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소속감 - 슬기로운 조직 문화를 위한 위트 있는 반격
김응준 지음 / 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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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소속감, 김응준 지음, 김영사, 2019


<그놈의 소속감>은 시작부터 놀라웠다. 책표지 책날개를 보고 놀란 건 <그놈의 소속감>이 처음이었다. 표지에 적힌 <그놈의 소속감>, 김응준을 보고 실명인가 싶었다. 부제가 슬기로운 조직 문화를 위한 위트 있는 반격이기에 가명일 것이라 생각했다. 실명이라면 대기업이든, 공무원이든 조직생활을 경험한 컨설턴트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책표지를 보는 순간 놀라게 되었다.


김응준
쓰는 내내 보수적인 조직 문화가 너무 신경 쓰였다.
이렇게 써도 되는 걸까?’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
5
급 공무원, 어느덧 4년 차다.(책표지 날개)


현직 공무원이었다. 주제의 흥미로움보다 걱정부터 앞섰다. ‘? 현직 공무원이 조직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그것도 실명으로 써도 괜찮나?’ 싶었다. 물론 이러한 걱정은 내가 가지고 있는 조직에 대한 자기검열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어느 조직이든 조직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눈치 보지 않고 공무원이어서 하지 못했던 말, 공무원이라 하고 싶은 말을 썼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눈치 보는 거, 딱 질색이다.
각자의 생각, 환경, 생활 방식이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소속감과 사명감은 알아서 길러볼 계획이다.(채표지 날개)


원래 속에 있는 말을 잘 참지 못한다.
이제 와 후회되는 일도 많지만 그것은 타고난 성격이다.
속으로 엎치락뒤치락 고민하는 대신 터놓고 이야기하는 편을 선택했다.
공무원이어서 하지 못했던 말, 공무원이라 하고 싶은 말을 썼다.(7)


<그놈의 소속감>은 부제 슬기로운 조직 문화를 위한 위트 있는 반격이라는 말처럼, 저자가 공무원으로 재직하며 겪은 조직문화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조직에 있든 누구나 겪는 상황이지만 앞에서는 당당히 이야기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어, 읽는 것만으로도 내가 속한 조직에서 겪는 답답함이 해소되는 느낌이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공무원 조직은 폐쇄적인 곳이다.
흐르는 물보다는 고인 물에 가까운 조직이라
매일 보는 사람과 꽤 오래 부딪쳐야 한다.
실제 정년까지 다니게 되면 한 동료와
세 번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입사하자마자부터 들었다.
소셜한 조직이라 트러블이 생기면 피할 곳도 마땅치 않다.
일만 잘해서는 안 되는 조직이란 말을 일주일에 한 번씩 들으며 출근한다.(29)


사람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누군들 좋은 의견을 내고 빠르게 회의를 끝내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말하면 내 일이 되고 그걸 돕거나 보호해주거나 끝까지 지지해주는 사람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사라지기 때문이다.(33)


아무리 편한 상사라도 상사는 상사다.
동료나 동기만큼 편할 리 없다.
나는 젊은 세대를 이해하는, 앞서가는 사람이야
나는 부하 직원들과 성공적으로 소통하는 상사야
나는 신문에서 구글의 조직 문화를 배우고 익힌 사람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 다시 한번 검토해주시면 좋겠다.(
)
억지로 소통하려고 하면 오히려 소통이 어긋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는 저절로 사람이 몰린다.(35)


성과 보상 체계가 명확하지 않은 조직에는 특징이 있다.
조직원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새로운 일부터 벌이고 보기를 택한다는 점이다.
일의 성공 가능성이나 현실성은 차후의 문제다.
특히 국가가 하는 일은 그 일의 실제 효과를 검증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63)


재미만 기준으로 한다면 절대 선택하고 싶지 않은 공간이 있다.
바로 회사 대회의실이다. 대회의실만 들어서면 예능 감각이 간절해진다.
대회의실이 과연 어떤 공간이냐 하면, 모든 공무원 조직에 있는 대형 회의 장소로,
고위직부터 말단까지 어떤 민간인이 들어와서 보더라도
누가 윗사람이고 아랫사람인지 알 만한 대형으로 앉아,
창의적인 생각과 대안을 내놓으세요라며
끊임없이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장소다.
긴장되고 숨 막혀서, 어떤 발언을 하고는 싶은데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76~77)


바쁜 사람은 어느 자리에 가도 바쁘고
안 바쁜 사람은 언제나 안 바쁘다는 점이다.
일이 자리를 따라가야 하는데 사람을 따라다닌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더 바쁜 자리로 옮기고,
덜 열심히 하는 사람은 덜 바쁜 자리로 옮긴다.(143)


처음 직장에 들어와 놀란 게 있다.
소속감을 가지세요라고 말하면
소속감이란 게 으레 생길 거라 믿는 어른들이 너무 많아서다.
행여나 오해는 마시라. 여기서 말하는 소속감이란
국민의 공복으로서 국가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소속감이 아니라
조폭 세계의 상명하복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어른들과 함께 일하다 보면 내가 초임 시절에는 말이야라는 말로 시작되는,
딱히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39)


저자가 말한 소속감을 가지라는 말은 조직에 대한 충성심, 상사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라는 말이다. 사기업에서는 로열티라 부른다. 업무 능력 보다는 조직에 대한 순응도를 표현하는 말이다.


