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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정책연구원, 교육)


------------ 전략 --------------

내꺼야! 내 학교야! 확 문닫아버린다

지난 9월 19일 한국사학법인연합회 등 9개 사학단체 대표들이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정부 여당안대로 국회를 통과하면 학교를 자진 폐쇄하고 신입생을 받지 않겠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학교 폐쇄 또한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여기는 걸 보면, 여전히 학교를 '내꺼야'라고 생각하고 있나 보다. 학교를 설립할 때 조금 돈을 냈을 뿐, 이후 실제 운영이나 시설 증·개축 과정에서는 학생 등록금이나 국민의 세금이 대거 투입되고 초중등학교의 경우에는 교사의 월급마저도 국가가 지원하고 있는 마당에, 아직도 '내꺼야'라고 여기나 보다. 더구나 학교설립은 법인이 하도록 되어 있고 돈을 낸 개인과 법인은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다.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물어보자. "자기가 낸 돈은 조금이고, 사실상 학생의 등록금이나 국민의 세금으로 대부분의 경비가 충당되고 있는데, 그럼 누구 겁니까? 그 사람 겁니까? 국민 겁니까? 참, 돈을 냈다고 해도 개인이기에 법인과는 다릅니다"라고. 그럼 "당연한 걸 물어보네"라고 황당한 표정을 짓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나 보다. 아니, 그보다는 퇴행 증상 중의 하나인 기억력 감퇴일 수도 있다. 자신들이 만든 사학윤리강령에 "사학을 위하여 제공된 재산은 국가사회에 바쳐진 공공재산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유물같이 다루어져서는 안된다"라고 분명하게 명시하였음에도, 정신을 깜빡 다른 데 뒀나 보다.

"이건 누구꺼야?" "내꺼야"
"저건?" "내꺼야"
"그럼, 요건?" "요것도 내꺼야"
"아니야, 넌 개인이잖아. 그리고 사실상 세금으로 운영되고, 공공재산이라고 니가 그랬잖아"
"아냐. 내꺼야 내꺼. 내꺼란 말이야"
"……"
"아앙∼ 미워, 미워, 미워. 씩, 씩, 씩, 내 말 안 들어주면 확 죽을꺼야"

이번에 발의된 열린우리당의 사립학교법 개정안은 교원임면권, 사학비리 시정 계고기간 등의 쟁점 분야에서 교육시민단체들보다는 사학재단의 요구를 전폭 수용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교원임면권이라는 인사권을 학교법인이 행사하도록 되어 있어서 재단운영과 학교운영의 분리라는 법 개정의 기본 원칙이 퇴색되었다. 개혁이라는 용어가 무색할 정도다.
그런데도 사학단체들은 반발하고 있다. '내 걸 왜 뺏어가냐'는 투로 계속 빈정되면서 만약의 경우 "학교를 폐쇄하겠다"며 정부와 국민을 대상으로 협박하고 있다. 그러면서 명색이 교육기관이란다. 그리고 교육자라고 자처한다. 그 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 심히 걱정될 따름이다.
사실 교육은 사회적인 과정이다. 학습 또한 사회적인 과정이다. 한국은 워낙 경쟁이 치열하고 사교육이 융성하여 공부 잘하는 것도 다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지만, 사실 혼자 힘만으로 학습이나 성장·발달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모, 주위 어른, 또래 친구들, 교사, 기타 환경 등 계속해서 이어지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학습은 이루어진다. 더구나 오늘날의 학교제도는 공교육체제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된다. 그러므로 내가 공부 잘하면 나 혼자 잘나고 잘해서 공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절반 이상은 사회적 관계의 힘이다. 마치, 생산의 사회성이 고도화된 현대 사회에서 "내가 만원을 벌면, 그 중 오천원 이상은 다른 사람의 몫"인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사회성이 매우 중요하다. 공부해서 남 줘야 한다.
하지만 "내꺼야. 여의치 않으면 확 ∼"이라고 말하는 사학단체들의 소속 학교에서 학업에 정진하고 있는 학생들이 무엇을 배울까. 사회의 협력 관계와 사회에 대한 기여를 익힐까 아니면 내가 잘 난 것이니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된건 말건 나 혼자 잘 살아보자를 익힐까.
자기중심적 사고는 청소년기에도 보인다. 이 때의 자기중심적 사고는 스스로를 뭔가 특별한 존재로, 다른 이들과 다른 존재로 보는 것이다. 또한 다른 이들이 모두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로 인해 과격하거나 위험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시기의 자기중심적 사고 역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성장·발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약해진다. 그런데 사회적 관계의 한 축이 되는 학교와 재단이 "내꺼야. 내껀데 이것들이 어디서. 에이, 여의치 않으면 정말 확 해버린다"를 심심치않게 말하고 행동한다면,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눈에 선하다.

