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현대철학 발표문> 

  후설의 현상학 –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사이에서

  후설은 초기에 수학에 대한 연구로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시작하였지만, 점점 철학으로 연구 분야를 옮기면서 현상학이라는 독특한 체계를 구축하였다. 현상학의 여러 요소들과 그 태도는 이후의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현대철학에서 거장으로 평가받는 많은 사람들이 후설을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상학은 현대철학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철학사조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한다. 특히 후설의 철학은 현상학이라는 흐름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현상학에 대한 구상은 당시 후설을 둘러싸고 있던 학문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은 계몽주의의 기획과 구상, 즉 자연과학의 발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다. 자연과학의 발전이란 ‘모든 것의 자연과학적 해석’을 의미했고, 인간 또한 자연과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심리학이 등장하였다. 반대로 인간의 정신성을 강조하며 철학과 인문학의 영역을 방어하려는 조류 또한 만들어졌다. 이들은 자연과학에 맞먹는 방법과 체계를 기반으로 인간의 정신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학문분과, 즉 ‘정신과학’을 만들고자 했고 그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여러 이론적 작업을 해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후설은 어떤 특수한 학문과 그 특수한 학문이 사용하는 개념, 그리고 그 개념들로 이루어진 연역적 체계를 사용하여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비판했다. 물론 그가 각 개별학문들이 자신의 고유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탐구를 수행하는 것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후설이 비판하려 했던 것은, 개별학문이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말하고, 그 방법을 사용해 드러낸 특정한 세계를 객관적인 세계라고 주장하려는 시도였다. 특정한 방법은 이미 그 안에 세계를 예비하고 있고, 따라서 특정한 세계 밖에는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방법에 의해 드러난 전체 세계의 특정한 모습일 뿐, 그것이 세계 자체이거나 혹은 그 세계가 인간에게 드러날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후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현상학은 각 개인에게 드러나는 그 모습이 전부라고 말하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현상학을 통해서 세계의 가장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정신의 작용이기 때문에 세계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후설은 이 점을 아주 조심스럽게 주장하며, 상대주의를 대표하는 정신과학의 흐름 또한 비판한다. 정신과학을 세우려 했던 이들은 주로 인간의 정신이 활동해온 결과들의 축적이라는 점에서 역사, 문화 등을 강조하며, 또한 현세대의 인간의 정신도 이들에 비추어 고찰할 수 있다고(고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을 역사와 문화의 경계 안에 한정시키는 결과를 낳고 만다. 후설이 보기에 인간의 정신은 이 영역들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보편성은 여기에서 갖추어진다.


  현상학의 목표와 대상 – 선험적 자아의 구조, 현상

  당시 주류이던 학문적 경향에 대한 위와 같은 비판은 각 개별학문들이 공리로 삼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 즉 토대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각각의 세계를 담고 있으며, 그 세계는 몇몇의 가장 기초적인 근거들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그 근거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투명한가? 그렇지 않다면, 개별학문들이 기초로 삼는 그 근거들은 또 무엇을 토대로 삼고 있는가? 후설의 현상학은 이 지점을 짚어내어, 모든 개별학문들이 토대가 될 수 있는 진정한 토대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그의 문제의식은 『성찰』에서 데카르트가 보여주는 의심과 매우 유사하다.

  정신과학에 대한 비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설은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보편적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고 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의 철학적 논증을 펼쳤던 인물로 보아야 옳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특정한 개별학문의 연구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후설이 말하는 보편적 세계란, 자연과학에서 가정하는 것처럼 인식주체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그리고 주체와 대상이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이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객관적 세계가 아니다. 그에게 보편과 객관은 다른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보편적인 세계는 어떤 차원에서 확보할 수 있는가? 후설은 전반성적인 영역이라고 답한다. 학문적 인식을 포함한 모든 인식은 반성의 산물이다. 반성을 통해 인간은 대상을 판단하고 규정한다. 그 형식은 수학적일 수도 있고(저것은 부피가 1ℓ이다), 실용적일 수도 있으며(저것은 내가 물을 마실 수 있게 도와준다), 미학적일 수도 있다(저것은 예쁘다). 그러나 이런 판단과 규정은 대상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고 내 의식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이 유의미한 것(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되는 과정에는 근본적으로 정신이 참여한다 -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그가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주목하는 것은 그 의미들로 이루어진 세계 자체가 아니라 그 의미가 부여되기 전 가장 즉자적인 세계 – 즉 전반성적인 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의 활동이다. 이 활동을 수행하는 자아가 경험 이전의 자아, 즉 선험적 자아이다.

