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디아의 비밀 비룡소 걸작선 21
E. L. 코닉스버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비룡소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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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디아는 모든 과목에서 수를 받는 '우등생 클로디아 킨케이드'일 뿐이라는 게 지겨워졌다. 일요일 밤 7시 반이면 누가 텔레비전 채널을 고를 차례인지 아웅다웅하는 것도,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는 것도, 매일 똑같은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것도 지겨웠다. 그래서 막내 동생 제이미를 끌어들여 가출하기로 결심한다. 제이미는 용돈을 받으면 꼬박꼬박 저축하는 구두쇠였고, 일제 트랜지스터 라디오도 있었기 때문에 파트너로 제격이라 생각한 것이다. 제이미가 가출계획에 흔쾌히 동의하자 둘은 곧바로 가출을 감행한다.

그런데, 클로디아와 제이미가 가출한 곳은 다소 엉뚱하지만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었다. 관광객을 가장해 입장한 뒤 폐관시간에는 화장실에 숨어있다가 불이 꺼지면 전시된 침대에서 잔다는 계획이었는데, 클로디아와 제이미는 경비원들을 피해 미술관에 숨어드는 데 성공한다. 둘은 그날부터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관광객들이 분수대에 던진 동전을 발견했기 때문에 돈 문제도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한편 그 즈음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천사조각상 하나가 새로 들어와서 클로디아의 관심을 끌게된다. 천사상의 조각가는 미켈란젤로일지도 모른다고 전문가들이 말했다. 클로디아는 제이미와 함께 도서관에서 미켈란젤로에 대해 공부하기도 하고, 조각이 놓여있던 자리에 난 흔적으로 미켈란젤로의 문양을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결정적인 증거는 부족했다. 결국 클로디아와 제이미는 조각상을 미술관에 판매한 프랭크와일러라는 부자 할머니를 찾아가게 되고, 거기서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된다.




 

33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다. 계몽사 문고 30번, 카니즈버어그 지음, 남소희 옮김.

초등학교 때 책을 읽으면서 용돈을 모아서 가출자금을 만든다는 게 신기했고(용돈을 정기적으로 받는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분수대에서 동전을 줍는다는 설정도 재미있었다. 그리고 음식자동판매기에서 아침식사를 사먹는 것도 신기했고. 1967년도에 발표된 작품으로 대호황을 겪던 미국의 풍요로움이 제3세계 빈국의 열살 난 어린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모양이다.

작품은 1968년 미국 어린이 문학상인 뉴베리 상을 수상했으며, 작가의 다른 대표작으로는 <내 친구가 마녀래요>, <롤빵 팀 작전>, <꼬마 화학자들의 비밀 파티>, <타콘다 부인의 초상>, <800번으로의 여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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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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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에는 토끼를 사다 기르던 아내가 토끼가 죽자 매우 슬퍼하다 결국 토끼가 되어 생을 마감한다는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버스가 급정거하면서 목이 부러져버린 아버지와 정신병에 걸린 아버지의 사촌, 그리고 사막의 이미지가 복잡다단하게 중첩되는 <사막에서>, 아내의 꿈에 등장하면 죽고 만다는 다소 엽기적인 내용의 <하얀 발목>, 춤을 소재로 여러가지 이야기에 변주를 가하는 <작별>, 예지와 직감 능력을 지닌 '나'와 돌을 기가막히게 잘 던지는 K를 다룬 <K>,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뒤 아버지의 폭력을 첫 기억으로 갖고 있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인 <하나, 둘, 셋>, 물 한 모금 마실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특허권을 인정 못받는다는 내용의 <물 한 모금>, 늘상 이쪽으로 다니던 양씨가 저쪽으로 가기로 마음먹은 날 살인자가 되고 마는 <이쪽과 저쪽>, 불에 탄 신체 일부를 먹어치우는 소방대원들의 이야기 <불 끄는 자들의 도시>가 실려 있다.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한국어가 필수이수과목이었다. 주로 보따리 강사들이 가르쳤기 때문인지 수업의 충실성과 질은 매우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정규직에게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한다면 그게 될 일이겠는가) 어쨌든 이름은 잊었지만, 한국어 강사가 소설에 대해 수업을 진행하다가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담배 없이 못 사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담배를 보루째 사다놓고 떨어지지 않게 관심을 기울이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내는 평소에 남편의 말을 잘 지켰지만, 그 날은 어찌된 일인지 다른데 신경이 쓰여 그만 담배를 사다놓지 못했다. 남자는 아내에게 화를 내다가 결국 흡연욕구를 참지못해 담배를 사러 밖으로 나갔다. 횡단보도를 건너 가게까지 남자는 한달음에 뛰어갔다. 담배를 달라는 남자의 말을 귀가 어두운 할머니는 잘 알아듣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자꾸 지체됐다. 겨우 담배는 샀지만, 할머니는 가게 문 닫기 전이라 지폐를 모두 갈무리해버렸다며 거스름돈을 동전으로 주었다. 남자는 투덜대며 가게를 나섰다.