여기에 더해 사기업에서는 주인의식을 갖고 업무에 임하라고도 한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별 저항 없이 사용한다. 주인이 아닌데 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소속감을 가지라는 것처럼 어색한 말이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 주인이 되는가? 주인 아닌 자의 주인의식은 노예근성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다시 <그놈의 소속감>으로 돌아오면 저자는 단지 관료화 된 조직, 조직문화만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이왕 속한 조직에서 나름대로의 소속감과 사명감을 갖고, 불합리해 보이는 모습들을 관례처럼 답습하지 않고자 하는 다짐들도 담겨있다.


내가 혐오했던 사람으로 나 자신이 변해가는 현실만큼 괴로운 일이 있을까.(100)


방구석 여포형 상사는 정말 피하고 싶은 미래의 모습이다.
물론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목표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깨닫고 있다.
아니면 아니다, 옳으면 옳다고 말하는 대신, 좋은 게 좋다고 말하는 것이
조직생활을 편히 하는 훌륭한 방법임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104)


생각해보니 항상 밝게 떠들며 사무실에 들어서는 사람이 있고,
퇴근할 때까지 내내 우거지상인 사람도 있다.
밝게 웃는 사람 옆에선 억지로라도 한 번 더 웃게 된다.(
)
나는 직장 동료에게 긍정적인 기운을 전하는 사람일까.
일단 나부터 노력해서 나라도 변해야 하지 않을까.(156~157)


단순히 공무원이라는 타이틀에 갇혀 안주하고 싶지는 않다.
조직이 원하는 순응하는 인재상과는 별개로,
삶과 일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 직장 밖과 안에서 목표를 설정한 다음
꾸준히 점검해보는 것. (166)


자기 만족감을 키워볼까 싶다.
만족감이란 언제나 주관적이다.
같은 일이라도 나만의 시각으로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167)


인간의 생애주기 중 육체의 최절정기인 청년기, 장년기에 하루 24시간 중 3분의 1 이상을 할애하여 빛나는 청춘을 갈아 넣어야 하는 직장생활. 젊음을 바쳐 일하는 만큼 개인의 성장은 물론 행복한 직장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고 직장생활의 삶의 목적은 아니다. 행복한 직장생활은 행복한 가정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놈의 소속감>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직장생활에서의 행복은 일이 아닌 휴식,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직장생활을 하며 삶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그것이 바쁘게 일하는 동안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일하고 난 다음에 오는 휴식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평화로운 시간 속에 오는 것 아닐까.(178)


<그놈의 소속감>은 공무원이든 민간기업이든 직장이라는 조직에 속하기 위해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이나, 이미 속한 조직에서 부침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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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는가 - 문화재 약탈과 반환을 둘러싼 논쟁의 세계사
김경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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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는가, 김경민 지음, 을유문화사, 2019

<그들은 왜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는가>를 읽기 전에는 문화재란 당연히 우리 민족의 문화 유산으로써 정체성과도 연결된 가치를 담고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조선 말기, 일제 침략기에 반출된 문화재는 당연히 반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약탈된 문화재이니 당연히 돌려줘야 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니 당연히 돌려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돌려주지 않는 것에 대해 파렴치한 행동이라 생각했었다.


영국박물관을 우리 손안에 있는 세계(The Whole World in Our Hand)”라고
표현하기까지 하면서, 영국박물관의 존재를 자랑스러워 한다.
이는 과거 가장 광대한 제국이었던 영국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지만,
그 유물들의 원소유국 입장에서 보면 영국은
조상들의 유산을 훔쳐가 돌려주지 않고
자신들의 문화적 성과로 자랑하는 파렴치한 국가일 뿐이다.(7)


저자 서문을 보며 이러한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 확신하며, 탈제국주의 시대에 아직도문화재를 돌려주지 않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것인지 궁금증을 풀고자 가벼운 마음에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읽을수록 강대국의 파렴치함(?)만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편견도 깨져 나가며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문화재는 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지리와 민족의 연속성이 없는 문화재는 인류유산으로서의 가치도 크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야 한반도라는 지역에서 한민족으로 5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지리적으로 민족으로 복잡하지 않은 구조이다보니 당연히 민족주의 관점에서 한반도 문화재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가 현재의 국경이 고대 문명, 고대 국가의 국경이 아닌 상황에서 현재의 국경을 기준으로 문화재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또한 문화재라는 것이 근대 국가가 생기며 성립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가 법으로 보호하고 있는 문화재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한정할 수 있는 명확한 지리적 범위를 가진 국가
그 유물이 담고 있는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59)


사물을 분류하는 가치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고대 로마에서는 그리스의 조각들이 상류층의 주요 수집품이었지만,
중세에는 기독교 성인들의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뼛조각이
훨씬 더 가치 있는 물건이었다.(69)


또한 문화재는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과시와 문명의 우열을 가르는 기준으로 악용되고, 결국 제국주의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문화재를 수집하여 제국의 수도에 전시하는 행위는()
과시의 효과를 넘어 식민지의 문명을 유럽의 문명과 비교하여
전 인류의 문화를 하나의 위계질서에 편입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233)


아시리아 사례는 근동지역에서의 문화재 소유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영국의 우위를 보여 주고자 했다.(
)
고대 아시리아의 예술과 유럽의 예술을 비교함으로써
서양 문명이 동양 문명보다 우위에 있음을 주장했다.(139)


아시아와 이집트, 중동 지역, 인도와 같이 열강이 눈독 들이는 지역에서
문화재를 수집하고 소유하고 전시하는 행위는
경쟁자를 향한 소유권 주장임과 동시에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한 국가의 독립성을 상징하는 문화재가
초기 역사에서는 타국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과 상징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63)