  이 선험적 자아가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결합한 장소를 후설은 현상이라고 부른다. 현상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인식의 근원이며, 학문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학문의 대상은 바로 현상이어야 한다. 그는 철학을 바로 이 현상에 대한 학문, 즉 현상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을 자신의 체계를 표현하는 단어로서 선택하였다. 모든 개별학문들은 현상의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대상으로서 끄집어낸다. 이것은 그 학문이 전제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태도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개별학문들은 객관적 대상에 대한 탐구이기보다는 특수한 정신적 태도와 절차의 산물이다. 현상학은 그 모든 가능성들을 담고 있는 현상에 대해 연구함으로서 모든 특수한 정신적 절차들을 예비하고, 그 학문들이 학문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토대를 닦는 학문이 된다.

  따라서, 현상학의 정신에 따르면 세계는 주체의 능동적인 구성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외부의 객관적 존재자들의 여러 특성을 지각함으로써만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선험적 자아는 근본적으로 지향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대상에게 다가가고, 대상은 선험적 자아에게 다가온다. 이 관계에서 주체의 특성은 ‘무엇에 대한 의식’, 즉 지향성으로 정의된다. 반면에 현상인 대상은 형상(eidos)에 근거해 반성을 통해서 판단하고 규정될 수 있다. 후설의 입장에 따르면 세계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선험적 자아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자아가 현상을 멋대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며, 대상 또는 세계를 어떤 태도로 고찰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그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본질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형상적 학문이다.


  현상학의 방법 – 판단중지, 현상학적 환원, 기술

  현상학의 연구영역인 전반성적인 세계와 마주하기 위한 첫 단계는 판단중지이다. 후설에 따르면, 각 개별학문들은 자신들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 객관적 세계는 선험적 자아의 다양한 정신활동의 산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보편적 세계는 아니다. 이 세계에 매이는 한, 그 세계를 구성해낸 방법, 즉 정신의 과정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개별학문들의 토대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 존재의 가정을 거부해야 하며, 그럴 때에만 정신이 그 자신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차원으로 이동한다. 그는 이 단계를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 철학의 용어를 빌려와 판단중지(epoche)라고 표현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선험적-현상학적 환원이다. 판단중지는 판단과 규정에 의해 대상에 부여되었던 모든 의미들을 세계에서 걷어낸다. 이를 통해 세계는 하나의 전체로서 뭉뚱그려져 드러난다.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은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들의 보편성을 의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으면서 그 전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나누었던 정신의 절차가 걷어진 존재자는 온전히 그 모습을 보전한다. 이 때 모든 인식은 이 하나의 전체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 전체를 의미와의 관계 속에서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선험적-현상학적 환원 이후에는 모든 분절적 인식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이 상황에서 인식대상은 모두 인식하는 자아의 인식활동에 따라 구성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인식대상의 입장에서는, 현상학적 환원 이후의 인식의 주체인 선험적 자아와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선험적 자아는 자신의 내부에 인식대상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며, 인식대상은 선험적 자아 내부에서 그와 구분할 수 없는 내적 구성물이다.

  이 단계에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자유로운 변환이다. 객관적 대상이 구성에 의해 생성된다는 것이 드러난 이후, 의식은 같은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된다. 그 방식은 온전히 의식의 방향에 달려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 대상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다른 대상으로서 무한히 열려있게 된다. 후설에 따르면, 이 자유로운 변환에서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닌 대상의 형상이다. 의식의 구성 방식에 따른 무한한 변환 속에서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 그 무엇이 인식과 판단의 기초가 되는 가장 근본적인 존재라는 것을 변환 속에서 깨닫는다.

