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정치철학연습 숙제> 


1.
서론

 

   존 롤즈의 정의론20세기 후반 사회·정치철학적으로 가장 많이 검토된 책 가운데 하나다. 그는 도덕법칙에 관해 생각할 때는 모든 우연적인 것을 배제해야 한다는 칸트의 발상을 정의에 관한 생각에 적용시켰다.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목적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여기에 가치를 부여한다. 사람들이 이런 목적의 체계를 설정하는 과정에는 출생지역, 부모의 신분과 가치관,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환경 등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가 많이 개입한다. 롤즈는 이들 요소를 우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목적의 체계들 가운데 특정한 몇몇을 중심으로 사회가 조직되어 있다는 것은, 그 특정한 체계가 목적으로 삼는 것을 성취하기에 적합한 행위가 상대적으로 더 권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다른 체계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은 행위를 제약당할 것이다. 이 경우 행위를 제약당하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우연적인 요소 때문에 그런 불행을 겪게 된다. 그래서 롤즈는 특정한 목적의 체계에 입각한 태도는 정의를 설정하는 데 바람직하지 않으며, 정의에 관해 생각할 때는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롤즈는 이른바 원초적 입장이라는 개념을 정립시켰다
. 원초적 입장이란 정의에 관해 생각할 때 올바른 결정을 내려줄 가상적 상태를 뜻한다. 그 입장에 서있는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내용 가운데 구체적인 것은 알지 못하고 단지 일반적인 사실만을 알고 있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어떤 수단들은 어떤 목적의 체계를 채택하더라도 쓸모있을 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수단들은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도 선호한다. 이들을 기본 가치 또는 사회적 기본 가치(social primary goods)라고 부른다. 롤즈는 권리와 자유, 기회와 권한, 소득과 부가 여기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정의의 원칙은 사회적 기본 가치의 분배를 규제하는 방식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는 롤즈의 정의론에서 핵심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 실제로 어떤 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목적의 체계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 사람들의 행동을 조정할 여러 제도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장 간단한 형식을 제시하려는 것이 롤즈의 목표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고려가 없었다면, 굳이 특정한 목적의 체계가 정의에 관한 생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기본 가치 개념은 구체적인 개인들의 선호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목적론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기본 가치 개념을 정의에 관한 생각에 끌어들이는 것은 구체적인 목적의 체계를 배제하려고 했던 롤즈의 구상과 충돌을 일으킨다. 나아가 롤즈가 정립한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원칙은 바로 그 목적론에만 부합하는 분배의 원칙이 될 가능성이 있다. 즉 롤즈는 특정한 유형의 자원을 분배하는 원칙을 정의 일반에 관한 원칙으로 확대해석하고 있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삶을 규제할만한 원칙이 될 수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 이런 점은 특히 사회적 기본 가치 가운데 소득과 부에 관해서 생각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문제를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개인의 삶의 계획을 설정하는 과정이다. 개인은 특정한 목적의 체계를 추구하기 보다는 부 자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조직할 가능성이 크다. 다른 하나는 사회 전체의 조직이다. 사회적 기본 가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사회 전체가 사회적 기본 가치에 가까운 것을 추구하는 목적의 체계를 성립시킨다. , 어떤 행위가 사회적 기본 가치에 가까운 어떤 것을 가져다주거나, 또는 서로 다른 두 가치가 사회적 기본 가치에 똑같이 근접한 것일 경우 둘 중 하나 또는 둘을 합한 양을 더 많이 얻게 해주는 행위를 권장하는 목적의 체계가 세워지는 것이다. 이는 특정한 목적의 체계가 한 사회를 지배하는 거부하고 각 개인들이 다양한 목적의 체계들을 추구하는 것을 보장하려고 했던 롤즈의 의도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2.
사회적 기본 가치 개념과 목적론적 해석 가능성

 

   사회적 기본 가치 개념에 관해 알기 위해서는 우선 원초적 입장 개념에 관해 살펴보아야 한다. 원초적 입장은 이른바 무지의 베일에 싸여있는 상태를 뜻한다. 구체적인 개인이 정의에 관해 고려하면서 원초적 입장의 태도를 취할 때,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구체적인 상황에 관한 정보는 모두 배제된다. 인간은 어떤 목적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런 목적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자연스럽게 선호한다. 그런데 그 목적의 내용이 정해지려면, 우리는 주변 상황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정보들은 이른바 가언적(조건적) 명령을 도출하기 위한 조건들이다. 이에 비춰봤을 때 구체적인 상황에 관한 정보를 배제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가치가 부여된 특정한 목적과 그 목적들의 체계에 관한 생각, 그리고 이들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특정한 수단에 관한 선호 또한 같이 고려할 수 없어진다.


   롤즈가 정의에 관해 고려할 때 가장 중점에 두었던 것은
, 바로 이렇게 특정한 목적의 체계가 사회 전체에 강요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 다르고 심지어 모순을 일으키기까지 하는 다양한 목적의 체계들이 유통된다. 사람들은 우연적 조건에 따라서 그리고 자신의 판단과 취사선택에 따라 이들 목적의 체계들 가운데 하나 또는 몇 가지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다. 정의에 관한 생각에 특정한 목적의 체계가 개입한다면, 그런 사회 속에서 자신의 삶을 꾸리는 사람들은 그 특정한 목적의 체계를 추구하게 되거나, 그와 다른 목적의 체계를 추구하려 할 때 다양한 형태의 제약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회적 기본 가치는 이렇게 목적의 체계들이 배제된 가운데 남은 일종의 잉여다
. 다시 말하면 사회적 기본 가치에 포함되는 것들은 특정한 목적의 체계에 구애받지 않는 수단이다. 그래서 특정한 목적의 체계를 선택할 자유, 그것을 성취할 기회, 이를 더 잘 성취할 수 있도록 자신의 환경을 편성할 권한, 어떤 목적의 체계 속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소득과 부 등이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다.


   원초적 입장의 개인이 무지의 베일이 걷힌 뒤 자신의 목적의 체계를 더 잘 성취할 수 있으려면
, 그 입장 속에서는 사회적 기본 가치를 가능한 한 많이 가져가는 것이 가장 좋은 전략이다. 그 입장 속에서 내가 선호할 수 있는 대상은 사회적 기본 가치 뿐인데, 어쨌든 나는 무지의 베일이 걷힌 뒤에 어떤 특정한 목적의 체계를 추구하는 구체적인 인간이고 그것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적용되는 정의의 원칙은 바로 이런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구상된다. 그러므로 정의의 원칙이 관장하는 분배의 대상은 사회적 기본 가치가 된다.


   롤즈가 정립한 정의의 두 원칙 속에서는 사회적 기본 가치 가운데 특정한 목적의 체계를 선택할 자유가 우선성을 부여받는다
. 이 자유의 우선성은 침해할 수 없는 것이고, 모든 개인은 다른 개인의 자유와 양립하는 가장 넓은 범위의 자유를 다른 개인들과 동등하게 부여받는다(1원칙). 소득과 부, 권한 등은 최소수혜자에게 더 나은 삶의 전망을 제공해줄 수 있는 한 차이가 허용된다(2원칙, 차등의 원칙). 자유는 모두가 동등하게 부여받는 반면 소득과 부, 권한은 다르게 부여받는다.


   사회적 기본 가치들이 어떤 목적을 추구하더라도 필요하다는 것은
, 그 가치들이 모든 구체적인 형태의 목적의 체계 또는 그것을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과 교환가능하다는 점을 함축한다. 자유는 특정한 목적의 체계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의미한다. 권한은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용이하도록 자기 주변의 환경을 조직하는 권한일 것이다. 소득과 부는 목적 그 자체가 되거나 또는 수단이 되는 대상들을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상징하는 물건을 뜻한다. 그러므로 원초적 상황에 있는 개인들은 모든 구체적인 수단과 교환가능한 가치들을 선호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원초적 입장의 개인들이 보여주는 선호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 그 입장의 정의에 비춰보았을 때, 사회적 기본 가치에 대한 선호는 구체적인 인간들과 결부된 모든 우연적인 선호들이 배제되어도 남는, 즉 모든 인간들에게 남아있는 가장 기본적인 경향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구체적인 인간들이 우연적인 요소를 충분히 고려할만한 능력이 없을 때 이런 기본적 경향이 나타날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동시에 개인의 삶에는 우연적인 요소가 개입하며, 개인이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의 체계가 이런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 달성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한 사회 내에서 사는 개인이 수립한 장기적인 전망과 그에 기초한 계획이 언제나 실현되지는 않는다는 일반적인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우리의 삶의 불투명함은 구체적인 개인들에게도 사회적 기본 가치에 대한 선호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사회적 기본 가치에 대한 선호는 원초적 입장의 개인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들의 선호 또한 규정하는 일종의 목적론적 체계로 간주할 수 있다.

 


3.
사회적 기본 가치와 개인의 도덕적 삶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실제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들도 목적의 체계에 의존하는 수단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의존적인 수단을 선호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의존적인 수단은 어떤 사람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을 경우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지만, 비의존적인 수단은 그 목적이 실패하더라도 그 수단을 다른 목적의 체계를 추구하는 데 재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의존적인 성격을 가진 수단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구체적인 개인들은 마치 원초적 입장에 있는 개인들처럼 합리적인 선택에 따라 그런 수단을 목적으로서 선호할 것이다. 물론 이런 수단이 어떤 것으로 형상화될지는 결정되어있지 않지만, 적어도 구체적인 인간들 역시 어떤 수단이 목적에 비의존적일수록 선호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은 일반적인 사실로서 알려진다.


