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 우리 소풍 간다
백민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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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의 첫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는 95년도에 출간된 작품이다. 출간 당시 인하대학교 생활도서관에서 몇 페이지를 읽다 말았는데, 20년이 지나 금융파생상품 수업 시간의 지루함과 이 소설 중 어느 것이 견디기 힘든지 저울질 하던 중 선택되어 읽게 되었다.

소설은 끊임 없는 쉼표와 말줄임표, 개연성이 짐작 가지 않는 문단으로 뒤섞여 있고 현실과 환상, 그리고 현재와 과거가 끊임 없이 교차한다.

그 중 사실에 근거한 부분만을 이야기하자면 주인공 K는 현재 글쓰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고, 喜라는 여자와 우연히 만나 동거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 K는 과거 80년 가난한 무허가촌에서 살았던 것 같다. 텔레비전에서 미국과 일본 만화가 컬러로 방영되기 시작한 때라서 동네 친구들은 각각 만화 주인공 이름을 딴, 딱따구리, 새리, 일곱난장이, 뽀빠이, 박스바니 따위의 별명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음악을 가르치던 안선생님에게 '고아들의 노래'라는 것을 배웠다. 동네에서 불량스러워 보이거나 정권에 불만이 있었던 사람들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간다. 돌아온 그들이 새리를 윤간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태생을 저주하고 괴물로 만들었던 데 대한 복수로 새리를 택한 것이다. 새리의 아버지는 공장을 운영했고, 공원들을 소모품 취급했다. 이 사건으로 새리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 박스바니는 윤간하던 그들에게 덤벼 들다가 죽고 만다.

그들이 초등학교에 다시 모인다. 과거 동굴은 시멘트로 발라져 막혀 있었다. 막혀 있던 시멘트를 깨부수다가 학교 수위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술에 취한채 운전하던 차가 전복되어 또 몇인가 사상자를 내고, K는 재즈 선율 속에서 뭐가 뭔지 모르는 정신 상태로 퐁텐블로와 박스바니 따위에 대해 횡설수설한다.

 

80년 광주와 군부독재의 아픈 기억에서 자생적인 사회주의 세력들이 생겨났고, 소련의 몰락과 더불어 진보 진영에 대혼란이 일어난 것이 90년대 초이다. 90년대 중반에 등단한 백민석은 이러한 혼란이 낳은 작가라고 생각된다. 문체는 불안정하고(어떤 평론가는 실험이라 평하지만), 폭력의 다양한 층위들이 구분되지 못하고 남용되고 있다.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알렉스들이 코로바 밀크바에 들렀다가 닥치는 대로 강간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분위기가 소설 전반에 걸쳐 계속된다. 백민석은 폭력에 의한 상처가 어떻게 치유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다만 폭력이 남긴 상흔이 어떻게 재생되고 반복되는지 이야기할 뿐이다. 이러한 백민석의 경향은 <목화밭 엽기전>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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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 랑데부 동서 미스터리 북스 54
코넬 울릿치 지음, 김종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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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조니와 도로시는 매일 밤 8시에 만났고 12시에는 작별했다. 몇 년이나 그들은 그렇게 만났고, 6월이면 결혼할 예정이었다.

5월 31일, 여느 때처럼 조니는 도로시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갔다. 그러나 그곳엔 경찰과 군중들, 그리고 도로시의 시체가 있었다. 도로시는 여객기 승객이 무심코 창밖으로 내버린 술병에 머리를 맞아 사망한 것이다.

조니는 끈질기게 항공사를 돌며 조사한 끝에 술병이 던져진 비행기를 찾아낸다. 그 비행기 승객은 다섯 명이었고, 조니의 복수가 시작된다. 조니는 승객들이 가장 사랑한 사람을 찾아내 매년 5월 31일 살해하기 시작한다.

