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인터넷으로 사이트 끄적거리다고 전지현에 관한 기사를 봤다.

전지현이 지금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한 달 코스로 갔는데, 명품 배낭만 제외한다면 한류열풍 연예인같지 않게 티 안내고 다니고, 의외로 엽기적인 그녀 영화 속 인물과는 반대로 성격이 차분하며 조용하게 공부만 하더라..  뭐 이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기사 중에 '전지현은 여느 대학생과 마찬가지로 쉬는 시간이면 콜라에 햄버거를 사먹으며 잘 어울려 다녔다.'라는 문장을 보면서 곁가지 생각으로 빠져들었다.

연예인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너무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평범한 일상을 가끔 너무나도 바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평범한 삶을 사는 일반인들을 동경하지는 않을테다. 그런데, 연예인의 특권이 무엇인가? 바로 언론의 스폿라이트 아닌가?

이런 상상을 해본다.

연예인들이 정말 자기만의 독특한 삶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누구처럼 연예생활과 카레이서 생활을 같이 하는 것도 멋지겠지만, 아무래도 내 맘대로 생각하니 아래와 같이 내가 선호하는 쪽으로 독특하다면 더욱 멋지겠다.

유니세프니 사랑의 장기기증운동이니 하는 것처럼 협회측에서 먼저 홍보대사를 제안하여 일년에 몇번 얼굴이나 비춰주고 한두번 봉사하러 잠깐 가는 얼굴마담역할보다는, 그 사람이 선택해서 뭔가 사회에 공헌이 되는 일에 힘을 쏟는다면 참 좋겠다.

인기있는 발라드 가수지만 대안에너지 환경연대의 회원으로 적극 참여를 하며 개발과 양산 초기에 있는 수소가스 자동차를 비싼 값에 구입하고 다니면서 홍보한다던가, 요즘 새로 뜨는 영화배우가 '동물원의 역습'과 같은 책을 감명깊게 읽고 동물원 뜯어고치기 시민연대에 가입한 후 직접 동물원 가서 실태조사도 하고 항의방문도 하는 것이다...  어느정도 잘 나가는 한 배우는 몸의 이유라기보다는 철학적 이유로 육식을 거부, 채식주의를 전파하고 책도 내고 강연회도 개최하고 모임도 만든다.

상상만 해도 참 재밌지 않나? 현실적 제약은 많지만 말이다.

물론, 정치적 커밍아웃을 한 민주노동당의 오지혜, 봉준호 외의 여러 사람들도 있고, 직접 참여연대에 방문했던 자우림과 같은 친구들도 있다. 그렇지만 적당히 정치색을 띄면서, 너무 개인적 취미도 아닌 위와 같은 공익적 시민사회 활동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유명인은 좀 색다르지 않을까?

유행만 좇고 무뇌아처럼 획일화되어가는 그쪽 계통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뚜렷한 소신과 신념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본의 아니게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선도할 수 있다면 참 멋질텐데... 유명인의 지위를 역으로 잘 이용하는 전략인 셈이다. 내가 유명인이라면 이런 일을 더 잘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하려던 것도 유명인이 되서 못해버리는 경우가 생길까?

에구... '너나 잘해라' 라는 말이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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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후사 2004-10-29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전지현이랑 수업을 같이 들은적이 있었어요.
"전지현 떳다" 하니까 건물 전체가 술렁거리면서 난리가 났었죠.
기억키로 전지현은 청바지에 청재킷 그리고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는데 옆에 친구로 보임직한 여학생과 얘기하고 있었어요.
그 모습이 그냥 평범한 여대생 - 쓰고 보니 조금 이상하네요. ^^'' - 이더군요.
새삼 텔레비전의 위력을 절감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

엔리꼬 2004-10-30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학교에 최진실이 '질투' 촬영하러 온 적이 있어요.. 다들 어찌나 좋아했는지...
음.. 세대차 느끼는군...

sooninara 2004-12-21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질투..최수종.최진실 주인공이었죠? 역쉬 30대와 20대는 달라요..
 

