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일 (양장)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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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을 알지 못한 채 읽었다. 열일곱 호정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문장은 십대 청소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리는 가운데 감정의 흔들림 또한 섬세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책을 다 읽고 알게 된 작가는 『푸른 사자 와니니』의 이현이었다.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동화에서도 빛났던 서정적인 묘사는 십대의 사계절을 담아낸 책에 잘 어우러졌다.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시절의 불안함과 홀로 떨어진 듯한 고립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막막함을 그리는 작가의 문장은 주인공 호정을 잘 형상화해냈다.



소설인 열일곱 고등학생 호정이 가족과 보내는 일상으로 시작한다. 터울이 많이 지는 동생 진주화 함께 호수가 있는 공원에 놀러간 장면은 "행복한 가정"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호정은 부모와 여동생이 만드는 '행복한' 그림의 일부가 되지 못한다. 호정의 모습은 얼핏 사춘기라 불리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풀기 쉽지 않은 응어리가 드러난다.



초반의 서술은 가족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장면과 호정이 의사와 나누는 대화가 섞여 있어 서사를 따라 잡기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차츰 이런 서술 방식 자체가 스스로의 상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호정의 심리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정은 어린 시절 사업 실패를 겪은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겪은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학교 안의 문제에 휩쓸린다.



호정은 전학생 은기에게 호감을 느끼고 가까워진다. 선뜻 마음을 열지 못했던 은기지만 일상을 나누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호정은 은기가 스스로를 편안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걸 이해한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보이고 싶지 않고 보여줄 수도 없는 것이 있더라도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런 마음을 알아 버린 애들이라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의 눈길만으로 아파지는 것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으면서 사라지지도 않는 것들이 있다. 사라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p.131


은기의 서사에 담긴 가정폭력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시선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가정 안의 문제로만 치부하며 덮어두려하는 동안 일어나는 피해와 피치못한 결말에 대해 또 불가피한 가해자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말이다. 오히려 덮어두어야 할 일들을 인간은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한다.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괴롭힘의 방식은 교묘했다. 물리적인 폭력이나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서 심리적으로 피해자를 무너지게 했다. 소문을 만들고 뒤에서 속삭였다. 이런 일들은 너무도 빈번했다. 호정과 은기 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다른 면모를 보이는 아이들은 쉽게 괴롭힘의 대상이 됐다. 가해자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금방 잊고 다른 소문을 찾아가지만 피해자들의 상처는 쉬이 나아질 수 없었다.


숙덕거리고 낄낄거렸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대면서.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지만, 그 애들의 눈초리만으로 충분했다.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돋운 한두 마디도 있었다. 그 애들은 나를 멋대로 상상 속의 진창에 굴리고 있었다.

p.212


법적으로 저촉되는 선만 안넘으면 죄가 되지 않는가. "법적인 처벌과 도덕적 단죄", "사회적 시선과 개인의 사정이 다를 수 있"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이해의 가능성이 담겨 있지만 선생님의 말을 귀담아 듣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모든 게 더더욱 모호하죠. 법적인 처벌과 도덕적인 단죄가 다를 수 있고, 사회적인 시선과 개인의 사정이 다를 수 있고. 여러분도 이제 그런 모순을 알 만한 나이죠.

p.257


아이들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은기는 학교를 떠나고 은기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었다고 자책하던 호정은 위태로운 정신 상태에 이른다. 소설 속 호정은 상담을 통해 문제를 직시하게 된다. 자기 안의 '아픈 나'를 인정하고 "엄마 아빠는 기억도 못할 사소한 이야기"지만 자신에겐 트라우마가 됐던 기억들을 소환하게 됐다. 그렇게 호정 안의 "몹시 안전했"던 "얼어붙은 호수"에 "봄"이 오기 시작한다. 호정은 그것이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아이는 그일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것 같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딱딱했던 호수의 표면이 녹으면서 다른 마음을 적실 수 있는 그런 봄을 호정은 두려워하면서도 바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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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 아파도 힘껏 살아가는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이주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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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 이주현은 한겨레신문사 기자다. 흔들림 없는 이성으로 객관적인 기사를 써야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직업 특성상 감정 조절이 어려운 병을 앓는 상태에서 직장 생활이 가능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앞섰다. 그는 무려 24년째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정신병을 터부시하는 생각들이 여전한 가운데 누구나 알만한 일터에 다니는 직장인이 자신의 병을 부러 공개한 이유도 궁금했다.


