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 2003년 제48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조경란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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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당장은 읽지 않더라도,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사서 모아두는 것은 마음 든든한 일이다. 해당 년도의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면, 그 해로 여행을 떠날 수가 있다. 이번에 여행을 떠난 해는 2002년이다. 제목은 <2003년도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이지만, 작품이 발표된 해는 2002년이다. 


조경란의 <좁은문>은 전당포 주인, 그리고 까페의 높은 천장에서 그네를 타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자가 들고 오는 것들은 가짜 금반지 따위이다.  여러가지 질감이 소설 속에 흩뿌려져 있고, 안개처럼 뿌옇고 답답한 느낌은 계속된다. 그제서야 작가의 <식빵 굽는 시간>의 자의식 충만함도 거북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봉천동에 산다>는 좀 더 사실적이다. 하성란의 <웨하스로 만든 집>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동네'라는 곳이 해체된 뒤 우리 모두는 유목민들처럼 살고 있다.

박정규의 <타블로 비방 혹은 비너스의 내부-작품번호1>는 제목만 읽고 타블로의 학력 위조 의혹을 떠올렸는데, 전혀 관계 없는 소설이었다. 타블로 비방(Tableux Vivants)은 '살아 있는 그림' 의 의미쯤 되는 모양이다. 제목에 대한 주석이 달려 있는 소설은 또 처음이다. 내용은 아내가 쓴 소설을 읽고 아내와 옆 집 남자의 불륜을 의심하는 이야기다. 물론 소설은 소설일 뿐이었다. '현실'과 '모사된 현실' 사이의 긴장에 대한 소설.

이나미의 <봉인>은 작가가 졸업한 모스크바의 고리끼 문학대학을 배경으로 한 듯한 소설이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 지느라 모든 것을 희생한 주 선생이 50줄이 넘어서 러시아로 유학을 온다. 가족들의 반대를 설득하지 못해 의절까지 한 주 선생은 최소한의 생활비만으로 처절하게 공부에 몰두한다. 하지만 그는 기숙사 뒤편 호수에서 익사하고 만다. 화자는 자신의 이웃, 우체국을 명퇴하고 이혼당한 뒤 홀로 쓸쓸하게 죽어간,의 죽음에서 주 선생을 떠올린다. 소설 쓰기 좋도록 두 개의 죽음이 공교롭게 교차한다. 작위적이다.

오수연의 <마니아>는 정신병에 걸린 아파트 주민 때문에 모두의 삶이 피폐해져 가는 과정을 세밀한 필치로 묘사한다. 읽다보면 자연스레 감정 이입이 되어 정신병에 걸린 여자에 대한 증오를 품을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소설 제목이 왜 <마니아> 일까?

윤성희의 <누군가 문을 두드리다>의 주인공은 하루키 소설에서 빌려온 듯, 심상하다. 원래는 시청 공원녹지과에서 근무했고, 수종 선택에 센스를 발휘한 덕에 인정도 받지만, 곧 웃사람들 집에 심을 나무를 부풀린 것이 들통 나 짤린다. 대신 그 웃사람들은 주인공에게 공원 한켠에서 자전거 대여점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심상한 주인공은 동생들이 남기는 물건을 중고품으로 파는데, 사연이 있어야 물건을 산다고 한다. 그 외에 사건들도 그저 이미지로 남을 뿐,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아류작 같다.

정미경의 <나릿빛 사진의 추억>은 꽤나 흥미롭다. 어느 날 사진을 현상하니 옛 여자친구의 나체가 찍혀 있다. 별 생각 없이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재미있는 사진을 현상했는데 돌려주랴 물었더니, 찢어서 없애달라 한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사진과 필름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없애버린 것을 어찌 돌려주냐 하니, 이번엔 조폭들이 찾아온다. 여자친구가 결혼하기로 한 새 남자친구가 전화 내용을 들은 뒤 사진 회수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그가 정말로 사진을 회수하는 것이 목적인지, 아니면 자신의 힘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인지는 뻔하다. 이제 다시 옛 여자친구를 불러다 새로 사진을 찍어서라도 돌려줄 수밖에 없다.

정영문의 <파괴적인 충동>은 최수철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아버지는 죽을 병에 걸렸고, 화자는 쥐를 테니스 채로 내려쳐 죽인 뒤 여자친구와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에서 불량한 애들에게 걸려 돈을 뜯긴 뒤, 여자친구만 먼저 돌려보낸다. 되돌아온 주인공은 치과 병원에 들린 뒤, 그 좋았던 기분으로 아버지의 병실에 들러 생명연장 장치 제거에 동의한다. 그 뒤 다시 테니스코트에 간 주인공은 파괴적인 충동을 느낀다. 예전엔 이런 소설을 읽으면 각각이 의미하는 바를 억지로라도 짜맞춰 말이 되도록 하는데 시간을 할애했는데, 이제 그런 짓이 피곤하다.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은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 이야기 한 '정욕'이 거세된 사랑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이다. 전쟁 직 후 좋아 지낸 남자에게 적극적으로 연애를 걸어보지도 않고 그저 안정된 삶을 택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젊은이답게 앞뒤 없이 몰두해보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윤후명의 <별의 향기 - 우리들의 전설 3>은 연작소설의 일부 같은데, 어느 날 화자가 단골 술집에 들렀다가 술주정을 부리는 바람에 술집에 갖히게 되는 내용이다. 술집 이름은 '소행성' 이었고, 화자의 앞에는 '쌍절곤'과 소설 책 <분노의 강> 이 놓여 있다. 윤후명의 소설은 나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 작위적이, 깊이 있는 척 하지만 철학이 부족해 보인다.