송경원(정책연구원, 교육)


------------ 전략 --------------

내꺼야! 내 학교야! 확 문닫아버린다

지난 9월 19일 한국사학법인연합회 등 9개 사학단체 대표들이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정부 여당안대로 국회를 통과하면 학교를 자진 폐쇄하고 신입생을 받지 않겠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학교 폐쇄 또한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여기는 걸 보면, 여전히 학교를 '내꺼야'라고 생각하고 있나 보다. 학교를 설립할 때 조금 돈을 냈을 뿐, 이후 실제 운영이나 시설 증·개축 과정에서는 학생 등록금이나 국민의 세금이 대거 투입되고 초중등학교의 경우에는 교사의 월급마저도 국가가 지원하고 있는 마당에, 아직도 '내꺼야'라고 여기나 보다. 더구나 학교설립은 법인이 하도록 되어 있고 돈을 낸 개인과 법인은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다.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물어보자. "자기가 낸 돈은 조금이고, 사실상 학생의 등록금이나 국민의 세금으로 대부분의 경비가 충당되고 있는데, 그럼 누구 겁니까? 그 사람 겁니까? 국민 겁니까? 참, 돈을 냈다고 해도 개인이기에 법인과는 다릅니다"라고. 그럼 "당연한 걸 물어보네"라고 황당한 표정을 짓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나 보다. 아니, 그보다는 퇴행 증상 중의 하나인 기억력 감퇴일 수도 있다. 자신들이 만든 사학윤리강령에 "사학을 위하여 제공된 재산은 국가사회에 바쳐진 공공재산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유물같이 다루어져서는 안된다"라고 분명하게 명시하였음에도, 정신을 깜빡 다른 데 뒀나 보다.

"이건 누구꺼야?" "내꺼야"
"저건?" "내꺼야"
"그럼, 요건?" "요것도 내꺼야"
"아니야, 넌 개인이잖아. 그리고 사실상 세금으로 운영되고, 공공재산이라고 니가 그랬잖아"
"아냐. 내꺼야 내꺼. 내꺼란 말이야"
"……"
"아앙∼ 미워, 미워, 미워. 씩, 씩, 씩, 내 말 안 들어주면 확 죽을꺼야"

이번에 발의된 열린우리당의 사립학교법 개정안은 교원임면권, 사학비리 시정 계고기간 등의 쟁점 분야에서 교육시민단체들보다는 사학재단의 요구를 전폭 수용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교원임면권이라는 인사권을 학교법인이 행사하도록 되어 있어서 재단운영과 학교운영의 분리라는 법 개정의 기본 원칙이 퇴색되었다. 개혁이라는 용어가 무색할 정도다.
그런데도 사학단체들은 반발하고 있다. '내 걸 왜 뺏어가냐'는 투로 계속 빈정되면서 만약의 경우 "학교를 폐쇄하겠다"며 정부와 국민을 대상으로 협박하고 있다. 그러면서 명색이 교육기관이란다. 그리고 교육자라고 자처한다. 그 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 심히 걱정될 따름이다.
사실 교육은 사회적인 과정이다. 학습 또한 사회적인 과정이다. 한국은 워낙 경쟁이 치열하고 사교육이 융성하여 공부 잘하는 것도 다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지만, 사실 혼자 힘만으로 학습이나 성장·발달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모, 주위 어른, 또래 친구들, 교사, 기타 환경 등 계속해서 이어지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학습은 이루어진다. 더구나 오늘날의 학교제도는 공교육체제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된다. 그러므로 내가 공부 잘하면 나 혼자 잘나고 잘해서 공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절반 이상은 사회적 관계의 힘이다. 마치, 생산의 사회성이 고도화된 현대 사회에서 "내가 만원을 벌면, 그 중 오천원 이상은 다른 사람의 몫"인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사회성이 매우 중요하다. 공부해서 남 줘야 한다.
하지만 "내꺼야. 여의치 않으면 확 ∼"이라고 말하는 사학단체들의 소속 학교에서 학업에 정진하고 있는 학생들이 무엇을 배울까. 사회의 협력 관계와 사회에 대한 기여를 익힐까 아니면 내가 잘 난 것이니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된건 말건 나 혼자 잘 살아보자를 익힐까.
자기중심적 사고는 청소년기에도 보인다. 이 때의 자기중심적 사고는 스스로를 뭔가 특별한 존재로, 다른 이들과 다른 존재로 보는 것이다. 또한 다른 이들이 모두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로 인해 과격하거나 위험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시기의 자기중심적 사고 역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성장·발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약해진다. 그런데 사회적 관계의 한 축이 되는 학교와 재단이 "내꺼야. 내껀데 이것들이 어디서. 에이, 여의치 않으면 정말 확 해버린다"를 심심치않게 말하고 행동한다면,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눈에 선하다.