'조울병'에 대해 막연히 극단의 기쁨과 슬픔을 오간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어떤 기전을 통해 발병되는지 치료과정이나 예후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저자는 자신의 삶 전체를 드러내며 '조울병'이라는 병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별한 병적 징후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린 시절부터 한 가지에 집착하는 면이 있었고 대학생 때 연애 문제로 상처를 받고 나서 가벼운 증상을 보였지만 알아 채기 힘들었다는 것 등이 병의 시작이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후 병은 본격적으로 발병했고 저자는 "조울의 파도"를 타야했다. 그 사이 두 번에 걸쳐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조울병'이 어떻게 사람의 일상과 주변 관계를 파괴하는지 서술하는 가운데 그의 직장 동료들이 인상에 크게 남았다. 지나치게 일에 몰두해 비정상적으로 바쁘게 지내는 모습을 보이다 입원해버린 그를 꾸준히 찾아주는 동료가 있었고 일을 계속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부모님의 판단을 만류하는 선배가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게 해야겠다는 부모님에게 선배는 "힘든 상태라 잠시 쉬어야 할 뿐이다. 너무 젊은데 일을 중단하는 건 맞지 않다."며 설득했다. 그 선배가 바로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신 구본준 기자다. 그의 세심한 관찰이 놀랍고 따뜻한 배려가 그립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p.45


저자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발병했을 때까지는 '회사'라는 집단에 아직 동료애가 존재했기 때문일까 혹은 그가 다닌 직장의 특수한 문화였을까. 치료과정에 일을 제대로 못했음에도 동료들은 그에게 기댈 수 있는 곁이 되어줬다. 동료의 존재는 저자가 완치되지 않는 조울병을 가진채 오랜 시간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다.(그 조직(혹은 동료들)의 문화가 거의 판타지스럽기까지 하다.)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 대한 대목도 주의를 기울여볼 만하다. 다른 질환도 그렇겠지만 특히 정신병은 그 특성상 의사와 환자의 거리감을 중요시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의료적 필요보다는 환자를 '타자화'하는 태도가 거리감의 더 큰 원인이 된다. 저자는 취재차 친분이 있던 유명 의사에게 진료를 의뢰한 후 실망스런 반응을 마주한다.


기자로서의 용무인지, 환자로서 문제인지 사전에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던 것은 내 실수였다. 환자로서 찾아왔다고 했더니 바로 반응이 달라졌다. '언론계 종사자'에게 반응했던 호의적인 제스처가 금방 사라졌다. 의사와 환자 사이엔 거리가 필요하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p.157


(…) 요즘 정신과 치료에선 정신분석보다 약물치료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환자의 말에 성의 있게 응대하기보다는 증상에 잘 맞는 좋은 약을 주는 편이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

환자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것은 의료인의 의무감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환자들은 배려와 윤리에 기반한 거리 조절이 아니라, 자신이 '열등한 대상'으로서 '타자화'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pp.161-162


저자가 조울병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데는 무엇보다 가족의 조력이 컸다. 가족은 그의 병명을 알게 된 후 관련된 책을 읽으며 병에 대해 공부했다. 피치못해 강제 입원을 결정했을 때 분노하는 저자에게 아버지는 절절한 편지를 써서 그가 혼자가 아님을 알게 했다. 언제 재발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족들의 의연한 태도는 저자에게 큰 힘이 됐을 게다. 게다가 '완치'라는 끝이 없는 병일때 가족이 지지가 지속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가족은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야 , 혹시 네가 조울병을 앓았고, 또 계속 약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해서 네게 중요한 일을 못 맡기겠다거나 아니면 너와 결혼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너와 인연이 아닌 거야. 그렇게 이해가 부족한 사람하고 어떻게 일을 함께하며, 어떻게 결혼해서 함께 살겠냐."

p.199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글로 정리하며 병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사막'과도 같은 조울병을 견디도 있는 삶과 그 과정에서 행했던 일들, 산책, 순례길 걷기, 운동 등의 활동을 정리한 책의 원고를 완성한 것은 2013년이었다. 책이 출판된 때는 2020년이다. 7년의 간극이 존재한다. 공개를 선택했다 해도 자신의 병을 드러내는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개인의 성찰을 위한 글쓰기와 그것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일 사이에는 그만큼의 무게 차이가 있었다.