김영하의 <이사>는 김영하 다운 소설이다. 폭력적이고 몰상식한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이삿짐을 개판으로 날라다 주고 가야시대 토기도 깨뜨려 버린다. 마치 스티븐 킹의 공포소설을 한 편 읽은 느낌이 든다.


졸다 깨다 하면서 비행기에서 읽었다. 마음에 남는 작품이 별로 없다. 정미경의 소설은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장밋빛 인생>이 읽히지 않은 채로 책꽂이에 꽂혀 있다. 오수연도 나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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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군도 열린책들 세계문학 18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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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많은 생물이 우주에 살고 있지만, 이 우주에는 생물의 수효만큼의 중심이 있다. 우리 모두도 각자가 우주의 중심이다.


솔제니찐의 기록문학 <수용소군도>의 첫 페이지에는 이와 같이 인간 존엄에 대한 선언이 씌여 있다. 그러나, 바로 뒤 이어 솔제니찐은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체포되었소!> 라고 속삭이는 음성을 들었을 때, 당신의 그 우주는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솔제니찐은 종전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에 장교로 복무 중 체포된다. 친구와 주고 받은 편지에 스탈린을 비난한 문구가 씌여 있었고, 이것이 편지 검열에서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재판도 없이 8년형을 언도받은 솔제니찐은 형기보다 긴 11년간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스탈린 격하 운동이 시작되자 1956년에 풀려난다. 1962년에 발표한 <이반 제니소비치의 하루>와 뒤 이어 발표한 <암병동>으로 197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데, 냉전시대에 소련의 실상을 고발한 점이 상당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소련은 이에1974년 2월 솔제니찐을 독일로 추방하고, 2년 뒤 솔제니찐은 미국으로 망명한다. 소련이 붕괴된 뒤인 1994년에야 그는 고국으로 돌아간다.

<수용소군도>는 1960년대 중반부터 씌여진 기록문학인데, 지인에게 맡겨 두었던 원고가 당국에 발각되는 등 여러가지 험난한 과정을 거쳐 1973년 1~2부가 파리에서 출판된다. 3~4부는 1974년에, 5~7부가 1976년에 발표된다.

체포, 숙청의 흐름, 신문, 푸른 제모, 첫감방·첫사랑, 그해 봄, 기관실에서, 로 이어지는 각 장에는 227명의 수감자들이 겪었던 일들이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난 주 화요일과 수요일은 뉴요커 윈드햄 호텔에서, 목요일은 파이브 타운스 인에서 묵었는데, 잠들기 전 두 시간씩 이 책을 읽었다. <수용소군도>를 읽다 보니 아주 오래 전에, 집에 굴러다니던 책이 하나 생각났다. 지금도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는데, 어렸을 적에 <아이템플> 이라는 학습지가 있었다. 그 학습지를 사면 <공부 잘하는 법>이나 <유머 모음집> 따위의 책들을 부록으로 끼워 주었는데, 그 부록 중에 소련의 참상을 코메디처럼 엮어 놓은 책이 있었다. 내용은 이런 식이다.


한 사내가 친구와 보드카를 마시다 술 취한 김에 스탈린 욕을 했다. 친구도 맞장구를 쳤다. 그 다음날 사내는 체포된다. 친구가 고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뒤 친구도 잡혀 들어온다. 술집을 나와 바로 고발하러 오지 않고 날이 밝은 뒤 고발하러 왔다는 것은 일말의 동요가 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용소군도>는 이런 이야기들이 잔뜩 씌여 있다. 유머와 위트도 있고, 사실적인 묘사도 발군이다. 하지만 솔제니찐의 정치 의식은 그다지 정교하지 못하다. 레닌과 스탈린, 트로츠키, 후르시초프 등이 모두 소련이라는 하나의 범주에 묶여 절대악으로 취급되고, 그러다 보니 때로 짜르 체제에 대한 향수(또는 찬양)와 백색테러에 대한 미화, 서방세계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 때문에 <수용소군도>는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사회가 사회주의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중요한 증거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소련 역시 국가가 자본가계급을 대신한 사회는 아니었는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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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라 수선화 - 창비소설집
공선옥 지음 / 창비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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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목마른 계절(1993. 창작과 비평 여름호)


남편과 이혼하고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애 둘을 키우는 '나'는 소설을 써서 먹고 산다. 하지만 벌이는 신통치 않다. 이웃에 사는 유정이 엄마 현순씨는 까페를 운영하느라 바쁘다. 그래서 '내' 아이들 또래인 유정이를 종종 맡아주었고, 그 인연으로 친해진다.