뚝! 밥 안준다


자아중심적 사고를 하는 아이를 무조건 혼내면 안된다. 정상적인 과정으로, 나이가 들면서 또는 비슷한 연령대의 다른 아이들과 관계하면서 자연스럽게 약화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슬슬 타이르거나 차근차근 설명해줘야 한다. 특히, 친구들과 되도록 많이 놀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이란 신기한 존재로, 자아중심적 사고를 하는 아이들끼리 놀아도 서로가 서로를 차츰차츰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 놀이의 효과 또한 한 몫 한다.
하지만 퇴행의 경우는 다르다. 이건 일종의 비정상이다. 따라서 치료해야 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따끔하게 혼내야 한다. 정상적인 성장·발달을 하는 아이라면 칭찬을 주로 해야 하지만, 퇴행은 적절한 벌이 필요하다.
다 큰 성인이 자기 것이라고 계속 우기면서 여차하면 확 어떻게 해버리겠다는 식으로 땡깡부리면(죄송. 일본말을 써서. 참, '땡깡'은 일본어로 지랄병·간질병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 따끔하게 혼내야 한다. "뚝! 밥 안준다"라고. 그리고 정말 폐쇄하는지 지켜봐야 한다. 만약 실제로 폐쇄하면, 국가가 인수한 후 공립학교로 전환하면 된다. 현행 법령에서도 사학 재단들이 이사회 결의를 통해 학교를 폐쇄한 뒤 신입생을 받지 않으면, 학교 재산은 공익적 기관 또는 지방자치단체에 귀속된다.
학교는 교육기관이다. 학교는 나와바리가 아니다. 성질난다고 확 뒤집어엎을 수 있는 데가 아니다. 그런데도 문 닫겠단다. 또한 학교는 구멍가게가 아니다. 장사 잘 된다고 문 열었다가 장사가 안될 것 같고 내 마음대로 못할 것 같으니까 '에라이'하면서 문 닫을 수 있는 데가 아니다. 그런데도 폐쇄하겠단다. 말인 즉슨, 학교를 교육기관으로 보지 않는다고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긴 법 개정과 관련하여 그동안 사립단체들이 표명해왔던 입장들 그 어디에도 학생이나 학부모, 교사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직 재단의 입장만이 보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정말 교육자인지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더더군다나 국가가 인수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리고 하기 싫다고 삐쳐서 하지 않는 경우엔 두 번 다시 교육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말과 행동에 따른 책임감이 무엇인지 가르쳐줘야 한다. 그걸 '교육'이라고 부른다.

http://www.pslaw.or.kr/  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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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27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는 성질난다고 확 뒤집어엎을 수 있는 데가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서림님, '나와바리'가 뭡니까?

엔리꼬 2004-10-27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와바리는 조폭 용어로 조폭 조직들이 지배하는 일정 구역을 뜻합니다.
활용 예) "느그들이 뭘 믿고 지금 우리 나와바리에서 얼쩡대냐?"
 

