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연습 발제>

 

우리의 지식 주장들은 때때로 우리가 실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오류에 빠진다. 이것은 모든 지식 주장을 위한 정당화를 약화시키는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경험적 믿음들은 대부분 지식이지만, 가끔은 그 경험적 지식들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도 있다. 이는 우리가 추론 과정에서 저지른 실수 때문일 수도 있고, 특정한 인식적인 조건이 만들어낸 결과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실수를 알고서 그 믿음을 지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추론된 믿음을 지식으로 수용할 수도 있고, 다른 인식적 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에서 생겨난 믿음과 기존의 지식을 비교해 검토해보는 경우도 있다. 이런 교정의 과정은, 실수를 저질렀다거나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있지 않다는 등의 ‘오류’에 우리가 빠졌다는 것을 저 알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대개 오류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시간을 들여서 그것을 교정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회의주의적 논증은 우리가 결코 ‘오류’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 수 없는 경험적 믿음이 가능한 인식적 조건을 제시한다. 이들은 ‘꿈 논증’과 ‘악마 가설’로 불린다. 이 두 논증이 일관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우리의 지식은 모두 실재와 비교했을 때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 둘째, 우리 스스로의 인식적 능력은 지식에 속하는 그 믿음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가려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어떤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이 우리의 인식적 능력에만 포함되는 과제라면, 우리는 데카르트가 제시한 인식적 조건 속에 있을 경우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를 하더라도 거짓인 믿음을 정당화할 뿐, 그 믿음을 지식으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논증은 ‘만약 악마가 있다면, 모든 경험적 지식은 거짓이다.’고 형식화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논증은 지식에 관한 회의주의를 뒷받침하는 적절한 논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제인 ‘악마가 있다’는 것(또는 통 속의 뇌, 영화 《매트릭스》, 《트루먼 쇼》 등 회의주의적 의심을 유발할만한 모든 전제)이 우리의 평범한 인식적 능력을 훨씬 뛰어넘어야만 알 수 있는, 그러므로 지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믿음들에 관한 신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논증이 그 의도에 따라서 지식에 관한 우리의 주장을 약화시키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그 논증에서 제시된 인식적 조건이 참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가 이 조건에 관한 믿음들을 인식적 능력을 통해 지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두 조건이 충족된다면, 기존의 지식을 조건에 관한 믿음들과 함께 검토해보고 경험적 믿음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악마 가설의 문제점은 둘째 조건을 무시한 채 첫째 조건만 충족시키면 경험적 지식에 관한 회의주의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 조건이 거짓인 믿음을 산출한다는 것을 확인할만한 어떤 능력이 없는 한, 그 조건은 단지 우리의 인식적 능력을 구성하는 요소 또는 우리의 인식을 제한하는 사항으로서 작용할 뿐이며, 우리는 그렇게 산출된 거짓인 믿음을 가지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이렇게 산출된 믿음은 다른 믿음과 비교되어 각각 다른 지위를 부여받지 않는 한, 어떤 대상에 관한 유일한 믿음이 되므로 회의주의적 입장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만약 악마 가설만으로도 우리가 지식에 관해 회의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고실험이라는 이름으로 알 수 없는 것에 관해 믿고 그것을 다른 이에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이른바 ‘회의주의적 독단’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지식에 관한 회의주의적 태도를 정당화하기 둘째 조건, 즉 우리의 인식적 능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비교대상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식 주장들은 때때로 우리가 실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오류에 빠진다는 것은 지식에 관한 우리의 정당화를 약화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흔히 《매트릭스》의 네오나 《트루먼쇼》의 트루먼이 악마 가설과 유사한 세계에서 빠져나와 실재를 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비교대상을 얻은 것 뿐이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아는 두 세계 가운데 어떤 것이 실재인가 판단하고 지위를 부여한다. 그것을 부여하는 과정은 주변 사람들의 태도나 환경 그리고 여러 믿음을 통한 인식적 정당화이다. 그러나 그 정당화의 과정이 이전에 ‘한 세계’만 알고 살던 시기의 정당화 과정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이 사례를 통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오류가 지식에 관한 정당화를 약화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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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연습 보고서>


1. 인식적 정당화와 '적절히 야기됨'

  ‘적절히 야기된 참된 믿음’은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지식의 정의 가운데 하나이다. 앨빈 골드먼은 ‘안다는 것에 관한 인과이론A Causal Theory of Knowing’이라는 논문에서 게티어의 논문의 사례가 지식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사실과 인과적causal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 사람이 동전을 10개 가지고 있다든가, 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누군가가 어디에 있다고 추측하는 것 등은 그 사람이 취직을 한다든가 또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믿음을 낳는 인과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지식은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이다. 우리는 p라는 사실을 직접 인지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p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지표나 증거 e,f,g,h 등을 통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p라는 사실은 e,f,g,h 등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인과적으로 연결되어있기causally connected 때문에, 우리가 e,f,g,h 등을 통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갖는 것이 정당화된다. 이런 주장은 특히 감각자료를 통해 지식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할 때 또는 이 과정을 정당화할 때 많이 이용된다. 이를테면 p라는 사실에 관한 우리의 감각적 정보들 e,f,g,h 등을 통해 우리가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식이다.


