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연구 발제. 존 롤즈, 『사회정의론』(황경식 옮김) 2장 요약>

   정의론은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 첫째는 선택될법한 다양한 원리들을 정식화하는 부분, 그리고 그 원리들 가운데 실제로 어떤 것이 채택될지를 논증하는 부분이다. 이 장에서 논의되는 것은 첫째 부분 가운데서 정의의 원리들에 관한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제도와 형식적 정의, 절차적 정의의 종류, 좋음(the good)에 관한 이론의 위치, 정의의 원리들이 평등주의적이라는 말의 의미 등등이다.

 


   10.
제도들과 형식적 정의

 

   사회적 정의의 주제는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다.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는 권리와 의무를 할당하고 이득과 부담을 적절하게 분배하는 방법을 규정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권리와 의무, 권한과 면책권 등을 동반하는 공직이나 위치 등을 규정하는 공적인 규칙체계로서 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제도는 허용되거나 금지되는 행위의 목록을 포함하며, 위반했을 때 그에 관한 처벌이 뒤따른다.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는 이런 제도들 사이의 조정이다. 제도는 추상적인 제도와 구체적인 제도로 나눠진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제도에 관해서 정의로운가 부정의한가를 이야기하려 한다면 우리는 구체적인 의미에서 현실화된 제도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추상적인 제도가 정의로운지 그렇지 않은지는 보통 그것이 현실화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일지를 생각해보고 그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도는 언제 존재하는 것일까
? 제도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제도를 구성하는 규칙의 체계에 따라야 한다는 공공적인 이해에 부합해 이행되는 상태에서 존재한다고 말해질 수 있다. , 제도는 다양한 실천들을 일일이 규정하며, 이를 일관된 계획 아래 조직한다. 또 이 제도에 동의한 특정한 사람들은 상호적으로 이것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실제로 그것을 수행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한 제도의 영향 아래 놓여있고 그것에 동의했다면, 그는 그 제도 속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제도가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안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서로가 제도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서로가 알고 있으며,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는 실제로 시행되는 제도들에 비추어 어긋나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관해 논의할 때 생각할 수 있을 법한 합리적인 가정이다. 이것이 제도의 공공성(공지성)이다. 이것이 잘 구현된 사회는 잘 조직된(well-ordered)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허용되고 금지되는 행위가 무엇인지 알고, 정의가 무엇인지에 관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정의로운 것과 부정의한 것에 관한 이해가 공적이다. 이런 공공성은 계약론자들의 이론에서 핵심적이다.


   우리는 몇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 우선 제도를 구성하는 규칙들과, 특정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수행되는 전략과 격률을 나눠보자. 전략과 격률은 내가 내 관심사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분석한 것을 토대로 구성된다. 이는 이미 특정한 제도와 규칙, 정의에 관한 관점을 가정한다. 반면 제도는 이런 전략과 격률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목적들을 추구하게끔 조직해야 한다. 이는 의도되거나 예측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제도 속에서 펼쳐지는 전략과 격률은 제도를 평가하는 데 좋은 지표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제도는 아니다. , 규칙과 제도, 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나눠보자. 이 셋은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어느 한 쪽이 부정의하다고 다른 것들까지 반드시 부정의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정의는 규칙들이나 제도들의 묶음으로부터 발생하는 일종의 결과다. 우리는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매우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사회를 이렇게 바라본다는 것은, 크고 작은 맥락에 따라 제도를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보통 정의는 기존하는 의식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 우리들이 실제로 알고 있는 것 가운데서 명백하게 부정의를 저지르는 사례들이 많고, 그러므로 정의는 언제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관해 논의하기로 했으므로, 논의의 방향을 이런 거대한 사례연구로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체계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실제로 정의에 관한 어떤 생각이 있고, 그와 함께 제도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가정에서 보이는 내용은 그 제도의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점에서 정의에 관한 이론을 함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만약 우리가 편중되지 않고 일관되게 관리되는 제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정의로운 것일까? 이런 상황을 형식적 정의라고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공정함 내지는 공평함을 정의에 관해 생각할 때 항상 떠올리곤 한다
. 이 말은 법률이나 제도가 사람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공평하고 일관되다는 것은 특수한 경우에 관해 다룰 때 고려되는 부적절한 고려사항들을 판결 또는 사회적 권위와 결부시키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물론 아주 말도 안되는 제도가 공평하고 일관되게 관리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제도가 임의적으로 운영되는 것보다는 낫다. 제도가 공평하고 일관되게 관리된다면, 그에서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은 그 제도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하면 보호할 수 있는지를 알고, 그에 알맞은 전술을 세울 수 있다. 반면에 제도 자체가 임의적으로 관리될 경우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런 원리에 따라, 형식적 정의는 결코 정의롭다고 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어떤 것을 정의의 원리들에서 배제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밝히기에
, 일반적으로 편파적이고 제멋대로인 제도는 거의 모든 경우에서 부정의하다. 그런 제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를 경멸하는 것을 체득하며, 이렇게 성장한 사람들이 만든 제도가 편중되지 않고 일관될 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제도는 양심은 잠재우고 임의성만 늘린다. 반면 편중되지 않고 일관된 제도는 그 제도 아래에서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을 편중되지 않고 일관되게 대하려는 욕망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형식적 정의가 지켜지는 제도 속에서 본질적인 정의를 찾기가 더욱 쉬울 것이라는 주장은 지지를 받는다.

 


   11.
정의에 관한 두 원리들

 

   정의에 관한 두 원리는 잠정적인 형식으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이 원리는 가설적인 것이다. 이후의 논의에서 이것이 단순히 가설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 해명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여러 단계를 거칠 것이다. 두 원리에 관한 첫 번째 진술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각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한 비슷한 자유와 양립하는 가장 넓고 기본적인 자유를 향한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둘째,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들은 그들(불평등들)(a) 모든 이의 이점이 되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되고, 동시에 (b) 모두에게 열려있는 위치들과 공직들이 덧붙여지도록 조정된다. 이 원리는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적용되는 것이다.


   두 부분은 각각 기본적 자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나눠진다는 것을 보장하는 부분과
,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을 규정하는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 원리가 보장하려`는 기본적 자유란 발화와 집회의 자유, 양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개인적인) 사유재산을 가질 권리에 따라오는 한 사람의 자유, 그리고 법의 규칙의 개념에 의해 정의된 것으로서 임의적인 체포와 압류로부터의 자유 등과 함께인 정치적 자유(선거권과 피선거권)를 가리킨다. 두 번째 원리는 수입과 부의 배분 그리고 권위, 책임과 명령의 연쇄에서 차이를 사용하도록 하는 조직들의 고안에 적용된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이뤄져야 하며, 권위를 갖는 직위는 모두에게 열려있어야 한다. 이 둘 사이에는 순서가 있으며, 이를 통해 어떤 사회적, 경제적인 보상도 평등한 자유의 제도를 정당화하거나 보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정의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 즉 불평등한 분배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한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생각의 한 특수한 경우이기도 하다.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는 사회적으로 기본적인 좋은 것들을 분배한다
. 이들은 한 사람의 인생을 계획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것들로서, 권리와 자유, 힘과 기회, 수입과 부 등으로 단순화된다. 우리는 이들이 공평하게 분배된 최초의 상황을 가정할 수 있는데, 이는 어떤 상황을 개선하는 데 기준이 된다. 만약 이들을 불공평하게 분배함으로써 이런 가설적인 시작점의 측면에서 나아지게끔 한다면, 이 불공평함은 정의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에도 부합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본적 자유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수입증가를 서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널리 퍼져있다. 정의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은 이것을 방지하지 않는다. 반면 정의에 관한 두 원리는 이런 교환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조건에서 기본적 자유가 우선한다는 두 원리의 순서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정의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에 미뤄봤을 때 이렇게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것이 더 특수한 경우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 이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이 두 원리들을 제도에 적용하면 특정한 결과들이 나온다
. 우선 권리와 자유는 기본적인 구조의 공공적 규칙에 의해 규정된다. , 자유는 사회적인 것이다. 첫 번째 원리는 자유를 규정하는 모든 규칙들은 그 제도의 영향 아래 놓인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돼서 가능한 한 가장 넓은 범위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자유에 제한이 놓이는 경우는 오직 다른 사람의 자유와 양립할 수 없을 때 뿐이다.


   그리고 정의의 주제가 구체적인 조건들을 최대한 고려하지 않은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인 것과 마찬가지로
, 우리의 논의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인 조건들이 거의 고려되지 않은 대표적 사람이다. 그는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가질만한 합리적인 기대치들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두 번째 원리에서 불평등한 분배가 적용되는 대상은 대표적 사람이다. 만약 특정한 구체적인 사람에게 재화를 몰아주는 것으로 두 번째 원리를 생각할 경우, 그것은 더 이상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관한 생각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재화를 몰아주는 일이 좋은 효과를 거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옳은 것과는 별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두 번째 원리가 의미하는 것은, 만약 불평등이 허용된다면 그 불평등으로부터 모든 대표적 개인들이 이익을 보고 그러므로 그런 불평등에 관해 모든 대표적 개인들이 합리적으로 동의해야만 그 불평등이 정당하다는 점이다. 공리의 원리은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손해가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이익으로 벌충되는 것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정의에 관한 두 원리는 이런 벌충을 허용하지 않는다.

 


   12.
두 번째 원리의 해석

 

   두 번째 원리에 들어가 있는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말과 모두에게 직위가 열려있다는 말은 애매하기 때문에, 이것이 정확히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규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는 각각이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고, 그러면 두 번째 원리는 총 네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정의에 관한 첫 번째 원리는 충족되고 있다고 가정한다. 또한 경제체제는 자유로운 시장 체제라는 것도 가정한다.

 

모든 이의 이점

공평하게 열려있다

효율성의 원리

차이 원리

I.재능에 열려있는 경력

자연적인 자유의 체계

자연적인 귀족지배

II.공정한 기회의 평등

자유로운 평등

민주적 평등

 

   먼저 자연적인 자유의 체계에 관해 살펴보자. 이 체계는 효율성의 원리를 충족시키는 기본적인 구조(즉 제도들 간의 조정)가 있으며 또한 직위들이 재능을 가진 자들에게 분배될 경우 정의롭다고 간주하는 체계다.


   효율성 원리는 기본적 구조에 적용할 수 있도록 정식화된
, 최적 상태에 관한 파레토 원리이다. 여기에서 최적의 상태란, 어떤 사람들을 빈곤하게 하지 않으면서 어떤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 가능성이 더 이상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이것을 분배의 문제에 적용해보면, 어떤 특정한 분배의 방식이 그 이외에 다른 사람들을 더 불리하게 만들면서 또 다른 사람들을 더 유리하게 만드는 방식이 없는 경우 그 방식은 최적의 분배의 방식이다. 생산의 문제에 적용해보면, 고정적인 투입을 이용해서 다른 상품을 더 적게 생산하지 않고 동시에 또 다른 상품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없다면 최적의 상태이다. 이 원리에 비춰봤을 때 생산과 분배가 비효율적이라는 것은, 어떤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서 다른 사람들을 유리하게 만드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받아들일법한 원리 가운데 하나다.

효율성의 원리

 

   그림 3은 일정한 재화를 두 사람에게 분배하는 방식의 집합을 나타내는 그래프다. , 어떤 한 사람(X1)이 가져갈 재화의 양을 기준으로, 두 사람(X1X2)에게 분배될 재화의 상대적인 양을 나타낸 것이다. 곡선 AB는 파레토 최적의 상태를 만족하는 점의 집합이다. X1a만큼 가져간다면, X2는 최대 b만큼 가져갈 수 있으며, 만약 실제로 이렇게 되었다면(D) 이는 최적의 상태다. 그러므로 최적 상태를 만족하지 못하는 그림 4EF는 최적 상태가 아닌데, 이는 CD에 대해서만 그렇다. CD는 모두 최적상태이므로 비교가 불가능하고, EF 사이의 비교도 불가능하다. EF는 위로 옮겨가든 오른쪽으로 옮겨가든 개선의 여지가 있다. E의 경우 그 개선의 여지가 있는 분배의 방식의 영역이 빗금친 삼각형으로 나타난다. 이 이외의 다른 영역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또한 D의 경우, D는 사각형 ObDa 안에 있는 모든 분배의 방식보다 우월하지만 그 밖의 다른 점(즉 분배의 방식)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같은 논증은 효율성의 원리에만 의지했을 때 가능한 논증이다
. 우리는 잠정적으로 X1X2가 똑같은 재화를 가져가는 분배의 방식의 집합을 공평한 분배로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것이 그림 4의 점선이다. 만약 이것을 우리가 공정한 분배라고 가정한다면, 점선과의 거리에 의해서 그 분배의 방식이 얼마나 공정한지를 판별해볼 수도 있다.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원리들은 바로 이런 고려를 집어넣어 분배의 방식을 고안한다.