학력은 지역과 무관하다

비육우나 돼지를 사육한다고 생각해보자. 여기저기에서 100마리를 사와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눠 따로따로 사육하기로 한다. 한쪽은 축사에 가두어 컴퓨터가 계산한 과학축산에 의존하며 성장호르몬 섞인 배합사료만 먹이고, 다른 한쪽은 가축의 본성에 내맡겨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흙을 파서 벌레를 잡아먹게 놔둔다면, 일정 시간 후 어떻게 달라져있을까. 과학축산에 의존한 쪽은 값이 많이 나가도록 살이 붙었지만 그리 건강하지 못할 것이고 다른 한쪽은 체격은 보잘것없지만 튼튼할 것이다. 목장주는 살찐 쪽을 선호할 것이 틀림없다. 오직 돈을 위해서.

도시 어린이들이 시골 어린이보다 수학문제를 잘 푼다. 슈퍼와 문방구가 지천인 도시에서 계산이 빠른 것은 환경 탓이다. 도시 어린이들이 더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도시 어린이들은 들풀의 이름을 거의 모른다. 언제 애기똥풀 꽃이 피고 무당개구리는 알을 낳고 강낭콩을 언제 파종하는지, 청호반새가 어떻게 새끼를 치는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시험에 나오지 않으므로. 살아가는데 계산이 필요하지만 생태계의 질서는 몰라도 될까. 그렇지 않다. 감성이 없는 삶은 무미건조해 금방 지치고 만다.

히말라야 북쪽의 작은 민족 라다크에는 불행이라는 단어가 없다. 어휘가 짧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들은 불행이라는 의미를 알 필요가 없었다. 가난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모두 자기 집과 갈아입을 옷이 있고 서로 도와 나누며 자급자족했으므로 수입이 다를 리 없다. 생활수준이 한결같으니 비교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서구문물이 돈과 함께 밀려들어오면서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육체노동을 천대하면서 불행을 배웠다.

최근 서울 시내의 일부 대학교에서 수시모집을 하면서 지역별로 차별했다는 의혹이 시민사회에서 강하게 일고 있다. 시골이나 지방도시는 물론 강남권과 강북권 고등학교 학생에 노골적인 차이를 두어 공정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일고, 참교육 학부모회와 전국교직원조합원 소속 교사들이 해당학교와 교육인적자원부 앞에 나와 연일 항의집회를 열고 있다. 평준화 원칙을 위배했다는 주장인데, 강남권과 강북권 고등학생의 학력은 입시에 반영해야 할 정도로 분명한 차이가 있을까.

학생들을 무작위로 반으로 나눠 한 그룹은 수업 마치면 학원과 과외로 입시공부에 몰두하게 하고, 한 그룹은 친구들과 산과 들로 쏘다니며 우정을 쌓고 사회 구석구석의 자원활동으로 보람을 배운다고 하자. 입시 공부에 치중한 그룹의 성적이 단연 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성적이 뛰어난 그룹의 학력이 당연히 뛰어날까.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인데, 왜 문제의 대학들은 강남권 학생들을 집중 선발했을까. 그건 학생을 선발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사육으로 끌어올린 성적을 학력으로 판단한 천박성 때문이다.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이 일찍부터 강남권 고등학교로 옮겼다는 거 모르는바 아니다. 그런데, 아파트 값 올리며 일찍부터 학교를 옮긴 열성부모의 아이는 원래 학력이 높을까. 부모의 기대와 달리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어려서부터 남을 의식하는 부모의 천박한 욕심으로 일찍부터 사육된 아이가 강남으로 옮겼을 터이므로.

