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도시 - 대규모 전염병의 도전과 도시 문명의 미래
스티븐 존슨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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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감염도시> 시작합니다.


콜레라는 인류보다 더 오래 생존해온 세균 때문에 발생하는 질병으로, 인류의 역사와 늘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인도와 아시아에서 큰 강을 끼고 발달한 몇몇 도시에서만 가끔 발생했을 뿐, 전인류를 위협하는 질병은 아니었죠. 하지만 1500년대 이후 유럽의 대외정복사업에 따라 인력과 자원의 국제적 이동이 활발해졌고, 콜레라 또한 이 흐름을 따라 유럽과 미국 땅을 밟습니다. 마지막 안전지대였던 영국마저 1800년대 초에 첫 감염자가 발생했고, 아주 짧은 시간에 진행된 도시화로 인해 높아진 인구밀도와 비참한 수준으로 떨어진 위생환경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러나 원인도 해결책도 오리무중인 채로 시간은 흘러가죠.


1854년 8월 런던 뒷골목 브로드 가의 한 아이가 전형적인 증상을 보인 뒤, 콜레라는 하루에 수십 명의 사망자와 수백명의 감염자를 발생시키며 삽시간에 런던을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콜레라의 원인을 잘못 진단한 보건당국의 조사와 정책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가는 가운데, 마취가 전문분야인 의사 존 스노우는 보건당국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콜레라 환자들을 조사하고, 감염자들의 분포를 나타내는 지도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교구 목사였던 헨리 화이트헤드는 사망자들을 위한 장례를 치르기 위해 돌아다니던 도중 스노우를 만나게 됩니다. 스노우는 콜레라의 원인을 제대로 밝히고 방역에 도움을 주는 정책을 제시하게 될까요? 의사 스노우와 목사 화이트헤드의 만남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1854년 발생한 콜레라 감염사태를 배경으로 1800년대 런던의 풍경, 도시화의 진행과정과 양면성, 의학과 역학의 발달 등 다양한 주제를 압축해 꿰어놓은 책, <감염도시>입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두 단어로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꼽은 키워드는 “패러다임”입니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나오는 단어라는 건 너무나 유명합니다. 견본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파라다이그마’에서 온 단어이면서 동시에 이 단어의 고대 그리스어 용례가 지식을 뜻하는 단어 ‘에피스테메’와 거의 같다는 것도 언급해두고 가면 좋겠네요.


저는 학생들이 패러다임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알고 그 개념을 논술이나 기타 필요한 곳에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단계 자체는 이제 지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개념의 의미는 심지어 토마스 쿤 스스로도 엄밀하게 정의하는 데 실패했어요. 이게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에 가장 많이 가해진 비판 중 하나일 정도입니다. 또 이제 어느 곳에서나 패러다임이라는 단어가 다 쓰이기 때문에 대강 어감만으로도 “특정 시대에 다수의 사람들이 따르는 신념체계”정도로 다들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를 쓴다는 것 자체로 멋있어보이는 시대는 이제 지났습니다.


다른 학생들과 차별화하려면, 실제로 과학의 어떤 영역에서 어떤 시기에 어떻게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관해 구체적인 정보를 습득하고 그걸 활용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책의 내용이 바로 패러다임의 교체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게다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관한 패러다임이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는 걸 계속 보고 있는 이 때에 시의성까지 갖춘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질병의 “나쁜 공기” 원인설과 물 원인설의 대립입니다. 질병에 관해서 당시에 존재했던 두 가지 패러다임입니다. 보건당국을 지휘하는 사람들은 “나쁜 공기” 원인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고, 반면 존 스노우는 물 원인설을 지지하는 사람이죠. 화이트헤드 목사는 나쁜 공기 원인설 지지자였다가 존 스노우를 만나서 설명을 들은 뒤 물 원인설로 돌아서고요. 존 스노우가 나쁜 공기 원인설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기체로 진통효과를 내서 수술을 하게 하는 마취 기술의 전문가여서 공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 마치 지금 우리나라 질병관리본부가 하는 것처럼 감염자 및 사망자들의 행적을 추적하고 정리한 결과 브로드 가 펌프에서 나온 물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진 않습니다. 사람들이 패러다임의 변화에 관해서 흔히 두 가지 도식을 떠올리는 것 같은데요. 하나는 틀린 옛것과 맞는 새것의 대립이라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입증할 수 없는 것 두 가지 사이의 대립이니 맞고 틀린 걸 가릴 수 없다는 무책임한 상대주의의 관점입니다. 하지만 거의 모든 패러다임 교체 상황에서 이 두 도식은 거의 들어맞지 않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양쪽 다 맞지만 어느 한 쪽이 더 잘 맞고, 더 잘맞는지 검증하는 실험을 거쳐 실용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면 그걸 사실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겁니다.