글레엄 개리슨 상원의원의 아내가 첫번째 희생자였다. 그녀는 매일같이 드나느는 문에 튀어나온 못에 긁혀 파상풍에 걸려 사망한다.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했지만 익명의 편지가 배달되고 수상한 기운이 감지된다. 그 편지에는 '어떤 기분인지 이제 알았겠지?'라고 적혀 있었다. 캐멜론 형사는 그녀가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증거가 너무 빈약했다.

두번째 희생자는 스트릭렌드 휴와 그의 정부였다. 한때 끈적한 관계였던 정부를 처리하려던 스트릭렌드는 정부의 집에 숨어 들었다가 그녀가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찰은 스트릭렌드 휴를 범인으로 지목하여 목메달고 만다. 스트릭렌드는 정부의 방에서 '기분이 어떤가 스트릭랜드씨?'라고 적힌 쪽지가 나왔었다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쪽지는 스트릭랜드의 아내가 감춰두고 경찰에 제출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의 뿌리 깊은 증오는 남편을 형장으로 보내고서야 사라진다.

세번째 희생자는 배키 페이지와 그의 아내 샬론 이었다. 배키가 군대에 간 사이 샬론은 수상쩍은 남자와 바람이 난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배키에게 편지로 상세히 전달된다. 분노한 배키는 탈영하여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다.

네번째 희생자는 리처드 R.드류의 딸. 약속된 시간에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것을 알아낸 경찰이 그녀가 살해당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다섯번째 희생자는 앨런 워드의 숨겨진 연인 마틴이었다. 앨런은 눈이 먼 가련한 마틴을 빼돌려 공해상으로 달아나고, 5월 31일을 무사히 넘겨 살아남았음을 자축하지만 그녀는 결국 살해당하고 만다. 공해상에서 날짜 변경선을 지나 6월 1일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복수를 모두 마친 조니는 캐멀론들이 도로시와 꼭 닮게 분장시킨 여자에게 속아 총에 맞아 사망한다. 술병을 내던진 사람은 스트릭랜드이다.

 

코넬 울리치는 <환상의 여인>으로 잘 알려진 윌리엄 아이리시의 또 다른 필명이다. 추리소설을 쓰기 전에는 조지 해플리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썼는데 그다지 신통치는 못했던 것 같다. 코넬 울리치의 <상복의 랑데부>는 쓸쓸함과 비정함이 교차하는 소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조니가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준다는 설정이 독특하다. 그들에게 있어 조니는 부조리한 운명과 같다. 그래서 순수하고 애처로운 마틴이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온갖 애를 쓰지만 결국 사망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어쩐지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비정함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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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서
이동하 지음 / 세계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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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의 산책>과 <낯선 바다>는 일상과 균형에서 벗어난 사람들 이야기이다. 일상과 일탈 사이에서 묘하게 균형을 잡으며 살아오던 남자들이 어느 순간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돌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동하는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그 이후에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는 들려주지 않는다. <지붕 위의 산책>의 남편 성문은 업무 시간 중에 바깥 출입을 한다. 아내인 '나'와 주변인물들은 성문이 바람이 났을 것이라거나, 불치병에 걸려 부쩌지를 못하는 것이라거나 따위의 추측을 한다. 어느 날 '나'는 성문의 뒤를 캐보기 위해 그가 회사에서 나온 순간부터 따라다녀보지만 그에게 일정한 목적이나 의도한 방향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낯선 바다>에 나오는 남편 기주 역시 성문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행태를 보인다. 잘 다니던 직장-형부가 사장인-을 때려치우겠다 했고, '나'와 이혼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내'가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형부의 직장엘 가보니, 남편 기주는 회사 여직원과 바람을 피운 전력이 있다. '나'는 어쩌면 기주가 정해진 틀에 갖혀 기를 펴지 못했던 자신의 생활 형태를 바꿔보려는 몸부림을 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빈 江>과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그는 화가 났던가?>는 부조리한 이야기들이다. 어느 날 낮잠에서 깨어보니 나 이외에 모든 사람들이 도시에서 사라져 버리거나(빈 江), 교수실에 노크도 없이 들어온 정체 불명의 사나이가 횡포를 부리더니 자신은 자살하기 직전 유서를 써야겠다면서도 정작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든가(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심야고속버스 운전 기사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빗길 과속을 하여 온 승객을 공포로 몰아 넣는다(그는 화가 났던가?)