조울병의 사막을 먼저 건넌 이로서 뒤따른는 다른 이에게 저자는 '의사'를 거듭 권한다. 예전에는 '조울증'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마음먹기에 따른 증상으로 여겼지만 '조울병'은 명칭의 변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분명한 '병'이다. 진단과 치료가 필요한 병이니 의사를 찾으라는 말이다. 그리고 의사는 많고 나에게 맞는 의사가 반드시 있으니 다른 의사 찾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전한다.


아직도 정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만, 내게 조증을 호소하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말할 거다. 의사를 찾아가라. 술을 마시지 말아라. 사람과의 접촉면을 줄여라. 잘 안 되겠지만 혼자서 빈둥대라. 울증 환자에겐 이런 조언을 할 거다. 의사를 찾아가라. 아깝더라도 업무량을 줄여자. 산책하라. 스스로 먹을 음식을 천천히 준비하라. 조증이든 울증이든 핵심은 이거다. 괴로우면 의사를 찾아가라.

p.150


저자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조울의 사막을 건넜다. 그러나 책의 문체는 그 시간들을 무겁지 않게 기술한다. 쉬이 읽히지만 그가 살아낸 시간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을 것임이 느껴진다. 삐삐언니가 건넌 사막 끝에서 오래 머물 오아시스를 만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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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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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작가의 생산력이 폭발한다. 신작이 속속 출간된다. 읽고 돌아서면 신작 소식을 접하는 기분이 들 지경. 첫 장편 『지구 끝의 온실』이 나온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데 단편집 『방금 떠나온 세계』가 출간됐고 잠시후 짧은 소설집 『행성어 서점』과 소설 『므레모사』를 내놨다. 작년 초에 나온 『사이보그가 되다』까지 포함하면 한 해에 무려 다섯 권의 책을 냈다.(단독 저작의 경우만 볼 때. 단편소설 앤솔러지 『놀이터는 24』에도 참여했다) 독자로서 편애하는 작가의 책이 읽어야할 목록에 쌓여있다는 건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다 갑작스런 슬럼프에 빠진다거나 하지 않을지 노파심이 생길 지경이다.(계속 다작하시면 물론 좋겠지만)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 요약해본다면 '이해 불가능성을 담지한 관계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울산부터 우주까지 펼쳐진 상상력을 담은 일곱 편의 단편에는 다른 세계를 사는 존재들이 잠시나마 서로 겹쳐지는 "접촉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다르게 보고 듣고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말로 각자 다른 인지적 세계를 살고 있다. 그 다른 세계들이 어떻게 잠시나마 겹칠 수 있을까. 그 세계 사이에 어떻게 접촉면ㅡ 혹은 선이나 점, 공유되는 공간ㅡ이 생겨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지난 몇 년간 소설을 쓰며 내가 고심해온 주제였다.

p.322, 작가의 말 中


"다르게 보고 듣고 인식하는" 세계는 각 단편들에서 다양하게 묘사된다. 「최후의 라이오니」에서는 죽음을 잊은 불멸인들의 행성을 배경으로 하고 「마리의 춤」에는 시각을 잃은 사람들, 「로라」에는 고유수용 감각 이상을 겪는 사람, 「숨그림자」에는 후각으로 소통하는 행성, 「오래된 협약」에는 예정된 죽음을 거부하지 않는 사제들, 「인지 공간」에는 인지를 공유하는 집단, 「케빈 방정식」에는 일반인과 다른 시간 감각을 가진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 세계에 보편적이라고 여겨지는 방식과 다른 세계를 사는 등장인물은 「로라」에서처럼 다름을 수용하거나 「인지 공간」에서처럼 집단을 떠나게 된다.