19세기에 들어 산업화의 성공과 함께 국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서유럽 국가들은 식민지를 확장해 나갔고, 단순하게 물리적인 영토 소유를 넘어 식민지 지배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문화재 수집과 전시는 제국의 지배를 정당화함과 동시에 제국의 위상을 과시하는 상징적 기재로 활용되었다.(233)


현재 문화재를 바라보는 관점은 문화민족주의문화국제주의시각이 있으며, 거의 평행을 이뤄 결코 좁혀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문화민족주의는
문화재를 특정 국가의 민족 정신과 정체성을 구현하는 상징물로 보고,
부당하게 빼앗긴 유물들이 본래 있었던 원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284)


문화국제주의는 문화/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는
특정 민족이나 국가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가 함께 보호하고 향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284)


또한 탈제국주의 시대에 국제법을 통해 문화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협약 이전의일에 대해서는 소급되지 않고, 강제성을 띄지도 않아 여전히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1954<헤이그 협약>) 제국주의 시대가 종결된 후
국제 사회에서 통용되는 문화재 보호에 관한 법적 기준을
처음으로 성문화한 것으로, 문화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헤이그 협약>은 전시 문화재 보호법이기 때문에
평시의 문화재 보호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252)


<1970 유네스코 협약>은 문화재의 불법적 이동(혹은 매매)의 제재에 관한
국제적 기본 틀을 만든 국제법이다.(
)
80
개국이 넘는 국가가 참여했으나, 강제력이 없는 국제법의 특성상 가입하지 않은 국가에게는 이 협약을 적용하여 제재를 가하거나 처벌할 수 없다.(253~254)


<1995 UNIDROIT 협약>은 이전 협약의 한계점인 국내법과 국제 협약의 사법 체계 간 조화를 추구하였을 뿐 아니라 문화재를 국가의 정체성과 연결 짓는 개념인 문화민족주의적 시각을 명문화하여 보다 진일보한 국제법 체계를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255)


영국에 문화재를 빼앗긴 국가들은 약탈의 불법성과 비도덕성을 비판하며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약탈은 불법이지만, 당시 관례에서 전리품 획득은 합법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의 국제법 체계상 그것이 합법이었고 관습적으로 이루어진 거이라면, 시대별 법의 효력을 인정하는 시제법의 원칙에 따라 오늘날에 약탈 행위를 불법이라고 처벌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261)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는 과거 불법적으로 약탈한 국가에게는 도덕적 성찰과 원소유국과 그 국민에게 과거사에 대한 치유, 심리적 승리를 안겨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국제법학자인 마이클 리파스는 문화재 반환은
원소유국과 그 국민에게 있어 불편한 과거사에 대한 심리적 승리라고 말한다.(
)
한 국가나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이 담겨 있는 물건을 돌려받음으로써
과거의 상처를 씻어 내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다는 것(
)
문화재 시장국가들이 합법/불법의 구분을 떠나
과거사에 대한 성철과 반성이라는 윤리적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266)


물론 반론으로 국가와 민족의 연속성이 없는 지역에서 이전 국가와 민족의 문화재를 파괴하는 행위는 이러한 원산국에 반환하여야 한다는 입장에 찬물을 끼얹는다고 한다.


2001년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운 탈레반 정권이
아프가니스탄의 4~5세기 불교 유적지인 바미얀 석굴사원을
우상숭배라며 로켓으로 파괴한 사건 또한
이후 문화민족주의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 작용하였다.(294)


<그들은 왜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는가>는 문화재 원산국과 시장국의 입장이 문화민족주의와 문화국제주의로 팽팽히 맞서지만, 문화국제주의를 주장하는 시장국가들도 문화재를 민족주의 관점으로 활용하고 있고, 심지어는 여전히 제국주의 성과로서 여전히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문화재를 돌려받기 위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문화재가 지는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와
그에 따른 반환 정당성에 대한 정교한 이론 구축 없이,
단순히 현재의 국경과 민족을 가르는 경계선에 근거한 반환 요청은
영국의 견고한 법적/이념적 방어막을 무너뜨리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300)


문화재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념에 대해서 영국도 자유롭지 못하다()
영국박물관은 이미 그 자체로 영국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일종의 거대한 문화재가 되었다.(
)
영국박물관을 국가 혹은 민족 문화와 동일시하는()
이러한 동일시에는 영국의 문화우월주의가 깔려 있다.(301)


동일한 문화재(나이지리아 베닌 브론즈)에 대해 매각과 대여 거부라는 일련의 결정은
문화재를 대하는 영국의 태도가,
문화국제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오로지 학문적 목적에만 기반하지 않는
영국의 이중적 태도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311)


영국 스스로 문화국제주의를 구현하는 보편 박물관이라고 주장하는 영국박물관을
인류 문화가 아닌 유럽 문화의 통일성을 구현하는 장소로 표현한 것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서구 중심주의와 제국주의적 사고를 반영한다(318)


문화재 반환 문제는 공식적인 절차와 법적 소유권의 개념이 아닌
상호 이해를 통한 양보와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335)


<그들은 왜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는가>를 통해 깨진 두 번째 편견은 우리도 타국의, 타민족의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고 국립중앙박물관에 다수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조선말기와 일제 침략기, 한국 전쟁이라는 혼란기에 문화재를 빼앗긴 국가로써 돌려받아야 할 문화재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려주지 않은 문화재가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도 문화재를 반환해 줘야할 입장에서 예외일 수 없다(
)
실크로드 컬렉션의 상당 부분을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실크로드 문화재는
1500여 점에 달하며, 그중 50여 점이 벽화다.
심지어 이 벽화 컬렉션은 세계 최고 수준의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자랑한다.(
)
슽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른 일본()
중앙아시아 수집품을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부른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아시아 컬렉션은 바로 이 오타니 컬렉션의 일부로,
일본이 패전으로 조선에서 철수하면서 총독부 박물관에 남기고 간 것을
대한민국 정부가 인수한 것이다.(336)