 

   효율성의 원리에서 최적의 분배 방식이 여러 개인 이유는 그 정의 때문이다. 한 사람이 모든 좋은 것을 가져간다고 가정하면, 그 사람에게 손해를 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분배의 방식은 없기 때문이다. 이를 교환의 측면에서 다시 설명해보면, 사람들이 교환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좋은 것들을 더 좋게 나누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잘 분배되었다면, 교환을 해서 좋은 것들의 위치를 바꾸려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는 분배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이 교환을 위해 내놓을 어떤 것이 없고 그래서 교환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서라도 효율적인 분배 방식이다. 이를 사회의 기본적 구조와 대표적 사람들에게 적용해보면, 권리와 의무 그리고 이득과 부담을 나눌 때 어떤 대표적 사람들에게는 손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어떤 다른 대표적 개인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그것이 최적의 분배 방식일 것이다. 정의의 첫 번째 원리에 의해서 기본적인 자유는 분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분배의 대상이 되는 좋은 것들은 소득이나 부, 권력이나 협동적인 활동을 규제하는 권위 등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 이런 수많은 효율적인 분배의 방식 가운데서 어떤 것을 정의롭다고 해야할지를 선택하고, 왜 그런지를 논증하는 일이다. 몇몇 사람들이 좋은 것을 다 가져가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리며, 그러므로 우리는 직감적으로 효율성을 정의의 원리로 삼는 것이 문제가 있음을 느낀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효율적인 분배의 방식 가운데서 정의롭다고 할만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정의로운 것과 효율적인 것 모두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단계에서 우리는, 적어도 효율성의 원리만으로는 정의로운 기본적 구조가 어떤 것인지 규명할 수 없다는 것은 알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자유의 체계는 효율성의 원리에 제한을 거는 조건을 제시한다
. , 특정한 효율적 분배는 자유로운 시장 경제 체제 안에서 가정되는 것들, 즉 최초의 소득, , 재능 등의 분배에 의해서 달성된다. 또한 자유로운 시장에서 가정되듯, 모든 사람들이 유리한 사회적 공직을 제한 없이 얻을 수 있다는 형식적인 기회의 균등이 보장된다. 이 두 가지가 자연적인 자유의 체계에서 정의로 간주될 제한 조건들이다. 그러나 최초의 분배는 시간이 갈수록 여러 요소들이 영향을 주면서 반드시 변화한다. 그리고 이런 변화 가운데 상당수는 개인의 능력에 달려있다기 보다는 일종의 도덕적 운의 영향이 훨씬 크다. 따라서 자연적인 자유의 체계는 임의적인 운이 분배를 좌우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부정의하다고 간주할 만하다.


   정의에 관한 두 번째 원리에 관한 자유로운 평등이라는 해석은 이런 상황을 교정하기 위해서 공정한 기회의 평등이라는 제한 조건을 추가시켰다
. 이는 유리한 직위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형식적이지 않고 실제로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 이 해석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러므로 비슷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비슷한 수준으로 살아야 하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그 재능을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재능 이외의 요소가 그들의 삶의 비전을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연한 요소들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시장 체제와 그것을 지지하는 효율성의 원리에 좀 더 근본적인 제약을 가해야 한다. 이 방식은 자연적인 자유의 체계보다는 진전되긴 했지만,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인 재능에 의해서 생기는 소득의 차이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미진하다. 재능 역시 우연적 요소에 속하고, 그런 점에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운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이런 재능들이 주변 환경에 의해서 잘 계발되거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이런 재능을 어떤 방향으로 계발할지 그리고 그런 의향을 한 개인이 가지게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환경에 상당히 의존한다. 따라서 재능이 비슷한 사람들에게 비슷한 삶의 비전을 보장해준다는 것은 실제로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우리가 정의에 관한 원리를 확립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우연적 요소, 운을 분배를 결정하는 요소에서 배제하는 데 있다.


   자연적인 귀족의 지배는 형식적인 기회의 균등 이외에 자연적인 요소를 분배의 방식에서 배제하려는 노력은 없지만
, 재능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이익을 얻는 것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상태가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의해서 제한된다. 재능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상태에 있는 것은, 그들의 상태가 개선되지 않을 때 다른 사람들의 상태도 개선되지 않을 때에만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 또한 불안한 것인데, 자연적인 귀족의 지배 역시도 분배에 우연적인 요소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호무관심한 합리적인 대표적 개인들이 모여서 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결정하려고 할 때 여러 요소들의 분배에서 우연적인 요소를 배제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정의에 관한 두 번째 원리의 해석은 민주적 평등성이 최선의 선택이다.

 


   13.
민주적 평등성과 차이 원리

 

   민주적 평등성은 공정한 기회 균등과 차이 원리의 결합이다. 차이 원리를 통해서 효율성 원리가 지니는 우연적인 것에 관한 불확정성을 배제하며, 체계 내에서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최소수혜자)들의 기대치를 더 낫게 할 때에만 그 체계 안에서 이점을 가지는 사람들의 보다 높은 기대치가 정당화된다.

차이 원리

 

   두 사람 사이의 분배의 방식을 나타내는 그래프를 그렸을 때, 차이 원리는 두 사람의 처지가 모두 다 낫게 해주는 그런 방식이 없다면 평등한 분배의 방식이 없다는 것을 표방하는 원리다. 그렇기 때문에 효율성의 원리를 나타내는 그래프와는 달리, 차이 원리를 만족하는 점들의 집합은 45도 각도의 그래프와 수직, 수평선으로 나타난다(그림 5). 이는 한 사람의 기대치와 처지가 나아지더라도, 다른 한 사람의 기대치와 처지는 별로 나아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 6을 보자. 만약 X1을 가장 이점이 많은 대표적 사람의 기대치, X2를 가장 이점이 적은 대표적 사람의 기대치라고 했을 때 곡선OPX1의 기대치에 따른 X2의 기대치의 관계 즉 분배의 방식의 집합이다. X1의 기대치가 너무 많을 경우 X2의 기대치는 당연히 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위로 볼록한 곡선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 곡선의 가장 높은 부분 a는 가장 이점이 적은 대표적 사람의 기대치를 가장 많이 충족시켜주는 방식에서 가장 이점이 많은 대표적 사람들의 기대치이다. , a 지점에서 분배의 방식이 가장 적절하다.


   그림
7은 재화가 일정할 때 가장 이점이 많은 사람과 가장 적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래프다. 이는 차이 원리보다 덜 평등주의적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림 8을 보자. 원점에서 출발한 그래프와 교차하는 직선들은 동일한 재화를 나누는 방식에 관한 그래프다. 이는 고전적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그려진 것인데, 이들은 동일한 재화를 나누려는 경우에만 분배의 방식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대개 이점이 많은 사람보다 이점이 적은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에, 교차하는 직선의 그래프들은 X1 축에 좀 더 가까워진다. 곡선OP는 여전히 기여도를 나타내는데, 공리주의를 기준으로 하면 재화의 양이 가장 많은 a가 최적인 반면에 차이 원리는 b를 선택한다. 하지만 ab보다 불평등하다.

 

   차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현실적인 예를 들어보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같은 재산소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기업가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이 미숙련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많은 삶의 비전을 갖게 된다. 이것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차이의 원리에 따르면, 기업가의 대표적 개인의 기대치를 줄이면 미숙련 노동자의 대표적 개인의 기대치 또한 줄어들 경우에만, 그리고 이런 차이가 미숙련 노동자의 대표적 개인의 기대치를 늘릴 때에만 정당하다고 여겨진다.


   차이 원리에 관해 이뤄져야 할 몇 가지 논의가 더 있다
. 첫째, 이 원리가 적용된 두 가지 경우를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실제로 극대화된 경우이다. 이 때는 이점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바뀌어도 이들의 기대치가 더 나아지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이점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이점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에 공헌하고는 있지만, 최대치는 아닌 경우다. 앞쪽은 완전히 정의로운 사회라고 부를만하고, 뒤쪽은 대체로 정의롭지만 완전히 정의롭진 않다. 이점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과도하게 높은 경우, 이것이 감소하면 이점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질 것이고 따라서 정의롭지 못한 것이 된다. 차이의 원리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점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극대화되는 것이고, 이에 비추어 볼 때 이점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적어도 이점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에 공헌하는 것이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부정의하다. 이는 실제 그 적용에서 빈부간의 심각한 격차로 나타날 것이며, 민주적 평등의 원리마저도 무너뜨린다.


   그렇다면 민주적 평등이라는 해석에서는 효율성의 원리가 무시되고 있는가
? 효율성의 원리를 채택하고 있는 자연적인 자유의 체계와 자유로운 평등 해석에서는 효율성의 원리를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로 제한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우연적인 것이 정의에 개입할 여지를 많이 남기고 있다. 반면 민주적 평등이라는 해석은 우선 이런 여지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위에서 확인하였다. 또한 효율성의 원리와 양립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차이 원리를 만족시킨다면, 어떤 이들이 그보다 더 손해를 보지 않고 동시에 다른 이들이 그보다 더 이익을 볼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가 부정의할 경우 어떤 이들의 기대치를 감소시켜야하는 상황에 맞닥뜨릴 수도 있고 이것은 효율성의 원리와 모순을 일으키지만, 정의는 이에 우선하고 또 완전히 정의롭다면 효율성의 원리 또한 만족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둘째
, 차이 원리를 만족시키려면 단지 가장 이점이 적은 대표적 사람들의 기대치만을 극대화하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차이 원리가 실현되면 모든 사람은 이득을 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득을 본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기대치의 불평등이 이어져 연결되어있다면, 즉 가장 이득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를 향상시킨다면 다른 이들의 기대치 또한 잇따라 올라간다면,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만을 극대화하더라도 실제로 많은 다른 대표적 사람들의 기대치도 따라서 나아진다. 또 반대로 이것을 가까운 관계라고 표현하면, 다른 많은 사람들의 기대치의 변화에 따라서 가장 이득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도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불평등이 가져다주는 그에게 돌아오는 이익 자체에서 이득을 얻고,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은 그 불평등이 기여하는 것에 의해 이득을 얻는다.

연쇄적 연결

 

   단순하게 3명의 대표적 사람을 가정해보자. 가장 이점이 많은 사람 X1,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 X3,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사람 X2. 그림 9의 곡선은 X1의 기대치의 증가에 따른 X2X3의 기대치의 변화를 나타낸 곡선이다. 차이 원리는 X3이 가장 높은 위치인 a를 선택한다. 연쇄관계는 X3 곡선이 a 오른쪽에서도 올라간다면, X2 곡선 역시 마찬가지로 올라갈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X2가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X3은 여전히 떨어질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X3이 올라간다고 X2가 반드시 올라가는 것 또한 아니며(그림 10), 이 경우에 연쇄적 연결은 적용되지 않는다.

 

   이런 연관관계에 관한 생각을 통해서 우리는 이점이 많은 사람들의 기여가 사회의 특정한 부분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체에 두루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득이 넓은 범위에 분산된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첫째는 제도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어떤 기본적인 이익을 위해 설립되며, 둘째로 그 모든 직책과 직위는 개방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정의로운 체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모든 이의 기대치를 향상시킨다. 물론 이런 가정이 실제와 꼭 들어맞는 일은 드물지만, 적어도 정의로운 사회에 관해 이와 같은 점들이 기대되고 또 일반적으로 정의로운 사회에서 이런 면모들이 보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 만약 가장 이점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치를 변화시켰을 때,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만 이득이 돌아가는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설정할 때 이런 문제가 생긴다면, 이는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게 된다.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해서 정의에 관한 두 번째 원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들은 (a)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에게 가장 큰 이득이 가도록 하고 또한 (b) 공정한 기회의 평등의 조건 아래에서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직과 위치가 덧붙여지도록 조정될 것이다.


   이러한 차이 원리와 그것이 나타내는 구상은 정의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과 쉽게 조화를 이룬다. 이런 일반적인 생각은 이런 원리를 모든 기본적인 가치에 적용한 결과이며, 이런 서열은 사회의 여건이 좋아질수록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형식이다.