뚝! 밥 안준다


자아중심적 사고를 하는 아이를 무조건 혼내면 안된다. 정상적인 과정으로, 나이가 들면서 또는 비슷한 연령대의 다른 아이들과 관계하면서 자연스럽게 약화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슬슬 타이르거나 차근차근 설명해줘야 한다. 특히, 친구들과 되도록 많이 놀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이란 신기한 존재로, 자아중심적 사고를 하는 아이들끼리 놀아도 서로가 서로를 차츰차츰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 놀이의 효과 또한 한 몫 한다.
하지만 퇴행의 경우는 다르다. 이건 일종의 비정상이다. 따라서 치료해야 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따끔하게 혼내야 한다. 정상적인 성장·발달을 하는 아이라면 칭찬을 주로 해야 하지만, 퇴행은 적절한 벌이 필요하다.
다 큰 성인이 자기 것이라고 계속 우기면서 여차하면 확 어떻게 해버리겠다는 식으로 땡깡부리면(죄송. 일본말을 써서. 참, '땡깡'은 일본어로 지랄병·간질병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 따끔하게 혼내야 한다. "뚝! 밥 안준다"라고. 그리고 정말 폐쇄하는지 지켜봐야 한다. 만약 실제로 폐쇄하면, 국가가 인수한 후 공립학교로 전환하면 된다. 현행 법령에서도 사학 재단들이 이사회 결의를 통해 학교를 폐쇄한 뒤 신입생을 받지 않으면, 학교 재산은 공익적 기관 또는 지방자치단체에 귀속된다.
학교는 교육기관이다. 학교는 나와바리가 아니다. 성질난다고 확 뒤집어엎을 수 있는 데가 아니다. 그런데도 문 닫겠단다. 또한 학교는 구멍가게가 아니다. 장사 잘 된다고 문 열었다가 장사가 안될 것 같고 내 마음대로 못할 것 같으니까 '에라이'하면서 문 닫을 수 있는 데가 아니다. 그런데도 폐쇄하겠단다. 말인 즉슨, 학교를 교육기관으로 보지 않는다고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긴 법 개정과 관련하여 그동안 사립단체들이 표명해왔던 입장들 그 어디에도 학생이나 학부모, 교사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직 재단의 입장만이 보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정말 교육자인지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더더군다나 국가가 인수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리고 하기 싫다고 삐쳐서 하지 않는 경우엔 두 번 다시 교육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말과 행동에 따른 책임감이 무엇인지 가르쳐줘야 한다. 그걸 '교육'이라고 부른다.

http://www.pslaw.or.kr/  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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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27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는 성질난다고 확 뒤집어엎을 수 있는 데가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서림님, '나와바리'가 뭡니까?

엔리꼬 2004-10-27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와바리는 조폭 용어로 조폭 조직들이 지배하는 일정 구역을 뜻합니다.
활용 예) "느그들이 뭘 믿고 지금 우리 나와바리에서 얼쩡대냐?"
 

오래간만의 술자리.
어쩌다가 이야기는 주례 이야기로 옮겨갔다.

지도교수님의 20년 전 결혼식 주례는 요즘 뜨고 계시는 천주교계의 이단아 함세웅 신부님이었고, 자신의 15년 전 결혼식 주례는 그 유명한 김승훈 신부님이라는 다 알려진 이야기를 늦깎이 입학생인 한 선배는 자랑삼아 또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그랬다.
"아! 저도 제 결혼식때 천주교계의 태두를 주례로 모실 수 있었는데, 그냥 평범한 분으로 했습니다"라고.

