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 6일전 동서 미스터리 북스 97
조너슨 라티머 지음, 문영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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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주식중개인 웨스틀랜드의 처형이 6일 앞으로 다가온다. 옆 감방의 사형수가 극심한 공포를 이기지 못해 자살을 시도하자 웨스틀랜드 역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MG라는 익명의 사나이가 보낸 편지를 만지작 거린다. 편지에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내용이 씌여 있었다. 

웨스틀랜드는 교도소장에게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해달라며 1만달러를 건낸다. 그리고 웨스틀랜드를 도와줄 사람들이 모여든다. 사립탐정 크레인과 조수 윌리엄즈, 최고의 변호사 크레인, 공동경영자 볼스턴과 우드베리, 지배인 수프레이그, 아파트 고용인 사이먼즈, 그리고 웨스틀랜드의 약혼자 에밀리 루 마틴과 전 비서인 블렌티노까지. 그들이 할 일은 6일 내에 진범을 잡는 것이다. 


웨스틀랜드의 이혼한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판결을 받았다. 

웨스틀랜드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사건이 일어난 날 밤 약혼녀 에밀리 루의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에밀리 루는 웨스틀랜드의 전 부인이 자신에게 심한 말을 했다고 전했고, 화가 난 웨스틀랜드는 전 부인을 찾아가 다투다 헤어지기 직전 화해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 날 그녀는 시체로 발견되고 웨스틀랜드가 가지고 있던 권총과 동일한 기종에서 발사된 총알이 현장에서 발견된다. 경찰은 즉시 웨스틀랜드를 체포하는데 모든 상황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먼저 범행에 사용된 권총의 행방이 묘연했고, 아파트 문이 닫혀 있었는데 특수하게 제작된 열쇠였기 때문에 그의 전 아내와 웨스틀랜드만이 열쇠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이웃이 웨스틀랜드가 아내의 집에 있었다고 경찰에 말한 시각에 총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한 것이다. 게다가 에밀리 루는 그날 밤 전화한 일이 없다고 한다. 


제일 먼저 해결된 것은 이웃의 증언이었다. 서머타임이 시작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이웃이 시각을 착각한 것이었다. 

MG라는 사내를 찾아가 증언을 받으면 혐의가 풀릴 것이라 생각한 일행은 그를 만나러 가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암살자들이 들이닥쳐 그에게 총을 난사하고 사라진다. 웨스틀랜드를 도우려 모인 사람들 중 누군가가 범인일 가능성이 있는 대목이었다. 

사건에 한 발 다가섰던 수프레이그마저 뺑소니차에 치여 숨지자 크레인은 사건이 일어난 날 밤 걸려온 에밀리 루의 전화를 조사한다. 그리고 누군가 에밀리 루의 전화에 프락치선을 연결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해미트에서 챈들러로 이어지는 시기에 가교 역할을 한 조너슨 라티머는 하드보일드와 수수께끼 풀이를 적절히 배합한 비중 있는 작가이다. 발표한 작품이 많지는 않은데 <처형 6일전(Headed for a Hearse,1935)>, <모르그의 여자(The Lady in the Morgue,1936)>, <죄인과 수의(Sinners and Shrouds,1955)>, <검정은 죽음의 의상(Black is the Fashion for Dying, 1959)> 이 있다. 


<처형 6일점>의 결말은 씁쓸하다. 에밀리 루의 전화는 실제로 걸려왔었다. 그녀는 동업자 볼스턴과 이미 결혼한 사이였다. 볼스턴은 위조 채권으로 장난질을 쳐 웨스틀랜드를 속이고 있었는데 전 부인에게 이 사실을 눈치채이자 그녀를 죽이고 아울러 웨스틀랜드도 제거하기 위해 일을 꾸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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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자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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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시청 수사 1과에서 근무하던 중 살인 사건의 재판에서 변호인 측 증인으로 법정에 서는 바람에 관할 지역 니혼바시로 쫓겨난 가가 교이치로. 스스로를 니혼바시의 신참자라 생각하며 에도 시대의 정취가 남아 있는 이 지역을 익히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고덴마초에서 40대 여성이 교살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가가는 경시청 형사들을 보조하는 역할로 수사에 참여한다. 


가가 시리즈 중 <거짓말 딱 한개만 더> 가 유력한 용의자의 거짓말을 파해쳐 진범을 밝혀내는 내용이라면, 이번 <신참자>는 왜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내는 이야기이다. 8개의 에피소드에 각각 거짓말하는 참고인들을 배치시키고 가가 형사가 그들이 거짓말하는 이유를 밝혀내어 사건의 군더더기를 제거한 후 마지막 9번째 장에서 범인을 밝혀내는 특이한 구성의 이번 작품은 2010년 4월부터 6월까지 일본 TBS TV에서 아베 히로시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드라마로도 방영되었으며 극장판 심참자 <기린의 날개>로도 제작되었다.