우리의 문화재를 돌려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소유한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의 문화재부터 돌려주는 것이 먼저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는 빼앗긴 다 돌려받아야 하는데, 우리가 가진 걸 돌려주지 않는다는 건 모순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왜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는가>를 한 번 읽었다고 해서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문이 더 많이 남았고, 여전히 정리되지 못하고,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잘못된 편견을 깰 수 있어서 좋았고, 지속적으로 탐독을 한다면 문화재를 소유권이라는 좁은 분야를 넘어, 문화재를 확보하기 위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 상황 등 당시의 시대상도 함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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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냉정 - 난폭한 세상에 맞서는 우리의 자세
박주경 지음 / 파람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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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냉정, 박주경 지음, 파람북, 2019


KBS 앵커 박주경이 쓴 <따뜻한 냉정>은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이슈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언론인 답게 객관적 실체에 접근하겠다는 냉정함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도 담겨있다.


그래서 <따뜻한 냉정>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실에 대해 객관적으로 냉정하고 냉철하게 바라보되, 약자를 위해, 미래세대를 위해 따뜻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우리 아이들이 계속 살아야 할 세상이()
냉소와 혐오가 시대의 지배 정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서로를 미워하고 비웃기만 하는 사회에 희망이 설 자리는 없으니까요.
희망이 없다면 생은 악몽입니다.
하루하루를 악몽에 시달리는 너와 내가 모여 이 사회를 꾸린다면(
)
세상은 지옥이 됩니다. 그래서 희망을 기어이 지켜내야 합니다.
증오의 뜨거움이나 냉소의 차가움이 아닌 희망의 따뜻함,
그 적정 온기가 절실한 시대입니다.(11)


요즘의 삶의 속도는 그야말로 초스피드이다. 빨라진 속도는 정보의 홍수시대를 낳았고, 텍스트 기반에서 영상 기반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면서 최근 가짜 뉴스도 넘쳐나지만 가짜 인지 진짜 인지 구별해낼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쁜 시대이다.


뉴스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이고, 객관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인다. 흔히 미디어의 힘은 보여주는 것에서 나오지 않고, ‘보여주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고 한다.


언론의 힘은 보여주지 않는 것이 아닌 시민의 눈과 귀가 되어 부조리를 보여 주는 것에서 나올 것이다. 하지만 권력화된 언론은 보여주지 않는 것에 열중하는 것 같다. 이들은 사회 혼란이 걱정된다며 사회 혼란을 부추기거나, 국격이 떨어진다며 호들갑을 떨며 비판하며 국격을 떨어트리는 일을 부추긴다. 혹 그렇지 않더라도 기계적 중립, 기계적 균형을 지키기 위해 과대 편향된 소수 집단의 의견이 반론이라는 이유로 비중 있게 다뤄지면서 정작 약자에게 필요한 권리에 대한 부분은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거나 무시되기도 한다.


그래서 일까? <따뜻한 냉정>의 이야기들은 TV를 통해 전달하지 못한 권력 없는 다수의 약자를 위한 메시지들이 담겨있어 뜨거운가슴으로 읽을 수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꼰대라는 표현은 일종의 저항용어다.
연령이나 지위 등에서 상대적으로 강자인 사람이 약자 앞에서
군림하는 자세를 취하면 꼰대라는 호칭으로 저항감을 드러내는 것이다.(20)


꼰대질이 무서운 건, 거기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갑질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꼰대질과 갑질은 한 끗 차이일 뿐이다.
지위나 권세를 이용해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으면 꼰대질이고,
남의 눈에서 눈물이 나도록 만들었다면 갑질이다.(24)


아프니 청춘이 아니라 아프면 환자’(28)


참고 견뎠지만 나아지는 게 없더라는 반론도 거세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현실에서
그 잠언 하나가 근본 치유책이 될 수 없음을 체험으로 절감했기 때문이리라(28)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진통제의 효력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통증의 뿌리를 자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진통제는 그저 언 발에 오줌 누기정도에 지나지 않는다.(28)


위정자들의 책임 방기와 전문가 집단의 엉뚱한 처방이 사회 문제라는
질환을 더욱 악화시키고 환자를 더 많이 양산한다.
사회적 병리 증세가 확산될 때,
법 제도와 국가 시스템마저 허술하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30)


가뜩이나 신분 이동의 사다리가 무너지고 자력 성공의 문이 닫히고
출발선부터 다른 이 불공정 경쟁의 시대에,
청년 개개인의 인내심이나 지구력만 강요하는 건 부질없고 무책임하다.(31)


여건이 꽉 막혀 있는데 그저 참다 보면 좋아질 거라는 말은 희망고문에 가깝다.(32)


공감 없는 충고만으로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을 거라 꿈도 꾸지 마라.(32)


이 시대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가 이른바 금수저 계층에
강력한 저항감을 가지게 된 것은 다음의 두가지 이유 때문(
)
하나는, 노력과 대가를 치르지 않고 으로 얻는 것들에 대한 반감이다.()
또 하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부재다.(37~38)


가진 사람이 여유분만큼의 자산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걸 손가락질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사회적 합의를 깰 때 발생한다.
물려받음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법과 제도가 정비되어 있는데,
그걸 따르지 않고 회피할 때 문제가 생긴다.(37)