2. '적절한appropriate'의 의미 - 그럴듯하고 극단적이지 않은

  새로운 조건인 ‘적절한appropriate’과 ‘야기된caused’의 의미를 살펴보자. ‘적절한’은 적어도 사실 p와 증거 e,f,g,h 그리고 사실 p에 관한 믿음 사이의 인과적 연결이 아무렇게나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한다. 이 관계는 자연법칙에 의해서 연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번개가 칠 때, 우리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면 번쩍거리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특별히 소리를 듣지 못하는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주 크고 둔탁한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번개는 순간적으로 많은 전기가 흐르는 현상이고 이것은 빛과 소리를 언제나 발생시키기 때문에, 번쩍거림과 크고 둔탁한 소리를 통해 번개가 쳤다는 것을 믿는 것은 정당화된다. 또한 이 연결은 신의 섭리, 혹은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전능한 악마의 속임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연결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관한 탐구는 우리의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러나 이 사건들이 언제나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는 일반화된 규칙 정도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 사건을 적절하게 연결시킬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믿음이 필연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크고 둔탁한 소리와 강한 빛이 번개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는 않듯, 개별적인 어떤 사건이 다른 어떤 사건을 논리적으로 함축하는 일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적절한’은 ‘필연적인necessarily’ 관계와 반대되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필연적이라는 말은 논리적 필연성을 가리킨다. 위와 같이 지표나 증거와 사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이들과 믿음 사이의 관계가 마치 동어반복처럼 논리적으로 필연적일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 사실과 증거와 믿음이 우리가 믿는 것처럼 연결되지 않는 모순이 없는 세계를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번개가 쳤을 때 빛만 번쩍이고 소리는 나지 않는 세계 U2를 생각할 수 없지는 않다. 만약 내가 U2에서 살고 있을 때, 빛과 소리를 감지해서 번개가 쳤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일 것이다. 하지만 적절하다는 말은 이런 식의 반례들을 거부한다. 어떤 두 사건 사이에 적절한 인과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 세계의 논리적인 구조를 상당히 바꾸지 않는 한 두 사건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3. '야기된caused'의 의미 - 지식이 산출되는 과정과 방법

  믿음이 야기되었다는 것은 p라는 사실에 관한 증거들에 의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이 생겨났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p라는 사실로부터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바로 추론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증거들을 취합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이런 ‘야기되는’ 과정에 반드시 개입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을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인간의 지식이 지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나 방법에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황토색 풀로 뒤덮인 초원에서 ‘저기에 사자가 엎드려있다’는 지식을 갖기가 쉽지 않다. 인간은 특정한 주파수에 관한 정보를 취합하여 시각적인 정보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 방법으로는 황토색 풀과 사자의 황토색 털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인식적 정당화는 우리의 지식을 생산해내는 방법이나 과정에 의존한다. 만약 p라는 사실이 q,r,s 등으로 변화하고 그에 관한 증거인 q(e,f,g,h),r(e,f,g,h),s(e,f,g,h) 등이 만들어질 때 어떤 방법이나 과정이 그 다른 증거들을 취합해서 다른 지식을 생산해낸다면, 이 방법은 사실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사실에 대응하는 적절한 지식을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에 믿을만하다reliable. 이 때문에 지식을 ‘적절하게 야기된 참된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신빙론자reliabilist라고 부른다. 신빙론자들의 주장의 핵심은 바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방법이라면 그 방법이 ‘적절하다’고 표현하는 데 있다. 즉, 이 적절하다는 말은 사실 사이의 관계 뿐만이 아니라, 사실 또는 증거와 우리의 신념 사이의 관계를 표현할 때도 쓰이는 것이다. 앨빈 골드먼은 이 ‘적절한’에 속하는 것으로서 지각perception, 기억memory, 어떤 사실에 관한 지표나 행위 등에 의해 야기된 추론으로 올바르게 재구성할 수 있는 인과적 연쇄a causal chain, 그리고 이들의 조합이라는 네 가지 목록을 제시한다. 따라서 우리가 지식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과 완전히 배치되는 사고실험들, 즉 데카르트의 악령이나 영화 매트릭스의 거대 기계 등의 반례는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어,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에 대한 반례가 될 수 없다.