   롤즈 본인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만
, 실제로 이런 비의존적인 성격을 지닌 수단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형태는 많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시장에 유통되는 모든 상품과 교환가능한 권리를 나타내는, 일반상품으로서의 화폐다. 더 많은 화폐의 소유는, 더 많은 재화와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관료제적인 조직에서의 권한 분배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조직의 상층부에 진입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행위를 조정하고 제어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수단을 목적으로서 추구하는 것 자체가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 개인들의 선호 대상이 사회적 기본 가치로 단일화된다고 하더라도 롤즈가 제시한 정의의 두 원칙은 적용된다. 정의의 두 원칙은 이 사회적 기본 가치들의 분배를 규제하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우선성을 부여받은 사회적 기본 가치, 즉 자유는 소득, , 권한 등 다른 기본 가치들과 교환할 수 없다. 다른 기본 가치들도 그것을 무조건 추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차등의 원칙에 따라 규제된다. 최소수혜자의 삶의 전망을 개선하기 위한 약간의 이익이 이외의 사람들의 가져갈 막대한 이득을 정당화해주며 따라서 롤즈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반박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불평등을 허용하는 제도에 의해 더 많은 사회적 기본 가치들을 분배받는 개인은, 일반적으로 더 적게 분배받는 개인에 비해 소수다. 그러므로 실제 양을 계산해본다면, 그 이익의 차이가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막대하지 않은 이상 최소수혜자 전체의 이익은 최대수혜자 전체의 이익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소득과 부의 측면에서, 일정한 시간 내에 한 사회가 만들 수 있는 재화의 양은 기술적으로 제한된다. 따라서 최소수혜자에게 이익인 제도일수록 그 이외의 수혜자들에게는 손해가 될 수 밖에 없다.


   진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정의의 원칙 자체가 아니다
. 정의의 원칙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고려된, 목적에 대한 정의의 원칙의 중립성이다. 정의의 원칙이 목적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면, 사회적 기본 가치에 관한 논의를 할 이유가 없다. 그 목적을 달성하는 행위를 정의로운 것으로 간주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다른 사회적 가치보다 더 드높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의 원칙은 목적에 대해 중립이어야하기 때문에, 어떤 목적에도 쓰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목적에 대해 중립적인 수단인 사회적 기본가치에 관한 논의를 펼치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 사회적 기본 가치는 애초에 수단으로서의 가치만 지니지만
, 특정한 목적의 체계에 속하지 않는 환경에 놓인 개인들에게는 사회적 기본 가치 자체가 목적으로 변화한다. 원초적 입장에 있는 개인들에게 사회적 기본 가치에 대한 선호가 있다는 것은 롤즈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고, 또 여기에 기반해 정의의 원칙을 이끌어내고 있다. 원초적 입장의 개인들이 그 본성에서 특정한 선호의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롤즈의 논의의 설정에 비춰봤을 때, 그들은 사회적 기본 가치에 대한 선호를 합리적으로 선택한다.


   이런 선호가 우리의 도덕적 삶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묻는다면
, 그 대답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은 구체적인 목적의 체계들 안에서 추구되는 대상들이다. 롤즈의 논의를 따르면, 사회적 기본 가치는 그런 대상들을 추구하기 위해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것일 뿐,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것을 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기본 가치 자체만 추구하는 삶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없다. 또한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도 없다. 그는 그 수단을 통해서 실제로 아무 것도 성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사회적 기본 가치와 정의의 영역들

 

   이런 측면에서 왈쩌는 롤즈는 비판하면서 지배적 재화와 재화의 독점, 정의의 영역에 관해 논의한다. 지배적 재화란 어떤 재화를 소유한 개인이 그 재화를 가졌기 때문에 여타의 재화를 광범위하게 소유할 수 있는 재화를 뜻한다. 사회적 기본 가치는 바로 이런 재화에 속한다. 그러나 왈쩌가 보기에 이런 재화가 등장하는 것은 긍정적이지 않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들의 임의성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논리로 이탈해서 사회적 의미를 형성하고, 하나의 지배적인 가치로 사회 전체를 통제하려는 경향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왈쩌는 롤즈가 구상하는 것처럼 모든 도덕적·물질적 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기본적 가치들의 집합을 단 하나로 구상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재화는 구체적인 사회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 , 어떻게 쓰여야 할 지가 결정된다. 그렇다면 어떤 재화를 정의롭게 분배하는 일은, 그렇게 획득된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재화는 불균등한 분배가 그 의미에 의해 허용되지만, 또 다른 어떤 재화는 평등한 분배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롤즈가 제시한 정의의 두 원칙은
, 왈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지배적 재화에 관한 분배의 정의의 원칙을 제시한 것일 뿐, 그것이 그 사회 전체의 정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다. 지배적이지 않은 재화의 분배에도 그에 따르는 정의의 원칙이 있다. 각각 다른 재화의 분배 정의를 확립하는 우선성의 원칙 또한 그런 구체적인 사회가 확립시킨 다양한 관습에 따른다. 정의로운 분배가 이뤄진다는 것은 그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특정한 재화에 관해 받아들이고 있는 의미와 실제 분배상태 사이의 간극이 좁다는 것, 또는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어서 사회가 부정의하다는 생각을 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회가 얼마나 정의로운지는 각각의 구체적인 재화들이 얼마나 정의롭게 분배되는가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 이렇듯 재화들 사이에는 상호교환이나 침범이 불가능한 일종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 왈쩌의 주장이다. 이런 입장에서, 롤즈는 특수한 유형의 재화에 관한 정의로운 분배의 원칙을 세우는 데 성공했을 뿐 사회 전체의 정의를 평가하는 원칙을 세우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왈쩌는 자신의 접근방식에 따르는 정의를 복합적 평등
이라고 명명한다. 이 명명에서는, 롤즈의 정의의 두 원칙에 단순한 평등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분배의 원칙이 원칙적으로 그리고 실제 우리의 도덕적 삶도 더 잘 설명해준다는 의미를 담으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정의에 관한 이론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우리의 도덕적 삶에 적용하기 힘들다면, 그 정의론은 실패했다고 간주해야 한다. 그것은 분명히 실천적인 의도에서 세워진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롤스가 제시한 사회적 기본 개념에 대한 원초적 입장의 개인들의 선호는 우리의 삶을 묘사하는데도 실패하고, 한정적인 정의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만 성공했다.

 


5.
결론

 

   인간과 사회에 관한 일반적인 사실에 비춰봤을 때, 구체적인 개인들에게도 특정한 목적의 체계의 추구와 그 수단에 대한 선호가 아닌, 사회적 기본 가치 자체에 대한 선호가 나타난다. 그들이 처한 조건은 원초적 입장의 설정과 결정적인 부분에서 유사하고, 원초적 입장의 개인이란 사실 구체적 개인들에게서 가장 핵심적이고 공통적인 부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개인들은 사회적 기본 가치의 구체적인 형태, 즉 화폐나 더 큰 권한을 가진 직책 등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런 선호가 자신이 채택한 목적의 체계를 달성하고 번성시키기 위한 수단인지, 아니면 사회적 기본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선호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특정한 목적의 체계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했던 롤즈의 의도는 달성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 한 사회 안에서 모든 사람이 선호하는 것 또는 다른 더 많은 재화와 교환 가능한 사회적 기본 가치를 선호하는 것을 중심으로 조직된 목적론적 체계와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양립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왈쩌의 논의를 따르면, 각각 다른 재화에는 각각 그 사회적 의미에 의존하는 정의의 원칙이 있다. 이들 원칙은 그 사회의 관습과 합의에 따라 결정되어 있으며, 그렇게 결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롤즈의 논의는 이런 측면에서 한정된 재화의 영역에서의 원칙만 제시했을 뿐, 한 사회의 정의 일반에 관한 척도를 제시하지는 못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죤 롤즈, 사회정의론(황경식 옮김), 서광사, 1985

마이클 왈쩌, 정의와 다원적 평등(정원섭 외 옮김), 철학과현실사, 1999

스테판 뮬홀·애덤 스위프트,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김해성, 조영달 옮김), 한울아카데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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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중국현대철학연습 숙제>

 

1. 문화열 현상의 역사적 배경과 문제의식

 

   문화열은 1980년대에 '문화' 개념을 중심으로 벌어진 다양한 학자들의 논쟁을 뜻하는 단어다. 문화 개념의 복잡함 만큼이나 이 논쟁 역시 80년대 전체에 걸쳐서 벌어졌는데, 중국의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참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규모였다. 이 현상은 처음에는 단순한 학술적 논쟁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당의 노선과 관련해서 그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이 논쟁에 직접 뛰어들고, 이 개념을 정의하는 방향이 이후 중국의 지향점을 설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당시 지식인들의 인식이 보태지면서 논의의 층위가 매우 다양해졌고, 다양한 입장들이 출현했다.


   문화열 현상의 배경은 역사적 배경과 당대의 현실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짚어낼 수 있다
. 먼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중국의 지식인들이 '문화'에 관해서, 특히 '중국의 문화'에 관해서 논의한 전통은 상당한 기간을 거슬러 올라가서도 살펴볼 수 있다. 5.4'문화'운동, '문화'대혁명이 그렇고, 문화열도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신해혁명과 5.4운동 시기에 중국의 전통을 어떻게 해석해야하고 또 앞으로 중국의 역사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해야하는가에 관한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눈여겨볼만한, 몇 가지 관점이 등장했다. 양수명, 장군매 등 문화적 보수주의자로서 중국의 전통문화를 현대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호적 등 부르주아적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전통문화에 반대하는 사람들, 그리고 진독수와 이대조 등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관점에서 전통문화를 봉건적이고 계급질서에 편향된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런 갈래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이런 비슷한 유형의 갈래가 문화열 현상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반복되기 때문이다.