죽음을 잊은 불멸인들은 무료함을 몰아내기 위해 온갖 유희용 실험에 몰두했다. 도시를 유지하는 기계들에게 자의식이 부여된 것도 그 실험의 일부였다. 불멸인들은 기계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법 또한 알았기에, 기계들은 자의식을 지닌 채로 그들의 주인에게 복종했다. 신체 교체를 위해 생산된 복제들에게서 자의식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이어졌지만, 아무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복제들의 자의식은 불멸인의 자의식이 전송되는 순간에 즉시 제거되었으므로.

pp.36-37, 「최후의 라이오니」 中


다른 세계(존재)에 대한 가장 오만한 대응을 보여주는 설정은 「최후의 라이오니」에서 볼 수 있었다. 배양된 복제에 자의식을 전송하는 기술로 죽음이 없는 삶을 살게 된 불멸인들은 장난삼아 '기계'와 '복제'에게 자의식을 생성한다. 그러나 '자의식'을 가지고도 그들은 단지 '기계'일 뿐이고 '복제'일 뿐이어서 불멸인들에게 복종하고 신체를 강탈당해야 한다. 다른 존재의 자의식 따윈 불멸인들의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불멸인들의 행태는 다름에 대한 타자화의 극단을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이 세계를 완전하게 인식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오감 중 어느 하나가 누락될 경우의 세계는 불완전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감각 손실은 다른 감각을 발달시키기도 한다. 시각을 잃은 사람들이 서로의 뇌를 통신으로 직접 연결해 소통하는 「마리의 춤」과 지하 세계에서 오래 살면서 시각이 약해진 사람들이 후각 정보로 소통하는 「숨그림자」에서 처럼. 오감으로 세계를 인지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세계의 모습을 알 수 없다.


나는 모그들과 달리 이런 형태의 소통에 익숙하지 않아다. 순간 마리가 왜 자신들의 소통 방식을 더 진보한 것으로 여기는지 알 것 같았다. 공간 속에서 모든 목소리가 동등한 무게를 가지고 충돌하고 있었다. 그들이 불필요한 감각 정보를 보리고 추상의 세계에 뛰어들었을 때, 나는 눈을 감고도 여전히 시각 정보를 기다리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p.89, 「마리의 춤」 中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났을 때 둘은 겹쳐지지는 않지만 접점을 만들어 낸다.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아는 순간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로라」에서 진은 세 번째 팔을 이식한 로라를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둘 사이를 완벽하게 납득시킬 해답이 없음에도 둘의 관계가 지속된다. 이렇게 부조화를 내포한 조화는 「숨그림자」와 「케빈 방정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존재하고 "같은 시간을 점유"하지는 못하지만 삶을 계속된다.


눈이 마주쳤을 때, 로라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씩 웃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여전히 로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동시에 제가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로라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요.

하지만 그걸 때닫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p.126, 「로라」 中


[(…) 어차피 우린 다 비슷한 본성을 지녔어. 어떤 세계가 너를 받아주는 게 아니야. 그저 그곳에 너를 받아주는 어떤 사람이 있는 거야.]

(…)

"이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곳을 덜 미워하게 하지는 않아. 그건 그냥 동시에 존재하는 거야. 다른 모든 것처럼."

p.182, 「숨그림자」 中


"그래. 언니는 이 풍경을 보고 싶었던 거지."

나는 문득 언니와 나의 시간이 다시는 겹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우리가 아주 다른 풍경을 보고 있으리라는 것도.

이제 언니를 보내줘야 했다. 우리의 세계가 어느 순간 분리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 우리가 다시 같은 시간을 점유하며 살아갈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언니는 그 시간을 계속 살아갈 것이다.

pp.319-320, 「케빈 방정식」 中


서로의 희생을 바탕으로 공존이 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오래된 협약」에서 행성 벨라타는 그 땅에 착륙한 인간들의 삶을 위해 생태계를 멈춘다. 인간에게 독성을 뿜어내지않기 위해서다. 대신 인간들은 약하게 남은 독성에도 불구하고 행성을 해치지 않기로 약속한다. 행성 벨라타와 인간은 이 협약을 통해 자신의 시간을 서로에게 양보하고 공존의 길을 찾는다.