나쁜 공기 원인설과 물 원인설은 각각 맞는 면과 틀린 면을 모두 갖고 있고, 오히려 새로 등장한 이론인 물 원인설이 입증 논리와 증거가 훨씬 더 빈약하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도 나오지만 나쁜 공기 원인설을 지지한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이가 나이팅게일인데, 실제로 나이팅게일은 나쁜 공기 원인설에 기반해서 군병원 시설을 개선하고 간호체계를 수립함으로써 크림전쟁에서 영국군 측 말라리아를 퇴치한 것으로 유명해진 사람이거든요. 그렇다면 나쁜 공기 원인설을 알아서 거부할 이유가 없어지죠. 실제로 말라리아는 위생환경이 좋지 않아 생긴 모기가 옮기는 질병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후대의 사람인 우리는 다 알고 있듯이,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에선 옳았고 런던 콜레라 사태엔 틀렸던 것일 뿐입니다.


콜레라 사태에 옳았던 사람인 존 스노우조차 실제로 원인균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애초에 펌프를 잠정적으로 원인으로 짚은 상태에서 조사에 들어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치 보건당국이 공기를 원인으로 찍어서 그에 관한 조사를 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럼에도 존 스노우는 자신의 가설을 입증할 자료, 반대사례처럼 보이는 것을 가설 안에서 설명한 근거를 충분히 준비해서 가설이 믿을 만한 것이라는 점을 사람들에게 보였고, 정책에 반영해 실용적 목적에 봉사한다는 점을 증명한 것입니다. 결국 콜레라에 관해서는 물 원인설이 옳다는 가설에 대한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냈고요.



2제 아이랑 투게더


더 재미있게 읽을 당신에게 보내는 애드온 서비스, 2제 아이랑 투게더입니다.


제가 꼽은 책은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입니다. 과학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은 크게 철학, 역사, 사회학 등 여러 관점에서 이뤄지고 이들을 보통 묶어서 “과학사/과학철학”, 또는 과학기술학(STS)이라고 부릅니다. 패러다임 개념은 이 분야의 최고 히트 상품인 것 같지만 막상 <과학혁명의 구조> 직접 읽는 거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또 패러다임 이야기 할 때 천동설/지동설 이야기 주로 하는데 이건 쿤이 직접 한 얘기고 오해 많이 샀고요, 조금 잘난 척하고 싶으면 뉴턴역학/상대성이론 얘기를 꺼내곤 하는데 상대성이론이 뭔지 이해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함정입니다. 이마저도 옛날 공부를 하신 어른들에겐 신기한 내용이지만, 학생들에겐 식상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꼽은 책이 <과학, 철학을 만나다>입니다. 일단 쉽습니다. EBS에서 했던 TV강연을 그대로 책으로 내서 그렇습니다. 최고의 장점. 또 화학 분야의 논쟁에 중점을 둬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에 우리 생활에 좀 더 밀접한 주제들로 꾸며져있어 신선합니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이후에 진행된 여러 논의도 담고 있고요. 책으로 읽기 지루할 때 유튜브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인데요. EBS 채널에 전편이 모두 올라와 있어서, “장하석”으로 검색하시면 다 볼 수 있습니다. 편 당 1시간씩 14편으로 조금 길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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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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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벤야멘타 하인 학교> 시작합니다.