  그러므로 전통적 의미에서의 이성은 이 차원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 이성은 판단하고 규정하는 인간의 능력이므로, 판단 이전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전체인 세계,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세계를 이성이 아닌 직관에 의해 매개 없이 대면한다. 직관에 의한 대면은 선험적 자아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능력이다. 직관은 인식의 기초를 이루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모든 판단에 작용하여 대상을 우리의 정신에 드러낸다. 직관의 능력은 정신을 형상과 마주하게 한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현상학적 연구의 표현방법은 기술이 될 수밖에 없다. 기술은 전체인 세계의 모습을 드러나는 그대로 적는 것을 뜻한다. 기술의 방법에 대비되는 것은 설명의 방법이다. 설명은 세계가 왜 그렇게 변화하는가에 대해서 표현한다. 따라서 한 사태와 다른 사태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이러한 표현은, 설명이 자연과학의 설명방법인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판단과 규정, 여러 가지 개념들을 사용해야만 하며 이성이 개입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기술의 방법은 어떻게 세계가 드러나는지에 대해서 표현한다.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는 중요하지 않으며, 때로는 인과관계나 논리학의 법칙을 무시하는 모순적인 표현도 허용된다. 후설에 따르면 세계는 근본적으로 정신의 능동적인 구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법칙에 의한 설명이라는 정신적인 틀이 오히려 세계의 진정한 구조를 그려내는 데 제한을 가할 수도 있다.


  현상학의 객관성 - 상호주관성

  위와 같은 비분절적 상태로 이끌 수 있는 능력 혹은 이미 그렇게 된 상태를 내재적 초월성이라고 한다. 내재적 초월성은 신이나 어떤 외부의 전능한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 능력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외재적'인 초월성과는 구별된다. 그런데 이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에서 인격으로서의 자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모든 구분이 사라진 세계에서 어떤 구분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은 선험적 자아가 태도를 바꾸는 것뿐인데, 선험적 자아가 인격으로서 태도를 취하지 않는 한 인격으로서의 조건을 갖출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과 선험적 자아의 작동구조는 너와 나의 구분, 즉 자신과 타인의 구분까지 없애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의 철폐는 역설적으로 아주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상호주관성이다. 후설은 이 말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즉 주체와 대상이 결합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들은 전반성적 구조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만 자신의 인식의 토대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만을 확신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면 그 인식의 토대가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인식의 구조이며 선험적 자아의 세계의 수준을 토대로 삼아 소통이 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후설의 철학에서 객관적 세계는 특정한 정신적 태도의 산물로서만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상호주관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자아는 인격으로서의 한 개인이 통찰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없는 수많은 인격으로서의 개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경험 이전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후설이 말하는 객관성이란 존재 또는 존재자의 객관성이 아니라 인식의 객관성이기 때문에, 현상에 드러나는 과정이 동일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객관성이라는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경험은 언제나 상호주관적이다.


  현대 사회의 위기

  이러한 상호주관성은 인간의 정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성찰을 통해 확보한 상호주관성은 인간 사이의 소통에 중요한 단초가 된다. 후설은 현상학의 구상이 자신 이외의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닫힌 철학이라는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독특한 상호주관적 영역을 개척하였다. 또한 이것을 단순히 인식론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대한 통찰의 이론적 도구로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진단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당시 유럽 사회는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건전한 공동체를 성립하기 위한 소통에 필수적인 상호주관성은, 현상학적 방법에 따라 깊은 숙고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경지처럼 느껴지지만, 누구나 직관적으로 모든 삶에 걸쳐서 바라보고 있는 이 세계의 자명한 진실을 가리키는 결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던 자연과학에 대한 신봉은 이와 같은 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 그 방법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은 결국에는 사회가 파괴되는 위기를 정신적인 수준에서부터 발생시킨다.

  자연과학이 위기를 초래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세계를 도외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선험적 자아가 참여하는 세계, 즉 현상의 세계이다. 하지만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은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자신이 보여주는 세계가 바로 세계의 진정한 모습인 것으로 호도한다. 이 세계가 반성 이후의 모습처럼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그것을 숫자로 표시하여 접근하려는 태도를 후설은 자연주의적 태도라고 부르면서 강하게 비판한다. 자연주의적 태도에 의해 진실로 존재하는 세계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고, 궁극적으로 자연주의적 태도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태도로서 자리를 잡으며 자신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엄밀하게 자신을 비판하며 가장 자명한 토대에서 시작해야 하는 학문적 작업이, 단순한 정확함을 확보하는 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정신의 위기란, 이성의 기능인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그 능력을 현재의 정신적 경향을 강조하는데만 끊임없이 사용하는 실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후설이 보기에 현상학은, 그가 정립한 하나의 철학적 사조 또는 정신의 방법론인 것과 동시에 사회의 해악을 방지하기 위한 일련의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단순히 특정한 정치세력에 반대하거나 억압하는 방식으로는 지속적으로 도래하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그 위기는 가장 심층적인 측면, 즉 정신적 측면에서 유래하는 위기이며, 따라서 그 극복 또한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모든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현상들은 철학의 표현이었다. “유럽인의 진정한 정신적 투쟁은 철학 내적인 투쟁의 형식을 띄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참고문헌