제가 평생을 지나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결정들이 그 곳에 있었습니다. 먼 우주에서 온 작은 존재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떼어 주기로 결정하는 마음이, 이 잠든 행성 벨라타 전체에 깃들어 있었어요. 저는 눈을 감고 그들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그 오래된 협약을, 수백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지키고 있는 존재들을.

p.225, 「오래된 협약」 中


다르게 여겨지는 생각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인지 공간」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인간의 인지 중 공유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것들은 삭제되는 세계에서 개별성은 사라진다. 다른 생각의 가능성이 제거되는 것이다. 모두에게 의미있는 기억만 남겨지는 세계에서 개인들에게 소중한 추억과 생각은 개인의 소멸 이전에 사라지고 만다. 작가는 '진리'만 옳은 것인지를 묻는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한다면, 각자의 해석이 다르다면 더 많은 진실을 만들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불변하는 진리는 모두의 인지 속에서 동일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여전히 믿는다. 하지만 스피어가 정말로 분열일까? 스피어를 갖게 된 우리는 정말로 같은 격자를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공동 인지 공간을 거닐면서도 각자의 스피어를 통해 진리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더 많은 종류의 진실을 만들어내는 다른 방법일 수도 있다.

p.268, 「인지 공간」 中


읽을 수록 빠져드는 김초엽 월드의 또 한 세계를 빠져나왔다. 다른 생각, 다른 해석이 여러 진실을 만들어낸다는 문장처럼 작가가 그려낸 세계에는 각각의 독특함이 배어있다. 단편마다 다른 세계를 읽어내다 보면 우주터널을 통과해 행성간 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천만다행으로 마지막 단편에서 작가는 대한민국 울산에 독자를 내려놓는다. 거주지와 멀다고 불평할 이유는 없다. 알 수 없는 독성 물질이 대기를 채우고 후각으로 소통하는 (서로를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 행성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부지런하고 이해심 깊은 작가가 예비한 다음 여행, 기꺼이 동참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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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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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김영하북클럽'에 소개돼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 유명 소설가가 이 책을 소개하지 않았다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인지도를 얻을 수 있었을까. 많고 많은 고통 서사 중 하나로 여겨졌을 듯 싶다. 주 독자층인 어른의 고통을 다룬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내용도 아니니 관심이 적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하'라는 이름의 영향력은 이 책이 가진 원래의 힘보다 더 멀리 가게 만들었다. 덕분에 독자들은 아이의 고통에 더 다가서게 됐다.


​책은 작가 모드 쥘리앵의 어린 시절 경험을 담고 있다. 한 남자의 괴상한 신념이 자본과 만나 아내와 아이를 인질로 잡고 평생을 고문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팔려왔고 아이는 어린 시절 사육을 경험해야 했다. 철저히 고립된 환경은 이들의 고통을 감췄고 아이는 자라서 결혼할 때까지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 시대에 가능한 걸까 어이없는 가운데 『배움의 발견』과 『언오소독스』가 생각났다. 부모의 신념, 특히 가부장의 신념은 가정을 얼마든지 자신만의 천구, 가족의 지옥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례적인 일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작년 한 해 나온 아동학대 뉴스만 떠올려봐도 그 빈도가 적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린 아이에게 강압적인 아버지의 존재는 공포 그 자체다. 특히 어머니의 방관은 공포의 수위를 더하고 아이를 고립감에 빠지게 만든다.


나의 공포감은 그 거인을 오로지 혼자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 커진다. 어머니에게서는 그 어떤 도움도 보호도 기대할 수 없다. 어머니에게 '디디에 선생'은 신적인 존재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숭배하고 동시에 증오한다. 하지만 결코 맞서지는 못한다.

p.36


보호자를 자칭하는 아버지가 아이에게 닥친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면서 아이는 의심을 품는다. 믿음과 현실이 다를 때 전지전능함에 균열이 시작된다.


누군가 내 안에서 절규한다. 린다처럼 죽도록 절규한다. 하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어디 있을 까? 나를 지켜주는 방패이며 보호자이자 수호천사라더니, 뭐든 볼 수 있고 뭐든 다 안다더니, 무엇보다 어떤 게 나에게 좋은지 다 안다더니. 삶의 모든 순간을 이 세상의 추함과 인간들의 사악함에서 나를 지켜내는 데 바칠 거라더니. 

p.116


『배움의 발견』과 『언오소독스』에서와 유사하게 모드 쥘리엥이 겪은 고통의 시절을 함께 한 것은 책이었다. 아버지가 읽게 한 나이 수준에 맞지 않는 독서는 괴로움을 주기도 했지만 아이가 삶을 성찰하고 미래를 꿈꾸고 용기를 북돋웠다.


