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베를린 - 분단의 상징에서 문화의 중심으로
이은정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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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10여명이 베트남으로 입국하려 시도하던 중 발각돼 중국으로 추방됐다. 이들은 북한으로 강제송환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11월 30일자 뉴스다. 뉴스화되는 경우 이외에 숨겨진 탈북민의 수는 얼마나 많을지 짐작하도 가지 않는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고대가요처럼 느껴진다.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진심으로 동의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도 의문이다. 이산가족은 통일을 진심으로 바라는 거의 유일한 사람들일 것이다. 분단 후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산의 아픔을 몸에 새긴 분들은 상당수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고령으로 생의 마지막 날을 살고 있을 것이다. 이 분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그때 우리는 통일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한 민족이라는 환상이 전무한 때에 통일은 어떤 방법으로 이뤄야 할까.

 

「베를린, 베를린」은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 학과장 이은정 교수의 책이다. 저자는 1980년대부터 독일에 거주하며 독일 통일 과정과 통일 독일의 발전 과정을 함께했다. 때문에 이 책에서 다루는 통일 이전과 이후의 독일에 대한 이야기가 더 가깝게 와 닿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얼마되지 않는 1992년 겨울 베를린 거리에서 시작한다. 무거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는 역사를 책임에도 독일 거리 곳곳을 생생히 묘사하며 서술을 이어가는 덕분에 수월히 읽힌다. 저자는 이 책에서 분단이전에 베를린에 대해 쓰는 이유를 “분단이 완전한 차단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년에 나온 박한식 교수의 「선을 넘어 생각한다」를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박한식 박사가 제시한 통일의 방법 역시 ‘충돌의 가능성을 최소화한 상태에서의 소통’이었다. 그렇게 ‘동질성을 회복함’으로써 통일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했다. 이은정 교수 역시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를 강조한다. 베를린은 ‘정치적 충돌을 야기할 사안을 배제한 기술적 교류에 집중’하면서 동․서의 연결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를린은 정치적으로는 분단되었지만 사실상 완전히 분리된 적이 없었다. (…) 분리되지 않은 인프라망을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상호 접촉과 협업이 불가피했다. 이 과정에서 서베를린과 동독은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접근 방법으로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했고, 정치적으로 충돌할 수 있는 사안은 배제한 채 기술적 교류에 집중했다. (…) 누구도 협상을 깨면서까지 자신의 입장을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하지 않았다. 결국 협상에 임하는 당사자들의 합리적인 사고가 냉전 중에도 교류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p.125

 

저자는 독일 통일 과정에서 동․서독 젊은이들이 한 역할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 대학생과 좌파 지식인을 중심으로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거부한 움직임이 68운동이다. 독일의 민주주의는 68운동을 기점으로 질적으로 변화를 겪었으며 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데 일정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자유를 향한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역사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나라의 1987년과 68운동을 비교하는 저자의 시각에 공감이 갔다.

 

독일의 현대사에서 68운동의 사회적․정치적 의미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1987년이 갖는 의미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 실제로 68운동 이후 서독사회는 그 이전의 서독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회가 되었다. 모든 형태의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거부하며,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대안문화도 정착되었다. p.185

 

통일된 독일의 연방외무부는 보위의 사망소식이 알려진 2016년 1월 11일 SNS를 통해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도움을 주어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동베를린 쪽에서 “장벽이 없어져야만 한다”라고 외치다가 경찰에 무자비하게 체포되었던 사람들에게 통일 후에 누군가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다. 역사는 항상 ‘영웅’만 기억하려 한다. 그런데 장벽을 넘어 부는 바람에 응답하한 것은 그 자리에 있었던 수천명의 젊은이들이었다. p.196

 

통일 후의 베를린은 ‘천의 얼굴을 가진 도시’가 되었다. 저자는 과거를 망각하는 것이 아닌 기억으로 만든 베를린으로 재건될 수 있었던 이유를 ‘교육에 대한 사유’에서 찾는다. 정형화된 해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말이다.

 

건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곳에 담긴 역사가 잊힌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통일 이후 베를린은 역사를 잊은 공간이 아니라 기억을 품을 도시가 되었다. (…)

이 공간들은 누구에게도 역사의 한 단면을 특정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기억의 공간으로서, 잊지 말고 성찰해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줄 뿐이다. 거기에서 독일 시민교육의 근간이 되는 ‘사유’가 그대로 드러난다.