   당대의 현실은 이런 지식인들의 열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 모택동이 죽은 뒤, 화국봉과 등소평을 비롯한 공산당 내의 일파는 모택동의 노선을 계승하려던 4인방을 몰아내고 새로운 당 지도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1977년 당대회에서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선언하고, 1978년 이른바 농업, 공업, 군사, 과학기술 분야를 육성한다는 이른바 4개 현대화 강령을 당의 과제로 설정했다. 이는 '인민의 정신적 혁명으로부터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간다'는 모택동의 노선을 포기하고, 사회주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생산력 발전에 당이 전력하겠다는 것, 즉 선부론(先富論)의 채택을 의미했다. 생산수단의 소유권이 인민공사에서 지방자치조직 또는 조합으로 넘어가는 부분적 공유-사유화 정책이 추진되었고, 서양의 국가들과 합작회사를 성립할 경제특구가 조성되었다. 등소평의 이런 개혁개방 노선은 모택동사상으로 단일화되었던 중국 사상계를 해빙시키는 역할도 동시에 해냈다. 그러나 이는 양면적이었다. 개혁과 개방의 제스처를 취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법치를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했으나, 여전히 모택동사상은 당의 지도 이념 가운데 하나였고 이에 관해 비판적인 지식인은 처벌을 면할 수 없었다.

 


2.
문화열의 전개

 

   그러나 개혁개방 정책의 시행이 중국과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아주 중대한 국면이며, 미래를 설계하는 정책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이라는 점은 매우 분명했다. 또한 모택동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언권이 자유로워진 것도 분명했다. 가장 결정적으로,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은 독자적인 혁명노선을 걸으면서 상대적으로 폐쇄되어있던 중국 사회를 다시 한번 국제경제, 그리고 그와 항상 동반되는 서양의 문화에 노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어, 1979년 미국과 중국은 국교를 수립했으며 80년대를 걸쳐서는 소련과의 관계도 차츰 완화되었다. 1984년에는 영국과 홍콩 반환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런 경제적 개혁개방 정책은 거의 동시에 정치적
, 문화적 개혁개방 요구를 불러일으켰다. 개혁개방과 함께 밀려들어온 것은 단지 상품 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이후 전개된 각국의 다양한 사상사조들 또한 같이 유입되었고, 중국의 전통문화를 포함해서 다양한 학문분과들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이런 학술적 작업들은 또한 지금까지 모택동 사상을 중심으로 펼쳐진 중국과 중국공산당의 역사적 여정을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평가하며, 동시에 역사적 전환점 속에서 앞으로 중국의 발전 노선을 설정하려는 실천적 목표를 지향했다.


   1980
년 이후 전국 각지에서 '중국문화사 연구자 좌담회', '중국 근대문화사 토론회', '전국 동서양 문화비교 토론회', '1차 국제 중국문화학 토론회' 등 좌담회가 토론회가 연이어 개최되었고, '중국 사상문화 연구중심', '동서양 비교문화 연구중심', '근대문화사 연구실', '중국 사상문화사 연구실' 등의 연구단체가 조직되어 체계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이들은 중국문화연구집간, 국학집간, 중서문화 비교연구, 동서양 문화연구, 중국 근대문화문제등의 잡지를 발간했다. 1985년에서 1986년 사이에 발표된 문화연구는 200여 편에 달하며, 연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중국 내의 원로와 소장학자, 서양의 중국문화연구자들, 홍콩과 대만 등 중국 외 지역의 중국인 학자 등으로 매우 다양했다.


   이들의 주요 연구 주제는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 첫째, 문화 및 문화의 정의, 대상, 구조, 범위 등 문화에 관한 일반이론의 정립. 둘째, 중서문화 비교연구를 통한 중서문화 각각의 특징과 우열의 토론. 셋째, 중국문화를 거시적으로 고찰, 중국 전통문화의 특징과 핵심 그리고 발전변화 법칙의 연구. 넷째, 각종 문화현상의 전문역사, 전문주제, 어떤 구체적인 문화현상의 연구와 토론. 문화교류, 갑골해석학, 도예, 선종, 경학 등이 여기에 해당. 다섯째, 중국문화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둘러싼 주제. 중국 현대문화아 전통문화 그리고 서양문화의 관계에 관한 토론.


   위 주제들은 연구의 분야나 성격에 의해 나눠질 수 있지만
, 이들의 목표는 결국 실천적 문제에 관한 이론적 답변을 제공하려는 것, 즉 중국의 미래상 정립으로 모인다. 먼 시간을 건너야 하고, 사회주의적 실험이 이미 한 차례 완료된 상황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의 신문화운동과 문화열 현상을 유사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측면에서 노선의 구도 또한 신문화운동 시기와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은 한 편으로는 현대신유학으로 전개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자본주의로 변형되어 문화열 논의에 뛰어들었다. 반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할 수 없는 중국공산당은, 표면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을 내세우되 문화대혁명 이후 부분적인 이념적 공백을 메우고자 민족주의적 감정을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중도적 입장을 택했다. 반면 개혁개방 정책을 더욱 급진적으로 추진할 것을 원했던 일부 지식인들은 입각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경제를 달성해야 한다는, 이른바 '철저재건론'을 주장했다. 이는 일면 등소평의 선부론과 큰 차이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의 핵심은 공산당의 이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 이념은 학생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으나, 천안문 시위에 대한 잔혹한 진압으로 인해 수그러들었다.

 


3.
문화열 시기의 노선

 

  (1) 문화보수주의

 

   문화열 시기 문화적 보수주의 노선의 핵심은 중국의 전통사상, 그 가운데서도 특히 유가사상에 관한 전면적인 (긍정적) 재평가와 계승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중국은 유가사상을 연구하는 측면에서 암흑기였다. 모택동이 집권한 이후, 당을 영도하는 사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이 채택되었으며, 그에 따라 유학사상은 봉건적이고 계급질서를 옹호하는 구사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공자를 파는 상점을 부수자!'는 이 시기를 상징하는 구호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개혁개방 정책의 시행은 유가사상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 시기 문화적 보수주의 노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중국 내부에서 유가사상을 새롭게 조명하고 되살리려고 한 노력에서 비롯된 현대신유가 사조다
. 문화대혁명이 거의 끝나가는 1978, 잡지 중국철학1집에 양수명과 풍우란, 웅십력의 글이 실리면서 중국 내부에서의 현대신유가 연구가 시작되었다. 1984년 유가사상 연구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공자기금회'와 민간연구단체인 '중국문화서원'이 설립되면서 이 분야의 학술적 사업은 더욱 활발해졌다. 여기에는 중국 내부의 학자들 뿐만 아니라 중국 외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인 학자들까지 대거 참석하였다. 또한 1985년 광주의 화남 사범대학에서 중국근현대철학사 학술토론회가 열렸는데, 이것은 건국 이래 중국 근현대철학사에 대해 처음으로 열린 전국적 학회였다. 이 자리에서 중국 내부에서 현대신유학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대만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조금 더 이른 시간에 나타날 수 있었다
. 이는 부분적으로 장개석 독재 정부가 유가사상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58년 대만의 잡지 민주평론에는 모종삼, 서복관, 당군의, 장군매의 공저로 중국문화와 세계 : 우리의 중국 학술 연구 및 중국문화와 세계문화 앞날의 공동인식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들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정치에 있어서는 정통을, 철학에 있어서는 그 도통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후 중국 내부에서 모택동사상의 영향 때문에 유가사상 연구가 차질을 빚었던 것과는 달리, 대만에서는 현대신유학 사조를 정립하고 독자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현대신유학 사조 안에도 다양한 흐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현대신유학 사조에 속하는 이들은 모두 기존의 관점들, 특히 서양학자들의 중국학 연구에 대해 비판적이다. 또한 중국의 역사와 전통에 속하는 내부적 관점으로부터 유가사상을 평가하고 그 현대적 의미를 발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중영(成中英)은 이런 관점에서 중국 전통사상의 현대적 의의를 내재적 인간주의, 구체적 합리주의, 생동적인 자연주의, 수양의 실용주의로 요약하고 있다. 또한 유술선(劉述先)은 유가사상의 도덕철학이 인간의 도덕적 발달에 관한 서양의 대표적인 이론인 콜버그의 도덕심리학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고 있으며 그보다 더 나은 면이 있다고 평가한다. 콜버그의 발달단계는 외재적인 도덕법칙을 따르는 것에서 최고단계를 이루지만, 유학의 도덕철학은 도덕법칙의 내용을 마음 안에서 찾기 때문이다.


   현대신유학과 다른 한 갈래는 유교자본주의 주장이다
. 이것은 동아시아 지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 관해 연구하던 서양의 학자들이 그 문화적 배경으로 유가적 전통을 지목하면서 시작된 주장이다. 전통사회에서 발견되는 "재부, 명예, 건강에 대한 강렬한 동기, 그리고 가족과 조상과 능력이 있는 사람에 대한 경외 - 이러한 의심할 수 없는 결정적인 문화적 요소는 맹렬한 경제적 행동을 촉발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주장은 일정 정도 개인의 행위동기를 중심으로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막스 베버의 문화연구 방법론을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베버는 개신교의 윤리는 자본주의를 뒷받침했지만 유교와 도교의 윤리는 자본주의적 사회를 잉태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는데, 유교자본주의는 이런 견해에 반대하여 유가적 전통도 충분히 자본주의를 뒷받침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유교자본주의 주장은 한 때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
. 그러나 이는 한때의 유행으로 끝났으며, 지금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주장에 대한 반박은 간단하다. 만약 유가적 전통에 실제로 그런 요소가 있다면, 왜 당대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또한 똑같이 유가적 전통을 계승한 사회라고 하더라도, 대만이나 싱가폴, 일본 등의 경제는 발전했으나 중국, 한국, 북한, 베트남 등은 당시까지도 저개발 상태이거나 또는 개발도상국들 가운데서도 후진적인 편에 속했다. 결국 유교자본주의는 흔히 80~90년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불린 특정 국가들에 한정된 연구이며, 학술적인 의미는 거의 없다.

