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세 권의 산문집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그 세 권의 책 저자가 소설가라는 점입니다.
한창훈, 전성태, 손홍규. 세 작가님의 또 다른 공통점은 아는 독자들은 잘 알지만, 모르는 독자들은 전혀 모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네, 우리나라 독자들은 베스트셀러 작가들에게 길들여져 있으니,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면 기억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들 한국 문학에서 나름의 자리들을 하나씩 가지고 계시는 작가님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아, 이 세 작가님의 또 다른 공통점을 찾는다면 이제는 사라진 모 소설상을 받으신 분들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소설가의 산문집을 읽다 보면 한창훈 선생님의 산문집 제목처럼 왜 글을 쓰는지 혹은 작가는 어떻게 된 것인지, 소소한 일들을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세 작가님은 학교 다닐 때부터 작가가 되려고 했을까요?
세 작가님이 생각하는 문학은 무엇일까요?
세 작가님은 정말 왜 쓰려고 하는 걸까요?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을 나는 고향집 근처 절에서 지냈다. 그때도 방학은 명목뿐 학생들은 등교해서 보충수업을 받아야 했다. 고3을 코앞에 둔 겨울방학을 자율적으로 보내겠다는 계획을 어른들에게 납득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부진한 입시 준비를 나름대로 메워보려고 절에 하숙을 구했지만 당시 나는 학교생활이 숨막혀서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낙오자로 끝없이 추락해가는 듯한 소외감과 열패감, 매 순간 자기 합리화에 빠져 산다는 자괴감. 하다못해 옆자리 친구들에게는 적의마저 치밀었다. 그들 역시 자의식 없이 현실에 순응하는 속물들처럼 여겨졌다. 그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은 일기 쓰기와 소설 쓰기였다. 나는 고1때부터 자취방에서 밤을 새워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이 년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홀로 끼적거린 소설이 30편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내 꿈이 작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보상 심리였다. 성적에 대한 중압감을 벗어날 방도를 못 찾은 나는 탈선할 용기도 없었던 것이다. 소설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값진 일을 하고 있다는 충만감이 들곤 하였다. 그 방학을 앞두고 나는 그 짓도 그만두자고 마음을 먹었다. 초조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절로 향한 내 발걸음은 도피에 다름아니었다.
(…)
방에 들었을 때 그는 노트에 뭔가를 쓰다가 덮었다. 소설 원고는 내 책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궁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뭔 얘기가 그래? 꼭 『선데이 서울』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구만.” 그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등지고 돌아앉았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금방 알아차렸다. 이야기가 황당하고 엽기적이고 선정적인데다가 어쩌면 개연성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모욕을 받고 나니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선생님이 소설이 뭔지나 아세요?” 그가 몸을 돌리고 앉았다. “글쎄, 그냥 내 느낌을 말했을 뿐이야. 난 정말 아무 감동도 받지 못했다.” 나는 원고를 들고 나와 아궁이에 집어넣어버렸다. 그리고 부지깽이를 쑤석거리며 울었다.
(…)
산을 내려오다가 나는 양지바른 무덤가에서 쉬면서 그의 편지 묶음을 풀었다. 애초부터 부칠 마음은 없었던지 주소도 없는 종투는 봉해지지 않은 채였다. 이미 나는 그의 편지를 하찮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그중 하나를 꺼내 읽으며선 죄책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숙!' 하고 불러놓고 시작되는 편지는 구구절절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인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여자는 비록 떠났지만 이 편지를 받고 나면 분명 돌아오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적어도 글이 이쯤은 돼야지, 나는 뭉클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
내 사명은 그렇게 쓸쓸하게 끝났지만 나는 새로운 각오로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나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_「『선데이 서울』과 연애편지」 중에서
그리 오래된 시절도 아니지만 내가 대학에 다닐 무렵 소설가 혹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들은 얼굴만 봐도 그렇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얼굴에서 다 드러났다. 문학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런 문장을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때는 문학을 한다는 생각마저도 조심스러웠다. 대체로 가난했고 앞으로도 기꺼이 가난하게 살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이미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는 희미해졌으며 누구도 그런 변화를 막을 수 없어 보였다. 문학에 목숨을 걸었던 많은 사람들이 속절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이 변화를 수용할 수 없는 사람들은 분개하며 떠났고 이 변화를 용납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 역시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며 떠났다. 아직 문청에 불과했던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혼란스러웠다. 같은 일에 종사하던 동료가 이 일에는 희망이 없다며 미련 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간들이라니.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그 시절이 어떤 의미였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법정을 세웠던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야 한 시대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이 순간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세월이 지난 뒤에야 나는 알게 될 것이다. 매번 깨달음은 한 걸음씩 늦게 찾아오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내가 사는 시대의 증인이 되는 것뿐이다. 그런 뒤에야 나는 문학에 한 가지 증거를 부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노 디아스의 소설에서 발견한 이 문장처럼.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 너는 하느님이 도미니카 사람이라는 증거야.” _「나는 왜 쓰는가」
가난과 외곽을 그리는 소설이 의미를 잃는 시대에 나는 소설가로 살고 있다. 변방의 삶을 그들의 언어로 쓴 소설이 나오면 으레 고색스러운 방 하나에 한꺼번에 모아놓고 체크인 해버리는 게 요즘 풍토이다. 토속적이다. 질펀하다. 한마디 내뱉어주면 된다고 여긴다. 평론가들이 모국어 기피, 근친 혐오, 그 배경 속에서 쓰고 있다.
도시에서 살기 때문에 욕망과 만나고, 그렇기 때문에 우울하고, 우울하기 때문에 웬만한 책임은 피할 수 있는 소설이 대부분이다. 대중 속의 고독도 사람의 일이라 작가가 그곳으로 손을 뻗지 않으면 안 되지만, 너무 많이들 어두운 카페로 걸어들어가버렸다. 개인의 우울이 사회의 비참보다 더 크고 강렬해져버린 것. 이른바 문학적이다. 그러나, 문학을 키우는 것은 비문학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_「사람이 떠난 빈 곳으로 바람이 분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