 



   14.
기회의 공정한 평등과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

 

 

   이 절에서 다루는 내용은 기회의 공정한 평등에 관한 자유주의적 원칙이다. 이 원칙은 두 원칙 전체에 관한 자유주의적 해석, 즉 민주적 평등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자유로운 평등이라는 해석과 구별되어야 하고, 또 여러 직무들이 재능에 따라 결정된다는 식의 능력주의적 사회의 개념도 아니다. 특히 이 원칙은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라는 관념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우선
, 직무가 평등하게 개방되어야 하는 이유는 효율성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특정한 개인들에게 특정한 직무를 개방하지 않으면서도 그 직무에 알맞은 재능을 지닌 사람을 뽑을 수 있고, 이 직무에 권한과 이익을 할당함으로써 더 효율적인 제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회의 공정한 평등이라는 해석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런 제한은 인간적인 좋은 것의 주요한 형식 가운데 하나인, 사회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것에서 오는 자아의 실현을 그 원천에서부터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특정한 직무에 권한과 이익을 할당하는 것은 사회의 기본적 구조의 역할이다.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그 구조가 정한 직무에 따라 행위할 것을 요구받으며, 이를 수행하면 기대치가 생겨난다. 그리고 그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 여기에서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에 관한 관념이 생겨난다. 적절한 기대치에 대한 합리적 보상이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정한 과정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절차들이
정의롭다고 부를 수 있는 여러 조건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는 완전한 절차적 정의다. 몇 사람이 모여서 케이크를 먹을 때, 가장 공평하게 먹는 것은 모두 똑같은 양을 먹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되려면, 아무에게나 케이크를 자르라고 한 뒤 그는 제일 마지막에 남은 조각을 먹으라는 규칙을 만들면 된다. 그렇게 해야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이 가장 많은 양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완전한 절차적 정의에서는 공평한 분할(분배)이 무엇인가에 관해 절차에 독립적인 기준이 있으며, 또한 그 기준에 알맞은 결과를 달성하는 절차가 만들어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형사 재판이다. 바람직한 재판에서는 피고가 실제로 저지른 일에 대해서, 여러 증거들을 근거로 적절한 판결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재판에 관한 법이나 이론은 바람직한 재판이 이뤄지는 방법에 관한 연구가 된다. 그러나 여러 이유들 때문에 언제나 바람직한 재판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이런 불완전한 절차적 정의에서는 바람직한 결과에 관한 독립적인 기준은 있지만 이것을 완전히 달성할 수 있는 절차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는
, 완전한 절차적 정의와 불완전한 절차적 정의와 비교해봤을 때, 바람직한 결과에 관한 독립적인 기준은 없지만 절차의 공정성에 의해서 결과의 바람직함이 담보되는 유형이다. 가장 좋은 사례는 여러 사람이 함께 벌이는 도박이다. 도박판을 벌인 이후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돈이 가면 좋은가에 관한 기준은 없다. 대신 그 판의 규칙이 있으며,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이 판에 참여한다. 그리고 그 판이 결정한 분할의 결과가 바람직한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 여부는 규칙이 특정한 사람에게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적용되게끔 짜였는가, 누군가가 속임수를 썼는지 등등 분할하는 과정에 속하는 사건들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실제로 공정하게 수행되었을 때, 그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분할의 결과는 그것이 어떤 형태라고 하더라도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라는 생각을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적용해보자. 법과 정부가 효율적으로 작용해 시장을 유지하고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고 조세제도를 통해 재산과 부를 널리 분배하며 적절한 최소한의 사회적 생활을 보장한다면, 교육을 통해 보장되는 기회의 공정한 평등 그리고 그에 따라 오는 다른 동등한 자유도 보장된다면, 이런 기본적 구조에서 이뤄지는 소득분배는 차등의 원칙을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민주적 평등이라는 해석에서 공정한 기회의 평등 부분의 역할은 이런 해석이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라는 생각에 충족된다는 것
, 따라서 민주적 평등이 주목하는 분배의 문제에서의 공정성은 구체적인 개인들에게 실제로 얼마만큼이 할당되는가라는 결과에 의존하지 않고 분배가 어떤 과정을 거쳐 발생하는가라는 절차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 절차, 즉 사람들이 요구하는 재화의 생산과 분배의 절차는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결정한다. 절차의 공정함은 결과의 정의로움을 보증한다. 또한 공정성을 과정과 결부시키면, 공정성을 결과와 결부시켰을 때 발생하는 고려해야 할 사항이 무한히 많다는 부담을 지지 않을 수 있다. 할당의 결과와 관련된 입장에서는, 고립된 개인의 상태에 대한 고려에서 도출되는 각각의 합(만족의 양)이 가장 큰 방식으로 분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 상태를 고려하는 방법은 공정한 관찰자의 눈을 빌려 만족의 계산을 한 가지 방식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제도와 절차는 이런 방식에 따라 분배를 달성하는 것에 불가피한 제한을 가하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며 정의와 거리가 멀다.


   정의의 두 원칙들 사이에는 축차적 서열이 있다고 가정된다
. 민주적 평등이라는 해석의 두 가지 요소 사이에도 축차적 서열이 있다고 가정된다. 우리의 목표는 정의에 관한 정당한 생각을 최대한 단순화된 개념을 조합해 제시하는 것이고, 이것을 분배적 정의의 문제에 적용해보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낸 정의의 원칙들은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지혜의 기반이 된다.

 


   15.
기대치들의 기초로서의 일차적인 사회적 좋음들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을 만족시키는 구체적인 제도들을 논의하기 위해서 먼저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대치와 그것을 평가하는 방법이다. 이와 관련한 공리주의의 입장을 살펴보고, 정의에 관한 두 원칙과 비교해보자. 만약 우리가 공리주의적인 원칙을 채택할 경우, 모든 기대치들의 합을 가장 크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원칙은 이 모든 기대치들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손해와 이익을 비교해 우열을 비교할 수 있도록 상호 비교의 방법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 이 방법은 직관이나 편견, 이기심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공리의 원칙은 이 문제에 만족스런 해답을 주지 못한다. 또한 우리가 실제로 개인들의 행복을 비교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이런 일이 실제로 그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상호 비교의 문제에 해답이 없다는 이유로 공리의 원칙에 관한 회의주의를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 역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기대치들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그 그렇게 평가된 기대치들의 총합이 극대화된 것이 정말 원칙이 될만한 주장인지에 관한 문제다.


   차이의 원칙은 기대치들 사이의 비교를 두 가지 방식으로 해결한다
. 첫째,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이 확인되기만 하면, 기대치의 비교에서는 항상 그들이 우선이다. 이것이 서수적(첫째, 둘째, 셋째) 판단이다. 이에 비해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공리주의는 기수적(하나, , ) 판단을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어떤 기준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기대치를 도출할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반면 차이의 원칙에서는 대표적 개인들이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관해 평가해보면 대표적 개인들 사이에서 지위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기대치에 관해 이 이외의 다른 평가의 요소는 필요하지 않다. 만약 대표적 개인의 기대치의 차이가 기본적 구조의 형태에 따라 변한다면, 기본적 구조의 형태를 바꾸어서 특정한 대표적 개인의 기대치를 개선할 수 있다.


   둘째
,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로 상호 비교를 단순화한다. 기대치는 대표적 개인들이 기대할 법한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에 관한 지표다. 어떤 개인에게 좋은 것들은 그 개인에게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가장 합리적인 삶의 계획이 무엇인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 계획은 다양한 관심사들을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조화시키고, 목표와 무관하거나 이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배제한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진행될 경우 행복하다. 일차적으로 사회적인 좋은 것들은 위와 같은 개인들이 삶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계획하든 간에 필요로 하는 것들, 그래서 적게 가지는 것 보다는 많이 가지길 바라는 것들을 뜻한다. 권리, 자유, 기회와 권력, 소득과 부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 가장 넓은 범주들이다. 이들은 어떤 목표를 성취하려고 들더라도 필수적이다.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의해 개인들에게 할당된다. 최초의 상황에 있는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질 우연적인 것에 관해서는 모른다. 그러나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은 모든 구체적인 개인들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최초의 상황 아래에서도 대표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끌어다 쓸 수 있는 자원이 된다.


   그렇다면 지표는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 이것은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이 표방하는 서열에 따라 만들어진다. 기본적인 자유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보장되어야 한다.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 가운데서 분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권위와 권력, 소득과 부 등이다. 우리가 중점적으로 고려해야 할 지수는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의 지표다. 보통 이 좋은 것들을 더 많이 할당받을수록 이점이 많아지며, 따라서 이들에 관하 지표를 따로 만들어야 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 지표는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의 대표적 개인이 된 상황을 생각해보고, 합리적으로 숙고해봄으로써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을 할당해주는 방식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이득인지를 떠올려보면 된다.


   지표를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과 연관시켜서 정의하는 것은 적절한가
? 어떤 사람들은 계획을 통해 목표를 실현시켰을 때 만족하는 정도와 지표를 연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행복은 목표를 실현시켰을 때 달성되는 것이지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달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표는 사회의 기본적 구조와 관련한 것이고, 사회의 기본적 구조는 목표를 실현시켰을 때의 만족도에 관해 말해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지표는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지표에 관해 이 같은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은 목표들 간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목표가 무엇인가에 상관없이, 단지 그 계획이 정의에 관한 두 원칙과 양립가능하기만 하면 된다. 이에 따라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은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 또는 상대적으로 이점이 적은 이들의 처지를 끌어올릴 수 있을 때에만 이점이 더 많은 자들에게 더 많이 할당된다.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을 지표로 삼는 것은 상호 비교를 위한 객관적인 기준을 세울 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 목표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했을 때 얼마나 행복한지를 상호 비교하는 것은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우며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구체적인 경우에 요구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이런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정의에 관한 일종의 철학적인 설명이다. 그리고 이런 설명은 그것이 적용되는 사회의 도덕적 측면의 핵심을 반영한다.

 


   16.
적절한 사회적 위치들

 

   여기에서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을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적용하는 것에 관해 논할 때 그 대상이 되는 것은 대표적 개인이다. 이런 생각은 구체적인 개인들에 관해 고려할 때 참고할만한 적절한 일반적인 관점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모든 개인들이 대표적 개인에 걸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개인이 대표적 개인에 더 가까운지에 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이에 관한 기준이 있다면, 특정한 종류의 개인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관해 더욱 적절한 관점이 될 것이다. 또한 이 기준을 떠올릴 때 우리는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이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제약을 가하는 취지, 즉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대한 자연적이거나 또는 사회적인 우연성의 영향을 가능한 한 배제하려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대표적 개인을 설정하는 방식도 이에 부합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한 시민이라는 위치와 소득과 부의 분배에 따라 정해진 위치 두 가지를 가진다
. 그러므로 만약 대표적 개인을 선정하려 한다면, 그 대표적 개인은 평등한 시민이면서 동시에 소득과 부의 분배에 따라 그가 누리는 생활의 수준을 대표해야 한다. 먼저 평등한 시민의 입장에 관해 살펴보자. 정의에 관한 원칙들 가운데 평등한 자유의 원칙과 기회의 공정한 평등이라는 해석에 의해서 사회 속의 모든 이들에게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 권한이 할당된다. 그러므로 평등한 시민이라는 적절한 일반적인 관점이 설정된다. 이 관점에 의해 고려될 수 있는 사회적인 정책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공통된 이익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다. 어떤 제도를 이 관점에 의거해 평가하면, 모든 사람이 각각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공평하게 보장해주거나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를 좀 더 잘 달성하게 해준다면 좋은 제도가 된다. 그러므로 이 관점은 특정한 개인 또는 집단이 아닌 모든 사회의 구성원을 동등하게 고려하고 있기 때문에 적절하다.


   둘째로 소득과 부의 분배에 따라 정해진 위치를 대표하는 개인의 입장을 살펴보자
. 이는 다소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다. 단순히 소득과 부의 정도에 따라 이것이 나눠지지는 않는다.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은 권위와 권력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들을 많이 할당받는 경우 여러 가지 관점에서 상대적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의에 관한 두 원칙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을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몇 가지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낮은 위치에 있다고 간주되는 특정한 사회적 역할을 정하고 그들의 소득과 부의 평균보다 낮은 소득과 부를 가진 사람들을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이라고 여길 수도 있고, 모든 사람들의 소득과 부를 고려해 중간값의 절반 이하(하위 25%)의 소득과 부를 가진 사람들을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의 기대치에 관한 지표를 만드는 데 기초가 될만한 자료들을 모을 수 있게끔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정도는 특수한 자료들에 기초해 규정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원초적 상황에서는 이런 기준 자체를 만드는 일이, 이를 벗어나서 실제로 어떤 기준을 설정해야 이 제도가 유효해질 수 있을지를 고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생각은 이 두 가지 위치에 기반한 적절한 일반적인 관점을 통해 사회 체계를 평가한다
. 그러나 이 두 가지 이외에도, 변하지 않는 자연적 특성에 의해 이런 관점이 생겨나는 경우도 있다. 성별, 인종, 문화 등 변할 수 없거나 쉽게 변하지 않는 것들이 이런 특성의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일반적인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는 데 요소가 될 경우 차이의 원칙이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적절한 사회적 위치의 개수가 적다.


