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한 조각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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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터스텔라>(2014), <오블리비언>(2013), <타이드랜드>(2005)에 공통점이 있었다. 세 영화는 하나의 그림을 주요 모티브로 삼았다. 황량한 들판 한 가운데 갸날픈 여성이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앤드루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다. <인터스텔라>와 <타이드랜드>는 거친 들판에 솟아 오른 낡은 저택의 이미지를 차용했고, <오블리비언>에서는 그림이 주인공들의 의지를 다지는 상징물로 등장한다.

 

화가의 이름이나 그림을 이전에 알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앤드루 와이어스는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 중의 한 명이다. 추상화가 대세이던 시기에 끈질기게 극사실주의를 표방한 구상화를 그려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그의 대표작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실존 인물인 크리스티나 올슨을 모델로 했다. 그녀는 샤르코 마리 투스 병으로 추정되는 신경계 질환을 앓아 움직임이 힘들어지고 중년에 이르러서는 기어서 이동해야 했다.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는 이웃이었던 그녀의 모습을 그렸다. 그림 덕에 유명세를 탔지만 크리스티나는 끝까지 외딴 시골에서 사는 자신만의 생활 방식을 지켰다.

 

작가는 거친 풀밭을 가녀린 팔로 디딘 크리스티나의 모습이 "무뚝뚝한 개인주의와 내면의 힘, 장애를 불사하는 도전 정신, 불굴의 의지"와 같은 "미국인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림의 모델 크리스티나의 삶을 소설로 살려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과 실제 인물 크리스티나를 구별짓고자 한다. 비록 역사적 사실을 철저히 조사해 소설을 썼다해도 소설로 표현된 인물의 내면이 실제 인물과는 다를 수 있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책을 읽은 독자 입장선 두 인물이 하나로 여겨진다. 꼼꼼한 사료조사로 구성한 소설적 현실이 실존 인물 크리스티나 올슨의 일대기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외딴 시골집에서 외롭게 살아가던 여성, 불편한 몸에도 무엇엔가 기대려하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기를 고집한 그녀가 작가의 문장으로 생생히 그려졌다.



소설은 1939년 크리스티나와 앤드루 와이어스를 만나는 시기와 그녀의 과거를 교차로 그려낸다. 크리스티나의 조상들이 어떻게 메인주 쿠싱에 정착하게 됐는지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병이 시작된 서너살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을 돌봐야 했던 청소년 시절, 사랑하고 배신당한 후 동생 앨과 외딴 집에 칩거하게 되기까지를 들려준다.

 

몸이 불편했지만 자존심과 자립심이 강했던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몸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태도로 마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그녀는 장애가 있다고 해서 동정받기를 원치않았고 도움 또한 거절했다. 고생스럽지만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려하고 학교도 어떻게든 계속 다니고 싶어 한다. 그녀는 문학에 대해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아이였다. 학교에 계속 남아 선생님이 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기뻐한 것도 잠시 그녀의 부모는 크리스티나의 학업 중단을 결정한다. 가사를 돌볼 사람이 없다는 이유다. 자기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사람이 대가족의 집안일을 온전히 떠맡아야 했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상처와 부상이 따라 다녔다. 마을 사람 일부는 친절을 가장한 동정과 감사함을 전제로한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그리곤 왜 자신들의 도움을 고마워하지 않는지 의아해한다. 크리스티나는 그들을 인정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들에게 장애인을 돕는 것은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확인하기 위한 행동일 뿐이므로. 크리스티나는 친절을 가장한 위선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둘 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지만 그 자존심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 내 자존심의 형태는 반항이고, 아버지는 부끄러움이다. 내게 휠체어는 포기했다는 것을, 집안의 보잘 것없는 존재로 살겠다고 체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눈에 그것은 창살이다. 아버지에게는 왕좌이고 덧없는 권위를 유지하는 방편이다. (…) 나는 부끄러운 줄 모른다. 부상과 굴욕을 감수해가며 내가 선택한 방식대로 움직이려고 한다. p.275

 

앤드루 와이어스(이하 앤디)는 크리스티나를 대하는 태도가 스스럼없었다. 그 자신이 다리를 약간 저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앤디를 크리스티나에게 소개한 그의 부인 뱃시도 어린 시절 척추층만증 교정을 받았었다. 몸의 불편함과 그에 따르는 사람들의 시선, 태도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세 사람은 금새 친밀함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앤디는 대개 뭘 들고 오거나 돕겠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는 방식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 우리를 개조가 필요한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나가고 싶어하거나 이미 문밖으로 반쯤 나간 거나 다름 없는 사람의 분위기를 풍기며 의자 끝에 걸터앉거나 문 앞에서 서성이지 않는다. 그냥 자리잡고 앉아서 관찰한다. p.240