 

<성가신 죽음>과 <땀>, <젖은 옷을 말리다>, <가을볕 속 잠자리떼>, <엇길>은 죽음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성가신 죽음>은 편리하고 쾌적한 아파트 단지가 죽음이라는 이별 의식을 치루어 내는 데에는 얼마나 불편한지 단상에 잠기는 주인공의 이야기인데, 아버지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철없이 자전거 타기에 골몰하는 아이의 모습이 애처롭다. <땀>은 개에게 유산을 물려주고 쓸쓸히 죽어간 노인의 이야기이고, <젖은 옷을 말리다>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부모 묘를 이장하는 이야기이다. <가을볕 속 잠자리떼>는 <성가신 죽음>과 궤를 같이한다. <엇길>은 학창시절 재기발랄했던 동기가 거지나 다름 없이 되어 동냥으로 생계를 잇다가 객사하고 마는 안타까운 이야기이다.

 

<네 개의 배역>은 남편의 군대 동기가 운전수로 들어와 한 집에 살게 되면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사장이기 때문에 형사 역만 하겠다는 아이와 도둑 역할만 하는데 싫증 난 운전수의 아들이 싸우고, 어머니들이 이 싸움에 끼어든다. 각자 치부가 드러나자 어머니는 아이들만 쥐어패며 속풀이를 하고, 잠시 후 애들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또다시 놀이에 골몰한다.

 

표제작 <문 앞에서>는 별 것 아닌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가며 잔잔한 감동을 준다. 훈장을 업으로 삼아 주말 부부를 하는 '내'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파트 문은 굳게 잠겨 있고 아내나 아이들도 쉬 돌아올 눈치가 아니다. 게다가 연로한 아버지마저 상경한 참이다. '나'와 아버지는 어떻게든 집으로 들어가보려는 노력을 그만 두고 이왕 해후한 김에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누고 내처 목욕탕에도 함께 간다. 벤치에 아버지가 까무룩 잠이 들고, '나'는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긴다. 그러나 이 생각도 어느 집 창문을 통해 흘러나온 연속극 드라마 소리에 곧 깨어지고 만다.

 

<짧은 황혼>과 <물풍선 던지기>는 세대 간의 대비를 통해 쓸쓸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늦은 나이에 연애 감정에 빠져드는 노인당 사람들의 얘기인 <짧은 황혼>은 장성한 손자가 노인을 들쳐 업고 가는 모습을 대비시켜 황혼의 쓸쓸함이 증폭되고, <물풍선 던지기>는 사람들에게 물풍선을 맞아가며 재수생인 아들 뒷바라지를 했건만 정작 재수생 아들 녀석은 공원에 놀러와 아버지에게 물풍선을 던진다는 내용이다.

 

이동하 소설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 단지는 과천의 주공아파트 단지 같다. 그곳의 거리에 벌여진 시장의 모습을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는데 소설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말줄임표와 같은 느낌을 준다. 일면 카프카식의 부조리소설이 아닌가 싶어지는 소설들도 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작가가 우리에게 대답을 유보하거나, 대답을 우리에게 맡겨두는 성질의 것인지라 동일하다고 보긴 어렵다. 어휘가 적확하게 선택되어 있고, 소설의 기본에 충실한 작품들이다. 제1회 오영수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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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딱 한 개만 더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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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발표된 가가 형사 시리즈로 다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여러 명의 용의자 중 누가 진범인지 밝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어떤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가를 가가 형사가 밝혀내는 내용이다.