어떤 방식의 교육이든 사실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받는 사람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보는 비판적 시각과 함께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만 나치체제와 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견해가 이런 사유를 뒷받침하고 있다. pp.239-240

 

한국의 분단에 대한 해답을 독일의 사례에서 찾을 수는 없다. 분단의 과정도 달랐거니와 동족 전쟁과 서베를린이라는 섬 같은 도시의 유무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들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로 간에 적대감정이 깊어졌던 적이 없다. 또 공산주의 국가 동독 땅 한가운데 자리한 서베를린이란 존재로 인해 동․서독은 끊임없이 소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분단 70년 동안 천혜의 자연적 경계선이 되어 버린 38선을 두고 서로가 완전한 단절 상태에 놓여있다. ‘빨갱이’라는 말이 여전히 통하는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은 어쩌면 이런 최악의 조건 때문에 지구 최후의 분단국으로 남은 것일까.

 

2차 대전 후부터 현재까지 도시 베를린의 역사를 통해 저자는 우리나라의 통일을 위한 시사점을 짚고 있다. ‘통일을 꿈꾸기 이전에 먼저 평화를 만들었던 동서베를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베를린의 과거가 우리의 현재라면 베를린의 현재가 우리의 미래이길 바라본다.

 

저자의 매끄러운 문장 덕에 암울한 시기에 대한 책을 수월히 읽고 분단국가로서의 우리나라에 대해 여러 생각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다만 독일과 베를린의 사례만 제시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입해보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박한식 교수의 「선을 넘어 생각한다」같은 책을 함께 읽으면 균형잡힌 독서가 될 것 같다. 이 책은 남북 분단상황에 대한 분석과 함께 실행 가능한 ‘평화’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은 글을 쓰는 저자의 다른 책이 있나 싶어 찾아봤지만 검색되지 않았다. 이 분야의 전문가로서 다른 저서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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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에서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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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서야 표지의 얼룩이 무엇인지 알아보게 됐다. 신기하게도 그 전에는 제목 아래에 있는 그 어둑한 그림자가 무슨 모양인지 몰랐다. 내 눈엔 그저 공원에 앉은 사람들만 보였고 화창한 하늘에 낀 작은 구름 때문에 잔디 일부분에 그늘이 져 있는 모양새로만 보였다. 일상에 길들여진 대로 보는 눈이 그려낸 광경이었다.

 

스티븐 킹은 공포 소설의 대가가 아니었던가. 무서운 이야기를 즐기지 않는 편이어서 스티븐 킹의 책을 읽을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이번 책「고도에서」는 그에게 전과 다른 칭호를 붙이고 있다. “스윗 킹”이라고. 공포의 제왕이 쓴 달콤한 이야기라면 읽어도 괜찮겠지 싶었다.

 

책에는 현실을 뛰어넘는 설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귀여운 수준이다. 주인공 스콧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체중감소 현상을 겪는다. 희한한 일은 외모나 신체 능력의 변화는 전혀 없다는 거다. 느껴지는 증상은 그저 몸이 중력의 감옥을 벗어나고 있다는 정도. 초현실적인 현상이다. 딱 여기까지 킹의 명성에 걸맞는 부분이었다.

 

스콧의 이웃에는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레즈비언 커플 디어드리와 미시가 산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결혼한 사이지만 보수적인 마을에서는 이들의 공개적인 행보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정체성을 쉬쉬하며 숨기지 않고 지나치게 당당하다는게 이유다. 아무리 멋지고 입맛 당기는 메뉴를 내놓는다 해도 그들이 ‘결혼한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레스토랑은 파산 위기에 처해있다. 이들이 게이커플이었다면 어땠을까. 다른 점이 있었을까. 그건 좀 다른 문제고.

 

“그러니까…… 레즈비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결혼까지 한 레즈비언이지. 그건 절대 타협 안 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 (…)”

“(…) 그 여자들이 정체를 숨기고 살았으면 괜찮았을 거야. 그런데 안 그랬잖아. (…)” p.65

 

마을 전체가 디어드리와 미시를 터부시 한다. 스콧은 이들을 위해 자신의 가벼워진 몸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몸에 변화가 오지 않았었다면 스콧은 레즈비언 커플에게 마음이 기울었을까.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상황,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직접 몸으로 겪고 있기 때문에 소외된 이웃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어졌을 것이다.