 

앤디가 크리스티나의 집에 작업실을 차린 후 그녀는 "그의 눈을 통해" "집의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을 모두 새롭게 인지"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을 판단했던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앤디는 황량한 그 집을 "백 년 동안 그려도 절대 싫증날 일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크리스티나 곁에 끝까지 남은 사람은 동생 앨이다. 사랑을 만나 떠날 수 있었던 기회도 누나를 위해 포기한다. 엘이 포기한 삶은 그에게 상처가 됐다. 누나 옆을 지키겠다는 마음은 그의 나머지 인생 일부를 갉아먹었다. 크리스티나는 대가족의 가사를 돌보기 위해 미래를 희생했었다. 앨은 누나의 희생에 값하기 위해 사랑을 잃었다. 가족이 무엇일까.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시스템인가. 다행인건 둘이 서로를 여전히 위하는 마음이 있다는 거다. 앨은 누나를 위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고 크리스티나는 동생에게 미안해한다. 크리스티나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할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의자에 기대앉는다. 옷이나 못 쓰게 된 손뿐만이 아니다. 모든 게 그렇다. 앞날이 두렵다. 허약해질 수밖에 없는 앞날이. 남한테 점점 의존하게 될 앞날이. 남은 생을 이 깨진 껍데기 같은 집에서 살아야 할 앞날이. p.303

 

여기서 우리는, 삶의 동반자가 아닌 남매로서, 나고 자란 집에서 조상들의 혼령에 둘러 싸인채, 꿈꾸었던 상상 속의 삶을 곱씹으며 함께 지내는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 우리가 먼지로 사라지면, 여기서 우리 둘이 공유했던 삶, 우리의 소망과 불안, 우리의 애착과 고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pp.352-353

 

앤디가 완성한 그림에는 "다른 사람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이 표현돼 있다. "세상의 작은 일부분"이자 크리스티나에게 "세상의 전부"인 "집과 들판" 그리고 젊은 아기씨의 마음을 가진 그녀의 "바람과 망설임". 크리스티나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사진처럼 선명하고 동화처럼 신비로운"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깨져버린 꿈과 약속을 딛고 지금까지 살아온 여자가 여기 있다. 그녀는 여전히 살고 있다. 영원히 저 언덕 비탈에서, 캔버스 가장자리까지 펼쳐진 세상의 중심에서 살 것이다. p.363

 

화가와 모델 사이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읽는 일은 흥미롭다. 그림을 잘 읽는 또 다른 방법이다.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의 『세상의 한 조각』 은 그림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해설하는 동시에 크리스티나 올슨이라는 장애인의 삶을 보여준다. 불편한 몸을 가진 그녀의 생각들을 기술한 대목들이 기억에 남는다. 희망과 절망, 낙관과 불안, 좌절과 체념 그 사이에서 건져 올리는 작은 행복들. 현실의 크리스티나도 그렇게 살았을 것 같다. 포기하지 않는 용기있는 삶을 살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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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4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누구 2021-06-05 21:17   좋아요 0 | URL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꾸벅)
 
스토아 수업 - 철학은 어떻게 삶의 기술이 되는가
라이언 홀리데이.스티븐 핸슬먼 지음, 조율리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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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철학의 갈래들에 대해 알고 싶어 철학사를 읽었었지만 기억에 남는 거라곤 스토아, 에피쿠로스, 스콜라, 실존주의 등등의 이름뿐이다. 각 사상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알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입이 절로 무거워진다. 읽어도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은 피상적인 문장으로만 사상을 알아보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상을 주장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알고 어떤 경험에서 철학의 줄기가 되는 생각을 퍼올렸는지 안다면 철학의 맥을 더 잘 알 수 있을텐데.

프랭크 틸리의 『서양철학사』에 따르면 '스토아주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쳤던 철학에 더 가깝"고 "그들의 삶의 이론을 형성하는 본질적 요소들"이 "대중적 형태로 제시"된 것이다. 앞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강조했던 "4주덕" 즉 "지혜, 정의, 용기, 절제"를 일상의 삶에 실천하는 방법에 대한 사상이라할 수 있다. 문장으로 풀어놓으니 스토아주의에 대한 정의 자체부터 어렵게 느껴진다. 스토아 학파를 구성하는 논리학과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등의 학문으로서의 철학적 논의를 떠나 쉽게 다가가 볼 수는 없을까. 삶의 한 부분으로서의 스토아 철학을 본다면 어떤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