김태길 외, 『현대사회와 철학』, 문학과지성사, 1981
Richard Kearney, 『현대 유럽철학의 흐름』(곽영아, 임찬순, 임헌규 옮김), 한울, 1997
W. Marx, 『현상학』(이길우 옮김), 서광사, 1989 


댓글(6)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9-24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효진 2011-09-24 16:16   좋아요 0 | URL
선택한 건 아니고 선생님의 강요로 첫 발표를... 맡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분야는 아니고요.

음... 현상학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현상에 대한 학문(...)이겠습니다. 후설의 저서는 『데카르트적 성찰』 하나밖에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가 독일관념론의 전통에서 여러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더라고요. 초월(선험)적이라는 말의 의미도 그렇고, 현상이라는 말도 그렇고요.

칸트가 그런 말을 한 건 어느 맥락인지 저는 잘 몰라서... 헤겔은 정신현상학이라는 말을 썼는데, 현상학이라는 말보다는 정신이라는 말에 강조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 일반의 정신이 전개되는 과정을 밝혀내겠다는 의미인 것 같아요. 현상은 정신이 자기를 현현해서 나타나는, 일종의 부수적인 것?이겠고요.

반면에 후설에게 현상은 의식(정신?)이 지향하는 것이라, 의식과 현상은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현상에 대한 연구는 곧 의식에 대한 연구이고, 현상학은 의식과 현상이 상호의존하는 관계 또는 상호발생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가 됩니다. 그가 의식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지향성인 것에서 이런 면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은 처음과 끝이 있는 이론체계는 아닌 것 같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방법론이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상학의 연구를 발표하는 형식이 '기술'이라고 후설은 주장한다고 하는데, 사실 말이 좋아 기술이지 그냥 생각나는대로 막 적으라는 것과 별 다를 게 없는 이야기죠. 소설에서 흔히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 같은거요.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을 차용하고도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데리다 등등의 전혀 다른 학문적 경향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용은... 음... 저게... 저렇게 읽고 그냥 머리에서 생각나는대로 정리한거라... 상호주관성 부분은 『데카르트적 성찰』을 읽고 쓴 것입니다.

2011-09-24 1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효진 2011-09-25 02:28   좋아요 0 | URL
저도 모르겠어서...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방법론이다! 라는 것입니다. 후설만의 독특한 체계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방법의 토대를 닦은 것이죠.

차이점이라면, 후설은 초점이 인식론적인 부분이고, 인식을 통해서 존재가 생성(자각?)된다고 보는 반면에, 하이데거는 존재론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고, 인식 이전의 존재(자)들과 그 존재(자)들의 양식과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 표현방법에 있어서 기술적이라는 점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공통적이고요. 이 정도가 예전에 『데카르트적 성찰』과 『존재와 시간』을 들여다보면서 내린 결론입니다. 두 사람의 문제나 어휘가 책을 꼼꼼하게 읽지 못하게 하는 터라(ㅠ.ㅠ) 저도 힘에 부칩니다......

바오 2015-03-2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기 힘든,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전후 맥락을 잘 전달해주어서 어리숙한 머리에 그래도 잘 넣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박효진 2015-03-28 18:41   좋아요 0 | URL
좋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전출처 : 알라딘신간평가단님의 "[인문/사회/과학] 분야 신간평가단에 지원해 주세요"