중학생이 읽기엔 약간 어렵고, 고등학생들에겐 어떻게 다가갈지 가늠이 잘 안되는 책입니다. 뒤에 소개할 서술양식 때문에 호불호가 많이 갈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로 고전으로 불리는 책들이 다 그렇죠...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두 단어로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꼽은 키워드는 “중2병”입니다. 이 소설의 문제에서, 이 책의 제목이면서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야콥 폰 군텐의 정신상태를 가리키기에 가장 적당한 말이 아닐까 생각하며 골랐습니다.


<벤야멘타 하인 학교>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인데, 소설의 중심을 차지하는 내용은 사건이 아니라 군텐의 의식의 흐름입니다. 아주 집요하게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에 가닿았는지만 이야기하고 있어서, 실제로 그의 주변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구조로 쓰여있다는 걸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생각이 되는대로 튀다보니 일관성이나 지속성이 없고,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감정의 진술이 시도때도 없이 등장합니다. 때로는 주인공이 이야기하고 있는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지조차 의심스러워지는 지점도 있습니다. 군텐과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대화를 나눕니다. 대화라기보단 독백에 더 가까울 것 같은데, 군텐에게 실제로 건넨 말인지 아니면 군텐이 그렇게 해석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인지도 추정하기 대단히 어렵고요. 이런 상태를 “자기 자신에게 매몰돼있다”고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군텐의 이름으로 미뤄보건대 그는 아마도 예전엔 잘나갔지만 지금은 몰락한 귀족의 자식인 것 같습니다. 그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이유가 없어 납득할 수 없는 사회적 압력”의 끝판왕, 즉 “아무 것도 배우지 말고 하지 말아라”라는 벤야멘타 학교의 지침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아직도 한국어판 제목처럼 이 학교가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 최소한 이 학교가 생각하기를 멈추라고 계속해서 지시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걸 가장 잘 드러내는, 주인공의 거울쌍으로 존재하는 캐릭터가 크라우스겠죠. 명령을 잘 따르고, 지시에 대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불만을 표출하지 않고, 그렇게 해서 결정적으로 생각하는 주체가 되기를 포기한 상태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상태는 역설적으로, 주인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모든 걸 처리해야 하는 하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덕목이 되겠죠.


이렇게 자기 내면으로 가라앉아버리는 상태는, 성장 과정에서 겪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의 과정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고,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이유가 없어 납득할 수 없는 사회적 압력을 실천해야만 하기도 하고,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지만 동시에 어느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나만의 세계를 쌓아 나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은, 이렇게 상충하는 욕구들로 가득한 상태가 바로 중2병에 걸린 상태 아닐까요?