가가 시리즈를 계속 읽어온 독자라면 이번 작품에서 가가 형사의 이미지가 전작들과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을 것이다.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파헤치는 냉철한 관찰자 이미지를 고수해오던 가가 형사가 이번 작품에서는 주변인들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고객의 병명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하는 보험관리사나 사장이 바람 피운 사실을 들키지 않게 하려는 요릿집 수련생, 시어머니와 화해하고 싶은 며느리나 절연한 딸의 행복을 바라는 시계포 주인 등 소설에는 타인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지만 아직은 서툰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서툰 부분을 가가 형사가 따뜻하게 감싸안는 내용들이 나온다. 


전 말이죠. 이 일을 하면서 늘 생각하는 게 있어요. 사람을 죽이는 몹쓸 짓을 한 이상 범인을 잡는 건 당연하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철저히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걸 밝혀내지 못하면 또 어디선가 똑같은 잘못이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죠.


냉철한 이미지를 벗고 '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한 가가 교이치로. 시리즈의 주인공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독자 입장에서는 꽤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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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의 회고록 환상문학전집 24
도리스 레싱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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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문명이 파괴된 영국의 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화자' 는 우연히 자신의 집 벽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벽 너머에는 방들이 있었고,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열 두살 난 에밀리라는 소녀를 화자에게 맡기고 떠난다. 소녀는 휴고라는, 개의 몸에 고양이의 얼굴을 한 동물과 함께였다. 에밀리는 한동안은 휴고와 집 안에서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며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쪽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그곳에는 폐허가 된 도시를 떠나 이주하는 사람들이 잠시 머물기도 했고, 무리를 지어 생존하려는 그룹들도 있었다. 

처음에 에밀리는 인도에 머무는 사람들이 휴고를 그저 먹잇감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룹에 전적으로 속하지 못하고 집과 인도를 오갔지만 점차 그룹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상주의자인 그룹의 리더 제럴드의 여자가 되기 위해 애를 쓴다. 그와 육체적 관계를 맺으면서 에밀리는 소녀에서 성숙한 여성으로 변모해간다. 문제는 제럴드가 에밀리만이 아니라 그룹의 모든 여자아이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는데 있었다. 그중에는 에밀리를 각별히 따르는 준이라는 소녀도 있었다. 

준은 에밀리를 좋아하면서도 제럴드의 여자가 되고 싶어했다. 준은 경박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화자'의 물건을 훔치기도 한다. 후에 준은 몸이 아파 화자의 집에서 에밀리의 간호를 받게 되는데 그 시기에 에밀리와 준은 동성애적 체험을 하게 된다. 준은 그 일이 있은 후에 도시를 떠난다.

화자는 그 사이에도 벽 너머의 방에서 에밀리의 어린 시절을 보게 된다. 에밀리는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정서적 억압을 받으며 자란듯 보였고, 욕망을 건강하게 표출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것 같았다.

제럴드가 문명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 그룹들을 교화시켜보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그룹은 흩어지고 만다. 제럴드와 에밀리가 어린 아이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돌아온 날, 화자는 벽을 열게 되고 그들은 벽 너머의 세계로 이주한다. 


작품 자체도 난해한데, 번역도 한 몫 거든다. 이런 저런 해설들을 읽어 봤지만 역시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해설에 의하면 이렇다. 세상의 종말이라는 인위적인 상황 하에 벽 이쪽은 현실이자 종말, 벽 너머는 새로운 세상이다. 따라서 화자가 벽 너머의 방들을 치우는 것은 영구적인 거주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정신적으로 준비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여 벽 너머로 넘어간 화자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the One)를 느끼는데(이선주 번역에서는 '한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다) 주인공의 완성된 자기를 나타내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사실 화자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몇 살인지는 전혀 나와있지 않다.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겠으나, '초월적 존재'나 '영구적 이주' 측면의 해설 보다는 에밀리의 성장 과정과 가족의 구성에 관한 작가의 시각에 좀 더 관심이 쏠렸다. 사실 에밀리의 성장 과정과 가족의 구성에 관한 작가의 관점에 그다지 공감은 가지 않았다. 에밀리가 소녀에서 여성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제럴드라는 이상적인 그룹 리더와의 육체 관계가 중요한 기점인데 난교(제럴드의 관점에서 봤을 때)와 동성애를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있다. 본능적 혐오를 갖고 있진 않지만 도리스 레싱이 왜 에밀리의 성장 과정에 이런 과정을 배치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한 문명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을 교화시키는데 실패한 직후 이들은 벽 너머로 이주해가는 대목도 뭔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물론 해설이 맞다는 가정 하에서지만, 도리스 레싱이 이상적인 새로운 질서로 그리고 있는 것은 좀 진부하지 않은가? 벽 이쪽에서 그룹의 여러 여자와 자던 제럴드가 피치 못할 사유로 이제 벽 너머에서는 에밀리와의 일부일처제를 강제당할 것이고, 문명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야만)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벽 너머로 건너가는 것은 뭔가 도피를 연상시킨다. 데이빗 글래드웰 감독으로 1981년도에 영화로도 발표되었는데 어떻게 연출되었는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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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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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포 주인 기리하라 요스케가 버려진 건물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격투의 흔적이 없고 정면에서 예리한 칼에 찔린 점, 100만엔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근거해 경찰은 돈을 노린 면식범의 소행이라 생각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전당포 점원 마츠우라였다. 그는 기리하라 요스케의 아내 야에코와 불륜 관계가 의심되었다. 하지만 범행 시점에 마츠우라가 예고에 없었던 한 통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 확인되어 마츠우라의 알리바이가 입증되자 경찰은 후미요라는 여자에 주목한다.