한편, 교대근무를 하기로한 동료가 아파서 12시간을 풀로 뛴 택시기사가 차고지로 향하고 있었다. 더 이상 손님을 태우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다급하게 택시를 잡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임산부 같았기에 매정하게 거절하기 어려웠다. 택시에 타자 마자 진통이 시작됐고, 기사는 맘이 급했다. 어서 임산부를 병원에 내려주고 쉬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신호를 잘 지키던 그가 그날은 신호위반을 했다.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늦었고, 택시는 횡단보도 중간에 쭈그려 앉아 동전을 줍고 있는 남자를 치고 말았다. 가로등이라도 밝았다면 남자를 볼 수 있었겠지만, 가로등은 하필이면 고장나 있었다. 나중에 목격자들에게서 들은 바로는, 남자는 호주머니에서 동전이 떨어져서 줍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인데, 강사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남자가 죽은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남자가 골초가 아니었다면, 아내가 담배를 사다놨더라면, 할머니가 귀가 어둡지 않았다면, 만약 거스름돈을 지폐로 주었다면, 택시기사가 동료와 교대를 해서 주의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임산부가 갑작스레 산통을 느끼지 않았다면, 가로등이 고장나지 않았더라면...


박형서의 작품을 읽고 이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작가가 '우연' 이라는 질료를 가지고 작업한 소설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그의 이런 작업은 그다지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의 실험이 불완전한 토대(공감대) 위에서 진행되기 때문이고, 둘째로, 다분히 사변적인 이야기들이  흥미를 유발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작가가 진정 쓰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학술적인 이유 때문에 쓴 소설 느낌이라고 할까. 


그건 그렇고 얼마 전에 이응준의 소설을 읽었는데, 그가 쓴 소설 중에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라는 작품이 있다. 박형서의 작품 <K> 중에 ...이십여 년 동안 쌓아온 추억의 속도로 멀어져갔다. 라는 대목이 나와서 어느 작품이 먼저인지 호기심에 찾아봤다.<K>는 2002년,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는 1994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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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년 금융위기 논쟁 공감개론신서 5
윤소영 외 지음 / 공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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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년 금융위기: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대안>


강의는 세 단락으로 구성되는데, 첫번째 단락은 금융위기의 원인을 구조적인 것(장기적·궁극적·보편적)과 정세적인 것(단기적·직접적·개별적)으로 나누어 설명. 구조적 원인은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경제에서 출현하는 이윤율 하락 경향을 의미하며 금융세계화와 이중적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 반면, 정세적 원인은 '금융혁신'과 관련.

두번째 단락은 부르주아적 정책대응에 대해 설명하는데, 재무부와 연준(FRB)의 정책기조는 겸업화와 인수합병이 주된 정책기조. 이로 인해 '은행의 좀비화' 현상이 출현. 여기에 구제금융을 통한 자본확충과 비전통적 통화정책인 제로금리정책과 수량완화정책(양적완화)를 병행하여 사용.

세번째 단락은 이번 금융위기의 전망에 대한 설명. 1930년 대불황과 금융위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1930년대에는 이윤율이 상승하는 경향인 반면 이번에는 하락하는 경향.


* 저자는 더블딥 가능성을 상정하며 2차 대불황까지도 가정한 뒤 사회운동노조를 대안으로 제시


금융위기의 원인


이윤율의 하락 경향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금융위기의 구조적 원인, 즉 이윤율의 하락 경향에서 출발. 1965년까지는 이윤율이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추세였으나, 65년 이후 이윤율이 장기적 하락 추세로 접어듬.