   만약 적절한 사회적 위치가 규정된다면
, 구체적인 개인들에게는 이득이 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적절한 위치에서의 관점은 이를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은 적절한 사회적 위치에서 내린 판단을 우선시한다. 이런 우선성은 제멋대로 내려질 가능성이 높은 구체적인 개인들 사이의 판단과 그로 인한 분쟁을 방지하고 질서를 확립하게끔 만들어준다. 게다가 대표적인 개인들의 위치가 위와 같은 방식에 따라 배정된다면, 구체적인 모든 개인들이 언제나 이득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이런 점들에 관해 동의했으므로, 우리는 이런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수용해야 한다. 적절한 사회적인 지위들은 일반적인 관점을 만들고, 이를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적용시킨다. 이렇게 대표적 개인들로 단순화한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관해 탐구하면 우리는 그 사회의 모든 시민들을 적절하게 고려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구체적인 시민들은 모두 대표적 개인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대표적 개인을 설정하고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증진시키게 된다.

 


   17.
평등의 경향

 

   이 절에서 설명해야 할 것은 정의에 관한 원칙이 평등주의적이라는 말의 의미, 그리고 기회의 공정한 평등이 능력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첫째
, 차이의 원칙이란 부당한 불평등에 대한 배상(redress)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원칙의 취지에 따라 진정한 기회의 평등을 논하자면, 사회의 기본적 제도는 적은 자질과 이점이 적은 사회적 위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정의에 관한 원칙에 배상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배상은 다른 것들과 비교된 뒤 우선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이는 우리의 정의감에 거의 항상 포함되는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차이의 원칙이 곧 배상은 아니다. 배상은 부당한 불평등을 소득과 부의 할당과 복지로 교정하려는 것이지만, 차이의 원칙은 이런 불평등이 인간적인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의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차이의 원칙은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만들어낸 시작점 자체를 교정해 기회의 공정한 평등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차이의 원칙은 배상의 취지를 어느 정도는 실현시켜 준다. 또한 이런 부당한 불평등에서 생기는 이점은 오로지 개인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이점이 더 적은 이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차이의 원칙은 그런 이점을 우리 모두의 자산으로 간주한다.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볼 필요는 없지만, 이런 식으로 처리되지 않으면 이는 아주 부정의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위와 같이 생각해보면
, 우리는 불평등은 부정의하면서 동시에 필연적이기 때문에 제도적 측면에서 생기는 모든 불평등에 반대하는 입장을 반박할 수 있다. 이런 불평등은 정의롭다거나 부정의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자연적 사실이다. 정의는 이런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를 처리하는 방식을 평가할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부정의한 방식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사회의 기본적 제도는 인간 행위의 양식으로서,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은 정의로운 방식으로 이들을 처리하며, 이 양식에 사람들이 합의한다는 점을 근거로 그런 행위의 양식이 실제로 더 정의롭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둘째
, 차이의 원칙은 상호성(reciprocality)을 표현한다. 차이의 원칙은 불평등에서 오는 이점이 언제나 이점이 적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런 불평등이 있을 때보다 없을 때, 이점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들의 처지가 나아지지 않는 경우에만 이런 불평등은 허용된다. 즉 특정한 불평등에서 오는 특정한 이점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이익을 동반한다. 하지만 이점을 가지는 사람들이 더 큰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제한이 걸린다는 점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우선은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협력 체계가 없이는 어떤 사람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리고 정의는 이런 협력 체계를 향한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 여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즉 더 큰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사회의 협력 체계를 자발적으로 유지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아는 한, 이들은 협력의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더 큰 이익을 추구할 가능성을 포기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상
(desert)이 다른 사람의 이익과 항상 연계되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는 보상이 언제나 불평등으로 인해 생긴 이점 자체가 아니라 그 이점에 관해 일정하게 보답해주는 협력 체계의 형식에 의지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된다. 또한 이런 보상이 능력(즉 이점)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며 그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는 주장도 이런 입장에 따라 반박해볼 수 있다. 그들이 가진 이점은 대개 그들 자신들에게 나오지 않고, 유복한 가정환경과 그것을 개발할 수 있었던 기회를 사회가 제공해주었다는 것에서 나온다. 따라서 이런 우연성들을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서 배제시키려고 생각하는 한, 이런 종류의 불평등을 근거로 보상을 바라는 것은 원래의 의미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은 평등주의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셋째
, 차이의 원칙은 박애에 관한 한 해석을 보여준다. 기존에 박애는 정치적 개념이나 제도가 아닌 삶의 태도로 간주되었다. 즉 실천되지 않으면 정치적 제도들이 진정으로 목표하는 바를 성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중요하게 취급되며, 정치에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아왔다. 특히 이 말은 사회가 더욱 더 넓으면 넓어질수록 희미해져 가지길 기대하기 힘든 유대감이나 정념적 측면을 표현하는 말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의 정치적 문제에서 이것이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잡을 수 없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은 박애의 정신, 자신의 이익이 타인의 손해가 된다면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제도 속에서 정식화하려는 시도로서, 실제로 사람들이 박애가 실현하고자 하는 형태의 행위를 하게끔 만드는 원칙으로 작동한다. 차이의 원칙에 의해서 나의 이익이 다른 사람의 손해가 될 때 그런 이익을 바라지 않을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민주주의에 관한 상식적인 세 가지 견해는 이와 같이 정의에 관한 두 원칙 속에서 구현되어 있다.


   이처럼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을 민주적 평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능력주의적 사회를 지향하지 않는다
. 능력주의적 사회에서는 소득과 부의 할당 또는 보상의 기준을 재능의 소유 여부에 두며, 기회의 평등은 이런 능력들이 보여줄 합리적으로 기대할만한 발전이나 번영의 수단이 된다. 이런 제도는 사람들을 분화시키고, 그 격차를 점점 더 벌려놓는다. 따라서 능력주의적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은 실제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 위치를 정당화하는 구실로만 쓰일 수 있을 뿐이다. 반면 민주적 평등이라는 해석은 모든 사람들이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를 가지고서 각자의 사회적 역할을 할 것을 권장하며, 불평등에 따른 서열(hierachy)이 생겨나는 것을 가능한 한 제한한다.


   여기까지 다룬 정의의 문제가 같은 세대 사이에 생겨나는 공시적 불평등에 관한 것이었다면
, 이런 원칙이 통시적으로도 적용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타고난 자질은 어쩔 수 없는 자연적 사실이지만, 그것이 실제 능력으로 얼마나 발현되는지는 그 사회가 정의로운 정도와 관련이 있다. 또한 대체로 다른 사람의 능력을 감소시키려 드는 제도는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의 이익 또한 감소시킨다. 그래서 차이의 원칙은 이런 불평등을 받아들이는 대신 여기에서 생겨나는 이점이 사회적 자산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런 이점을 가진 본인에게도 이득이다. 따라서 지금의 사람들이 이런 타고난 자질을 최대한 보존하고 이 수준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의도한다면, 그에 합당한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이 조치들은 역시 지금 세대의 사람들이 합의할만한 내용이어야 한다.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 우리는 모든 사람의 자질과 능력이 가장 잘 발휘되는 사회가 올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18.
개인들을 위한 원칙들: 공정성의 원칙

 

   정의에 관한 원칙을 탐구할 때 사회의 기본적 구조만이 고려사항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 가운데는 개인에 관한 것도 있으며, 국제법에 관한 것도 있다. 그리고 이들이 충돌할 때 어떤 것을 먼저 고려할 것인지에 관한 우선성의 원칙도 있다. 여기에서는 개인들에 관한 원칙을 거칠고 간략하게나마 다뤄볼 것이다.


   우선성의 원칙은 도식을 통해 나타내볼 수 있다
. 이 계통은 연역관계를 뜻하는 것은 아니고, 정당성에 관한 여러 원칙들을 세부적으로 분류한 것이다. 그리고 로마 숫자는 원초적 입장에서 받아들이게 될 원칙의 순서를 표시한 것이다. 이 순서에서 개인에 대한 요구사항은 허용사항보다 우선하는데, 이는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요구사항을 규정한다는 점을 반영한 것이다. 사회 체계와 제도가 다른 것들에 비해 우선하는 것은, 무엇이 정의롭다고 이야기할 때 그렇게 말할만한 기준이 대체로 사회적인 것이라는 정의에 관한 우리의 감각을 반영하고 있다.


   정의에 관한 생각을 포함해 정당성에 관한 한 이론을 만들려 할 때
, 우리는 정당성에 관한 여러 개념들을 정의할 원칙들을 채택한다. 그리고 이 개념들은 서로 관계를 맺는다. 이런 개념들에 관한 원칙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그 원칙들이 원초적 상황에 있는 대표적 개인들이 선택할 법 하다는 것을 증명하면 된다. 이것은 옳음(right)에 대한 의미론적, 맥락적 분석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필수적인 것만 고려하고, 가능한 한 불확정성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데 중점을 둔다. 따라서 이는 일종의 해명이고, 불확실한 부분을 제거해나가는 작업이 될 것이다. 만약 공정성으로서의 정의와 정당성이라는 이론이 우리의 일반적인 정의에 관한 생각과 일치하거나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나면, 우리는 이제 이 이론들을 일상적인 언어로 바꿔서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의와 정당성에 관해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개인에 관한 원칙 가운데 하나는 공정성이다
. 만약 어떤 제도가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을 만족시키며 동시에 사람들이 그런 조정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제도들이 제공하는 기회를 이용하려고 한다면, 사람들은 제도가 요구하는 바를 수행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어떤 사람들이 전체의 이익을 증가시키는 데 필요한 방식으로 자유를 제한당한다면, 그 사람들은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해 그러한 방식을 따르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정의에 관한 원칙은 어떤 제도의 요구사항들이 정당한 직무인지를 판별하게 해주고,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수행하지 않는 한 협력의 체계로부터 생겨나는 이득을 기대할 수 없다.


   공정성의 원칙은 두 부분으로 이뤄져있다
. 첫째는 제도의 정의로움에 관련한 부분이다.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 제도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의무를 요구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 의무를 요구할 수 있으려면 제도가 어느 정도 정의로워야 한다. 그러므로 계약에 의해 생겨나는 사회적 의무라는 개념이 억압적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는 개념이 될 것이라는 비판은 정의에 관한 원칙과 사회계약론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다. 둘째는 사회적 의무의 자발성에 관련한 부분이다. 사회적 책무는 그것이 명시적이 되었든 묵시적이 되었든, 이익에 의한 것이든 자발적 연합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또 그 내용은 언제나 제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이행할 의무는 그 연합을 유지하는 사람들 모두가 짊어진다.

 


   19.
개인들을 위한 원칙들: 자연적인 의무들

 

   사회적 의무와 대비되는 자연적 의무들이 있다. 이는 통일된 방식으로 정리하기가 어렵다. 분류를 하자면 넓게 보아서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을 나눠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 가운데서 무엇이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지를 정해야 하는데, 소극적인 자연적 의무들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으로 짐작된다.


   사회적 의무와 대비되는 자연적 의무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 첫째, 자연적 의무는 자발적인 연합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며, 이들을 요구하기 위해 어떤 제도가 선행할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적 의무를 이행할 것을 요구받는다고 보아야 옳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않을 것을 제도적으로 요구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인행위를 변호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둘째, 자연적 의무는 어떤 사람이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규정한 역할의 차이 혹은 그것이 허용한 불평등한 관계들 가운데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와 무관하게 적용된다. 즉 동등한 도덕적 인격인 인간 일반에게 해당된다.


   이런 특징을 공정으로서의 정의와 연관시켜서 생각해봤을 때
, 정의로운 제도를 지지하고 따르는 것은 모든 인간이 지니는 의무가 된다. 현재 제도가 정의롭다면 지켜야 하고, 막대한 희생이 뒤따르지 않는 한 현재의 제도를 더 정의롭게 바꿀 수 있다면 바꿔야 한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사회적 의무와 무관하게 제도의 구속을 받기도 하며, 그래서 자연적 의무는 사회적 의무에 대해 독립적이다. 이런 원칙은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도 선택할만한 것들이며, 특정한 제한이 부차적으로 가해지지 않는 한 무조건적으로 적용된다. 사회적 의무로서의 공정성의 원칙과 자연적 의무로서의 정의는 사람들이 정의로운 제도에 소속되는 두 가지 방식이다. 특히 공정성의 원칙은 차이의 원칙에 의해서 이점을 더 많이 할당받은 사람들에게 더 강하게 적용된다. 즉 제도 안에서 보다 많은 이득을 보는 사람은 그 제도가 가능한 한 정의로워야 한다는 사회적 의무를 지니게 된다.