2제 아이랑 투게더


더 재미있게 읽을 당신에게 보내는 애드온 서비스, 2제 아이랑 투게더입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이 학교가 정말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가 맞다면, 자신에게 매몰된 군텐의 정반대편격인 인물을 제시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몇 년 전 노벨문학상을 수상해서 유명해진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입니다. 1930년대 영국의 친독일파 귀족의 집에서 집사로 일하는 사람이 주인공인데, “주인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주인의 지시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신조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사랑에도 실패하고, 주인집에 드나들던 나치당의 장교들을 대접해주면서 2차 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죠. 전쟁이 시작되면서 나치에 우호적이었다는 이유로 주인은 몰락하고, 그 귀족의 집은 미국의 기업가에게 팔리면서 주인공은 일자리를 잃고 맙니다. 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는 여전히 “나는 주인의 명령을 받아 일하는 사람이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계속해서 생각합니다. 같은 제목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주인공 역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영혼없는 연기가 끝내주는 꽤 볼만한 영화입니다. 마치 <벤야멘타 하인 학교>의 크라우스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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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공 - 공놀이는 어떻게 인류를 진화시켰나 세계사 가로지르기 19
김은식 지음 / 다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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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세상을 바꾼 공> 시작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스포츠”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종목을 말해보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공을 갖고 노는 게임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축구, 야구, 농구를 비롯해 테니스, 골프, 탁구, 미식축구 등등등. 우주인이 지구에 와서 우리들을 본다면, 그들은 “호모 사피엔스는 둥글고 탄력있는 물체를 보면 매우 흥분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왜 “그깟 공놀이”에 미쳐있는 것일까요? 이 종목들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우리 곁에 있는 공놀이들의 기원과 그 사회문화적 의미가 궁금하신가요? 공을 만드는 소재의 발전에서부터 민주주의 평등사회와 민족주의와 연관된 정치적 상징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그깟 공놀이”가 아닌 인류와 함께해온 공놀이의 여정이 궁금하신가요? 아이와 함께, 부모님과 함께, 공놀이 뒤에 잠깐 쉬며 <세상을 바꾼 공>을 읽어보세요. 이 책을 읽은 뒤엔, 공과 공놀이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시선이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과 이 책을 읽으며 수업을 해보았는데, 정치와 스포츠가 연관되는 부분이 어렵다는 의견이 꽤 많았고, 저도 학생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추상적이지만 소속감이 느껴지는 “사회”라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시점이 되어야 이 책의 내용이 수월하게 이해가 될 것 같은데, 아마도 고등학생 정도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두 단어로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꼽은 키워드는 “해태 타이거즈”입니다. 기아 타이거즈 아니고, 해태 타이거즈입니다. 저는 기아 타이거즈도, 해태 타이거즈의 팬도 아니지만, 이 팀에서 오래 뛰었던 투수 이강철 선수, 현 KT 위즈 감독님의 팬입니다. 또한 5월 광주 민주화운동 주간에, 광주를 연고로 삼고 있는 해태 타이거즈를 다루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선수가 소속돼있던 팀, 그리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헌정방송으로 2종 보통 키워드를 꾸려볼까 합니다.


외국에 민주주의와 저항의 상징인 팀으로 FC바르셀로나가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정치적 상징이 강한 구단을 꼽는다면 누가 뭐라해도 해태 타이거즈일 것입니다. 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촉구 시위를 무력으로 짓밟고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라고 쓰고 환심을 사기 위해 라고 읽는) 이전 박정희 정부에서 채택해왔던 강력한 문화적 억압정책을 서서히 완화하기 시작합니다. 책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이른바 영화, 스포츠, 성을 줄여서 말하는 3S 정책으로 유명한, 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문화적 전략이었죠. 프로야구의 개막도 3S 정책의 일부였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광주를 연고지로 삼고 출발한 해태 타이거즈는, 지역차별과 정치적 억압을 스포츠로 넘어서고자 하는 호남인들의 열망 전체를 담은 상징이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전라남북도를 다 합쳐도 광역시도 하나, 프로야구팀도 하나인 것을 보면 다른 지역과의 경제적 격차가 얼마나 벌어져있는지 알 수 있죠. 프로야구 출범 이전 아마추어 야구에서 강팀으로 손꼽혔던 광주일고 야구부의 인력을 거의 그대로 흡수한 해태는 82년 창단 이후 97년까지 15년 동안 무려 9번이나 우승팀이 되어 호남 사람들의 마음을 약간은 어루만져주었습니다.


자료를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해태 타이거즈 시절 응원가 중에 하나가 이난영 선생의 <목포의 눈물>이었다고 합니다. 원곡은 잘 모르지만 리메이크 곡을 통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루시드 폴의 리메이크 버전을 제일 좋아하는데, 배경음악으로 깔아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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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과 같이 보시면 좋을 영화를 하나 들고 왔습니다. 2002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YMCA 야구단>입니다. 네이버에서 1천원에 구매하실 수 있고요, 이 책의 4장에 등장하는 한국 최초의 야구팀인 YMCA팀의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감독은 김현석인데, 연출작품 중에 야구 영화가 세 편이나 있고, 최근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연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영화의 주연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정말 화려한데요, 김혜수, 송강호, 황정민, 고 김주혁 배우입니다.