1. 안녕하세요. 9기 신간평가단이었던 박효진입니다. 중앙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중입니다.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 직업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신간평가단은 아주 좋은 기회와 경험이었습니다. 9기에 지원해서 합격하였고, 항상 충실하게 글을 써왔습니다. 해해가 끝나는 때까지 신간평가단을 하고 싶습니다. 이게 아주 흥미로운 일이라는 걸 알았거든요. 다시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2. 제가 신간평가단으로 쓴 리뷰 가운데 가장 추천수가 많은 글입니다. http://blog.aladin.co.kr/russell85/5013001 이택광, 『이것이 문화비평이다』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신간평가단을 하겠다고 지원 댓글을 달던 게 엊그제같은데, 벌써 마지막이라니... 아쉽고 짠하고 마음이 그렇습니다. 게다가, 다달이 좋은 책들은 더 많이 나오고 있고요. 이번 달에는 주목신간 고르기가 더욱더 힘들었습니다. 가리고 가려서 뽑은 이 달의 신간, 책 읽기 좋아진 계절이라 좀 두꺼운 책 위주로 선정해보았습니다. 

 

1. 안전, 영토, 인구 

  미셸 푸코의 말년 강의 가운데 하나입니다. 프랑스든 여기든 이제야 이 강의들이 출간되는 듯 한데요. 푸코는 삶의 권력(생체권력?)과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가장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철학자로 유명하죠. 그에게 안전(안보?), 영토, 인구라는 법적 규정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그리고 이것을 읽는 사람들과 이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이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참고도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 인정투쟁 

  벤야민, 아도르노, 하버마스 등이 형성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를 잇는 악셀 호네트의 대표작이 출간되었네요. 검색에 따르면 재출간인 것 같은데, 여튼 고전들은 언제나 읽혀야 하니까 이렇게 다시 나오는 건 아주 반가운 일이겠지요. 잘 알려져있듯이 인정투쟁은 헤겔의 사회철학에서 처음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고전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 호네트는 우리 사회를 비출 수 있는 거울이 될 수 있을까요? 

 

 

3.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목차를 보니 이슬람 세계를 중심으로 서술된 세계사인 것 같습니다. 역사, 문화, 사회 등을 통틀어서 서술한 이슬람 입문서들도 숫자가 많지 않은데, 이렇게 한 분야에 집중한 책이 나오는 것도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역사 쪽 책들을 보면서, 이번 달에도 유럽에 관련된 역사책들이 많이 눈에 들어왔는데, 한번쯤은 (우리도 거기에 소속되어있는) 비유럽에도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4. 러시아 문화사 강의 

  이 책을 선정한 의도는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선정한 이유와 비슷합니다. 유럽같지만 유럽 아닌 유럽, 마찬가지로 아시아같지만 아시아 아닌 아시아, 하지만 일명 도선생과 톨선생이라는 전세계를 뜨겁게 달구는 대가를 배출한 그곳. 충분히 흥미가 생기는 곳에 대한 적절한 입문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5. 일본, 한국 병합을 말하다 

  진보적인 성향을 띄는 일본 사학자들이 대한제국 병탄에 대해 발표한 논문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어쩌면 그 주체라고 볼 수 있는 그 공동체의 일원들이 어떻게 이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객관적 시선으로 우리를 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식품정치- 미국에서 식품산업은 영양과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매리언 네슬 지음, 김정희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1년 9월
29,000원 → 27,550원(5%할인) / 마일리지 1,450원(5% 적립)
2011년 09월 24일에 저장
품절
진화의 종말
폴 R. 에얼릭 & 앤 H. 에얼릭 지음, 하윤숙 옮김 / 부키 / 2011년 9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2011년 09월 24일에 저장
절판

장기 비상시대- 석유 없는 세상, 그리고 우리 세대에 닥칠 여러 위기들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 지음, 이한중 옮김 / 갈라파고스 / 2011년 9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2011년 09월 24일에 저장
품절

스파르타 이야기- 신화로 남은 전사들의 역사
폴 카트리지 지음, 이은숙 옮김 / 어크로스 / 2011년 9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11년 09월 24일에 저장
절판


2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렌트읽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정치사상가 아렌트