기술혁신에 의한 이윤율 상승과 금융세계화·이중적자와 관련되는 금융혁신에 기인한 이윤율 상승은 다르게 분석되어야 함.


금융세계화와 이중적자


이중적자는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말함. 금융세계화와 이중적자가 전개되면서 금융혁신이 출현하고 이윤율이 상승. 1970년대 초반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1971년 금-달러본위제 중지, 1973년 고정환율제 폐지)

1960년대까지가 케인즈주의의 전성시대인데, 이 시기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금융의 억압.

1980년대는 금융세계화의 초기 단계인데 몇 가지 특징이 있음. 첫째는 런던의 유로달러시장으로 진출했던 미국의 초민족은행이 뉴욕의 증권시장으로 귀환한 것과, 은행과 증권사의 구별이 점차 소멸하여 겸업화가 출현했다는 점. 둘째는 석유달러환류를 대체하는 수출달러환류가 출현. 무역적자는 자본수입으로 보전하고, 재정적자는 국채발행으로 보전하는데, 미국은 국채 즉 재무부증권을 발행하여 동아시아로부터 자본을 수입. (동아시아의 중앙은행이 국채 매입)

미국이 이중적자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달러의 발권이익(seigniorage) 때문.


* 저자는 이러한 사정 설명에 덧붙여 박정희 대통령 암살은 이윤율이 급락하는 상황에서 급증하는 무역적자와 외채원리금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1979-80년의 정치적 격동은 결국 남한경제의 구조적 위기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는 의견


한편 금융성숙기에 접어들기 전, 케인즈주의에 의해 억압되던 금융이 해방되면서 실물경제를 지배하는 금융우위 현상이 나타남. 실물경제 자체가 금융화되는 메커니즘은 '주주가치의 최대화' 및 '주주행동주의'가 핵심. 이를 통해 초민족기업 자체가 탈산업화되는 동시에 금융화. 이는 초민족기업이 실물경제적 축적이 아닌 금융적 축적을 지향하는 것으로 GE가 대표적인 예임.

1980년대 이후 케인즈주의를 역전시키는 새로운 경제정책인 신자유주의가 출현하면서 금융의 우위를 보장하는데, 그 핵심은 저금리를 통해 증시를 부양하고 다양한 규제·감독 철폐를 위해 겸업화를 허용하는 것임. 1990-2000년대 금융세계화를 통해 이윤율의 현실궤도는 상승하는데, 이런 상승을 주도하는 것이 실물경제가 아닌 금융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함. 이 시기 특징은 1933년 글래스-스티걸은행법 폐지로 겸업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 1990년대에 잠시 형성된 신경제거품이 붕괴되면서 증시와 주택시장을 결합한 새로운 파생금융상품을 중심으로 하는 금융혁신이 등장한 점이다. 물론 이 특징의 이면에는 겸업화와 이중적자가 전제.

주택거품이 증시거품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는데, 2007년 주택거품이 붕괴됨.

한편, 2000년대의 금융세계화는 군사세계화와 결합되는 특징도 있음.


금융혁신과 신용의 증권화


부동자산(부동산)이 유동자산(동산)으로 전환, 단시 말해 모기지론(주택담보대출)과 모기지(주택담보대출증서)가 증권으로 전환. 이렇게 부동자산과 유동자산의 경계가 소멸하는 것을 '유동화', 즉 '신용의 증권화'라 함.

은행신용은 한계가 있지만 이를 극복한 것이 증권시장. 증권시장(국채, 주식 등)

글래스-스티걸은행법은 은행업과 증권업의 결합을 금지한 것인데, 금융서비스현대화법이 제정되면서 겸업화가 본격화되고 신용이 증권화함. (주택담보부증권, 부채담보부증권, 자산담보부기업어음, 신용부도스왑...)