<거짓말, 딱 한개만 더>는 <잠자는 숲>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이다. 자살한 것처럼 보이는 전직 발레리나가 사실은 살해당했고, 그 범인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또 다른 전직 발레리나라는 내용이다. 살해 동기는 일반인으로서는 언뜻 납득하기 어렵다. 발레 공연에서 자신이 해내기 어려운 부분을 삭제한 것이 들키자 돈을 주고 무마한 후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살인을 하기 때문이다. 한 분야에서 최고에 올라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긍심의 영역이 얼마만큼 상처 입기 쉬운지 소설은 이야기하고 있다.

<차가운 작열>은 빠찡꼬에 빠진 주부가 한여름에 어린 아이를 차안에 방치했다가 사망에 이른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씌인 작품이다. 주부는 아이가 죽은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강도가 든 것처럼 꾸민 후 차단기를 내린다. 정전이 되어 아이가 에어컨을 쐬지 못해 탈수로 죽었다고 꾸민 것인데, 이를 눈치챈 남편이 아내를 목졸라 죽인다.

<제2지망>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딸을 통해 이루려는 일그러진 어머니의 모습이 비극을 불러오는 내용이다. 이혼 후 새로 사귄 남자에 대해 딸이 적개심을 품고 살해한다는 엽기적인 내용이다.

<어그러진 계산>은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잘 보여준다. 아내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가부장적인 남편을 아내와 그녀의 정부가 살해하려 한다. 그러나 도리어 정부가 살해당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남편 마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남편이 정부를 살해한 후 보여준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사랑하면서도 구속하며 괴롭히는 알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친구의 조언>은 냉혹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가 형사의 친구가 어느 날 졸음 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당한다. 가가는 친구의 교통사고에 뭔가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고 생각하여 조사에 착수한다. 친구의 아내는 동성애인에게 빠져 남편을 살해하기 위해 드링크에 수면제를 탔었다. 그녀가 한 행동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었지 않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가가는 단지 죽어주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그녀는 행동한 것이라고 말한다. 친구가 아내에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암시를 주자 아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간다. 눈치챘다면 어쩔 수 없지 라는 식의 태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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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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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키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은 1844년 11월에 초고가 완성된 후 다음 해 5월까지 수정되었고, 탈고된 원고가 1846년 1월 <뻬쩨르부르그 선집>에 소개되었다. 그리고로비치, 네끄라소프, 벨린스끼 등은 새로운 고골이 출현했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하급 관리 마까르 제부쉬낀과 병이 든 고아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가 주고 받은 편지와 바르바라의 짤막한 수기로 구성되어 있다.

마까르 제부쉬낀의 가난함은 고골의 <외투>에 나오는 아까끼 아까끼에비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꼴을 갖춘 옷은 모두 저당 잡힌 탓에 단추가 모두 떨어져 나간 옷을 입었고, 구두는 발이 삐져나올 지경이다. 변변한 방에 세를 들 수가 없어 부엌에 칸막이 한 방에서 악취를 맡으며 살아간다. 월급은 벌써 몇달치를 가불해 썼고, 하숙비가 밀려 주인집 여자는 음식조차 주지 않는다. 그에게 유일한 낙이라면 먼 친척인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와 주고 받는 편지다. 

바르바라는 어릴 적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병이 들어 가세가 몰락하자 먼 친척인 안나 표도로브나의 신세를 지게 된다. 당시 그 집에는 폐병에 걸린 뽀끄로프스끼라는 대학생이 있었는데 바르바라는 그의 이지적인 면에 끌려 첫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뽀끄로프스끼가 지병으로 죽고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안나 표도로브나는 뚜쟁이처럼 바르바라를 부잣집에 시집 보내 한 밑천 잡을 궁리를 한다. 견디다 못한 바르바라는 하녀 표도라와 함께 그 집을 나와 하숙을 하며 곤궁한 생활을 하게 된다.