라이언 홀리데이와 스티븐 핸슬먼의 책 『스토아 수업』은 '삶의 기술'로서 '철학'을 말한다. 이때의 철학은 '스토아 철학'이다. "덧없는 사상이 아닌, 행동하는 철학이자 쓸모있는 삶의 기술"을 실천한 철학자의 일생은 곧 '스토아 철학'의 본질적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스토아 철학은 덧없는 사상이 아닌, 행동하는 철학이자 쓸모 있는 삶의 기술이다. 용기, 절제, 정의 그리고 지혜라는, 간결하지만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네가지 덕목을 강조했다. 그래서 여느 철학처럼 철학자들이 남긴 말과 글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실제 삶의 여정에서도 여러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책에는 스토아 철학을 창시한 키티온의 제논부터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기원전 330년 즈음부터 기원후 180년까지의 기간 동안 살았던 26인의 철학자를 다룬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싹을 틔운 스토아 철학은 로마 제국 황제의 마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스토아 철학자의 계보를 나열한다. 예를 들면 철학의 창시자 키티온의 제논 다음에는 그의 제자이면서 스토아 학파의 2대 수장인 클레안테스를 소개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스토아 철학의 전반적 사상을 소개하는 1부, 자기 자신의 성찰에 대한 2부, 최선의 삶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3부, 궁극적 삶의 기술을 서술하는 4부로 나눠 각각의 철학자의 삶을 소개한다.


철학자들의 이름과 생몰연대와 사상만 나열된 경우 같은 사상 테두리 속의 각 인물들을 변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 책은 철학자들의 일생, 직업 누구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서술함으로써 역사 속의 철학자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로도스 출신의 파나이티오스는 로마 장군 스키피오의 "통역관이자 고문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로마 출신으로 집정관을 역임한 스토아 철학자 루틸리우스는 로마 장군 마리우스와 갈등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와 갈등했고 아우구스투스는 아테노도루스와 아리우스라는 두 명의 스토아 철학자를 스승으로 삼았다. 로마사 속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이 차지했던 역할에 대해 읽으면서 스토아 철학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높아졌다. 로마사의 향방에 스토아 철학이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해보는 흥미로운 공부를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


연민에서 비롯한 '공감'을 바탕으로 한 "세계 시민주의"를 장려한 크리시포스와 "인생을 한 편의 연극"에 비유한 노예 철학자 에픽테토스, 그리고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몸소 실현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다룬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국내 번역돼 있는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는 것도 숙제다.


크리시포스의 공헌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우리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에서 산다는 제논의 사상을 바탕으로 '심파테이아symphatheia'라는 개념을 장려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연결되어 있고 모두가 우주의 시민이기에, 기쁨과 슬픔, 고통 같은 감정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다는 세계 시민주의다. p.76


에픽테토스는 삶에서 읽어나는 일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인생은 한 편의 연극과 같다. 그래서 그는 온 힘을 다해 연기했다. "(…) 잘 연기하는 게 각자 해야 할 일이다. 배역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p.317


(…) 마르쿠스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 타인의 칭송과 숭배를 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기념기를 거의 만들지 않았고, 비판에 개의치 않았으며, 절대로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 p.361


모든 철학자가 스토아 철학을 삶에서 완벽하게 실천한 것은 아니다. 철학으로 얻은 명성을 권력과 축재에 사용했던 세네카, 철학적 삶보다는 명성에 집착했던 키케로, 복수에 눈이 멀었던 디오티무스 등은 반면교사의 대표적 사례다. 철학을 공부했다고 해서 배운대로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이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사상을 일생을 통해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배우고 느끼고 실천하지만 누군가는 배움과 삶이 따로 간다. 그렇지만 우리 중 대다수는 그 둘의 중간 어디쯤에 자리할 것이다. 어떤 배움은 실천하고 또 어떤 앎은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삶의 모습이다. 스토아 철학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우리의 자리를 '배움과 삶의 합일' 쪽으로 기울이는 일일 것이다. 알긴 알지만 행하지 못하는 삶에서 아는대로 행하는 삶으로 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그 어떤 인물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서 용기와 정의, 절제와 지혜라는 고결한 덕목을 실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성공하거나 역경에 맞섬으로써, 의도했든 아니든 자신이 믿는 원칙이 실제 선택보다 더 숭고하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완전무결한 인생보다 스토아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한 데에 더 큰 의의가 있다.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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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 -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리처드 월린 지음, 서영화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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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내게 읽어도 이해하기 힘들고 조금 아는 것 같다가 금새 헤매게 되는 분야다. 어려운 문장을 붙잡고 있을 때면 '대체 내가 왜 이 책을……'하며 끙끙댄다. 책에 담긴 내용을 소화하지 못해 머리를 쥐어 뜯다가 해제 또는 옮긴이의 해설을 볼 때서야 '아, 내가 읽은 내용이 이런 거였어'하며 자괴감에 빠지기 일쑤다. 그럼에도 또 언제 그랬냐 싶게 철학을 다룬 책에 끌리곤 한다. 무슨 조화 속인지.