문제는 민간주택담보부증권임. 서브프라임(비우량) 비중이 급격히 증대한 가운데, 모기지회사가 판매하는 주택담보부증권을 증권회사가 구매. 이 과정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주택담보부증권을 또 다른 증권으로 전환하여 투자신탁기금과 연금기금, 심지어 은행과 보험회사에까지 판매함. 부채담보부증권(CDO)은 서브프라임 주택담보부증권과 프라임 주택담보부증권을 혼합(구조화), 또는 대기업 회사채와 서브프라임 주택담보부증권을 혼합하는 바람에 전체 금융기관이 연결됨. ABCP, MMF, CDS등의 형태로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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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영 교수의 강의 첫번째 단락에서 얘기하는 이윤율 저하, 이중적자와 발권이익, 신용의 증권화 부분이 주는 시사점이 많아 발췌한 것이며, 두번째, 세번째 단락은 10년여가 흐른 현재 시점에서는 시사하는 바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여 생략함

함께 수록된 <2007-09년 금융위기 논쟁 비판>은 윤종희, 박상현이 서술한 부분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진영의 학자들이 당시 어떤 입장을 경지했는지 참고할 만 하나, 금융위기가 진행중인 사정 때문에 정련된 이론체계를 이루지 못한 산발적 주장이 많은 한계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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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 개정판
이응준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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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 Tree>


대학을 졸업하고 두해 정도 빈둥댈 때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녀와 '나'는 호신술 강좌에서 만났다. 그녀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내'가 그녀처럼 병들었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녀는 피터, 폴 앤 메리의 <Lemon Tree>를 들려주며 장래 꿈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사실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그녀와 어떤 식으로 헤어질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 뒤, 동물원에 갔다가 '나'는 그녀의 사진기를 놓아두고 왔다며 화장실을 되짚어 간다. 그 길로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을 셈이었다. 그녀는 얼마간 기다리다 '나'의 의도를 알아채고 동물원 출구로 걸어간다. 그녀와는 그렇게 헤어졌다. '나'는 며칠 뒤 사진기 속에 필름이 들어있지 않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그녀가 서른이 넘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두돌이 지난 딸이 있고, 열두살 차이 나는 전도사 남편이 있다고 재잘댔다.

그 다음 만남에서 '나'는 그녀에게 최면을 걸어 그녀가 '나'를 찾은 진정한 이유를 묻는다. 뜻밖에도 그녀는 남편이나 아이에 관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라 했다. 그리고 '나'를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는 서른이 넘은 어느 날, 문득 과거에 사귀었던 '내'가 여전히 자신처럼 별수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진정하고 싶고 해낼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는지 궁금했노라 말한다. '나'는 돌려주려다 돌려주지 못한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며 '아무것도 아닐 순 없다'고 생각한다.


<이교도의 풍경>


전도 유망했던 판화가이자 문화비평가 구문모가 작년 9월 29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음독자살한다. 그는 80년대에는 운동권이었고, 소련이 패망한 뒤에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희망>이라는 책을 써 '후기자본주의적 증후군들을 빛나게 갈파했다'고 격찬받으며 변신에 성공한 인물이었다.

어쨌든 그로부터 소포가 하나 배달되어 왔는데, 거기에는 옥해(獄海)라는 다소 묘한 지명에 가서 소포를 전달해달라는 부탁이 쓰여 있었다.

소포를 보관하던 '나'는 반년이 지나서야 옥해로 간다. 옥해에서 다방 여급과 하룻밤 연정을 나눈 다음 날, 지정한 주소로 찾아갔지만 만나야 할 주선욱은 '나'를 피하는 눈치였다. 여동생에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그녀의 태도도 아리송했다. 얼마 뒤 그녀를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는 구문모가 사랑했던 사람이 동성의 주선욱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문득 숨을 헐떡이며 육지로 올라오려는 애처로운 표정의, 낙타가 그리워 사막을 가는 무모한 고래를 떠올린다.


<내 가슴으로 혜성이 날아들던 날 밤의 이야기>


'나'는 인문계 사립고등학교에 뺑뺑이로 들어갔지만 2학년이 되자 간단한 테스트를 거쳐, 중요 과목의 수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을 미대 진학반 작업실에서 보냈다. 길수형은 당시 미술반의 선배였다.