 

  (2) 중국공산당의 노선

 

   중국공산당의 공식적 노선은 비판적 계승론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선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화할 때 취했던 태도, 즉 공산주의적 기조는 유지하되 중국의 현실에 맞도록 변형한다는 정신의 연장선상으로 파악된다. 당의 노선을 전면적으로 바꾸지는 않지만, 전통 문화와 "'비판'의 관계를 강조할 때 일체의 착취계급 사상의식과 결별하면서 민족문화 허무주의를 반대하고, '계승'의 관계를 말할 때 복고주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정립하였다." 이들은 ""봉건주의의 찌꺼기는 버리고 민주주의의 알맹이는 흡수한다."신민주주의론의 명제에서 이론근거를 찾고 있다."


   계승할 것과 버릴 것을 찾아내려면 우선 전통 문화에 관한 정확한 연구가 필요하다
. 이 노선에 속하는 이종계(李宗桂)는 전통문화에 관한 논의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몇 가지 요소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중국의 전통문화는 윤리적 사고에 근거한다, 학문과 실용이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현실정치에 관심이 많다, 주체의식을 고양한다, 변증법적 사유가 풍부하다, 정체(整體) 관념이 강조돼 조화를 추구하고 공동체 중심으로 사고한다, 직관(직각)적 사유에 크게 의지한다, 경전중심적이다, 인간관계를 중시한다, 무신론적이다 등등.


   또한 이런 분석에 따라 실제로 계승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것도 과제이다
. 장대년(張岱年)은 반드시 배척해야 할 것과 계승해야 할 것에 각각 4가지를 꼽는다. 먼저 배척해야 할 것은 반민주적인 계급사상으로서의 삼강(三綱), 반개인적인 가족중심의 전통, 직관에 의지하는 사상적 방법, 비논리적이고 비약이 심한 사유방식이다. 이들은 반드시 민주주의, 개인주의,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반면 계승해야 할 것은 무신론, 변증법적 사유, 인본주의, 애국주의적 측면이다. 이런 것은 현대 사회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중국 전통문화에서도 그 풍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공산당의 이런 노선에서 정치적 의도를 읽을 수 있다
. 우선 비판적 계승론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그 내용이 약간 다르게 느껴진다. , 비판적 계승론이라고 이름이 붙어있지만 사실은 공산당의 공식적 노선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노선이다. 민족문화에 관한 연구는 공산당의 정치적 이념에 부차적이며, "당의 문화전략 아래 물질문명 발전에 대한 조정과 지도 역할을 담당할 수단으로서 비판계승론이 자리매김된다." 공산당에게 민족주의란 개혁개방 정책에 잇따라 발생하는 반공산당적인 연구들, 즉 완전히 전통문화를 옹호하는 문화적 보수주의자들과 완전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요구하는 세력들에 대항하는 이념이 된다.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 중국 전체를 운명공동체로 묶어놓은 뒤 당의 지도에 따른 단합과 발전을 강조함으로써, 당과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을 수구 또는 반동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비판적 계승론자들은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을
"계급적 편견이 유학 안에 알게 모르게 표현되어" 있다면서 비판한다. 유가의 "'정통사상'은 중국 고대에 장기간 어용적 의식형태로 존중되고 받들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제도와 정치의 상부구조, 즉 군주전제·중앙집권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철저재건론자들에게는 중국의 구체적인 현실을 모르고 무조건 서양의 제도만 추종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전면적 도입'은 당연히 민족의 주체적 정신을 발휘한다는 전제 하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 우리들의 사회주의 제도를 위태롭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독립과 통일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3) 반당적 개혁 노선 - 철저재건론

 

   반면 전통문화의 여러 요소들이 현대 문명의 여러 측면들과는 조화롭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계승하고 발전시킨다는 생각에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나아가서 마르크스-레닌의 원래 이론에 따르면 사회의 발전단계는 언제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단계를 거쳐야하는데 중국은 그 단계를 겪지 않았으므로, 이 단계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데 까지 나아갔다. 이들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미에서 이들을 '철저재건론자'들이라고 칭한다.


   철저재건론을 주창하고 지지한 사람들은 대개 젊은 소장학자들이었다
. 이들은 당시에 유럽과 영국, 미국에서 유행하던 여러 이론들을 이용해 중국사회의 특징을 설명하려고 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김관도(金觀濤)'중국사회 초안정구조론'이다. 그의 이 주장은 문화를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서 파악하는 사회학이론을 중국의 전통문화연구에 적용한 것이었다. 그는 "중국 봉건사회가 중앙 집권적 구조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분산적인 소농 경제를 묶어주는 내재적 조직력=유생 계층으로 조직된 중앙 집권적 관료 조직이 존재했고 통일적인 문자와 발달된 교통 통신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 이데올로기와 관료 기구의 '일체화' (...) 로 말미암아 중앙집권적 전제 정치가 추진되어 소농 경제 사회에서 등장하는 귀족화 경향과 농민의 지주에 대한 종속화 등이 억제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이런 초안정구조 속에서 중국의 봉건적 제도는 서양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장기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다.


   더불어
, 그가 문화는 하나의 전체적인 체계로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적 계승론자들의 주장이나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전통문화의 특정한 요소들을 떼어서 현대화한다거나 계승한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화하려고 하거나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요소가 제외된 다른 문화적 요소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한다는 것은 한 문화가 다른 문화로 바뀌는 것, 한 체계가 다른 체계로 교체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세계가 이전의 세계와 경제적, 정치적으로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에 알맞는 문화체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김관도는 자신의 연구가 알려진 것처럼 중국의 전통문화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연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현재 중국공산당의 노선인 중국 특색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중국의 전통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간주한다
. "1949년 공산당이 정권을 획득하여 마르크스주의가 지배적인 사상이 되자 전통은 표면적으로 잊혀졌지만 심층구조의 측면에서는 도리어 전통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이념의 발전, 특히 모택동 사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그 이념은 이른바 "유가화한 마르크스주의".


   결국 이들의 정치적 요구는 중국의 정치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 이른바 '철저한 재건'으로 기울어진다. 철저재건론과 흐름이 완전히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이택후의 서체중용론이 이런 정치적 요구를 가장 잘 압축해서 보여준다. 더 이상 중국의 전통사상과 문화는 현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런 전통은 심층적인 의식구조에 자리잡고 있어서, 현재 중국 공산당의 이념조차도 전통문화적 색채가 강하다. 경제발전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교설에 맞서서, 모택동은 정치적 운동을 통해 공산주의 혁명을 이끌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50년대와 60년대, 70년대를 거치면서 중국은 모택동주의가 실천할 수 없는 이상이라는 점을 배웠다. 그렇다면 중국에게 남겨진 과제는 현대에 걸맞는 사상적 활동을 위해 구체적인 경제구조를 바꾸는 것, 특히 경제단계에 맞는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이것은 저발전상태인 중국에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자는 정치적 요구로 쉽사리 바뀔 수 있었다. 또한 이런 발전을 지도할 사상 또한 서양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이택후의 주장에 따라서, 정치적 자유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게 되었다.

 


4.
결론 - 천안문 사건

 

   철저재건론자들의 주장은 젊은 학생들과 소장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 이들의 주장과 요구는 80년대를 지나면서 점점 커졌다. 중국 공산당은 당의 지도이념과 정면으로 맞서는 이들 운동을 탄압했지만, 도리어 그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참신한 목소리를 지닌 합비(合肥) 과학기술대학의 천체물리학자 방려지(方勵之)가 학생들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 그것은 당 원로들을 전율케 했다. 맨 처음 합비 과학기술대학에서 시작되어 19871월에는 북경으로, 그리고 전국으로 확산된 학생 시위의 배후에는 그의 사주가 있다고 원로들은 생각했다. 학생들은 '자유의 꿈'을 선전하는 깃발을 들고 다녔으며, 민주주의가 새로운 종교인 것처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당시 총서기였던 호요방(胡耀邦)은 이들 학생운동에 우호적인 편이었으며, 이를 우려한 등소평은 19871월 그를 총서기직에서 해임하고 조자양(趙紫陽)을 임명했다.


   호요방이 사망하자 전국의 학생들은
198964일 그를 추모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였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게 그 추모열기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요구하는 시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두 어달 전부터 감지되던 불안한 기운에 공산당 지도부는 인민군의 전격 투입을 결정하고, 탱크와 총으로 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했다. 학생들 뿐만 아니라, "다수의 특파원과 텔레비전 기자들이 마지막 장면을 보도하기 위해 광장에 남아있었다. (...) 그들(인민군)은 폭력과 유혈사태가 목격당하거나 취재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 미국 CBS 기자는 카메라를 뺏기고, 얻어맞은 후 밤새도록 자금성에 구금되어 있었다. 홍콩과 타이완 기자들도 감금당한 채 일요일 아침에야 석방되었다. 그러나 어둠과 혼란과 위험 속에서도 카메라는 계속 돌아갔고 녹화했다."