후미요는 마츠우라 전당포에 이런 저런 물건들을 저당 잡히고 근근히 살아 가는 여자였는데 기리하라 요스케가 그녀의 집에 종종 들렀다는 소문이 있었다. 경찰은 후미요의 곤란한 처지를 알게 된 기리하라 요스케가 그녀에게 일정한 경제적 도움을 주는 대신 욕망을 채웠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알리바이가 입증된다. 

그 즈음 수면으로 떠오른 것이 데라사키였다. 후미요가 일하는 국수집에 노상 드나드는 데라사키를 집요하게 추궁한 결과 후미요를 좋아한다는 진술을 확보한 경찰은 그가 질투심 때문에 기리하라 요스케를 죽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데라사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그의 소지품에서 기리하라 요스케가 분실한 것과 동일한 라이터가 발견된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죽어버려 낙심하고 있던 경찰은 후미요마저 가스 중독으로 사망해버리자 사건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담당 형사 사사가키만이 씁씁할 뒷맛을 내내 곱씹을 뿐이었다. 


당시 후미요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유키호였다. 유키호는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쪽 사촌 집에 입양된다. 꽃꽂이와 다도를 가르치는 양어머니 밑에서 유키호는 비교적 부족한 것 없이 자란다. 한편 기리하라 요스케에게도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류지였다. 류지는 조용하면서도 음울한 성격의 아이였다. 소설은 두 아이가 서른이 될 때까지의 이야기로 6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사회를 '범죄'를 화두로 그려내고 있다. 류지가 벌인 범죄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저작권 문제, 비대면채널 금융서비스의 취약점, 내부정보를 이용한 증권 거래, 해킹 등 '지능 범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류지와 아키호의 지능 범죄와 기리하라 요스케 사망 사건의 진상은 사사가키의 끈질긴 수사로 결국 밝혀진다. 하지만 왜 두 아이가 소설의 제목처럼 '하얀 밤을 끝없이 걸을 수' 밖에 없었는지도 밝혀지면서 소설은 쓸쓸하게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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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류지는 계좌번호와 암호를 현금카드에 자석가루를 뿌리는 단순한 방법 만으로 알아낸다. 현금카드 시스템 자체가 허술했고, 이를 포착한 류지가 부정출금 범죄를 벌인 것이다. 최근 농협에서 폰뱅킹 부정 출금 사례가 있었지만 농협에서는 부정 출금되었다는 것을 고객보고 입증하라고 했다. 입증할 수 있을리가 없다. 

비슷한 사례로 급발진 문제가 있다. LPG 차량 구입 때문에 급발진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알아봤는데, 그야말로 '요령부득' 이라는 생각이다. 급발진은 차량이 출발, 혹은 주행 중 갑자기 연료 공급 쓰로틀 벨브가 최대로 열리면서 급가속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브레이크등이 들어온 CCTV 자료도 많지만 제동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단 급발진 현상이 일어나면 운전자가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어 보인다. 기껏 대처법이라고 나온 자료들도 기어를 중립으로 넣는다거나 브레이크를 한번만 꾹 밟아야 한다든가 하는, 언제든 급발진이 일어날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운전하다가 마침내 급발진이 일어나면 초인적인 순발력을 발휘하라는 공허한 얘기에 불과하다. 미국에서는 ECU의 납땜 불량이나 전원공급 불량으로 소결을 낸 모양이나 우리나라에서는 급발진이 인정된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다. 제조사에서는 운전자가 브레이크페달과 엑셀러레이터 페달을 혼동했다거나, 두 페달을 동시에 밟았다는 따위의 말로 얼버무릴 뿐이다. 