길수형은 미술 선생님이 지정해 주신 수채화 데생말고도, 입시엔 필요하지도 않은 유화를 자주 그렸다. 유화는 수채화와 달리 어두운 색에서 시작해 윗부분으로 갈수록 밝은 색으로 칠해가는게 기본 기법이다. '나'는 삶이 유화처럼, 세상의 바탕을 마땅히 고통스럽고, 슬프고, 쓸쓸하고, 외로운, 곧 어둠의 색으로 인정해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길수 형의 가방을 충동적으로 뒤져 스케치북을 본 적이 있었다. 스케치북에는 풍만하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기름기 흐르는 근육질의 남자들과 갖가지 포즈로 성교를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동안 넋이 나가 있던 나를 발견한 길수형이 분노로 이글거리며 다가와 따귀를 갈겼고,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내게서 '무엇'이 빠져 나가고, '또다른 무엇'이 들어오는 희안한 체험을 하게 된다.

결핵이 의심되는 고열에 시달린 뒤,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다. 그림 그리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나'는 그 뒤 카메라 기자가 되었고, 소연이라는 아가씨와 사귀게 되지만 언제나 과거의 경험 때문에 종종 '다른 사람' 처럼 행동하게 되고, 소연은 그런 '나'에게 미국자리공이라는 귀화식물에 대해 이야기 한다.

다시 길수형 이야기로 돌아가, 길수형은 비박(Biwak)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산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법이라 했다. 산의 신비와 밤의 어둠, 그리고 턱을 들면 바라다보이는 하늘의 무한한 깊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박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길수 형은 에베레스트로 갔고,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혜성 햐쿠타케가 지구를 스쳐지나가던 시기에, 과거의 경험을 다시 반복한다. 소연은 '나'를 떠났다.

인생이 비의(秘意)로 가득찬 오지라면, 그래서 우리 모두가 탐험가라면, 이제 '나'는 천공에 달려 비박을 하는 사람으로 뭔가에 들떠 잠 못 들 준비가 되어 있는 참이라고 느꼈다.


<그녀에게 경배하시오>


'나'와 s는 록 카페에서 만났는데 '내'가 그녀의 직업을 단박에 알아맞혀 가까워지게 되었다. s는 불가사리다. 그녀가 먹어치운 쇳덩어리가 경비행기 한 대 분량쯤 된다. 어렸을 적에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특별한 능력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는데, 마침 쇠를 먹어치워도 괜찮을 만큼 위벽이 두껍고 위산분비가 잘 됐다고 했다. 그녀는 춘천에서 왔는데, 이제는 미국에 가서 한대수를 만나겠다고 했다. 유독 '왜'만 'why'로 치환해서 말하는 말버릇을 가진 s.

일요일 이른 아침 T를 만난다. T의 부친은 입시 재벌이다. 최근 '나'는 동성애자인 T의 약점을 들춰내는 작자를 몽키스패너로 작살내준 적이 있다. 그걸 빌미로 돈을 우려낸 날, 집 부근에 스포츠 머리 형사들이 어른거렸다. '나'는 받은 돈을 s에게 주며 그녀의 행복을 빌어준다. 얼마 뒤 식당에서 나는 벽에 걸린 TV에서 s가 <기인열전>에 출연해 쇳덩어리를 먹는 장면을 본다. '나'는 결코 s를 비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어둠의 계보를 알고 있었다>


수영이 이 달 말에 미니애폴리스로 간다고 선언한다. 그녀는 주립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할 예정이고, 멋진 자동차도 몰겠다고 했다. 수영은 준기의 여자친구였고, 준기는 죽었다.

사업으로 성공한 '형'은 '나'를 철부지 취급하며 인생의 비밀을 안다는 듯이 잘난 척 했고, 진득하니 사업이나 배우라고 했다. '나'는 그런 형 앞에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사업을 배울 생각은 없었다. 대학원에 복학한다. 종교학과 대학원생은 미오와 '나' 둘 뿐이었다. 미오는 냉장고니, 라디오니 하는 걸 어디선가 주워와서 뚝딱뚝딱 고치는 재주가 있었다. 미오와 '나'는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티벳의 천장(天葬)이니 견장(犬葬)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 끝에 미오는 한의사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미오에 대해 알 수 없다고 느끼고, 그런 '나'에게 미오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니, 줄탁동기(啐啄同機)니 해가며 또 알 수 없는 소리를 뇌까렸다.

문득, 준기와 무당을 찾아갔던 때가 떠오른다. 무당은 준기에게 '이미 없는 놈' 이라고 했고, '나'에게는 '허송세월 하다 서른다섯 넘어 뭘 끄적거리는게 성과가 있을거' 라고 했다.