『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는 조금 만만해 보였다. 책 소개를 읽어보니 하이데거의 유대인 제자들인 아렌트, 뢰비스, 요나스, 마르쿠제와 하이데거의 사제관계에 집중한 책처럼 보였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동조한 일에 대해 또 제자 아렌트와의 관계에 대해, 그 전후 사정이 알고 싶기도 했다. 뢰비스와 요나스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지만 나머지 두 명의 이름은 들어 봤으니 어려운 철학을 다루더라도 읽을(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순진한 생각이었다. 책은 하이데거와 그의 유대인 제자들의 '관계'에 집중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관계'를 통해 하이데거 사상의 방향성을 명료히 하는 것이 책의 목표였다. 


저자 리처드 월린은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가 우발적이거나 불가피했던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독일적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독일에서 번성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계승자'이며 반유대적, 반근대적 사상가다. 이에 반해 하이데거 사상의 근원을 배제한 채 그의 텍스트를 독해한 북미권에서는 그를 "'인간'과 '이성'에 대한 비판자"로 여기고 그 안에 담긴 '정치적 함축'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전에 하이데거에 대해 읽었던 글들은 저자의 우려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나치에 부역했지만 주변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기간이 매우 짧았고 나치의 본질에 대해 알게 되자 곧 관계를 단절했다는 내용이었다. 옮긴이는 해설에서 국내 하이데거 연구가 '내재적 접근을 선호한다'고 적고 있다. 이는 북미의 연구 전통을 따른 독해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월린의 책은 하이데거 연구의 다양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독의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


월린은 하이데거 수용사를 논할 때에도 이러한 외적 평가 척도를 중요하게 제시한다. 월린은 영미권 내에서 하이데거의 수용이 (…) 여전히 내재적 접근을 선호해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국내 하이데거 연구에 대해서도 아주 다른 평가를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하이데거나 제자들의 사상에 대한 텍스트 외재적인 분석과 비평은 기존에 내재적 접근 방식이 주를 이뤘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균형 잡힌 시선을 제시하는 미덕을 분명히 갖는다.

pp.435-436


책은 하이데거의 유대인 제자들에서 시작한다. 스승이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나치의 사상적 대표가 된 상황에서 유대인 제자들은 어떤 혼란과 반응을 드러냈는지를 서술한다. 저자가 선택한 대표적인 네 명의 제자는 한나 아렌트, 카를 뢰비트, 한스 요나스, 허버트 마르쿠제다. 저자는 이들을 독일에 동화된 유대인이라고 말한다. 나치의 탄압이 시작되기 전까지 자신들의 유대 정체성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나치 이전까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지우면 독일 사람들과 같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유대인들을 보는 독일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고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탄압이 시작됐다. 하이데거의 제자들도 갑작스런 스승의 변화에 각자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제자들 중 사상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 스승의 영향에 많이 휘둘린 사람은 한나 아렌트다. 아렌트는 제자인 동시에 연인이었다. 하이데거가 나치에게 돌아섰을 때 아렌트는 스승을 비난했지만 종전후 그와 화해하고 스승의 대변자가 됐다. 월린은 하이데거 사상의 영향을 아렌트의 저작에서 찾아내 그녀의 사상 변천이 하이데거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밝힌다.


그러나 두 사람이 화해한 이후, 그녀의 어조는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화해 이후 그녀는 하이데거의 나치 전력의 무게와 크기를 체계적으로 축소했다. (…) 이전의 비판적 묘사의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pp.142-143


근대 역사의식 연구로 독일에서 잘 알려진 카를 뢰비트,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추구한 생철학자 한스 요나스의 경우도 근대 정신을 비판하고 전제주의에 경도돼 있다는 점에서 스승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그(요나스)는 플라톤의 '철학자 왕' 교리가 담고 있는 반민주주의 편견에 명백하게 빚을 지고 있다. 이는 1930년대 초 하이데거 역시 미혹되었던 편견이기도 하다. 요나스는 전제정치의 미덕을 공공연하게 찬양한다.

p.263


허버트 마르쿠제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영감을 받아 스승을 찾은 사람이었다. 그는 스승의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결합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제자의 방향을 탐탁잖아 했고 나치를 선택하면서 결별에 이르렀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젊은 추종자가 좌파의 정치 신념을 가졌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하이데거는 마르쿠제의 철학적 세계관의 핵심을 형성한 것이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를 종합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이데거의 단호한 반공산주의적 관점에 비추어볼 때, 이를 호의적으로 보았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pp.317-318


