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라이징
토머스 해리스 지음, 박슬라 옮김 / 창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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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나는 드라마든 소설이든 그 내용에서 ''과 ''이 나오면 항상 ''의 입장이 되어 본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왜? ''이 될 수 밖에 없었는가? 찾다보면 늘 결론은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보니 어제 본 외과의사 봉달희가 안중근에게 그 ''이 생긴 원인이 무엇인지는 왜 알려하지 않는가? 하는 대화가 생각난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그게 좋은 방향으로 가든 나쁜 방향으로 가든 말이다.

 오래 전에 <양들의 침묵>을 영화로 보던 때가 기억난다. 영화 보는내내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같이 간 친구들과 연방 눈을 가렸다가 말았다가 여름이었는데도 그렇게 떨었었다. 후에 텔레비젼에서 다시 보여주었을 때는 너무나 담담하여 내가 정말 그렇게 떨었나 싶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양들의 침묵>과 <한니발>에 이어 드디어 렉터의 근본을 알게 되었는데 다 읽고난 지금 괴물 렉터의 탄생에 너무나 공감이 간다. 또 그 공감 만큼이나 기분도 참 거시기하다.

 다시 ''과 ''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얼마 전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에 우발적인 살인자가 된 형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많은 피해를 보는 동생이야기가 나온다. 처음에 살인자 형을 둔 죄로 인해 동생이 받아야하는 그 많은 상처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그건 내가 너무나 비현실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설마 살인자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해?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말도 안돼 라고...하지만 만약 내가 형이 저지른 살인의 피해자 가족이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과 ''을 떠나서 아무리 ''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하더라도 직접 그 살인자를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과 ''은 차이가 없다. 똑같은 것이다. 다만 내가 어느 입장에 서 있는 가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그럼, 한니발 렉터가 되어 보자. 그는 어린 나이였고, ''이라곤 없었다. 그의 오래된 조상중에 '잔인한 한니발'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것도 몇 백년 전의 일이다. 유전 형질이 변했든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유전으로 치기엔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한니발이 괴물이 되었던가?  원인은 '전쟁'이다. 전쟁은 많은 사람을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가운데 한니발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초등학교 무렵 생기는 자의식이 점점 자라면서 이성으로 발전하고 그 끝에 가서 정신으로 완성된다고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했다. 그만큼 어릴 때, 받아들인 의식이 어떤 형태로 자의식을 생성해 가는지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한니발은 전쟁으로 인해 굶주림에 반미쳐 있는 가해자들에게 받은 충격이 고스란히 그의 의식 속에 악몽으로 남았고, 그 미친 짐승들에게서 여동생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이 이성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그들을 향한 복수심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이라고 불릴 만한 것으로 변했다. 이 경우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의 상황보다 더 심한 것이므로 그 ''을 가지게 된 한니발의 심정이 백번천번 이해가 간다. 나라고 해도 그런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이성'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고 남들이 ''이라고 부르든 말든 한니발과 똑같이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은 소년 한니발은 1945년, 어린 여동생을 구하려고 했던 그 겨울에 죽어버렸어. 미샤와 함께 그애의 마음도 죽어버린 거야. 그렇다면 지금은 대체 어떤 인간 일까? 지금으로서는 뭐라 적절히 표현할 말이 없군. 아직은 더 나은 단어가 없으니, 괴물이라고 부를 수밖에." 한니발은 스스로 괴물이 되었다. 아니,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포필 경감의 말처럼 ''한 한니발은 그때 동생과 함께 죽어버렸다. 토마스 해리스는 그 나름대로 살인에 동기를 부여하여 '잔인한 한니발'보다는 좀더 '인간적인(?) 한니발'을 만들어 한니발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악몽은 복수를 하면서 사라지게 했을지언정 괴물로의 탄생을 막아내진 않았다. 이 부분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한니발 렉터 박사'의 탄생인 것이다.