   천안문 사건은 문화열 현상을 일단락지었다
. 개혁개방 정책에 맞물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다던 지식인들의 포부는, 공산당 지도부가 여전히 자신들의 노선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피를 흘려 확인함으로써 수그러들었다. 이는 문화열 현상의 성과와 한계, 그리고 과제를 동시에 보여준다. 문화열 현상은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설계를 그려보고자 하는 지식인들의 열망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조직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았고, 당은 결국 애초에 기획한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충돌의 결과가 천안문이라는 비극으로 드러난 것이다. 문화열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중국은 공산당 일당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수반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구는 여전히 수용되지 않고 있다. 문화열 현상이 성취하고자 했던, 그러나 천안문으로 인해 유예된 그 요구는 여전히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과제로 남아있다.

 

 

* 참고문헌

 

신성곤·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조경란,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 삼인, 2003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음, 현대중국의 모색, 동녘, 1992

코지마 신지(小島晋治마루야마 마츠유키(丸山松幸), 중국근현대사(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1998

해리슨 E. 솔즈베리, 새로운 황제들, 다섯수레,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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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현대철학연습 발제. 프랑크 하르트만, 『미디어철학』(강웅경, 이상엽 옮김) 13장 요약>

 

1. 역사의 종말

 

   20세기 이후 인간을 둘러싼 매체환경은 완전히 변했다. 매체는 사실을 전달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기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매체 기술의 발달이 이런 상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많은 매체이론가들은 인간이 이 기술에 지배되었다는 도식으로 상황을 파악한다. 그러나 플루서는 이런 도식만으로는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매체환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고,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매체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을 소통에 관한 학문, 즉 코뮤니콜로기Kommunikologie라고 이름붙였다.


   코뮤니콜로기의 입장에서 세계사는 두 단계로 해석된다
. 하나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변하는 단계로, 산업혁명 시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 다음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방식이 변하는 단계로,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현상이다. 이 단계에서는 알파벳에서 비-알파벳으로 나아가는 코드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 변화가 어떤 정치적 효과를 일으킬지 현재 우리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코드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방식(즉 존재방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코뮤니콜로기는 바로 존재방식의 변화를 연구 과제로 삼으며, 전통적인 철학적 연구를 대체하는 기획이 된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알파벳 코드로 기록되었다
. 이런 의미에서 비-알파벳 코드를 향한 변화는 역사의 종말을 의미하고, 동시에 역사가 새로 쓰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과연 플루서의 코뮤니콜로기가 사용하는 이런 수사는 단순한 표현이나 선동에 해당하는가? 또는 매체환경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방법인가?

 


2.
텔레매틱스 사회

 

   플루서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놀라운 것이 하나 있다. 그는 인터넷 세계나 컴퓨터 환경 등 우리가 지금 늘 쓰고 있는 매체환경이 아직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시점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매우 정밀하게 예견했다. 그는 현상학적 방법으로 매체를 분석해 그 일을 해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전화기는 일대일 소통수단이기 때문에 발신자와 수신자의 주체성을 지켜주는 매체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플루서는 통화를 위해 가설된 여러 종류의 선들이 실제로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매체를 가능하게 해주고 작동시키는 체계이며, 이들을 이용하는 (문화적) 코드가 바로 전화번호라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전화 체계는 인간이 사용할 비
-알파벳 코드를 암시한다. 역사의 종말 이후에 도래할 사회의 의사소통은 전화번호와 같은 비-알파벳 코드로 이뤄질 것이다. 이는 방송 형식을 통해 파시즘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지만, 동시에 다대다 매체로서 대화의 형식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 둘을 구분하는 방법이 아마도 매체이론의 과제가 될 것이다. 대화의 형식이 성취된다면, 모든 이에게 모든 필요한 사실이 알려지는 완전한 공공성(공지성) 또는 정치적인 이상향이 달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전화는 대상에 의식이 현존하는 방식을 근거리
-직접 현존에서 원거리현존Telepräsenz으로 바꿨다. 사람들은 서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매체를 매개로 삼아 서로 아주 가까이에 있게 된다. 귄터 안더스는 이런 의미에서 텔레비전Tele-vision이 세계를 우리의 집으로 배달한다고 말했다. 이런 매체환경을 근거리-직접성을 기준으로 삼아 평가한다면 매우 위험스럽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매체를 통해 펼쳐지는 현상은 실재로서의 지위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루서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전환하여, 근거리-직접성이라는 기준이 환상에 불과하며 버려야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원거리현존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내던져졌다. 이 환경을 구성하는 매체들을 텔레매틱스라고 부른다. ‘텔레비전Tele-vision/Fern-sehen텔레Tele-phone/Fern-hören, 그리고 텔레센서Tele-sensor/Fern-spüren가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플루서가 보기에 텔레비전만으로는 진정한 텔레매틱스 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
. 텔레비전은 일대다 매체이고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다대다-쌍방적 매체가 확산되고 정착되는 그 때가 되어야 진정한 텔레매틱스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사회가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는 지금 예측할 수가 없다.

 


3.
언어현상학적인 자극 유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매체에 현상학적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고전적인 철학적 탐구가 거의 소용없어진 시대에 관해 상상한다. 이들이 소용없어진 이유는, 그런 철학적 문제를 만든 매체환경이 사라지고 새로운 매체환경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플루서는 인간되기Menschwerdung’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에세이에서 이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플루서는 언어를 통해서 우리의 매체환경, (매체)현상을 파악하려고 한다. 이전의 매체환경에서 언어적 개념들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한계, 즉 매체적 한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인간은 텔레매틱스를 통해 이 한계를 넘어선다. 만약 이 시대에 철학을 한다면, 우리는 지금 상황을 표현할 언어적 개념을 가지지 못한 채 말 없는 철학(형상으로 철학하기)을 해야만 한다.


   지금까지의 철학이 우상숭배금지
, 즉 형상금지를 원칙으로 삼았던 이유는 형상을 실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상은 실재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노력을 가로막기까지 한다. 그래서 철학은 알파벳 언어의 나열을 매체로 삼았다. 그러나 매체의 변화, 특히 사진기의 등장은 형상과 실재 사이의 차이에 의문을 제기했다. 급기야 이 둘의 위계는 역전되었고, 그렇다면 철학의 매체 또한 바뀌어야만 했다. 철학은 실재를 대상으로 삼는 탐구인데, 이제는 형상이 실재의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이 사진기를 거쳐 인간의 의식에 떠오르는 과정은, 이제 매개작용이 아니라 인간이 대상을 접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미국에서 실제로 이뤄진 기술발전은 플루서의 이런 아이디어와 호응한다
. 바네바 부시는 미국 내 과학연구자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위해 지능증폭 논리기계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는 도서관 모델을 대체할 지식의 창고로서 기획된 것이다. 이후에는 이미지를 전자적으로 처리하는 비트매핑 기술이 개발되었다. 이 두 아이디어의 핵심은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는 것처럼 미디어가 작동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4.
/글쓰기

 

   플루서는 문자와 형상의 대립구도를 포기함으로써 실재와 가상이라는 대립도 포기하고, 철학(인식론)에서 매체철학으로 옮겨간다. 실재, 그리고 실재하는 것에 관한 개념은 사라져가고 그 자리를 모든 의식된 대상에 공통된 매체규칙이 대신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손에 은유해 표현한다. 인간은 손이 두 개인데, 하나는 철학적인 손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적인 손이다. 기술적인 손은 세계를 움켜쥐는(개념화하는begriff) 손이고, 이것을 도와주는 여러 수단을 이용하는 손이다. 그러나 개념화 이후의 시대를 진단하는 손은 철학적인 손이다. 이 둘이 맞잡는다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철학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또한 어디에도(어떤 일에도) 잘 들어맞지 않아 노는 손들은 서로 다른 손들을 맞잡아 텔레매틱스 사회를 구현한다. 근대 사회에서 손을 맞잡는 것은 근거리-직접성이 성립되는 곳에서만 가능했지만, 텔레매틱스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은유 그 이상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 반드시 사회과학적 분석이 뒤따라야만 충분히 설득력 있는 논의가 될 것이다. 플루서는 실제로 자신을 시험삼아 이런 분석을 시도했다. , 전통적인 철학의 작업인 글쓰기에 관해 정리하고, 새로운 형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는 글쓰기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의미의 생산, 글쓰기의 포기, 글쓰기가 구시대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는 글쓰기라는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하였다. 자신의 글을 인쇄하지 않고 디스켓에 담아 출판해서 이런 유형분석이 맞는지 시험해보았다.


   특히 그는 이 디스켓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해 끝없는 추가글을 달아주길 바랐다
. 텔레매틱스 사회에서 글 쓰는 도구와 글쓰기의 관계, 그리고 나아가서 저자와 독자, 원래글과 추가글의 관계가 바뀐다. 그의 디스켓 출판의 의도는 이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이런 생각은 미셸 푸코가 글쓰는 주체의 종말이라는 주제로 엮어낸 의견과 유사하다. 근대의 글쓰기와 텔레매틱스 사회의 글쓰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책문화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지식을 유포하는 여러 체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특히 지식 자체가 중요시되는 사회로 진행되면 될수록, 어떤 저작들은 저작의 성과 그 자체로 수용된다. 그리고 그 성과는 지식의 체계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성과로 자리매김한다. 반대로 저자(즉 주체)의 이름은 그 성과의 이름으로만 붙여질 뿐이다.


   이런 생각을 참고해보면
, 플루서가 놓친 점이 드러난다. 그는 생산된 정보가 각자에게서 개인적으로 수용 및 처리될 것이라 생각하고, 사회적 맥락에서 배치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또한 단순히 디스켓으로 출판하는 것만으로는 그의 구상을 완성시킬 수 없었다. 그것은 여전히 출판이었으며, 여전히 일방적이었기 때문이다.