대선이 끝난 광주는 우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현순씨네 가게도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여름은 뜨거웠고, 물이 부족해 제한급수가 시작되었다.

어느 날 현순씨네 가게에서 여급으로 일하는 절름발이 '미스 조'의 애인이 자살한다. 애인은 5월항쟁에서 살아남은 시민군이었다. 얼마 뒤 '미스 조'도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다.

아파트 뒷편은 항상 덤프트럭으로 시끄러웠다. 찻소리가 시끄러우니 아이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목소리가 커지니 텔레비전 볼륨도 올라갔다. 소음은, 소음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단순한 소리들을 제 주변으로 끌어당겨 이내 소음화시켜버렸다. 현순씨는 역사가 귀신이라고 했다. 마치 소음처럼, 상관 없는 사람들까지 끌고 가버린다 했다. 그래서 역사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고 했다. 5월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o 불탄 자리에 무엇이 돋는가(1994. 문예중앙 가을호)


해희는 짝사랑하던 남자와 헤어지고 술을 마시다 걸려 정학을 맞았다. 할머니네 집에 내려온 해희는 빈둥대며 주변사람들을 관찰한다. 바람난 할머니, 마누라가 도망가버린 점쟁이, 그리고 시민군이었던 남자와 삶이 지운 짐 때문에 힘든 여자를 본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인생의 외로움을 통감한 해희는 다시 술을 마실 수 밖에 없었고, 그 모습을 본 부모님이 외친다. "오메 오메, 저것이 아직도 술 못 끊었어"


o 그들이 사라진 저쪽(1993. 샘이 깊은 물 9월호)


'나'는 남편과 이혼했다. 남편에게는 본부인이 있었다. 아이를 산동네 탁아소 '아기둥지'에 맡기고 방을 구하러 다닌다. 맞춤한 방들은 비싸다. 글쓰는 것은 돈이 별로 되지 않는다.

친구 필순과 운주사에 간다. 필순은 아이를 뗐다고 했다. 남편이 원치 않았다고 한다. 

우연히 희아라는 아가씨를 만난다. 차가 없어 애를 먹다 간신히 한 대를 세우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희아는 타지 않고 도망가버린다. 필순은 희아의 가방에 약이 있었다고 했다. '아기둥지'에는 '내' 애기만 남아 오지 않는 어미를 그리다 하마 잠이 들었을 것이다.


o 피어라 수선화(1993. 상상 겨울호)


아버지는 큰집 사람들 몰래 논문서를 저당잡혀 도시로 나가 사업을 벌였다. 사업은 실패했고, 병을 얻어 입원한다. 그래서 '나' 영심이가 일곱살 동생 금심이가 다섯살 때 큰집에서 지냈다. 둘이서 불장난을 하다가 큰집을 태워 먹는다. 큰엄마한테 한껏 혼이 난 날 밤, '나'는 몹시도 앓는다. 그날 밤 큰엄마는 '나'에게 '잠밥'을 먹이며 '짠한 것'이라고 안쓰러워 한다.

어른이 된 '나'는 뱃속에 아이를 가졌지만 마음 편히 낳고 키울 처지가 아니다. 옆집은 매일같이 시끄러웠다. 공고생과 배다른 여동생, 그리고 엄마 세 식구였는데 매일같이 상소리를 하면서 싸웠다. 공고생의 담임과 엄마가 좋아지내는 것과, 공고생이 배다른 여동생을 잘 챙겨주지 않는다는 것이 원인이었다. 어느 날 부터인가 공고생이 칼을 가는 소리가 들려와 '나'는 곧 공고생이 어머니의 정부이자 자신의 담임을 찔러 죽이는 상상에 빠져든다. 

어느 날, '나'는 자살을 기도하지만 옆집 고등학생에 의해 발견되어 목숨을 건진다. 배다른 여동생이 없어져 찾다가 '나'를 발견한 것이다. 몸이 회복된 뒤, 칼 다 갈았냐는 '나'의 물음에 공고생은 금속공작 숙제라고 심상하게 대꾸한다. 그리고 또 모자의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생명이 움트는 곳에 대해 생각하고, 죽이고 싶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o 목숨(1992, 창작과 비평 가을호)


시골에서 상경한 혜자는 시다 역할을 하다 경님이 덕에 미싱을 타게 된다. 하지만 유인물을 뿌려달라는 부탁을 들어줬다가 공장에서 쫓겨난다. 그 뒤로 차장 노릇을 3년 정도 하다가, 차장이 필요없게 되어 직업을 잃고 술집 작부가 된다. 당장 거처할 곳이 필요했었다.

그러다 영등포 쇳공장 노동자 재호를 만나 살림을 차린다. 계속 작부 생활을 하기는 뭐해서 호프집을 차렸다. 하지만 재호는 5월 시민군이었고, 그때의 트라우마를 잊지 못해 괴로워하다 혜자 곁을 떠나버린다. 혜자의 뱃속에는 아이가 들어 서 있었다. 재호의 고향에 가보니 거기에 홍이라는 이름의 그의 아이가 있었다.