스포츠와 함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이 책에서 계속 언급되는 주요 주제 중에 하나인데요, 이 “근대”라고 하는 것이 어떤 특성을 지니는 시대인지를 이 영화 속에서 그럴듯하게 포착해내고 있습니다. 왕조국가 조선에서 정신적으로 벗어나는 양상, 신분 없는 평등 사회, 엄격한 규율과 규칙에 따라 훈련하고 움직이는 “스포츠”로서의 운동, 구성원 사이의 갈등과 반목을 넘어서 하나의 유기체로서 움직인다는 팀 스피릿, 일제강점기에 식민통치를 당하는 한국인들의 민족 감정을 대변하는 상징적 집단으로서의 야구팀 등 여러 복잡한 요소를 편향 없이 세련되게 그려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제 20년이 다 되어가는 영화인데다, 명작이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부족해서 약간은 오글거리고 낡은 티가 나긴 합니다. 이런 점들만 약간 참고 넘기신다면 여러가지 면에서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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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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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철학자와 늑대> 시작합니다.


이 책을 쓴 마크 롤랜즈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논문을 쓰는 철학자입니다. 처음 강사생활을 시작하던 시절 아름다운 외모에 이끌려 늑대 한 마리를 기르기로 결정하고, 브레닌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리고는 브레닌이 늙고 병에 걸려 안락사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11년 동안 함께 지냅니다. 훈련시키면서 느낀 점, 자신이 채식을 시작했을 때 늑대도 채식을 시켜야하는가 생각했던 경험, 산책 중에 길을 잘못들어 전기철조망에 감전됐던 사고, 다른 개들이나 다른 사람들 나아가서 세상과 브레닌이 관계 맺는 방식, 오랜 기간 동안 병간호를 했던 상황 등 늑대 브레닌과 함께 지내면서 생긴 에피소드는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하고,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 깨달은 것들을 솔직하게 서술함으로써 롤랜즈는 철학적 고민과 사유의 깊이를 더해갑니다. 늑대를 통해 사람을 이해하는 여정을 담은 철학자의 일기장, <철학자와 늑대>입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두 단어로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뽑은 키워드는 “실존주의”입니다. 인간의 조건, 자유, 시간, 죽음 등과 연관된 아이디어를 많이 제시한 철학사조이고, 이 책의 2장 “나의 늑대가 되어줄래?”, 8장 “시간은 롤렉스 시계가 아니잖아”, 9장 “꿈 속에서 다시 만나자” 에서 다루는 내용이기도 하죠. 이 책을 쓴 마크 롤랜즈는 늑대의 행동방식을 관찰하면서, 늑대가 세상을 대면하는 방식이 어쩌면 실존주의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실존주의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책의 목차에도 나와있는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일텐데요.


사르트르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에드문트 후설이라는 독일 철학자를 언급하고 가야합니다. 책에서도 등장하는 사람이죠. 후설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바깥을 향해 있다고 해요. “나는 생각한다”는 말은 언제나 생각의 내용을 포함하며, 아무런 대상 없이 성립되는 정신적 활동은 없다는 뜻이죠. 만약 인간이 정신적 존재라면, 인간의 존재 또한 정신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정신의 활동을 구성하는 대상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성될 것입니다. 인간 정신의 이런 특성을 후설은 “지향성”라고 합니다.


