예비 엄마네요. 뱃속에 아기를 품고 있습니다. 곁에는 아빠가 흐믓한 얼굴로 아내의 배 위에 손을 얹고 있습니다. 아빠의 얼굴에는 무엇보다 호기심이 가득해 보입니다. 엄마가 손으로 감싸고 있는 불룩한 배는 아가에겐 ‘집’ 같습니다.


노란 자동차 곁을 지나 엄마는 큰 발걸음으로 산책합니다. 그 옆의 아빠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네요. 비행기가 떠가는 하늘을 보며 아빠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엄마 배속 실려 산책길에 나선 아가에게 엄마는 ‘자동차’ 같습니다.


갓태어난 아가에게 자신을 감싼 엄마는 ‘둥지’같고, 서성이는 엄마 어깨에 기대고 잠들었을 땐 ‘산꼭대기’ 같습니다. 아기띠에 감싼 아기를 안고 갈 땐 ‘캥거루’ 같고, 젖을 줄 땐 ‘분수’같아요. 아가를 ‘조개껍데기’같이 보호하고, ‘달’ 같이 비춰주는 존재가 엄마입니다.




‘폭신한’ 엄마, ‘안전한’ 엄마 곁에는 아가는 쑥쑥 자랍니다. ‘거울’ 같이 아가와 마주보고 눈을 맞추는 엄마의 옆모습과 아가의 옆얼굴이 닮았습니다.


아가를 위해서 엄마는 ‘모터’처럼 유모차를 밀고, 달콤한 ‘사탕’ 역할도 합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받쳐주고 섬같이 아가 몸을 받쳐주며 목욕을 시킵니다. 고운 ‘멜로디’로 아가의 잠을 부르기도 하죠. 엄마는 ‘나무’같고, ‘인형극’같이 변화무쌍합니다. ‘태풍’처럼 큰 소리를 내고 청소를 하며, 아가가 아플 땐 ‘의사’처럼 보듬고, ‘약’처럼 낫게 도와줍니다.


자연 ‘풍경’과 닮은 엄마는 물놀이터의 ‘튜브’같이 아가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야기’를 잘 해주는 엄마, 아가의 말썽에 ‘심각’해지는 엄마는 아가를 보호하고 즐겁게 하고 잘 먹입니다.


엄마 뱃속에 들어있던 아기는 엄마 곁에서 엄마를 세상 모든 것같이 느끼며 자라납니다. 엄마 가슴에 꼭 붙어 있던 아가는 기어 다니고, 앉고, 잡고 버티다가 어느 날 혼자 일어섭니다. 그리고 첫 발을 내딛죠. 엄마는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립니다. 엄마만 바라보던 아가는 이제 엄마의 반대 방향, 세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갑니다. 그 발걸음이 조심스러워 엄마는 내민 손을 거두지 못하지만 아이의 눈은 자기 앞의 세상에만 고정돼 있습니다. 하지만 등 뒤에 자신만을 바라보는 두 명의 눈이 있다는 걸 알고 있죠.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집’같은 엄마와 그 옆의 아빠가 있다는 걸 말입니다.


알록달록 색감이 예쁜 그림책 『엄마는 집 같아요』입니다. 노란 바닥에 누워 무릎위에 아기를 올려놓고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는 표지가 사랑스러워요. 등을 받쳐주고 온 몸으로 자기를 감싸주는 엄마는 아기에게 ‘집’입니다. 아기는 엄마에게 온 존재를 의지하며 스스로를 키워갑니다. 태어나서 일 년 남짓의 시간을 담은 이 그림책에선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강렬한 순간들을 마주치게 됩니다. 모든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마주하는 순간이지만 그 모든 순간들이 매번 감동적인 그 때 말입니다. 예를 들면 처음 아이를 안았을 때, 아이가 처음 웃었을 때, ‘엄마’를 불렀을 때, 첫 걸음마를 했을 때 같은 순간들. 책은 그런 찰나들,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빛나는 순간들을 응축하고 있습니다.


작은 아기가 제 발로 걸음을 걸을 때까지 엄마는 아기에게 모든 것입니다. 집을 나선 후에 ‘엄마’는 안전과 따스함을 증거하는 하나의 단어가 됩니다. 책을 덮은 후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기에게 엄마는 ‘집’ 같았습니다. 부모에게 아기는 무엇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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