기진맥진해서 호프집으로 돌아온 혜자가 설저지를 하고 냄비밥을 해서 먹는다. 아이가, 또하나의 목숨이 혜자에게 쓸쓸해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꿈속에서 혜자에게는 아이가 두 명이었다. 홍이와 홍이 동생이었다. 꿈속에서 혜자는 행복했다.


o 우리 생애의 꽃(1994. 문학사상 5월호)


남편은 순직했고, 쥐꼬리만한 공무원 연금은 살림에 별 보탬이 되지 않았다. 아이는 학교에 갔다 와서 '내'가 없으면 밥을 안 먹는 것으로 엄마의 부재를 규탄했다.

어느 날, 아파트 앞 채전에서 방뇨를 하다가 수자씨를 만난다. 수자씨는 젖가슴이 크고 예뻤다. 수자씨는 그 젖가슴을 앞세워 남강민물매운탕집에서 남자들을 후렸다. '나'는 그런 수자씨를 보며 응원을 보내는 바였다. 어느 날, 수자씨가 꼬드겨 카바레를 갔으나 남자를 후리지 못한다. 택시기사를 꼬셔 까페에서 술을 먹은 다음 날, 둘은 택시기사가 토큰 하나 남김 없이 싹 쓸어갔음을 깨닫는다. 수자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강민물매운탕집에 가면 다시 남자를 후릴 수 있을 것이라 외치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준다. 그리고 '나'는 감시 우리 생애의 꽃이라고 이름 붙여버렸던 내 허술한 반란의 나날들이 참혹하게 무릎 꿇는 것을 본다.


o 흰 달(1993. 실천문학 겨울호)


순(純)의 남편에게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다며 아이를 데리고 시골집으로 와버렸다. 남편은 시민군이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창녀와 사이에 낳은 자식이 하나 있었다. 나는 남편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젊을 적 밖으로만 나돌며 바람을 피우다 술집 작부에게서 아이를 하나 얻었다. 간에 몹쓸 병이 걸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이제 하냥 죽을 날 받아놓은 것 처럼 사위어 가고 있었다. 배다른 동생 호길이는 눈치가 있었지만 아홉살 어린애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호길이가 가여우면서도 싫은 소리를 내지르고 후회하곤 했다. 

남편과 살던 집에 찾아갔다가 되돌아오던 길에 버스가 고장 나 '나'는 시골길을 걸어오며 아버지, 남편, 호길이, 누리, 그리고 남편과 창녀 사이에서 낳았다던 아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문득, 길이 이렇듯 밝은 것이 달 때문이었음을 깨닫는다. 동쪽 하늘을 보니 아버지 집 지붕위로 아버지의 흰 저고리가 사뿐 내려앉고 있었고, 흰 달 같은 혼백 하나가 막 흰 저고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o 목포는 항구다(1994. 월간 예향 8월호)


비닐구두를 신고 고향을 찾아가려는 여자, 그리고 우연히 여자를 만나 술을 산 남자가 여관에서 밤을 보낸다. 여관 주인의 딸은 벙어리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다. 벙어리 아가씨가 매일 듣는 노래는 '목포는 항구다' 였다. 고향으로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또는 갔지만 고향이 없어져버린, 이들이 여관에 머물렀던 시기에 동백꽃이 진다. 


o 씨앗불(1991. 창작과 비평 겨울호)


5월 항쟁에서 살아남았지만 시민군 출신인 그들은 갖가지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함께 싸우다 총탄에 맞아 숨진 동료들의 기억, 계엄군에게 끌려가 죽도록 얻어 맞아 만신창이가 된 몸, 감옥에 갖혀 뭉텅 잘려나간 청춘. 그들은 현재의 가정에도 충실하지 못했고, 보상은 커녕 제대로된 평가마저 받지 못한 채 여전히 분신자살하는 동료의 소식을 들으며 울분을 삼켜야 했다. 의준 역시 그런 고통 속에서 아내 진예의 속을 썩이기 일쑤였다.