이런 후설의 주장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프랑스에 소개하면서 유명해진 사람이 사르트르입니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철학자들은 개별적인 존재들에 관해 생각할 때 “종의 특성”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인데, 인간의 다른 특성은 동물이나 식물과도 공유하는 반면 이성적 사고와 영혼의 소유는 다른 동물에게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고유한 특성은 이성적 사고 능력과 영혼의 소유라는 식입니다. 이렇게 특정한 종을 규정하는 특성을 본질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라 철학자들은, 가장 완전한 인간은 이 본질을 가장 잘 구현하는 인간이고, 인간의 삶은 비인간적 활동을 줄이고 인간적 활동을 늘리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즉, 동물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인간의 존재 양식이며 자유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이것이 인간의 존재 양식에 관한 잘못된 파악이라고 주장합니다. 후설의 논의를 이어받은 사르트르는 정신이 근본적으로 수동적이고 외부의 대상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이성적 사고 능력”이나 “영혼” 등의 본질을 지니고 태어나는 사건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는 주변과 맺는 관계에 의해 인간으로 “만들어집니다.” 나아가 서로 다른 환경과 관계를 맺고 있는 개별 존재들은 종적 특성으로 한데 묶을 수 없을만큼 수많은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니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종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닌 관계의 개별적 산물로서의 존재 양식을 가리키는 사르트르의 용어가 바로 “즉자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는 관계에 의해 무기력하게 규정되기만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선, 최소한 인간만은 이러한 관계를 자신에서부터 출발해 규정할 수 있는 능력, 존재 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능력은 지금 내 존재가 주변 환경과 관계맺은 방식을 통해서 생성되었다는 반성에서부터 출발해, 대상으로서의 세계 속에서 내가 어떤 부분에 관심을 쏟을지 선택하고 결단하는 의지로 나아갑니다. 사르트르에겐 이렇게 관계를 맺을 대상을 선택하면서 형성하는 이러한 활동이 인간의 자유의 핵심이며, 이런 능력을 가진 존재인 인간을 “대자 존재”라고 부릅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실존주의 시”로 흔히 언급되는 김춘수의 <꽃>이 이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내가 “꽃”이라고 부르기 전에 그 대상은 세계 전체와 구별되지 않는 ‘그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의를 기울여 “꽃”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꽃은 세계 전체로부터 떨어져나와 내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로 자리잡습니다. 동시에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꽃을 내 세계로 받아들여 변화한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나와 같지 않은 새로운 존재가 되죠. 이렇게 인간은 대자 존재로서, 나의 세계와 세계 속의 나를 동시에 생성하는 끊임없는 과정에 놓여있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 마크 롤랜즈는 단지 인간 뿐만 아니라 늑대도 이런 생성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제 아이랑 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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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추천해드리고 싶은 책은 피터 고프리 스미스의 <아더 마인즈: 문어, 바다, 의식의 기원>입니다. 우선 철학자가 쓴 동물 관련 에세이라는 점에서 <철학자와 늑대>와 공통점이 있고요. 문어를 다뤘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문어는 최근 동물의 지능이나 진화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흥미를 끄는 동물인데요. 일단 지능이 매우 높고 의식적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신경세포의 분포가 육상생물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늑대와 함께한 삶이 인간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고 말하는 <철학자와 늑대>처럼, <아더 마인즈> 또한 문어를 관찰하면서 인간의 의식과 지적 활동이 어떻게 진화해왔고 작동하는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철학적 내용 이외에도, 진화를 다룬 다른 책에서는 상대적으로 적게 다뤄지는 해양생물의 진화에 관한 정보, 문어의 행동에 관한 다양한 실험에 관한 설명이 흥미를 끄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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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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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 퀵서비스


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빌리 엘리어트> 시작합니다.