다들 궁금해서 누구냐고 묻는다.
"원래 그 신부님의 형이 저희 아버님 친구분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자주 뵈었고, 몇몇 가족들이 동반 여행갈 때 동행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답니다. 주일이면 숙소였던 콘도 방에서 그 신부님께서 직접 미사를 집전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교회법에 어긋나는건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 신부님께 연락을 했으면 흔쾌히, 아주 흔쾌히 주례를 봐주셨을텐데..."

"아, 글쎄 누구냐고..."
"아, 네. 그 분은 박*(일명 빠콩) 신부님이십니다."

"(허걱)......"
"야,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 연구회 멤버들 주례는 완전 좌우 합작이었겠네... 큭큭"

유명하지만 많은 욕을 받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안다는 것은 참 곤혹스러운 일이다.

주위 사람에게는 참 다정다감하다. 게다가 어찌나 어린 조카를 아끼시는지, 그 모습만 보면 참 좋다. 그러나 그 신부님께 사적 유감은 없지만, 객관적으로 엄청 싫어한다. 그래도 그 분을 싫어한다는 것이 혹시나 그 분의 형, 그러니까 아버님 친구분께 누가 되지는 않을까, 명색이 천주교 신자인데 하느님의 사제를 그리 미워해도 되나? 별별 소심한 생각이 다 든다.

그래도 미워하기로 했다. 91년 그의 활약상, 정국 반전의 주역임을 아는 나로서 어찌 그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 결혼식을 안하면 안했지, 어떻게 그 분을 주례로 모실 수 있는가? 주례사 하다가 주사파 이야기 나오면 어쩌려고...

요즘 다시 스타가 되셨다. 그래도, 주위 사람들이 엄청 욕을 한다. 그러나, 최소한 같이 욕하지는 않는다. 그게 나 나름대로의 행동 제약방식이다. 야, 나도 너무 이성적이다.

나중에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다시 생긴다면? 그때도 여전히 아무런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맨날 하는 그 소리, "내가 전향시킨 주사파 몇 명이나 돼.", "주사파 걔들 북한 김정일 지령받고 돈받았어."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절대로 앞에서 싫은 소리 못하겠다...  생김새가 무서워서 그렇냐고? 그럴 수도 있다. 어차피 깊이 있는 논쟁은 이루어지지 않으니깐?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래도 사적인 만남 아닌가? 앞으로 개인적 대면은 평생동안 없기를 간곡히 바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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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27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콩 신부님은 한때 무척 존경했던 신부님이에요.
좋아하던 사람이 이상하게 변한 모습 보면 인생이 무섭습니다.

노부후사 2004-10-27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콩 신부 정말 밥맛이에요. -ㄴ-;;
한때 가톨릭 신자였지만 지금은 그때 관두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슴다. 한국에서 종교를 갖는다는 건 신을 믿는 행위 이상의 무엇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예컨대 돈이라든지...

엔리꼬 2004-10-27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 아, 존경하실 정도였군요... 마태님도 말씀하셨지만 선민의식이 있는건지.. 끊임없이 언론에서 주목받고 싶어하는 듯한 인상을 받아요.
Epimetheus님 .. 음.. 종교인이 다 그렇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어딜 가나 잘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으니깐요... 저도 가끔 성당가는 종교인이긴 하지만 여러 비뚤어진 모습에는 아주 불만이 많지요.
 

나에게 있어 신문보기는 인터넷 시대라는 지금까지도 꽤 중요한 버릇으로 남아있다. 신문의 잉크냄새만 맡아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퍼지는 알러지 환자도 있음을 TV에서 알았지만, 난 그 잉크 냄새를 즐기는 족속이다.

아침에 갓 발행된 신문을 읽지 못하면 하루종일 찝찝한 기분이 든다. 그러고는 늦은 밤이든 며칠 지난 후가 되었든 모든 면을 뒤져본 후에야 신문을 버린다. 신문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각종 미디어가 있어도, 우리 집에 배달된 신문의 모든 면을 손수 뒤지지 않으면 뭔가 할 일을 다 못 끝낸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러한 특이한 강박증에 가까운 버릇은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것이다.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마도 국민학교 고학년때부터 신문을 읽었던 것 같다. 어렸을 적부터 현재까지 부모님께서 받아보시는 신문은 c일보. 지금이야 그 신문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만, 그때야 그런 게 어디 있었나? 그때 신문은 세상과 통하는 흔치 않는 통로이자 지식의 보고였다.