 

이 동네 전체가 레즈비언을 부결했다. 선거 투표에서 부결한 것만 뜻하는 게 아니다. 이 마을의 표어가 ‘남들 모르게 못하겠으면 나가라.’인가 싶다. p.104

 

디어드리는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태도에 마음의 문을 닫는다. 이웃들이 뭐라든 스콧은 디어드리 커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그러한 태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기적은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 누군가를 특히 나와 다른 누군가에게 한 발 다가가는데 필요한 건 한 잔의 와인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스콧이 치즈, 크래커, 그리고 올리브와 함께 준비한 피노 와인 한 잔이 두 사람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p.150

 

스콧에게 찾아온 마지막이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칠 앞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찾아온 비현실적인 일이 사실이라면 아직 알 수 없는 미래 또한 생각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스콧은 그의 삶에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다만 ‘행복’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스콧은 자신이 가진 체력의 극치를 경험했다. 신세계였다.

그는 만사가 다 이와 통한다고 생각했다. 이 고양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이라면 우리는 죽음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p.136

 

과거는 역사이고 미래는 불가사의다. p.97

 

디어드리는 마지막 순간에 도와달라는 스콧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스콧과 디어드리, 그 둘은 다름을 이유로 타자화되어 소외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전같으면 서로를 수용할 일이 없었을 그들이 이제 상대를 완벽히 이해한다.

 

“그리고 저는 병실이나 정부 기관에서 검사나 당하면서 이 체중 감소 프로그램의 남은 시간을 허송하고 싶지 않아요.” 스콧이 말했다. “어쩌면 대중들의 흥밋거리나 되거나요.”

디어드리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완벽하게 이해돼요.” p.159-160

 

소설은 이해와 포용의 이야기였다 그것도 아주 따뜻한 이야기 말이다. 킹의 소설이 이런 식이라면 내가 그간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은 것은 지나치게 겁먹은 행동이었다. 설정이 어떻든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이야기, 사회의 그늘에 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라면 게다가 그토록 흥미진진하다면 얼마간의 으스스함은 견딜만 할 것 같다.

 

내가 책 표지를 보면서 당연한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스콧도 디어드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은 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변화로 인해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소외된 타인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내가 책을 다 읽고 나서 표지의 그림자 모양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래서 스콧에 대해 뭉클한 마음이 더 커졌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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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문은강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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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하다. 고복희가 춤추는 장면은 끝까지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원더랜드가 프놈펜에 있을 거란 상상만으로 흐믓해졌다. 왜냐구? 고복희처럼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라기 때문이다. 평범한 수준의 상식이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사회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권력자가 됐든 돈 많은 사람이 됐든.

 

소설의 주인공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원더랜드’라는 이름의 호텔을 운영하는 고복희다. 소설의 배경과 인물들은 모두 현 시대를 살아가는 각 세대와 계층에서 추출한 표본들 같았다.

 

배경은 80년대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슷한 캄보디아. 군부의 세력이 정치를 휘두르고 자본과들과 결탁하며 비리와 불의가 득세하는 곳이다. 군사 정권이라는 점만 빼면 원칙을 교묘히 피해가는 힘있는 자들의 행태는 거기나 여기나 별 다를 바 없다.

 

군복을 입과 민간인을 위협하는 모양새라니. 이런 것마저 과거의 한국과 닮아 있다. 그때도 그랬다. 아파트가 무너지고 호텔에 불이 나 애꿎은 사람들이 죽는 이유는 모두가 당연한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

개 같은 세상. 그렇다. 총을 들고 위협하는 군인. 부패한 관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 지금 이 나라의 현실이다. pp.54-55

 

고복희의 원더랜드를 찾은 손님 박지우는 청년세대의 표본이다. 열심히 살고 싶지만 되는 게 없다. 하루가 멀다하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친구를 보다 못해 진짜를 느끼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앙코르와트를 찾아 프놈펜으로. 그러나 불국사가 서울에 없는 것처럼 앙코르와트는 프놈펜이 없었다.

