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노코와 마들렌 여사
마키메 마나부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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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가노코는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애다. 가토코네 집에는 마들렌이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겐자부로라는 이름의 시바견이 살고 있다. 가노코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그 둘은 부부이다! 게다가 어찌된 일인지 서로의 말도 알아들을 수 있다.

가노코가 요새 새로 사귄 친구는 스즈인데, 꽤 엉뚱하다. 처음 만난 날, 스즈가 코에 엄지손가락을 끼운 채 손가락을 나비모양 팔락거리며 노는 모습에 반했다. 하지만 스즈는 왠지 가노코를 멀리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스즈는 코 나부나부를 한 자신의 모습이 창피했다고 한다.

한편, 겐자부로는 사람 나이로 치면 할아버지이다. 그래서 소화기능이 예전과 같지 못하다.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예전에 맛봤던 소고기를 다시 한번 먹어보는 것.

어느 날, 겐자부로가 꼬리 둘 달린 고양이가 사람과 모습이 바뀐다는 얘기를 듣던 마들렌 여사가 깜빡 졸다 깨어보니 길 한복판이었다. 그때 반대편에서 오던 사람과 마들렌 여사가 바뀌는 사건이 벌어진다. 마들렌 여사는 먼저 공터에 흉물스럽게 뒤덮인 비닐포장들을 치운 뒤 정육점에서 소고기를 사다가 겐자부로의 밥그릇에 넣어준다. 잠시 뒤 잠에서 깨어난 마들렌 여사는 어쩐지 모든 게 진짜 같았다. 게다가 겐자부로 역시 꿈 속에서 소고기를 먹었다지 않는가!

만나면 헤어지게 되는걸까. 스즈는 아버지를 따라 인도로 전학을 가게 되고 겐자부로는 천운이 다해 숨을 거두게 된다. 마들렌 역시 잠시 동안 집처럼 여기고 보금자리로 삼았던 가노코네 집을 떠난다.


마냥 따뜻하기만 한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어쩐지 기만당하는 느낌이다. 세상이 따뜻하지 못한데, 따뜻한 이야기만 한다는 것은 어쩐지 잘못된 것 같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쓰지 않았을까. 

겨울이면 통과의례처럼 감기가 찾아온다. 어제부터 몹시 앓았다. 수요일엔 출장이 있어서 그 전에 다 나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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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LR도 부럽지 않은 똑딱이 카메라 - 전면개정판
문철진 지음 / 미디어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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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던 스마트폰이 문제가 생긴 지는 꽤 오래 전이다. 여름 내내 주머니 속에서 자가발전을 하며 홀로 뜨거웠고, 카메라를 작동시키면 스마트폰이 꺼졌다. 스마트폰을 바꾸면 될 일인데 어떤 고집에서일까, 책장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자리보전하고 있떤 똑딱이 카메라를 사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세종시 축제에 가서 아이 사진을 찍어줬는데 거의 한 장도 건지지 못했다. 아이는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카메라 셔터 속도는 아이를 따라잡지 못했다. 셔터 속도를 빠르게 하면, 너무 어두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사진 찍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산 책이다.


배운 점은 구도가 중요하다. 삼분할, 심도, 측광 따위의 용어들과 뜻.

느낀 점은 희안하게도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DSLR이 부러워 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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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의 경숙 - 2013년 제58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김숨 외 지음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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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은 김숨의 <그 밤의 경숙>이다. 한 밤중에 도로에서 남편과 퀵 오토바이 기사 간에 시비가 붙는다. 퀵 오토바이 기사와 맞붙었다간 남편이 크게 상할 것 같다. 경숙은 오토바이 기사에게 제발 가달라고 부탁하고, 남편은 분에 못 이겨 차를 출발시킨다. 어쩐지 남편의 차가 퀵 오토바기사를 친 것만 같다. 

혼란에 빠진 경숙은 자신이 근무하는 콜센터에 대해 생각한다. 번호로 불리며 소모품 취급받는 곳, 전화를 하라고 큰애에게 스마트폰을 사줬지만 정작 자신은 아이의 전화가 아닌 그악스런 고객들의 전화만 받아야 하는 상황 등.  

<그 밤의 경숙>은 김종일의 단편 <일방통행>을 떠올리게 한다. 김종일이 공포라는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소설을 써본다면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수상작가의 선정작 <북쪽 방>은 한평생 열정 없이 지구과학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직 후 폐병을 얻어 아내에게 백안시 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매일같이 누군가가 집 담벼락에 쇠공을 던지는 통에 몹시도 불안함을 느끼던 그는 어느 날 바깥에서 쇠공이 날아가 누군가의 머리를 깨었다는 외침을 듣는다. 아내의 목소리 같기도 하다. 아내는 우족을 사러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쇠공을 던지는 사람이 객관적인 실체인지, 아니면 유폐된 남자인지 확실치 않다. 그는 아내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싶었을까? 김숨의 소설은 이번이 처음인데, 공포를 주조로 하는 소설이라는 엉뚱한 느낌을 받는다.


김연수의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은 잘 쓰여진 소설이다. 특히 초고와 관련한 이야기는 인상 깊었다.