수영으로부터 엽서가 날아들었다. 수영은 포르쉐를 몰고 싶다 했지만 기껏 1990년산 폭스바겐을 밤이면 있는 대로 밟고 다닌다고 한다. '나'는 아무렴 어떠랴 하는 심정이었다.

미오가 어디서 고물 오토바이를 구해서 고쳐왔다. '나'와 미오, 그리고 철학과 조교 정아씨, 이렇게 다 큰 어른 셋이 오토바이를 타고 살곶이 다리까지 간다. 셋은 그곳에서 쓸쓸한 대화를 나눈다.

학교에서 한총련 출범식이 열리자 경찰은 학교의 모든 통로를 차단했다. 그에 맞서는 학생들은 연일 강도 높은 시위를 해댔다. 전경이 한차례 밀어닥쳤고, 앳된 신입생 하나가 다리를 다쳐 피를 흘렸다. '나'는 그 학생을 치료한 뒤 헌 신발을 내주었다. 학생은 종교학은 뭘 공부하느냐고 묻고,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앳된 신입생이 경영학과에 다닌다길래 '나' 역시 그건 뭐하는 건지 묻고, 학생은 '지도 몰라예' 한다. 둘은 한참을 웃었다. '나'는 외롭기 때문에 낯선 이에게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묶어주고, 수건과 비누를 건네주었음을 깨닫는다.

전경이 학교로 들어오진 않았지만 전경 하나가 페퍼포그 차에 깔려 죽었고, 무고한 시민이 프락치로 몰려 학생들에게 맞아 죽었다.

미오의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날아온다. 그날 '내'가 느낀 감정은 놀랍게도 절친한 친구의 불행에 대한 걱정이라든가 동정이 아니라, 일종의 설렘이라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교문으로 이어진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다 정아를 본다. 그녀가 매우 특별해 보인다는 것이 놀랍다. 살다 보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오직 한 사람이 떠난 것일 뿐인데도, 마치 전 세계가 송두리째 상실된 듯한 기분이 드는 때가 있다. 그러나 뿌듯한 사랑은 반드시 찾아오고, '나'는 그 불꽃스런 힘을 그 순간 느꼈다.


<지평선에서 헤어지다>


독일 유학 당시 알고 지내던 진석 형이 임서현이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남자의 직업은 의사고, 재혼이라 했다. 당시 '나'는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잘 팔리지 않는 남성전용잡지를 만들고 있었다. 곧 실업자가 될 예정이었고, 임서현의 소식으로 다소 우울한 감정을 느낀다.


독일로 떠난 것은 유학생활을 가장한 사치스런 유람이자 먼 곳으로의 정처없는 도피생활이었다. 가자마자 외로움을 심하게 느꼈다. 어느 날, 여섯 시간 동안 접시를 닦아 돈을 벌었다. 아는 사람과 진탕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고, 우연히 한인 감리교회를 통해 알게된 임서현과 술을 마시게 된다. 임서현과 나는 그날 꽤나 죽이 맞아서 오랫동안 얘기했는데, 그녀가 자기가 쓴 동화를 들려주었다. 내용은 이랬다.

아이들만 사는 별이 있는데, 남극과 북극에 샘물이 하나씩 있었다. 사내아이는 남극에서, 계집아이는 북극에서 물을 떠 마셔야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소년과 소녀가 있었는데 그들은 어른이 되어 사랑을 이루고 싶었다. 둘은 지평선에서 각각 북극과 남극으로 길을 떠난다. 

왜 하필이면 지평선에서 떠났느냐고 '내가 묻자 임서현은 지평선에서 헤어져야 그들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누군가 가장 오래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임서현 7년 사귄 남자가 있다 했다. 그날 밤, '나'는 전철을 놓쳤고, 서현은 자신의 현관문을 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야윈 등으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얼마 뒤 외로움이 사무쳐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는 오라 했지만, 현관문은 열리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온 뒤 멀리서 흐느끼는 전화가 걸려온다. 그녀였던 것 같다.


결혼식이 끝난 뒤에야 도착한 '나'는 신부화장을 한 그녀를 본다. 무엇인가, 그녀의 맨살에 머물던 그 시절의 외로움을 요령껏 아름답게 감추고 있었지만, 찬찬히 살펴본 그녀는 결국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이고, 그러하기에 영원히 '내'가 알지 못하는 그녀였다.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장례버스는 해저물 녘 우리를 서울역 광장에 떨어뜨려 놓았다. 다들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다가 종로통으로 몰려갔다.