 난 인간은 누구나 ''하게 태어난다고 믿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자아가 성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많은 아이들이 ''으로 발전하는데 정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자라는 환경, 혹은 주변의 어른들로 인해 변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모든 것에 예외도 존재하지만...한니발 렉터, 그의 괴물로의 탄생에는 전쟁이라는 무시무시한 환경 속에 어른들의 탐욕과 굶주림 그리고 어린아이로서는 어쩔 수 없는 그 상황이 '원인'이 되어 만들어진 어쩔 도리 없는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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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0735 2007-02-10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러님~ 우리 여기서 또 마주치는군요! ^^
요 책을 벌써 읽으셨어요? 얼른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readersu 2007-02-11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스카님!!! ^^ 반가워용~얼른 읽으시와요..넘넘 재밌어요...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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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조금 더 젊고 책에 대한 아니, 책을 많이 읽어야야하고 그 만큼 소유하고 있는 책도 많아야한다고 생각하던 그 시절에, 철학이 뭔지도 사실 모르던 그 시절에 딴에는 이런 책 정도는 내 책꽂이에 꽂혀있어야한다는 허영심으로 구입한 책이 있었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공교롭게도 두 책이 다 니체였던 것 같은데..그 책을 사서 꽂아 놓고는 느꼈던 그 뿌듯함이란..그렇다면 그 책을 읽었느냐?  처음 샀으니 두 어장 펼쳐보았는데 역시 내게 철학책은 무리였었다. 그 책들은 그렇게 십 년이 넘도록 내 책꽂이에서 나오질 못하다가 결국엔 내 손에 의하여 정리해고되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에피쿠로소가 말하는 헹복의 물질적 환상이 아니고 뭐였겠는가?..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따로 있는데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그럴듯한 해결책으로 느껴지기 위해 산다..물론 에피쿠로소는 값비싼 물건에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지만, 물건을 사 놓고도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사실은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을 수나 있을까 싶은 걱정이 너무나 커서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장식용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나의 지식에 대한 이해 부분이 업그레이드 된 것인가? 아님 알랭 드 보통의 글솜씨인가? 난 이 책을 펼치자마자 빠져들었다..이럴 수가..

 책 속에는 여섯 명의 철학자가 나오는데 여섯 명의 철학자들에게 듣는 위안들..로 꾸며져 있다.인기와 돈과 좌절과 존재, 상심한 마음과 곤경까지... 어느 것 하나도 빠지지 않고 나에게 위안이 되어 줬는데, 특히나 좌절에 대한 위안을 토로한 세네카의 장에서는 정말 많은 위안을 받았는데 지금 나에겐 많은 위안과 용기가 필요해서인지 어떠한 일을 정하는데 있어서 머뭇거림의 순간을 좀 더 확연하게 밝혀준 것 같다. 

그대는 말하겠지.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라고. 그렇다면 그대는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고,그것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이 세상에는 일어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없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나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났을 때 가지게 되는 그 충격과 타격을 미리 계산하고 있다면 세상 그 무엇에 두려움을 가질 것인가? 모든 것에 기대를 거는 한편으로 어떤 일이든 다 닥칠 수 있다고 예측하라고 세네카는 말한다.

 철학이란 사실..인생이라고 말하고 싶다.우리의 삶 속에 다 들어 있는 것들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그 어렸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해가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일지도...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은 책 제목처럼 지금, 이 시간에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혹은 모든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책이라고 감히 이야기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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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지음, 지주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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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가? 없다. 가 정답이다. 난 프루스트를 모른다. 그래서 좋아할 지 말아야할 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더더욱 프루스트를 좋아할 수가 없다. 왜? 프루스트의 글을 읽어보지도 않고 난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한문장의 길이가 <표준적인 크기의 글자로 한 줄로 배열된다면 4미터가 조금 안 되며 포도주병 바닥을 17번 감을 수 있다.>라고 하니 나처럼 쉽고 짧은 간단한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그 문장 하나도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미리 포기? 아마도...그렇다면, 프루스트를 알지도 못하면서 프루스트의 글을 포기한다면, 이건 잘하는 것일까? 잘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문장의 길이에 대해 미리 알려 준 드 보통에게 책임을 떠 넘겨야 하는 것일까? 

 나의 이런무식한 결정(읽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과는 다르게  버지니아 울프는 프루스트를 찬양한다. < "프루스트는 내 자신의 표현 욕구를 너무 자극해서, 문장 하나도 쉽게 쓸 수가 없어요.'아, 내가 그렇게 쓸 수 있다면' 하고 나는 외치죠. 그리고 순간 그가 불러 일으키는 놀라운 흥분과 충만함 때문에 나도 그렇게 쓸 수 있다고 느끼고 펜을 잡게 되지만, 나는 그렇게 쓸 수 없지요." > 그녀의 심정을 읽고나니..앗! 내가 너무 성급하게 포기했나? 싶다. 아무튼 그후로 버지니아는 프루스트에게서 벗어나 [댈러웨이 부인]도 쓰고 [세월]을 쓰면서 마침내 프루스트의 그늘을 벗어났다고 하는데, 그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지도 않고 포기한다는 것은 정말 무식한 행동이 되겠다.