아직도 우리는'입증 책임'이 권력의 크기와 무관하게 피해자에게 일방적으로 전가되는 부당한 사회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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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 후마니타스의 문학
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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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쾨슬러는 1905년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 유대계 부모 아래 태어나 1931년 독일 공산당에 참가해 활동하다가 1938년 환멸 속에 탈퇴한다. 그리고 1940년 <한낮의 어둠>을 발표했다.

<한낮의 어둠>을 통해 아서 쾨슬러가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이었을까? 소설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통찰력 있는 해석서이자, 스탈린이 표방한 일국사회주의론의 허구를 예리하게 파해친 고발서이다. 


혁명 전에 러시아에서는 이론적·실천적 선결 조건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곧바로 가능하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기존의 정설은 봉건제사회에서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고, 그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갈등이 촉발되어 마침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발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러시아는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된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부르주아 혁명을 거치지 않은 상태였다. 

혁명을 단계적으로 수행해야 하는가(단계적 혁명론), 아니면 부르주아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가(영구혁명론) 하는 논쟁은 곧 영구혁명론 쪽으로 기울었다. 단계적 혁명론을 지지했던 레닌이 영구혁명론을 주장했던 트로츠키의 의견으로 선회하면서 1917년 혁명은 세계 최초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되었고 소비에트 사회가 건설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첫번째 문제는 영구혁명의 전제 조건인 '혁명의 수출' 문제였다. 영구혁명을 주장한 트로츠키는 전세계 경제가 결합 발전하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그런 이유로 러시아의 수호를 위해서는 주변국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보았다. 

두번째 문제는 극히 소수였던 볼셰비키의 지도력 문제였다. 볼셰비키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소수파' 였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라는 이상적인 개념 만으로는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통치력을 갖기 어려웠다.


이 문제를 단칼에 해결한 것이 바로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레닌이 병으로 쓰러지자 후계자를 자처한 후 두 문제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해결해버린다.(레닌은 유서에서 스탈린이 후계자가 되는 것에 대해 경계하였고 오히려 트로츠키의 재능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탈린은 국제적이고 영구적인 사회주의는 환상에 불과하다며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하고, 1929년에는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 때문에 전세계 인민의 해방을 표방한 러시아에 파시즘 국가 독일의 전쟁 수행 물자를 실은 배가 경유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다음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환상에 불과하다며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일당 독재는 '당은 무오류'라는 원칙 하에 집행 되었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가 된다.


<한낮의 어둠>은 이러한 러시아 혁명의 변질 과정에서 한 고참 혁명가가 투옥된 후 끝내 스탈린식 사회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내면화한 후 비참하게 처형당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 루바쇼프는 어느 날 투옥되는데, 그 자신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는 투옥 중 러시아 혁명의 변질에 대해 문제제기 했던 리하르트나 리틀 뢰비, 알로바 등을 지켜주기는 커녕 사망케 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 후 루바쇼프는 함께 혁명에 투신했던 1세대 혁명가 이바노프에게 심문 당한다. 그런데 이바노프가 하는 말은 루바쇼프 자신이 희생당했던 사람들에게 취했던 태도를 설명해주는 것 같다. 이바노프는 말한다. 


......학살 행위를 없애기 위해 학살자가 되고, 양을 도살하지 않기 위해 그 양을 희생시키고, 인민을 매로 채찍질함으로써 그들이 채찍질당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그래서 신중함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신중함을 빼앗고,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류를 감히 증오하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사랑이네......


이바노프의 이 발언은 곧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상적 형태로 나아가지 못하고 '외부로부터의 주입' 개념에 골몰한 볼셰비키의 이야기이며, 인류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을 깨달은 당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자만심의 고백이다. 


그러나 이바노프는 루바쇼프 심문에서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글레트킨에게 고발당하고 곧 처형당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는 글레트킨이 2차 심문을 시작한다.


루바쇼프는 이바노프와 글레트킨의 논리를 내면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문법적 허구'를 버리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투신하기로 마음 먹는다. 거짓 자백서에 사인을 하면서 루바쇼프는 자신이 당을 위한 희생, 역사를 위한 희생을 했다고 생각한다.


<한낮의 어둠>은 12주간의 교육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읽었던 책이다. 천안 교육원 숙소에서 책을 읽다 밖으로 나가 보면 가로등에 눈발이 날리는 날이 많았었다. 12주라는 긴 시간이 끝나갈 즈음, 교육을 함께 받던 68명의 교육생들은 저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면서 여기 저기 모여 술판을 벌이거나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거나 했다. 그 이면에는 불안감이 있었다. 교육이 끝난 후 어디에서 일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도 불안했겠지만, '언젠가는 다른 곳으로 가게 될 사람' 취급을 받으며 유예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도 불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새해가 밝았다. 올해 어떤 책들을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읽고, 생각하고,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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