컴퓨터는 작가에게서 초고를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작가의 일이란 교정하지 않은 초고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정말 여기까지가 다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때 비로소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는 이유는 김연수가 작가를 일반인과 엄격히 구붓짓는 태도와 과잉된 자의식 때문이다.


백가흠의 <한 박자 더 쉬고 - The Song 2> 는 비정한 소설이다. 학창시절에 '나'를 괴롭히던 엄석대 같은 존재를 커서 다시 만난다. 그는 예쁜 아내를 얻어서 교회에 다니며 잘 살고 있다. '나'는 여전히 장가도 못 가고 혼자 예술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과거 기억을 떠올리다 '나'는 다니던 교회 여자애가 강간당하는 현장에 '내'가 데려다 줬었음을 떠올린다.

백가흠은 이 이야기에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정하다. 어설픈 권선징악도 문제지만 얘기만 던져놓고 나몰라라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닌가? 에밀 졸라 정도의 거장이라면 모를까.


이장욱의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쿨한 이미지들의 집합으로 삶의 이면에 대해서는 거의 다가서지 못한 작품이다. 다분히 무라카미 하루키 풍의 이미지.


정찬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잘 쓰인 소설이다. 침팬지가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어 글을 쓰도록 의뢰받는다는 독특한 상황 설정과, 외젠이라는 가공의 침팬지 이야기를 엮어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나는 정찬의 소설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다.


조해진의 <홍의 부고>와 최진영의 <어디쯤>은 습작 느낌이다. 기교가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작가의 내부로부터 '쓰고싶다', '써야한다' 하는 욕망이 차올라 쓰여진 소설이 아니라 '단편을 하나 써볼까' 하는 정도의 욕망에서 시작된 작위적인 글 같은 인상을 받는다는 말이다.

홍이라는 후배가 죽었는데 정작 홍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아버지가 가라고 해서 약도를 보고 찾아가려는데 도무지 찾지 못하겠다는 것. 두 소설은 많이 닮아 있다.


편혜영의 <비밀의 호의>에서 주인공의 동생은  어렸을 적에 사흘간 집을 나갔다 돌아왔다. 주인공은 못내 그녀가 그 사흘동안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다. 그것만 알면 그녀의 모든 것을 알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끝내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시력을 잃어가는 동생을 요양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며 앞으로의 삶은 비밀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편혜영은 <철수사용설명서>에 오늘의 작가상을 준 심사위원 중 한명이다. 그래서 나는 편혜영이 왜 <철수사용설명서>에 상을 주어야 했는지가 궁금하다. 그것만 알면 소설 업계의 비밀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윤성희의 작품 <못생겼다고 말해줘>는 역시 윤성희 다운 작품이다. 삶의 냄새가 나지 않고 이미지만 둥둥 떠다니는.

전성태의 <배웅>은 짤막한 소품으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는 쏘냐를 배웅하는 화자의 애틋함을 그린 작품이다.

97년인가 조경란의 <식빵 굽는 시간>을 읽었을 때는 불만족 스러웠는데, <옥수수빵 구워줄까>는 나쁘지 않다. 엄마가 애지중지하던 오븐과, 엄마 밑에서 크지 못해 안쓰러운 조카들, 그리고 그런 것들과 차츰 화해하는 '나'의 모습들이 매끄럽게 배치되어 있다.


11월 1일부터 3일까지 제주도 워크숍을 다녀왔다. 오며 가며 전철과 비행기에서 읽었는데 작품 수준이 전체적으로 불만족스럽다. 그러나 제주도는 아름다웠다. 일해야 할 시간에, 일해야 하는 공간에 있지 않아도 좋은 그 상황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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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저녁
정찬 지음 / 문학동네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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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 거리에 쓰러진 채 발견된 시체에서 청소부가 은십자가 목걸이를 습득한다. 목걸이에는 '빈첸시오'라는 이름이 세겨져 있었다. 청소부는 성당에 다니는 아내에게 목걸이를 선물하지만, 그녀는 남의 목걸이를 지니는 것이 마음에 걸려 신부에게 사실대로 말한 후 목걸이의 처분을 맡긴다. 그리고 목걸이의 본래 임자인 또 다른 '빈첸시오' 가 나타난다.


사망한 빈첸시오의 본래 이름은 황인후였다. 그의 어머니는 신부와 상간하여 인후를 낳았는데, 전해 듣기로 신부는 인후의 어머니로부터 아이를 건내받은 직후 아이를 내팽개쳤다고 했다. 그때의 사고 때문인지 인후는 간질을 알았다. 이 질병으로 인하여 인후는 신부가 되는 꿈을 접어야 했다.

인후가 사촌의 별장에서 강혜경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지만, 둘은 운명과도 같은 사랑에 빠진다. 혜경의 집에서는 반대가 심했지만 둘 사이에 아기가 생기자 혜경의 어머니는 조금 누그러진다. 하지만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만다. 혜경의 집에 내려오는 유전병이었다. 인후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며 하느님에게 간구했지만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자 심한 절망감에 빠져 수도원을 전전하며 자신을 학대한다.