재화의 공유를 기치로 내세운 신사업들이 벌어들인 수익까지도
제대로 공유하는지를 따져보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본사가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게 해주는 기초 자산들은
결코 그 회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56)


동맥경화가 신체 혈관을 틀어막아 사람을 한순간에 쓰러뜨리듯이
돈맥경화는 사회 혈맥을 꽁꽁 틀어막아 공동체를 일거에 쓰러뜨릴지도 모른다.(63)


시쳇말 가운데 개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사실 개만 한 사람찾기도 쉽지가 않다.(
)
개만한 사람이란 곧 개만큼 정 넘치고
개만큼 순수하고 개만큼 의리 있는 사람을 말한다.(70)


고통을 상쇄하는 행복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고통은 고통이고 행복은 행복일 뿐.
상쇄는커녕 어쩌면 행복의 경험치가 고통의 체감도를 더 가중할 수도 있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행복을 알게 된 뒤 그걸 잃었을 때의 상실감이란
……(73)


애완에서 반려로 용어 하나만 바꾸었다고 해서
인식이나 문화 자체가 성숙해지는 건 아니다.
애완이든 반려든 생명을 물건으로 여기는 의식 자체가 최우선 해결 과제다.
사람만 동물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 게 아니라
동물도 자격 있는 주인을 만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75)


비대면 서비스의 확산으로 사람의 일자리가 줄 거라든지
노인들의 디지털 소외 현상이 심화될 거라든지,
다른 여러 우려의 목소리들도 많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걱정되는 것은 바로 대면기피현상이다.(79)


무관심은 가장 무서운 사회질환 가운데 하나다.(79)


SNS 같은 걸로는 애당초() ‘진짜 삶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얼굴 대 얼굴, 그 오프라인 접촉만이 서로에 대한 진짜 관심과 소통을 가능케 하고
필요한 곳에 도움의 손길을 뻗게 해준다.(81)


미국뿐 아니라 유럽을 비롯한 서구권 전반이 그렇다.
종업원이라 해서 함부로 오라 가라 하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한국에서처럼 종업원들을 어이! 여기!” 이런 식으로
낮잡아 부르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손님이 왕이라는 말도 있지만,
왕도 기품 있게 행동해야 왕대접을 받는다.
무례를 권리로 착각하여 행동하다가는
자칫 왕은 커녕 사람 대접받기도 힘들어질 수 있다.(96~97)


정치인들은 행동하지 않는 대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들을 심판하지 않는 시민을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다.(105)


미국의 유명 TV 진행자인 빌 마허는
방송에서 가짜 평형이라는 개념을 주창
A
라는 저질 정치세력과 B라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정치세력이 있을 때,
A
는 선거에서 살아남기 위해 “B도 똑같이 나쁘다!” 혹은 “B가 더 나쁘다!” 이렇게 호도한다. 가짜로 평형을 맞추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의외로 많은 유권자에게 먹혀든다고 지적했다.(
)
특히 A세력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 게으른 사람들이라고 했다.
게으른 사람들은 정치나 정책, 공약 등에 대해
어떤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양쪽 다 나쁘다는 단정만 되풀이한다.(109)


책임 규명을 소호히 하고 단죄 절차를 건너뛰는 일은
대한민국의 뿌리 깊은 폐습 가운데 하나다.
죄를 묻지(ask) 않고 묻는(bury)데 급급했던 업보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113)


단죄란 보복과는 다른 차원이다.
물어야 할 책임을 확실하게 묻는 일이다.
다시는 그런 정의롭지 못한 일을 도모하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보복이라는 주장은, 책임져야 할 자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가장 흔하게 인용하는 레퍼토리다.(114)


2016년 재단(위안부 화해치유재단)을 처음 설립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는
상당수가 그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무엇보다 피해당사자들이 결정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어느 날 갑자기 통보를 받았다.
두 나라가 돈을 주고 받고 재단 하나를 설립하는 선에서
위안부 문제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고 말이다.
당시 정부는 불가역이라는 표현까지 썼다.(115)


피해자는 용서 안 했는데 가해자는 속죄를 선언하는 것,
영화 <밀양>이 생각납니다. 반성에 시효가 있을까요?
상처엔 시효가 없습니다. 수요집회는 그래서 계속되었습니다.”(116)


특이한 것은 그 “Pray for OOO” 물결이
유독 서구권 나라에서 참극이 발생할 때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중동이나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에서 비극이 발생할 때는
등장하는 걸 보지 못했다.(128)


아랫사람이나 지위가 낮은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고도
자신이 뭘 실수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례(133)


한 사람 인생에 조언이나 위로를 할 때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 한다.
진중하게 말을 고르고 고른 뒤에,
그러고도 몇 번을 더 참아 확실하게 묵혀야 한다.
그 묵힘 끝에 정제된 언어만이 위로나 조언의 자격을 갖는다.
거기까지 갈 자신이 없다면 그냥 자제하는 게 제일 좋다.
모두 카운슬러가 될 필요는 없다.(141)


소위 확신범이라 불리는 부류가 있다.
범죄 용어의 일종이지만 언론계에서도 널리 통용된다.
어떤 사안이나 사회를 보는 관점에 있어서
자신()만의 섣부른 확신을 정립하고,
그것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
여러 가지 오류나 과실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대로 그것이 잘못인 줄을 끝까지 모른다.(200)