 


5.
상상하기-이야기하기-정보만들기

 

   위와 같은 플루서의 단편적 입장들을 종합해보면 코뮤니콜로기 기획의 성격과 목표가 대강 그려진다. 우리는 정보가 모여있는 공간이 전자매체를 통하면 모두에게 열리는 매체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이 매체환경에서는 인간의 존재 양식이 새롭게 정의된다. 그는 이 과정을 추상화과정으로 요약한다. 그 단계는 각각 생활세계, 상상, 서술(기술), 분석(비평), 비선형적 재형상화 단계를 거친다.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은 형상으로 철학을 하고, 모든 것이 집적된 종합적 형상을 투사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매체는 그림
(즉 형상)과 구술언어다. 그러나 구술언어는 지속시간이 짧고 적은 정보만을 전달하기 때문에,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그림이 매체로서 쓰였다. 그러나 그림은 개인의 의식의 투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림을 해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의사소통을 위한 그림의 해석 체계 즉 그림 코드가 만들어지고 이어져 내려왔는데, 이것이 종교의 매체이론적 기능이다. 또 그림 코드는 평면 위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차원적이다. 다음 추상화단계로 알파벳이 나타난다. 이 문자들은 상징이긴 하지만 지시대상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 않으며, 분리되어있다. 그리고 일정한 방향으로 독해된다. 사람들은 여기에서부터 인간이 하는 모든 일들의 선형성을 발견한다. 문자는 단일한 방향으로, 즉 선 위에 배열되기 때문에 일차원적이다.


   그 다음 추상화단계는 비
-알파벳 코드다. 플루서는 이 단계는 영차원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매체기술과 매체장치를 통해 기술적 형상을 접한다. 그러나 매체장치들 사이에서 그 형상들 자체가 옮겨다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일정한 형식의 부호로 변환된 뒤에 매체장치들 사이를 오고 간다. 인간은 결코 그 부호들을 직접 독해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부호를 지배하는 것은 기계들이며, 그들이 대상을 산출한다. 아날로그 사진과 디지털 컴퓨터가 이런 견해에 부합하는 장치들이다. 인간은 점점 실재를 해석할 권리를 기계들에게 넘겨준다. 그들은 부호를 해석하는 독자적인 코드를 지니고, 실재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부호와 그 해석을 전달한다. 끝내 인간이 접하는 세계는 이 매체장치가 조직해놓은 것이 되고, 인간은 이 조직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변한다.


사회적 코드

사유형식

미디어형식

문화기술

기본행동

사회형식

미학

알파벳 이전

순환적(신화)

상징화하는 장면

해석하기

상상하기

마법적 문화

이차원적

알파벳

선형적(이성)

선형적 과정

읽기/쓰기

이야기하기

산업사회

일차원적

알파벳 이후

점형적

(모자이크)

상황

컴퓨팅하기

정보만들기

지식사회

영차원적

 


6.
선형성의 위기

 

   그러므로 이 시대는 분명히 위기라고 진단할 수 있다. 우리는 매체장치들이 어떻게 세계를 조직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전에 코드가 변화하던 시기를 참고함으로써 우리는 이런 변화를 맞이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알파벳 코드의 등장은 그림과 그 해석 전통이 지니고 있던 마술적인 힘을 약하게 하는데 성공했고,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매체를 이용하려는 계몽주의적 기획으로 발전했다. 플루서는 마치 알파벳으로 넘어올 때 그랬듯이, 우리 시대는 알파벳 코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기술적 상상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파벳 코드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여러 담론들, 즉 철학, 정치, 과학 등의 담론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알파벳의 등장에 관한 그의 분석을 자세히 살펴보자
. 인간에게 매체가 주어지기 전, 세계는 세계와 인간이라는 두 영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매체는 세계를 인간의 의식 안으로 끌어들이고 '주체화'하면서 주체가 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했다. 이것이 탈존Ek-sistenz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탈존을 가능하게 한 첫 매체는 그림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그림은 명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의 전통을 따로 전해야만 했는데, 이는 의사소통의 관점에서 문제가 된다.


   그래서 알파벳은 전통에 의존하지 않고
, 지시를 통한 직접적인 독해를 지향한다. 그러나 알파벳 코드는 직접적 독해를 얻는 대신 그림에서 한 번 더 추상의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세계와 더욱 동떨어졌다(소외). 알파벳이 하지 못하는 묘사는 또 다른 추상적 언어인 숫자로 보충되었다. 알파벳과 숫자를 사용하면 할수록 그 나열과 지시의 일차원적 특성은 인간의 사고 양식을 지배했다. 급기야 계몽주의의 최종적 모습에서 언어를 계산하는 행위에 관한 발상이 등장했고, 여러 수학적 기법들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수학적 기법들은 세계를 프로그램화 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 이제 더 이상 알파벳 코드는 필요하지 않으며, 한 단계 더 추상화된 비선형적 상상력이 등장한다. 현대의 매체기술은 이런 구조에 기반해 작동된다. 매체장치들은 세계를 완전히 낱낱이 해체한 뒤 다시 재조립한다. 인간은 이런 매체들을 통해 인식하고, 더 이상 세계 자체와 매체가 보여주는 것을 구별할 수 없다. 이것이 매체 개념의 필연적 귀결이다. 매체와 사유의 선형성은 매체장치의 기술적 발전 때문에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고, 선형성에 기반을 둔 근대적 주체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7.
주체에서 기획으로

 

   플루서의 생각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의 주요 입장을 매체이론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우리의 세계에는 명석판명한(견고한) 대상성이 없다. 대신 세계는 일종의 장으로서, 수없이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다. 특정한 매체는 이 장을 해체하고 재조립시켜서 그 가능성들 가운데 몇몇을 펼쳐놓는다. 대상의 특성이 이렇게 바뀐다면, 그것을 다루는 주체의 특성 또한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주체는 가능성들 가운데서 어떤 것을 재조립해서 현실로 승인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주체적 행위는 투사(기획)적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뀐다.


   투사적 행위자들은 의미없는 장 속에 의미를 부여한다
. 의미와 의미 사이의 소통은 계산으로 이뤄진다. 단지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장 속에서 각자가 전혀 다른 투사방식으로 현실을 승인하기 때문에(즉 각자의 계산방식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완벽한 계산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투사적 행위자에게는 동일한 코드가 전혀 다른 현실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그의 매체이론은 시학
poesie로 마무리된다. 그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며 어떤 일을 중요하다고 간주할 것인지는, 아직 다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다. 세계는 매체를 통해 점과 여백으로 흩어져 재조립되고, 주체는 가능성의 장 속에서 특정한 가능성들을 끄집어내는 투사적 행위자의 좌표로 표시된다. "점에서 점으로의 전환"이라는 말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니는 듯 하다. 플루서는 이런 진단을 통해 새로운 매체환경 속에서는 의사소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구성적 성격을 그리고 우리의 구성적 특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세계의 구성의 권리를 내주고 기술파시즘에 종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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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이글루에 써놓은 글을 옮겨놓습니다.>

 

3년동안 쓴 연습장을 마무리하는 글.
300에 대한 호평으로 시작해서 반자본주의로 끝나는구나
허허 참 인생의 질곡이 많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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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친구와 야심한 밤에 논쟁을 벌였다. 축약하자면, '시장경제가 한국의 경제에 기본으로 삼을만한 원리가 될만한가?' 라는 문제였다. 그 친구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혹은 현재까지 인류가 개발한 경제체제 가운데 가장 그럴듯한) 선택이라고 말하였고, 나는 시장경제의 원리 자체에 반대하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발전의 방법, 타국의 상황 등 세부적인 경제적 자료가 필요한 수준까지 나아갔기에, 결국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관념적인 수준에서 시장경제를 반대한다. 


  시장 경제의 원리는 다음과 같이 세분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인간은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 둘재는 이익을 얻기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 셋째는 이런 개인들이 모인 곳에서 여러 상품의 가치는 수요와 공급의 숫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 넷째는 이런 사회적 구조 아래 개인은 노동과 매매를 통하여 상품을 생산-소비한다는 것, 다섯째는 이 구조에 어떤 큰 단위가 강제적인 조정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 여섯째는 이와 같은 활동이 생산과 소비를 늘려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나 스스로를 급진주의자라고 칭할 것인데, 그 이유는 위의 원리들 가운데 첫째와 둘째에 전혀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품이 거래되는 것을 교환이라 한다면, 교환과정에서 양자가 비대칭인 경우를 너무 잘 볼 수 있다. 그런 일은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양자가 비대칭이라면, 한 쪽이 이득을 보았을 때 다른 한 쪽은 손실이 생길 것이다. 만약 양쪽이 동시에 이득을 보았더라도, 한 쪽이 더 많은 이익을 보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한정된 재화를 가지고 양쪽이 모두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결국 논리적으로 재화의 크기를 현재 상태보다 더 키워야 할 수 밖에 없다. 발전이란 시장의 결과가 아니라 요청인 것이다. 


  설사 인간이 이득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합리적으로 추구한다는 말 또한 의문을 남긴다. 사실상, 인간은 이익을 합리적으로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 합리적인 면에서 벗어나 있는 여러 심리적 요소,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한 정보의 부족, 추론과정에서 저지를 수 있는 오류 등. 이런 면모들은 경기의 과잉상승(거품)과 과잉하락(장기침체)를 불러오며, 시장은 이것을 결코 해결해주지 않는다. 