4. 결론 : 정보와 지식의 구분은 가능한가

  대부분의 컴퓨터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컴퓨터에게는 인간이 컴퓨터에게 입력해준 문장이 그 문장이 지시하는 내용과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그 기준을 가질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적 정당화가 이런 기준과 능력에 의해 성립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절히 야기된 것은 자연적 사실일 뿐 정당화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 지식의 정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에게 인식론의 임무란 그렇게 야기된 믿음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지식이 될 수 있는지 즉 옳게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지식이 되기 전에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은 아마 정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만 정보와 지식은 구분할 수 있는 대상인가? 나는 여기에 아니라고 대답함으로써 지식 그 자체가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라고 답하고 싶다. 위에서 언급된 기준이나 능력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정보들 가운데 지식이 되는 것이 있다면, 정보들 가운데서 지식을 선별하기 위한 추가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정보들 사이의 차이는 사실의 차이 또는 방법의 차이로 인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어떤 정보들이 지식이라면, 정보들 가운데 지식을 선별하는 기준은 사실의 차이에 따른 기준 또는 방법의 차이에 따른 기준이 될 것이다. 이 두 기준 가운데 사실의 차이에 따른 기준은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라는 정의에 이미 반영되어 있으므로(즉 이미 사실에 대해 참이므로) 남는 것은 방법의 차이에 따른 기준이다. 하지만 방법의 차이는 사실에 반응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 어떤 방법이 더 정당화를 잘하고 못하는지에 관한 문제일 수는 없다. 따라서 정보와 지식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방법의 차이 이외에 다른 평가기준을 도입해야만 성공할 수 있고, 이것이 왜 그런지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정보와 지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으므로 인간이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짓거나, 또는 우리의 지식이란 정보 수준에서 더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해야한다.

  육안으로 보는 달과 망원경으로 보는 달 사이에 어떤 것이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흔히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멀리서 보는 것 보다는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더 낫다'는 전제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은 황토색 풀숲 속에 엎드린 사자는 보지 못하지만, 흰색 탁자 위에 앉은 청개구리는 잘 본다. 적외선 카메라는 사자는 잘 포착하겠지만, 변온동물인 청개구리는 잘 보지 못할 것이다. 눈이 나쁘다는 것은 안구의 구조가 특정한 상태에 놓여있고, 그것이 다른 특정한 상태를 '기준으로 맞추어진' 주변환경과 이런저런 마찰을 일으킨다는 말이지, 그 눈이 대상에 대한 지식을 덜 정당화하고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론적 입장은 두 가지 난점에 직면할 것이다. 하나는 인식론에서 규범적 측면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믿음을 형성하는 과정belief-forming process에 초점을 맞추어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을 ‘정당화된 참인 믿음’으로 만드는 골드먼의 입장이 주목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믿을만한 방법’에 의해 생산된 믿음은 ‘믿을만한 믿음’으로 간주하고, 규범적 평가의 영역을 믿음 자체나 이유와 결론 사이의 정당화 관계에서 믿음을 생산하는 방법으로 옮긴다. ‘믿을만함’의 의미는 그 과정이 외부의 사실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그 과정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형성하는 과정이 민감하다는 것은 어떤 믿음이 그 과정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단지 입력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사실과 출력으로서의 생산된 믿음 사이에 더 많은 대응관계가 있다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생산된 믿음이 변화한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세계가 변화했다는 믿음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세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관한 믿음은 얻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신빙론적 입장에서는 믿음을 형성하는 과정에 의해 세계와 믿음은 근본적으로 단절되어있다고 보아야 옳다. 그러므로 인식론의 규범적 성격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임의적이나마 여러 방법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표준적으로 설정하여 그에 입각해 규범적 판단을 내리거나, 또는 신빙론적 입장 자체를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둘째는 이런 인식론적 입장으로는 일반적 사실에 관한 믿음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관해 설명하기가 힘들다는 비판이다. 적절히 야기된 것은 사건 각각에 대한 정보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한 사건에 관한 정보들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까지 발생했고 앞으로도 발생할 모든 사건들에 관한 기술, 즉 일반적 사실에 관한 믿음들을 더욱 중요한 믿음으로 간주한다. 이런 일반적 사실에 관한 믿음들은 흔히 개별적인 사건들에 관한 정보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에게 입력으로서 주어지는 세계는 이런 일반적 사실을 직접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반적 사실에 관한 믿음을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으로서 간주할 수 없다. 그것을 야기할 수 있는 입력으로서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인정한다면, 자연과학에서 지식으로 간주되는 거의 모든 믿음들은 아마도 지식으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릴 것이다. 자연과학적 지식은 대부분 일반적 사실에 관한 명제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김기현, 『현대인식론』, 민음사, 1998
K.레러, 『현대 지식론』(한상기 옮김), 서광사, 1996

Alvin I. Goldman, "A Causal Theory of Knowing" from Journal of Philosophy, Vol.64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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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연습 발제>


1. 인식적 정당화와 '적절히 야기됨'

  ‘적절히 야기된 참된 믿음’은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지식의 정의 가운데 하나이다. 앨빈 골드먼은 ‘안다는 것에 관한 인과이론A Causal Theory of Knowing’이라는 논문에서 게티어의 논문의 사례가 지식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사실과 인과적causal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 사람이 동전을 10개 가지고 있다든가, 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누군가가 어디에 있다고 추측하는 것 등은 그 사람이 취직을 한다든가 또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믿음을 낳는 인과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절히 야기된 참된 믿음’이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지식은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이다. 우리는 p라는 사실을 직접 인지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p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지표나 증거 e,f,g,h 등을 통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p라는 사실은 e,f,g,h 등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인과적으로 연결되어있기causally connected 때문에, 우리가 e,f,g,h 등을 통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갖는 것이 정당화된다. 이런 주장은 특히 감각자료를 통해 지식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할 때 또는 이 과정을 정당화할 때 많이 이용된다. 이를테면 p라는 사실에 관한 우리의 감각적 정보들 e,f,g,h 등을 통해 우리가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식이다.