아렌트는 스승과 화해했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다. 때문인지 아렌트에 대한 저자의 서술은 다른 제자들의 경우에 비해 신랄해보인다.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제자들의 사상적 흐름을 소개하고 스승 하이데거와의 관계 서술한 후 그들의 사상에서 보이는 스승과의 연계성을 풀어낸다. 반면 아렌트의 경우는 하이데거와의 관계를 일대기적으로 소개하면서 그 변화에 따른 아렌트 철학의 향방을 서술한다. 한나 아렌트의 모든 사상은 하이데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마지막까지 짝사랑이 계속된 것처럼 묘사된 것을 볼 때 그녀가 가진 정치철학자로서의 위대함을 어디서 찾아야할지 난감해졌다. 아렌트는 책에 소개된 제자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인데 말이다. 특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주장을 어떤 맥락으로 바라봐야 할 지 생각하게 했다.

교육자로서 하이데거는 대단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제자들이 스승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데는 이런 부분이 일정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하는 말마다 '가치있는 어떤 것'이라는 느낌을 주는 스승이라면 그가 말하는 사상의 결점도 눈에 들어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은 한때 스승을 믿고 따랐고 그의 배신에 경악하면서도 자신들에게 배어든 스승의 그림자를 알아채지 못했던 듯하다.


요나스는, 상당한 정도로, 그 철학자의 매료시키는 능력이 '이해할 수 없는' 담론의 성격에서 기인했다고 언급했다. 말하자면 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말에는 '이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p.271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자로서의 면모는 2014년 『검은 노트』가 출판되면서 확연히 드러났다. 사적인 기록물인 『검은 노트』에 그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일에 끔찍하게도 가담한 사실"을 적었다. 하이데거를 '수동적 반유대주의자'로 보려는 지지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본심'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월린의 주장이 더 합리적 결론이라 생각한다. 하이데거를 더 이상 '훌륭한 사상가'로 보기는 어려운 일이며 그의 철학은 '문제의 일부'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국가사회주의의 끔찍한 악행을 하찮아 보이게 만드는 하이데거의 불온한 노력, 그것도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 실질적 가해자인 독일인들을 역사적 책임에서 면제시켜 주려는 노력은 그의 제거주의적 반유대주의 고백과 결합되어 그를 더 이상 '훌륭한 사상사'로서 볼 수 없게 만든다.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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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된 아이 사계절 아동문고 99
남유하 지음, 황수빈 그림 / 사계절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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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숲 속에 들어선 아이가 날 돌아다 본다. 초목의 색은 싱그럽지만 아이의 등 뒤는 어둑하기만 하다. 어두운 숲을 향하고 선 아이는 뒤를 돌아본다. 이제부터 숲으로 들어갈 거라고. 캄캄하게 앞이 보이지 않는 그 숲 속으로 들어갈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아이의 눈 빛에서 '초대'라는 의미를 읽어야 했을까. 곧 나는 그 아이의 등을 따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발을 디딜 것만 같다. 남유하 작가가 글로 그린 검은 숲 속으로.


「푸른 머리카락」에 이어 남유하 작가와는 구면이다. '한낙원과학소설상' 작품집에서도 느껴졌지만 작가는 '다름'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을 가진 사람인 듯하다. 남과 다른 누군가가 겪는 마음의 고난에 대한 묘사가 특별하다. 다름을 바라보고 납득하는 누군가의 마음 또한 잘 알고 있다. 사계절 아동문고 99번 『나무가 된 아이』에는다름을 겪는 또는 져켜보는 존재들에 대한 작가의 치밀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온정으로 가득찬 것도 아니고 날카로운 비판도 아닌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책에는 6개의 단편이 들어있다. 각 단편의 첫 장에는 그 소설을 대표할 이미지와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는 문장이 들어있다. 짧게는 한 줄, 길게는 네 줄로 된 이 문장들을 읽으면서 단편 전체를 상상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힌트같은 그 짧은 문장에서 각각의 단편들이 나온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소설은 첫 문장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남유하 작가의 첫 문장을 읽고 나면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된거야?"하는 회기심에 책 장을 넘기게 된다.

 

「온쪽이」

눈 두 개, 귀 두 개, 팔 두 개, 다리 두 개.

어쩌다 나는 이런 모습으로 태어나게 됐을까?