일찍 일어나시는 아버지는 아침마다 화장실을 가시면서 배달된 신문을 항상 가지고 들어 가셨고, 어느 정도 훑으신 다음에는 마루에 던져 놓으셨다. 늦게 일어난 우리들은 신문 쟁탈전을 벌이지만 결국은 스포츠 면을 비롯한 알짜배기 지면은 장남이 차지하고, 우리 남매는 재미가 떨어지는 나머지 부분부터 보는 경우가 많았다. 아침 식사를 하기 전까지 우리 삼남매는 나눠진 신문을 각자 펼쳐놓고 쪼그려 앉아 읽고 있는 모습을 연출하곤 했다.

당시에는 헤드라인은 물론 기사의 많은 부분까지 한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상상도 못하지만 스포츠면의 선수 이름까지 한글 표기 전혀 없는 한자였다. 프로야구에 심취했던 나로서는 김시진(金始眞)이니 김봉연(金奉淵)이니 윤동균(尹東均)이니 하는 지면에 실릴만한 선수들의 한자 이름을 읽어내야 했다.

다행히도 국민학교 때 천자문 서예를 배운 적이 있어서 한자에 나름대로 익숙했기에, 신문에 나오는 새로운 한자 읽기에도 재미를 붙였다.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반드시 부모님께 여쭤보면 정확한 답변을 해주셨으니 나의 한자실력은 쑥쑥 늘어났다. 지금도 이건 선동렬의 선(宣)자이지 의(宜)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도, 유두열의 유(柳)씨와 테니스 선수 유진선의 유(兪)씨, 유남규의 유(劉)씨가 모두 다른 집안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 신문의 덕이다. 대학시절, 시험기간에 옆에 앉은 친구들에게 내 답안지를 보여준 유일한 경험도 '한문' 과목 시간에 일어났으니, 그 신문에 크게 고마워해야 할까? 물론 당시 다른 신문을 구독했어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겠지만..

c 일보의 풍부한 컨텐츠(당시엔 컨텐츠란 말은 없었지만)는 어린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특히 단행본으로도 여러 권 편집되어 나왔던 꼭지 중 하나인 이** 코너를 보는 재미는 쏠쏠했다. 시사 문제와 맞닿아 있는 토픽 선택과 그 토픽과 관련된 동서고금의 관련된 모든 자료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그 지식의 향연에 매혹되었다. 하루가 채 안되는 그 짧은 시간동안 한 주제에 대한 서적을 다 뒤지는가? 책을 뒤진다고 되는 일인지? 자료조사원이 몇 명씩은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후 그 코너의 제목 삽화가 펜에서 컴퓨터로 바뀐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듯이, 자료수집은 컴퓨터로 했다는 기사를 얼핏 보았고, 그래서 그 의문은 풀렸었다. (그런데 지금도 의문이다. 그 시절에 컴퓨터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인터넷도 없었는데 말이지..)