 
2. '적절한appropriate'의 의미 - 그럴듯하고 극단적이지 않은

  새롭게 추가된 조건인 ‘적절한appropriate’과 ‘야기된caused’의 의미를 살펴보자. ‘적절한’은 적어도 사실 p와 증거 e,f,g,h 그리고 사실 p에 관한 믿음 사이의 인과적 연결이 아무렇게나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한다. 이 관계는 자연법칙에 의해서 연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번개가 칠 때, 우리가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면 번쩍거리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특별히 소리를 듣지 못하는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주 크고 둔탁한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번개는 순간적으로 많은 전기가 흐르는 현상이고 이것은 빛과 소리를 언제나 발생시키기 때문에, 번쩍거림과 크고 둔탁한 소리를 통해 번개가 쳤다는 것을 믿는 것은 정당화된다. 또한 이 연결은 신의 섭리, 혹은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전능한 악마의 속임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연결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관한 탐구는 우리의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다.

  또한 이 적절한은 ‘필연적인necessarily’ 관계와 반대되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필연적이라는 말은 논리적 필연성을 가리킨다. 지표나 증거와 사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이들과 믿음 사이의 관계가 마치 동어반복처럼 논리적으로 필연적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실과 증거와 믿음이 우리가 믿는 것처럼 연결되지 않는 세계는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번개가 쳤을 때 빛만 번쩍이고 소리는 나지 않는 세계 U2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U2에서 살고 있으면서 빛과 소리를 감지해서 번개가 쳤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일 것이다. 하지만 적절하다는 말은 이런 식의 반례들을 거부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거대한 기계 등이 이런 반례에 해당한다. 인과적인 관계는 우리가 접하는 상식의 한도 내에서 ‘적절하기만’ 하면 된다.


3. '야기된caused'의 의미 - 지식이 산출되는 과정과 방법

  믿음이 야기되었다는 것은 p라는 사실에 관한 증거들에 의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이 생겨났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p라는 사실로부터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바로 추론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증거들을 취합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이런 ‘야기되는’ 과정에 반드시 개입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을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인간의 지식이 지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나 방법에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황토색 풀로 뒤덮인 초원에서 ‘저기에 사자가 엎드려있다’는 지식을 갖기가 쉽지 않다. 인간은 특정한 주파수에 관한 정보를 취합하여 시각적인 정보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 방법으로는 황토색 풀과 사자의 황토색 털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인식적 정당화는 우리의 지식을 생산해내는 방법이나 과정에 의존한다. 만약 p라는 사실이 q,r,s 등으로 변화하고 그에 관한 증거인 q(e,f,g,h),r(e,f,g,h),s(e,f,g,h) 등이 만들어질 때 어떤 방법이나 과정이 그 다른 증거들을 취합해서 다른 지식을 생산해낸다면, 이 방법은 사실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사실에 대응하는 적절한 지식을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에 믿을만하다reliable. 이 때문에 지식을 ‘적절하게 야기된 참된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신빙론자reliabilist라고 부른다.


4. 결론 : 정보와 지식의 구분은 가능한가

  대부분의 컴퓨터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컴퓨터에게는 인간이 컴퓨터에게 입력해준 문장이 그 문장이 지시하는 내용과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그 기준을 가질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적 정당화가 이런 기준과 능력에 의해 성립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절히 야기된 것은 자연적 사실일 뿐 정당화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 지식의 정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에게 인식론의 임무란 그렇게 야기된 믿음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지식이 될 수 있는지 즉 옳게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지식이 되기 전에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은 아마 정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만 정보와 지식은 구분할 수 있는 대상인가? 나는 여기에 아니라고 대답함으로써 지식 그 자체가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라고 답하고 싶다. 위에서 언급된 기준이나 능력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정보들 가운데 지식이 되는 것이 있다면, 정보들 가운데서 지식을 선별하기 위한 추가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정보들 사이의 차이는 사실의 차이 또는 방법의 차이로 인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어떤 정보들이 지식이라면, 정보들 가운데 지식을 선별하는 기준은 사실의 차이에 따른 기준 또는 방법의 차이에 따른 기준이 될 것이다. 이 두 기준 가운데 사실의 차이에 따른 기준은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라는 정의에 이미 반영되어 있으므로(즉 이미 사실에 대해 참이므로) 남는 것은 방법의 차이에 따른 기준이다. 하지만 방법의 차이는 사실에 반응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 어떤 방법이 더 정당화를 잘하고 못하는지에 관한 문제일 수는 없다. 따라서 정보와 지식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방법의 차이 이외에 다른 평가기준을 도입해야만 성공할 수 있고, 이것이 왜 그런지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정보와 지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으므로 인간이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짓거나, 또는 우리의 지식이란 정보 수준에서 더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해야한다.