 

반쪽이들이 사는 나라에 돌연변이 온쪽이가 산다. 왼쪽 또는 오른쪽 몸만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인간 기준으로) 온전한 몸을 가진 온쪽이는 반푼이 취급을 받는다. 학교에서도 가족 안에서도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닌 온쪽이를 감싸는 건 엄마뿐이다. 엄마는 온쪽이가 있는 그대로 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온쪽이는 자신때문에 부모님이 불화하게 되자 수술을 결심한다. 문제없는 몸의 반을 잘라내고 반쪽이가 되는 수술이다. 자신의 다름을 단점으로만 보게 만드는 사회에 순응해야 할까. 남부끄럽지 않기 위해 자신을 상처내는 일을 감수해야 할까. 온쪽이는 단점인 줄만 알았던 두 다리로 자신을 얽맨 속박에서 탈출한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말하는 어떤 기준이 누군가에겐 '슬픔'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정상'이 되기를 강요하면 그 누군가는 평생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느껴야 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을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슬픔이었다. '정상'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남들에게 비정상으로 느껴지는 내가 내게는 정상이었다. 수술을 통해 남들에게 저상으로 보이는 내가 된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비정상이라고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왼쪽도 오른쪽도 잘라 내고 싶지 않다.

pp.22-23

 

「나무가 된 아이」

필순이가 나무가 됐다.

2반 현오는 무당벌레가 되어 날아갔고,

3반 수아는 청설모가 됐다던데,

우리 반 필순이는 나무가 된 것이다.

 

표제작 「나무가 된 아이」는 카프카를 변주처럼 느껴진다. 아이들이 어느 날 다른 존재로 변화한다. 무당벌레, 청설모가 되기도 하고 나무로 바뀌기도 한다. 갑충으로 변신한 카프카의 주인공은 주변에서 존재감을 잃지는 않았다. 모습이 변했어도 가족들은 갑충이 '그'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변신한 아이들은 그 존재감마저 사라진다. 그 아이들이 변화한 모습을 어른들은 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런 아이들이 있었다는 기억조차 사라져버린다.

 

괴롭힘을 당하다 못해 변신한 아이들을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다. 그들이 겪은 일에 대해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변화한 상태에서도 미움을 받는다. 지워진 존재가 되어서도 끝나지 않는 괴롭힘은 복수로 귀결된다. 피해자가 겪은 일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과정을 본 누군가가 마음을 건넬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했다.

 

「뇌 엄마」

엄마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길쭉한 원통 모양의 유리관 속에

둥둥 떠 있는

연분홍색 뇌가 떠올라.

 

신체가 없는 가족과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이 될까. 대화를 할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는 인간, 정신과 소리로만 존재하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 (그래도) 존재의 소멸보다 나은 선택인 걸까.

 

아이의 엄마는 사고로 몸을 잃고 뇌만 살아 있다. 합성된 목소리로 대화하고 감정을 느껴도 안아주거나 쓰다듬지는 못한다. 아이는 몸이 있는 엄마를 그리워하지만 뇌엄마가 사라지길 원치는 않는다. 연극배우였던 엄마는 신체의 존재성을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움직임을 구현할 신체를 잃고 뇌로만 존재하는 자신을 받아들이기는 힘든 사람이었다. 아이는 춤을 추면서 엄마를 이해한다. 몸이 없는 엄마의 고통을 조금씩 헤아린다. 그리고 언젠가의 헤어짐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문득 유리관 속의 엄마를 바라보았어. 노래할 수 있지만 춤출 수 없는 엄마를. 눈물을 닦어 줄 수 없고,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 엄마를. 그리고 나는 마침내 받아들일 수 있었어. 엄마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p.61

 

「착한 마녀의 딸」

바이올렛은 착한 마녀의 딸입니다.

 

마을에 새로 이사 온 바이올렛을 아이들과 달랐다. 바닷가에 살던 아이는 친구들과 공통점이 별로 없었다. 마녀의 딸은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었고 마법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바이올렛은 마법의 도구가 됐다.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들어주는 수단으로 바이올렛을 대한 것이다. 아이는 그렇게라도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친구들은 마법에 따르는 책임을 바이올렛에게 미뤘다. '마녀'라는 신분은 바이올렛 모녀가 정당함을 요구할 수 없게 했다. 아이들의 행동은 한계를 모르고 극악해지고 그들 자신의 파국까지 초래한다.

 

특정 개인 혹은 집단에 대한 편견은 사람을 어디까지 사악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아이들이 가진 편견은 어른들의 용인으로 어떻게 확대될 수 있는지. 사람의 약점을 잡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상처주는 일이 어쩌면 그렇게 쉬운 일인지. 아이들이 태워올린 불꽃은 마녀의 눈에서만 눈물이 흐르게 놔두지는 않을 것 같다. 악은 더 큰 악을 부른다.

 

「구멍 난 아빠」

처음에는 검지가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아빠의 가슴에 난 구멍 말이다.