  여기에서 시장은 결코 합리적으로, 예측 가능하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측이 불가능한 것은, 그것이 합리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다. 따라서 시장을 움직이는 힘은 반합리적(비합리적) 요소인 욕망의 수요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잇다. 욕망이란, 경제에 참여하는 주체의 필요에 따라 생성될 것이고, 다시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시장을 주체들의 욕망에 놓아두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인류는 역사적인 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때에는 항상 욕망이 개입된다. 거품이 생성되는 때에도 이들이 개입한다. 도한 사태가 모두 지나고 나서야 이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최근의 미국 부동산 위기(서브프라임)나, 그 전의 정보기술기업주들의 몰락(닷컴거품 붕괴) 등의 사례들은 하나같이 경제주체와 시장의 비합리성, 비이성성을 증명한다. 


  이런 기초 위에서 경제가 운용되는 이상, 아무리 정부의 규모가 비대하고 규제와 제한이 많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근본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혹은 정부구조의 왜곡에 의해 이런 면들을 고의적으로(굳이 고의적이지 않더라도) 방관할 수 있다. 결국 이것은 어떠한 사건과 직접 연관이 없는 경제주체들에게까지 타격을 주는 위기로 커질 수 있다. 한국의 경우, 국제금융기구의 원조(IMF 사태)가 그랬고, 카드 사태가 그랬다. 따라서 큰 정부 구상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매력적인 방안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근본적인 대안은 될 수 없다. 이것은 내가 분석해본 시장 경제의 원리 가운데 다섯 째에 대한 반론이 될 것이다. 


  설령 큰 정부 구상이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그 정부는 경제를 예측가능하게 메타적으로 통제하는 기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의 경향을 짚어보았을 때 - 특히 '제3의 길' 이라는 이름으로 시장경제원리를 경제의 토대로 삼는 현재의 추세는, 이와는 정반대이다. 즉, 정부는 거대한 재정을 바탕으로 시장을 교란시킬 뿐 통제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정부도 경제를 구성하는 경제주체가 되어, 시장의 비합리성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정부가 제공해야 할 여러 가지 용역 - 교육, 의료, 공공시설, 생계보장 등 - 을 줄여 정부의 손실을 메우는 현상을 필연적으로 낳는다. 


  시장경제는 무엇보다도 발전에 대한 환상 때문에 그 영향력이 유지된다. 바로 여섯째 원리에 대한 신봉이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제1세계 국가의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의 역사에 비추어 보았을 때,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고 간주된다. 그리고 현재 실제로 이들 국가는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여전히 선진국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선은 앞에 썼듯이 '발전은 시장의 결과가 아니라 요청이다.' 라는 관념적인 반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외에도 두 가지 반론을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시장 경제가 발전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장경제 원리를 채택해 발전하는 국가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들도 있다. 2차대전 이후 갑자기 해방을 맞이한 국가 가운데, 시장경제를 원리로 채택한 국가는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들 가운데 실제로 발전구도에 진입한 나라는 몇이나 될까. 친미 성향의 군부독재 정권이 들어서 시장경제를 채택한 나라들, 경제적으로 우파인 민족주의자들이 세운 나라들. 한국인의 눈에는 이런 곳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객관적 경제지표의 성장을 들어 시장과 발전의 연관성을 강조하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객관적 경제지표는 그 자체가 은폐성이 짙은데다가, 시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성장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현재 선진국들은 전혀 시장적이지 않은 여러 방법으로 자국의 경제지표를 성장시켜왔다. 관세장벽을 높여 자국산업을 보호육성한다든가, 군사력을 통해 강제로 시장을 개척한다든가, 물리력을 동원해 우너자재를 공짜에 가까운 가격으로 매입하고 비싼 값에 팔았고, 생필품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손실분에 대해서는 정부비축을 명목으로 대신 매입하거나 보조금을 지급했고, 저축을 장려해 단기간에 엄청난 자금을 끌어모아 관 주도로 국가기간산업에 투자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런 방법이, 내수를 폭발적으로 진작하고 경제를 안정적으로 성장시키는 데 더 도움이 된다. 


  또 다른 반론은, 시장경제원리 아래서 발전은 필연적이지 않은 데 비해, 시장경제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시장의 붕괴와 그에 따르는 파국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이다. 이상적 시장은 위험을 언제나 내포한다. 이 과정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기술이 특정한 상품공금자에 의해 발전하면서, 시장의 균형을 깨뜨린다. 이 공급자는 가격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단숨에 올라서고, 가격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다른 공급자를 시장에서 쫓아낸다. 물론 이 과정은 공급자 간의 경쟁이 아니라 합리적 수요자들의 선택과정에서 생겨나므로, 공급자의 의지와 무관하다. 자본은 선도적인 공급자에게 쏠리고, 어느 순간 독점적인 지위 혹은 그에 준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공급자에게 넘어가고, 소비자는 높은 비용을 치러야한다. 이것은 필연적이다. 


  다른 하나는, 경제-사회 전반적으로 기술 수준이 높아질 경우, 노동자 집단은 그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게 된다. 기술 향상은, 같은 양의 상품을 만드는 데 더 적은 양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의 생산수준을 유지하면, 노동자 집단의 소득은 줄어든다. 생산량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기술수준이 높아지기까지 투자한 비용을 회수해야 하기 때문에 제품의 단가는 동일하다. 이전과 노동시간이 같으므로 임금 역시 동일하다. 어느 쪽이든 실질적인 수요는 감소할 수 밖에 없고, 결과는 어느 쪽이든 경제위기다. 이상적인 시장이 붕괴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지구 전체가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가는 추세인 지금도, 이러한 필연은 똑같이 반복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중국은 경제가 정부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돈 놓고 돈 먹는 식의 규제 없는 금융화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미명 아래 경제주체들의 욕망을 자극해 정기적인 파국을 불러온다.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큰 손해를 입는 집단은, 다름아닌 금융상품에 투자해 시장을 교란하려던 정부다. 국제적인 노동력의 이동은 어느 지역에서든지 노동의 조건을 가장 나쁜 상태로 만든다. 물론 이에 대한 책임은 좀 더 싼 임금을 받고 일하는 다른 노동력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싼 임금을 선호하고 또 그에 대해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선호를 강하게 주장하는 사용자에게 주어저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시장경제는 적어도 경제를 제도화할 때 근본적인 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급진주의자가 추구하는 경제모델은 '급진적 민주주의에 의해 생산 전반이 통제되는 경제'이다. 이와 같은 이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시되었으나, 시장중심주의적인 환상에 의해 묵살된 상태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현실사회주의'와도 다르다. 현실사회주의로서 드러난 국가들은 결국 생산계획조정계층이 특권계층이 되는 것 이외에 더 다른 결과를 낳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장의 생산방식에 대항하는 운동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것은 시장경제가 품고 있는 근본적 한계에 대한 저항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계획(을 포함한 경제정책 전반)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에게 동등한 참여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방향은 생산된 상품을 올바르게 분배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이것마저 확보되지 않는다면, 소비의 주체인 경제주체들이 소비의 수단이 될 소득재분배를 올바르게 받지 못할 것이 뻔하다. 경제주체들의 소비감소는 곧 경제의 왜곡과 붕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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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가 있었으나 이 이상 진행시키지 못하고 일단 스탑.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뒤의 이야기인데,
그것은 경제 이야기가 진짜 관념적인 수준의 이야기이므로
일단 떼어놓고 쓰기.
태클 및 첨언부언 대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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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현대철학연습 발제. 프랑크 하르트만, 『미디어철학』(강웅경, 이상엽 옮김) 8장 요약.>

 

1. 설명 대신에 기술

 

   분석철학적 경향은 19세기 말 독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경향을 띄는 철학자들은 반형이상학적 경향을 보였고, 철학은 전적으로 과학적이어야 하며 또 그만큼 엄밀한 학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통적인 철학에서 다뤄온 여러 주제는 여기에 부합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시에 수학철학, 과학철학 등의 연구에 의해 이런 엄밀함은 갖춰지기 힘들다는 견해가 등장했다. 세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사실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화두는 세계의 확실함과 과학의 엄밀함 즉 '설명'에서, 이들을 설명할 때 동원되는 명제들의 유의미함 즉 '기술'로 넘어갔다.


   이 속에서 철학은 학문의 논리
Wissenschatslogik이 된다. 철학의 과제는 새로운 진리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각 분과학문들이 내놓은 주장들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밝히는 것이 되었다. 철학 또한 한 분과학문으로서 스스로를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전통적인 철학에서 다뤄왔던 주제들이 포함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이다. 이들을 학문에서 추방하는 것은 일종의 개혁운동이 되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뭉쳐서 비엔나 학파를 만들었고, 이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모든 분과학문들이 하나의 체계 아래 놓인 통일과학Einheitwissenschaft이었다.


   이들은 통일과학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분과학문 사이의 소통을 위해 통일된 표기형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이런 요구는 매체철학적인 의미에서, 각 분과학문들에 고유하게 사용되던, 다시 말해 그 분과의 역사에 지배당하는 언어로부터 벗어나 탈역사적인 미디어 추구라는 과제와 연결된다. 만약 고유하고 역사적인 언어들이 우리의 사고를 흐릿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면, 탈역사적 언어들은 내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해주며 나아가서 의사소통의 불투명함도 없애주리라 기대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의 요구는 매체의 관점에서 봤을 때 깨끗한 매체, 해방된 상징에 대한 요구로 이해할 수 있다.