살아남은 자들끼리의 대책 회의도 다툼이 일어나 의견이 갈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날, 의준은 미군과 함께가던 양공주와 싸움이 붙어 경찰서에 끌려가고, 돈으로 합의를 본다는 말에 '살아내는 방법은 오직 몸 하나로 부딪치고, 싸우고, 때우고, 굴리고, 개기는 것 그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밤이 이슥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위준은 각목으로 테러를 당하고, 아내는 또 한차례 울음을 쏟아낸다. 하지만 위준은 자신의 가슴 한복판에 오일팔 귀신들이 씨앗불로 남아 이글대고 있음을, 그 씨앗불의 힘으로 앞으로 살아갈 것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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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책을 사가지고 집에 간 날, 작은형이 작가에 대해 알은 척을 했다. 같은 과 선배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작가에 대해 뭐라 했는데, 지금 얼핏 기억 하기론 '강단 있는 분'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책날개에 나온 작가 사진을 한참동안 들여다 봤던 것 같다. 하지만 인연은 거기까지였는지, 책은 읽혀지지 않았다. 그때만해도 '먼 데 있는 무당이 용하다고 생각했'던 시기였으므로, 가족이 알고 있는 작가의 소설은 대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물론 이 생각은 나중에 작가의 단편 '타관 사람'을 읽고 깨진다. 나는 그 소설이 무척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지난 주 월요일에 헤지 펀드 운용사 실사를 위해 뉴욕과 시카고에 가게 되었다. 내 업무도 아니었고 내 순번도 아니었는데, 대타로 이름이 올라 출장명단에 든 것이었다. Morgan Stanley, UBS 그리고 Mesirow와 같이 자본주의 첨병인 그 회사들을 방문하기 전, 나는 비행기 속에서 예방접종을 맞는 기분으로 읽을만한 소설을 책꽂이에서 찾다 <피어라 수선화>를 발견했다. 비행기에서 읽는 내내 나는 내 선택이 훌륭했다는 것과, 곧 작가의 또 다른 소설을 읽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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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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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나'의 이름은 수전 트린더이고, 사람들은 보통 나를 <수>라고 부른다. '내'가 알기로 어머니는 죽었고 석스비 부인이 '나'를 친딸처럼 키웠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렌트 스트리트의 구석진 곳이다. 도둑들의 소굴인 이곳의 두목은 석스비 부인이다. 그녀는 압도적인 권위로 도둑 소굴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갓난애들에게 진을 숫가락으로 떠먹이며 키운 뒤 팔아 넘겼고, 잔챙이 악당들을 관리했다. 그녀의 파트너 격인 입스씨는 표면적으로는 자물쇠점을 했지만 본업은 장물아비였다. 존은 꼬마 악당이었고, 데인티는 존의 여자친구였는데 매번 존에게 얻어 맞으면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또 한명의 악당은 젠틀먼이라 불렸는데, 예술 계통에 다소 소질이 있었고 여자를 후리는 것이 주된 사업이었다. 어느 날, 젠틀먼이 1만 5천 파운드짜리 건수를 물어온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패팅턴에서 조금 떨어진 브라이어라는 곳에, 책에만 파묻혀 사는 크리스토퍼 릴리라는 이름의 학자가 있다. 그에게는 열일곱 살 된 질녀 모드 릴리가 있는데, 그녀는 결혼하게 되면 1만 5천파운드의 유산을 상속 받게 되어 있다. 젠틀먼은 크리스토퍼 릴리에게 접근해 그가 소장한 그림들을 배접하는 일을 얻어 모드 주변에서 얼쩡댈 수 있었고, 호감을 얻는 데 마침내 성공한다. 하지만 모드와 결혼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무엇보다도 크리스토퍼 릴리가 그렇게 되도록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젠틀먼은 모드의 마음을 훔친 뒤 함께 야반도주하여 몸도 훔치고, 유산을 가로챈 뒤에는 정신병원에 처박아 버린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 계획을 옆에서 도와줄 사람으로 '나'를 지목한다. '내'가 수전 스미스라는 이름으로 모드의 하녀로 들어가 계획을 성사시킬 수 있도록 일을 꾸미면 반을 떼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석스비 부인과 입스씨, 그리고 '나'는 젠틀먼이 제안하는 엄청난 액수의 돈에 혹해서 그러마고 응낙하고, 곧 하녀 수업을 속성으로 받는다. 그리고 브라이어로 떠난다.


브라이어에 도착해 보니 그곳은 일년 내내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곳이었고, 저택은 외따로 떨어져 있었으며, 음침한 기운이 흘렀다. 모드 릴리는 '나'를 무척 반겼고, '나' 역시 모드 릴리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녀는 여려 보였고, 세상 물정을 잘 몰랐다. 그녀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삼촌에게 불려가 책을 읽어주는 따분한 일을 했고, 열정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가 보기에 모드는 젠틀먼에게 마음을 빼앗긴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에는 묘한 구석이 있었고, 젠틀먼이 다가가면 안절부절 못했다. '나'는 그 원인이 그녀의 순진함과 성적 무지 때문이라 생각했고, 모드 역시 성적인 부분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했기에 '나'는 무심결에 그녀와 신체 접촉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이 단순히 가르치고 배우는 것만이 아닌 양상을 띠게 되고, '나'는 모드에게 매혹되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젠틀먼이 끊임없이 계획을 상기시킨 덕에 몽롱한 환상을 걷어내고 애초 계획대로 그들의 야반도주를 돕는다. 야반도주 첫날부터 젠틀먼은 모드를 함부로 대하기 시작한다. 농가에서 모드의 순결을 빼앗은 젠틀먼은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하고, 모드는 더러운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다. 모드는 점점 초췌해진다. 모드는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나'에게 선물한다. 나는 점점 귀부인과 같이 보인다. 그리고 정신과 의사 크리스티가 농가로 찾아온다. 그가 '나'에게 몇 가지 묻는다. '나'는 모드가 가여웠지만 계획대로 대답한다. 잠시 뒤, 젠틀먼과 모드가 '나'만 남겨두고 떠나간다. 그때서야 '나'는 깨닫는다. 버리는 패가 '나'였다는 것을.