한 때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 시기가 있었다. 진실을 이야기하는데 자기검열과 두려움이 동반된 암울함과 자괴감이 들던 그런 시기였다. 암울한 군사독재 시절이라고? 아니다 불과 3년여 즈음에도 유효했던 이야기다. 자신이 만든 법도 스스로 어기는 작금의 사태를 목도하면서 다시금 3년전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한 가운데 만난 <따뜻한 냉정>은 다시금 시계추를 과거로 돌리거나 멈추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했고, 미래 세대를 위한 기성 세대의 의무감이라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은 항상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삶아가는 것에 매몰되어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에 일침을 가하듯 삶을 대하는 태도,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죽음이란 그 어떤 위로도, 관심도, 애정으로도 막을 수 없는 단호한 수순이다.
때가 오면 누구나 홀로 죽음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 살아 있는 것들의 숙명이다.
그 모든 회한과 두려움과 애착을 정면으로 껴안고 맞이하게 될 독존의 죽음 말이다.(272)


어떤 조건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는 것 은 다름 아닌 삶이다.
죽음은 손 안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닿는 순간 그걸로 끝이다.(279)


삶은 나의 역사 그리고 당신의 역사다.()
그러니 삶을 껴안자. 삶을 끝까지 보듬어 안자.
자신이 써 내려가는 역사책의 마지막 장을 섣불리 비관하지 말자.
그 비관으로 집필을 중도 포기하지 말자.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생의 모든 가능성들을 희망과 절망 사이에 덤덤히 열어두자.
마지막 페이지란 결국, 최선을 다한 본문들이 만들어낸 후회 없는 결론이다.
누구에게나 그것이 최선 아니면 차선이었을 것이다.
그저 묵묵히, 스스로 정한 목차에 따라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부끄럽지 않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279)


삶은 누구에게나 역사
모든 인간이 저마다의 스토리로 각자의 역사를 써 내려가며 한 생을 살아낸다.
선택 없이 주어진 그 길은 참 두렵기도 하다.
생로병사의 거대한 윤회가 예외 없이 사람을 틀어쥔다.
빠져나갈 길은 없다.
그러니, 그 안에서 어떻게 사느냐, 어떤 역사를 쓰느냐 만이
각자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다.
발버둥 치든, 받아들이든, 주어진 공책은 단 한 권이다.
그 한 권 위에  지울 수도 고칠 수도 없는 나만의 역사가 적혀 내려간다.(276)


그러한 삶의 과정에서 나의 마음 바라보기를 통해 인생의 오르막길 보다 힘든 내리막길을 이겨내는 힘을 기르고자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맞다. 오르막이 내리막보다 오히려 덜 힘든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내리막은 오르막보다 견디기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269)


천천히, 조금씩,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단기 과외나 퍼스널 트레이닝 같은 걸로는 섣불리 꿈꿀 수 없다.(
)
적어도 어떤 내공의 경지를 원한다면,
처음부터 조바심 같은 건 문밖에 내다 버려야 할 것이다.(243)


자발적 고독의 좋은 방법으로는 혼술, 혼밥 말고도 다양한 것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여행이다.
여행지에 가서 홀로 낯선 거리를 헤매거나 광활한 자연을 내달리다 보면(
)
소위 인간 공해라는 것이 없었고 사람 관계로 부대끼고 고민할 일이 없었다.
오히려 소중한 사람들이 더 소중히 느껴지는 계기였다.
사람들에게서 멀어질수록 사람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일종의 역설이기도 하다.(246)


마음 바라고기는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호심술이다.
호신술만 중요한 게 아니라 호심술도 중요하다.
이 단순한 기술은 비단 화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부정적 감정에 대입 가능하다.
시기, 질투, 후회, 불안, 슬픔, 좌절
…… 그 모든 것들을
마치 제3자가 된 것처럼 바라보는 것이 핵심이다.(255)


박주경의 <따뜻한 냉정>에는 좋은 인용구도 많다. 읽을수록 의미가 더 깊이 새겨지는 좋은 문구이기에 옮겨 적어본다.


소수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했고 다수는 너무 적게 갖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식량이 모자라 고통을 겪고 있는데,
소수는 남아도는 식량에 묻혀 익사할 지경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36)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에만 머문다면 수전노와 다를 바가 없다.”
-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39)


남을 억울하게 만든 사람들이 되레 억울함을 토로하는 게 대표적인 한국병입니다.
이 병을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나라 망합니다.”
-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 (51)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여 받게 되는 형벌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
-
플라톤 (108)


백여 가지의 대중음악 장르는 잘 구분하면서
대선 후보 두 사람도 제대로 구분 못 하니
정치에 얼마나 무관심한지 단박에 알 수 있다.”
-
미국 유명 TV진행자 빌 마허(109)


소위 좋은 직장이라는 것이, 치열한 경쟁과 상하 수직 관계로 인해
일하는 사람 개인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어려운 곳(
)
그런 사회에서는 여간 강심장이 아니면 살아남기 어렵고,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감성이 아주 무디어질 것
-
김인권 여수애양병원 명예원장, 서울대 졸업식 축사(144~145)


그대들이 함께할 때 어느 정도의 빈 공간이 있도록 하라.
서로 사랑하되 너무 집착하거나 구속하지 마라.
두 사람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가 있고
천국의 바람이 불 정도의 틈과 여백은 있어야 한다.’
-
철학자 칼릴 지브란도 <예언자>(157)


“20년 후에 돌이켜보면 했던일보다 하지 않았던일들을 더 후회하게 될 것이다.”
-
마크 트웨인(167)


확보한 증거보다 마구 앞서 나가거나 확신한다고 외치는 것,
그리고 위험한 추측을 과감히 던지는 것,
지혜와 통찰이 아니라 포퓰리즘에 가깝다.”
- CSB
변상욱 대기자(201)