  아렌트는 그의 연구주제인 ‘전체주의’ 때문에 현대에 가장 주목받는 정치사상가 가운데 한 명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전체주의의 기원』, 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으로 알려져 있다. 『아렌트 읽기』의 지은이인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은 그에게 수학한 제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인정받는다는 아렌트 전기의 지은이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은 이 책을 고르는데 아주 중요한 정보이며, 동시에 이 책을 설명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책에는 아렌트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이 등장하고, 지은이가 아렌트와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도 간혹 등장한다. 또한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고 그와(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현재 체계적으로 정리중인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강의록과 편지에 대한 언급도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가 쓴 900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의 아렌트 전기의 축약본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단순히 그의 저서들을 요약, 정리한 것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애쓴 느낌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목차는 크게 네 부분으로 짜여있다. ① 서론을 대신한 그의 삶에 대한 지은이의 간략한 서술, ②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③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서술, ④ (현재도 진행중인 것으로 보이는) 『정신의 삶』에 대한 자신의 연구 성과. 하지만 이 네 부분이 무 자르듯이 똑 나누어지지 않는다. 아렌트의 문제의식은 분명히 전체주의로부터 출발하였으나, 그것을 실증적으로 다루지 않고 전체주의가 가능하게 된 인간의 삶의 특정한 상황과 연관지어 다룬다. 그 상황에 대한 연구가 바로 『인간의 조건』 의 내용이 된다. 『정신의 삶』 은 말년의 아렌트가 그 조건들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탐구와 자신의 사색의 결과를 정리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정신의 삶』의 결론은, (이 책에 따르면) 다시 ‘전체주의’로 돌아간다. 즉, 특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돌파해 나갈 수 있는 인간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서술인 것이다.

  따라서, 글의 처음에서 결론부터 일단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아렌트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치 현실에 대한 교범’ 역할을 하는 『전체주의의 기원』 에 대한 설명이 담긴 초반부에 비해서, 그런 교범의 역할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사유의 바다로 들어가는 후반부로 갈수록 논의가 깊어지고 넓어지며 어려워지는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아렌트의 사유의 역사의 일부이므로, 그리고 단순히 전체주의의 제도, 혹은 집권세력을 변화시키는 것 보다는 인간의 본질적 측면에서 어떤 능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앞으로 그와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을 줄이는 더욱 근본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리고, 아주 쉬운 말이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그래서 우리에게 더 귀감이 될법한 말들이기에 더욱 그 내용이 인상깊게 남는다. 나 스스로가 아렌트의 저서를 직접 읽어본 적이 한 번도 없기에, 이런 느낌이 더욱 강한 것 같다.


제 4의 책, 『혁명론』

  전체적인 인상과 더불어서, 이 책을 읽으면서 아렌트에 대해 생기는 호기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혁명론』 이라는 책이 어떤 내용일까 하는 궁금증이다. 이 책의 목차는 주요 저서 세 권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지만, 사실 이 책 또한 그 세 권에 못지않은 빈도로 등장한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다루는 부분은 정치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런 맥락에서 『혁명론』은 스탈린 체제(그리고 아마도 마르크스-레닌 주의의 핵심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체주의라고 규정했을 때 우리가 혁명의 모델로 삼아야 하는 실제 정치혁명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또한 『인간의 조건』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혁명이 전체주의가 되지 않기 위한 조건으로서 인간의 상황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이 구현되었을 때의 인간들은 어떤 태도를 갖추었는가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혁명론』에 대한 내용이 부각된다.

  이 두 맥락으로 미루어볼 때, 아렌트의 『혁명론』은 어떻게 혁명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정치적 변혁을 단순히 역사적으로 기술한 책은 분명히 아닌 것 같다. 반대로 혁명의 기초를 이루는 철학적 태도 내지는 정치구조를 바꾸기 위한 행동지침을 다루는 혁명의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한쪽에 치우친 책이었다면, 이 책은 위의 두 맥락에 모두 등장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미루어 짐작하기로는, 그 실체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지만 혁명의 순간에는 매우 중요한 혁명의 요소, 즉 ‘혁명의 정신’에 대한 기술일 것이다. 그 책을 보지 않았으니 이 또한 짐작일 뿐이지만.

  『아렌트 읽기』에 등장한 『혁명론』 언급을 바탕으로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아렌트는 정치적 혁명의 형태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고 한다. 하나는 프랑스 유형인데, 아렌트는 이 유형의 대표인 프랑스 혁명을 포함한 거의 모든 혁명이 이 유형을 따라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혁명에서는 혁명지도자들이 대중을 의도적으로 조직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미래를 선포하며, 그들의 행동이 어떤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청사진을 달성하기 위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윤리적 덕목을 내세워 혁명에 수반되는(혹은 지도자들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지배권력의 교체로 혁명이 완수된다.