   이제 개인에 관한 원칙 가운데서 허용사항이 남았다. 정의와 정당성에 관한 원칙을 논할 때에 이 부분은 비중이 요구사항에 비해서 덜하다. 이는 허용사항의 내용들을 우리가 행해도 되고 행하지 않아도 되는 행위들이며, 따라서 정의상 자연적이거나 사회적인 의무들을 위반하지 않는 행위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들의 도덕적 지위는 자연적, 사회적 의무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이런 도덕적 지위가 높은 행위들 가운데는 의무 이상을 하는 행위들이 있다. 이런 행위는 좋은 일이지만, 사람들이 반드시 그것을 해야한다고 요구받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차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주제가 아니다.

 

덧댐. 위쪽에 등장하는 박스의 그래프들은 인터넷에 찾아보시면 나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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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현대철학연습 발제. 심혜련, 『20세기 매체철학』 4장 요약.>

   1990년대 초반 대중문화에 관해 성찰했던 이론가들에게 주요한 관심사는 사진
, 영화와 같은 것들이었다. 처음 논쟁은 이런 수단을 사용해 만들어진 작품이 예술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되었겠지만, 이는 점차 대중문화라는 현상 자체 그리고 그 속에서 이런 매체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해 분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진이나 영화 등의 매체가 대중문화의 중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왠지 옛스러운 측면이 있다. 이는 이들이 대중문화라는 현상을 매우 잘 분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적 성격 또한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드는 까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대중문화의 중심에 자리잡은 미디어가 사진도 영화도 아닌 텔레비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동시대의 대중문화에 관해서 그리고 미디어에 관해서 분석하려고 한다면
, 텔레비전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귄터 안더스는 텔레비전에 관해 철학적으로 분석하려고 한 선구적인 철학자로 간주된다. 그는 유대인으로 1902년생이다. 1923년에 후설의 지도 아래 <논리적 문장에서 상황범주의 역할Die Rolle der Situationskategorie bei den logischen Sätzen. Erster Teil einer Untersuchung über die Rolle der Situationskategorie>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 시기에 동료이자 선배인 하이데거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와 1929년에 결혼했으나 37년에 이혼했고, 이후 두 번의 결혼을 했다. 나치 정권을 피해서 1933년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갔고, 2차 대전 종전 이후 귀국해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대표작인 <인간의 골동품성(구식성)>1권이 1956년에, 2권은 1990년에 출판됐으며, <팬텀과 매트릭스로서의 세계>1권에 포함되어 있다.


   그가 텔레비전에 관해 문제삼은 것은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이미지의 존재론적 위상이었다
. 그는 그 이미지가 실재와 가상이 뒤섞인,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이상한 성격을 가진다고 분석한다. 또한 이 이미지들이 텔레비전을 보는 우리의 세계관 자체를 재구성하고 있으며, 이는 실재에 대한 외면이며 더 나아가서는 실재의 상실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미디어에 관해 비관론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에코의 분류법에 따르면 그는 미디어 '종말론자'("종말론적 지식인들은 문화 상품의 소비자들을 대중이라는 획일적인 물신화된 개념으로 격하시킬 뿐 아니라, 대중들이 모든 귀중한 예술 작품들을 단순히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고 비난하지만, 동시에 자기 스스로도 대중 문화 상품들을 물신화된 개념으로 격하시킨다. (...) 이에 대한 구조적인 특징만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대중문화 상품 전체를 통째로 부정한다." "<텔레비전은 세상을 환영으로 몰고 간다. 따라서 시청자의 바람직한 반응이나 모든 비판적인 대응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는 텔레비전이 자기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프로메테우스적인 부끄러움
- 인간의 상황에 관한 유비로서의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적 상황이란 인간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에 관한 안더스의 비유다. 이 비유엔 단지 인간과 미디어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과 기술 전반에 관한 그의 통찰이 담겨있다. 인간은 기술을 쟁취하고 통제한다. 기술은 자신의 논리에 의해 독자적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만 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기술과 인간 사이의 전도가 일어나고, 기술지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전도 이후에 기술은 인간을 자원으로 삼아 더욱 폭발적으로 팽창하고, 인간의 종속은 더욱 심화된다. 인간은 근대 이전의 도덕적, 윤리적 사고를 통해 다시 기술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자 하지만, 이미 기술은 저 멀리 가버리고 없는 상태다. 인간과 기술 사이의 이런 차이가 바로 프로메테우스적 격차이며, 여기에서 겪는 인간 존재의 성격이 바로 프로메테우스적인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술보다 뒤쳐져 있는 인간의 상태를 가리켜 '골동품성'이라고 부른다.


   미디어와 기술에 관한 그의 분석은 하이데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 분명하다
. 그러므로 그의 주장을 하이데거의 기술 개념과 비교해서 알아보면 더욱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현대 문명의 기술에 관한 그의 생각은 <기술에 대한 물음>이라는 강연문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에서 기술 개념은, 처음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원되는 수단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현대 기술 또한 마찬가지여서, 지금 우리가 이 시대에 사용하는 여러 장치들 또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설계된 장치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내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더 깊은 의미
, 즉 기술 일반의 의미를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을 인용해 설명한다. 질료인, 형상인, 목적인, 운동인(작용인) 가운데 기술은 작용인이다. 각각 독립적일 때는 아무것도 아닌 질료, 형상, 목적을 통합하여 무언가를 우리 앞에 드러내주기 때문이다("위에 열거한 세 가지 방식들을 숙고하여 한 군데에 모은다. 숙고한다는 말은 레게인, 로고스이다. 이 낱말은 아포파이네스타이에, 즉 앞에 내보임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술은 없던 것을 있게끔 해주는 탈은폐의 방식, 즉 우리에게 진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이런 측면에서 기술이라는 말에 제작술(포이에시스)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반영하였다. 기술은 없어지기 쉬운 것들을 좀 더 강하게 붙들어매는("금방 이렇게 저렇게 모양새를 바꾸어버릴 수 있는") 제작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탈은폐의 방식은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을 수 없다
. 그러나 현대 사회는 특정한 방식의 탈은폐만을 강조하고, 이를 재촉한다("그러나 오늘날의 농토 경작은 자연을 닦아세우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경작 방법 속으로 흡수되어버렸다." "오히려 강 물줄기가 발전소에 맞추어 변조되었다. (...) 즉 수압 공급자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발전소의 본질에 맞추어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써 그에게 닦달(닦아세움)은 현대 문명의 기술의 본질적 성격이다. 닦달이 탈은폐의 방식인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는 허위가 아니다. 인간은 이 탈은폐를 목도하는 사람이기에 이것을 지배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런 탈은폐의 방식에 자기 자신조차 탈은폐당한다("이렇듯 주문 요청하는 탈은폐로서의 현대의 기술은 단순한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적인 것을 부품으로서 주문 요청하도록 인간을 닦아세우는 그 도발적 요청 역시 드러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한 도발적 요청은 인간을 주문 요청에로 집약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집약시키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적인 것을 부품으로서만 주문 요청하는 데 몰두하게 한다.") 그는 이런 현상이 기술을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인간이 겪어내야만 하는, 일종의 역사적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기술문명에 관한 안더스의 분석은 하이데거와 유사하다
.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 강연의 말미에서 이런 비관적인 상황을 넘어서는 개념으로 시적인 탈은폐로서의 예술을 제시한다. 즉 고대의 기술 개념(테크네)과 제작술 개념(포이에시스)를 상기하고, 그런 자유가 탈은폐를 목도하는 자들의 주권임을 인지할 때, 인간은 기술을 넘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기술에는 이런 측면이 그 개념적 측면에서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 반면 안더스에게서는 이런 측면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이미 기술(기계)에 종속되고 기술의 일부가 된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술은 전체이며, 전체는 무한이고, 인간은 이를 파악할 수 없다. 파악할 수 없다면 통제할 수도 없다. 이것이 지금 인간의 상황이다("예전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부터 하이데거의 '적소전체성' 분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행위와 제작은 행위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형상을 따라 해야 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만들어지는 것(또는 행위 속에서 도달되는 것)의 에이도스는 미디어적 행위에서는 '제거된다'.").

 


   팬텀이 지배하는 텔레비전
& 매트릭스가 된 세계와 그 세계 안에서의 대중

   - 텔레비전 영상에 관한 존재론적 분석, 텔레비전은 어떻게 대중을 주조하는가

 

   텔레비전 영상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매우 크다. 안더스는 이 영향이 선험적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어, 인간의 감성형식 나아가서 존재의 문제까지 결정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텔레비전은 일종의 '이미지의 압도적인 홍수'로 파악할 수 있다. 텔레비전 방송에 내보내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곳에서 수없이 많은 이미지들이 생산되고, 전파를 통해 배포된다. 여기에 적응하기 위해 인간은 문자성을 포기하고 이미지성을 획득한다. 이들이 '탈문자적인 문맹자 집단', 즉 아이콘매니아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홍수같은 이미지들로 실재를 대체한다. 이런 반복적 이미지들이 소비되고, 또 실재를 대체할 수 있는 이유는 근대적 이성의 특징 때문이다("자연과학의 근대적 인식론에서는 모든 것이 실험적으로 반복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보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유일성은 점차로 사라져 버린다. "오로지 유일무이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지 버클리의 존재와 지각의 동일화 명제, (...) "존재한다는 것은 소유된다는 것이다"라는 강력한 명제로 대체된다. (...) 관광여행자들에게 일관되게 중요한 것은 "거기 있다"가 아니라 휴가사진을 통해 제시되는 증거, "거기에 있었다"이다.").


   텔레비전의 이미지가 이렇게 실재를 대체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존재론적 근거는 무엇일까
? 이에 대한 안더스의 대답이 바로 '팬텀'이다. 텔레비전의 이미지는 실재하는 세계를 촬영한 것이 분명하고, 그리고 그것을 내가 지금 여기에서 수상기를 통해 보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지만, 사실 그것의 시공간적 실재성은 분명하지 않다. 카메라와 전파, 수상기를 통해서 매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있다는 것 만큼이나 분명한 것은 내가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세계에 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이런 매개를 경유하는 것 뿐이다. 수상기가 내보내는 영상의 존재론적 지위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인데, 이 때문에 텔레비전의 이미지는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는 유령에 유비된다.


   텔레비전은 인간의 생물학적 감각이 닿을 수 없는 곳의 실재를 매개한다
. 이것이 실재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텔레비전이 그것에 접하는 유일한 창구라는 점이다. 이런 이미지의 중첩들은 생물학적 감각의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이내 인간의 세계이해를 완전히 대체해버린다. 이미지의 홍수로 만들어진 이런 세계를 안더스는 매트릭스라고 표현한다. 수상기를 통해 발사되는 이미지의 존재론적 성격이 모호하기 때문에, 여기에 기반을 둔 매트릭스의 존재론적 성격 역시 모호하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실재이다. 더 나아가 실재와 가상, 실제와 텔레비전 화면 사이의 경계 자체가 붕괴된다. 이런 세계에서 무언가를 결정하는 주체는 텔레비전의 영상이 된다. 개성은 채널 선택권으로 환원된다. 우리는 텔레비전이 걸어주는 말을 듣거나 듣지 않는 소극적 선택 이상의 것을 할 수가 없다("우리가 세계롤 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에게 올 때, 우리는 더 이상 세계 안에 있을 수가 없다.").