당시 각종 지방신문들은 중앙신문인 c와는 말 그대로 게임이 되지 않았다. 중앙지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빈약한 기사거리, 조악한 편집상태와 종이의 질, 별로 관심도 없는 지역 이야기(당시만 하더라도 애향심은 별로 없고, 서울로 뜰 생각만 했다)으로 도배한 지역 신문들과 비교하면 독보적 우위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87년 민주화의 광풍이 몰아쳤었고 89년 전교조가 기지개를 펴면서 우리 사회에 다른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지만, 입시에 매달린 범생이 고등학생에게 더이상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주어지지 않았다. c일보를 바라보는 범생이의 눈은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89년 고3 여름, 1면엔 대문짝만하게 임수경의 북한 잠입, 탈출 소식을 전했고, 급기야 반공 애국청년 서림은 부르르 떨었다. "결국엔.... 그런데 이 새끼들이 미쳤나?". 그에 앞선 봄 무렵, 대학가요제로 유명한 '따라지 대학교(당시 부산에선 그렇게 불렀다)'에선 학생들이 선량한 전경을 불태워 죽였단다. "이 미친 놈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려나..."
c 일보의 논조와 일치되었던 그때의 그 상황들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신문과 함께 했던 우리 삼남매. 국민학교때부터 허공에 한자를 쓰는 특이한 취미를 가졌고 바둑을 즐겨했던 장남은 우리 어머니 표현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이과생으로 1등만 도맡아 했고, 매년 초 신춘문예에 큰 관심을 보이던 막내는 문예창작과로 진로를 정한다. 나? 나는 신문 잉크 중독증에 빠졌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이렇게 나와 인연을 맺었던 신문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구독했던 신문과는 대척점에 있는 신문을 보기 시작한다. (시리즈 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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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후사 2004-10-27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척점에 있는 신문이라... 그렇담...?

엔리꼬 2004-10-27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탄을 기대하세요... 지금 구상중입니다... 왜이리 글 한편 쓰기가 힘이 들까요..

sooninara 2004-12-2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안에 2탄을 써주시지요^^
 

학력은 지역과 무관하다

비육우나 돼지를 사육한다고 생각해보자. 여기저기에서 100마리를 사와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눠 따로따로 사육하기로 한다. 한쪽은 축사에 가두어 컴퓨터가 계산한 과학축산에 의존하며 성장호르몬 섞인 배합사료만 먹이고, 다른 한쪽은 가축의 본성에 내맡겨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흙을 파서 벌레를 잡아먹게 놔둔다면, 일정 시간 후 어떻게 달라져있을까. 과학축산에 의존한 쪽은 값이 많이 나가도록 살이 붙었지만 그리 건강하지 못할 것이고 다른 한쪽은 체격은 보잘것없지만 튼튼할 것이다. 목장주는 살찐 쪽을 선호할 것이 틀림없다. 오직 돈을 위해서.

도시 어린이들이 시골 어린이보다 수학문제를 잘 푼다. 슈퍼와 문방구가 지천인 도시에서 계산이 빠른 것은 환경 탓이다. 도시 어린이들이 더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도시 어린이들은 들풀의 이름을 거의 모른다. 언제 애기똥풀 꽃이 피고 무당개구리는 알을 낳고 강낭콩을 언제 파종하는지, 청호반새가 어떻게 새끼를 치는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시험에 나오지 않으므로. 살아가는데 계산이 필요하지만 생태계의 질서는 몰라도 될까. 그렇지 않다. 감성이 없는 삶은 무미건조해 금방 지치고 만다.

히말라야 북쪽의 작은 민족 라다크에는 불행이라는 단어가 없다. 어휘가 짧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들은 불행이라는 의미를 알 필요가 없었다. 가난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모두 자기 집과 갈아입을 옷이 있고 서로 도와 나누며 자급자족했으므로 수입이 다를 리 없다. 생활수준이 한결같으니 비교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서구문물이 돈과 함께 밀려들어오면서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육체노동을 천대하면서 불행을 배웠다.

최근 서울 시내의 일부 대학교에서 수시모집을 하면서 지역별로 차별했다는 의혹이 시민사회에서 강하게 일고 있다. 시골이나 지방도시는 물론 강남권과 강북권 고등학교 학생에 노골적인 차이를 두어 공정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일고, 참교육 학부모회와 전국교직원조합원 소속 교사들이 해당학교와 교육인적자원부 앞에 나와 연일 항의집회를 열고 있다. 평준화 원칙을 위배했다는 주장인데, 강남권과 강북권 고등학생의 학력은 입시에 반영해야 할 정도로 분명한 차이가 있을까.