나는 그레고르다. 하지만 따라가야 할 모델을, 본보기를, 이상을 찾았다. 당테스가 나에게 자유의 길을 보여준다. p.137


『백치』를 읽을 때는 금맥을 발견한 기분이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에 빠진다. 그의 책에 나오는 모든 인물에 매혹된다. (…) 그럼에도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삶을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삶에 맞서 벽을 세우지 않는다. 반대로 삶을 사랑하고, 그 안에 잠기고, 필요하다면 아예 깊숙이 빠져버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뭐든 겪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더이상 두려워하지 마." p.157


나는 언제든 다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정확히 말해서, 싸울 준비가 된 나는 마틸드다. 모드는 가련한 낙오자다. 모드는 두려움에 떨고, 늘 복종한다. 하지만 마틸드는 전사다. 전투를 치르는 것은 마틸드다. 『적과 흑』에서 만난 마틸드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 마틸드는 나의 은밀한 친구가 되어 나에게 용기를 주고 기운을 북돋는다. p.243


아이 마음 속 질문은 본격적으로 커졌다. 무조건 받아들이던 아버지의 말과 규칙들이 부조리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질문은 책에서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은 그녀의 삶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모드의 어머니는 어려서 남편에게 팔려온 후 오직 자녀 생산과 교육을 위해 키워졌다. 자신이 당한 고통이 크기때문인지 어머니는 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인다. 남편에게 질책받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할 뿐이고 오히려 남편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녀의 심리는 어떤 상태였을까. 그녀 자신도 사랑받지 못한 아이 상태여서 있지도 않은 남편의 사랑을 위해 딸을 경쟁상대로 삼은 걸까. 남편이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자식에 대한 애정도 사그라들고 딸과의 연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걸까.


페리소의 '왜?'가 지금껏 내 머릿속에 맴돌던 모든 '왜?'들과 하나가 되어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왜 린다를 가두지? 왜 페리소를 묶어두지? 왜 나는 밖에 나가면 안 되지? 왜 맛있는 음식을 즐기면 안 되지? 왜 이브는 담뱃불을 내 무릎에 대고 끄지? 왜 레몽은 나에게 그 짓을 하지? 왜 내 방에는 난방을 틀면 안되지? 왜 씻으면 안 되지? 왜 아무도 소설책에서처럼 나를 안아주지 않지? 왜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가면 안 되지? 왜?

하지만 가장 중요한 '왜?'는 따로 있다. 왜 어머니는 나를 미워하지?

p.212


아동기를 벗어난 한 순간 모드는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파악하게 된다. 이 책의 부제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그녀는 외부로 나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네 살 때부터 감금생활을 했음에도 바깥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타고난 용기도 작용했겠지만 엄혹한 환경에서 자신을 지킨 그녀만의 능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적에 곁을 지킨 동물과 다양하게 접한 음악은 그녀의 감성이 박제되는 것을 막았고 책은 직접 마주하지 못한 세상을 보여줬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알 수 없는 이유로 내 마음속의 싸움이 멈춘다. (…) 아무튼 초인에 대한 매혹이 한순간에 증발해버린다. 그리고 아버지가 내 눈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보인다. (…) 나는 자유롭고 싶고 날아오르고 싶다. 집 없이 살아야 한다면, 괜찮다. 제대로 먹지 못할지도 모른다면, 그것도 괜찮다. 개 한마리가 보내주는 사랑의 눈길만 있으면 더이상 먹지 않아도 좋다. 살아갈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상관없다. (…) 아버지가 말하는 이른바 초인들의 세계에 대한 매혹은 이제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pp.260-261