젠틀먼은 크리스티 의사에게 자기 아내가 결혼한 뒤부터 정신이 이상하게 되어 스스로를 하녀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감금 치료를 요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이름이 수전 스미스이고, 하녀라고 진술했다. 모드 릴리 역시 자신이 수전 스미스이고, 하녀라고 진술했다. 그녀는 진흙에 더러워진 드레스에 며칠간 먹지 않아 초췌한 모습으로 말했다는 점이 다른 점이었다. 크리스티 의사는 모든 것을 알겠다는 태도로 나를 정신병원으로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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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생인 세라 워터스는 1988년 작은 서점에서 일하다가 공공 도서관으로 직장을 옮긴 뒤, 1991년 대학원에서 레즈비언과 게이 역사 소설에 관한 연구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19세기 런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빅토리아 3부작 중 첫번째 작품이자 데뷔작인 <벨벳 애무하기>를 쓰게 된다. 원제인 Tipping the Velvet은 <여성에 대한 구강성교>를 뜻하는 빅토리아 시대 은어라 하며, 2002년 앤드루 데이비스에 의해 드라마로 각색되어 BBC TV에서 방영되어 논란을 일으킨다.

두 번째 소설 <끌림>은 빅토리아 시대 여자 감옥과 강신술을 다룬 내용이라고 하는데,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 이 작품이 저평가된 점이 아쉽다고 한다.

2002년에 발표된 <핑거스미스>는 1860년대가 배경이다. 핑거스미스는 도둑을 뜻하는 은어로, 빅토리아 시대 소설 3부작의 정점을 이룬다. 부커상 최종 후보, 오렌지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대거상 역사 부문을 수상한다. 역시 2005년에 BBC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되고,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로 다시 한번 재조명 받기에 이른다.


<핑거스미스>는 총 3부로 나뉘어 있는데, 위에 요약된 내용은 '수'의 시선으로 처리된 1부이다.


<2부>는 모드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1부에서 수가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나온다. 모드는 수가 생각하듯 순진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모드는 자신의 어머니가 정신병자이고, 그녀를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알고 자란다.

정신병원 간호사들에게 위탁되어 자라던 모드가 브라이어에 처음 왔을 때에는 천방지축이었다. 하지만 호된 매질로 곧 성질이 눅어지게 된다. 그녀는 섬세한 손으로 책장을 넘기기 위해 장갑을 끼도록 강요 받고, 적당한 목소리로 구둣점 등을 살려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교육 받는다. 때때로 삼촌은 자신의 친구들을 불러 모드에게 낭독을 시킨다. 문제는 책 내용이었다. 삼촌이 수집하고, 읽도록 강요하는 책들은 모두 도색소설이었다. 매일같이 도색소설을 읽고, 정서하는 일에 찌들어 삶을 지긋지긋해 하던 때에 리차드 리버스, 즉 젠틀먼이 접근한다. 그는 수에게 제시한 단순한 방법으로 모드를 꼬드겨 낼 수 없음을 금세 알아차린다. 모드는 매일같이 도색소설을 낭독하면서 삶의 더러운 면을 너무나 많이 접했기 때문에 간단하게 속여넘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젠틀먼은 모드에게 자신과 함께 도망쳐 형식적으로 결혼하여 유산을 얻고, 대역으로 '수'라는 하녀를 정신병원에 처넣음으로써 연기처럼 사라져 독립할 수 있다고 꼬드긴다.

모드 역시 잠깐 '수'와 마찬가지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매혹을 느끼지만 '수'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제력을 발휘해 '수'를 정신병원에 처넣고 젠틀먼과 떠난다.


<3부>에는 숨겨진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들은 석스비 부인의 입을 통해서 나온다. 석스비 부인은 17년 전 남편 없이 아이를 낳은 여인을 잠시 돌보게 된다. 바로 크리스토퍼 릴리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문과 삶을 저주하며, 태어난 아이는 반드시 평범하게 자라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는 석스비 부인이 평범하게 키워주고, 대신 다른 아이를 크리스토퍼 릴리의 집으로 보내 달라고 말한다.

크리스토퍼 릴리가 고용한 사람들이 들이 닥치자, 석스비 부인은 '자신의 아이'를 그들의 손에 넘겨준다. 이 아이가 지금의 모드 릴리이다. 즉 모드 릴리의 친모는 석스비 부인인 것이다.

반면, 석스비 부인이 키우게 된 아이는 수전 릴리, 지금의 수전 트린더이다. 크리스토퍼 가문의 진정한 상속자는 수전이다.