 이 책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는 드 보통의 '프루스트 평전'같다. 아니 평전이라기보다는 서평? 비평서? 암튼. 프루스트를 알지 못하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프루스트를 쉽게 접하고, 프루스트의 인생관과 프루스트의 모든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게 해 주었으니, 나는 역시 프루스트보다는 쉽게 설명 해 준 드 보통이 더 맘에 든다.^^

 이 책은 첫째, 삶을 사랑하는 방법에서, 아홉째, 책을 치워버리는 방법까지... 프루스트를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그 어려운 문장을 프루스트의 일생과 멋지게 조화시켜 나처럼 프루스트의 책을 읽을 엄두도 못내는 사람들에게( 텔레그래프가 이야기 했듯이) '내가 읽어 본 가장 재미있는 문학 비평서' 라는 말이 틀리지 않게 해 주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나서도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싶은 맘이 안생긴다면 그건?

 드 보통이 이야기 한다. <프루스트에 대한 참된 경의란 그의 눈을 통해서 우리의 세계를 바라 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을 통해서 그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닐 것이다>라고...이제 내겐 만약에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가지고 갈 의향이 생겼다. 무인도에서 그의 눈을 통해 두고 온 우리의 세계에 대해 탐구하고 연구할 생각이... 그러니 드 보통의 이 프루스트문학 비평서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독서가의 마음을 일단 사로 잡았으므로 반은 성공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프루스트의 말처럼 <독서는 정신적 삶의 문턱 위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정신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정신적 삶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나를 정신적 삶으로 인도하고 있는 드 보통의 철학적이고 약간의 유머러스한 책들은 앞으로도 내 애장서에서 빠지지 않는 한 부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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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피아드 -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세계신화총서 2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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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이 말하듯이 페넬로페, 즉 오디세우스의 아내인 베짜는 페넬로페의 이야기다. 작가는 <시녀이야기>로 나에게 꽤나 흥미를 던져 준 마거릿 애트우드. 읽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 언젠가  시오노 나나미의 <살로메 유모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책에서도 페넬로페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 역시 알려진 신화가 아니라 시오노 나나미가 리모델링한(?) 이야기 였는데 나름 아주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난다. 페넬로피아드 역시 마거릿 애트우드가 페넬로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오디세우스를 숏다리에 교활하고, 약삭빠른 간사한 인간으로 몰았다. 급기야는 "제발 나처럼 살지 마요!"하고 외치기까지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죽어 저승에 간 페넬로페가 <나는 죽고 나서 전부 알게 되었다>라며 시작하는 이 책은  기존의 오딧세이아를 사실이 그랬다고 알고들 있겠지만 그게 아니다라며 페넬로페의 입장에서 바라본 이야기다. 그녀의 어린시절부터 오디세우스를 만나고 결혼까지 하게 된 사연하며 오디세우스가 없는 동안 구혼자들에게 시달린 자신이 어떻게 그 생활을 견뎌내었는지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얼마나 이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특히 딸처럼 아끼던 시녀들을 죽였는지 등등 우리가 알고 있던 오딧세이아가 아니다. 페넬로페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제목도 페넬로피아드.^^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야기를 아주 흥미롭게 엮어갔다. 페넬로페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중간중간에 죽은 시녀들이 나타나 노래를 부르고, 연극을 하더니 마지막엔 오디세우스를 심판까지 한다. 그 심판의 과정은 코메디처럼 웃긴다. 이 작가가 <시녀이야기>를 쓴 작가라니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재미있다. 신이 등장하고 영웅이 나타나며 여성편력 심한 남자들의 이야기가 아닌 정숙하기로 소문난 페넬로페, 신화 속에서 항상 약자였던 여자의 입장에서 그린 신화이야기. 그녀가 마침내 털어 놓는 진실을 꼭 알아보시길...오딧세이아 혹은 일리아드는 한물 갔다. 이제 21세기의 오딧세이아 혹은 페넬로피아드가 있을 뿐이다.