골목길로 들어서면 그 길만 보이고 길은 우리를 속인다.
위에서 넓게 보도록 노력하자.”
- CBS
변상욱 대기자(201)


아마 (속한 언론사에 따라) 각자의 한계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언론도 어떤 면에서는 성직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좋은 부모나 기회를 만나지 못해
밑바닥에서 참혹하게 눈물을 흘리고 사는 약자가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
언론으로서 철학을 가져보잔 말씀입니다.
순도 99.9퍼센트 금은 진보나 보수 누구의 손에 있어도 금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
김희중 대주교(210)


 밤은 낮의 적이 아니고 죽음은 삶의 적이 아니다
-
북아메리카 인디언 노래(233)


아름다움을 아움다움으로 알아보는 건 추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것도 악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노자 <도덕경>(233)


매일 입을 옷을 고르는 것처럼 생각을 고르는 법도 배워야 해.
인생을 통제하고 싶으면 정신부터 차려
-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252)


법회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새로 돋아나는 꽃과 잎의 거룩한 침묵을 통해 들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들 가십시오
-
법정 스님, 마지막 법회 인사말(275)


삶이란 바람에 흩어지는 들소의 입김이고
일몰 뒤로 사라지는 그림자 같다
-
아메리카 인디언(277)


인생이란 열린 문틈 사이로 쏜살같이 지나가는 백마 한 마리를 보는 것과 같다.”
-
장자 백구지과극”(277)


인생이 무엇을 닮았는지 아는가?
그것은 눈 위에 찍힌 기러기 발자국 같다
우연히 그 흔적을 남기긴 했으나
기러기가 어디로 날아갔는지는 알 수 없다
-
중국 시인 소동파의 시 <설니홍조>(278)


“70년을 살고 깨달았지요, 이 우주에서 인생이란 겨자 소스같은 겁디다.
한순간 톡! 하고 쏘다가 다음 순간 이내 사라져버리지요
-
영화 <덴버> 오프닝 신(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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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의 영화 - 공선옥 소설집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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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의 영화, 공선옥 지음, 창비, 2019


유복하지 않지만 화목한 가정


요즘의 자기소개서에도 등장하는 문장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때 이 말은 자기소개서에서 공식과 같은 말이었다. 어린 시절의 어렵고 힘든 가정사를 긍정적으로 포장해주는 혹은 사소한 것으로 바꿔주는 마술과도 같은 말이었다. 나 역시 화목한 가정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지 않고, 가족간에 큰 마찰이나 문제 없이 함께 모여 다정다감하게 사는 것이란 어림치의 이미지만 갖고 사용하였다.


때로는 정말로 화목한 가정이라 할 수 있을까 자기검열을 하며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가 가정을 이루면 유복하지 않지만 화목한 가정이라는 단어에 자괴감이나 자기검열이 들지 않도록 정말 화목한 가정을 꾸려야겠다는 작은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다른 가족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많은 가족들이 저마다의 사연으로 화목하지 못한 상황에 놓여있고, ‘화목한 가정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화목한 가정의 이미지는 대체로 비슷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보통 삼대의 가족이 함께 살거나 자주 왕래하며 살고, 서로가 큰 마찰 없이 서로 도우며 화기애애하게 살아가는 모습, 가족 간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양보와 절충을 통해 원만히 해결하는 모습을 화목한 가정으로 그리고 있었다.


저마다의 개성이 다른 인간이 모인 집단으로 최소 단위인 가정도 저마다 다를 수 있음에도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건 아마도 TV 드라마 속에 비춰진 화목한 가정이라는 판타지가 작용한 건 아닐까 싶었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가족, 연인, 친구, 동료 등)은 절대악과 절대선으로 구분되고, 이로 인해 많은 갈등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의 갈등은 언제나 해결가능한 문제이다. 대체로 절대악이 절대선으로 전향하거나,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됨으로써 권선징악의 해피앤딩으로 귀결된다.



현실에서 가족 간의 갈등과 마찰은 쉬 봉합되거나 해피앤딩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친구나 동료와의 갈등보다 가족 간 갈등의 골이 더 깊다는 것을 안다. 이웃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평생 얼굴 마주하지 않고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는 주위에 얼마든지 있다. 혹은 어떠한 조건들로 인해 절대로 화목한 가정이라는 판타지적 이미지에 접근할 수 없는 가족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내가 가진 이미지화 된 화목한 가정을 기준으로 화목하지 않은 가정’, ‘불행한 가정으로 딱지를 붙이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면서 드라마를 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화목한 가정이라는 판타지를 깨고 다른 사람, 다른 가정에 대해 가치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은주의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라고 하는게 맞을 것 같다.



<은주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모두 저마다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화목한 가정이라는 이미지에 부합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반드시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는다. 모두가 저마다의 어려움 속에서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사연에 가슴 아파지고, 이들을 통해 나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는 한편 나는 <은주의 영화>에 소개된 8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화목과 불행이라는 엉터리 이분법으로 이들을 불행한 가정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각인된 판타지는 쉽게 깨지지 않음을 절감했다.



현실의 어려움 일상이 늘 우울하거나 암울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은주의 영화>에 소개된 8편의 소설 속 주인공 들은 저마다 아픔이 있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웃음을 자아내는 작은 에피소드들이 있지만 결코 가볍게 웃을 수 없었다.