 


2.
시각적 방법의 도입

 

   이런 요구가 채택한 방법은 시각적 방법의 도입이었다. 당시 새로 등장한 미디어 기술은 활자인쇄 이외에 다른 형식의 미디어들(영화, 음반 등)이 대량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는 이런 점에 착안해 과학의 성과들을 공유하는 데 이들을 이용하면 훨씬 더 그 목적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비엔나식 방법에 따른 그림통계학Bildstatisik nach Wiener Methode>이라는 논문에서 시각매체로 문자를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실험결과를 이미지로 재현하면, 보는 사람은 활자로 재현한 것보다 훨씬 더 보기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시각매체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수많은 재구성이 개입하는 활자 매체와는 달리, 실험과정과 결과를 거의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시각매체는 처음에는 과학자들 사이에서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활용되며
,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급되어 과학의 성과를 직접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해주는 수단 즉 계몽의 도구로 활용된다. 또한 활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교양Bildung 중심의 계몽주의, 데카르트와 칸트의 세계로부터도 벗어난다. 체코의 신학자인 코멘스키(코메니우스)는 그림으로 이뤄진 백과사전(<세계도회>)을 만들려 했는데, 노이라트는 이를 인용하며 자신의 기획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점들 때문에 그의 다른 면모들보다 매체철학적 이론과 공헌이 더욱 부각된다
. 그는 새로운 매체의 발견을 통해 분석철학적 목표와 계몽의 꿈을 동시에 실현하려 했다. 그는 1924년 비엔나에 사회경제박물관을 세우고, 미래의 박물관에 관한 구상을 현실화시켰다. 그가 생각하기에 박물관은 옛것을 보관하는 창고가 아닌 지식의 교량이 되어야 했다. 그런 지식은 세대를 막론하고 알아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시각매체들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나타낸 것은 각종 통계 및 평가자료였다.

 


3.
과학적 표현의 전달 능력

 

   노이라트는 언어와 활자화가 더 이상 대중적인 의사소통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짚어냈다. 아날로그 기술이 등장한 이후 활자가 아닌 다른 매체들을 통한 대중적 의사소통이 급격히 확산되었고, 새로운 형태의 시각적 논증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그는 이것을 활자를 대체할만한 과학적 성과의 보급 수단이라고 평가했다. 시각매체의 모양이 메세지 전달에 핵심적인 요소이므로, 이를 잘 고안한다면 효과적으로 과학의 결과들을 널리 알릴 수 있다. 그는 매체에 관심을 쏟으면서 언어의 명료함이라는 이론적 문제와 계몽이라는 실천적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계몽에 걸맞는 지식세계의 구성은 어떻게 가능할까
?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가 직접 만든 인공언어를 유포시키는 것도, 사회의 전체적 수준이 과학적인 단계로 올라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 사회는 공학적 접근을 통해서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기존에 신뢰하고 있던 여러 체계들도, 특정한 사회적 전환기에 가해지는 급격한 충격으로 인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이다. 또 그 자리를 기획된 다른 체계가 차지한다. 그는 전쟁을 겪으며 이런 순간을 경험했으며, 그러므로 이런 사회공학이 가능하다 믿었다.


   계몽은 이런 사회공학의 목표다
.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각매체를 중심으로 지식세계 전체가 재편되어야 한다. 지식세계의 재구성에 기초한 사회개혁이 바로 계몽이며, 이는 애매모호함 없는 의사소통에 의해 과학적 지식이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과학자 사회에서 통일된 언어를 구축하고 이들을 그림언어로 표현해 대중에게 보급하는 두 단계를 거치면 노이라트의 계몽의 기획이 완료된다.


   이런 사회공학적 노력이 한데 모인 것이 백과사전이다
. 그러나 근대의 계몽 기획과 달리, 매체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백과사전에 대한 관점이 변화한다. 근대에 백과사전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이 축적된 장이었다면, 노이라트의 관점에서는 당대에 통일과학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다. 근대의 계몽은 백과사전의 편찬으로 결실을 맺지만, 노이라트는 계몽적 노력을 지속시키기 위해 지식을 전달하려고 백과사전을 편찬한다. 그렇다면 우리와 다른 역사, 그리고 그에 따라 다른 언어를 소유하게 될 후세대들이 어떻게 지금 우리의 백과사전을 이해할 수 있을까? 노이라트의 계몽 기획에서는, 이 대목에서 다시 의사소통의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탈맥락적, 탈역사적으로, 더 많은 사람이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파벳 활자가 아닌 다른 수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4.
그림통계의 '비엔나학파의 방법'

 

   "현대인은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인간이다. 광고, 계몽포스터, 극장, 삽화, 신문, 잡지 등은 대중을 교육시키는 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조차도 그림이나 삽화에서 보다 많은 자극을 받는다. 피로한 인간들은 읽어서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는 쉽게 알아낸다. 이뿐만 아니라 그림교육학은 많이 교육받지 못했지만 시각적으로는 잘 수용하곤 하는 성인들이나 혜택받지 못하고 별로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 오토 노이라트, <비엔나식 방법에 따른 그림통계학>


   노이라트는 그림언어가 활자와 숫자가 보여주지 못하는 총체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 그리고 탈역사적이고 편견에서 자유롭기에 과학을 설파하는 데 매우 적절하다. 이것은 '말은 분리시키고 그림은 결합시킨다'는 표현에서 압축되어 드러난다. 이런 노이라트의 생각을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매체가 단순한 중간자로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접하는 세계의 질서와 그에 관한 사실을 구현한다는 현대적인 사고를 떠올리게 한다. 과학의 전파 매체로 그림을 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매체에 관한 관점에서 노이라트는 현대적이다.


   이 두 측면은
, 노이라트의 관점에서는 결국 매체 자체에 관한 연구와 매체의 혁신을 통해 해결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아이소타이프ISOTYPE, 즉 일종의 다양한 아이콘 모음을 개발해 기존의 어휘를 대체하고자 했다. 이 아이콘들은 그것이 표상하려고 하는 바를 즉각 나타낸다. 그의 말에 따르면, "네 번, 다섯 번째 볼 때도 아직 계속해서 정보를 주는 그림은 비엔나학파의 입장에서는 교육적으로 부적합한 것으로 비판된다." 이런 그림문자는 관계적으로 사용되고, 규격화-축약이 필요하며, 일관되게 항상 동일한 기호를 사용하고,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자기지시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규칙 아래 제작되었다.

 


5.
민중의 계몽으로서의 그림문자

 

   우리는 이미 이런 그림문자가 일반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노이라트의 아이디어는 성취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각각 아이콘 제작자 만큼의 아이콘을 가지고 있다. 같은 대상을 보고 있더라도, 각각 다른 아이콘 제작자들이 같은 아이콘을 만들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이라트의 계몽 구상은 기본적으로 과학자 집단과 그 이외 집단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콘 제작의 권위는 과학자 집단에게 주어진다. 이들이 통일성을 유지한다면 아이콘 또한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고, 이 통일성은 방송 환경을 통해서 과학자 집단 이외의 사람들에게 전파된다. , 노이라트의 구상은 당시의 매체환경에 대한 반응이며, 동시에 계몽주의적 공공성(공지성)에 대한 응답이 된다.


   그림문자의 고안은 그를 근대적 계몽을 성취하려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근대적 지식세계를 벗어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시킨다
. 스스로 '말하는 기호'들로 적절하게 옮겨진 세계는 사람들에게 이 세계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정보들을 공공적으로 소유한다. 이것이 과학적 인식과 과학적 결과의 전달의 최종 목표다. 여기에서는 정보의 전달이 목표가 되고, 세계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인식론적 물음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난다. 이 점에서 그는 근대적 지식세계를 벗어난다. 반면 매체를 바꿔 의사소통 환경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 즉 더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장을 만들어야 계몽이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근대적 계몽의 기획은 그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6.
보편코드는 기능하는가

 

   또 다른 측면에서, 계몽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줄 그런 언어(또는 기호)가 가능한지를 물어볼 수도 있다. 노이라트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림문자를 고안해보았다. 그러나 그림문자는 실제로 노이라트가 생각한 것처럼 작동할까? 그는 시각매체를 혼란이 덜하고 깨끗한 매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으로 활자언어를 대체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각매체를 충분히 접하는 우리는 많은 반박을 가할 수 있다. 착시 등의 요소 그리고 그래픽 기술은 과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세계를 창조해낸다, 기호를 이해하려면 맥락이 필요하다, 특정한 기호에 관한 이해는 그 기호가 만들어지고 통용되는 공동체를 넘어서면 불가능하다 등등이 이런 반론에 해당한다. 특히 기호는 "행위, 동사의 시제, 부사, 전치사를 표현해야 할 경우에는 매우 어렵다." 설령 보편언어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그림만으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 분명하다.


   그러나 노이라트의 그림언어 구상은 분명 매체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 그는 시각매체의 중요함을 통찰했고, 인간의 의사소통을 언어와 활자 중심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이런 매체에 관한 통찰을 계몽이라는 철학적 실천과 분명하게 연결시켰다. 그러나 이 둘을 연결시키려는 과정에서 '기호''그림'을 혼동한 것은 큰 실수였고, 그의 한계점이다. 그림이 기호가 되려면, 즉 의미를 지니거나 무언가를 가리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는 무언가를 가리키는지 계속해서 가르쳐져야 한다. 이것이 기호가 공동체 밖으로 나아갈 수 없는 이유다. 그림이 아무리 특징을 잘 잡아서 나타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호가 아니다.


   반면 이 글에서 지금까지 계속 언급한 것처럼
, 미디어이론의 측면에서 그의 의의는 분명하다. 그는 문자와 그림 사이의 위계를 뒤집어서 현대를 예견했다. 그리고 이런 그림이 사람들 사이의 정보교환, 의사소통의 중심이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나타냈다. 노이라트 당대에는 이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에는 기술이 그만큼 발전하지 못했지만, 노이라트의 예언은 현대에 들어서야 딱 맞아들어가고 있다. , 그는 '읽기'가 단순히 책 매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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