  그런데 아렌트는, 이러한 유형의 혁명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아예 혁명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데,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지배-피지배의 구분이라는 정치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명분이 무엇이 되었든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정치와 거의 다를 것이 없다. 그가 보기에, 폭력을 동반하는 정치는 전체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그것은 사실상 인간에게서 정치적인 행위를 할 수 없도록 (아렌트가 쓰는 의미에 따른) 정치적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가 말하는 정치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능력이기에 정치적 감각의 마비는 곧 인간으로서의 자격의 상실을 뜻한다. 그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인민의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마비시키는 정치, 그것이 바로 전체주의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유형의 혁명이란, 혁명이 아니라 전체주의에 매우 근접해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또 다른 유형은 미국 유형이다. 아렌트는 이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우선 가장 단순한 이유는, 인민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폭력이 동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그것은 의도적 조직이 아닌, 자발적인 결합과 끝없는 토론에 따르는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미국 유형의 혁명의 특징은, 혁명의 지도자들(지도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의문스러운 어떤 ‘주도자’들)이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 즉 자신들이 꾸릴 정치공동체의 미래를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 공동체를 구성한 이후의 사람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영향 아래 놓일 (공동체 구성원 자신을 포함한) 미래의 세대들에게 내맡겨진다. 이것은 아렌트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감각을 보장해준다. 이 정치적 감각의 상호교차점이 정치적인 것의 장소, 즉 공공의 영역이 된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감각은, 그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보았던 ‘행위’개념, 즉 창조성 - 자유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다. 그 어떤 인간도, 어떤 행위를 할 때에는 그 행위에 전제되는 여러 상황들, 행동의 뿌리들이 있다. 그 뿌리란, 특정한 정치공동체가 지금까지 형성해온 행동 양식인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정치공동체 구성원 전체와 연관되어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결코 그것들이 그 행위가 어떤 모습일지 결정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혹은,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와 연관되어있지만 결코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어떤 모습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게 되고, 이것은 창조 – 자유 – 행위가 된다. 이 결정성을 승인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가, 정치공동체가 전체주의적 가능성을 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칸트주의자 아렌트

  이렇게 아렌트의 관심은 전체주의라는 일종의 정치적인 현상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 즉 창조 – 자유 – 행위라는 문제로 넘어오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긴 나머지 한 가지 호기심은, 여기에는 아렌트의 이름 만큼이나 고전적인 철학자들의 이름, 특히 칸트의 이름이 아주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유와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 아렌트는 칸트에게 배우고 또 그를 넘어서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고 할만큼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칸트 자체도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에 상당히 깊게 천착한 철학자이고, 역사철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세계적인 관점에서 정치적인 전망을 제시한 철학자인 만큼 칸트와 아렌트 사이에는 분명한 접점이 있다.

  가장 핵심적인 접점은 바로 ‘세계시민적 관점’일 것이다. 정치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칸트는 이전의 정치사상가, 또는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보편사’의 관점, 즉 이 세계의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어떤 관점에서 사고해보라고 제안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공통된 관점에서 역사를 통찰했을 때 특별한 공동체의 역사가 아닌 ‘보편사’가 드러날 것이라고 제언한다. 하지만 그 보편사의 순간(또는 역사의 종말)이 언제, 어떻게 도래할 것인지에 대한 말은 아껴둔 채, 그 때에 등장할 정부는 이미 존재하는 여러 공동체들이 각자의 권리, 즉 자유를 보장받지만 동시에 그 권리를 도덕의 이름으로 제한할 수 있는 느슨한 연대체가 될 것이라고만(되어야 한다고만?) 슬쩍 이야기한다.