이제 왜 석스비 부인이 정신병원에 갇힌 수전에 대해 무신경했는지 알게 되었으리라. 그녀는 17년만에 되찾은 자신의 딸, 지금의 모드 릴리 외에는 어떻게 되는 상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가 정신병원에서 찰리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이것이 화근이 된다. '수'가 칼을 들고 도둑 소굴에 난입하여 해명을 요구하고 다투는 사이, 젠틀먼이 들이 닥친다. 젠틀먼이 술이 취해 떠들어 대다가 문득 석스비 부인과 모드 릴리의 얼굴을 보고 놀라운 비밀, 즉 그 둘이 친모녀 사이임을 알아채고 만다. 비밀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 칼을 들어 젠틀먼을 찌른다. 모드 릴리의 짓인 것도 같았고, 석스비 부인 짓인 것도 같았다. 곧 찰리가 집을 뛰쳐 나가면서 '살인이다'라고 외치고 석스비 부인이 자신의 부인이라며 잡혀 간다. 석스비 부인은 사형 당한다.

모든 것이 끝난 뒤, '수'는 부인의 유품에서 계약 내용이 쓰여있는 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모드를 사랑했었는지를 깨닫는다.

폐허처럼 변해버린 브라이어를 찾은 수전은 모드를 발견한다. 그녀는 도색소설을 집필하고 있었다. 수는 당황스러웠지만 곧 그 내용을 읽어 달라고 말한다. 모드는 자신이 얼마나 수를 간절히 원하는지를 가득 써놓았다면서 자신의 글자들을 하나하나 보여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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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7-06-28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ㅜㅜ 저 뒤에 아직 안 읽었는데 아아 ㅜㅜ

PostmanBlues 2017-07-03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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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시를 하고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은 뒤에 <2부>, <3부> 이렇게 굵은 글씨로 표시했는데... 읽으셨군요... 저도 눈물이 납니다.
 
캥거루가 있는 사막
해이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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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몽구 형의 한 계절


'내'가 학보사 공모전에서 수필로 가작을 수상하자, 아버지가 '나'를 경기도 삼주에 위치한 오두막으로 데려간다. 거기에는 신춘문예로 등당했지만, 지금은 무위도식하는 몽구형이 세월을 낚고 있었다. 몽구형을 쫓아다니는 죽부인은 얼굴도 예쁘고 경제력도 있었지만, 몽구형은 도무지 죽부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몽구형이 오로지 하는 여자는 마리아 수녀님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찾아와 밥을 먹다 더 들라고 권하자, 몽구형이 돌연 "子曰 君子食無求飽하고 居無求安하며 敏於事而愼於言이라 했습니다" 라고 말을 꺼낸다. 이에 아버지가 "옳거니, 就有道而正焉이면 可謂好學也已니라" 라며 논어 학이(學而)편을 인용하여 주거니 받거니 한다. '나'는 깜빡 잠이 들었는데 잠시 후 들려온 아버지의 대화는 이랬다.

"야, 짜샤, 너 벌써 이 짓거리 몇 년째냐. 너 올해는 뭔 일이 있더라도 꼭 쇼부를 봐야 해. 그 동안 썼던 거 잘 오사마리해가지고 문단에 카운터 완빤치 한 방 멕이는 거야. 너 인마 이대로 야코 죽으면 네 인생의 후까시는 그야말로 뽕빨나는 거다..."


o 돌베개 위의 나날


한국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뾰족한 호구지책이 없어 '나'는 아내와 호주 시드니로 떠나왔다. 아내가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한은 호주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고, 졸업 후에 직장을 잡게 되면 시민권도 획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뒷바라지를 위해 '나'는 백선배를 따라 청소 일을 다닌다.

청소업계는 한국인들끼리 단가 경쟁을 하다보니 품삯이 박했다. 하지만 그나마도 빨리 처리해야 일감이 떨어졌기에, '나'는 고무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막힌 변기에서 여자 생리대를 끄집어내기까지 한다.

좀 더 빠른 시일 내에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최씨를 따라 공장 청소에 따라 나선다. 하지만 최씨가 두 달치 임금을 떼먹고 사라져 버린다. 아내 등록금이었다.

아버지 유산이 있다는 호언장담은 흰소리였고, 백선배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최씨만 찾아내면 요절을 내서라도 돈을 받아내겠다는 '나'에게 백선배가 최씨는 진즉에 '불자(불법체류자)'로 잡혀들어갔다 했다. 그리고 자신도 사실은 '불자'였다면서 선물로 제라늄 씨앗을 건낸다.


o 캥거루가 있는 사막


호주의 사막을 여행하던 '내'가 코바야시 이사오라는 일본인을 만난다. 사막을 관통해 에어스록에 오르던 날, 코바는 자살을 시도한다. '내'가 가까스로 코바를 구해낸다. 킹스 캐니언을 마지막으로 '나'와 코바는 헤어진다. 코바는 사막 도시들을 여행한 뒤, 다시 사막으로 거슬러 올라가겠다고 했다.