약한 존재를 향한 폭력은 너무도 흔하고 그것을 전시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보호의 의무를 진 어른이 가해자가 되고 벗어날 힘이 없는 아이는 희생된다. 참담하여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무시로 일관할 수 없는 일이다. 괴로워도 들여다보고 귀기울여야 한다. 다른 이의 관심이 아이를 구조할 수 있다. 『완벽한 아이』는 '부모'라는 고통를 벗어나려는 아이의 처절한 노력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아이의 상황을 알아보고 탈출을 도운 어른이 있다. 소설이라 해도 놀라울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일이다. 영향력 있는 작가가 책을 알려 많은 이들이 읽고 그만큼 주위의 고통에 눈이 밝아졌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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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 페스트 / 시지프 신화 동서문화사 월드북 154
알베르 카뮈 지음, 이혜윤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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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에 편두통을 앓았음에도 불구 아름다운 장정에 반해 『페스트』를 읽고 감동한 끝에 다시 잡은 카뮈. 카뮈는 "같은 주제로 세 개의 장르에 걸쳐 작품을 쓴 유일한 작가"라고 한다.(서평가 로쟈 이현우) '부조리'를 테마로 쓴 작품은 소설 『이방인』, 에세이 『시지프 신화』, 희곡 『칼리굴라』다. '반항'을 중심으로 소설 『페스트』, 에세이 『반항하는 인간』, 희곡 『계엄령』을 묶었다. '사랑'을 주제로 에세이 『안과 겉』을 썼고 소설 『최초의 인간』을 미완성 유고로 남겼다. 이러한 분류에 따르자면 앞서 읽었던 『시지프 신화』와 『페스트』는 중심 주제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을 읽어 보니 앞의 두 작품의 유사성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물론 세 작품 모두 부조리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 포함돼 있어 같은 작가의 작품 경향을 알 수 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희곡과 에세이를 더 읽어 봐야 작가의 '부조리', '반항', '사랑'에 대해 알수 있을 텐데 『이방인』은 독자로서의 의욕을 꺾이게 만들었다.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쩌면 어제일지도 모른다.

p.11


아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말하는 강렬한 첫 문장이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벌써 화자가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이 드러난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받고 알게 됐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망 시점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모른다는 부연 설명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문장들은 '어머니'와 '사망'의 관계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나' 뫼르소의 태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상식를 벗어나 보이는 화자의 언행은 작품 내내 이어진다. '부조리'라는 철학적 테마를 구현했다는 소설에서 '상식'을 찾는 독자가 '비상식'적일까.


​뫼르소는 "어머니 일만 없었다면"이라며 산책을 즐기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어머님을 보시겠"냐는 제안은 거절한다. 어머니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고 장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제는 드러누워 12시간 동안 실컷 잠잘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 기쁨을 느낀다. 그는 주변 타인에 대해서는 물론 자신의 일에서도 '무의미'함을 되뇐다. 어머니의 죽음에 "내 탓이 아니라며" 그런 말조차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일상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으며 야심을 뒀던 학업을 포기한 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학창 시절에 이미 깨달았다고 말한다. 무의미로 점철된 삶이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런 소리를 사장에게도 한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그런 말을 해본댔자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차피 사람이란 언제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니까.

p.23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다. 나는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할 것이고, 결국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p.26


조금 뒤에 마리는 나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나는 대답했다. 

p.


"결혼하고 싶은지" 묻는 여자 친구에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하고 "자기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도 역시 "그건 아무 의미도 없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아무 중요성도 없지만 네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며 비슷한 관계의 "다른 여자로부터 같은 청혼이 있었어도 승낙했을" 거라 답한다. 연인(과 같은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가 이렇다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얼마나 공허할 것인가.


누구나 결코 생활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어떤 생활이든지 다 비슷하고, 또 이곳에서의 내 생활에 조금도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고 나는 대답했다. (…) 사장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내 생활을 바꿔야 할 하등의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나는 불행하진 않았다. 학생 때는 그런 야심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해야 했을 때, 그런 모든 것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던 것이다.

p.38


'나'가 그나마 긍정적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대상은 자연이다. 장례 중에 "열어놓은 문으로 시원한 밤공기에 꽃향기가 실려"오는 걸 느끼고 장지로 가는 길에서 "상쾌한 흙냄새를 들이마"신다. "퇴근해 부둣가를" "걸으며 돌아오"던 중 "하늘은 초록빛이었고 나는 기분이 좋았다"며 즐거움을 표현한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감정 역시 결정적 사건을 앞두고 변화한다. "뜨거운 햇볕에 마치 따귀라도 얻어맞은 것 같"은 느껴지고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볕에" "머리속이 꽝꽝 울리"는 가운데 뫼르소는 "태양과 태양이 쏟아붓는 짙은 취기(醉氣)"에 빠진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눈앞에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뜨거운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후볐다. 그때 모든 것이 흔들렸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왔다. 하늘은 활짝 열리며 불을 비 오듯 쏟아놓는 것만 같았다. 온몸이 뻣뻣해지고, 총을 든 손에 경련이 났다. 방아쇠는 부드러웠다. 나는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를 만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p.51