 

“뭔가 이루고 싶으면 죽도록 하라고 하는데. 제가 봤을 때 죽도록 하는 사람들은 진짜 죽어요. 살기 위해 죽도록 하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p.93

 

한인 회장 김인석은 기성세대를 대표한다. 노년층의 안일함과 청년층의 게으름을 못마땅히 여기며 다같이 뭉쳐 한국인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일을 도모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늙은이는 시도 때도 없이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지껄인다. (…) 아직도 그 시대에 머물러서 빠져나오질 못한다. 젊은 놈들은 더 한심하다. (…) 훌륭한 점심을 먹는 것이 인생에서 가중 중요한 일인 것처럼 군다. p.133

그는 스스로가 한국인이라는 데에 자부심이 있다. 한국인은 보통 인간이 아니다. (…) 얼마나 대단한 민족인데. 고개를 치켜들고 떵떵거려야 한다. 이렇게 죽은 듯이 살아서는 안 되는 거다. p.134

 

호텔 원더랜드에서 일하는 캄보디아인 린은 출중한 외모에 외국어에도 능통하다. 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이 부끄럽다. 우리네가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가 정확히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린이 생각하는 한국은 자랑스럽게 여기기 힘든 나라다.

 

고용허가제가 실시된 이후로 한국은 외국인에 대한 취업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업은 값싼 임금으로 위험한 노동을 할 수 있는 인간을 원할 뿐이었다. 부당한 대우에도 한국 정부는 제대로 해결할 생각조차 없었다. 특히 여성 노동자에 대한 처우는 최악이었다. p.99

 

고복희의 남편 장영수는 개발 논리에 희생된 사람들을 보여준다. 바닷가 출신인 그는 새만금 간척사업이 자연에 얼마나 훼손을 가하는 일인가를 알리기 위해 애쓴다. 갯벌에 의지해 살아가는 어민들을 보호하고 자연을 살리기 위한 그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간다.

 

그것은 일종의 부끄러움이었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는 정부에 대한. 눈앞의 손실만 바라보는데 급급한 법원에 대한. 명백한 오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나약한 자신에 대한. pp.193-194

 

고복희는 원칙주의자다.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지만 그녀의 원칙은 주위와 불화하지 않는다. 그녀의 원칙은 일관성있고 의로움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불편하게 느꼈던 박지우도 호텔에서 일하는 현지인 린도 고복희를 신뢰한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다.

 

낭비는 고복희가 용납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다. 불필요한 쓰레기를 만드는 건 게으름뱅이나 하는 짓이다. 항상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p.88

 

우리 사회 구성원들을 대표하는 캐릭터들이 모여 원더랜드를 둘러싼 한 바탕 이야기를 엮어간다. 교민사회의 힘 있는 자들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원더랜드를 탐낸다. 남편의 꿈을 구현한 장소인 원더랜드를 순순히 포기할 고복희가 아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움직임에 대해선 굳이 애쓰지 않지만 원더랜드를 지킨다는 원칙은 고수한다. “부당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참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삶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자를 향한 불의를 눈앞에서 목격할 때 그녀는 자신의 ‘옳지 못함’을 무릅쓴다. 소설 대목 중 가장 통쾌한 장면이다. 자신의 옳지 못함으로 더 큰 불의가 자신의 본 모습에 눈을 뜨게 하는 불가사의한 통쾌함이었다.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가 「오베라는 남자」보다 재미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고복희라는 캐릭터는 그 독특함 때문에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다. 짧은 단발머리와 꼬박꼬박 내뱉는 “다, 나, 까”말투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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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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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이 맞나? 「일생일대의 거래」을 들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책의 부피는 그간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이야기의 향연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었다. 책 뒷면에 친절히 소개되어 있는 바를 보자면 그의 필력은 무려 다음과 같다. 「오베라는 남자」452쪽,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552쪽, 「브릿마리 여기있다」480쪽,「베어타운」 572쪽, 「우리와 당신들」 602쪽. 이중 「우리와 당신들」을 재밌게 읽었다. 서사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책장이 쉴 새 없이 넘어갔다.

 

소설은 그 길이가 짧아질수록 그 안에 담기는 의미가 압축된다. 상세한 설명과 묘사 없이 뚝뚝 떨어진 장면들을 서로 연결해 상상해야 한다. 이 작가에게 기대한 소설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호기심도 일었다. 이렇게 프레드릭 베크만이 쓴 두 개의 중편 중 하나인「일생일대의 거래」와 조우했다.