  육안으로 보는 달과 망원경으로 보는 달 사이에 어떤 것이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흔히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멀리서 보는 것 보다는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더 낫다'는 전제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은 황토색 풀숲 속에 엎드린 사자는 보지 못하지만, 흰색 탁자 위에 앉은 청개구리는 잘 본다. 적외선 카메라는 사자는 잘 포착하겠지만, 변온동물인 청개구리는 잘 보지 못할 것이다. 눈이 나쁘다는 것은 안구의 구조가 특정한 상태에 놓여있고, 그것이 다른 특정한 상태를 '기준으로 맞추어진' 주변환경과 이런저런 마찰을 일으킨다는 말이지, 그 눈이 대상에 대한 지식을 덜 정당화하고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런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우리가 지식을 어떻게, 어디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관한 적절히 야기된 참된 믿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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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연습 보고서>


1. 오류가능주의

  어떤 종류의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입장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오류불가능주의(infallilbilsm)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을 거짓으로 만드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반대사례가 단 하나도 존재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내 친구 형진이 ‘나 어제 최종면접 합격했다’고 내게 이야기할 경우, 나는 ‘형진은 취직했다’는 믿음을 얻고, 이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거짓으로 만들 수 있는 반대사례가 있는 믿음이다. 예를 들어, 형진이 내게 거짓말을 했거나, 또는 서류상의 착오 때문에 면접합격통보가 잘못 전해졌을 경우, 이 믿음은 거짓이 된다. 그리고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형진은 취직했다’는 틀릴 수 있고(fallible) 따라서 이 믿음은 (오류불가능주의에 따르면) 지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믿음이라도 그 믿음을 거짓으로 만들 수 있는 반대사례는 얼마든지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흔히 가장 엄밀한 지식이라고 불리는 수학적인 믿음만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거짓이 될 수 있다. 데카르트의 널리 알려진 논증에 따르면, 아주 뛰어난 악마가 우리를 언제나 속이고 있는 것은 가능하며, 만약 실제로 이 세상이 그렇다면 우리의 수학적인 믿음은 거짓이 된다. 그러나 이런 기준을 적용할 경우, 우리가 일상적으로 ‘안다’고 생각하는 많은 믿음들이 거짓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오류불가능주의가 내세우는 지식에 관한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따라서, 틀릴 수 있는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이러저러한 기준만 만족한다면 지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 생겨났는데, 이를 오류가능주의(fallilbilism)라고 한다.

  이 입장을 간단하게 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1) 모든 믿음은 틀릴 수 있다.(틀릴 수 없는 믿음은 없다.) 또는 (2) 모든 믿음은 틀릴 수 있게 정당화된다(fallibly justified). 오류가능주의는 모든 믿음들이 실제로 거짓이다 또는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와 구별된다. 틀릴 수 있게 정당화된다는 것은 틀릴 수 없게(conclusive)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것만 함축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류가능주의적인 정당화를 비결정적인(inconclusive) 정당화라고 한다. 오류가능주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안다’고 말하는 많은 것들을 지식으로 인정하며, 동시에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의심(rational doubt)’을 할 여지 또한 만든다는 점에서 많은 인식론자들이 받아들이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오류가능주의에게 남겨진 과제는 과연 비결정적인 정당화가 어떻게 가능하며,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정당화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만약 그 기준을 밝혀낼 수 있다면, 그 기준을 만족하는 믿음은 적절하게 정당화된(adequately justified) 믿음이 될 것이고, 그것은 바로 지식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토마스 리드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자료들은 그 자체로 정당화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자료가 틀릴 수도 있다는 다른 비교가능한 사례가 제시되기 전까지, 우리는 그 믿음이 틀렸을 가능성에 관해 전혀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료가 틀릴 수 있다는 다른 자료가 생겨날 경우 둘을 비교함으로써 어느 쪽이 옳은가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예전의 그 자료는 적절하게 정당화된 것이지 완전하게 정당화된 것은 아니다. 이외에도 철학의 전통에서 이러한 정당화의 방법은 연역과 귀납 등등으로 다양하게 제시되었는데, 이런 정당화 과정에서 착오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믿음은 대부분 지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오류가능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2. 게티어 사례