'태양'때문에 권총이 발사되고 "불행의 문" 열렸다. 뫼르소도 그렇게 느꼈는지는 의문이다.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태도는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거나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교도소 생활 중에 괴로운 일은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 정도다. 그는 곧 익숙해졌고 불행하지 않았다. '습관'이 된 괴로움, "언제나 같은 날이" "감방으로 밀려오는 것"이란 표현에서 『시지프 신화』의 맥을 찾아볼 수 있었다. 실패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지속되는 삶과 그것을 지탱하는 습관의 힘을 말이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은 뫼르소가 자신과 대면하는 기회였다.


다시 말해, 문제는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추억을 되새기는 것을 배운 뒤부터는, 지루한 일도 없어졌다. (…) 그처럼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무시했던 것, 잊어버렸던 것들을 기억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었다. 

p.63


천장에 뚫린 창문으로 다가가서 마지막 빛 속에 다시 한 번 내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으나, 심각하다고 해서 놀라울 건 없었다. (…)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러달 이래 처음으로 나는 내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나는 그것이 오래전부터 내 귀에 울리고 있었던 소리임을 알아차리고, 그동안 줄곧 내가 혼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p.65


재판 과정에서 뫼르소의 변화를 더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타인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결의 욕망을 발견한다.


(…) 문지기는 나를 바라보고 눈길을 돌렸다. 그는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 담배를 피웠다는 것, 잠을 자고 밀크커피를 마셨다는 것을 말했다. 그때 나는 무엇인가 방청석 전체를 격앙시키는 것을 느끼고, 처음으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71


(…) 셀레스트는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나를 위해 자기가 더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나에게 묻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몸짓도 하지 않았으나, 한 인간을 껴안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 것은 그때가 생전 처음이었다. 

p.71


뫼르소의 변화가 회개로 가는 길을 열거나 하진 않는다. 사형선고를 받고 그는 죽음이라는 숙명이 20년쯤 일찍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며 자신의 "행동을 그다지 뉘우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앞으로 나에게 일어날 일, 예를 들면 오늘이나 내일의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뭔가를 뉘우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에 애인을 만들었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다며 "영원히 관계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받아들이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어머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커다란 분노가 내 죄를 씻어주고 희망을 모두 가시게 해 준 것처럼,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밤을 앞에 두고, 나는 비로소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닮아 마침내는 형제 같음을 느끼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끝나,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기 위해서,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p.94-95


'삶의 끝은 죽음이고 예외는 없다'는 인생의 부조리를 인정하는 뫼르소의 태도는 이해하겠다. 죽음 이후 찾아올 신의 세계를 강요하는 종교인을 고함으로 쫒아낸 일도 납득이 간다. 세계는 사형수 하나의 죽음 따위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뫼르소는 형제애를 느낀 건가?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뉘우쳐본 일이 없는 그이기 때문에 죽음을 앞둔 오늘 이 순간도 꿋꿋이 받아들여 심지어 행복을 느끼는 걸까? 수감 기간에 그나마 느낀 세계와의 관계를 사형집행날 많은 구경꾼을 만남으로서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걸까? 그러면 그는 죽음의 순간에 외롭지 않을까.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오늘을 충실한 것에 행복을 느낄까.


뫼로소의 마지막은 여러모로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는 대목이었다. 사르트르의 해설과 책 말미의 '알베르 카뮈와 그 작품 세계에 관하여'을 읽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이방인』에는 『페스트』에서 느꼈던 공감의 정서가 없었다. 현실을 그린다기 보다는 철학적 알레고리로 작품을 이해해야 하는 걸까 싶기도 하다. 미진함이 남는다.


펜데믹 상황에 이입하며 『페스트』를 읽고 감동한 독자라면 『이방인』에 비슷한 기대를 갖진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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