 

이건 한 생명을 구하려면 어떤 희생을 치를 준비가 되어야 하는지를 다룬 짧은 이야기다. 미래뿐 아니라 과거까지 걸린 문제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신이 앞으로 가게 될 길이 아니라 뒤에 남긴 발자취가 걸린 문제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게 전부라면, 그게 당신의 전부라면 누굴 위해 당신을 내어 줄 수 있을까? p.5

 

꽤 무거운 주제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도입부로 시작한다.

 

안녕, 아빠다. 조만간 일어나겠구나. 헬싱보리는 지금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일 텐데. 나는 사람을 죽였다. p.11

 

자녀에게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인사를 건네면서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하는 아버지라니. 「이방인」의 첫 문장에 대한 오마주라도 되는 걸까.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누굴 죽인 걸까. 그걸 왜 아이에게 고백하듯 말하는 걸까. 데뷔작부터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작가다운 시작이다.

 

그 후의 이야기는 도입부의 궁금증을 풀어가는 수순으로 이어진다. 자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던 주인공은 가족을 버리다시피 하던 끝에 홀로 되고 사회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이루지만 병마를 피하지 못한다. 입원한 병원에서 불치병에 걸린 소녀와 죽음의 사자를 만난 그는 하나의 죽음으로 다른 하나의 죽음을 대신하려 한다. 아니 하나의 목숨으로 다른 목숨을 사려한다.

 

“다른 사람들 데려가요! 다른 사람을 줄 테니 그 사람을 죽여요!” p.21

 

평생 남자의 주변을 맴돌며 죽음의 순간을 경고해주던 회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어김없이 병원에도 나타난다. 뭔가 잔뜩 적힌 폴더를 들고 까만 연필로 그 위에 뭔가를 표시하는 으스스한 분위기의 여자. 그녀는 그 병원에서 누구를 데려가려는 걸까. 그? 소녀? 언제 올지 모를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남자는 행복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행복이란 승자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갖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행복은 어린아이나 동물을 위한 것이고 거기엔 실질적인 기능이 전혀 없다. 행복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그들의 세상에는 예술도 음악도 마천루도, 발견도 혁신도 없다. 모든 리더, 네가 아는 모든 영웅은 하나같이 집착이 심하다. 행복한 사람들은 무언가에 집착하지 않고, 질병을 치료하거나 비행기를 띄우는 데 일생을 바치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를 위해 살고 오로지 소비자로서 지구상에 존재한다. 나와 다르게. pp.73-74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날 그의 마음에 동요가 생긴다.

 

그리고 나는 궁금해졌다. 내가 그 개들처럼 행복한 적이 있었는지. 그 정도로 행복해질 수 있었는지. 행복해지는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p.74

 

“암이 있으면 가구에 낙서해도 되”는 걸 알고 자신을 보며 우는 엄마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할 줄 아는 다섯 살짜리 아이는 회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를 무서워한다. 회색 스웨터 아줌마가 오지 못하게 보초를 서겠다고 아이와 약속한 남자는 자신에게 큰 변화가 닥친 걸 알아챈다.

 

남자에게 중요한 건 시간이다. 그리고 1초의 가치를 믿으며 인생을 건 마지막 거래를 한다. 그가 건 1초의 가치는 무엇인지, 그의 마지막 거래는 성공했는지는 각자가 확인해 보시길.

 

많은 의미를 눌러담은 동화같은 소설이다. 중편이라 부르기에도 짧아 보이는 분량이지만 삶에 대해 부모가 되는 일에 대해 행복과 희생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책의 만듦새도 좋았다. 표지부터 속지의 삽화들까지 따스한 색감의 그림들이 들어있다. 이야기를 담되 울림을 더 크게 만드는 이미지들을 보며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다 보면 어느새 첫 페이지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남자의 선택을 곱씹어 보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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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샘과 함께하는 시간을 걷는 인문학
조지욱 지음 / 사계절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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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길에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수많은 인간의 발자국이 묻어 있다. 어떤 길은 수천 년의 시간을 견디며 수만 킬로미터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길을 공부한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과 같다. 그런 역사가 깃든 길을 걸으며 수천 년 동안 그곳을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을 만나는 상상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 p.7

 