마그네틱 섬에서 일본에서 온 여인과 만난다. 그녀는 자신을 우미코라고 소개했다. 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것처럼 서로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둘은 몸을 섞게 되고, 각자의 비밀을 적어 유리병에 넣기로 한다. '나'는 동성동본이며, '나'의 아기를 뱃속에 키우고 있는 아영이를 떠올린다. '나'는 이상한 충동에 그녀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유리병을 다시 파가지고 길을 떠난다. 유리병 속에 적힌 것을 읽어보고 '나'는 코바야시와 우미코는 친남매지간이었고, 서로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출악어기>는 한문선생을 1년 가량 하다가 역마살 때문에 트럭 운전을 하는 아버지가 '악어'라고 불리는 '나'에게 어려운 문자를 써가며 매일같이 가르침을 주는 내용이다. 어느 날 범종 아홉번을 치고 아버지가 거창하게 길을 떠난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사실 한문선생과 함께 자취를 했을 뿐이고 떠나는 곳도 둘째부인 집이었다.


<우리 전통 무용단>은 시드니에서 관광 안내원으로 일하는 '나'와 우리 역사의 어두운 한 시기에 남편을 잃은 할머니들이 며칠 간 함께 보내며 서로를 이해하는 이야기이다. 할머니들이 추는 춤이 '나'는 창피했지만, 외국인들은 그것을 한국의 전통 무용이라 생각하며 신기해 한다.


<어느 서늘한 하오의 빈집털이>는 우울증 아내와 이혼한 선배가 아내가 없는 틈을 타 자신의 물건을 오토매틱 밴에 싹쓸이해 가는 내용이다. 하지만 보물 1호를 남기고 오는 바람에 전부인에게 현재의 애인이 사준 모바일폰으로 전화를 걸어 애걸복걸한다.


<관수와 우유>는 소심한 관수와, 그의 우유를 빼앗아 먹은 택기, 그리고 택기의 지나친 행동을 제지하다가 싸움을 벌인 '나'의 이야기이다. 택기가 다른 반에서 응원군을 데려오고, '나'의 반에 3년 꿇은 '또자형'이 가세하여 싸움은 더 커지고, 급기야 교련선생과 국어선생이 소주를 까다가 소란을 듣고 달려온다. 하지만 싸움의 원인을 밝히려는 노력은 누구도 하지 않고, 관수는 자신의 '인내심 없음'을 자책한다.


<환원기>는 벽천의 문원에 들었다가 성급한 맘에 글도둑질로 등단하는 성진의 이야기이다. 줄탁지기(啄之機)를 모티프로 쓰여진 글이다.

알 속의 병아리가 충분히 발육하여 바깥 세상으로 나가고자 쪼는 것을 줄(啐)이라 하고, 그 소리를 듣고 어미닭이 부리로 껍질을 깨드려 주는 것을 탁(啄)이라 한다. 이 과정은 상당히 미묘해서 닭과 병아리가 서로 쪼는 곳이 다르면 병아리는 세상 구경을 못 하게 된다. 또한, 병아리가 알 속에서 성숙하기도 전에 성급한 어미닭이 알을 먼저 깨거나, 부화기를 맞은 병아리가 안에서 쪼는데 밖에서 어미가 응답하지 않아도 병아리는 숨이 막혀 죽고 만다. 선학(禪學)에서는, '참선자가 개오(開悟)의 경지에 도달할 때'를 사승(師僧)이 알아 그 깨달음의 길잡이 노릇을 해낼 수 있는 솜씨를 가르켜 '줄탁지기(啄之機)' 라 한다.

해이수 소설의 구조는 일견 순박하다. 그는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모습'을 기본 구성으로 하여 이야기를 엮어 간다.

<몽구 형의 한 계절>에서의 몽구 형과 아버지, <출악어기>의 아버지는 어려운 한자를 써가며 식자연 하지만 사실은 주워들은 것들이라 깊이가 없고, 그들의 실제 모습 역시 속물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이 속물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기 위하여 생활력 있고 예쁜 죽부인을 멀리하거나, 한자선생이 남기고 간 노트를 달달 외우고 범종을 쳐가며 온간 젠 체를 다한다. 사실은 수녀님 궁둥이를 훔쳐보거나, 생활력 있는 때밀이 출신 셋부인을 두고 있는 처지이면서.

이러한 모습은 <돌베개 위의 나날>과 <어느 서늘한 하오의 빈집털이>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서는 '선배'가 등장하는데, 온갖 약은 척은 다하지만 사실은 '나'에게 까지 사기를 치고 '불자'로 고발당해 시드니에서 쫓겨 나거나, 우울증 걸린 아내를 속이고 바람을 피웠다가 걸리자 도리어 이혼을 한 뒤 집을 싹쓸이해 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세상 사는 약은 요령을 알려주지만, 사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것이 실상이다.

<우리 전통 무용단>와 <캥거루가 있는 사막>은 다소 작위적이다. <관수와 우유>에서는 공지영과 같은 태도가(작가 해이수는 소설 속 '나'와 같은 관찰자를 소설가라고 생각했겠지만 정말 그럴까?) 엿보이고, <환원기>는 얼핏 이외수의 <들개>를 떠올리게 한다. 글쓰기를 잘하기 위해서 동양고전과 서양고전을 읽는 행위나, 폐교에 스스로를 유폐시켜 글을 쓰는 행위나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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