마까르 제부쉬낀은 가불을 하고 돈을 빌려 바르바라에게 보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파탄을 맞게 된다. 바르바라도 바느질감을 맡아 약간의 돈을 벌어들여 마까르 제부쉬낀에게 보내지만 그녀의 건강이 악화되어 이마저도 불가능하게 된다. 둘 사이에 돈 이야기 외에 문학적인 의견 교류도 약간은 있었지만 마까르 제부쉬낀의 낮은 지적 수준으로 인해 원만히 진행되지는 못한다. 마까르 제부쉬낀은 고골의 <외투>가 권선징악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푸쉬킨의 작품에 대해서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반면 이웃의 삼류 작가 라따자예프는 훌륭한 소설가라고 생각했다.

미뤄 오던 파국이 눈 앞으로 다가왔을 즈음, 바르바라의 집에 비꼬프라는 부유한 지주가 찾아온다. 그는 바르바라가 겪고 있는 고통은 모두 돈으로 해결될 수 있고, 자신은 유산을 물려줄 아내가 필요하니 가부를 속히 알려달라고 한다. 만약 늦게 알려준다면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겠다면서.

얼마 후 바르바라는 제부쉬낀에게 자신이 비꼬프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했고, 이로써 얼마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는 편지를 보낸다. 제부쉬낀에게 몇 차례 편지가 더 온다. 모두 결혼식 준비에 필요한 물품 준비를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는 제부쉬낀이 그동안 보낸 편지를 모두 살던 집에 놓아 두고 떠날 것이며,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 씌여 있었다.

제부쉬낀은 바르바라에게 자신이 점점 더 나아지고 있었다는 말과, 그녀가 여행하기엔 날씨가 너무 험하다는 말과, 그 밖의 이치에 닿지 않는 말들을 횡설수설하는 편지를 쓴다. 그의 마지막 편지가 바르바라에게 전달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도스또예프스키에 관해서는 '악마적'이라는 수식이 많이 붙는다. 막심 고리키는 그가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라고 했고, 토마스 만은 도스또예프스끼가 '불행과 악덕, 욕적과 범죄에 기독교적인 공감을 보인 작가'라고 했다. 꼰스딴찐 모출스끼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인간 지옥의 모든 계(界)를 통과하는데 이 지옥은 <신곡>의 중세적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에서도 이러한 악마적 상황은 변함 없이 엿보인다. 얼핏 보면 이 소설은 가난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로 읽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끔찍한 지옥이 어른거린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편지에 쓰고 있지만 둘 사이에 편지를 주고 받는 행위 외에 이렇다 할 진전은 전혀 없다. 기껏해야 푼돈을 주고 받는 상호 부조 행위가 전부이고, 육체적인 관계도 없고, 미래에 대한 약속도 없다. 

제부쉬낀은 자신이 바르바라를 사랑하는 것이 '부성애'라고 애써 선을 긋고 있다. 자신의 욕망이 실현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부쉬낀의 욕망은 언제나 '이성에 대한 사랑'을 가르키고 있다. 파국을 늦추기 위한 제부쉬낀의 안간힘은 눈물 겹다. 월급을 몇달치나 가불하고, 상여금이 나오면 꽃과 사탕을 보내며, 사채업자를 찾아다닌다. 더 이상 파국을 늦출 수 없는 그 순간, 바르바라는 주저 없이 비꼬프에게 떠난다. 그녀는 편지에 슬픔에 관해 쓰고 있지만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난다는 흥분 역시 감출 수가 없다. 

기형적인 둘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난다. 제부쉬낀은 바르바라를 통해 자신의 비천한 삶이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같이 아름답고, 문학적인 소양을 갖춘 젊은 여성과 자신이 '가난'이라는 공통분모를 영유하며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서 환각을 맛 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 환각이 깨어지는 순간 제부쉬낀의 지옥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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