「시간을 걷는 인문학」은 지리에 얽힌 여러 시대의 사회, 문화, 경제, 환경 등의 이야기를 길이라는 주제로 묶어낸다. ‘1장 하늘부터 바다, 땅속까지, 세상은 길로 이어져 있다’에서는 여러 가지 길에 대해 소개하고 ‘2장 우리와 또 다른 사회를 연결하는 길’에는 문명과 문명을 연결하는 길과 그 길이 있음으로 일어난 변화에 대해 다룬다. ‘3장 오고 가는 길에서 피어나는 문화’에서는 길과 강이 문명의 생성과 문화의 발달에 미친 영향을 서술하고, ‘4장 경제 발전과 전통 사이에 놓인 길’은 교역과 소통을 위한 길이 경제와 어떤 상관 관계를 맺는지 알아본다. ‘5장 자연환경과 길은 공존할 수 있을까?’에서는 인간이 만든 이기인 길과 자연이 주고받는 영향을 다룬다.

 

저자는 세계 도처의 길을 소재로 하는 동시에 그 길에서 파생된 문명 그리고 길을 통해 이뤄진 소통과 발전, 쇠망에 이르는 역사의 현장을 함께 보여준다. 길을 알면 길에 담긴 인간사를 알게 되고 인간 문명을 통찰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을 걷는 인문학」이라는 책의 제목은 책의 의도를 가장 적절하게 요약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길을 소개하는 부분에 눈이 갔다. 나라 땅 여기저기에 낯 선 이름의 길들이 오랜 시간동안 자리하고 있었다. 각각 길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저자는 ‘토끼비리’ 길을 설명하면서 ‘비리’란 강가나 바닷가의 낭떠러지를 뜻하는 사투리라는 것과 조선 선조 때 재상 유성룡의 일화와 고려 태조 왕건의 이야기를 한다. 역사를 담은 길 이야기가 길지 않은 에피소드로 차곡차곡 담겨있다.

 

 

이야기 사이사이 따로 영역을 만들어 넣은 단편적인 설명도 재미있다.

 

배는 어떻게 발달해 왔을까?

원시 시대의 통나무배로는 ‘카누’, 가죽배로는 ‘카약’이 있다. 단순히 재료의 뜨는 성질을 이용하던 것과 달리 인간의 힘으로 뜨도록 만든 최초의 배는 이집트인의 ‘파피루스배’다. 나일강의 갈대(파피루스)로 만든 이 배는 앞과 뒤의 끝이 올라간 모양을 하고 있으며, 처음으로 돛을 달았다. p.94

 

「시간을 걷는 인문학」은 지나온 시대에 대한 이야기에 더해 현재 그리고 앞으로 문제가 될 환경 이야기도 다루고 있다. 특히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가 물속에 잠기는 현상이 우리나라도 나타난다는 것에 놀랐다. 제주 ‘용머리 해안 산책길’ 이야기는 지구 환경 변화에 예외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산책로가 바닷물에 잠기기 시작하더니 최근 들어 잠기는 시간이 길어져 하루 평균 4~6시간에 이른다. 산책로가 사라지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지구 온난화가 그중 하나라고 한다.

제주 해수면은 지난 40년 동안 22센티미터 상승하고, 바닷물의 온도는 30년 사이에 1.2도 높아졌다. 제주 해역의 해수면 상승률은 우리나라 다른 해역보다 가팔라서 1년에 4.55밀리미터씩 상승한 것을 분석됐다. 이것은 전 세계 평균 해수면이 1년에 1.8밀리미터씩 상승한 것보다 2.5배 정도 높은 수치다. 과학자들은 지구 기후 변화로 수온이 상승해 바닷물의 부피가 커진 것을 원인 중 하나로 꼽는다. 이는 이어도 남측을 지나 동해안과 일본열도 동쪽으로 들어오는 쿠로시오 해류의 유량과 수온 변화 등의 영향이다. pp.182-183

 

하나의 이야기 길이가 길지 않아 어린이가 읽기에 적당하다. 책 내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시각 자료가 알차게 들어있다. 지도뿐 아니라 그래프, 에피소드를 설명하는 사진 등은 읽기의 흥미도를 높이는 포인트다. 다만 한 지형을 설명하며 시대나 지명, 인물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뒤섞여 나와 배경 지식의 정도에 따라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다. 연결해서 읽지 않더라도 짧은 시간에 한 에피소드씩 넘겨보아도 좋을 책이다.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면 흥미로운 지역의 길 이야기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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