 


   안더스 이후 텔레비전에 대한 논의

 

   안더스가 텔레비전을 보았던 것은 1940년대 후반이다. 이후 프로그램의 성격이나 제작방식, 제작기술 등 방송환경은 매우 많이 바뀌었다. 이에 따라 텔레비전을 긍정적으로, 또는 최소한 중립적으로 분석하는 학자들 또한 많이 등장했다. 대중문화에 관한 부정적 시선을 '오웰주의적 환상'이나 '대중에 관한 물신화'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학문적인 관심에서 비껴있는 텔레비전을 본격적인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의 논의는 선구적인 측면이 있다. 설령 그가 아주 부정적이고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안더스 이후 텔레비전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눠진다. 하나는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여러가지 내용들을 분석하는 경향이다. 레이먼드 윌리엄스 등은 문화연구의 일환으로서 텔레비전과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한 대중문화 현상을 고찰한다. 또한 니클라스 루만은 대중문화 현상의 중심에 텔레비전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다른 하나는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 형식을 주목하는 경향이다. 실재와 가상 문제는 보드리야르에 의해 반복되고 있으며, 현상학적 탐구라는 방법은 플루서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덧댐. 본문의 내용이 너무 개괄적이고 그 장에서 다루려는 사람이 아닌 다른 학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다른 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체이론이나 매체미학, 매체철학을 공부하려는 분들께 이 책을 권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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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yke 2013-09-2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서양현대철학연습 발제. 『20세기 매체철학』 3장 요약.>

 

   이른바 '대중문화'라는 현상은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산업사회 이후에야 나타난 완전히 새로운 문화적 현상이다. 그 이전에는 수요의 측면에서 문화 또는 예술작품을 향유할만한 계층이 매우 한정되어 있었으며, 또 생산의 측면에서 특정한 작품 또는 문화적 생산물을 많은 사람에게 제공할만한 체제가 갖춰져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한정된 계층의 소수가 몇몇 작품을 감상하면서 생성됐다. 그러나 부르주아적 혁명은 예술을 향유하는 계층을 한층 더 넓히는 데 기여했고, 결정적으로 공장제 공업은 높은 밀도로 모여있는 노동자 집단을 형성시켰다. 이들은 후에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대중문화는 이들 속에서 형성된 문화, 더 구체적으로는 이들이 즐기는 문화적 대상물을 가리키며, 대량으로 생산되고 대량으로 소비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이전과는 다른 문화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 많은 사회학자와 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아도르노는 대중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매우 부정적이다. 대중문화 현상에서 중심을 이루는 문화적 대상물들은 생산의 단계에서 이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포섭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이들은 문화적 대상물이 아니라 상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기만이 있다. 이런 상품들은 상품이 아닌 문화적 대상물로서 소비되기 때문이다. 상품과 문화적 대상을 소비하는 방식은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기만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문화적 태도'를 잃어버리고 자본주의적 사회에 매몰된다. 이것이 그의 문화산업론의 핵심이다. 그의 고찰은 이후 대중문화에 관해 비판적인 많은 사람들에게 그 원형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의 문화산업론은 대중매체가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한 고찰을 포함하고 있다
. 따라서 매체이론의 관점에서 그를 살펴보려면 문화산업론을 반드시 다뤄야만 한다. 이 글에서는 아도르노의 예술사회학과 예술 개념에 관해 살펴보고, 그에 따른 문화산업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회비판으로서의 매체이론 - 아도르노의 예술사회학(문화사회학)

 

   대중문화의 등장은 많은 학자들의 이목을 끌었지만, 이는 주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평가되었다. 대중문화 속 문화적 생산물들은 이전의 문화적 생산물들 즉 예술작품에 비해서 저열하고 통속적이기 때문에 그 내용의 측면에서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학파, 특히 아도르노의 대중문화 비판은 이런 일차원적인 가치평가에서 벗어나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는 문화적 생산물들의 내용이 아니라 이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고찰하였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대중문화의 수준이 아니라 대중문화의 사회적 역할, 효과, 영향이었다. 이런 면에서 그의 대중문화 비판은 단순한 비난들과 구별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문화
, 그리고 대중매체가 파시즘과 연결되어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대중은 자신들에게 잠재된 혁명의 동력을 파시즘이라는 형태로 잘못 표현하고 있으며, 이런 정치적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던 계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은 곧 파시즘에 대한 비판,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된다. 또한 이런 발상은 문화와 사회를 구별하고 예술이 고유한 영역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에 반대하고, 나아가 새로운 미학적 입장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 그들은 미학이 아닌 예술사회학을 통해 문화에 접근하려고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벤야민은 이런 대중문화 현상을 정치의 예술화(미학화, 심미화)라고 주장했다. 대중매체는 대중에게 표현수단을 부여했는데, 정치의 문제를 권리의 체계의 변화가 아닌 표현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난 것이다. 반면 아도르노는 문화산업론을 통해 문화의 생산 과정에 자신의 탐구를 집중함으로써 독특한 예술사회학을 전개했다. 그에게는 대중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문화적 생산물을 누가 만들었는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그의 문제의식을 짧게 표현하자면 예술의 상품화 또는 상품의 예술화(미학화, 심미화).

 


   '
관리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예술 - 아도르노의 예술개념

 

   그렇다면 예술의 상품화 또는 상품의 예술화가 왜 문제가 되는가? 아도르노가 왜 이것을 문제삼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의 예술 개념과 예술작품에 관한 관점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결론을 먼저 간략히 이야기하면, 그가 보기에 예술 또는 예술작품과 상품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생산양식은 대중문화의 문화적 생산물들을 상품과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예술의 성격과 상품의 성격이 충돌하고, 문화적 생산물은 예술로서의 성격을 상실한다.


   그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의 생산양식에 따라서 그 시대에 사용할 수 있었던 재료들을 조합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 그리고 어떤 생산물이 예술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기준, 즉 예술의 개념 또한 역사성을 가진다고 설명한다("예술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여러 계기들의 짜임 관계(성좌)에 의해 이뤄진다" "현재의 예술에 대한 규정은 언제나 과거 한 시대의 예술에 의해 제시된다."). 그러므로 예술 개념과 예술작품은 사회와 반드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만약 예술작품이 이런 특징만 가지고 있다면 다른 생산물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 여기에서 그가 제시하는 예술의 특징은 부정성 내지는 창조다. 즉 예술작품은 역사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새로운 것, 이제까지 감성적으로 파악되지 않았던 것을 감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을 조합해 보여주는 변증법적 생산물이다("예술은 경험적 현실과 분리됨으로써 자체의 필요에 따라 전체와 부분들의 관계를 형상화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분리를 통해서만 예술작품은 이차적인 존재로 된다. 예술작품은 작품의 외부에서 거부되어 있는 것을 경험적인 생명체에 부여하며, 이로써 또한 물적이고 피상적인 작품 체험을 통하여 만들어진 작품 형태를 탈피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위대한 예술작품은 예술의 개념을 바꾼다("위대한 예술가들이란 결코 매끈하고 완전한 양식을 구현한 사람들이 아니라 카오스적인 고통의 표현에 대항하기 위한 강인함으로서, 즉 양식을 '부정적 진리'로서 작품 속에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에 따라
, 예술 개념의 역사성과 예술 작품의 부정성이라는 긴장은 예술작품에게 사회비판적 성격을 부여한다. 예술은 경험적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무엇, 반대되는 무엇을 자신의 내적 형식을 통해 표현한다. 만약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산업사회에서 어떤 문화적 생산물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사회가 보여주지 않는 무엇인가를 표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서 예술작품이 지녀야할 덕목은 '쓸모없음'이 된다("예술은 기존 사회의 규범에 따르거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대신에, 독자적인 것으로서 자체 내에서 결정체를 이룸으로써, 마치 청교도들이 모든 종파를 부인하듯이 그 단순한 존재를 통해서 사회를 비판한다. 순수한 것, 그 내재적 법칙에 의해 철저히 형상화된 것 가운데 무언의 비판을 가하지 않는 것, 혹은 총체적인 교환 사회를 지향하는 상태로 인한 굴욕을 탄핵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예술의 비사회적 요인은 특정한 사회에 대한 확정적 부정이다.")

 


   '
관리되는 사회'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문화산업 -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

 

   하지만 문화산업은 이러한 예술과 예술작품을 상품화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이다. 오히려 문화산업을 통해 만들어진 문화적 생산물들은 혁명의 동력이어야 할 대중의 잠재력을 무마하고, 도피처를 제공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된다. 현대의 문화산업이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이유는 문화적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생산수단이 독점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이고, 이런 식으로 문화적 생산물을 이용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대중문화의 관계자들은 문화 산업을 기술적 용어로 설명한다. 그들은 문화 산업에 수백만이 참여하기 때문에 수많은 장소에서 동일한 상품에 대한 동일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든 재생산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생산의 중심지는 몇 안되지만 수요는 여기저기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는 기술적 문제가 경영에 의한 조직과 계획을 필요하게 만든다고 얘기한다. (...) 이러한 주장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은 문화 산업의 조종과 이러한 조종의 부메랑 효과인 수요가 만드는 순환 고리로서 (...) 기술이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할 수 있는 기반은 사회에 대한 경제적 강자의 지배력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기술적 합리성이란 지배의 합리성 자체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들은 이윤 동기에 따라서 상품을 생산해내지만
, 이것을 대중문화와 대중매체라는 환경 속에서 예술 또는 문화로 포장한다. 그러나 이 문화상품에는 작품 내적인 예술적 성격 즉 부정성과 창조가 거세되어있고, 감각적 부분만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다르다는 것, 개성이라고 강조되는 것들은 아주 부차적이고 감각적인 문제일 뿐이며, 내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


   "
영화 제작자는 베스트셀러에 의해 보증된 안심할 수 있는 원고가 아닌 경우 모든 원고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 스케치나 단편, 문제작, 히트송과 같은 형식들은 후기자유주의적인 취향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대중 문화의 단계에서는 화석화되어 문화 산업에 의해 강요된 평균적 규범이 되었다." "문화 산업의 특징인 '새롭게 하기'는 대량 복제의 개선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체계'의 핵심적 요소다." "자아의 특수성이란 언뜻 보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에 의해 결정된 개인들의 독점 상품이다. (...) 지문을 제외한다면 신분 증명서는 모두 정확히 똑같은 것으로서 영화 배우로부터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인의 삶과 얼굴은 보편성의 힘에 의해 똑같은 신분 증명서 중의 하나로 변질된다."


   내용의 부정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문화적 생산물은 소비를 통해서 동일한 소비자들을 만들어낸다
. 또한 이런 이윤 동기에 부응하지 못하는 '부정성'의 예술들은 문화의 영역에 등장조차 하지 못한다.("세상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것에는 예외 없이 문화 산업의 인장이 찍혀지기 때문에 문화 산업의 흔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나 확인 도장이 찍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세상에 등장할 수 없다.")


   여기에서 향유와 유흥의 차이가 드러난다
. 향유는 예술작품과 감상자 사이에 생겨나는 소통의 형식이다. 아도르노는 이것을 미메시스적 수용방식이라고 표현한다. 반면 유흥은 문화상품과 소비자 사이의 관계다. 예술작품을 향유하는 감상자는 객체의 형식과 내용 속에 자신을 침잠시키고 관조함으로써 작품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는다. 역설적이게도 이 변증법적 관계는 주체의 사유 속에서 이뤄지고, 결과는 부정성의 경험이 될 것이다. 반면 문화상품을 유흥하는 소비자는 감성적(감각적) 형식에만 만족하거나 온전히 자신을 투영하기만 함으로써 변증법적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이런 경험이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통해 일어난다
. 대중문화는 생산양식을 포위한다("사적인 문화 독점 하에서 "폭군은 육체를 자유롭게 놓아두는 대신 곧바로 영혼을 공략한다. 지배자는 (...) 이렇게 말한다.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자유다. 너의 생명이건 재산이건 계속 네 것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이후 너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독점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대중은 예술작품와 감상자 사이에서 생겨나는 진정한 개성 즉 부정성으로부터 배제당하고, 감성적 형식의 차이를 물신화하는 소비자들만이 넘쳐나는 사회로 점차 나아간다.


   이 과정이 더 진행되면
, 문화산업의 독점자본은 단순히 수요에 맞춘 대량생산 뿐만 아니라 수요를 핑계로 자신들이 원하는 상품을 생산하며 수요를 조작하는 단계에 이른다. 수요를 조작한다는 것은 대중이 거짓된 욕망을 품게끔 한다는 의미이다("즐김은 사실 도피다. 그러나 그 도피는 일반적으로 얘기되듯 잘못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마지막 남아 있는 저항 의식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오락이 약속해주고 있는 해방이란 '부정성'을 의미하는 사유로부터의 해방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수사학적 질문의 뻔뻔스러움은 이러한 질문이 사유하는 주체에게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체적 사유로부터 빠져 달아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다는 데 있다."). 대중은 감상자에서 소비자로 퇴행하고, 독점자본의 문화산업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한다.


   아도르노에게 대중이 소비자로 퇴행한다는 것은 대중이 비판적 시선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문화산업은 자신의 논리에 의해 욕망을 창출한다. 그리고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여러 장치에 대중을 종속시키는데, 이 장치는 독점자본주의에 알맞는 행동양식을 강요한다. 그런데 욕망은 지속적으로 창출되고, 그래서 욕망의 완전한 충족은 끊임없이 유예된다. 그러므로 대중은 문화산업의 논리에 종속된 상태에서 거의 벗어날 수 없으며, 나아가서 주체의 상태 자체가 수동적으로 변화하고 혁명 또한 영원히 유예된다. 이 과정에서 남는 것은 이와 같이 '관리되는 사회'에서 생산되는 자극적 문화상품들 뿐이다.