하루종일 실험에 몰두한 대학원생을 두고, 생각은 언제 하느냐고 교수가 핀잔을 주었다는데, 남이 정해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성적 올리기에 급급했던 고등학생들은 하인이나 로봇처럼 주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할지 몰라도 대학 진학 후 또는 사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는데 대단히 미숙하다. 한마디로 창의성이 부족하다. 남을 배려하는 일도 교과서에 의존하려 든다. 문제는 잘 풀지만 원리를 찾는데 실패하는 유학생들이 초반에 고전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각 깊은 교육자라면 표피적인 성적에 의존하며 사육된 학생을 선발하는데 몰두하지 않아야 옳다. 다양한 지역에서 창의력 있는 학생을 공정하지만 유연하게 선발하는 편이 미래지향적이라고 본다. 차제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아침밥 차리는 엄마가 시리얼에 우유 부어 먹이는 엄마보다 교육적이라고 생각한다. 냉정한 과학적 칼로리보다 눈에 비치는 엄마의 정성이 아이의 감성을 따뜻하게 그리고 창조력 있게 자극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리얼을 보면 개 사료가 생각난다.
 
박병상
(요즘세상, 200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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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게임은 끝났다. 고교등급제 반대한다고 한나라당 국회의원마저 그랬다.(물론 다른 대안을 내놓으려 하긴 했지만)  고교등급제가 어디 논의거리가 되는가? 그러나, 의도한 것인지, 의도되지 않은 것인지는 몰라도 상황은 항상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결국, 이번 사건도 언론에 의해서 '고교평준화 반대' 에서 '사학의 자율성',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 나아가 검은 속마음을 가진 못되먹은 몇몇 단체의 선동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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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일보 사설이다.

[사설]연세대 유감 표명 일리 있다
 
일부 단체가 제기한 고교등급제 적용 의혹을 받으면서 집중적인 공격대상이 되었던 연세대가 어제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이 대학은 “일부 단체가 강남 강북을 대립시키고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양상으로 우리 학교의 입학정책을 단편적 자료를 이용하여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비난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이 발표는 이번 고교등급제 파문을 냉정하게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번 사태는 몇몇 대학의 수시모집에서 강남지역 학생들에게 고교등급제를 적용해 우대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시작됐다. 전교조 등 일부 단체들이 압박하자 교육부는 실태조사를 벌였다. 조사반은 대학에 입학서류철을 요구했고, 면접을 담당한 교수명단까지 제출하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그동안 일부 단체들은 외곽에서 연일 대학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헌법이 보장한 ‘학문의 자유’, ‘대학의 자율권’을 새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런 식으로 대학을 여론재판에 올려 욕보이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대학이 지닌 학생선발권에 관한 일이다. 일부 단체의 ‘선동’에 교육당국까지 가세한 것은 기가 막힐 노릇이다.

연세대가 발표문에서 “일부 단체가 강남과 강북을 대립시켰다”고 주장한 것은 그들 단체의 ‘교묘한 의도’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수시모집에서 강남보다 훨씬 많은 학생을 입학시키는 다른 지역의 특수목적고는 슬며시 빼놓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결처럼 몰고 간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연세대가 “입학정책은 신뢰의 기반 위에 대학자율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천명한 것에 공감한다. 고교등급제 의혹은 곧 흑백이 가려지겠지만 어떤 구실로도 이번처럼 대학을 유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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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7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졸업을 축하합니다.

물론 00학번 모두가 졸업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압니다. 행정적인 착오가 없다면 내가 알아본 바로는, 정임, 해나, 주현, 은주, 선애, 선영, 가현, 덕귀, 자영, 혜정, 효현, 지영, 지선, 지현. 이렇게 열 네 명이 대학의 문을 나서더군요. 이름 하나하나를 타자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하나하나의 얼굴을 떠 올리게 됩니다.

이야기를 나누었건, 공부를 가지고 씨름을 하였건, 아니면 교실에서나 복도에서 오가며 눈웃음만 주고 받았을 뿐이건... 이제까지 선생과 학생으로서 만난 밀도에 서로 차이는 있겠지만, 졸업하는 00학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는 지금 나의 애틋한 마음은 한결 같습니다. 해준 것 없는 지도교수로서의 자괴감, 좀 더 성실하고 참될 수 있었어야 했던 교육사회학 선생으로서의 후회, 사회라는 새 땅으로 막막하게 나가도록 자네들을 내버려 둔 삶의 선배로서의 미안함...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은 어둡고 슬플뿐입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 그대들에 대한 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것을 크게 피워낼 수 없었던 내 게으름을 탓하면서...