학생들을 무작위로 반으로 나눠 한 그룹은 수업 마치면 학원과 과외로 입시공부에 몰두하게 하고, 한 그룹은 친구들과 산과 들로 쏘다니며 우정을 쌓고 사회 구석구석의 자원활동으로 보람을 배운다고 하자. 입시 공부에 치중한 그룹의 성적이 단연 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성적이 뛰어난 그룹의 학력이 당연히 뛰어날까.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인데, 왜 문제의 대학들은 강남권 학생들을 집중 선발했을까. 그건 학생을 선발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사육으로 끌어올린 성적을 학력으로 판단한 천박성 때문이다.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이 일찍부터 강남권 고등학교로 옮겼다는 거 모르는바 아니다. 그런데, 아파트 값 올리며 일찍부터 학교를 옮긴 열성부모의 아이는 원래 학력이 높을까. 부모의 기대와 달리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어려서부터 남을 의식하는 부모의 천박한 욕심으로 일찍부터 사육된 아이가 강남으로 옮겼을 터이므로.

하루종일 실험에 몰두한 대학원생을 두고, 생각은 언제 하느냐고 교수가 핀잔을 주었다는데, 남이 정해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성적 올리기에 급급했던 고등학생들은 하인이나 로봇처럼 주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할지 몰라도 대학 진학 후 또는 사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는데 대단히 미숙하다. 한마디로 창의성이 부족하다. 남을 배려하는 일도 교과서에 의존하려 든다. 문제는 잘 풀지만 원리를 찾는데 실패하는 유학생들이 초반에 고전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각 깊은 교육자라면 표피적인 성적에 의존하며 사육된 학생을 선발하는데 몰두하지 않아야 옳다. 다양한 지역에서 창의력 있는 학생을 공정하지만 유연하게 선발하는 편이 미래지향적이라고 본다. 차제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아침밥 차리는 엄마가 시리얼에 우유 부어 먹이는 엄마보다 교육적이라고 생각한다. 냉정한 과학적 칼로리보다 눈에 비치는 엄마의 정성이 아이의 감성을 따뜻하게 그리고 창조력 있게 자극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리얼을 보면 개 사료가 생각난다.
 
박병상
(요즘세상, 200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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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게임은 끝났다. 고교등급제 반대한다고 한나라당 국회의원마저 그랬다.(물론 다른 대안을 내놓으려 하긴 했지만)  고교등급제가 어디 논의거리가 되는가? 그러나, 의도한 것인지, 의도되지 않은 것인지는 몰라도 상황은 항상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결국, 이번 사건도 언론에 의해서 '고교평준화 반대' 에서 '사학의 자율성',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 나아가 검은 속마음을 가진 못되먹은 몇몇 단체의 선동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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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일보 사설이다.

[사설]연세대 유감 표명 일리 있다
 
일부 단체가 제기한 고교등급제 적용 의혹을 받으면서 집중적인 공격대상이 되었던 연세대가 어제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이 대학은 “일부 단체가 강남 강북을 대립시키고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양상으로 우리 학교의 입학정책을 단편적 자료를 이용하여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비난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이 발표는 이번 고교등급제 파문을 냉정하게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번 사태는 몇몇 대학의 수시모집에서 강남지역 학생들에게 고교등급제를 적용해 우대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시작됐다. 전교조 등 일부 단체들이 압박하자 교육부는 실태조사를 벌였다. 조사반은 대학에 입학서류철을 요구했고, 면접을 담당한 교수명단까지 제출하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그동안 일부 단체들은 외곽에서 연일 대학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헌법이 보장한 ‘학문의 자유’, ‘대학의 자율권’을 새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런 식으로 대학을 여론재판에 올려 욕보이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대학이 지닌 학생선발권에 관한 일이다. 일부 단체의 ‘선동’에 교육당국까지 가세한 것은 기가 막힐 노릇이다.

연세대가 발표문에서 “일부 단체가 강남과 강북을 대립시켰다”고 주장한 것은 그들 단체의 ‘교묘한 의도’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수시모집에서 강남보다 훨씬 많은 학생을 입학시키는 다른 지역의 특수목적고는 슬며시 빼놓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결처럼 몰고 간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연세대가 “입학정책은 신뢰의 기반 위에 대학자율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천명한 것에 공감한다. 고교등급제 의혹은 곧 흑백이 가려지겠지만 어떤 구실로도 이번처럼 대학을 유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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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7 00: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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