 이 책은 문학동네에서(스코틀랜드의 캐넌게이트 출판사가 기획) 야심차게(?) 내 놓은 세계신화총서 중에 한 권이다. 세계 각국의 대표작가들이(아쉽게도 우리나라 작가는 없다.) 기존의 내용이나 스타일을 작가의 재량에 따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우리가 여태 알고 있던 신화가 아닌 새로운 신화를 쓴 것이다. 최근에 나온 이야기는 <공포의 헬맷>과 <사자의 꿀:삼손이야기>가 있다. 아주 기대되는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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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나라 커피 문화의 역사를 보여준다. 커피가 처음 들어온 때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커피와 커피를 파는 다방이 어떻게 변천하였는지...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흥미를 가질 것이다. 읽다가 재미난 점이 있어서 올림. 요즘 스타벅스에서 혼자 커피 마시는 여자들을 된장녀라고 하며 말이 많은데(혼자일 때, 혼자서 커피마시며 책이라도 읽으면 도서관보다도 더 좋은데 왜 그걸 뭐라고 하는지...그것말고 다른 것이 뭔가가 있겠지만 그 뭔가가 뭔지는 나도 잘 모름) 그 비슷한 여자들이 이 책에도 나와 올려본다. 

 커피의 확산은 1920년대와 30년대를 풍미하던 모더니즘의 바람을 타고 이루어졌다. 커피 한 잔에 10전으로 고가였기 때문에 돈 내고 사탕물 사서 마시는 세상이 왔다고 탄식을 하는 이도 있었지만, 당시 유행의 첨단을 걷던 이른바 '모던 보이', '모던 걸'에게 커피는 사탕물 이상의 것이었다.

 이들은 주로 특별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고, 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안의 자녀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던 보이'는 주로 양복에 비싼 넥타이를 매고 중절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짚고 다녔고, '모던 걸'은 쪽지지 않은 단발머리에 금시계나 작은 양산으로 치장하고, 입술에는 붉은 립스틱을 바른 채 하얀색 구두를 신고 다녔다. 이들은 영어나, 일본어를 대화에 곧잘 섞어 사용하면서 당시 시대의 소비와 유행을 이끌었다. 이들은 커피를 기존의 전통세대와는 거리를 둔 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겨일본인이 운영하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즐겨 마시곤 하였다.     [p43] 

 1999년 친구랑 싱가폴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난 그때 <스타벅스>에 대해 잘 몰랐는데 이 친구가 이대앞에 <스타벅스>가 생겼다는데 한번도 가 보지 못했다고 싱가폴에 <스타벅스>가 있으니 한번 가보자고 했다. 뭐 그러던지...하며 찾아 간 곳은 파리의 카페처럼 길가에 테이블을 내 놓고 커피를 팔던 <스타벅스>였다. 가로수가 엄청나게 크고. 그 그늘 아래에 있던 테이블들..나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아무튼..김영하의 말처럼 <프라푸치노가 뭔지, 블렌디드가 뭔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주문에 성공한 손님들은 직원의 지시에 따라 옆으로 이동해야 하며, 그기서 자기가 주문한 것이 나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린다. 마침내 자기 커피가 나오면 감지덕지 받아 들고 빈 자리를 찾아 앉은다. 이 모든 장면에서 미국을 본다. 언제나 어리둥절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한 그 이상한 나라를...>그 이상한 나라에서 온 커피를 처음 마셔보겠다고 했으나..아무리 쳐다보아도 뭔소리인지 모르겠고..이리저리 쳐다보며 머리 굴리다가 결국 그날 우리가 겨우 주문에 성공한 것은 <오늘의 커피>였다.- -;;; 그때만 해도 엷은 아메리카노가 숭늉같이 부드럽고 좋았던 때라...엄청나게게 찐한 그 커피를 스타벅스가 뭔데..뭔 커피맛이 이러냐? 어쩌고 저쩌고 하며 반도 못 마시고 나왔었다. 어쩌면 그 곳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 맛이 없던(?) 커피도 용서가 되었었는지도 모른다..

 30년대의 소설을 보면 <커피에 인이 박혔다>라는 글을 많이 본다. 난 집에서는 그다지 커피를 즐기지는 않지만 나가면 커피를 즐겨 마신다. 직장에 다닐 때는 정말 인이라도 박힌 것처럼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정신을 못차리기도 했었다.

 요즘 갑자기 큰 통의 원두를 선물 받아 믹서로 우유와 커피를 섞어 라떼를 만들기도 하고, 프림대신 우유를 타서 마시기도 하며...커피가지고 별짓을 다한다. 그러고보면 커피는 내게도 이젠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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