잘 살기 바랍니다. 잘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 모두 달리 생각하겠지만, 궁극에는 생각을 모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쩌면 삶의 가치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확인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동안 우리는 미망 중에 헤매며 행복을 고민하고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성실하게 산다면, 우리를 주관하는 절대자께서 우리에게 행복의 답을 주는 데 인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세상은 지금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학의 문을 나서면서 성공보다 실패의 느낌을 가지고 나가도록 세상이 부추기고 있습니다. 취업이 되지 않았다,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였다... 적지 않은 도전이 실패로 끝나게 된 마당에 어느 누가 담담할 수 있겠으며, 어느 누가 쉽게 자신을 추스를 수 있겠습니까? 적지 않은 우리 친구들이 이런 상황에서 어깨가 쳐져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데에는 제자를 소위 경쟁력 있게 키우지 못한 선생 탓도 작지 않음을 인정하며 미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경쟁에서 이기고 성취를 맛보는 데서 행복을 찾기는 어렵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어깨가 쳐졌을지 모르는 친구들을 위로하고자 애써 꾸며내는 말이 아닙니다. 졸업을 앞두었다는 심각한 계기를 이용하여 어쩌면 마지막으로 강의(?)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번 찬찬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시험을 치고 합격하여야, 직장을 얻어야, 삶을 채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널려 있습니다. 여러분의 역량과 손길을 기다리는 곳은 부지기수입니다. 물론 그 곳 모두 돈을 충분히 주고 사회적 위신을 충분히 주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곳들이 여러분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 행복을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새롭게 눈을 뜨고 세상을 보면 세상은 결코 백수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진정 하지 않고는 못배길 일이 있다면, 실업이라는 말 같은 것은 무의미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모두 버젓한 직장을 가지고 졸업할 수 있었더라면 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었으면 내 마음이 훨씬 가볍고 기쁠 것이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다만, 좀 더 근본적으로 내가 아쉬워하는 것은, 경쟁에서의 승리나 직업의 위신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생각하고 느끼고 깨달을 수 있도록 서로 더 가르치고 배울 수 없었다는 사실이자 현실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부자와 권력자들이 가엾다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가서 우리는 공부를(교육을)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실지로 잘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부디 지금 부딪치고 있는 어려움에 절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어쩌면 절망할 가치가 없을 부딪침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늘 자신의 고유함과 존재 의의를 잊지 말고 열과 성을 다하여 일상에 임하기 바랍니다.

어줍잖게 감상적으로, 평소에 제대로 열심히 가르치지 못한 죄의식을 조금이나마 털어낼 양으로, 제스추어를 쓰는 꼴이 되었습니다. 사실이 그러한 점도 있구요. 그러나 졸업하는 여러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여겨주기 바랍니다.

부디 잘 살기를... 그리고 가끔은 안부를 묻고, 계속해서 어렵고 힘든 일들을 같이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녕.

2004년 2월 12일

강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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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오래된 글이지만, 알라딘 내 서재에 꼭 모셔두고 싶은 글...

아!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발끝마저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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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10-05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많지만, 훌륭한 분들도 많군요. 글 너무 멋져요...
 