행사 작가 K<대낮의 매운탕>이라는 작품을 아주 오래전 발표한 후 소설은 쓰지 못하고 잡문만 쓰면서 살고있을 즈음 <대낮의 매운탕>이라는 소설 제목으로 인해 식도락가의 전국 맛집 탐방행사에 매운탕 전문 작가로 섭외된다. 그리고 회는 매운탕 다음에 나오니 매운탕 전문 작가는 회도 잘 알 것 아니냐며 회 투어 행사에도 섭외된다.


섭외 당시 작가 K<대낮의 매운탕>은 매운탕과 관계 없이 암울한 시절을 극복하는 젊은 세대의 이야기이기에 행사 섭외를 미덥지 않게 생각했지만, 행사비를 받은 이후 회 투어에서는 책도 찾아보고, 직접 전어회도 먹으며 전문 작가이미지를 갖기 위해 노력한다.


부탁을 받았으니, 지난번 매운탕 행사에 응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공부를 미리 해둬야 할 것 같았다.(
)
전어 횟집 순례객들 앞에서 매운탕 전문 작가는
회 전문 작가로 변신해야 할 것이다.(
)
회 전문 작가가 그들과 같은 양의,
같은 깊이의 정보만을 나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명색이 전문작가가 아니냔 말이다. (17)


그러나 전어 회는 매운탕이 나오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실소가 나오면서도 마음껏 미소지을 수도 없었다.


K는 부지런히 전어회를 씹는다.
부지런히도 씹어보고 천천히도 씹어본다.
이리저리 살펴도 본다.
이번에 뛰는 횟집 탐방 행사는
지난번 매운탕 때보다 잘하고 싶다,는 생각도 씹는다.
이제 곧 매운탕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어회는 매운탕이 안나온다는 것을
회를 먹고 나서야 알았다. (19~20)


<은주의 영화>에서는 어린 시절 만화 속 노래가 들려 미소가 절로 지어지고, 멜로디가 들리는 듯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어려운 상황과 오버랩되며 씁쓸해지기도 했다.


, 그러면 내가 노래해줄까?
개구리 소년 빰빠바 개구리 소년 빰빠바
니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단다
비바람 몰아쳐도 이겨내고 일곱번 넘어져도 일어나라
울지 말고 일어나 빰빠바 피리를 불어라 빰빠바
……계속 운다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음음 알 수 없는 둘리 둘리
빙하 타고 내려와 음음 친구를 만났지만
일억년 전 옛날이 너무나 그리워
보고픈 엄마 찾아 모두 함께 나가자
아아아아 외로운 둘리는
……계속 운다(121)


8편중 <은주의 영화>는 일종을 씻김굿같기도 했다. 카메라로 찍은 화면에 빨려들어 영상 속 화자가 내가 되고, 현실에서의 내가 영상 속 화자가 되는 체험. 이모 상희와 이웃집 친구 철규가 되어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쏟아내면서 아파하고, 묻어둔 말을 꺼냄으로써 위로받고 위안 삼는 씻김굿과 같다고 느꼈다.


이모가 웃었다. 분명히 카메라 속에서 이모가 웃었는데
현실에서의 나도 웃고 있었다.(
)
카메라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카메라가 숨을 쉰다.
카메라가 큰 숨으로 나를 빨아들인다.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카메라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카메라 속에서 카메라를 찾는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카메라 속에서는 카메라가 필요 없다는 것을.
카메라 속에서는 내가 카메라이고 카메라가 이모다.
나는 이제 이모가 되었다.(82~83)


그놈들이 바지를 추켜 입으면서 그래.
죽이기에는 애가 둘이나 있다고. 애들 봐서 죽이지는 못하겠다고.
철규가 나를 살렸어.
내가 숲에서 나왔을 때 철규가 은주를 업고 기다리고 있더라고.
철규는 울지 않았고 은주도 울지 않았다고.
나도 울지 않았지. 다만 갈매기만 울드만, 파도만 울드만,
우리는 결코 울지 않았다고, 철규도 나도 아무 소리 안했어.
그냥 가만히 있었어, 울지도 않고, 그것이 다여.
자네 안 들어오는 동안 우리한테 그런 일도 있었다고.
그러나 그것은 암것도 아니라고, 살았으면 된 거라고.(125)


쇠고랑을 차는 한이 있어도, 내가 이 말을 해놓고
죽는 한이 있어도 말을 해야겠지, 말을.
철규야, 이 엄마를 용서해라. 그리고 이 엄마를 잊어버려라.
나도 인자부터 너를 잊어버릴 테다,
잊어버리고 새 인생을 살아갈 거다.
너도 다 털어놓고 훨훨 날아가라, 니 가고 싶은 데로 날아가라.
우리 인생에는 그런 시기가 있단다. 막 미쳐 돌아가는 시기가 말이여이.
남한테 절대로 털어놓을 수 없는 한 시기가
있는 모냥이여, 우리 인생이.(122~123)


나도 말해야겠네. 진짜 말 못했는데,
울 아부지 제삿날 우리 은주한테도 못한 말을 철규한테 할라네,
우리 아들 철규 앞에서는 할라네.(123)


 화목한 가정이라는 내 안의 판타지를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된 <은주의 영화>를 다 읽고 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품고 있는 아픔을 쉽게 동정하거나, 용기랍시고 이겨내라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동정이나 위로는 나의 가치판단이 개입된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임을 깨닫게 되었다. 내 주변 사람들의 인생에 가치판단이 들려 할 때마다 꺼내봐야 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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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천사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4
에드거 월리스 지음, 양원정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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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유산을 노린 천사같은 약혼자. 억울한 누명으로 옥살이와 살해당한 상속자. 이를 막기위한 친구이자 변호사의 노력. 이 소설의 결말이 해피앤딩일까, 아닐까 무척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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