 


   문화산업론의 의의와 한계

 

   대중문화를 통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는 사람들에 맞서서, 아도르노는 미학적 경험이 빠져있는 대중문화의 확산은 단지 야만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듯 하다. 즉 독점자본주의적 사회에서 대중문화의 등장은 예술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배제한 채 확산되기 때문에, 긍정적인 현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종속된 대중이라는 주체를 낳는다는 것이다.("개인이라는 관념은 개인과 보편성과의 완전한 동일성이 문제되지 않을 경우에만 용납될 수 있다."). 대중매체란 결국 확립된 소유관계과 그에 관한 의식을 정당화하고 확산시키는, 일종의 조작의 수단이다.


   그는 이렇듯 문화산업이 판치는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 우리가 가장 처음에 다뤘던 예술 개념과 예술작품을 제시한다. 순수한 부정성으로서, 언제나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서의 예술은 사회와 맺는 변증법적 관계에 의해서 해방의 공간을 자신의 내부에서 전개한다. 그리고 이것을 향유하는 감상자는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과 문화산업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주체성을 획득한다. 이런 새로운 주체들이 해방의 토대가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살펴보자면
, 크게 두 가지가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하나는 그가 고찰한 것이 미디어의 소유자나 그 내용에 관한 것이지, 미디어 자체에 관한 비판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미디어 형식 자체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그러므로 어떤 내용을 전달해주는가에 따라 해방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반론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온당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문화산업의 관점에서 분석한 것은 이미 문화산업의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결정된 상태에서 진행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올바로 쓰인다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에 관한 긍정적 가정이 이미 전제된 상태에서 가해지는 비판은 아도르노의 문제의식과 분석 대상을 염두에 두지 않은 상투적인 어구이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의 문제점, 즉 문화상품의 소비자들을 수동적인 존재로만 설정했다는 것은 진지한 비판이 될 수 있다. 소비자들은 대중매체를 단순히 전해주는 그대로 소비하지만은 않는다. 분명히 소비자들은 미디어의 형식과 내용에 영향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역사성'이라고 부를만한 독립적 영역이 있다는 것 또한 명확하다. 어느 때에는 온전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또 다른 때에는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은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과 1인 미디어 시대 이후에 더욱 부각된다.

 

 

덧댐. 중간에 겹따옴표 안에 들어간 말들은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그리고 『계몽의 변증법』의 문화산업 장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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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1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현재 사회에 아도르노를 적용하면 우리는 무엇을 구체적으로 예술로 향유해야할까요?
대중가요는 안될테고..
클래식음악?
미술관에가는것 정도가 되나요?

박효진 2013-04-26 01:04   좋아요 0 | URL
아도르노 본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클래식에 집착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 아도르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예술작품을 대하는 수용자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어떤 유형이나 장르를 즐겨야 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아니고, (뻔한 얘기지만) 작품에 대해 내면으로부터 깊이 감상해보는 자세가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보통 형식을 파괴하는 작품들이 이런 깊은 생각을 자아내기 때문에, 아도르노가 불협화음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실용주의연구 발제. 『로티와 사회와 문화』(김동식 엮음, 철학과현실사, 1997)에 있는 리처드 로티, <낭만적 다신론으로서의 실용주의>(남기창 옮김) 요약. 영어 원문은 in Philosophy as Cultural Politics>

 

   로티는 실용주의를 낭만주의, 다원주의, 공리주의의 결합으로서 파악하고 있다. 낭만주의는 완전함을 향한 개인의 끊임없는 노력과 그 과정에서 취하는 열려있는 태도, 그리고 삶에 대해 개인이 취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특성을 말한다. 다원주의는 이런 개인들의 삶의 태도를 존중하며, 이들의 위계를 결정할 특정한 기준 또는 그에 관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공리주의는 이런 개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가장 추구해야 할 바는 각 개인의 가능한 한 가장 행복한 삶의 방식이며,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경우는 오직 어떤 행위가 다른 사람 또는 사회의 다른 많은 구성원들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 뿐이라는 사회적 삶에 대한 시각을 뜻한다.

 

   이런 식으로 실용주의를 이해하는 입장은 베르텔로의 입장에서 잘 드러나있다. 실용주의에 관한 그의 기준은 니체와 제임스-듀이, 그리고 밀을 모두 같은 실용주의자로서 분류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한 사람의 삶을 표현하고 그것을 유통하는 수단으로서 철학이나 지식보다는 시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낭만주의적 문학작품들에 관해 긍정적이었다. 이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이들이 일신론적이고 플라톤주의적인 기독교에 맞서서 다신론을 긍정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개인들의 수 만큼 다양한 시, 그리고 다양한 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이들에게 다신론과 다원주의는 대체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공통점 못지 않게 차이점 또한 분명히 드러난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이다. 니체는 민주주의에 부정적이었는데, 그것을 이른바 현대의 기독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티는 니체의 이런 정치적, 종교적 태도가 그의 사상에서 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실제로 표방하고자 한 것은 이른바 반표상주의이다. 그러나 이런 반표상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와도, 반민주주의와도 양립가능하다. 니체는 다른 기독교주의자들 그리고 플라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대문자 진리에는 이상적 사회에 관한 지식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공유했으며, 따라서 대문자 진리에 관한 거부는 곧 이상적 사회에 관한 거부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니체에게서는 반표상주의와 반민주주의가 공존했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반표상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종교가 인간의 삶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드러내고, 그 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색채가 탈색되어 사회적 강령만 남은 기독교는 어떤가? 기독교에서 신에 관한 언급과 역설을 제외한다면, 남는 것은 평등과 박애(동포애) 뿐이며, 이것은 실용주의적으로 충분히 수용가능한 것이다.

 

   이런 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로티는 실용주의의 종교관을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종교는 습관이다. 둘째, 종교는 진리와는 무관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소속된 문화의 한 부분이다. 셋째, 진리 개념을 폐기함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활동에 관해 새로운 구분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활동/개인적 활동의 구분이다. 넷째, 종교가 문제가 되는 시기는 그것이 사회적인 것과 결합되어 구분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날 때 뿐이다. 다섯째, 니체는 이런 종교성(그리고 종교적 도덕성)을 도덕적 나약함의 상징으로 보았지만, 반면 제임스와 듀이 그리고 밀은 타인의 행복에 관한 무관심의 징후 그리고 민주주의적 합의를 우회하려는 수단으로서 종교성을 보았다.

 

   실용주의자들의 종교관을 살펴보면, 제임스와 듀이는 많은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미묘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제임스는 종교를 실용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노력했고 상당한 성과 또한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 경험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초월적인 존재 또는 그에 관한 무엇인가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것은 여전히 플라톤주의적인 실수, 즉 진리를 향한 욕구와 행복을 향한 욕구를 구분하고, 진리욕구가 충족되면 행복욕구도 자연스럽게 충족될 것이라는 생각이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듀이는 종교가 아무리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진리성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종교가 권장하는 바를 실천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진리욕구와 행복욕구의 구분을 없앴을 뿐만 아니라 행복욕구만이 인간에게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런 실천을 통해 증명되는 것은 그 종교가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 성격, 자신이 진리라고 설파하는 내용에 관한 내용 전부가 아니라 실천과 관련된 사항들 뿐이다. 이렇게 그는 기독교에서 형이상학적 색채를 빼는 데 성공했고, 그것이 인간의 삶에서 충분히 하나의 시로써 역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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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실수 - 리처드 로티

 <실용주의연구 발제. 리처드 로티,  in Philosophy as Cultural Politics 요약. 원문은 http://blog.aladin.co.kr/russell85/6072772>

  

   로티는 '냉전적 자유주의자'라는 개념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이들은 냉전을 지지한 자유주의자들인데, 언듯 보아서는 형용모순이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경멸하는 데 이러한 표현이 쓰였다. 이런 칭호를 얻을법한 사람들은 주로 예전에 공산주의 정당에서 활동을 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스탈린주의에 의해 강요된 가혹한 당파투쟁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런 당파투쟁은 과연 소비에트 연방이 정의를 구현하고 있는가에 관한 사상적, 철학적 논쟁으로까지 번졌다. 이 논쟁의 진영은 크게 양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공산당적을 유지하고 있는 스탈린주의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당을 포기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이다(로티의 부모가 트로츠키주의자였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이들은 서로를 변절자라고 욕했으며, 상대편을 궤멸시키기 위해서 자본주의적 세력(즉 미국 정부)과 결탁하는 것 또한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많은 지식인들에게 냉전적 자유주의자라는 칭호는 여전히 달갑지 않다. 그리고 이런 칭호를 받는 사람이 되고싶어하지 않고, 비평의 과정에서도 위대한 작가들에게 이런 칭호를 붙이지 않는다. 로티는 조지 오웰에 관한 히친스의 비평을 이런 태도의 좋은 사례로 든다. 오웰은 반-공산주의자였다. 그렇다면 오웰은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지지했을까? 히친스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웰은 반-공산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반-제국주의자였고, 이 둘 사이에서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져야할지 확실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티는 이런 히친스의 확신에 의문을 제기한다. 로티는 오웰이 베트남전을 스탈린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인식했을 가능성 또한 있으며, 만약 그랬다면 오웰은 전-트로츠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참전을 지지했을 것이라 본다.

 

    로티는 이어서 이런 식으로 소설가를 비평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많다고 지적한다. , 오웰에게 "불편한 사실을 직면하는 힘"이 있었다면, 다른 정치적 입장을 취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던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로티가 보기에 히친스는 모든 성실하고(honest) 지적인 사람은 미래의 역사가들의 판단과 거의 일치하는 정치적 판단을 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이 성실함은 경험적 사실에 관해 면밀하게 조사하고, 그에 관해 가감없이 솔직하게 표현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단어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사례가 훨씬 많다. 조지 버나드 쇼는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묵인했고, 예이츠는 무솔리니를 한 때 존경했다. 사르트르는 한때 공산당원으로서 스탈린주의 비판에 소극적이었으며,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에게 매우 공격적이었다. 그러므로 히친스를 비롯해서 이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 관해 로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이들은 지적으로 불성실(dishonest)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지적으로 불성실한 자들은 사실에 관한 조사가 부족했거나, 또는 알고도 묵인하거나 자신을 기만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로티는 이런 태도가 좌파들의 악명높은 깐깐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근원을 더 추적해보면 도덕적-정치적 선택에 관한 고전적 관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릇된 도덕적 선택은, 신중한 선택의 결과 고의적으로 선함을 배반하는 것이라는 기독교적 생각과, 선택에 필요한 원리가 모든 합리적 존재에게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플라톤주의적인 생각의 결합에 의해서 '비합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현대의 많은 도덕철학자들 또한 이런 생각을 많이 수용하고 있다. 반면 듀이는 이 둘의 결합을 이루어낸 것이 칸트라고 생각하고, 이는 도덕적-정치적 선택에 관한 잘못된 관점을 심어줄 수 있으므로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도덕성에 관한 헤겔의 생각, 즉 도덕적 원리란 과거에 우리가 해왔던 것의 성긴 요약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도덕적-정치적 선택은 신념과 욕망의 연결망을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건이라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결과이다.