소설 <빌리 엘리어트>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만든 같은 제목의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기반해 영국의 소설가 멜빈 버지스가 재창작한 소설입니다. 주인공 빌리 엘리어트는 탄광촌에서 광부인 아버지 재키 그리고 역시 광부이면서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형 토니와 함께 사는 12세 청소년입니다. 권투 수업 중에도 우아한 동작을 생각하며 옆에서 진행되는 발레 수업에 눈길을 계속 주던 빌리. 혼자서 몰래 발레 동작을 따라하다가 발레 교사인 윌킨슨 선생님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마는데, 선생님은 빌리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고 발레를 가르치기 시작하죠. 하지만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는 여성들이나 하는 발레를 빌리가 배우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탄광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 때문에 벌어진 파업으로 인해 학원비를 지원하는 데 더욱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빌리의 강한 의지와 윌킨슨 선생님의 설득에 아버지 재키는 마음을 바꾸었고, 빌리는 왕립 발레 학교 입학을 위한 지역 오디션을 준비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한 오디션 직전, 형 토니는 파업 시위 도중 경찰을 다치게 한 죄로 재판에 넘겨지고, 가족의 재판에 참석해야 했던 빌리는 지역 오디션에 불참하고 맙니다. 윌킨슨 선생님은 크게 실망했지만 아직 런던에 직접 가서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겨울에 난방조차 할 수 없어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인 피아노마저 부숴 땔감으로 사용한 빌리의 가족을 포함해, 탄광촌의 모든 사람들이 오늘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는 마을회의에서 빌리를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특히 방금 재판을 받아 마을 사람들의 영웅으로 떠오른 토니의 연설 덕분에 빌리는 가족들과 함께 런던으로 가 오디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빌리는 오디션에 합격했을까요? 탄광촌 사람들은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산업구조의 급변에 직면해 쇠퇴해가는 1970~80년대 영국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계급 격차, 젠더 갈등, 가족과 공동체의 역할, 성장기 청소년의 성정체성 고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를 가로지르는 명작 소설, <빌리 엘리어트>입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두 단어로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꼽은 단어는 <지역문화>입니다. 영국에서 석탄은 산업혁명 시기부터 가장 중요한 자원 중 하나였습니다. 전세계 다른 모든 지역에서 점진적인 경제적 발달이 이뤄져 산업혁명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영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이유가 가까운 곳에서 석탄을 캐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역사학자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탄광지역은 가장 빨리 공업화된 지역입니다. 일자리가 생기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이 모여들면 문화가 생겨나죠. 이렇게 이른바 “노동자 문화”가 최초로 생긴 지역에서 발생한 소설 속 사건들이 보여주는 문화적 단면을 통해, 우리나라의 공업화된 지역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볼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주인공 빌리를 갈등으로 몰아넣는 것은 권투와 발레라는, 성별에 따라 이분화된 아이들의 선택지입니다. 나는 발레가 더 좋아보이는데 아버지와 형은 내게 권투를 배우라고 하고, 권투를 할 때에도 “요리조리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현대적으로 하고 싶은데 이 사회는 “정정당당하게” “남자다운” 옛날식 복싱을 선호합니다. 이런 이분법은 성장하고 난 뒤에 아이들이 어떤 직업을 가지면 좋은지 판단하는 사회의 선호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권투를 배우는 이유는 권투 선수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아버지 재키가 반복하는 말처럼 “빌리 또한, 내가 했고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했던” 광부 일에 적합한 강인한 체력과 태도를 갖기 위해 훈련하는 과정입니다. 광부에게 “요리조리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일은 거의 필요하지 않을테니까요.


반면에 여자 아이들이 발레를 배우는 이유는, 적어도 제가 읽은 경험으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윌킨슨 선생님이 “중산층” 가정의 구성원으로 등장한다든가, 런던에서 잘 사는 사람들이 배우는 게 발레라는 식으로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가 생각하고 있었고 발레 학교 입학과 교육에 실제로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드는 등의 설정을 보면, 권투와 발레라는 소재는 계급과 경제적 격차에 관한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상력을 약간만 더 발휘해보자면, 이 탄광촌 공동체의 남성들에겐 중산층이 가져야 할 여러 특성이 불필요하거나 낮게 평가받는 데 반해, 여성들에겐 탄광촌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 못지 않게 중산층이 가져야 할 우아함 같은 덕목 또한 가져야한다는 문화적 압력이 존재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발레를 하는 빌리 그리고 빌리의 친구이자 여장을 좋아하는 크로스 드레서인 마이클은 이런 지역/노동자 문화의 경계에 위치한 캐릭터입니다. 이 둘은 "호모"라는, 남성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 정도로 탄광촌 사회의 성역할과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인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좋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빌리는 발레 학교 오디션을 받겠다는 소원을 마을 사람들로부터 공인받은 반면, 마이클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처지라는 점은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요.