  게티어는 자신의 논문 「정당화된 참된 믿음은 지식인가?」에서, 자신이 두 가지 점을 주목한다고 밝힌다. 여기에서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란 전통적인 의미에서 지식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생각됐던 것, 즉 (1) 어떤 명제 p는 참이다. (2) 어떤 인식주체 S는 p를 믿는다. (3) S는 p를 믿는 것에 정당화되었다. 를 가리킨다. 게티어는 이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면서도 ‘첫째, 한 사람이 실제로는 거짓인 명제를 믿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it is possible for a person to be justified in believing a proposition that is in fact false), 둘째, 모든 명제 p에 대해서, 만약 S가 p를 믿는 것이 정당화되고 p가 q를 수반하며 S가 p에서 q를 연역했고 그래서 이 연역의 결과로서 q를 승인한 경우, S는 q를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for any proposition p, if S is justified in believing p, and p entails q, and S deduces q from p and accepts q as a result of this deduction, then S is justified in believing q)’에 주목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계영과 은지는 같은 회사에서 최종면접을 치르고 왔다. 그리고 계영은 안타깝게도 면접관에게 문자를 통해 은지가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고, 또한 면접장에서 은지가 그의 핸드백에서 미스트를 꺼내 얼굴에 뿌리고 다시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계영은 ‘(2-1) 은지는 취직을 할 것이다. 또한(and) 은지는 그의 핸드백 안에 미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충분히 정당화된다. 계영은 (2-1)에서 ‘(2-2) 취직을 할 그 사람은 핸드백 안에 미스트를 가지고 있다’를 연역적으로 추론해낼 수 있으며, 이를 믿는 것 또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런데 사실 합격한 것은 은지가 아니라 계영이었고, 합격통보문자는 계영을 놀래키기 위한 사장의 짓궂은 장난에 따른 지시사항이었다. 또한 계영은 몰랐지만, 면접시간에 늦을까봐 급히 들고 온 계영의 핸드백 안에는 미스트가 들어있었다. 이 경우에 계영이 (2-2)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상황을 가정해보자. 은지는 계영과 20년지기 친구이다. 은지는 계영이 20년 동안 기아자동차를 구입하고 애용하는 것을 보아왔고, 또한 방금 전 계영이 K9를 타고 가다가 잠깐 멈추어 ‘같이 타고 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에 ‘(2-3) 계영은 기아자동차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이는 은지가 20년 동안 보아온 것, 그리고 방금 계영이 K9을 타고 가는 것을 본 것에 의해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리고 은지에겐 나윤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6개월 전에 받은 마지막 엽서 이후로 소식이 끊겨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대강 보스턴 쯤에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2-4) 계영은 기아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또는 나윤은 보스턴에 있다’고 마음대로 믿어버렸다. (2-3)을 전제로 (2-4)를 이끌어내는 것은 타당한 연역적 추론인데, 이 논증은 전제가 모두 참이면서 결론이 거짓일 수 없는 논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4)을 믿는 것 또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러나 사실 계영은 얼마 전 자기 소유였던 K7을 팔았고, K9은 새로 나온 기아의 차를 타보려고 계영이 빌린 것이었다. 또한 정말 우연히도, 나윤은 그 때 보스턴에 있었다. 이 경우, 은지는 (2-4)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3. 결론

  오류가능주의의 입장은 게티어가 주목하는 두 가지 요점 가운데 첫 번째 주장이다. 게티어 사례를 통해, 우리는 오류가능주의자의 입장에 설 경우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지만 지식이라고 볼 수 없는 무한한 사례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류불가능주의자들에게는 거짓일 수 없게 정당화된 믿음만이 지식이기 때문에 게티어 사례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반면 오류가능주의자들에게는 거짓인 믿음들도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식이 아니다. 그러나 그 정당화된 거짓인 믿음들로부터 참인 믿음을 이끌어낸다면, 그것은 정당화된 것인가? 만약 이것을 정당화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참인 믿음을 지식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이 게티어 사례가 보여주는 문제이다.

  위의 두 사례에서, 계영과 은지는 어떤 믿음을 지식이 되도록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가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여러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우리의 믿음을 지식으로 만들어주는 데는 실패했다. 거짓인 명제 (2-1)은 참인 명제 (2-2)를 함축한다. 그러므로 (2-1)을 정당화하는 조건을 통해서 (2-2)를 정당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4)도 마찬가지다. 은지는 (2-3)에 정당화되어 (2-4)를 정당화하고 참이라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 (2-3)은 거짓이며 그 외의 명제(‘나윤은 보스턴에 있다’)가 참이기 때문에 (2-4)는 참이다.