마침내 자신의 아버지 빈첸시오 신부가 책임자로 있는 수도원으로 간 인후는 자신이 하느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하느님은 기도에 응답하는 신이 아니라 함께 슬퍼하는 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역시 인후를 내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아버지 빈첸시오 신부로부터 은십자가와 세례명 빈첸시오를 받은 인후는 예수님과 닮은 삶을 살다가 추운 겨울에 객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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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시오는 세 분이 있었다. 한분은 성 빈첸시오 페 레리오 사제 증거자로 중세기의 위대했던 설교자이고, 다른 한분은 성 빈첸시오 순교자이다. 마지막 한분은 '너희가 여기 형제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장 완전하게 실천하신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증거자이다. 소설 속에서 인후는 세번째 빈첸시오이다.


소설보다 흥미로운 것은 문학평론가 김주연의 글이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을 때 기독교인들은 하나의 곤란한 질문을 받게 된다. '학살의 시기, 도대체 하느님은 어디에 계셨느냐'는 질문이 그것이다. 만약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그같은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이 신의 묵인 혹은 방조 아래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신학자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이 '하느님의 눈물론'을 들고 나왔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수백만 명의 유태인들이 죽어갈 때 하느님은 너무 슬퍼 울고 계셨다는 주장이다.


정찬의 소설은 이 불트만의 이론을 모티프로 하여 전개되는데, 사실 하느님의 눈물론에 관한 소설은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서 너무나 훌륭히 다루어진 주제라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작가는 '시간의 무게'를 견디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밝혔으나, 다소 진부한 주제와 도식적인 전개로 성공하진 못한 것 같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1133293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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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유키 - 제1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조두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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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에 일본군은 조선의 주요 성을 점령했다. 그들은 성을 점령하면 승리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임금이 도망갔는데도 조선은 항복하지 않았다.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을 괴롭혔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돌담으로 둘러싸인 성안의 좁은 땅만 차지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1597년 정유년, 일본은 십사만 일천오백명의 군사로 조선을 다시 침략한다. 처음 얼마간은 전주로 향하는 길에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차츰 전세가 바뀌어 육군이 상주 목사 정기룡에게 패한 뒤 직산 싸움에서 크게 졌고, 9월 16일 이순신에게 명량에서 패하면서 일본 수군 역시 무너진다. 육군과 수군은 서해에서 만날 수 없었다. 퇴각을 거듭하던 일본 육군은 순천과 울산을 잇는 남해 연안에 성을 쌓고 1598년 11월 18일 철수 때까지 주둔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일만 삼천여 병졸과 역부들 역시 순천 인근 해안에 산성을 쌓았다.


소설은 바로 그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군막장 도모유키의 시선을 빌어 전개된다.


도모유키의 눈에 비친 조선군은 무시무시하다. 바다에는 이순신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고 일본군의 퇴로를 완벽히 차단하고 있었다. 그 장군에게는 뇌물도 통하지 않아 일본군의 목을 잘라 바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일본군들은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지 못한 채, 기약없이 성을 보수하고 인근 민가를 약탈해 식량을 보급했다. 때로 도자기를 빚을 줄 아는 기술자를 잡아오면 상이 내려오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일본군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잘못하면 매질 당하고, 심하면 목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성 안에는 붙잡혀온 조선인들이 꽤 있었고, 그들은 성을 보수했다. 제대로 된 음식을 지급받지 못했고, 활용가치가 없어지면 살해됐다. 그리고, 일부는 상인들에게 팔려 일본으로 끌려갔다.

도모유키는 그런 혼란한 와중에 조선여인 명외를 사랑했다. 명외를 보면 가난 때문에 술집에 팔려간 동생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공기가 달라지더니 철군 얘기가 나온다. 도모유키는 철군 직전 조선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앨 것을 알았기에 목숨을 걸고 명외를 탈출 시킨다.

마침내 철군 하는 날, 도모유키가 탄 배는 조선수군에 의해 여지없이 격파되고 패잔병들이 다시 육지로 돌아와 무리를 지어 이동한다. 하지만 살기위한 이동일 뿐 목적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도모유키는 명외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일행으로부터 외따로 떨어져나온 도모유키가 명외가 살던 마을이라고 짐작되는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눈보라를 헤치고 마침내 명외의 집에 당도한 도모유키의 눈에 미소 짓는 명외의 얼굴이 보인다. 도모유키가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고, 눈앞은 점점 어두워진다. 바람이 일어났고, 그늘에 쌓인 눈이 날았다.


전쟁을 통해 이득을 얻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패배해도 얻는 것이 있기 때문에 기꺼이 전쟁을 치룬다.

민중들은 전쟁의 승패와 관계 없이 죽거나 상하고 삶은 피폐해진다. 소설에서 조선군인들이 일본군에게 잡혀갔다온 백성들을 모조리 도륙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 맥락에서 도모유키와 명외는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핍박받는 민중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간결한 문체, 특이한 시각 모두 좋았다. 서사가 조금 약하고, 사투리는 못봐줄 정도로 어색했지만, 그런 흠결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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