독일(獨逸)→도이칠랜드        
서서(瑞西)→스위스            
인도(印度)→인디아            
향항(香港)→홍콩                
성항(星港)→싱가포르            
호주(濠洲)→오스트레일리아    
오지리(墺地利)→오스트리아          
파란(波蘭)→폴란드              
나마(羅馬)→로마                
태국(泰國)→타일랜드            
뉴육(紐育)→뉴욕                
백림(伯林)→베를린              
낙위(諾威)→노르웨이            
분란(芬蘭)→핀란드            
나성(羅城)→로스앤젤레스        
서전(瑞典)→스웨덴            
성림(聖林)→헐리우드            
지나(支那)→차이나              
수부(壽府)→제네바              
희랍(希臘)→그리스              
애란(愛蘭)→아일랜드            
상항(桑港)→샌프란시스코        
윤돈(倫敦)→런던                
정말(丁抹)→덴마크              
나전(羅典)→라틴                
신서란(新西蘭)→뉴질랜드            
애급(埃及)→ 이집트    
화성돈(華盛頓)→ 워싱턴
월남(越南)→베트남
마이새(馬耳塞)→마르세유
서반아(西班牙)→스페인
영국(英國)→잉글랜드
구라파(歐羅巴)→유럽
소격란(蘇格蘭)→스코틀드
파사(波斯)→페르샤
몽고(蒙古)→몽골
백의의(白耳義)→벨기에
토이기(土耳其)→터어키
해아(海牙)→헤이그
포도아(葡萄牙)→포루투갈
화란(和蘭) →네델란드
노서아(露西亞)→러시아
백랄서이(伯剌西爾)→브라질
미국(美國)→아메리카
법국(法國)→프랑스
이태리(伊太利)→이탈리아
나마니아(羅馬尼亞)→루마니아
해삼위(海蔘威)→블라디톡
아이연정(亞爾然丁)→아르헨나
파리(巴里)→ 파리
아불리가(阿弗利加)→아프리카
아세아(亞細亞)→아시아

 

아지기도 샌프란시스코를 상항이라 부르는 곳이 있더군요.. 상항 한인학교.. 이런 식으로....

알아두면 좋을 팁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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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09-30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새벽별님 서재에서 보고 왔어요. 저도 퍼가겠습니다.

엔리꼬 2004-09-30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마음껏 퍼가세요.. 저도 퍼온것이라.. 정확한 출처도 몰라요..
 

동심의 힘


한때 <쟁반노래방>을 즐겨보았었다. 한 소절 한 소절 우리 동요를 따라 부르다 보면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우리말의 정겨움과 순진함이 가슴속으로 배어들어와서 아무도 옆에 없어도 혼자 즐거워지곤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인가는 <과꽃>을 따라 부르다가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아니 실제로 난 잠겨 있던 슬픔을 몰아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렸다. 누구나 다 아는 1절에서가 아니었다. “과꽃 예쁜 꽃을 들여다보면/ 꽃 속에 누나 얼굴 떠오릅니다./ 시집간 지 어언 삼년 소식이 없는/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나요.” 1절만 열심히 따라 부르던 어린 시절, 나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도 왜 과꽃을 좋아하는 누나를 그토록 애절하게 부르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꽃밭 가득히 피어 있던 과꽃은 실은 시집간 누나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 누나는 아마 기저귀를 갈아주고 얼러준 사람이었을 것이며 과꽃이 핀 계절에는 아예 동생을 업고 들어가 꽃밭에서 나오지 않고 즐겼을 것이다. 그렇게 온몸으로 누나와 과꽃은 하나가 되어 기억의 덩어리로 뭉쳐 있는데 지금 그 누나가 시집을 가고 소식이 없다. 올 가을도 꽃밭에 과꽃은 어김없이 피었건만 누나는 여기 없었다. 그리워하는 대상은 부재하지만 그와 함께 추억할 수 있는 꽃을 노래하는 그 애절함이란! 순간 난 말을 잊었다.