  또한 게티어 사례가 지식에 대한 정의에 포함된 ‘정당화’라고 불리는 것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 정당화는 인식주체가 어떤 믿음들이 여러 방법에 의해 서로 이유와 결론의 관계로 묶여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므로 거짓인 믿음들에서 참인 믿음을 연역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각 믿음들의 진리값과 상관없이 그 참인 믿음이 ‘정당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참인 믿음들에서 거짓인 믿음을 연역한다고 하더라도 거짓인 믿음이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정당화를 다른 것으로 설명한다면, 게티어의 문제를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외부의 사실들로부터 직접적으로 반영되어야만 정당화된다고 말한다면, 게티어의 사례에서 이후에 연역된 참인 명제들은 직접 반영된 것이 아니므로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지식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게티어 사례가 오류가능주의자들에 대한 적절한 반박이라면, 오류가능주의자들은 두 가지 어려움에 빠지게 되며, 여기에 각각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첫째, 아무리 정교하고 엄밀한 방법을 개발하고 또한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결코 실수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떤 믿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오류가능주의자들은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정당화의 기준을 마련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게티어 사례는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정당화 이외의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지식의 기준에는 정당화된 참된 믿음 이외의 조건이 더 추가되어야 한다.

  이는 더 나아가서,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는 정당화와 무관하다는 점을 함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아무리 오류가능주의자들이 정당화를 정교하게 기획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식주체가 무엇인가를 확신하는 상태를 뜻한다면, 그것은 그 믿음의 진리값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정당화가 될 것이다. 그렇게 정교하게 정당화된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식에 관한 오류가능주의적인 개념이 과연 가능한지에 관해 더욱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즉, 오류가능주의자들의 생각처럼 정교한 정당화과정을 통과한 거짓일 수 있는 믿음이 우리의 지식을 구성할 수도 있다면, 우리의 지식 가운데 중요한 몇몇들 또는 전체가 거짓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지식들을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만약 정당화와 상관없이 언제나 참인 어떤 믿음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만 한다면, 정당화의 방법을 설계하고 그것이 얼마나 정교한지를 역설하는 것보다 그 언제나 참인 믿음들에 우리의 정당화를 의탁하는 것이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지식을 얻는 데 더욱 믿을만한 수단이지 않을까? 절대적이고 확실한 지식을 찾으려는 많은 시도들은 대부분 이러한 생각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믿음의 진리값과 무관한 정당화는, 그 믿음의 참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게 참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만을 지지하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토대로서 인정받기에는 부족해보인다.


- 참고문헌
 

김기현, 『현대인식론』, 민음사, 1998
K.레러, 『현대 지식론』(한상기 옮김), 서광사, 1996

Gettier, E.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from Analysis, Vol.23 (1963)
Hetherington, S. “Fallibilism” in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eds) J. Fieser and B. Dowden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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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연습 발제>

1. 오류가능주의


  어떤 종류의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입장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오류불가능주의(infallilbilsm)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을 거짓으로 만드는 가능한 반대사례가 단 하나도 존재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내 친구 형진이 ‘나 어제 최종면접 합격했다’고 내게 이야기할 경우, 나는 ‘형진은 취직했다’는 믿음을 얻고, 이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거짓으로 만들 수 있는 반대사례가 있는 믿음이다. 예를 들어, 형진이 내게 거짓말을 했거나, 또는 서류상의 착오 때문에 면접합격통보가 잘못 전해졌을 경우, 이 믿음은 거짓이 된다. 그리고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형진은 취직했다’는 틀릴 수 있고(fallible) 따라서 이 믿음은 (오류불가능주의에 따르면) 지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믿음이라도 그 믿음을 거짓으로 만들 수 있는 반대사례는 얼마든지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흔히 가장 엄밀한 지식이라고 불리는 수학적인 믿음만 하더라도 그 믿음은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널리 알려진 논증에 따르면, 아주 뛰어난 악마가 우리를 언제나 속이고 있는 것은 가능하며, 만약 실제로 이 세상이 그렇다면 우리의 수학적인 믿음은 거짓이 된다. 그러나 이런 기준을 적용할 경우, 우리가 일상적으로 ‘안다’고 생각하는 많은 믿음들이 거짓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오류불가능주의가 내세우는 지식에 관한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따라서, 틀릴 수 있는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이러저러한 기준만 만족한다면 지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도 제기되었다. 이를 오류가능주의(fallilbilism)라고 한다.

  이 입장을 간단하게 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1) 모든 믿음은 틀릴 수 있다.(틀릴 수 없는 믿음은 없다.) 또는 (2) 모든 믿음은 틀릴 수 있게 정당화된다(fallibly justified). 오류가능주의는 모든 믿음들이 실제로 거짓이다 또는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와 구별된다. 틀릴 수 있게 정당화된다는 것은 틀릴 수 없게(conclusive)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것만 함축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류가능주의의 정당화를 비결정적인(inconclusive) 정당화라고 한다. 오류가능주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안다’고 말하는 많은 것들을 지식으로 인정하며, 동시에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의심(rational doubt)’을 할 여지 또한 만든다는 점에서 많은 인식론자들이 받아들이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오류가능주의에게 남겨진 과제는 과연 비결정적인 정당화가 어떻게 가능하며,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정당화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만약 그 기준을 밝혀낼 수 있다면, 그 기준을 만족하는 믿음은 적절하게 정당화된(adequately justified) 믿음이 될 것이고, 그것은 바로 지식이 될 것이다. 철학의 전통에서 이러한 정당화의 방법은 연역과 귀납으로 제시되는데, 이런 정당화 과정에서 착오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믿음은 대부분 지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오류가능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2. 게티어 사례