  아렌트의 『혁명론』으로 이야기를 다시 돌리면, 미국의 건국은 칸트가 이야기했던 과정이 실제로 역사에 드러난 사건이 된다. 아렌트는 칸트의 관점을 미국의 건국의 사례를 들며 조금 더 급진적으로 끌고 간다. 즉, 칸트가 제안했던 보편사란, 사실 칸트 스스로도 그것이 정말 존재할까 확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제안한 세계적 정치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 즉 가장 구체적인 개인에서부터 최고 수준의 연대체에 이르기까지 미래를 창조해갈 능력 – 즉 자유를 지속적으로 보장하는 ‘그’ 정치체제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정치적 감각 – 역시 자유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렌트가 ‘자유’라는 개념은, 칸트가 ‘자율’이라는 말로 설명하려고 했던 것을 포함하며 동시에 자율을 추진하는 동기가 이성이 아닌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실천이성)은 자신의 행동의 원칙을 확립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도약 자체까지 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확립한 원칙이 실천이성이 아닌 또 다른 이성, 즉 순수이성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연과 필연, 자유와 자연의 모순이라는 고전적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칸트가 이 둘(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매개하는 인간의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판단력에서, 미학이 아닌 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자율을 통해 도덕적 원칙을 확립하면서도, 판단에 의해 그 원칙을 보편적 법칙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사고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곧 다른 이의 관점에 대한 고려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지은이는 이것이 『정신의 삶』에서 쓰지 못한 부분, 즉 ‘판단함’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전체주의 현상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한 그의 사유는 이렇게 자유에 대한 사색, 그리고 현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뛰어넘을 정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실상 현재 출판된 『정신의 삶』은 ‘사유’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를, 그리고 ‘의지’ 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두 학자는 그게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델 – 자유에 기반한 소통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세계시민적 인간상(소크라테스)의 사례, 그리고 이러한 정치가 가능하게 하기 위한 비이성적 능력에 대한 고찰의 좋은 사례를 남긴 선배 철학자(아우구스티누스)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가 진정 맺고 싶었던 결론, 그리고 제시하고 싶었던 것은 쓰여지지 않은 ‘판단함’이었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그리고 현실과의 접점

  이런 생각의 궤적을 따라서, 아렌트는 더 이상 정치사상가나 정치이론가가 아닌 정치철학자 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자가 된다. 나는 그를 전체주의 현상에 대해 다룬 정치사상가나 이론가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이런 구도는 상당히 흥미로웠고, 철학자로서의 아렌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을 던져주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해 짧게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보겠다. 첫째, 철학하는 사람들이 항상 강조하듯이, 그리고 아렌트가 그랬듯이, 이 책은 단순히 아렌트에 대한 입문서로 끝나지 않는다. 지은이는 분량이 많지 않은 이 책에 아렌트 철학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아내면서도, 동시에 ‘아렌트가 만약 지금까지 살아있었더라면’ 이라는 말로 운을 떼며 이것이 현재의 정치 현상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과감하게 적어내고 있다. 아렌트의 학문적 태도가 그랬듯이 매우 조심스럽게 제안하면서도, 그 틀이 매우 합리적으로 현상을 분석해낼 수 있는 도구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철학이 현실, 특히 현대의 정치와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지은이의 입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폭력에 매우 민감한 아렌트의 이론의 체계에 비추어 볼 때,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정치현상인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슬로건에 대한 비판은 매우 매섭다. 제국주의적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며 자기 안에 스스로 전체주의의 요소를 생성시켜나가는 미국에 대한 비판은 물론, 그것에 반대하기 위해 테러라는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며 그것을 자신의 세력을 결집하는 데 이용하는 무국적 테러 세력에 대한 비판 또한 놓치지 않는다. 양자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는 사람들은 모두 양측의 테러로 인해 겁에 질려 정치적 감각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적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그대로 하게 된다.’ (특히 미국의 경우) 아렌트의 관점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 자체가 그 사회가 완전히 전체주의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언제든지 전체주의 현상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다. 분명히 현재 무차별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 또 그것은 철저하게 ‘아렌트 연구자’인 지은이의 관점에 한정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렌트는 (이 책의 내용으로만 비추어보자면)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며, 그가 이상적인 정치로 제시한 민주주의의 내용은 상당부분 미국의 민주주의를 모델로 하고 있다. 반면, 건국 당시가 아닌 그 이후의 미국, 특히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아렌트 말년의 미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분명 아렌트 스스로도 비판적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체주의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거나, 혹은 ‘전체주의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일 뿐 그 자체가 전체주의는 아니라고 했던 점 같은 것을 미루어보면, 혹시 그가 미국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나 스스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정리를 해야할지 몰라 그냥 의문부호로만 남겨두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