1절이 아니라 2절에서 다시 화들짝 놀랐던 동요는 바로 <달맞이>였다. “비단물결 넘실넘실 어깨 춤추고/ 고개 숙인 수양버들 거문고타면/ 달밤에 소금쟁이/ 맴을 돈단다.” 달빛이 교교하게 비치는 냇가가 그림처럼 내게 다가왔다. 달빛에 어른거리며 반짝거리는 물결과 그 옆으로 달밤의 바람결에 흔들리는 수양버들이 소금쟁이와 함께 어우러져 춤추고 맴돌고 연주하는 그 정경이 내 주위를 감싸면서 나도 어서 저 달밤의 냇가로 달려나가고 싶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과꽃이 가득 핀 꽃밭, 비단물결과 거문고 타는 수양버들과 맴도는 소금쟁이를 내게 알려준 것은 단지 가사의 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 속에 묵혀져 있던 어린 시절의 리듬과 멜로디의 힘이기도 했다.

<우리 동요 80년>을 보면서 난 그 힘이 무엇보다도 어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인터넷을 통한 ‘우유쏭’과 ‘당근쏭’에 익숙해 있으며 더이상 <반달>이나 <꽃밭에서>를 부르지 않는다. 뛰어노는 놀이터를 잃어버린 우리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키우고 있는 어른들이 진정으로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동요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는 간절한 그리움도 그에 동반되는 순수한 동심도 아득히 멀다.

그러나 티베트고원을 고향으로 가진 인도 북부 다람살라의 아이들의 얼굴에는 순수한 그리움이 있었다. 돌아갈 고향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그들의 눈동자에서 순진하고 티없는 진심을 보았다. 티베트의 어린 망명자, 다와가 하염없이 흘러내리던 콧물을 쓰윽 닦으면서 신발을 벗고 앞뒤로 구멍난 양말을 신은 발을 들어올리면서 짓던 미소를 난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박형준 시인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 우리의 상심한 가슴이 덥혀지듯이,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여진 오래된 가구야말로 추억의 힘이며 전통의 힘”(<가구의 힘> 중에서)이라고 하면서 ‘가구의 힘’을 규정했다. 난 그 추억의 힘과 전통의 힘을 ‘동심의 힘’으로 바꾸면 어떨까 생각 중이다.

가슴에 묻혀 있던 추억이 빛바랜 사진들처럼 구멍난 양말과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콧물로 상기되듯이 동심의 힘은, 지난 세월을 닦아 지금의 황폐함을 덮어주는 것, 진정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추억하게 해주는 것이다. 손때가 묻어 생채기가 나고 얼룩이 져 있어도 새롭고 화려한 가구에서는 결코 위로받을 수 없는 데면데면함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흐뭇한 웃음과 뿌듯함이 밀려오게 하는 것, 바로 그런 것이다.

해마다 5월이면 가정의 달이라는 미명 아래 어린이들을 위하고 어버이들을 위하고 스승들을 위한 쇼핑이 상점가를 휩쓴다. 게임기에, 화려한 옷가지에, 온갖 상품들이 우리의 주머니를 유혹하고 평소에 등한시하던 ‘가정’에 잠시 봉사할 구실을 마련해준다. 음반가게 옆을 지나다 나는 어느 해쯤이면 아름다운 우리 동요가 훌륭하게 편집되고 제작되어 기꺼운 마음으로 선물할 수 있는 상품이 되나 하고 기대해본다. 진정한 동심을 아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지난한 문제를 끙끙대기 전에 80년의 전통을 가진 우리 동요를 먼저 살려주는 것이 도리이지 않겠나 싶어서이다.

素霞(소하)/ 고전연구가
씨네21 4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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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섬집아기'라는 노래를 아이에게 들려주길 좋아한다.
아주 귀에 익은 곡이지만, 내용은 듣는 이에 따라 슬프기도 하다.

가사를 생각하지 않고 들으면 한없이 아름다운 노래인데,
이 동요에는 삶이 담겨 있다. 고단한 삶과 엄마의 한없는 사랑.

우리 옛적 동요에는 이렇게 우리 어버이들의 삶이 묻어 있다.
귀가 닳도록 들었던 동요를 지금에 와서야 그 참맛을 안다.

오늘도 아이에게 이 노래를 들려준다.



섬집 아기

한인현 작사 / 이흥렬 작곡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 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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