  게티어는 자신의 논문 「정당화된 참된 믿음은 지식인가?」에서, 자신이 두 가지 점을 주목한다고 밝힌다. 여기에서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란 전통적인 의미에서 지식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생각됐던 것인데, 즉 (1) 어떤 명제 p는 참이다. (2) 어떤 인식주체 S는 p를 믿는다. (3) S는 p를 믿는 것에 정당화되었다. 를 가리킨다. 게티어는 이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면서도 ‘첫째, 한 사람이 실제로는 거짓인 명제를 믿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it is possible for a person to be justified in believing a proposition that is in fact false), 둘째, 모든 명제 p에 대해서, 만약 S가 p를 믿는 것이 정당화되고 p가 q를 수반하며 S가 p에서 q를 연역했고 그래서 이 연역의 결과로서 q를 승인한 경우, S는 q를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for any proposition p, if S is justified in believing p, and p entails q, and S deduces q from p and accepts q as a result of this deduction, then S is justified in believing q)’에 주목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계영과 은지는 같은 회사에서 최종면접을 치르고 왔다. 그리고 계영은 안타깝게도 문자를 통해 은지가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고, 또한 면접장에서 은지가 그의 핸드백에서 미스트를 꺼내 얼굴에 뿌리고 다시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계영은 ‘(2-1) 은지는 취직을 할 것이다. 또한(and) 은지는 그의 핸드백 안에 미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충분히 정당화된다. 계영은 (2-1)에서 ‘(2-2) 취직을 할 그 사람은 핸드백 안에 미스트를 가지고 있다’를 연역적으로 추론해낼 수 있으며, 이를 믿는 것 또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런데 사실 합격한 것은 은지가 아니라 계영이었고, 합격통보문자는 자동전송 프로그램의 실수로 인해 전달이 잘못된 것이었다. 또한 계영은 몰랐지만, 면접시간에 늦을까봐 급히 들고 온 계영의 핸드백 안에는 미스트가 들어있었다. 이 경우에 계영이 (2-2)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상황을 가정해보자. 은지는 계영과 20년지기 친구이다. 은지는 계영이 20년 동안 기아자동차를 구입하고 애용하는 것을 보아왔고, 또한 방금 전 계영이 K9를 타고 가다가 잠깐 멈추어 ‘같이 타고 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에 ‘(2-3) 계영은 기아자동차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이는 은지가 20년 동안 보아온 것, 그리고 방금 계영이 K9을 타고 가는 것을 본 것에 의해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리고 은지에겐 나윤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6개월 전에 받은 마지막 엽서 이후로 소식이 끊겨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대강 보스턴 쯤에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2-4) 계영은 기아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또는 나윤은 보스턴에 있다’고 마음대로 믿어버렸다. (2-3)을 전제로 (2-4)를 이끌어내는 것은 타당한 연역적 추론인데, 이 논증은 전제가 모두 참이면서 결론이 거짓일 수 없는 논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4)을 믿는 것 또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러나 사실 계영은 얼마 전 자기 소유였던 K7을 팔았고, K9은 새로 나온 기아의 차를 타보려고 계영이 빌린 것이었다. 또한 정말 우연히도, 나윤은 그 때 보스턴에 있었다. 이 경우, 은지는 (2-4)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3. 결론

  게티어 사례가 오류가능주의자들의 입장에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충분히 정당화되었다고 해서 어떤 믿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두 사례에서, 계영과 은지는 어떤 믿음을 지식이 되도록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가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여러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우리의 믿음을 지식으로 만들어주는 데는 실패했다. (2-2)의 경우, 명제가 실제로 지칭하고 있는 대상은 계영이지만 계영은 은지에 관한 믿음 (2-1)을 통해서 (2-2)를 연역했으므로 (2-2)를 은지에 관한 명제로 믿고 있을 것이다. (2-4)도 마찬가지다. 은지는 (2-3)에 정당화되어 (2-4)를 정당화하고 참이라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 (2-3)은 거짓이며 그 외의 명제(‘나윤은 보스턴에 있다’)가 참이기 때문에 (2-4)는 참이다. 

  만약 게티어 사례가 오류가능주의자들에 대한 적절한 반박이라면, 오류가능주의자들이 아무리 정교하고 엄밀한 방법을 개발하고 또한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결코 실수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떤 믿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오류가능주의자들은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정당화의 기준을 마련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게티어 사례는 , 따라서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더 나아가서,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는 정당화와 무관하다는 점을 함축한다고 볼 수도 있다.

- 참고문헌

김기현, 『현대인식론』, 민음사,

Gettier, E.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from Analysis, Vol.23 (1963)
Hetherington, S. “Fallibilism” in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eds) J. Fieser and B. Dowden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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