 

    듀이의 설명방식에 따라 오웰이 왜 정치적으로 옳았는가에 관해 해명한다면, 그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 것이다. 만약 이런 관점을 채용해서 오웰의 정치적 적절함의 원인이 성실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의 정치적 부적절함 또한 그 원인이 불성실함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엘리엇은 <동물농장>의 초고를 받고도 출판하기를 거부했지만, 이것이 그가 불성실하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이런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이전 세대의 정치적 선택에 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스탈린주의를 뒤늦게 포기한 사람들은 그렇게 될법한 여러 조건에 놓여있었을 뿐인 것이지, 그들이 신념으로서 지니고 있던 특정한 원리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만약 그 사람들도 더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면, 스탈린주의에 훨씬 더 빨리 환멸을 느끼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이런 문제에 성실함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왜 많은 성실한 사람들은 영국의 공장과 광산을 보면서 사회주의가 더 나은 정치제도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굴락의 존재가 폭로된 것만으로도 소련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사건이 벌어지던 당시에 이들은 전혀 다르게 알려지고 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판단의 문제에 관해서 섣불리 이야기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이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 듀이는 의사결정에 관한 플라톤주의적 모델은 인간의 삶과 맞지 않기 때문에 무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리스적인 '이성'이라는 말을 '지성'이라는 말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수용한 평론가 가운데 한 사람은 라이오넬 트릴링이다. 트릴링은 인간의 지성이란 인간의 삶의 어려움과 복잡함을 마주하고 대처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인간 이해를 비평에 적용했는데, 그 결과는 인간사에서 이런 대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르가 소설이라는 생각으로 나타났다. 소설은 판단의 합리적 근거가 아니라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 이야기(서사)를 알려준다. 이 견해에 따라서 성실한 사람이라는 개념을 다시 해석하면, 그는 다양한 서사를 가지고 그것이 어떤 도덕적-정치적 판단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된다. 또한 그 이야기들은 완벽하게 구성된 이야기가 아니고 엉성하게 이어지고 있을 가능성도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의 소설 <여행의 중간>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이른바 '냉전적 자유주의자'라고 불릴만한 사람인 챔버스를 모델로 삼아 만들어졌다. 챔버스는 히스가 간첩활동을 하고 있다고 폭로한 최초의 사람이고, 처음엔 공산당에서 활동했으나 이후 반-공산주의자가 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는데, 로티에 따르면 그 이유는 단지 챔버스와 히스 사이의 다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챔버스는 당시 좌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다른 많은 저널리스트, 평론가들과 달리 <타임> 지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반-공산주의적 성향의 기사를 보도하는 데 열심이었다. 이런 그의 성향은 보수적 성향의 발행인인 루스조차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성향이었다. 루스를 비롯한 많은 출판인들, 그리고 미국의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는 2차 대전 당시에 미국과 소련이 협력했던 것처럼 종전 이후에도 두 국가가 협력하는 세계가 되길 바라고, 스탈린이 정말 나쁜 놈인지에 관해서 아무도 섣불리 그렇다고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결국 챔버스의 편집 성향과 논고들은 심각한 반대 이외의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좌파적 지식인들은 공화당 지지자들이 공산주의를 뉴딜 정책을 반대하는 구실로 이용했던 과거를 상기하면서, 같은 역사가 또 다시 반복될 것을 걱정했다. 챔버스는 이런 분위기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으며,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타임> 지를 비롯한 루스의 다른 잡지들의 성향이 자신과 거의 일치하는 방향으로 점차 바뀌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겼다."

 

    그러나 챔버스는 히스와의 그 유명한 다툼으로 인해서 1948년 이후에야 그 이름이 알려졌다. 히스가 완전히 탄로난 뒤에 트릴링의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트릴링이 마치 챔버스를 모델로 막심을 묘사한 것처럼 낸시 크룸과 아서 크룸은 히스를 모델로 만들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미뤄볼 때 트릴링은 이 소설을 쓰던 당시 히스에 관해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히스 부부와 크룸 부부의 이 평행은 우연이지만 놀랍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 관한 광고를 보면 챔버스(와 막심)는 변절자로 묘사되며, 돈 또는 명예라는 이익을 위해 당을 배신했고 그러므로 그는 불성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여러 표현들로 꾸며진다. 그러나 트릴링은 히스의 대변인에게 챔버스에 관해 "명예로운 사람"이라는 답변을 남겼다. 그 대변인은 이것을 풍자의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로티는 이것이 진지한 답변이라고 해석한다. 그 까닭은 트릴링은 그 책의 새로운 판본에 붙인 서문에서 챔버스는 그의 조국을 배반하는 간첩활동에 참여한 전력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명예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로티는 이 문구를 도덕적-정치적 실수가 불성실함이나 멍청함 같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이런 단어들은 도덕적-정치적 선택에 관해 기술하는 데 매우 조잡하다는 생각을 트릴링이 표현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이런 선택과 실수는 소설을 통해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고도 덧붙인다.

 

    트릴링 주변의 많은 인물들이 챔버스에 관해 그가 그런 식으로 묘사하는 것을 마뜩찮게 생각했다. 심지어 부인인 다이애나 트릴링도 그랬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트릴링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비평가 포스터는 조국과 친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조국을 배신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현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이런 식으로 원리를 세워놓고 그 원리에 자신의 판단을 호소하는 것은 구체적이고 복잡한 것 속에서 온전히 살아남기를 싫어하는 책임회피의 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남는 것이 바로 듀이가 말한 지성이 활동하는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의 중간>은 듀이적 삶의 방식을 표현하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라스켈은 막심과 크룸 부부 양쪽 모두와 자신을 차별화하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이러한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크룸 부부는 스탈린주의를 굳게 믿는 사람이고, 막심은 이들이 반드시 파멸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공산주의적 활동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라스켈은 자신이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했지만, 누군가가 당을 떠난다고 할 때 불쾌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미국공산당과 모스크바의 관계에 관한 보수 언론들의 보도는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심의 배신은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도록 라스켈을 몰아붙였다. 그는 누가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하는 위치에 있다. 독자들은 라스켈이 트릴링이 걸어간 길을 걸어갈 것 같은 캐릭터라고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를테면 왈라스 대신 트루먼에게 투표하고, 챔버스의 편에 서서 냉전적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반면 크룸 부부는 스탈린주의에 관해 의심하지 않고, 이런 의심을 일종의 정신적 무질서라고 생각했다. 이런 막심과 크룸 부부를 동시에 바라보는 라스켈은 "크룸 부부에게 배운 것 때문에 막심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는 일견 모순적인 말을 내뱉게 된다. 막심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라스켈에게 설명하며 라스켈 식의 지혜는 이 시대에 필요하지 않다고 대답한다. 승리를 거두는 것은 자신이나 크룸 부부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런 국면에서 라스켈은 막심과 크룸 부부 사이에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트릴링은 이런 공통점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이 소설을 썼다. 막심의 오만함과 크룸 부부의 깐깐함은 듀이적인 의미의 "인간적인 비판적 지성"의 부족이 드러나는 두 가지 방식인 것이다.

 

    막심은 챔버스와 마찬가지로 어떤 절대적이고 보상을 주는 것에 기대어 영웅적이고 단독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삶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챔버스는 동료들의 압력을 어떻게 견뎠는가라는 질문에 "어떤 힘이 내 옆에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크룸 부부는 이에 필적하는 완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스탈린의 악행에 관해 이야기할 때 히스의 부인 프리실라가 그에게 '정신적 자위'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 데서 드러난다. 막심은 마치 키에르케고르처럼, 확실성은 불가능하지만 필요하지 않은 것이기에 성취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대적인 합의는 논쟁에서 이기는 능력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크룸 부부와 히스 부부는 키에르케고르가 "기독교계"라고 부른 사람들의 특징을 그대로 물려받았기에, 구원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었고, 모든 성실한 사람이 자신들과 같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구원으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과 대화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반면 라스켈과 같이 "인간적인 비판적 지성"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무조건적, 자기충족적 계율과 같은 원리에 저항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이에 비추어볼 때, 막심과 크룸 부부는 다 이런 종류의 생각에 자신의 도덕적-정치적 결정을 의존하는 인물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행의 중간>은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쁘티-부르주아적 정서라는 공세에 대해 트릴링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쓴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라스켈을 통해서 드러나며,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왜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지를 우리는 알아차릴 수 있다.

 

    만약 그의 소설을 이런 식으로 읽는 것이 옳다면, 트릴링은 막심-챔버스 뿐 아니라, 크룸-히스 부부 또한 명예로운 사람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챔버스와 히스 모두에게 비열한 동기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이 가져다주는 최선의 선택을 했고, 그것은 챔버스가 공산주의자 그룹을 폭로한 이유이기도 하고 히스가 죽기 전부터 45년 동안이나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간첩활동도 하지 않았고 거대한 음모의 희생자였다는 거짓말을 반복한 이유이기도 하다. 알프레드 케이진은 "앨저 히스는 왜 고백할 수 없었나" 라는 글에서, 히스가 열정적인 애국자라는 것을 확신했다고 적고 있다. 뉴딜 정책을 입안한 것과 소비에트 정보국의 스파이가 된 것은 둘 다 그의 조국애로부터 나온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케이진은 "히스는 자신이 우리보다 더 좋은 미국인이었다는 것을 확신하며 죽을 것"이라고 보았다. 다양한 시간에서 두 사람은 간첩이고 위증자였지만, 그들은 그럴듯한 이유에서 이런 행위를 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이해한 만큼 인간성을 위해서 헌신했지만, 그것은 이후의 역사가들이 그 행위의 결과에 따라 어떻게 그들에 관해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 관련이 없었다. 반면 소설가는 행위의 동기와 행위의 결과 모두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도덕적-정치적 선택에 관한 기독교적이고 칸트적인 생각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든다.

 

 

    덧붙여, 트릴링이 이런 듀이적인 생각을 언제나 확고하게 지지한 것은 아니다. 오웰에 대한 그의 태도는 히친스와 흡사하다. 그는 오웰의 독특함은 머리를 굴리지 않는 것, 즉 간단하고 직접적이고 기만하지 않는 지성만으로 세계와 대면하는 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구절은 우리에게 마치 험프리 보가트가 되고 싶어하는 우디 알렌, 헤밍웨이는 우리 시대에 그가 유일하게 질투하는 작가라고 말하는 트릴링의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트릴링이 단지 오웰을 비평할 때 최선을 다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로티는 오웰이 듀이적인 관점에서도 좋은 작가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는 독특하게 단순하고 진실하게끔 보이는 작품을 만드는 데 매우 공을 들였다. 헤밍웨이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런 단순함과 건실함들을 차분히 모았다. 물론 이 작가들이 트릴링과 히친스가 보인 것과 같은 반응을 바란 것은 사실이나, 이들이 이런 작업을 할 때는 어떤 거부감을 일으킬만한 것도, 어떤 위선적인 것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이런 시도들은 당신에게 없는 덕목을 있는 척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덕있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행위들을 수행하며 자신이 점차 덕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문제라는 것이다. 한쪽 편에서는 이런 시도에 대해, 직접적이고 명증한 선함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면 단지 위선적이라고만 말할 뿐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나 듀이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런 직접적인 관계가 가능하다는 환상은 오웰에 관한 트릴링의 글의 제목인 "진리의 정치학"에서 암시된다. 정치적인 실수를 피하는 방법은 성실하게 진실들을 모으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과학이 없는 것처럼 진리의 정치학 또한 있을 수 없다. 갈릴레오는 지적인 옳음이라는 칼로 미신과 편견을 쳐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될 결과를 산출하는 현명하고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갈릴레오는 근대의 영웅이 되었다. 오웰도 마찬가지로 20세기의 영웅이 되었다. 시대의 편견에 저항하는 이런 영웅들을 존경하는 것은 완전히 적절하며, 필수적이다. 만약 이런 존경이 없다면 도덕적 이상주의도, 도덕적 진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버나드 윌리엄스가 "도덕적 운"에서 쓴 내용을 잊어서는 안된다. 고갱은 이런 영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취급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가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면, 고갱은 아마 수십년 동안 불쌍한 캔버스나 만들어내고 자신이 회화의 역사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키는, 앨저 히스같은 종류의 화가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갈릴레오는 그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옳다고 논증하기 위해 노력한 라이프니츠의 용감하고 공상적인 현대적 버전 정도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부적절한 사례들이다. 정치학의 역사는, 과학의 역사처럼 사물들이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게 되는지에 관한 관점에서 쓰여진다.

 

    영웅숭배가 도덕적 진보를 위해 필수적이라고만 한다면, 이것은 혐오스럽다. 그러나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어떤 사람이 성실하게 하더라도, 어떤 한 사람에 의해 혐오를 받을 수 있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노예제를 유지하려고 싸우는 리 장군의 결정에 의해 혐오받았지만, 그렇다고 리 장군이 명예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도 나치의 아이히만이나 소련의 수슬로프와 식사를 같이 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삶의 서사가 오웰과 트릴링 그리고 우리가 각자의 삶에 관해서 하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일관성을 가진다는 사실은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성실함과 명예로움은 이런 이야기의 일관성의 정도에 달려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의 삶을 선한 것으로 드러나게끔 자신의 삶에 관한 소설을 구성할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어떤 사람도 의식적으로 악하지는 않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진짜 의미하는 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적이고 칸트적인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들 대부분이 자기기만이나 불성실함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일관성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필요로 하게 되고, 결국 모든 인간에게 명료하게 보이고 우리의 삶을 인도해주는 별과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르고, 별과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은 엉성한대로 일관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찰지게(긴밀하게) 만드는 것이 후세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있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거부한 사람들은 나쁜 것 같고,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착한 것 같다. 그렇지만 이들을 인도해주는 별 같은 것은 없었다. 이런 생각은 역사의 심판이라는 것도 완전히 그를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우리의 후손에게도 별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적 판단을 하길 멈춰야 한다거나, 또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나치가 승리하고 그들이 역사를 쓰더라도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한 사람들은 옳다고 말할 수 있으며, 만약 우리의 아이들이 라스켈보다는 막심이나 크룸과 더 비슷해지려고 하면 아이들을 꾸짖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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