 

아빠 명치에 정말로 구멍이 뚫렸다. 반대편 벽이 보이는 구멍, 배에서 등까지 통과하는 텅 빈 공간. 대체 이 구멍은 왜 생긴 걸까. 서로 소원한 엄마, 아빠. 아빠의 사업이 잘 안되고부터 지훈이네 가족은 함께 찜질방 가는 일을 그만뒀다. 어려운 가정 형편은 아빠, 엄마의 꿈을 빼앗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를 여행하는 사진 작가"라는 아빠의 꿈과 어쩌면 "화가"였을 엄마의 꿈. 꿈이 빠져나간 자리엔 텅빈 공허만 남는다. 미래를 그려볼 수 없다는 건 사람의 몸마저 지워가는 일인 모양이다. 어른으로 사는 일은 바람에 시린 구멍을 얻는 것일까. 혹은 그런 구멍이 있음에도 꿋꿋이 사는 것이 어른인 걸까. 희망을 이야기하는 일이 섣부르게만 느껴진다.

 

「웃는 가면」

지금은 그 아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미소만으로 우리 반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까지 사로잡았던 아이.

 

무리에서 홀로 떨어지는 게 어쩐지 두려운 아이,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아야 하는 아이. 그런 아이에게 미소 한 번으로 모든 사람을 사로잡는 친구 수지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미유처럼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아이는 드물다. 아이들의 주목을 받고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다른 아이들의 웃음을 빼앗는 건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다.

 

특별함의 가치만을 평가하는 세계에서 평범한 다수는 자신들이 누리는 가치를 잊기 쉽다. 그러나 평범할 수 있음도 능력이다. 평범함의 가치를 알았던 미유는 특별함의 권유를 거절할 용기가 있었다. 아이는 누군가의 절망을 먹이 삼아 얻는 사랑보다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평범함이 더 가치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과 "특별한 괴물", 작가는 선택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남유하 작가는 스스로를 "이상한 아이"였다고 말한다. 스스로 이방인인 시절을 보내봤기 때문에 그 아이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말이다.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특별한 아이"라고 불러줬던 엄마처럼 작가는 이제 "이상한 아이"들을 위한 글을 쓴다. 작가가 쓴 "이상한" 이야기들은 "이상한 아이"들 뿐 아니라 그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공유하는 "어른"에게도 유용하다. 그 어른들도 한때는 "이상한 아이"였을테지만 그들은 그 시절을 이미 잊었을테니.

 

저는 늘 이상한 아이, 다른 아이였고 그런 저에게 아무도 "괜찮아."라고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

저는 동화를 쓰면서 열두 살의 나에게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싶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작은 목소리가 나와 비슷한 아이들에게도 닿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저처럼 '이방인'이라는 말의 뜻도 모른 채 이방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소곤소곤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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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 눌러 새로고침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3
이선주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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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의 눈에는 세상이 어떻게 비칠까. 성인 세대가 보는 세상과 어떻게 다를까. 같은 땅을 딛고 같은 공기로 호흡하면서도 문득문득 서로의 세상이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음에 난감해진다. 누구나 유년시절을 통과함에도 어른이 되고 나면 그 시기가 낯설어진다. 성인이 되고 나면 사람은 어느 순간 자신이 거쳐온 과정을 잊는 모양이다. 아니 잊는다기 보다는 변화한다는 쪽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여린 감각은 어른의 감각으로 생생한 기억은 희미한 망각으로 바뀌어 간다. 그리고 어른의 상태에 이른 사람은 어린 존재의 느낌, 감정, 기억을 되돌리기 힘들어진다. 내 곁의 새로운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책에 도움을 구한다. 십대의 모습을 담은 책들.

자음과모음 청소년 문학 시리즈 『마구 눌러 새로고침』은 십대의 공간을 주제로 한 소설집이다. "현실에서 가상까지, 십대의 일상이 깃든 공간들"을 "다섯 작가의 상상력으로 바라" 본 글들이다. SNS, 학교, 나만의 방, 게임, 주방을 주요 모티브 삼아 십대 청소년의 이야기를 풀었다.