심병삼씨는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누군가를 거짓말할 정도로 고독하게 만들면 불행한 일이 생긴다' 라고 독특한 해석을 할 줄 알았다. 그는 Ernest Hemingway라는 이름의 카페를 경영하면서 커피 감음회를 열었다. 거기엔 사진작가, 서양미술사 교수, 오토바이 수리공, 사법고시생, 공인중개사, 피혁공장 사장, 동물병원 원장 등이 드나들었다.


은희는 연극배우였다. 그녀와 '나'는 어느 날 문예회관 대극장 옥상 문 앞에서 관계를 한 적이 있다. 은희의 요구였다. '기념식수'라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은 일주일 뒤 파혼이라는 통고로 의미가 명확해진다.


심병삼씨가 죽고, 드나들던 사람들이 경찰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는다. 알고보니 그들은 커피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감음회는 심심파적이었던 것 같다.


휴대폰을 꺼내 은희에게 전화를 건다. 너의 장례식에 다녀왔다고, 청혼했던게 사실인지 거짓인지 궁금하다고, 어짜피 너와 행복하지 못했을 것 같으니 헤념하는게 나을지 궁금하다고 중얼거린다. 문득 은희는 쓸쓸한 양치기 소년이고, '나'는 아랫마을의 무심한 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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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후 소설들을 관통하는 묘한 정서가 있다. 쓸쓸함, 외로움, 죽음, 이별 등을 주조로 한 고즈넉한 정서. 한 시대가 끝나고, 희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면 사람들은 실존주의에 경도되는지도 모르겠다.

이응준은 매우 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작가인데, 다소 기교적으로 흐르는 곳이 눈에 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개똥벌레>와 <노르웨이의 숲>을 연상시키는 곳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어둠의 계보를 알고 있었다>는 마음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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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12
플뢰르 이애기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플뢰르 이애기는 1940년 7월 31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으나, 훗날 로마에 정착하여 이탈리아어로 소설을 쓴다. 잉게보르크 바흐만, 토마스 베른하르트 등과 친교를 나눴고 배우자는 작가이자 편집자인 로베르토 칼라소이다. 데뷔작은 <손가락을 입에 물고> 이며, <수호천사>, <물의 형상> 등이 주요 작품이다.

상복이 꽤 많은 편인데 1989년 발표된 <아름다운 나날>은 이탈리아의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문학상인 바구타 상과 유럽 보카치오 상을 수상하였고 수전 손택이 심사하고 <타임>이 뽑은 2003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다. <하늘의 두려움>으로 모라비아 상을, <프롤레테르카 호>로 바일라테 알데리고 살라상과 비아레조 상을 수상했다.


<아름다운 나날>은 14살의 소녀가 기숙학교에서 프레데리크라는 소녀를 만나 우정과 동성애와 경외심 그 어디쯤의 감정을 느끼는 내용이고, <프롤레테르카 호> 역시 14살의 소녀가 자신과 피가 섞이지 않은 아버지와 열나흘 동안 크루즈 여행을 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라고 파악된다.


문체는 매우 건조하고, 종종 종잡을 수 없는 서술이 이어진다. 오역이 아닌지 의심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우리는 자살에 집착하면서, 어쩌면 자살에 비균형적인 관심을 두었고, 무엇보다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자살 사건들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알고 싶어 했다. 우리 친족들 누구도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을, 사람들 말로는, 그 남자가 열두 번 종이 치기를 기다렸고, 종소리가 다른 모든 소리를 덮어 버렸다고 했다.


도대체 '비균형적 관심' 이 뭔지도 의문이지만, 쉼표가 만능이라도 되는 양 쉼표를 기준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 문장에 가둬두고 있어서 지독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라. 이런 문장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내용이 비문에 다를 바 없는 번역과 시너지 효과를 내는 <아름다운 나날>의 번역가는 김은정이며, 임정희가 번역한 <마리 퀴리의 지독한 사랑>, 김연경이 번역한 <악령>, 김준호가 번역한 <불만의 겨울>과 함께 번역이 엉망인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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