“탄광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일인 것 같기도 하지만, <빌리 엘리어트>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광부입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그 동네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광부라면, 광부들의 모임은 경제활동을 하는 마을사람 전체의 모임과 차이가 거의 없겠죠? 그래서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가 거의 일치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한국의 주요 도시에선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기도 합니다. 한 동네 사는 사람이 모두 광부이거나, 한 회사의 회사원이거나, 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거나 하는 경우 말이죠. 이렇게 한국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한 커뮤니티 안에 살아가는 것을 소셜 믹스, 사회적 계층 혼합이라고 하는데요.


돈이 없는 빌리네 가족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주는 장면이 제 눈에 띈 이유는 이 사실과 이어집니다. 마을회관에서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를 심사하고 의결하는 풍경 자체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일은 아니지만, 이 회의에서 "누구누구네 집 아들 유학비용을 모으자"는 내용을 논의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낯선 풍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듯 사람들의 모임이 사실상 노동조합의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즉, 파업에 참여하는 광부 노동조합이 소설의 중요한 배경인 이유는,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가 조합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광부 노동조합 자체가 이 소설의 문화/정치/경제/사회적 요소가 유지되도록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노동조합는 대기업 공장 노동자들이 결성한 이익집단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유럽에서 상당수의 노동조합은 보험이나 연금 업무도 자체적으로 집행하는 등 동업자 공동체의 기능도 같이 수행합니다.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이유로, 중세 길드의 전통을 노동조합이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길드란 중세에 있었던 같은 종류의 제품을 생산하는 장인들의 공동체입니다. 흔히 역사나 경제학에서 길드는 공급을 독점해 가격을 통제하고 기술을 공개하지 않는 등 경제의 발전을 방해한 집단으로서, 자본주의, 공장에서의 대량생산, 시장경제의 발달과 함께 그 힘을 잃어 사라진 경제주체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길드가 관리하는 영역은 생산과 판매에 국한되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넓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생활밀착형 보험과 연금입니다. 길드 구성원들은 길드에 소속된 댓가로 원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판매가격을 보장받으며 다른 곳에서 개발된 선진 기술에 대한 정보를 거의 댓가없이 받을 수 있었는데, 이에 대한 보상으로 길드에 회비를 냅니다. 길드는 이 회비를 이용해 부상을 당해 일을 할 수 없게 된 길드원에게 생계비를 지급하거나,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은퇴한 장인에게도 돈을 주었습니다. 일종의 상호부조라고 할 수 있는데요. 노조 장학금이라거나 노조 연금보험, 노조 상조회 같은 이름이 낯설지 않고, 탄광촌에서 빌리의 일을 처리하는 게 감동을 주는 일회성 이벤트처럼 보이기보다는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 가운데 빌리의 안건이 올라간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2제 아이랑 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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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를 재미있게 보신 분들에게 무엇을 추천해드릴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영화 두 편이 생각났어요. 두 개 모두 영국을 배경으로 할 뿐만 아니라 영국의 사회상을 통해 계급갈등과 문화격차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인데요. 한 개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영화이기 때문에 아이랑 같이 보는 걸 권해드릴 수 없어요. 나머지 하나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좌파 성향 감독이라고 평가받는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15세 등급이고, 복잡한 상징 해석이 필요없는 아주 직관적인 영화라 아이와 함께 보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늙은 목수 다니엘와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케이티의 일상을 비춰줍니다. 여러 측면에서 <빌리 엘리어트>와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요. 다니엘을 통해서 산업구조, 경제정책, 사회문화의 변화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어려운 상황에 처하는지 보여주고, 케이티를 통해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의 시선이 얼마나 뿌리깊고 심각한지를 보여줍니다. 이 둘의 삶을 제대로 보듬어주지 못하는 영국 사회와 국가 행정 체계에 대한 비판도 함께 담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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