작품 수록 작가 중 조우리 작가가 눈에 띈다. 장편소설 『오, 사랑』으로 제18회 사계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로 청소년의 생생한 목소리를 드러냈다는 평을 받았던 분이다. "우리 곁에 있는 이야기처럼 여겨"지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다. 새로 고침_이선주 눈에 띄는 형식이었다. '빵야'라는 이름으로 SNS 활동을 하는 고등학생 이방울의 목소리로 이뤄진 소설이다. 처음에는 누구와 누가 어떤 상황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 어리둥절했다. 방울의 말들이 쌓이면서 SNS 속 자신의 모습에 집착하면서 성형중독에 빠진 그녀의 모습이 드러난다. 방울은 현실의 내가 아니라 SNS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다.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원하는대로 보정하고 편집할 수 있는 삶의 모습말이다. 보여지는 모습과 남들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요즘 세태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서글프다. 아, 그게……그게 있잖아요. 진짜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지금의 제가 너무 싫어요. 근데 인스타그램 속의 저는 좋거든요. 그럼 저는 저를 싫어하는 건가요, 좋아하는 건가요? p.28 껍데기는 하나도 없다_조우리 몸이 자라면 몸에 맞는 껍데기를 찾아야하는 소라게를 자기 자리 찾는 과정에 있는 청소년에 비유한 이야기다. 소년 K는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인기 있는 친구 재현의 기분을 맞추려 한다. 재현은 우성을 따돌리기 위해 모함을 하고 K를 거기에 끌어들인다. 작가는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다른 친구를 따돌려야 하는 심리적 고난을 묘사한다. 그렇게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서 지킨 자리는 지속가능할까. 따돌림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한 외줄타기를 보는 듯했다. 그 순간 K는 깨닫는다. 의자 뺏기 게임처럼 어차피 껍데기의 수는 개체의 수보다 필연적으로 적다. 나도, 재현도, 우성도 누구도 그 주인은 아니다. 사실 제대로 된 껍데기란 하나도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존재감이 없으면 뭐로? 근성, 눈치, 독기? 어서 아무 거나 뒤집어쓰란 말이야. p.59 주술사의 시간_유영민 나에게 고통을 준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은 절실한 마음이 만들어내는 폐허를 그린 소설이다. 괴롭힘으로 학교를 그만 둔 동훈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초우인(저주 인형) 만들기에 몰두한다. 자신을 괴롭힌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인형을 바늘로 찌르며 상대방을 저주한다. 동훈이 만든 저주 인형은 인터넷을 통해 판매되고 저주의 주문은 망을 통해 퍼져나간다. 방안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시간이 길어질 수록 동훈 자신의 모습도 변해간다. 저주는 저주받는 사람이 아니라 저주하는 사람에게 재앙을 몰고오는 법칙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이자까지 쳐서" "상대를 저주하다보면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나 자책도 자연스레 생겨나기 마련이죠. '그때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나도 참 바보 같았구나' 그런 식으로 나 자신에 대한 분노의 수위가 높아지다 보면, 어느 새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 바뀌는 거예요." pp.100-101 뜬구름 사이에서 우리는_문이소

작가는 "기성세대가 비용과 책임을 피하며 갈팡질팡하는 동안 청소년 들은 사라져 가는 지구 생명체와 연대하며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이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내가 신이 되어 문명을 구축해가는 게임이 있다면, 그 세계 속에서 하나의 종족이 다른 모든 생명을 위협하며 행성을 망치고 있다면 그 세계를 만든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주인공 청소년은 그 '하나의 종족'을 말살할 것을 선택한다. 게임이니까. 그러나 그 게임의 질문은 지구 환경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인공지능의 물음이었다. 네트워크를 장악한 인공지능은 청소년들이 내놓은 답을 현실화해나간다. 청소년들이 내놓은 것처럼 출구가 없어 보이는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구원은 무엇일까를 질문하게 되었다.

싱귤: 그런가요. 역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알았어요, 제가 할게요. 입장 바꿔 보면 사피엔스가 행성의 재앙이잖아요, 제가 헤리치 생태계 구원을 위해 사피엔스를 칠게요. p.134 식사를 합시다_문부일

누군가에게 준 상처가 예상보다 훨씬 커서 인생의 향방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용서'는 가능한 걸까. 한다승과 서노민은 초등5학년때 서로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원인을 제공한 사이다. 고등학생이 되어 우연히 다시 만난 이들은 함께 생활하면서 왜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알게되고 '용서'를 향해 한 발짝을 내딛는다. 서로를 용서할 용기는 자신들의 문제를 헤쳐나갈 용기로 발전한다. 내 인생을 바꾸게한 친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 그 어려운 일을 이들은 해낸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바꾼다. 둘의 용기가 너무 소중했다.

세상에는 이미 정해진 답이 있고, 그것에 맞추느라 힘이 들 때가 많았다. 부모가 함께 살아야 자녀의 인성이 좋아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한부모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딘가 문제가 있을 거라고 섣불리 판단했다. 그런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나는 더 열심히 공부했다. 아빠도 나를 잘 챙기려고 더 부지런하게 살았을 것이다. p.165


다섯 가지 색깔의 이야기들은 공통의 배경색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청소년이라는 이미지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 보이는 시기여서일까. 어른이 된 나는 이제 그 시기의 혼란을 체감하지는 못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그리고 조우리 작가가 '진지한 궁서체'로 쓴 '작가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장담할 수 있다.


불행한 청소년이 불행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이건 지금 불행한 청소년인 너에게, 한때 불행한 청소년이었던 내가 하는 말이니 믿어도 좋아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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